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제가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에 부임한 이후로 저희에게, 적어도 저희 가족에게 있어서 매우 특별한 때입니다. 저와 제 아내 패트리샤가 결혼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죠.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최고의 선물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패트리샤,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일어나서 돌아서 주겠어요?
저는 결혼 50주년을 어떻게 기념할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희에게 주신 4명의 자녀는 모두 결혼해서 우리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손주 15명도 모두 우리 교회에 출석하고 있고, 때가 되면 차례로 세례도 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7명에게 세례를 줬죠. 스물 세살부터 세살까지 연령대도 다양합니다. 어떻게 기념하면 좋을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50년을 기념해서 특별한 50일을 보내면 어떨까?”하고 말이죠. 50년에 비하면 50일은 너무 짧긴 하지만요. 지금은 중간정도 지났습니다. 이 집회를 위해 돌아왔는데 다시 떠날 겁니다. 60일로 늘려 볼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오래지 않아 이 멋진 사역지로 다시 돌아올 겁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서 받는 사랑, 또 자녀들, 손주들에게서 받는 사랑에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아침 제 책상 위에 두 손녀가 쓴 쪽지가 있었는데, “설교 잘 하세요”라고 적혀 있더라구요. 아마 저를 위해 기도하고 있을 겁니다.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모든 선물 중에서, 여러분의 가족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교회에 출석하고, 함께 사역하고, 함께 주님을 섬기는 것이야말로 주님이 주시는 가장 큰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집회에서는 <이상한 불>이라는 주제로 현대 은사주의 운동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수십 년간 걱정해 온 문제입니다. 제 사역 초기에 이 운동이 시작되는 것을 보면서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년간 저는 이 강단에서 은사주의 운동 문제를 다뤘습니다. 40년 전에는 은사주의 운동과 그 당시에 발생했던 문제들에 대해 연속 설교로 다뤘고, 몇 년 후에는 <은사주의>라는 책을, 또 그 다음에는 <무질서한 은사주의>라는 책을 썼습니다. 또 이 주제에 관해 설교하고 계속해서 관심을 가짐으로써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분별력을 갖출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교회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으면 저는 항상 동일하게 대답합니다. 바로 분별력의 부재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을 손에 들고도 진리를 분별하지 못한다면, 수천 가지 이단에 의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마치 영적 에이즈와 같습니다. 면역체계가 약한 사람들이 수천 가지 질병으로 죽을 수 있는 것처럼, 교회도 분별력을 행사하지 못하면 수천 가지 이단으로 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항상 문제입니다.
사역에 따르는 책임 중에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것처럼 범사에 오래 참음으로 가르치는 적극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책하고 경계하며 권해야 합니다. 분별력을 행사하는 것은 기독교적 삶의 핵심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적 삶은 기독교적 사고의 반영이며, 기독교적 사고는 건전한 교리와 연결되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분별력이 시작됩니다.
분명한 것은 자칭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분별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번 집회의 목표는 여러분이 분별력을 갖도록 돕는 것입니다. 저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나눠주실 소중한 초청 연사들과 함께 말이죠. 우리는 은사주의 운동에 속한 사람들 중에 사기꾼이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아마 본인들도 알고 있겠죠. 이들은 거짓 교사들인데 스스로도 그렇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이들은 돈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있고 스스로도 그렇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또한 이 운동에 휘말려 속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유다서 말씀을 빌리자면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해야 할 자들입니다. 은사주의 지도자들 중에는 맞서고 폭로해야 할 지도자들이 있고, 도움을 주고 격려하며 진리를 알게 해야 할 무지한 지도자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베뢰아 사람들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하려고 했습니다. 우리도 이번주에 그렇게 노력할 겁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이 여러분은 정말로 택함받은 분들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특별한 자리에 앉아 계십니다. 제가 알기로는 교회 역사상 이런 식으로 이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 모인 적이 없었습니다.
은사주의 운동의 규모는 얼마나 클까요? 지구상에는 은사주의자가 5억 명 있습니다. 비교해 보자면 로마 카톨릭 신자는 10억 명입니다. 몰몬교도는 천 4백만 명입니다. 몰몬교도 천 4백만 명에 은사주의자 5억 명이라고요?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목회자들이 몰몬교에 맞서는 것을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마땅히 그래야 하죠. 몰몬교는 하나님에 대해, 그리스도에 대해, 구원에 대해 그릇된 가르침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5억명 이상의 사람들을 사로잡은 이 거대한 운동에 맞서는 것에는 주저하게 되었을까요?
그러니까 이번 집회를 통해서 하고자 하는 것은, 사랑과 연민을 갖고 은사주의 운동에 맞서는 동시에 매우 직접적인 방식으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문제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도움을 드려서 분별력을 키울 수 있도록 말이죠. 그러면 다른 이들도 깨닫도록 도울 수 있을 겁니다.
자, 레위기 10장을 펴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집회의 주제인 ‘다른 불’의 근거가 되는 성경 구절이 바로 이 레위기 10장에 나옵니다. 인류에게 있어 가장 큰 의무이자 특권이면서 가장 본질적인 행위이자 최고의 책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찾느라 듣지 못하신 분들을 위해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인류에게 있어 가장 큰 의무이자 특권이면서 가장 본질적인 행위이자 최고의 책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참된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복음을 믿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바로 그 참된 예배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의무이자 특권이며 우선순위입니다. 실제로 요한계시록에서 천국을 보면 모든 성도들과 천사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높이고 있습니다. 인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예배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예배입니다.
천국에서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함께 모이는 이유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이라고 고백할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예배가 얼마나 시급하고 엄중하며 중요한 일인지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배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 문화에서 예배는 경박하고 피상적이며 얕고 하찮은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영으로 예배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감정과 인간적 능력을 동원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하며, 이는 계시된 성경에 따라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예배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예배해야 하는데, 이는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존재 전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계시된 진리에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며 예배하는 데 쏟아부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레위기서에서 이스라엘의 예배를 제정하셨습니다.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 초기 예배 지도자는 제사장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공식적으로 아론부터 시작되었죠. 아론은 출애굽기 29장에서 처음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레위기 8장에서 성별되었죠. 그리고 아론은 제사장 가문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아론의 자손들은 이때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예배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맡게 되었죠.
레위기 9장에서 아론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명령대로 제사를 드리면 긍정적으로 응답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레위기 9장 6절입니다. “모세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니 여호와의 영광이 너희에게 나타나리라 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제단에 나아가 네 속죄제와 네 번제를 드려서 너를 위하여,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또 백성의 예물을 드려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되 여호와의 명령대로 하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고 아론은 그 명령을 따라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계시하신 대로 행하면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었습니다.
같은 장 22절로 내려가겠습니다.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마치고 내려오니라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
아론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자 하나님이 약속하신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고 하셨습니다. 아론이 그대로 하자 23절을 보면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났고, 곧이어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살랐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 제사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10장으로 넘어갑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
아론은 방금 두 아들이 불에 타 죽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 모세가 아론의 삼촌 웃시엘의 아들 미사엘과 엘사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나아와 너희 형제들을 성소 앞에서 진영 밖으로 메고 나가라 하매 그들이 나와 모세가 말한 대로 그들을 옷 입은 채 진영 밖으로 메어 내니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이르되 너희는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가 죽음을 면하고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침을 면하게 하라 오직 너희 형제 이스라엘 온 족속은 여호와께서 치신 불로 말미암아 슬퍼할 것이니라.” 국가적으로 애도해야 한다는 겁니다. “여호와의 관유가 너희에게 있은즉 너희는 회막 문에 나가지 말라 그리하면 죽음을 면하리라 그들이 모세의 말대로 하니라.”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또 나 여호와가 모세를 통하여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치리라.”
아론이 순종했기에 하나님은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반면 아론의 두 아들은 순종하지 않았고 하나님은 이들을 불로 삼키셨습니다.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호와 앞에 나올 때는 반드시 여호와를 경외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시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로 예배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모든 면에서 의롭고 훌륭했습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한 제사장이었습니다. 맏아들 나답은 대제사장 직분을 이어받을 법적 후계자였고, 아비후는 그 다음 서열이었습니다. 이들은 모세의 조카였습니다. 출애굽기 24장을 보면 이들의 이름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의 첫머리를 차지했습니다. 매우 존경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를 제외하고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처음 언급될 때 언급된 유일한 인물들이었습니다. 아론과 모세를 제외하면 이스라엘 지도자의 첫 명단에 이름이 올랐던 유일한 인물들이었습니다. 민수기에서 이스라엘의 “칠십 장로”, 즉 산헤드린을 언급했을 때 유일하게 함께 언급됐습니다. 이들은 부도덕하거나 사악하지 않았고, 권력을 찬탈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존경받는 자들이었습니다.
또한 나답과 아비후는 칠십 장로와 함께 시내산 중턱까지 올라가서 하나님이 모세와 대화를 나누시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정말이지 큰 특권이었는데, 출애굽기 19장에 따르면 백성들은 물론 짐승들조차도 산 근처에 가까이 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야 했습니다. 백성들이 산 아래에서 연기와 번갯불을 바라보는 동안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께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24장에 따르면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습니다. 다른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던 특권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오직 모세만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 보호받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2절에서 느닷없이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모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우리는 이 불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모릅니다. 제 생각에는 하나님이 친히 하늘에서 내리신 불이 있는 놋 제단이 아닌 다른 곳에서 가져온 불이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친히 밝히신 놋 제단에서 불을 가져와야 했습니다. 분명히 이들은 다른 곳, 허락받지 않은 곳에서 불을 가져왔습니다. 사소한 문제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지금같이 육신적이고 가볍고 자기중심적이고 경솔한 세대에게는 정말 과도한 반응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이 어디서 왔는지를 왜 신경쓰실까요? 너무 사소한 문제 아닌가요?
아마도 이보다 더한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이것이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고 이보다 더한 일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9절에서 아론이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는 지시를 받은 사실로 미루어 보아 술에 취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답과 아비후는 판단력이 흐려졌고, 이에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를 무시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9장 24절에서 제물을 태운 불이 10장에서는 이들을 태워 죽였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두려운 사건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서 하나님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재산을 팔아 얻은 돈에 대해 성령님께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회중 앞에서 죽이신 것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것 역시 가볍고 육신적인 문화에는 과민 반응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장 중대한 범죄는 부패한 예배에서 생겨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장 심각한 징조,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장 중대한 범죄는 부패한 예배에서 생겨납니다.
잠시 출애굽기 32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말씀드릴 것이 너무 많아서 속도를 좀 내야 할 것 같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는 금송아지 사건이 나오기 때문에 잘 기억하실 것 같네요. 4절을 보면 아론이 이 사건을 주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금송아지는 참 하나님의 거짓 형상이었습니다. 6절입니다.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참 하나님을 거짓 형태로 예배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신성을 모독하는 왜곡된 형상으로 바꿔버린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백성에게 재앙이 내렸습니다. 대규모 살육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각 사람이 형제와 친구와 이웃을 죽였습니다. 예배를 부패하게 만든 자들을 죽이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장 중대한 범죄는 부패한 예배에서 생겨납니다. 이런 점에서 은사주의 운동은 거짓된 예배로 계속해서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은사주의 운동은 아버지를 모욕하고, 아들을 모욕하고, 가장 심하게는 성령을 모욕합니다. 불경건한 생각, 불경건한 행동, 진실하지 않은 믿음, 거짓 주장, 거짓 약속, 육신적인 행동, 이 모든 것을 성령님의 역사로 돌리지만, 이런 것들이 성령님의 이름과 연관되는 것조차도 성령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다른 불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죄입니다. 더 슬픈 점은 이것이 심판의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몇 달 전 예배에서 이 문제를 다뤘을 때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죠.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다시 말해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이 사탄을 힘입어 이루어졌다고 말했습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나오죠.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성령님의 역사를 사탄의 일로 돌리고 있다는 겁니다.
은사주의 운동의 많은 곳에서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탄의 일을 성령님의 역사로 돌리고 있는 겁니다. 과거에는 성령님의 역사를 사탄의 일이라고 했는데 이제는 반대가 되었습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은 가볍게 다룰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다른 불을 드리는 모든 이들은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부패한 예배를 드리는 모든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이 행하지 않으시고 말씀하지 않으신 일들을 성령님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성령님을 모욕하는 심각한 일입니다. 은사주의 진영에서는 간과하고 있지만 말이죠.
며칠 전에 저는 ‘쿤달리니 컬트’라고 하는 힌두교 의식을 봤습니다. 마귀에 씌인 것 같은 행동을 하더군요. 그런데 소위 ‘부흥’이라고 하는 은사주의 운동에서 보이는 극단적인 행위와 완전히 동일했습니다. 이교도나 마찬가집니다. 사탄이 지배하는 어둠의 왕국의 일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일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너무 터무니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입니다. 비극이자 역설인 것은, 성령님께 가장 헌신적이라고 주장하고, 성령님의 능력을 독점했다고 주장하며,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성령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귀에 씌인 자들과 동일한 행위를 하면서 말이죠.
성령님이 행하지 않으신 일들, 말씀하지 않으신 말들, 하게 하시지 않은 체험들을 성령님의 역사로 돌리는 것은 매우 심각한 범죄입니다. 어떤 면에서 은사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환상을 신비한 체험과 마귀의 능력이라는 ‘다른 불’에 던져 넣고 거기에서 나온 거짓 신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제가 모든 은사주의자들을 불신하는 걸까요? 그건 아닙니다. 은사주의 운동 안에도 진정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이 거짓 예배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이 운동 자체는,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참된 예배에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 운동 자체는 참된 예배를 풍성하게 하는 데 아무 역할도 하지 않습니다.
제가 왜 이렇게 말하는 걸까요? 은사주의 운동은 성경의 명확성에 어떠한 기여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 해석에도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았습니다. 건전한 교리에도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은사주의 운동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정확한 성경 해석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은사주의 운동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강력한 교리가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도들로부터 시작해서 신실한 사람들을 통해 주어진 분명한 진리의 흐름이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들의 글을 읽고, 개혁주의자들의 글을 읽고, 청교도들의 글을 읽으며, 역사를 통해 흐르는 진리를 따라가면서 그동안 발생했던 모든 쟁점에 대해 풍성하고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여기에 은사주의 운동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합니다. 그저 혼돈과 혼란, 왜곡과 오해를 일으킬 뿐입니다.
은사주의자들 중에도 진리를 믿는 사람이 있을까요? 네, 있습니다. 은사주의자들 중에도 어떤 쟁점에 대해 건전한 신학을 고수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네,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참된 이해는 은사주의 운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진리와 교회를 수호하시기 위해 사용하셨던 경건한 설교자들과 교사들을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은사주의 운동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합니다. 진리를 손상시키고 혼란스럽게 만들 뿐입니다. 은사주의 운동은 성경과 건전한 교리를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은사주의 운동은 성경적 복음을 회복시키거나 강화하지 않습니다. 은사주의 운동은 진리와 건전한 교리를 보존하지 않습니다. 단지 왜곡과 혼란과 오류만을 낳았을 뿐입니다. 성경적 복음에 대한 믿음은 온전히 보존되고 있습니다. 살아남은 겁니다. 앞으로도 반드시 살아남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보호하고 계시기 때문이고, 신실한 교회 안에서 신실한 사람들을 일으키셔서 계속해서 다음 세대로 전달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은사주의자들 중에도 진리를 알고 진리를 사랑하며 복음에 대해 정통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에 대해서는 이단적인 견해를 취합니다. 물론 모두가 이단은 아닙니다. 하지만 다시 말씀드리지만, 은사주의 운동에 있는 진리는 그 운동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운동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은사주의 운동은 하나님을 모르는 비기독교인들, 육신적인 이유와 욕망, 감정적 체험을 위해 참여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진리를 알고 진리에 충실한 분들도 있다는 것에 감사하지만, 제가 우려하는 바는 대다수가 어둠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미혹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가라.” 이 말씀은 분명 은사주의 운동에 대한 예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은사주의 교회와 그 영향력 아래 있는 죄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환경 속에도 진리가 존재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은사주의 교회 안에 있는 죄인들에게 주어진 은혜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은사주의 운동에도 불구하고 신자가 되는 것은 가능하지만, 은사주의 운동 때문에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가장 두려운 것은 전 세계의 사람들이 이 운동 속에서 길을 잃은 채로 육신적 욕망과 거짓 약속들을 쫓을 뿐, 참된 복음과 참된 회개, 참된 그리스도, 참된 구원에 대한 이해나 관심은 거의 또는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정통 복음에 기초했다고 하는 그 어떤 운동도 은사주의 운동보다 교회에 큰 해를 끼친 운동은 없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몰몬교도는 천 4백만 명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5억 명의 사람들이 성경과 신성한 진리에 대한 정통적 이해에 끼칠 수 있는 폐해는 엄청날 겁니다. 제가 우려하는 바는 은사주의 운동이 성공하는 이유가 진리가 아닌 어둠의 왕국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죄인들이 원하는 것을 약속하기 때문에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겁니다. 복음주의 교단들은 하나님의 도성에 은사주의 운동이라는 트로이 목마를 두 팔 벌려 맞아들였고, 숨어있던 군대는 하나님의 도성에 진리가 아닌 우상을 세웠습니다.
이보다 더 심각한 일이 있을까요? 없을 겁니다. 대조적으로 개혁신학과 건전한 교리에는 거짓 교사들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머무는 곳이 아닙니다. 개혁신학, 즉 건전한 교리, 경건한 사람들의 긴 계보 속에서 이어져 온 성실한 성경 해석에는 거짓 교사들이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사기꾼도, 탐욕스러운 기만자도 없습니다. 거짓말쟁이와 진리를 왜곡하는 자도 없습니다. 신약성경의 교리로 우리를 되돌리는, 종교개혁의 교리를 믿는 개혁교회 연합집회에서는 거짓 기적, 거짓 환상, 거짓 예언, 거짓 기름부음, 무분별한 혼란이 없을 겁니다. 사람들이 떨고, 중얼거리고, 구르고, 쓰러지고, 성령에 대해 이상한 말을 하는 일도 없을 겁니다. 개혁주의 교계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 일들입니다. 진리에 닻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죠. 경험과 감정, 직관이 진리를 정의하는 기준이 되면 그야말로 지옥문이 열리는 겁니다.
1657년 존 오웬은 하나님과의 교제에 관하여 고전적인 방식으로 분석하는 글을 썼습니다. 청교도들이 하던 방식이었죠. 책 제목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하여, 각 위격별로, 사랑과 은혜와 위로 안에서> 꽤 함축적인 제목 아닙니까? 또 다른 제목도 있는데,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과 성도들의 교제>입니다. 존 오웬이 쓴 이 책은 마치 보물과도 같습니다. 삼위일체적 교제를 다루기 때문이죠.
오웬은 우리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과 함께 교제해야 한다는 것과, 삼위일체의 각 위격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언약 관계는 삼위일체의 각 위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관계는 아버지에 의해 시작되고, 아들에 의해 이루어지며, 성령에 의해 전달됩니다. 아버지는 신성한 주권적 사랑을 표현하시고, 아들은 신성한 주권적 은혜를 표현하시며, 성령은 신성한 주권적 생명을 전해주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온전히 예배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모든 것과 아들이 이루신 모든 것,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를 구원하고 성화하시는 일에서 실행하시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진정한 역사는 무엇입니까? 성령은 죄를 깨닫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시며, 의롭다 하시고, 깨닫게 하시며, 정결케 하시고, 회심시키시며, 성화시키시고, 양자 삼으시며, 세례를 주시고, 내주하시며, 은사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며, 인도하시고, 구원하시며, 열매를 맺게 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성경이 말하지 않는 성령님의 역사는 이렇습니다. 우리를 넘어뜨린다거나, 우스꽝스럽게 웃게 한다거나, 체온을 올라가게 한다거나, 딸꾹질을 하게 한다거나,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혼미한 상태에 빠뜨리며, 술 취한 것처럼 보이게 하고, 쓰러지게 하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게 하고, 원시적인 소리를 내게 하며, 뛰거나 구르게 하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존 오웬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모든 약속을 기억나게 하고, 우리 마음에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게 하며,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며, 구속의 날까지 우리를 인치시고, 우리의 최종적 유업을 보증하시며, 우리에게 위로의 기름을 부으시고, 우리의 양자됨을 확증하시며, 우리의 간구 가운데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믿음의 지혜가 여기 있다. 믿음은 보혜사 성령의 이 모든 역사에서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을 만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역사에 무지함으로써 그 달콤함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어야 하고, 우리에게 마땅히 요구되는 감사 또한 소홀히 해서도 안 된다.”
오웬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신자로서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것은 묵상과 기도, 올바르게 정돈된 삶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다. 우리는 삼위일체의 각 위격이 우리를 향해 베푸시는 특별한 자비와 사역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이에 대한 반응으로 사랑과 순종을 각 위격에게 돌려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입니다. 성령님을 조롱하는 것은 하나님을 슬프시게 합니다. 로마서 12장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에 대해 알려줍니다. 이것이 우선순위입니다. 궁극적인 우선순위입니다.
또 다른 청교도 토마스 굿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때로는 성부 하나님께, 때로는 성자 하나님께, 그리고 때로는 성령 하나님께 드려진다. 때로 우리의 마음은 우리를 택하신 아버지의 사랑으로 향한다. 때로 우리의 마음은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향한다. 그리고 때로 우리 마음의 사랑은 하나님의 깊은 것을 살피시고 우리에게 계시하시며 우리를 위해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시는 성령님을 향한다. 그렇게 우리는 한 증인에서 다른 증인으로 옮겨가는데,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과 이렇게 교제해야 한다.”
굿윈은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세 위격 모두가 우리 안에 균등하게 자리하실 때까지 결코 만족해서는 안 된다. 말하자면 삼위의 하나님 가운데 앉아서 세 위격 모두가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이생에서 약속하신 가장 귀한 것이다.” 저는 이 문장이 제일 좋습니다. “삼위일체의 모든 위격이 우리 안에 균등하게 자리잡게 하여 세 위격 모두에게 합당한 경배를 드려야 한다.”
히브리서 10장에는 경고가 있습니다. 잠시 히브리서 10장 29절을 보겠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우리는 이 구절의 전반부, 즉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는 자들에게 더 뜨거운 지옥이 있다는 부분에 집중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는 것을 좋아하지 않죠.
지난 25년 동안 복음을 수호하기 위한 중요한 방어 체계가 있었습니다. 짐 보이스가 천국에 가기 전에 시작한 ‘신앙고백적 복음주의자 연합(ACE)’를 시작으로, 여러 조직, 기관, 연합체, 단체들이 생겨났고 모두가 동참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 인격, 본성, 십자가 사역, 부활, 칭의 교리와 십자가 사역과 부활에 관련된 위대한 진리를 수호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어쩌면 약간 지나치게 되어 이제는 모든 것이 십자가를 가리키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십자가를 묵상하게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공격받으실 때마다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끈질긴 헌신으로 수호해 왔습니다.
하나님이 공격받으실 때도 비슷한 양상을 보입니다. 일부 신학자들이 하나님은 미래를 알지 못하고 계획하실 수 없으며,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전혀 알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열린 유신론’을 제기했을 때, 많은 학자들과 저술가들, 설교자들이 모여 복음주의 공동체와 함께 성부 하나님에 대한 공격에 대응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10장 29절을 보면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에게도 극심한 형벌이 내려질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헬라어 동사 ‘에누브리조(enubrizō)’의 명사형은 ‘휴브리스테스(hubristēs')’인데, 여기에서 영어 단어 ‘hubris’가 나왔습니다. ‘오만함, 무례함, 폭력적인 모욕, 사악한 모욕’이라는 뜻이죠.
성령님은 여호와의 루아흐, 여호와의 영이십니다. 전능자의 호흡이십니다. 즉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 섭리가 진리임을 알고도 무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자들은 더 뜨거운 지옥에 가게 될 것에 모두가 동의할 겁니다. 하지만 동일한 경고가 은혜의 성령에 대해 오만하고 무례하고 폭력적인 모욕을 가하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다음 구절입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우리는 성령님을 모욕하는 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숨결이자 성령이신 ‘루아흐 야훼’께서 생명을 창조하시고, 변화시키시며, 정결케 하시고, 위로하시며, 죄인들을 그리스도를 닮게 하시고, 온전하게 하시며, 능력을 주시고, 인치시며, 보호하시고, 깨닫게 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높이고 사랑해야 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주어진 가장 큰 사탄의 속임수는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거짓 교리이다.” 그런데 누가 우리를 영원히 보호하시나요? 누가 우리를 영원히 인치시나요? 누가 우리 유업의 보증이신가요?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의 사역은 우리를 영원히 지키시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사람은 바로 은사주의 운동 지도자입니다. “지금까지 주어진 가장 큰 사탄의 속임수는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거짓 교리이다”라고요? 성령님의 사역을 사탄의 일이라고 비난하는 겁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으로 인해,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는 의롭다 하심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는, 어떻게 됩니까? 영화롭게 됩니다. 로마서 8장이죠. 그런 발언은 성령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베니 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 나아가서 ‘주님의 뜻이라면’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답니다. “성령의 역사는 내 말에 달려 있다. 내가 말하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으실 것이다.” 정말 그럴까요? 우리는 이 두 문장에서 성령님의 역사가 마귀의 일로 돌려지고 성령님의 주권이 의문시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니 자신이 주권자이지 성령님이 주권자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거짓 교사가 한 말입니다. 그런데 그 기름부음은 조작된 환상입니다. 베니의 주장에 의하면 고인이 된 여성 설교자 두 명의 무덤에 갔을 때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합니다. 에이미 셈플 맥퍼슨과 캐서린 쿨만이죠. 이들의 무덤에 갔을 때 기름부음을 받았답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모든 터무니없는 것들을 일일이 다루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강조하고 싶습니다. 다시 주요 요점으로 돌아가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의무이면서 가장 막중한 책임입니다. 출애굽기 20장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줍니다. 계명의 전반부는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전반부가 어떻게 끝나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에 대해 불경스러운 방식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저주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성이나 속성, 사역, 말씀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하나님을 불경스럽게 표현하고 왜곡하는 모든 방식을 뜻합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생각하고 이해하고 언급하면서 하나님이 절대 하지 않으실 일이나 말씀하지 않으실 말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은 하나님이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저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일입니다.
신명기 28장 58절부터 60절입니다.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네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던 애굽의 모든 질병을 네게로 가져다가 네 몸에 들어붙게 하실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하나님은 벌하실 것입니다. 신명기에 나오듯이 그러한 자는 재앙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은사주의 운동이 이렇게 오래 살아남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 제게 이렇게 묻는 분도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들을 치시지 않을까요?” 글쎄요,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고, 우리가 모르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을 겁니다. 저는 욥처럼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계획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제게 모든 것을 말씀하실 의무가 없으십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압니다. 거짓된 은사주의 운동이 아무리 성장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질 심판의 손길까지는 막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금송아지 성령이 아닙니다. 거짓 성령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경에 계시된 성령님입니다. 욥기 33장은 “전능자의 기운”, 히브리서 9장은 “영원하신 성령”, 시편 51편은 “자원하는 심령”, 시편 143편은 “선하신 영”이라고 합니다. 또 이런 호칭도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영, 아버지의 영, 그리스도의 영, 아들의 영, 생명의 성령, 은혜의 성령, 지혜의 영, 모략과 재능과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 진리의 영, 성결의 영, 영광의 영, 위로자 등이죠. 누가복음 1장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거룩하신 것처럼 성령도 거룩하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주권적이신 것처럼 성령도 주권적이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능력이 있으신 것처럼 성령도 능력이 있으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은혜로우신 것처럼 성령도 은혜로우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사랑이 많으신 것처럼, 성령도 사랑이 많으십니다. 완전함 안에서 하나이십니다.
이 모든 것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교회 안에서 성령님을 향한 참된 예배를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제게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예수님이 시편 말씀을 인용하신 것처럼 말이죠.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성령님이 이렇게 모욕을 당하실 때 저는 고통을 느낍니다. 교회는 아버지를 옹호하기 위해, 아들을 옹호하기 위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왜 성령님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일어나지 않을까요? 왜 그런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은사주의 운동은 사랑과 관용을 근거로 받아들이기를 요구했습니다. 그렇게 환영받은 은사주의는 교회를 타락시키고 감정주의를 극단적으로 조장하면서 기도, 예배, 찬양, 믿음, 만족, 겸손, 주권을 비롯한 수많은 것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과거 역사의 다른 시기였다면 은사주의는 이단이나 이교도적인 것으로 여겨져 거부당했을 겁니다.
몇 가지를 더 나누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생각하도록 강요했던 부정적인 것들을 씻어내기 위해서 말이죠. 성령 하나님에 대한 위대한 찬사 하나를 나누고 싶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사기꾼들과 거짓 교사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선물을 말씀드리죠.
로마서 8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매우 친숙한 성경 구절이지만,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위한 성령님의 가장 위대한 사역입니다. 26절부터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틀림없이 성령님에 대한 구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8장은 ‘성령 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성령님과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26절입니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무엇보다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심으로써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성령님도 우리의 중보자이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을 아시기에 언제나 하나님의 뜻대로 중보하십니다. 성령님의 중보 사역의 결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모든 것이 신자의 영원한 선을 위해 합력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모든 것이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요소가 있습니다. 이 ‘선’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도대체 그 선이 무엇일까요? 29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것이 성령님의 궁극적인 사역입니다. 우리로 그리스도를 닮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모든 것이 하나의 궁극적인 선을 향해 합력하도록 우리 안에서 일하시며, 그 궁극적인 선이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의 형상을 본받은 많은 이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분이 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삶에서 하기 원하시는 일은 무엇인가요? 간단히 말하면, 누구를 본받게 하시나요?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에이콘(eikōn), 에이콘(eikōn), 즉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하시려고 일하십니다.
이것이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노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푯대란 무엇일까요? 푯대는 위로부터의 부르심의 상급입니다. 우리가 위로부터의 부르심을 받을 때의 상급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화롭게 되었을 때의 모습이 현재의 성화 과정에서도 목표가 됩니다. 우리가 미리 정하신 바 되고 부르심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면 마침내 우리는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영화롭게 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아질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입니다.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이것이 최종 목표입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영화의 순간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우리가 영화롭게 되어 그리스도와 같게 될 때까지 성령님의 사역은 우리가 점점 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사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완전한 사역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은 어떻게 일하셨나요? 예수님을 쓰러뜨리셨나요? 술 취한 것처럼 보이게 하셨나요? 넘어지거나, 펄쩍 뛰거나 구르거나 미친듯이 웃거나 짖거나 중얼거리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게 하셨나요? 상상하는 것조차 이상한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이런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은 성령 충만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예수님과 늘 동행하셨습니다. 언제나 동행하셨습니다. 마리아의 태중에서 생명을 주신 분도 성령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자발적으로 성령의 능력 안에서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과 특권을 독자적으로 사용하지 않으시고 성령님께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삶은 이랬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누가복음 1장에 따르면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성령님의 능력으로 성장하셨고,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습니다. 마가복음 1장에 따르면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에 따르면 예수님은 시험을 받으실 때 성령님의 능력으로 견디셨습니다. 같은 장을 보면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하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 14절부터 15절에 나오죠. 예수님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완전한 순종 가운데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순종을 통해 완벽하게 되셨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순종하셨고, 또한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죠. 히브리서 9장 14절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승리로 죽음을 맞으셨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성령님이 예수님 안에서 역사하셨습니다. 로마서 1장에 따르면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 1절부터 2절에 따르면, 부활 이후에도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께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하십니다.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성령님의 완전한 사역을 보고 싶다면, 성령님이 완전하신 인간 안에서 하신 일을 보십시오.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도 성령이시며,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납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성장하셨고, 우리가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은 세례받으실 때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셨고, 우리도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 즉 그리스도의 몸이 됩니다. 예수님은 시험 중에 성령으로 견디셨고, 우리도 시험당할 때 성령께서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사역하시는 동안 성령의 능력을 받으셨고, 우리도 사역할 때 성령님께서 은사와 능력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성령 충만하셨고, 성령의 열매와 거룩함을 보이셨습니다. 우리를 채우시고 열매맺게 하시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은 순종 가운데 성령의 능력으로 완전해지셨고,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도 같은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성령 안에서 승리로 죽음을 맞이하셨고, 은혜와 영광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도 고난 중에 견디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죽음에서 부활하셨고, 우리도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성령님의 사역과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보고 싶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일을 보십시오. 물론 그리스도는 완전하게 순종하셨죠. 하지만 성령님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역사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역사하십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신 그 일을 우리 안에서도 이루시기로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6장에 흥미로운 말씀이 있습니다. 7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예수님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하셨습니다. 왜일까요? 왜 떠나시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일까요? “내가 가면 성령을 보낼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을 보낼 것이다. 내가 떠나는 것이 유익인 것은 성령이 내 안에서 하신 일을 너희 안에서도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나는 내 사역을 마쳤고, 이제는 성령이 사역하실 차례다. 내 사역은 끝났고, 성령의 사역이 온전히 시작되려 한다.’
요한복음 14장 16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26절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이는 먼저 신약성경을 기록할 사도들에게 적용되며, 나아가 성령님의 진리 사역에서 유익을 얻는 모든 신자에게도 적용됩니다.
15장에서도 본질적으로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26절입니다.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16장 13절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다시 말해서, 성령님의 사역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시고 그리스도의 일을 보이셔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사실입니다. 성령님은 아들 안에서 하셨던 것처럼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과 닮게 만드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완전한 인간성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시며, 하나님이 택하신 구속받은 자들이 시간 속에서 죄와 육신과 사탄과 세상의 권세를 이기도록 힘을 주시고, 더욱 하나님의 아들을 닮아가도록 능력을 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거룩한 지식, 거룩한 교리, 거룩한 행위, 거룩한 태도, 거룩한 말씀, 거룩한 성품, 거룩한 행동, 거룩한 포부, 거룩한 갈망, 거룩한 애정을 일으키십니다.
정말이지 얼마나 끔찍한 교만이며 모욕인지 모르겠습니다. 성령님이 부패와 불경건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욕되게 하는 마귀와 같은 일들을 일으키셨다고 주장하다니요? 성령님의 사역은 타락한 형상을 가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는 자들, 즉 하나님의 형상이 너무나 심각하게 훼손되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고 지옥의 고통 속에서 영원히 도망칠 수 없는 자들을 취하셔서, 그들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제가 은사주의 운동에 진리가 있다고 믿게 되는 때가 온다면, 은사주의 지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모습을 보여줄 때, 진정으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임을 보여줄 때일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자리에 함께 모일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여기 모인 귀하신 성도님들로 인해 감사합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진리에 대한 열망이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알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섬기며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참된 사역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때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모습, 그리스도의 겸손, 그리스도의 온유, 그리스도의 온화함, 그리스도의 친절, 그리스도의 진실함을 볼 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높임을 받고 존중받는 모습을 볼 때입니다. 희생과 사랑, 거룩한 성경에 대한 열정을 볼 때, 분별력과 진리가 다스리는 것을 볼 때입니다.
그러나 은사주의 운동에서는 이런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결론내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그러한 일들을 성령님의 역사로 돌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조차 두렵습니다. 주님, 우리가 진리를 분명히 알게 하옵소서. 진리를 분명히 알게 하옵소서. 우리가 먼저 분명히 이해하고 다른 이들을 돕게 하옵소서.
우리 안에서 행하신 모든 일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속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어리석은 거짓을 쫓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참된 믿는 자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경험하고 있음에 감사합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는 모습에서 드러납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님이 만들어내시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미워하는 것에서도, 오류와 죄와 부패를 미워하는 것에서도 드러납니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는 것은 우리 안에서 성령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께 감사드립니다. 성령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아버지의 모든 선하신 뜻을 우리 안에서 이루어 주심으로 우리에게 멋진 한 주를 주실 것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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