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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장 25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첫 번째 시간의 핵심은 하나님의 의가 믿음을 통해 죄인들에게 주어짐으로써 모든 죄인들의 필요를 만족시켰다는 것이고, 그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써 죄인이 치러야 할 죄의 값을 대신 치르셨습니다. 제가 앞서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던 것을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죄의 값을 하나님께 치르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그 값을 사탄에게 치렀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치르셨습니다. 지옥에서 영혼과 육체를 멸하는 자는 사탄이 아닙니다. 지옥에서 영혼과 육체를 멸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재판관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죄를 저질렀고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이 치러야 할 책임은 하나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만족되어야 하는데,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만족되었습니다. 따라서 죄인의 필요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만족되었습니다. 속량의 대가로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그 값을 모두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의가 만족되었고, 하늘로부터 이 하나님의 의가 죄인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죄인의 필요가 만족된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25절 하반절부터 이 장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부분에서 한 가지 요점을 동시에 제시합니다. 하나님도 만족하신다는 겁니다. 죄인의 필요가 만족된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모두 알고 계시죠?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놓치는 부분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위해서도 죽으셨다는 겁니다. 이것은 정말이지 장엄하면서도 무궁무진한 주제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로마서 1장 5절에서 바울은 다른 사도들이나 복음 전도자들과 같이 개인적인 고백을 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여기에서 중요한 부분은 “그의 이름을 위하여”입니다.

궁극적으로 구원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높이기 위한 것입니다. 요한3서 1장 7절에서 요한은 복음 전도자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갔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생각지도 못하셨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구원의 주된 이유는 우리의 유익을 위함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목적을 향한 수단이지 그 목적 자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시는 이유는 죄인들이 사랑스러워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비참한 죄인들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하십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는 것이 거룩한 천사들과 구원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영원한 영광을 보여주는 수단이라고 여기십니다.

바울은 로마서 11장 끝에서 구원에 관한 위대한 논문을 마무리합니다. 다른 서신서에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은 송영으로 마무리합니다. 복음의 경이로움에 대한 거룩한 추론과 합리적 논증을 마무리하면서 송영의 찬양을 터뜨립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바울은 구원에 드러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에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하나님께는 조언을 해주는 존재인 모사가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시나요? 하나님께는 조언자가 없습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빚지지 않으십니다. 누구에게 은혜를 입지도 않으십니다. 누군가로부터 정보를 얻지도 않으십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구원의 목적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 영원한 교제 가운데, 성부는 성자를 향한 사랑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속량된 인류를 주고자 한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며, 나의 사랑은 무한히 주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성부는 성자를 향한 사랑의 표현으로 세상을 창조하기로 결정하셨고, 세상이 타락에 빠지는 것을 허락하셨고, 그 세상에서 인류를 속량하기로 결정하셨으며, 속량받은 인류를 성자에게 신부로 주어 속량받은 인류가 영원토록 성자를 영화롭게 하도록 하셨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모든 것이 완성되고 속량된 인류의 수가 다 차게 되면 성부 하나님께서 이들을 성자의 신부로 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따르면 성자는 그 속량된 인류를 받아들이고 사랑의 표현으로써 그 속량된 인류를 다시 성부에게 드립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떤 의미에서 삼위일체 안에서 일어나는 위대한 사랑의 결과물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화음에 녹아들어갑니다. 따라서 로마서 11장 끝에 있는 송영은 로마서의 절정입니다. 12장은 “그러므로”라는 단어로 시작됩니다. 로마서는 일련의 “그러므로”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2장부터는 영광스러운 구원의 결과로 나타나는 행동에 대해 말합니다.

구원의 전체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대제사장적 기도를 드리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영광을 기도합니다. 구속의 계획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회심한 사람은 성부께서 성자에게 주신 사랑의 선물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그렇죠? 요한복음 6장 37절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왜 그렇습니까? 아버지께서 택하시고 아버지께서 주셨습니다. 아들은 주신 자들을 보살피십니다. 영화롭게 된 인류는 영원한 할렐루야 찬양의 화음이 되어 하나님께 영원토록 찬양을 돌립니다. 옛 찬송가의 가사처럼 우리는 경이로움과 사랑과 찬미에 잠기게 될 것입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원주민 사역을 했던 위대한 선교사였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했죠. 브레이너드 선교사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높은 지위를 얻으려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고 천국에 가는 것이다. 내가 천국 어디에 거하게 되든 상관없다. 높은 자리든 낮은 자리든 상관없다.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려고 천국에 간다. 나의 천국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히 그분의 영광에 헌신하는 것이다.” 브레이너드 선교사는 천국에서 이것을 성취하였습니다. 구원의 영원한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께 영원히 영광을 돌리는 데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어떻게 죄인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만족하는지를 살펴봤습니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만족하시고 영화롭게 되시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 3장을 통해서 네 가지 요점을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 3장으로 돌아갑니다. 25절 하반절부터 읽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걸까요? 어떻게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걸까요? 어떻게 하나님을 드러내는 걸까요?

첫째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의를 선포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에 대해 이런 질문을 합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어떻게 죄인들을 용서하실 수 있느냐는 겁니다. 물론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무엇을 근거로 아브라함을 용서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어떻게 아브라함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다”라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무엇 때문에 의로 여기신 걸까요? 하나님은 어떻게 노아와 그 가족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신 걸까요? 하나님은 어떻게 하나님의 의를 나누어 주셨을까요? 하나님은 어떻게 에녹을 의롭다 하시고 에녹과 동행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어떻게 엘리야를 의롭다 하시고 마차에 태워서 하늘로 데려가셨을까요? 구약의 다른 인물들을 어떻게 의롭다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어떻게 의롭지 않은 자들을 의롭다 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이 질문은 가장 많이 제기되면서도 정말 중요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의로우신 분이신지를 의심하는 겁니다. 죄인을 의롭다 하는 것은 바리새인들을 화나게 했던 일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듣고 있던 유대 율법학자들을 짜증나게 했던 일이기도 합니다. 죄인에게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약성경을 제시하면서 ‘하나님은 스스로를 거룩하다고 선언하신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용납하실 수 없으신 분이시다’라고 따졌을 겁니다. 구약 시대의 하나님은 부정을 심판하시고 벌하셨습니다. 이교도에게는 변덕스러운 신들이 있었습니다. 일관성 없는 신들이 있었습니다. 종교 의식이나 종교적 제물, 희생제사, 도덕적 행위로 달랠 수 있는 신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은 무한히 거룩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의를 죄인에게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터무니없게 여깁니다. 바리새인들이 고안한 유대교에서는 자신들의 의를 한껏 뽐냅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않습니다.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같이 하나님께 나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나의 의로움을 받아 주소서.” 이것이 바리새인들이 이해한 하나님의 의였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예수님은 창녀와 범죄자, 세리, 죄인, 사회적으로 고립된 천민들과 어울리셨습니다. 부정을 저질러 쫓겨나 회당 출입을 금지당한 사람들과도 어울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그런 자들과 어울리실 수 있으셨을까요?

그래서 예수님이 비난을 받으신 겁니다. 죄인, 술취한 자, 악인들의 친구라는 비난을 받으셨죠. 한번은 예수님이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였습니다. 평판이 좋지 않은 길거리 여성으로 보이는 이가 들어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렸습니다. 마당이 탁 트인 집에서 예수님을 보고는 따라왔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고 싶었을 겁니다. 그 모임을 주관했던 바리새인은 매우 격분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그 여인이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아셨을 것이고, 자신을 만지지 못하도록 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의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지금 여인의 행동은 완전히 벗어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라고 말씀시며 죄를 사하셨습니다. 또 한번은 사람들이 지붕을 뜯어서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렸을 때,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던 것 기억하십니까? 바리새인의 신학에서는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처럼 그 남자가 병에 걸린 것은 죄 때문이라고 설명하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당황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죄를 사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죄인을 벌하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로 가신 걸까요?

그러니까 질문은 이겁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죄를 오래 참아 주셨습니다.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역사 내내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를 참으셨다는 것을 사람들은 마음으로 알고 있습니다. 죄인들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불의한 사람들이 오히려 더 번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층은 모두 불의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 역사 내내 사람들의 죄를 참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그럴 수 있으셨을까요? 하나님은 어떻게 아브라함을 용서하셨을까요? 어떻게 모세를 용서하셨을까요? 도대체 어떻게 사람들을 용서하신 걸까요?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하셨을까요? 여기에서 십자가가 등장합니다. 죄를 덮으시는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어떻게 된 건지 아시겠습니까? 과거에 용서받은 모든 죄들도 정당한 죄값을 치렀기 때문에 용서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죽은 짐승들이 있지 않습니까?”라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짐승으로는 죄를 속할 수 없었습니다. 희생제사는 속죄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것이었지 희생제물로도 진정한 속죄를 이룰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의 사람들이 날마다 아침 저녁으로 계속해서 제사를 드려야만 했던 겁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고 간과하시고 용서해 주신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용서받은 걸까요?

모든 인간의 죄악된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간과하시고 용서하셨으며, 심지어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구약 시대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왔을 때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었는지가 사도행전 17장 30절에 나와 있습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필요한 심판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그런 하나님을 거룩하시다 할 수 있을까요? 말라기 시대의 유대인들은 실제로 하나님을 그렇게 비난했습니다.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말 2:17). 하나님의 정의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시다시피 율법주의자들은 은혜를 경멸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동생을 용서할 때 형이 화를 낸 이유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형은 율법주의자였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은혜를 경멸합니다. 긍휼을 경멸하고, 자비를 경멸하고, 용서를 경멸합니다. 그래서 말라기 시대에 이렇게 말한 겁니다.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악을 행하는 자들을 기뻐하시고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을 그들은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물은 겁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주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은혜를 선포한다면 분노를 일으킬 뿐입니다. 예수님이 은혜를 선포하셨을 때 그랬고, 바울이 은혜를 선포했을 때도 그랬습니다. 시편 78편 38절입니다.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미가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7:18). 주와 같이 죄를 용서하시는 신이 어디에 있느냐는 겁니다. 결코 그런 신이 있다고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있으신가요? 세계 역사의 모든 종교 가운데 용서와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과 같은 신은 없습니다. 그런 신을 절대 찾을 수 없습니다. 신들은 전부 진노, 징벌, 심판, 보복을 일삼을 뿐입니다. 하나님처럼 용서하시는 신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 신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역사 전체에서 계속 반복되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신가요? 하나님께는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로마서 3장 26절이 그 틀을 제공해 줍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들을 의롭다 하실 수 있을까? 하나님은 어떻게 의로우시면서 동시에 죄인들을 의롭다 하시는 분이 되실 수 있을까? 이것이 딜레마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자비로우시면서 동시에 거룩하시고 정의로우실 수 있을까요? 값싼 용서는 도덕적 악입니다. 어떤 범죄자가 유죄라는 걸 알면서도 무죄를 선고하는 판사가 있다고 해 봅시다. 범죄자에게 연민을 느껴서 그냥 놓아준다면 부패한 판사라고 비난을 받을 것입니다. 판사의 책임은 법을 수호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구약에는 하나님의 의가 두텁게 깔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또한 자신을 긍휼의 하나님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4장을 보면 하나님은 친히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하나님의 은혜는 수많은 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은혜로우시며 정의로우실 수 있으실까요?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 질문에 답을 줍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의와 정의를 보여줍니다. 누군가는 죽어야만 했습니다.

저는 그 점을 이렇게 설명하곤 합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살면서 지은 모든 죄에 대해 값을 치뤄야 합니다. 벌을 받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죄는 없습니다. 모든 죄에는 치러야 할 죄값이 있습니다. 죄인은 영원한 심판으로 그 값을 치르는 때가 옵니다. 그 값을 결코 다 치를 수 없어서 영원한 벌을 받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그 값을 다 치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이렇게 모든 죄에는 대가가 있지만, 하나님은 너무나도 자비하셔서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너무나도 정의로우셔서 자신의 의가 요구하는 완전한 희생제물로서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과거 역사를 돌아보며 기록을 바로잡습니다. 바울에 따르면 십자가는 과거로 돌아가 죄를 덮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구약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받았나요?” 그 때에도 살아계신 참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자신들이 죄인임을 알았습니다. 율법이 너무도 무거워서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습니다. 자신들의 행위에 확신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자비와 용서,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희생을 근거로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이 창조될 때부터 죽임당하신 어린 양이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는 우리의 시간 개념과 다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는 과거와 미래 모두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죄인이 의롭다고 선언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인간의 지혜로는 그 딜레마를 결코 풀 수 없습니다. 2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여기에서 “이 때에”는 신약시대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과거 구약 시대에는 이를 감추셨지만, 신약시대에는 나타내셨습니다. 그런 이유로 바울은 복음을 신비라고 부릅니다. ‘뮈스테리온’, 이 신비는 우리가 알아낼 수 없는 어떤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신비는 감춰져 있다가 드러난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십시오.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 입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분으로 입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으로 입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으로 드러났고, 동시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의롭게 하시는 분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구원을 성취하셨지만, 구원을 준비하시고, 방법을 마련하시고,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삼으셔서 그 희생을 받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십자가로 우리의 죄를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결코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비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을 처형하실 만큼 정의로우시다는 것을 보여주셨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레위기 1장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구약의 제사 제도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희생을 예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백만 마리의 무고한 짐승들이 제사에서 대신 죽었다는 사실은, 죄 없는 대리자의 최종적인 제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를 입증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간과하실 수 없다는 것과 반드시 죄를 심판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십자가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두 번째 방식이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내일 아침에 좀 더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둘째,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를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냄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27절부터 28절입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자랑할 데가 없고, 자신의 공으로 돌릴 수도 없고, 자축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계획하시고 실행하실 수 있습니다. 복음을 이해하는 데 있어 본질적이고 기초적인 것은, 해를 당한 사람이 그 침해를 없애기 위한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해를 당한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한 해를 없애기 위한 수단을 확립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을 저주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죄인으로 선포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해를 당했고,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당했습니다. 이것을 뒤집고 지우고 제거할 수 있는 수단을 결정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믿음으로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의롭게 하는 수단으로 삼으셨습니다. 그야말로 오직 은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오직 은혜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이미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은혜가 놀라운 이유는 우리 죄인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위대한 은혜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려주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십자가에서 나타났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하실 정도의 은혜입니다.

아시겠지만 마가복음 설교를 마무리할 때, 예수님이 고난주간에 겪으신 고난을 살펴봤습니다. 십자가와 관련된 쟁점들을 살펴봤습니다. 예수님이 겪으신 고난에 대해서 다시는 설교하고 싶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치르신 희생이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는지 깊이 경험하는 시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감람산에서 기도하실 때 예수님은 모세혈관이 터져 땀샘으로 피가 흘러나올 정도였습니다. 이는 죄값을 대신 치르시기 위해서 아버지에게서 분리되고 형벌을 받으시는 것이 예수님께도 얼마나 큰 부담이었는지가 생리현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이 기도를 두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약해지셨던 순간이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그렇게 말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께도 죄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이 약해져서 하신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잔은 예수님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예상하실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받으시기 전에 엄청난 공포를 느끼신 것이 분명합니다. 제 생각에 예수님은 정오부터 세 시까지의 어둠 속에서, 세 시간 동안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온전히 감당하셨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 혼자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받아야 하는 죄에 대한 형벌을 단 세 시간 안에 감당할 수 있었단 말입니까?” 지옥에서도 다 받을 수 없는 수많은 영혼들의 영원한 형벌을 어떻게 예수님이 세 시간 만에 전부 감당하셨을까요?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예수님 자체가 무한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감당하실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오직 은혜가 드러납니다. 제가 “두 아들 이야기”라는 책을 쓰고 설교했던 때가 떠오릅니다. 그 비유에서 아버지는 달려나와 더러운 죄인을 껴안습니다. 절대적인 겸손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인간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십자가만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만족시키고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십자가도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율법이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이 의에 이르도록 하심으로써 자신의 의를 나타내셨습니다.

셋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일관성을 보여줍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조금 살펴보았습니다. 바울은 이 위대한 진리를 붙잡기 위해 일종의 순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를 보여줍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하나님의 일관성을 보여줍니다. 2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절부터 30절입니다.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구원에 이르는 길이 두 가지인가요? 유대인의 방법과 이방인의 방법이 따로 있습니까?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고, 이방인들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일까요? 그렇게 말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전통적인 세대주의 진영에서 자란 분은 그렇게 배우셨을 겁니다. 하지만 29절이 확증하는 것은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죠. 이사야 54장 5절입니다. “그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실 것이라.” 예레미야 16장 19절입니다. “민족들이 땅 끝에서 주께 이르러.” 막힌 담이 허물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따로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30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여기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앞부분은 모두 수식하는 말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은 세상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다른 신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십니다. 신명기 6장 4절입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하실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믿음이 있다면 의롭다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 역사 속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여러분이 세대주의를 어떻게 생각하실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 문제에 있어서 과거에 사로잡혀 있다면, 인류 역사의 전체에서 동일하신 한 분 하나님이, 믿음을 통한 은혜라는 한 가지 방식으로 사람들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알기를 바랍니다. 구원은 항상 믿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행위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항상 은혜를 통해서였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구원 받을 만한 어떤 가치가 있었던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었는데도 하나님은 자신의 의를 은혜의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생겨나기 전에도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고, 모세도 은총을 입었으며,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은혜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항상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방식을 바꾸셨다고 비난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불변성입니다. 이 불변성은 하나님의 모든 섭리에 나타납니다.

마지막 요점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을 만족시킵니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정의와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일관성을 선포한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또한 십자가는 하나님의 율법을 확증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해 봅시다. “얘야, 난 네가 너무 안쓰럽구나. 그러니 그냥 용서해 줄게.” 이 말은 “하나님은 당신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십니다”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복음을 마치 기도를 조금만 하면 모든 것이 짠 하고 해결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율법은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사람은 죽습니다. 그렇죠?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겔 18:20). 또 갈라디아서 3장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10). 하나님이 은혜로 용서하시고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 자신의 의를 주신다는 말에 31절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율법은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율법의 요구사항은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정당한 형벌은 어쩌라는 겁니까?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복음을 보면 하나님의 거룩한 정의에 의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죄값이 요구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값을 우리가 치르거나 그리스도가 치르거나 이 둘 중의 하나입니다. 찬송가 가사 중에 이런 가사가 있죠. “주님은 나의 구주, 주님 안에 하나님의 자비가 있다네.” 저는 죄인의 입장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일관성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는 거룩도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울의 복음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내 복음’입니다. 참으로 아름답고도 장엄하지 않습니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반응입니다. 어젯밤 예배 시간에 부르는 찬양을 들으면서 우리 모두가 정말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자신에 관한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우리가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토록 놀라운 구원을 허락하신 하나님은 찬양 받으시기 합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우리에게 말씀을 허락해 주시고 이 아침 우리를 새롭게 하시니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찬미하고, 흠모하고, 사랑하고, 찬양하기 원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좋은 선물에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복된 하루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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