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이사야 53장을 살펴볼 수 있는 특권이 다시 주어졌습니다. 벌써 오늘로 9번째 시간입니다. 다음 주일 아침에 10번째 시간으로 이번 시리즈를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리즈에서 말씀드린 것은 제가 53장을 통해 배운 것의 100분의 1도 되지 않습니다. 이 장에 담긴 무한한 깊이와 높이와 너비와 길이를 이제 막 알아가기 시작한 것 뿐이라는 것을 꼭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사야 53장은 그 깊이와 너비가 무궁무진합니다. 하려고만 한다면 말 그대로 한 절 한 절 설교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이사야 53장은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졌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위대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견줄만한 다른 장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700년 전에 예수님의 성육신과 낮아지심, 높아지심에 대한 일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3장은 그야말로 놀랍습니다. 이사야 53장을 10주에 걸쳐 살펴보고 있지만 이 모든 것조차 그저 맛보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이사야 53장을 부지런히, 충실하게 연구해 보시면 참 좋겠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일에 제가 말씀드릴 결론 그 이상을 여러분이 알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사야 52장 13절부터 53장 12절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부분의 주제는 여호와의 종입니다. 여호와의 종인 메시아에 대한 노래입니다. 이것을 ‘종의 노래’라고 한다고 말씀드렸죠.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메시아를 보내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것은 네 번째 종의 노래입니다. 이사야서에는 종의 노래가 총 네 편 실려 있습니다. 이사야 42장과 49장, 50장, 그리고 52장 13절부터 53장 12절에 있는데, 이 네 번째이자 마지막 노래가 메시아에 대한 강력하고 완전한 예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 전체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완전하고 포괄적인 예언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약 연구를 시작할 때 ‘구약에 예표된 그리스도’라는 제목을 붙였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포괄적이고도 완전하게 발견할 수 있는 이사야 53장에서부터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이 부분이 오늘 아침에 다룰 주된 내용이긴 하지만 다른 곳부터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24장을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4장을 펴 주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24장을 보면 예수님이 엠마오로 향하는 길에 계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첫 번째 일요일이고 부활하신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몇 명의 제자들과 함께 엠마오로 향하는 길에 계십니다. 이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사실에 슬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5절부터 27절입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주님의 말씀대로라면 메시아의 사역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고난과 영광, 즉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입니다. 제자들은 이것을 알고 있었어야 했습니다. 선지자들이 이미 예언한 내용이기 때문이죠. 구약의 선지자들은 메시아가 고난으로 묘사되는 사역과 영광으로 묘사되는 사역을 할 것이라고 이미 예언했습니다.
엠마오에서 제자들을 만나신 날 예수님은 나머지 제자들도 만나셨습니다. 44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모세의 율법, 선지자의 글, 시편은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구약의 세 부분이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고난을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의 메시아 사상에는 없는 부분입니다. 유대교 신학자들은 메시아의 영광에만 초점을 맞추고 고난은 외면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분명하게 밝히신 것은 자신이 고난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이고, 기꺼이 그 고난을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는 이미 그 고난을 받으신 상태였습니다. 유대인의 메시아 사상에는 고난이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유대인들의 모든 문헌을 철저하게 검토해 보아도 메시아가 와서 자신들의 죄를 위한 희생제물로서 고난을 받으리라고 믿었다는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유대인의 메시아 사상에는 영광만 있었습니다. 메시아가 왕국을 건설하고 이스라엘을 적으로부터 구원하실 것이라고 기대했죠. 고난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선지자들이 전한 바를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고, 부활하여, 영화롭게 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메시아의 생애 전체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시는 것과 부활하시고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0-11절입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고난과 영광 이 두 가지를 제쳐 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고난과 영광은 메시아의 생애와 사역을 구성하는 요소입니다. 그리고 고난과 영광으로 구약 성경에 담긴 메시아에 대한 모든 예언을 요약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메시아 예언 요약본인 셈이죠. 율법서와 선지서, 성문서 등 구약 전반에서 메시아의 고난과 낮아지심에 대한 내용을 찾을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메시아의 영광과 높아지심도 구약 전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약에서 고난과 영광의 두 가지 주제가 가장 또렷하고 자세하게 묘사된 곳은 다름 아닌 이사야 52장 13절에서 53장 12절까지입니다.
이 장은 구약에서 메시아 예언을 가장 완전한 형태로 담고 있습니다. 메시아가 태어나기 700년 전에 기록된 예언에 메시아의 생애가 자세히 담겨 있는 겁니다. 그 내용이 완벽하게 정확하다는 것은 역사를 통해 입증되었습니다. 이사야 53장은 구약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기에 가장 완벽한 장입니다. 이 장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메시아가 두 번 오신다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초림에서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보여주고, 재림에서 높아지심과 영광을 보여줍니다. 초림 때는 죄를 위한 희생제물로 오시고, 재림 때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오십니다. 이러한 초림과 재림은 구약의 예언들을 통해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53장에는 신약에서처럼 초림과 재림이 결합되어 나타납니다.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이사야 53장 10절부터 12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네 번째 종의 노래를 구성하는 다섯 개의 연 중 마지막 연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종을 다시 만납니다. 종은 야훼의 종이자 여호와의 종, 주님의 종입니다. 바로 메시아죠. 첫째 연에서 종은 놀라운 종으로, 둘째 연에서는 멸시당한 종으로, 셋째 연에서는 대속물이 된 종으로, 넷째 연에서는 잠잠한 종으로, 잠잠히 도살당하는 종으로 묘사됩니다. 이제부터 살펴볼 다섯째 연에서는 높아지신 종으로 묘사됩니다.
마지막 연인 10-12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네 번째 노래의 시작 부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사야 52장 13-15절입니다. 차례로 읽어보겠습니다. 먼저 이사야 52장 13절입니다.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13절에는 주의 종, 메시아에 대한 수수께끼 같은 진술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메시아, 내 종, 야훼의 에베드, 하나님의 종을 만나게 됩니다. 완전한 순종을 했기에 하나님의 종이라 불리고 있죠. 여기에서 우리는 메시아의 신성을 발견합니다. 메시아는 곧 하나님이십니다. 13절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여기서 메시아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세 개의 동사는 이사야 6장에서 하나님을 묘사하는 데 쓰인 동사와 동일합니다. 또한 요한복음 12장에 따르면 이사야 6장에 나오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환상은 예수님에 대한 환상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메시아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하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메시아는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될 것입니다. 이 영광은 유대인의 메시아 사상에도 담겨 있습니다. 메시아는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입니다. 메시아는 말 그대로 왕이나 군주들, 통치자들의 입을 다물게 할 것인데, 메시아의 위엄과 영광에 놀라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직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될 것이고, 아직 듣지 못했던 것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는 유대인의 영광스런 메시아 사상과 잘 부합합니다. 메시아는 하나님이십니다. 유대인들이 분명하게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여기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메시아는 존귀하게 될 것입니다. 메시아는 성공을 거둘 것입니다. 형통할 것입니다. 그것이 13절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메시아는 세상을 정복하실 것입니다. 나라들을 정복하실 것입니다. 메시아는 위엄과 영광으로 다스리시면서 그들이 듣지 못했고 보지 못했던 것들을 말씀하시고 행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14절에는 수수께끼가 하나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그 영광으로 인해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지만, 또한 가장 상한 모습으로 인해서도 놀라게 할 것입니다.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두 번이나 메시아를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13절의 메시아는 하나님이고, 14절의 메시아는 사람입니다. 메시아는 하나님으로서는 높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며, 사람으로서는 상하고 망가지실 것입니다. 메시아의 모습은 다른 어떤 사람보다, 다른 어떤 인간보다 심히 상했습니다.
참으로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습니다. 네 번째 종의 노래가 시작되며 주어진 수수께끼입니다. 이 분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이 분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입니다. 언뜻 보기에 이 신비는 풀리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어떻게 이리도 영광스럽고 놀라운 구원자 하나님이, 동시에 가장 참혹하게 상하고 가장 망가진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이 모든 일의 결과로 15절에서처럼 영광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이 분은 누구이며,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메시아는 높아지기도 하시고 낮아지기도 하실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빌립보서 2장이 말하는 바입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 후에 메시아는 아버지로부터 높임을 받으실 것입니다.
종이 고난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의 종이 낮아지고 또한 높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종의 낮아짐과 높아짐은 모두 하나님이 네 번째 종의 노래에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야훼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고난받는 종, 모습이 상한 메시아는 힘없는 희생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아버지께 택함받은 승리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성령을 힘입어 고난과 영광을 모두 감당하십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이 13절부터 15절에 나오는 수수께끼에 대한 답이 53장에서 주어집니다. 이 본문은 메시아의 고난과 그 목적, 영광과 그 목적을 모두 설명합니다.
이사야 53장은 가장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야훼의 종이 죄인들을 위해 죽음으로써 구원을 가져다 주신다는 좋은 소식입니다. 종의 죽음만이 이 세상의 죄를 담당할 수 있는 유일한 희생제사입니다. 이 놀라운 계시는 52장 13절부터 15절에서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면서 시작되고, 53장 11-12절 중간에서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시면서 끝납니다. 하나님이 직접 이 엄청난 계시를 시작하시고 끝내십니다. 하나님은 52장 13-15절을 통해 계획을 약속으로 알려주시고, 마지막인 11-12절에서 그 약속이 성취될 것을 재차 확인해 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종, 즉 메시아의 높아짐과 낮아짐을 모두 계획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일어난 모든 일은 하나님의 계획이 정확하게 이루어진 것이지 예상 밖의 불행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자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선포되고 그 목적이 재차 확인되는 그 사이에, 다시 말해서 네 번째 종의 노래가 시작되고 끝나는 사이에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부분이 등장합니다. 53장 1절부터 11절 상반절까지입니다. 새 시대를 여는 회개의 고백입니다. 여호와의 종을 거부하고 증오했던 것을 미래 세대의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있습니다. 2주에 걸쳐서 그 부분을 살펴보았죠. 1절의 시작 부분부터 나오는 모든 동사들이 과거 시제입니다. 그리고 과거 시제가 계속 이어집니다. 무슨 뜻일까요?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돌아보는 예언인 것입니다.
53장 1절부터 11절 상반절에는 미래에 일어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분명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사건을 되돌아보고 자신들이 잘못했음을 깨닫고는 이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1절부터 11절은 기본적으로 온 이스라엘이 고백하게 될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될 것입니다.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게 될 것이고,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릴 것이며, 이스라엘 전체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고백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미래에 구원받을 것이라는 약속은 예레미야 31장의 기초가 되는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은 에스겔 36장 22절부터 29절에서 반복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시며,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십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미래에 구원받으리라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스가랴 12장 13절에서 반복됩니다. 바울은 이 모든 것을 로마서 11장 25절부터 27절에서 재차 확실하게 합니다.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스라엘 국가가 미래에 구원을 받으리라는 확실한 약속입니다.
스가랴도 그 날을 묘사합니다. 그 날이 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영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그 순간 이스라엘은 생명과 통찰력을 얻게 되고, 자신들이 유일한 구원자를 거부하고 죽이고 미워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생각을 바꾸고 돌아서서 이사야 53장의 표현대로 고백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찔리신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예수님이 상하신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같았습니다. 예수님이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지신 것은 마땅히 형벌 받을 우리의 허물 때문이었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미래에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 받게 될 구원은 구약에서 약속되고 신약에서 반복됩니다.
여담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국가적 구원을 ‘전천년설’이라는 접근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신학자들, 특히 무천년설을 지지하는 신학자들은 이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미래적 구원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바를 피할 길은 없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예레미야와 에스겔, 이사야, 스가랴를 모두 없애버려야 할 겁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도, 로마서의 내용도 모두 없애버려야 할 겁니다.
물론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국가적 구원은 매우 분명한 사실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17세기 종교개혁자들과 이후 청교도들은 미래에 있을 이스라엘의 구원을 믿었습니다. 1564년에 하나님 품에 안긴 장 칼뱅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방인들이 돌아올 때, 유대인들도 변절을 버리고 믿음과 순종으로 돌아올 것이다. 이스라엘 전체를 구원하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그렇게 완성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에 따라 유대인들은 장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기에 이스라엘의 구원을 놀라운 방식으로 선포하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은혜는 결코 헛되지 않다.”
함께 제네바 성경을 번역했던 칼뱅과 동료들은 로마서 11장에 이런 주석을 달았습니다. “주님이 유대인 중에서 택하신 사람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유대인의 눈이 먼 것이 보편적인 것은 아니며, 또한 유대인의 이 눈멂이 영원히 지속되지도 않을 것이다. 언젠가 그날이 오면, 유대인 역시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처럼 이제껏 완고하게 거부해 왔던 것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제네바 성경 번역 작업에 참여했던 번역가와 학자, 신학자 모두가 이스라엘의 미래적 구원을 확증했습니다. 또한 수많은 청교도들 역시 같은 입장을 취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신 분들도 동일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찰스 하지와 로버트 할데인 같은 신학자들과 마틴 로이드 존스, 찰스 스펄전 등의 설교자들이 그랬습니다. 1616년부터 1683년까지 살았던 존 오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기도와 굴욕의 날이 계속되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오랜 백성인 유대인들의 약속된 회심이 빨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신실한 성경 해석자들은 모두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청교도 신학자 토마스 보스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의 국가적 회심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지금 깨닫지 못해 버림받은 유대인들은 마침내 회심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이스라엘을 보고 있는 우리에게는 엄청난 소식 아닌가요? 이안 머레이에 따르면 유대인들의 미래에 대한 동일한 믿음이 17세기 청교도 문헌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문헌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18세기 미국의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 역시 이스라엘의 국가적 구원을 단언합니다. 성경을 신실하게 연구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를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있듯이, 그 날이 오면 유대인들은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의 표현 그대로 고백하거나 비슷하게 고백할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그때가 오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찔렀던 분을 바라보고 생각을 바꾸게 될 것입니다. 회개의 고백이 흘러나올 것입니다. 4절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범한 죄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었고 예수님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지신 것은 마땅히 형벌 받을 우리의 허물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고백은 11절 상반절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 주어집니다. 11절 하반절부터 12절까지에서 하나님은 이 고백을 확인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 고백이 참된 고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1절 하반절부터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11절 하반절부터 12절까지입니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의 고백이 정말로 정확한 고백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확인해주시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직접 자기의 종에 대한 이스라엘의 궁금증, 즉 어떻게 낮아지고 또한 높아지실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고 계신 겁니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이제 12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메시아의 높아지심입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큰 그림을 이 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미래 세대의 유대인들은 저와 여러분이 이미 고백한 대로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자이고,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와 죄인들을 위한 대리적이고 대속적인 희생제사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지게 하려고 하나님이 택하신 어린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의 다른 이름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이제 복습을 마무리하고 마지막 연을 살펴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여호와의 종의 죽음이 가져다주는 유익을 사람의 관점에서 살펴보았습니다. 11절 중간까지가 그렇습니다. 11절 중간부터 12절에서는 관점이 바뀝니다. 이제 우리는 유대인이나 죄인들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듣게 됩니다. 유대인들의 고백이 진실하다고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겁니다. 더 잘 이해하려면 다시 10절로 가야 합니다. 10절을 보겠습니다.
10절은 여호와께서 종에게 행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구원론적 관점에서 완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을 하는 미래 세대의 유대인들이 십자가의 중요성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을 거라는 겁니다. 이 구원론에는 빠진 것이 없습니다. 완전한 복음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이유는 이 예언이 그리스도가 오시기 700년 전에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수천 년 후에 유대인들이 십자가를 온전히 이해하게 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제 실상을 알고 있습니다. 10절을 보면 유대인들은 여호와께서 메시아를 상하게 하시기를 원하셨고, 질고를 당하게 하셨고, 그를 속건제물로 드리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전부 이해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죄인들을 대신하는 그리스도의 대리적이고 대속적인 속죄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핵심 교리를 이해합니다. 유대인들은 죄를 알지 못했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죄인이 되셨음을 이해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몸으로 감당하셨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이제 유대인들은 이해합니다. 유대인들은 신약의 서신서들이 자세하게 설명하는 바를 이해합니다. 히브리어로 주님을 의미하는 야훼는 테트라그라마톤으로, 주님 자신의 이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한글 성경에는 없지만 이 문장은 접속사 “하지만”으로 시작합니다. “그렇지만”이 될 수도 있습니다. 9절과 연관시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완전히 거룩하시고, 완전히 의로우시며, 완전히 무죄하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예수님께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상함을 받고 질고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상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질고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끔찍한 일이 자기 종에게 일어나게 하신 겁니다. 물론 예수님을 부당하게 상하게 한 것은 유대인입니다. 앞절에서 살펴보았죠.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을 했습니다. 예수님께 부당한 재판을 하고 잔인하게 폭행했으며, 학대했고, 괴롭혔고, 주먹질도 했고, 뺨도 때리고, 매질을 가했습니다.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는 못을 박고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예수님께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을, 죄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을 하면서 그렇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본문을 보면 하나님도 메시아를 상하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인간은 최악의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와 동시에 하나님은 최선의 일을 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인간은 죄가 없으신 분을 향해 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을 하고 있고, 하나님은 죄인들을 위해 하실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사도행전 2장과 4장에 따르면 하나님의 목적과 뜻에 따라 예수님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뜻에 따라 예수님의 죽음이 결정되었습니다.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리스도에게 지우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를 상하게 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가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끊어지게 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에스겔 18장에 따르면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도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의로운 자기 종이 죽는 것은 기뻐하십니다. 이사야 53장 11절에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나의 의로운 종”이라고 부르십니다.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죄 없는 이의 죽음은 온전히 기뻐하십니다.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하나님의 기쁨이 드러나고, 그리스도의 상함에서 하나님의 기쁨이 드러나며, 그리스도의 질고에서 하나님의 기쁨이 드러납니다.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이라는 표현에 대해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은 매우 강한 표현으로, 그리스도를 고통스럽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병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존재 자체를 완전히 쇠약하게 할 정도로 극심한 고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종을 상하게 함으로써 죽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고통스럽고 괴로우며 극심한 질고를 당하셨으며,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한편,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선의의 순교자로서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순교자는 이런 식으로 죽지 않습니다. 물론 순교자들도 화형을 당하는 등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했지만, 순교 역사를 연구해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존 폭스의 순교자 열전>에는 수천 명의 순교자들이 나오는데, 교회 역사 속의 순교자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죽었습니다. 찬송을 부르며 죽었습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을 자신 있게 고백하면서 죽었습니다. 가슴에 소망을 품고 죽었습니다. 기쁨으로 죽었습니다. 은혜가 주는 위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교자들은 따뜻한 은혜가 주는 평안과 위로 가운데 죽었습니다. 성령에 휩싸여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죽었습니다. 은혜가 주는 평안과 위로 가운데 죽었습니다. 순교자들은 죽는 순간 하늘을 맛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달랐습니다. 유월절을 지내면서도 누구도 찬송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성경 말씀을 낭독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어떤 위로도 없었습니다. 성령님도 하나님도 아무런 위로를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은 은혜가 주는 평안한 위로 가운데 죽지 않으셨습니다. 율법이 자행하는 가차없고 냉혹한 공포 속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그러지지 않는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 죽으셨습니다. 아무런 위로 없이 하나님의 분노만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은 지옥을 맛보며 죽으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 어떤 신자도 그렇게 죽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불신자는 그렇게 죽습니다. 모든 신자는 천국을 맛보며 죽습니다. 모든 불신자는 지옥을 맛보며 죽습니다. 예수님은 지옥을 맛보며 죽으셨습니다. 위로도, 은혜도, 자비도 없이 불신자처럼, 불신자와 똑같은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이사야 53장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잘 알게 됩니다. 메시아의 죽음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전히 의문이 남습니다. 하나님은 왜 기뻐하셨을까요? 왜일까요?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은 기뻐하실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은 어떻게 그런 괴로움과 고통을 아들에게 주시면서 기뻐하실 수가 있으실까요? 하나님을 기쁘게 한 것은 결과이지 고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상하고 슬픔에 빠졌을 때 하나님이 느끼셨던 기쁨은 아들에게 가해진 고통 때문이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고통이 아니라 아들이 이루어 낸 것, 아들의 고난이 아니라 고난으로 인해 이루어진 구원이 아버지를 기쁘게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사야 53장이 말하는 바입니다. 여호와께서 왜 아들이 상함 받기를 원하셨을까요? 무엇 때문에 아들을 상하게 하고 질고를 당하게 하시는 것을 기뻐하셨을까요? 히브리어 원문의 문자적 의미로 보자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속건제물로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아들의 생명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한 것은 결과이지 고통이 아닙니다. 고통과 괴로움은 꼭 필요한 과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율법과 진노가 쏟아내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 죽으셔야 했고 거기에는 그 어떤 위로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상함을 기뻐하셨던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이루신 속죄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담으로부터 세상 끝날까지의 모든 신자들을 위해 속건제물이 되셔서 온전한 공의를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장차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대해서도 온전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고백하게 될 내용이 더 있습니다. 10절 하반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그런데 그리스도는,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어떻게 죽은 사람이 씨를, 그 후손을 보게 본다는 걸까요? 그의 날이 길 것이라고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신다고요?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한다고요? 이 말은 예수님이 살아계시다는 뜻입니다. 살아 계셔야만 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부활의 고백입니다. 부활을 대를 잇는 것에 빗대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가 씨를 보게 되며.” 예수님이 자신의 후손을 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미래시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제 유대인들은 미래시제로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행하신 일의 결과를 보게 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후손을 보게 되실 것입니다. 분명 대를 잇는 것에 대한 비유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 후손을 보게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지나칠 정도로 조상에게 집착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족보를 확인할 수 있는 웹사이트도 있죠? 후손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만들어낸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자녀를 보고 싶어요. 자녀들이 결혼하는 걸 보고 싶어요. 손주도 보고 싶어요. 손주들의 손주까지도 보고 싶어요. 제 후손이 계속 이어지는 것을 보고 싶어요"라고 말이죠.
저는 개인적으로 주님 앞에 신실한 세대가 언제까지 나올지 보고 싶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이어질지, 후손들이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살게 될지 정말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마 그렇게까지 오래 살지는 못하겠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복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대홍수 이후부터는 1대, 많으면 2대가 이어지는 것을 볼 정도로 오래 살면 복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자녀들과 손주들을 보고 있기에 복받은 사람입니다. 증손주까지 볼 수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저도 언젠가는 죽게 될 테니까요, 그 후의 후손을 본다는 건 분명 불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만일 예수님이 자신의 후손을 보게 되실 것이며 자손을 보게 되실 것이라면, 오랫동안 살아계셔야 한다는 뜻이고 또 그렇게 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날은 길 것입니다. 이 표현은 히브리어로 긴, 영속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살아계십니다. 로마서 10장 9절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이것이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후손을 보실 것입니다. 미래의 여러 세대들을 보실 것입니다. 그 모두를 보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살아계셔야만 합니다. 다스리시고 높아지시려면 말이죠. 저는 이 말씀이 참 좋습니다. 히브리서 2장 9절입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10절입니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영적 후손을 보실 것입니다. 영광으로 이끌어간 모든 사람들을 보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39절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예수님은 모든 후손을 볼 때까지 살아계실 것입니다. 살아계셔서 자손들을 보실 것입니다. 신부가 완성되는 모습을 보실 것입니다. 영광으로 들어가는 무리를 보실 것입니다. 자녀들을 보실 것입니다. 놀라운 현실입니다.
예수님은 형통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 52장 3절 “내 종이 형통하리니”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이는 10절 하반절에서 다시 강조됩니다.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은 무엇일까요? 여호와께서 예수님을 상하게 하셔서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보게 되실 것입니다. 보실 뿐만 아니라 그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여호와의 기뻐하시는 뜻을 예수님이 성공적으로 이루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그리스도의 사역이 온전히 성취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실 때 기뻐하십니다. 죄인들을 구원하시면서 기뻐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도살하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상하게 하는 것을 기뻐하신 이유는, 이렇게 하셔서 하나님께 영원히 찬양과 영광을 돌릴 죄인들을 구원하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 말하듯이 이 모든 것, 즉 구원 사역 전체의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사야 53장 11절에서 마지막 고백을 합니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그가 무엇을 본다고 합니까? 주의 종은 구속의 계획이 완성되는 것을 볼 것입니다. 여호와의 기뻐하시는 뜻이 성취되는 것을 볼 것입니다. 자기의 영적 후손들을 볼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모여드는 것을 볼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드리신 속죄제사에 만족하시고, 그리스도는 자기의 자녀들 모두가 자신의 보좌를 둘러서는 것을 보고 만족하실 것입니다. 영적 자녀들, 모든 세대의 구속된 자들, 그리스도가 영원히 사랑하시는 자들,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부, 그리스도의 영원한 아들들과 딸들이 그리스도의 임재와 영원한 천국의 영광 안에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경배하며 높이고 섬길 것입니다. 그리고 특히 그리스도는 외도한 아내 이스라엘의 구원을 보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사야 62장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나는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하나님은 미래에 있을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는 말 그대로 자기 영혼이 수고한 것의 결과로 이스라엘을 포함한 영적 후손들을 보고 만족하실 것입니다. 좀 다르게 번역하면 그리스도께서 최고로 즐거워하실 것입니다. 종은 자기 자녀들에게 의와 구속, 용서, 영원한 천국을 주셨다는 것에 온전히 기뻐하시며 만족하실 것입니다. 그 날은 어떤 날이 될까요?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 11절 하반절부터 주어집니다. 이 마지막 부분은 다음 주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배를 마치기 전에 특별한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몇 년 전에 돈 그린, 낸시 그린 부부와 가족이 우리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린 목사님은 신시내티에 있는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르심을 받아 우리 공동체를 떠납니다. 훌륭한 공동체가 있는 교회입니다. 오늘 아침에 그 교회 리더들이 우리와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분들을 환영하고, 장로님들과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그린 목사님을 떠나보내면서 격려의 말씀을 해 드리고 싶습니다. 저희는 목사님을 지지하고 있고, 사랑하고 있으며, 신뢰하며 믿습니다. 그리고 이 부르심이 목사님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확실히 하고자 합니다. 첫 예배 때와 마찬가지로, 여기에 계신 장로님들과 함께하고자 합니다. 그린 목사님, 앞으로 나와 주시고, 오늘 함께 예배 드리신 장로님들은 그린 목사님 주변에 함께 둘러서 주시기 바랍니다. 대부분 장로님들은 처음부터 돈 목사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린 목사님은 우리 사역에 헌신된 일꾼이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목사님을 알고 계시고, 목사님과 그 가족을 매우 사랑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님의 신실한 종에게 행하시는 일을 기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이 소중한 분들의 손을 잡고 기쁜 마음으로 축복하려 합니다.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말이죠. 우리는 그린 목사님과 목사님의 사역을 그리워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목사님을 보내드리는 것이 목사님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라고 진심으로 믿습니다. 오늘 아침 그렇게 선포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오늘 예배를 마무리하며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 주권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노래했고, 보았고, 말했고, 읽었고, 선포했습니다. 선지자들이 아버지의 주권을 선포하는 것을 들었고, 아버지께서 직접 그 주권을 선언하시는 것도 들었습니다. 주님, 주님은 먼저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시고, 주님의 교회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목자로 부르심을 받아 맡겨주신 주님의 교회를 돌보며 이끕니다. 그린 목사님도 그렇게 부르신 줄 압니다. 지난 몇 년간 목사님과 함께 사역하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목사님과 가족들의 삶에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셔서 다음 단계로 이끄시고 사역이 풍성해질 것을 믿습니다.
그린 목사님을 맞이할 공동체가 목사님과 가족들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하옵소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 능력으로, 우리가 간구하고 생각할 수 있는 그 모든 능력보다 뛰어나고 풍성하게 역사하여 주옵소서.
목사님이 목회하실 신시내티에서 일어나는 부흥이 근처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퍼지게 하옵소서. 목사님에게 능력을 주시고 놀라운 방식으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 선택된 종들의 삶에 우리 교회가 후원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음을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님들이 그린 목사님 가정을 후원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모든 일이 이제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들의 시작에 불과하게 하옵소서. 목사님을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으로 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목사님을 세우고 성도들과 더불어 유업을 받게 할 것입니다. 목사님이 파송되는 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리며 복된 소식을 기대합니다.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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