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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4장을 펴주시기 바랍니다. 요한일서 4장입니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와 관련된 말씀을 읽겠습니다. 요한일서 4장 1절부터 8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다시 1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사도 요한이 주는 명령입니다. 영들을 분별하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영들”은 “인격체”를 말합니다. “분별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키마조(dokimazō)’는 금속공학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금속의 순도를 평가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영들, 곧 인격체들이 인간인지 천사인지 분별하라는 말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1절부터 22절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여기서도 동일한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탄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거짓 왕국을 운영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이 세상의 신입니다. 공중 권세 잡은 자입니다.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의 통치자입니다.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도록 허락받았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사탄과 그 수하들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합니다. 사탄이 자기 시간의 99%를 거짓 종교, 거짓과 속임수에 사용한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사탄은 사회의 비참하고 부패한 죄악된 행위의 배후에 있는 자가 아닙니다. 그건 사탄이 아니라 육신의 행위죠. 사탄은 부패한 종교와 거짓된 신념 체계의 배후에 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잠시 고린도후서 10장을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입니다. 사람들은 사탄과 마귀와 관련된 영적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대부분은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탄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번은 목회자 컨퍼런스에서 저명한 교회의 목사님이 수천 명 앞에서 기도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사탄아, 너를 결박하노라.” 저는 기절할 뻔했습니다. 기도를 시작하더니 내뱉은 첫 마디가 “사탄아”라고요? 마귀에게 이렇게 저렇게 명령하는 겁니까? 아마도 그 목사님은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영적 전쟁의 일부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에게 그럴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망상에 불과하죠.

고린도후서 10장 4절이 묘사하는 영적 전쟁은 이렇습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전쟁과 무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죠,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인간의 무기가 아니라는 겁니다. 3절에서 말하는 “육신”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육신으로 행하나”라는 말씀은 죄를 짓는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않습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재주나 영리함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의도가 아무리 고귀하더라도 인간이 만들어낸 것으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합니다. 4절에 따르면 “하나님의 능력”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무기는 하나님의 능력이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인간의 무기로는 싸울 수 없는 영적 전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 무기들이 아무리 잘 고안되고 잘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말이죠.

왜일까요? 4절을 보면 우리는 “견고한 진”을 무너뜨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무기가 견고한 진에 맞설 수 없다는 겁니다. “견고한 진”이라는 단어는 고대 세계를 생각할 때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돌로 된 건물입니다. 난공불락의 요새이죠. 참고로, “견고한 진”이라는 단어는 또한 ‘감옥’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견고한 건물을 공격하고 있는 겁니다. 작은 물총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인간이 만든 무기로는 상대할 수 없습니다.

이 견고한 진은 무엇일까요? NASB를 보면 4절 하반절에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이라고 합니다. 5절 시작 부분에서는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라고 합니다. “견고한 진”이 바로 “모든 이론”이라는 겁니다. 여기 사용된 헬라어 '로기스모스’(logismos)는 생각, 이데올로기, 이론, 관점, 신념 체계, 심리학, 철학, 종교 등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맞서 싸우는 상대입니다. 생각과의 전쟁입니다. 지성과의 전쟁입니다. 사탄을 쫓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들을 몰아내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죠. 우리의 전쟁은 지성과의 전쟁입니다.

왜일까요? 세상이 신념 체계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념 안에서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진처럼 견고히 서 있습니다. 이들이 살고 있는 요새는 감옥이 되고 결국 무덤이 됩니다.

이 모든 요새, 진의 설계자는 다름 아닌 사탄입니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이죠. 최고의 사기꾼이죠. 광명의 천사로 가장합니다. 거짓된 신념 체계를 통해 자신의 일을 수행합니다.

이러한 신념 체계는 5절에 더 자세히 설명됩니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높아보이는 모든 생각, 겉보기에 고귀해 보이는 생각, 지적인 생각, 위대한 통찰력 등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세워진 모든 이데올로기, 이념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체계 안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요한의 표현을 빌리자면 적그리스도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들은 견고한 진을 치고 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결국에는 그곳이 무덤이 될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책임은 무엇일까요? 이러한 이념을 부수고 진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사고방식과의 전쟁입니다. 사탄은 이러한 이념의 설계자, 디자이너, 엔지니어이자 건축가입니다. 사람들은 그 안에 갇혀서 결국 영원한 지옥에 가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겉보기에 너무나 훌륭해 보이는 이유는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사탄이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은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신약성경도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마태복음 7장의 산상수훈을 보면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바울도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여러 번 경고합니다. 베드로는 사실상 베드로후서 전체에서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경고합니다. 이어지는 유다서에서도 성령님은 다른 동사 시제를 사용하셔서 베드로에게 주신 것과 동일한 내용을 전달하십니다. 베드로후서 2장에서의 경고가 다시 주어지는 셈입니다.

신약성경이 미래를 계시하는 위대한 요한계시록으로 끝나기 전에, 두 개의 짧은 서신인 요한이서와 요한삼서가 있습니다. 요한이서와 요한삼서는 각각 한 여성과 남성에게 쓰여진 것으로, 초반부에서 다섯 차례 사용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진리’입니다. 요한계시록 직전의 서신에서 진리에 계속 충실하라고 경고하고 있는 겁니다. 교회가 시작된 1세기 마지막 십년에 마지막 사도 요한이 전하는 마지막 말씀은 진리를 위해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는 “진리를 위해 힘써 싸우라”고 덧붙입니다. 진리를 위한 전쟁입니다. 실제로 저는 <진리 전쟁>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서 싸울 수 있는 방법은 영들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주장하고 단언하고 맹세하는 모든 것을 무턱대고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영들을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대한 원칙을 제시하는 요한일서 4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참고로 1730년부터 1740년까지 대각성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 정당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각성운동에서 일어난 일들 중에서 분명히 성령님의 역사로 보이는 일도 있었고, 성령님의 역사로 보이지 않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요한일서 4장을 기초로 그 운동을 평가했습니다. 어제 말씀을 전한 스티브 로슨이 칼빈을 되살렸다면, 오늘은 제가 조나단 에드워즈를 되살려서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성령 사역의 표징>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성령 사역의 표징>입니다. 요한일서 4장에 기초해서 쓰여진 책으로 1741년에 출판되었습니다. 에드워즈는 요한일서 4장 말씀이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모든 일을 평가하는 데 기초가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이 기준은 조나단 에드워즈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처럼 살펴보고 적용한 것뿐이죠. 이 기준은 성령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기준입니다. 모든 영적 운동, 모든 설교, 모든 설교자들은 이 기준으로 평가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참된 사역이라면 이 기준에 부합할 것입니다. 성령님이 이 기준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모든 검증이 이 여덟 구절로 가능합니다. 모든 목사, 모든 교사, 모든 설교자, 모든 그리스도인은 모든 주장을 조사하고 모든 사람과 예언을 분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처럼 모든 것을 조사하여 진리인지 살펴야 합니다.

여기서의 쟁점은 무엇입니까? 성령의 역사입니다. 3장 24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그 다음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요한은 우리 구원이 확증되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에 기초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 구원의 확신은 성령님의 역사에 기초합니다.

물론 저는 성령님이 보이지 않는 분이시고,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역사는 초자연적이고 신성하며 감지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성령님의 역사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그 결과는 보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체험하거나 느끼지는 못하지만 성령님의 역사로 나타난 결과는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은사주의 운동이 어리석은 이유 중 하나는 성령님이 나를 인도하시거나 성령님이 내게 지시하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입니까?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제 머리에는 성령님이실 때는 빨간 불이 켜지고 그냥 제 자신일 때는 꺼지는 그런 표시등이 없습니다. 성령님의 지시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감지할 수 없고 보이지 않으며 초자연적이고 신성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것은 성령님이 제 삶에서 역사하시는 결과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뿐입니다. 이 경험은 제가 구원받았을 때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구원받은 즉시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들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 즉시 철학에 관심이 없어졌습니다. 대학에서 철학을 부전공하고 서양철학을 공부하긴 했지만 말이죠. 아마 저보다 철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없을 겁니다. 제게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자 하는 강렬한 열정과 갈망 뿐입니다.

저는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느끼지도 못했습니다. 다만 제가 아는 것은 성령님이 역사하신 결과입니다. 저는 세상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긍휼한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누구신지도 모르지만, 허락하신다면 말씀드리고 싶네요. 저는 정말로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증거입니다. 성령님이 제 안에서 보이지 않게 역사하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아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드러나시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묻는 분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목사님이 신자라는 걸 어떻게 아세요?” 제가 신자임을 아는 것은 완벽해서가 아니라 방향성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미워하고 무엇을 갈망하는지에서 드러납니다. 우리 모두는 로마서 7장의 상태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서 원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합니다. 우리는 그런 우리 자신을 미워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요한복음 3장 8절에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 3장에서 성령님을 설명하는 예시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보이지 않지만 그 결과는 매우 분명합니다. 성령님의 보이지 않는 역사가 일으키는 가시적이고 명백하며 경험 가능한 결과를 통해서 우리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다는 것을 압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다음과 같이 역사하십니다. 회개하려는 열망과 죄를 미워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구원과 용서를 구하려는 열망을 주십니다. 복음을 믿는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고 주님으로 인정하려는 열망을 주십니다. 성경을 기뻐하고 순종하려는 갈망을 주십니다. 시련과 환난 중에서도 기쁨을 주십니다. 다른 신자들을 사랑하고 교제하려는 열망을 주십니다. 성경을 이해하고 깨닫는 능력을 주십니다. 기도하려는 마음, 거룩한 애정, 찬양하려는 열망, 감사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삶으로 예배드리려는 마음을 주십니다.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십니다. 정말 격려가 되는 내용입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이 있죠. “이것은 여러분이 원하든 원치 않든 성령님이 여러분 안에서 행하시는 역사입니다.”

그런데 다른 영들도 있습니다. 제가 적잖이 놀랐던 점은, 3장 24절의 영광스러운 내용에서 갑자기 예기치 않게 방향이 바뀐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실재와 성령님의 참된 사역에서, 갑자기 하나님에게서 나오지 않은, 거룩하지 않은 영들,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고하는 내용으로 넘어갑니다.

그럼에도 그렇게까지 놀랍지 않은 이유는 구약에서부터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경고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속임수는 항상 있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부터 있지 않았습니까? 사탄의 속임수는 언제나 존재하며 언제나 효과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백성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경계하고 분별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 길고 긴 진리 전쟁은 항상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백성은 항상 거짓 선지자들, 거짓말쟁이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이들의 전략이 효과적인 이유는 속이고 기만하기 때문입니다.

은사주의 운동의 역설은, 만일 은사주의 운동을 비판하고 경계하며 분별하려 하고, 진리를 위해 싸우고, 성경의 기준으로 판단해서 오류를 드러내려고 하면 죄인이라고 정죄한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교회의 연합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가 성취되지 못하게 한다고 비난합니다. 어떻게 아느냐구요? 제가 직접 겪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겪고 있습니다.

이들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분별력을 죄악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분별력을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기도에 대한 범죄로 만들어야 합니다. 은사주의 운동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진리의 전사들을 공격해야 합니다. 성령님을 대적한다고 비난해야 합니다. 건전한 교리 아래서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주의 교계는 침묵하도록 위협을 받았습니다. 은사주의 운동을 비판하는 책을 쓰기 시작할 때 함께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지난 15년간 출간된 책 중에서 은사주의 운동의 실체를 드러내는 책은 없었습니다. 복음주의 교계를 침묵하게 하는 데 성공을 거둔 겁니다.

다시 요한일서를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언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 분별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4장 1절부터 이런 지시를 받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왜일까요?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은사주의자들이 검증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오류를 확신하기에 충분합니다. 만일 은사주의 운동이 성경과 일치하는 성령님의 참된 역사라면, 확증되고 입증되기를 원할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검증을 환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분별의 원리는 무엇일까요? 그 중에서 하나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얼마나 다룰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나머지는 책에서 확인하세요. 제가 트래비스에게 오늘 3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더니, “절대 안 됩니다. 3시간은 안됩니다” 이렇게 말하더군요.

좋습니다. 자, 시작합니다. 첫 번째 원리입니다. 성령의 참된 역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높입니다. 성령의 참된 역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높입니다. 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어떻게 알 수 있는지가 이제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첫 번째 원리는 기독론적 분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모든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긍정문이죠,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처럼 모든 것은 기독론에서 시작됩니다. 모든 것은 성육신에 대한 명확하고 참된 이해, 즉 인간의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성경적으로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여기서 요한은 구체적으로 무슨 내용을 다루고 있는 걸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인간이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육체가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쳤죠. 이는 초기에 가현설, 영어로는 ‘도세티즘(Docetism)’이라고 불렀는데, ‘나타나다’라는 뜻의 헬라어 ‘도케오(dokeō)’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물론 이 사상은 물질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는 철학적 이원론, 즉 헬라의 이원론에 근거합니다. 물질적인 것은 모두 악하고, 영적인 것은 모두 선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육체로 오셨다면 물질에 해당하고 따라서 이원론적 관점에서는 악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인간으로 보였을 뿐 실제로는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의문시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문제일까요? 네, 중요합니다. 정말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는 대속자가 되시려면 반드시 인간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어 우리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시려면 예수님은 반드시 인간이어야 합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으로 여겨지려면, 예수님은 반드시 인간으로서, 인간으로서 사셨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인성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요한은 완전한 기독론을 다루는 게 아닙니다. 요한의 의도는 그런 게 아닙니다. 단지 당시에 존재했던 하나의 오류, 즉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의 참된 본성을 향한 공격을 지적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이 참된 기독론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십니다.

451년에 열린 칼케돈 공회에서는 단성론을 이단으로 단죄했습니다. 단성론은 예수님의 두 본성이 혼합되어 섞여 있다는 주장입니다. 기독교 초기부터 시작된 커다란 논쟁이었죠.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교회 역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한 위격 안에서 함께하되 섞이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에 기독론에 관해 신약이나 구약에 계시된 요소들이 모두 나오지는 않지만, 분별의 첫 번째 원리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정확한 관점입니다. 4장에 모든 것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모든 것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여기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거짓 종교와 이단은 모두 왜곡된 기독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왜곡되고 변질된 기독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몰몬교도들은 예수님이 루시퍼의 영적 형제라고 생각하는데, 루시퍼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라고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도 창조된 존재라고 합니다. 이처럼 모든 이단은 그리스도에 대한 왜곡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그러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정확한 견해를 가지고 계시며, 항상 그리스도의 영광을 참되게 드러내십니다. 성령 충만한 설교자는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정확하고 참된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높이며 드러낼 것입니다.

이것은 건전한 신학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강조점의 문제입니다. 복음의 명확성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본성과 그리스도를 강조하는 데 있어 어떤 오류가 보이거나, 또는 복음에서 어떤 오류가 보인다면 이는 성령님의 역사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6장 14절입니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그리스도에 대해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거나, 그리스도를 낮추거나, 복음을 오염시키거나, 아들에게서 주의를 돌려 성령에만 주목하게 만드는 자들은 성령 안에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말하기를 마귀는 커다란 앙심과 적대감을 품고 그리스도를 공격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높이려는 마음을 절대 심지 않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뒤틀고 혼란스럽게 하며 억압하고 왜곡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높이는 척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하나님의 아들에게서 거짓 성령으로 돌리려고 합니다.

성령님의 참된 역사는 그 반대입니다. 성령님의 참된 역사는 참되신 그리스도를 높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탁월함을 높이시고, 복음을 온전하고 정확하게 이해하게 하십니다.

만일 은사주의 운동이 성령님에 의한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영광이 모든 곳에서 드러났을 겁니다. 그리스도 중심이 되어 운동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참된 복음을 믿으며 참된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겸손하고, 기쁨이 넘치며, 희생적이고,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선포하고 자신들을 주님의 종으로 여길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주님이 인도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갈 겁니다.

하지만 잭 헤이포드와 무어 같은 은사주의자들은, 은사주의 운동의 특징이 ‘성령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들의 글을 읽어드리죠. “오순절 운동은 매우 다채롭지만 단 한 가지는 모두 동일하다. 그것은 바로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경험하려는 열정이다.”

성령님을 추구하는 대상으로 삼는다면 성령님의 사역은 거부된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그리스도는 가려지고, 성경은 평가절하되며, 성령의 역사로 여겨지는 거짓된 체험에 대한 집착이 생기지만, 실제로 성령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에베소서 3장 14절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바울의 기도가 나옵니다. 이것이 바울이 원하는 겁니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강건하게 하시기를 간청하며 기도하고 있다고 말이죠. 이제 그 목적이 나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바울의 기도는 무엇입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항상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지점에서 은사주의 운동은 거짓으로 분별됩니다. 자신이 만들어낸 거짓된 성령을 높임으로써 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높여야 한다는 기준에서 탈락하기 때문이죠. 성령에 집착하는 사람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사로잡혀 예수님에 대해 배우고 사랑하는 것을 결코 싫증내지 않고, 예수님의 영광에 매료되어 예수님께 순종하고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은사주의자들의 상당수는 사실상 적그리스도입니다. 은사주의 계통에서 환상 중에 예수님을 보았다는 이야기는 저를 정말 두렵게 합니다. 예수님이 소방관 옷을 입고 계시답니다. 예수님의 키가 300미터랍니다. 화장실에서 주기적으로 예수님을 만났답니다. 쓰레기 더미 위에서 춤을 추신답니다. 요양원에서 휠체어에 앉아계신 모습을 봤답니다. 어떤 이들은 해변에서 예수님과 함께 오랫동안 산책을 했답니다. 이런 식의 주장이 끝없이 펼쳐집니다.

한 은사주의 저자는 이렇게 썼습니다. “성령님이 자신을 계시하신 직후에, 나는 예수님을 보았다. 주님의 은밀한 장소로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다. 잔디밭에 누워서 말했다. ‘예수님, 제 옆에 누워 주실래요?’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아버지께서도 오셔서 예수님 옆에 기대어 누우셨다.”

정말이지 감상적인 감정주의이고 기괴한 공상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이나 성령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망상일까요? 아마도 그럴 겁니다. 거짓말일까요? 분명 그렇습니다. 성령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천국은 진짜다>라는 책에 나오는 것처럼, 네 살배기가 천국에 갔다가 돌아와서 예수님이 하셨다는 말을 전하고 예수님이 미가엘보다 키가 작다고 하는 그런 기이한 환상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것도 충분히 나쁘지만, 더 큰 문제는 예수님에 대한 이단적 내용입니다.

이들의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은 하나님으로 오시지 않았답니다.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답니다. 십자가에서 사탄의 죄성을 지시고 영적으로 죽으신 것이며 사흘 동안 지옥에 계셨답니다. 번영신학 설교자 케네스 코플랜드의 말을 들어보면, ‘믿음의 말씀’ 진영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비성경적이고 불경스럽게 묘사하는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읽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짖으셨던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이 더 이상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사탄의 본성을 취하셨다. 예수님은 지옥의 구덩이 한가운데 빠지셨다. 모든 고통을 겪으셨다. 예수님의 쇠약해진 작은 벌레 같은 영이 구덩이 밑바닥까지 내려갔고, 마귀는 예수님을 완전히 없애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갑자기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믿음의 말씀’ 운동을 벌이는 또 다른 저자인 크레플로 달러도 그리스도의 신성을 의심하면서 비슷한 불경을 저지릅니다. 읽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하게 태어나지 않으셨다. 성장 과정에서 차츰 완전해지셨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은 여행을 하시다가 지치셨다. 하나님이 피로를 느끼지 못하는 분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예수님은 그랬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세상에 오셨는데 피로를 느끼셨다면, 즉 피곤하셨기 때문에 우물가에 앉으셨다면 상당히 곤란한 문제가 발생한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세상에 오셨다고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신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배 뒤편에서 주무셨다고 한다.” 이 얼마나 뒤틀리고 터무니없는 생각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신성을 비방하는 겁니다.

‘믿음의 말씀’ 설교자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면서 스스로가 작은 신이라고 주장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마치 사라 영이 자신의 우스꽝스런 책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케네스 코플랜드는 예수님을 대변하는 척 하면서 다음과 같은 왜곡된 가르침을 전합니다. 읽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신으로 생각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서 비난을 받더라도 당혹스러워하지 말라. 사람들은 내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나는 내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단지 내가 그분과 동행하고 있으며, 그분이 내 안에 있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할렐루야!”

참으로 노골적인 교만이면서 뻔뻔한 거짓말이자 신성모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은사주의자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런 자들을 지적하고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적그리스도의 영이 아니라면 이토록 심한 비성경적인 가르침을 결코 전하지 못할 겁니다.

이것이 위험한 이유는 그리스도에 대한 어리석은 주장과 이단적인 사상을 넘어서 복음을 왜곡한다는 데 있습니다. 꽤 광범위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왜 오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세상을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깨닫게 하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령님은 사도행전 5장이 말하듯이 복음의 역사적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2절이 말하듯이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들에게 능력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사역을 알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복음에 충실하십니다. 결코 복음을 왜곡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의 진리를 어떤 형태로든 훼손하는 것은 성령님의 사역이 아닙니다. 그리고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로마 카톨릭을 포용하는 운동은 성령님이 주도하시는 운동이 아닙니다. 로마 가톨릭은 거짓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은사주의 운동은 왜 로마 카톨릭을 포용할까요? 공통된 거짓 체험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건전한 교리가 영적 체험에 종속되었습니다. 거짓된 영적 체험, 거짓된 형태의 복음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입니다. 카톨릭 은사 갱신 운동은 1967년에 한 무리의 학생들이 소위 ‘성령 세례’를 받고 횡설수설 의미없는 말을 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운동을 공식적으로 승인했습니다. 왜일까요? 카톨릭은 흡수하기 때문입니다. 카톨릭이 성장하는 방식이 그렇습니다. 최근에 교황이 이렇게 말하는 걸 들어보셨을 겁니다. “교회로 오세요. 동성애자도 괜찮습니다. 무신론자도 최선을 다한다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로마 카톨릭입니다. 이단도 흡수하고, 반대자들도 흡수하고, 외부에 있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흡수합니다. 그렇게 체계를 구축합니다. 왜일까요? 그 체계에는 왕이 있는데 바로 어둠의 왕이기 때문입니다.

2000년이 되자 카톨릭 은사주의자들의 숫자는 대략 1억 2천만명에 달했습니다. 전 세계에 5억명 정도의 은사주의자가 있으니, 5분의 1이 로마 카톨릭 신자인 셈입니다. 로마 카톨릭 은사주의자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리를 고수하며, 신자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사실을 거부합니다. 행위로 의롭게 된다고 합니다. 카톨릭 교회의 일곱 성례에 담긴 사효적 효력을 믿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카톨릭 미사에 깊이 빠져서는 그리스도를 다시 희생시키려는 끔찍한 시도를 하죠. 우상을 숭배하듯이 마리아와 성인들을 숭배합니다. 개신교 은사주의자들은 이들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왜 받아들였을까요? 로마 카톨릭을 용인하려는 걸까요? 현대 복음주의가 이렇습니다. 기사 하나를 읽어드리죠. “지난 여름 초교파적 집회에서 은사주의자와 오순절주의자들 만여 명이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 나흘 동안 기도하고 찬양하며 손뼉을 치고 기뻐했다. “성령과 세계 복음화”라는 집회에 참석한 인원 가운데 절반이 카톨릭 신자들이었다. 집회 진행 위원장을 맡았던 리젠트대학교 신학과 학과장인 빈슨 사이넌은 “성령께서는 로마 카톨릭 신자들과 개신교 신자들 사이에 있는 담을 허물기를 원하신다”라고 말했다.”

만일 은사주의 운동이 카톨릭을 포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성령 운동이 아닙니다. 로마 카톨릭 신학은 부패했습니다. 거짓 복음입니다. 따라서 카톨릭 은사 갱신 운동 배후에 있는 영은 성령님이 아닙니다.

이게 다가 아닙니다. 전 세계적으로 2천 4백만 명의 은사주의자들이 일신론적 오순절파에 속해 있습니다. 일신론적 오순절주의란 무엇입니까? 이들은 예수님만 유일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삼위일체를 부인합니다. 2천 4백만 명이 삼위일체를 부인합니다. 미국에서는 네 명 중 한명 꼴입니다. 이들은 무엇을 믿습니까? 양태론을 믿습니다. 한 하나님이 계시는데 세 가지 다른 양태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때로는 아버지이고, 때로는 아들이며, 때로는 성령이지만, 결코 동시에 세 분 모두가 나타나지는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한 분 하나님이 이렇게 세 가지 양태로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세례 장면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그렇죠? 제 말은 하나님이 정말 빠르게 모자를 바꿔 쓰셔야만 한다는 거죠. 하지만 아타나시우스 신조에서 서로 동등하신 삼위 하나님, 즉 성부, 성자, 성령님이 계시다는 것이 확립되었습니다. 양태론은 교회 역사상 이단으로 단죄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본성을 공격하고 구원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이 알고 있는 가장 유명한 일신론적 오순절파는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T.D. 제이크스일 겁니다. 참된 하나님도, 참된 그리스도도 없다면 참된 성령도 없습니다.

양태론자들은, 직접 한번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서로 다른 세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한 분 하나님이 존재하신다. 시대에 따라 달리 불릴 뿐 서로 독특한 세 인격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 명칭들은 한 분 하나님의 제각기 다른 양태를 나타낼 뿐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창조주요 입법자이시라는 점에서 “성부”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점에서 “성자”로, 교회 시대에 나타나셨다는 점에서 “성령”으로 각각 불리신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이시고 성령께서도 하나님이시지만, 이 둘은 서로 구별되는 인격을 가리키지 않는다.”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이후로 주류 기독교 교단들은 모두 양태론을 이단으로 단죄했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큰 교회는 휴스턴에 있는 조엘 오스틴의 교회입니다. 조엘 오스틴은 천박하고 감상적인 보편주의를 지향하죠. 보편주의는 성경이 말하는 모든 것과 극단적으로 대립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오스틴의 답변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입에서 나왔을 법한 것이었습니다. 횡설수설하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그들의 잘못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고, 기독교 신앙에 따르면 이것이 제가 믿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의 마음을 판단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버지와 함께 인도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들의 종교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이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압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이들은 매우 진지했습니다. 아무튼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제 자신과 성경이 가르치는 것뿐입니다. 저는 예수님과 교제하고 싶습니다.”

다른 때에 몰몬교 신자가 참된 기독교 신자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글쎄요, 제 생각에는 그런 것 같습니다. 미트롬니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제가 믿는 믿음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그 고백의 세부적인 내용을 판단할 입장이 못 됩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이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스틴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아시나요? 굉장합니다. 이것이 보편주의의 실체입니다. 그런데 몰몬교에서도 오늘날 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이 경험하는 초자연적 현상을 동일하게 경험했다고 주장합니다. 1836년 조셉 스미스는 자신이 건축한 커틀랜드 성전 봉헌식에서 방언과 예언, 기적적인 환상 등 다양한 은사를 체험했다고 했습니다. 다른 목격자들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야말로 엄청난 능력이 나타났다. 방언을 하고 환상을 보고 천사들을 보았다. 오순절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영이 풍성하게 부어졌다. 수백명의 장로들이 방언을 했다.”

보시다시피 찰스 파햄이 은사주의 운동을 시작하기 50년 전부터 몰몬교도들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몰몬교가 예수님을 루시퍼의 영적 형제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까? 몰몬교는 성령님이 역사하신 종교가 아닙니다. 몰몬교 신자들의 경우도 성령님의 역사를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은사주의 운동이 복음을 왜곡한 또 하나의 사례는 “믿음의 말씀” 운동이 내세우는 번영 신학, 곧 건강과 부의 약속에서 확인됩니다. 거짓 복음입니다. 저는 지금 참된 기독론을 공격하는 모든 방식을 설명드리고 있습니다. 번영 복음은 모든 오순절주의의 근본 특징입니다. 따라서 대다수 나라의 오순절주의자들 가운데 90%가 넘는 사람들이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순절주의가 성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거짓된 성공과 건강, 부를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먹잇감으로 삼고 있죠.

번영 복음은 성경적인 복음에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경제적인 번영과 육체적 건강을 약속합니다. 육신적 위로와 세상의 재물, 세속적 성공을 약속합니다. 돈을 주고서라도 사려고 하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말이죠. 번영 복음은 끔찍하고 추악합니다.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을 먹잇감으로 삼아서 거짓말로 자신들만 살찌우는 겁니다. 이보다 더 비참한 일이 있을까요? 어떻게 이런 일들을 성령님의 역사로 돌리고, 예수님의 이름과 연관시킬 수 있단 말입니까?

이러한 변질된 장사꾼들이 거짓 복음을 팔고, 이단이라는 상품을 유통시키고 있습니다. 번영 신학 설교자들은 기독교를 조롱거리로 만들었습니다. 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번영 복음은 기독교로 포장한 프로레슬링과 다를 바 없다.” 말이 되죠? 하지만 영적 사기꾼들은 언젠가 신성모독죄로 엄한 형벌을 받게 될 겁니다. 유다서 13절이 그렇게 말하고 있죠.

이렇게 이단에 연루된 사람들, 즉 로마 가톨릭과 일신론적 오순절파, 믿음의 말씀 운동과 같은 번영 복음과 관련된 사람들의 수를 모두 더하면 수억명에 이를 겁니다. 사실 은사주의 운동의 대다수라고 할 수 있죠. 이 모든 것은 오늘의 요점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성령님의 참된 역사가 무엇이라고요? 누구를 높인다고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위격, 사역, 복음을 높이십니다.

여러분이 은사주의와 관련된 제 책을 사서 읽어보시면, 은사주의 운동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고 무엇이 다른지를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다른 몇 가지 요점들을 최대한 간략하게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두 번째 분별 원리는 요한일서 4장 4절부터 5절에 나옵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

은사주의 운동이 왜 성장할까요?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세속적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주려고 합니다. 건강과 부와 번영을 약속합니다. 그러면서 기독교적 용어로 포장을 하죠. 강력한 감정적 체험을 제공합니다.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우울감에서 꺼내줄 수도 있습니다. 군중 속으로 몰아 넣고, 요란한 음악과 조명을 틀어놓으면서 뭔가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술을 마실 때와 동일한 경험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음악과 감정, 해방, 자유, 건강, 부, 황홀경, 번영의 소망, 이 모든 것은 세속적입니다. 이에 대해 5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

은사주의 운동이 성공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세속적인 사람들이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세속적인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세상을 이겼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이겼습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경고를 듣지 못했나 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조엘 오스틴은 <지금이 최고의 순간이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한국어판 제목은 <긍정의 힘>이죠. 오스틴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지금이 최고의 순간인 이유는 지옥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으로 향하고 있다면 지금이 최고의 순간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죠.

또한 강렬한 감정적 음악이 자기도취적이고 자기만족적이며 무감각한 곡조를 타고 거짓 약속을 전달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타락한 마음이 원하는 무분별하고 피상적인 정욕을 주지 않으십니다. 성령님은 이런 것을 주지 않으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겸손과 상한 심령, 회개를 주십니다. 우리 안에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열매를 맺으십니다. 음악 없이도 말이죠. 번영 신학이 매력적이게 보이는 것은 육신적 욕망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번영신학 설교자들이 어떻게 세속성을 과시하는지 보셨나요? 이렇게 해서 이야기를 팝니다. ‘보십쇼.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십쇼. 똑같은 일이 여러분에게도 일어날 겁니다.’ 폰지 사기죠. 버니 매도프의 영적 버전입니다. 오순절주의자 열 명 중 아홉은 빈곤 속에 살고 있습니다. 열 명 중 아홉이 빈곤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지리아, 남아프리카, 인도, 필리핀 등지에 있는 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 가운데 90퍼센트 이상이 하나님이 충분한 믿음을 지닌 모든 신자에게 물질적 번영을 허락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얼마나 큰 거짓말입니까?

번영 복음은 라스베가스의 카지노보다도 더 비난을 받아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종교로 위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스베가스 카지노는 마피아가 운영한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죠. 그래서 돈을 잃게 될 거라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대표한다는 사람들이 같은 짓을 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과부가 성전 헌금함에 자기가 가진 생활비 전부를 넣는 것을 보셨을 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죠? “너희가 보는 이 성전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과부가 두 렙돈을 드린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배우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적 헌금의 예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과부가 남은 마지막 두 푼을 드리고 집에 가서 죽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행위 종교에 속아 넘어간 과부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가르침을 받은 대로 마지막 두 푼으로 천국에 들어갈 길을 사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헛된 소망으로 마지막 한 푼까지 빼앗는 이런 체제는 무너질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무너졌습니다.

다른 원리들도 간단히 언급하겠습니다. 좋은 내용들은 다 건너뛰고 있습니다. 제 목회실에 왔던 술취한 선지자 이야기도 건너뛰고 있습니다. 책에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자, 세 번째로, 빨리 끝내겠습니다, 성령님의 참된 역사는 사람들을 성경으로 이끕니다. 어제 밤에 콘래드 목사님 말씀 들으셨죠? 성령님의 참된 역사는 사람들을 성경으로 이끕니다. 6절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진리의 영은 무엇으로 달려갑니까? 성경입니다. 성경으로 달려갑니다.

피터 와그너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직접 우리와 말씀하신다는 것을 부인하고, 하나님이 계시하기를 원하신 모든 것을 성경에 기록하게 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66권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구절은 성경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이 교회에게 어떤 책을 성경에 포함시키고 어떤 책을 포함시키지 말아야 할지를 깨우쳐주시기까지는 2백 년이 넘는 세월이 필요했다. 그것이 곧 성경 외적인 계시가 아니고 무엇인가? 더욱이 카톨릭 교회와 개신교는 여전히 정경의 숫자를 놓고 이견을 내비친다. 또한, 나는 기도는 쌍방향의 활동, 곧 우리가 하나님께 말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기대하는 활동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우리가 목격해온 대로 하나님은 선지자들에게 새로운 계시를 허락하신다.”

한때 달라스 신학교 교수였던 잭 디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달라스 신학교에서 가르치다가 지금은 떠났죠. “성경의 충분성은 마귀의 교리이다. 우리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가장 고귀한 목적을 이루려면 기록된 말씀과 하늘로부터 새롭게 주어지는 음성 모두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사탄은 신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점과 관련해 우리에게 다양한 공격을 퍼붓는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시나요? 사탄이 성경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면서 우리를 속인답니다.

디어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사탄의 성공적인 공격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이 기록된 말씀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에게 더 이상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치는 교리를 발전시켜온 것이다. 이 교리는 비록 기독교 신학자들을 통해 완성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마귀의 교리에 지나지 않는다.” 마귀의 교리라고요? 성령님의 참된 사역과는 완전히 거리가 멉니다.

또 다른 원리도 잠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성령님의 참된 역사는 하나님의 사랑을 독려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사랑을 독려합니다. 성령님의 참된 역사는 사랑을, 성경적 사랑을 불러일으킵니다. 그 사랑은 순수하고 참되고 거룩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향해 나타나고, 겸손하고 희생적인 섬김과 덕을 세우려는 열망으로 다른 사람들을 향해 나타납니다.

이제 정말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은사주의 운동에서는 모든 것이 이웃이 아닌 자기에 관한 것입니다. 은사도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자신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기도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이 거짓 체계에 영합하는 겁니다. 따라서 사랑이 부족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러한 거짓 사랑에 대해 썼습니다. 이들 사이에 마치 신앙적 사랑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짓 사랑일 뿐입니다. 전혀 희생적이지 않기 때문이죠. 신비주의와 물질주의가 혼합된 곳에는 자아도취가 있습니다. 자신이 느끼고 경험하고 얻을 수 있는 것에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는 것에만 관심이 있죠. 성령님의 역사로 위장한 유아적인 자기애, 냉정한 물질주의, 이기심일 뿐이죠.

따라서 우리는 은사주의 운동의 진실성에 대해 추측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말로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이 있습니다. 이 기준으로 은사주의 운동을 평가하고 베뢰아 사람들처럼 분별력 있게 판단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 앞에 밝히 드러날 겁니다.

요한이서 7절부터 11절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잘못된 기독론을 수용하는 종교혼합적인 포용에 대해 경고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 이러한 것들을 성경의 빛 가운데서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을 주심에 감사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똑똑하거나 더 낫기 때문이 아님을 압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생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그 은혜가 아니었다면 우리도 이 운동에 속은 사람들처럼 어둠 속에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을 높여드립니다. 주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립니다. 주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옵소서. 순전한 진리로 모든 거짓과 속임수를 뚫고 비추어 주옵소서. 사탄을 우리 발 아래 두시고, 그리스도께서 높임을 받으사 모든 사람을 주님께로 이끌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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