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이사야 53장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을 펴도록 하겠습니다. 이 위대한 장은 여러 측면에서 구약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이사야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이사야서는 66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흥미롭게도 성경 전체를 구분하는 방식과 동일한 방식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으로 나뉘고, 이사야서 역시 전반부 39장, 후반부 27장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는 그 양식과 내용에 있어 현존하는 히브리어 시 중에서 최고 수준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대선지서 중에서도 가장 위대하고, 소선지서 전부를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만일 신약성경이 모두 소실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기록만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사야 53장에서 죄인을 온전히 구원으로 이끌 수 있는 신학적 교리를 충분히 찾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은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높아짐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은 이사야의 지성소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에는 놀랍고도 무궁무진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제가 계속 말씀드렸던 것이죠. 이사야 53장은 일종의 예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가 받은 미래에 대한 환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과 우리에게 친숙한 성경 인물들은 환상을 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모세는 느보산 위에서 이스라엘 땅을 바라볼 때 환상을 보았습니다. 어떤 점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그 땅을 차지하기 전에 먼저 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미래를 보았는데 그리스도의 날을 보며 기뻐했습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며 대면했고,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을 들었습니다. 순교당한 후에 가게 될 낙원을 미리 본 것이죠. 사도 요한도 여러 차례 환상을 보았습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한 미래의 땅과 하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에스겔은 아직 오지 않은 심판을 고대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변화산에 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영광을 미리 보았고 그 영광에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보는 이 모든 놀라운 환상 중에서 이사야가 받은 놀라운 환상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물론 엄밀히 말해서 신학적 의미로 정의되는 ‘성경적 환상’에 의하면 그것은 환상이 아니라 직접 계시였습니다. 그럼에도 이 직접 계시를 통해 이사야는 마치 환상을 본 것처럼 십자가 사건과 그 의미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 누구보다 큰 특권을 받았습니다.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기도 전에 갈보리 언덕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담긴 의미를 그 누구보다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사야는 복음의 선지자요 십자가의 선지자입니다.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들이 신약성경 곳곳에서도 예언되고 있지만, 이사야서만큼 그 모든 내용이 기록된 곳은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에게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역사적 기록만 남게 된다고 해도, 이사야 53장 단 한 장 만으로도 그 안에 담긴 신학적 의미를 찾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을 복음의 요약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죄인이 심판으로부터의 구원과 죄를 용서받기 위해 필요한 모든 내용이 이사야 53장에 요약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이사야 53장은 그 이상입니다. 이사야 53장은 선지자들에게 보여주신 모든 계시 중에서 가장 심오합니다. 이사야 53장은 갈보리 언덕에 대한 단순한 예언 그 이상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단순한 예언 그 이상입니다. 이사야 53장은 갈보리와 십자가를 지나 인류 역사의 마지막 때를 배경으로 합니다. 십자가 사건의 먼 훗날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때보다도 훨씬 미래에 있을 인류 역사의 마지막을, 이스라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올 때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재림하셔서 지상에서 불경건한 자들을 멸하실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 왕으로서 다스리실 것입니다. 믿는 이스라엘과 구속받은 이방인들을 그 나라로 데려가실 것이며, 구약에 나오는 나라에 관한 모든 예언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점에서 우리는 이사야 53장을 통해 갈보리 언덕을 넘어 시대의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인류 역사 마지막에 유대인들이 하게 될 고백을 듣고 있는 겁니다. 십자가를 돌아보며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을 얼마나 잘못 판단했는지 고백하게 될 겁니다. 이것은 마치 시간여행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미래로 가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시점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시간여행입니다. 이사야가 했던 일은 먼 미래를 향해 나아갔던 것으로서, 이스라엘이 자신들이 찔렀던, 못 박았던 그분을 돌아보고 그를 위해 애통하게 되면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릴 것을 바라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스가랴 12장 10절과 13장 1절이 진술하는 바입니다. 이사야는 먼 미래의 끝, 즉 이스라엘이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메시아, 곧 영광의 주를 깨닫게 되는 때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예언은 엄청난 종말론적 사건, 즉 유대인들의 국가적 회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스가랴는 유대인들 중 3분의 2가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3분의 2는 심판을 받을 것이고 멸망할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 중 3분의 1은 예수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이런 일이 곧 일어난다면, 유대인들 중에서 4-5백만명 정도가 택하신 나라의 구원받은 백성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믿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주님이자 구원자로 인정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미래의 유대인들은 확실하게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죽음을 자신들을 위한 대리적이고 대속적이고 희생적인 죽음으로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죽으셨다 부활하시고 높아지신 예수님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은 유대인들이 미래에 하게 될 고백입니다. 하지만 이 고백은 구원받을 모든 죄인이 해야만 하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함께 있는 이유는 이 고백을 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 생각과 우리 입술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이사야 53장의 어조는 매우 슬프고 침울하고 애통스럽고 비참합니다. 왜 그럴까요? 유대인들의 미래 세대가 과거를 돌아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고, 자신들의 메시아를 너무 늦게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이 오면 유대인들은 이 장에 기록된 대로 고백할 것입니다. 제가 다시 읽겠습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이사야가 구약의 가장 위대한 책이라고 한다면, 이사야 53장은 가장 위대한 장입니다. 이 장에서는 “많은”이라는 단어가 다섯 번 나옵니다. 이 장에서 “많은”은 여호와의 종이 행하시는 놀라운 속죄의 수혜자들을 가리킵니다. 수혜자는 많지만, 메시아는 혼자입니다. 11절을 보면 메시아는 홀로 의로운 종입니다. 죄인들은 많지만, 완전한 속죄를 주시는 분은 한 분이십니다.
신약성경 저자들도 “많은”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에게 주기 위해 왔다고 언급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 15절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이 많은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저자 역시 히브리서 9장 28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한 사람과 많은 사람이라는 개념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마태도, 마가도, 바울도, 히브리서의 저자도 이사야 53장을 직접적으로 인용한 것은 아니지만 그 개념을 가져다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11절을 보면 의로운 종 한 명과 많은 죄인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죄인은 많지만 의로운 종은 한 명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참된 고백입니다.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구원에 이르는 모든 고백의 특징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구원에 이르는 모든 고백의 특징입니다. 구원을 위한 참되고 정직한 고백입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11절에서 죄인은 자기의 죄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감당합니다. 죄인이 자기 죄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감당합니다. 이것은 장차 이스라엘의 국가적 고백에도 해당될 것이지만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참된 구원의 믿음에 이르는 모든 개인에게도 해당됩니다. 죄인이 자신의 죄에 대해 온전히 책임을 감당하는 진실하고 정직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을 탓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탓하는 것은 아주 오래된 방식입니다. 아담과 하와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말이죠. 아담이 하와 탓을 하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기억하시죠?
하지만 이 놀라운 장에는 미래 세대가 십자가를 돌아보며 하는 고백이 담긴 과거형 동사만 있지는 않습니다. 이 장에는 우리가 파악해야 할 또 다른 언어적 특성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1인칭 복수 대명사가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53장을 읽어드릴 때 “우리, 우리, 우리의, 우리의, 우리를, 우리를”이라는 메아리가 들리셨나요? 문제는 바로 ‘우리’입니다. 참된 회개란 바로 이 점을 깨닫는 것입니다.
네, 죄인이 구원을 받으려면 성령님이 주권적으로 생명을 주셔야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스가랴의 말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셔야 하고, 그래야 그들이 돌아서서 믿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어있는 죄인을 깨워 거듭나게 하려면 성령의 능력이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불신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셨다는 것, 특히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하셨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은 죄인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제 잘못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제게 생명을 주지 않으신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저를 완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믿지 않게 된 이유는 성령님이 제게 생명을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제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비난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성령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주권적인 목적이 합력하여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회개를 가져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무한하신 지성을 통해 이 일을 행하시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인의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두고 슬피 울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너희는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21절에서 바울은 구약을 인용합니다.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령님을 탓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탓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의 불신앙에 대한 책임과 자신의 불신앙으로 인해 처한 상황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감당합니다. 저지른 죄와 범죄와 부정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감당합니다. 저지른 죄의 영향과 결과의 책임도 오롯이 감당합니다. 자신들의 삶에 가득한 비통과 슬픔에 대해 책임을 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이 저희 때문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참된 고백을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탓하지 않습니다. 죄인 스스로 책임을 집니다. 참회하는 사람은 모두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도 해당됩니다. 우리는 11절에서 참된 회개의 진정한 본보기를 발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11절에서 말하는 많은 사람에 해당한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들이 죄인임을 깨달으며, 그 모든 것이 자신들을 가리키고 자신들의 책임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과 대조되는 한 분이 계신데, 그분은 이스라엘을 대신해 죽으신 의로운 종으로서 오직 그분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도 깨닫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11절 고백의 핵심입니다.
이제 4-6절입니다. 이 노래의 중간 연에 왔습니다. 이사야 53장에는 다섯 개의 연이 있는데 지금까지 두 연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중간입니다. 나머지 두 연은 나중에 더 살펴볼 것입니다. 이 중간 연에 가장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이 세 절은 구약 전체에서 가장 장엄한 구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구절들을 설명해 드리는 것이 사실 조금 힘겹기도 합니다. 이해하기가 쉽지 않고 매우 심오하기도 하고 인간의 지성을 넘어서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제가 설명을 하기에 부족하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여러분이 성경의 이 위대한 부분을 이해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자신의 죄를 기꺼이 고백하고 그 결과 진정으로 구원을 받는 많은 사람은 4-6절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구원에 이르는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첫 번째 연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놀라우신 종 메시아는 여호와의 종으로 불렸습니다. 이 놀라우신 종에 대해서는 이사야 52장 13-15절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지난 설교에서는 이사야 53장 1-3절에서 멸시받는 종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대신하시는 종을 볼 것입니다. 계속해서 여호와의 종을 살펴보고 있는데, 이제부터는 그 종이 우리를 대신하는 역할을 보겠습니다.
이사야 53장의 첫 세 구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종의 삶을 살펴보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전혀 대단해보이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예수님에 관한 메시지를 믿지 않았고, 여호와의 팔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에게 나타나 말 그대로 여호와의 팔이 되어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걸 믿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이걸 믿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거의 없습니다. 이 계시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거의 없습니다. 왜 없었을까요? “저희가 예수님의 출생을 보니 마치 곁가지 같았고, 메마른 땅에 튀어나온 뿌리 같았습니다. 하찮아 보이고, 전혀 중요해 보이지 않았고, 존재 자체가 불필요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의 시작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동네에서 태어나 아무도 알지 못하는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지배층에 있는 엘리트 계층에게 종교적으로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동네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지극히도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주변에는 더 평범한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습니다. 그게 예수님의 시작이었죠.”
“그 후에도 예수님의 삶을 살펴보았지만, 정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어떤 장엄함도, 위엄도 없었죠. 외모도 매력적이지 않았습니다. ‘메시아’로 불릴 만한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보다 최악이었던 건 마지막 모습이었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았고, 지배자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습니다. 슬픔과 비탄이 가득한 사람이 되었고, 외모는 형편없이 망가졌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얼굴을 가리고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정말이지 예수님의 최후는 끔찍했습니다. 하찮은 시작과 보잘것 없는 생애, 끔찍한 죽음. 이게 저희가 예수님을 멸시한 이유입니다. 저희는 예수님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여겼습니다.”
바로 이것이 1-3절에서 멸시당하는 종의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4-6절에서 죄인의 고백이 시작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제가 완전히 잘못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저희가 완전히 틀렸습니다.” 그리고 4절에서 전환을 보여주는 표현이 나옵니다. “실로, 정말로, 또는 참으로.” 감탄사입니다. 급격한 인식의 전환, 즉 예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태도가 전면적으로 바뀌었음을 보여줍니다. 마치 발뒤꿈치를 딛고 획 돌아서는 것과도 같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아이고, 이제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서 다른 길로 가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감당하셨던 우리의 고통과 예수님이 지셨던 우리의 슬픔을 봅니다. 예수님이 찔리신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예수님이 상하신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새롭게 바라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줄 알았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바라바와 예수님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을 때, 예수님을 죽이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죄 때문에 죽지 않으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허물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 죽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신성모독자였기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죽게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메시아가 아닌데 자신을 메시아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죽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하셨기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의 생각은 이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성모독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범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이신 이유는 신성모독이라는 예수님 자신의 죄악과 허물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끔찍한 신성모독 죄를 범한 것입니다. 자신을 메시아라고 주장했고, 아브라함 이전에 살았다고 주장했고,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했고, 죽은 후에 살아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창조주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이 신성모독자는 이렇게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죄 때문에 하나님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고, 우리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압니다. 예수님이 지셨던 질고는 우리의 것이었고, 예수님이 당하신 슬픔도 우리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때문에 찔림을 당하셨고, 우리 때문에 상처를 입으셨으며, 우리 때문에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대한 관점을 완전히 뒤집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신학적으로는 ‘형벌적 대속론’이라고 부릅니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이것을 알게 될 것이고, 믿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4-6절은 마치 동심원처럼 고백의 내용을 확장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 구절은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점점 큰 원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각 구절은 이스라엘의 죄와 종이 감당한 속죄에 대해 이야기하며 동일한 주제를 확장시켜서 고백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 세 구절은 너무나 심오해서 오늘 아침에 전부 살펴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음 시간에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잘못했는지 깨달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잘못된 태도를 가지고 있었고, 그 잘못된 태도를 잘못된 행동으로 드러냈습니다. 이것은 본성에서 기인한 것이었죠. 회개에는 이 세 가지 모두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참된 회개란 우리가 잘못 생각했고, 잘못 행동했고, 그 이유는 우리의 본성이 완전히 타락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4절은 잘못된 태도에 대한 것이고, 5절은 잘못된 행동에 대한 것이며, 6절은 그릇된 본성에 대한 것입니다. 내면 깊은 곳까지 내려가는 것이죠. 우리의 태도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자신의 죄악 때문에 징계를 받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우리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허물 때문이었고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본성이 그릇되었기 때문입니다. 6절은 우리의 본성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습니다.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6절이 본성에 대한 것인가요?”라고 말이죠. 양은 양이 하는 행동을 합니다. 일종의 비유입니다. 양은 위험 속에서 헤맵니다. 이 양이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의 본성이 그릇되어 우리는 각기 제 길로 갔습니다. 이제 미래 세대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깨달음은 모든 죄인이 구원받기 위해 도달해야 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행동의 근원이 되는 허물과 죄악을 깨달아야 합니다. 허물과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지고 영혼이 병들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러분의 본성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문제를 인식해야만 합니다. 바로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 문제를 6절에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놀라운 각성이 엿보입니다. 그들은 깨달았습니다. 그가 우리의 질고를 지셨고, 그가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질고입니다.
‘질고’로 번역된 단어는 질병, 쇠약, 재앙 등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 꽤 광범위한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속죄라는 문맥에 비추어 볼 때, 이사야가 말하는 질고와 슬픔은 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인생은 고통과 질병과 재앙으로 가득합니다. 이것들이 질고입니다. 질고는 우리가 인생에서 만나는 고뇌와 투쟁, 문제들을 외부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를 몸소 지십니다. ‘지다’라는 단어는 들어올리거나 주워서 자기 위에 올려놓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만들어내는 모든 결과를 친히 짊어지셨습니다.
다음은 슬픔입니다. ‘슬픔’은 고통을 의미하는 단어로,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것을 좀 더 강조합니다. 질고가 죄의 외적인 결과를 가리킨다면, 슬픔은 죄의 내적인 결과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나오는 죄는 원래 “죄”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도덕적 실체가 아니라 죄로부터 비롯되는 삶의 고통과 공포, 문제들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죄와 죄가 만들어내는 모든 것들을 들어올려서 짊어지시고 스스로에게 씌우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것을 짊어지고 십자가로 향하셔서 하나님의 형벌을 전적으로 받으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10절에 따르면 여호와께서는 예수님이 상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 죄의 형벌을 치르셔서 죄의 무게와 그 결과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구약 전반에 걸쳐 유대인들을 향한 경고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은 죄라고 경고하십니다. 동일한 문제에 대해 모든 사람에게도 경고하십니다. 성경에는 “죄악을 담당하다”라는 말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죄악을 담당하다.” 이 말은 레위기 전반에 걸쳐 등장합니다. 에스겔 4장에도 나오는데,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백성은 자기의 죄악을 담당하고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종, 메시아는 죄인의 죄악을 온전히 담당하고, 죄의 모든 결과들을 떠맡으십니다. 그 모든 것들을 자기에게 지우고, 죄에 대한 모든 형벌을 치르며, 그 죄악들을 가져가십니다.
레위기 16장에 의하면 속죄제를 드릴 때는 염소 두 마리를 속죄제물로 삼는데, 제비를 뽑아 여호와를 위한 염소는 속죄제로 드리고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살려둡니다. 제사장은 이 ‘아사셀’ 염소에 안수합니다. 그리고는 백성의 모든 죄를 아사셀 염소에 지우고 광야로 내보냅니다. 아사셀 염소는 다시 돌아오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 아사셀 염소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죄에 대한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희생제물과도 같습니다. 아사셀 염소로서 모든 죄를 지고 가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우리의 고통을 단순히 공감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지고, 죄에 대한 형벌을 온전히 받으며, 죄값을 완전히 치르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죄의 결과와 발현, 죄로 인한 질고와 슬픔으로 가득한 우리 인생이 받는 죄의 지배를 끝내신다는 겁니다. 언젠가 우리는 모두 이 온전함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언젠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면, 죄도 없고 죄의 결과들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죄로 인해 고통을 받아야만 했지만, 예수님이 대신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심판과 고통, 절망, 영원한 심판을 통해 느껴야 할 모든 것을 가져가셨고, 그 모든 것을 스스로 짊어지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짐을 완전히 가져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모두 다 갚아 주시고, 우리 죄를 없애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앞으로 오실 이에 대한 예언인 것입니다. 이제 이 위대한 장의 나머지 부분에서 그와 동일한 진리가 반복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중요한 기본 진리이기 때문이죠. 예를 들면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그렇다면 문제는 이것입니다. “대체 ‘그’는 누구인가? 죄와 죄의 발현과 죄의 결과를 모두 지고,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만족시키기 위해 형벌을 모두 치르며, 그 모든 것을 가져가고 없애서 다시는 죄를 볼 수 없도록 하시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이 모든 것을 수행하는 그분은 누구란 말인가?”
베드로는 분명히 이 구절을 염두에 두고 베드로전서 2장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이사야 53장을 직접적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말고는 그 누구도 그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말고는 그 누구도 이것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종, 메시아, 예슈아, 예수님에 대한 진리를 깨닫고 울며 회개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저지른 엄청난 잘못을 증언할 것입니다. 대대로 그렇게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수 천년 동안 그렇게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이제 자신들이 얼마나 잘못했는지 선포합니다. 예수님이 고통을 겪으신 것은 예수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 매를 맞고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님 자신의 죄 때문에 예수님을 벌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신성모독으로 인해 하나님께 징벌을 받고 매를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엘로힘을 말합니다. 또 여기에 나오는 모든 동사는 엘로힘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징벌을 받고, 하나님께 매를 맞으며, 하나님께 고난을 당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죄 때문에 예수님을 벌하신다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여기에 나오는 표현은 굉장히 센 어조의 단어입니다. “징벌을 받는다”라는 단어는 매우 강하게 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출애굽기 11장 1절에 나오는 재앙, 즉 모든 처음 난 것을 치셨던 것과 관련해서 사용된 매우 폭력적인 단어입니다. “맞다”라는 단어는 ‘얻어맞다’, ‘죽임을 당하다’라는 뜻으로 말 그대로 누군가를 죽을 때까지 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난을 당한다”라는 단어는 일반적인 단어인데, ‘수치당하다, 모욕당하다, 파괴당하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얻어맞고 수치와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보았을 때, 유대인은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범해서 하나님이 벌을 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유대인들의 평가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관점입니다. 하지만 진리를 보는 유대인들도 있습니다. 그렇죠? 여러분들 중에도 있습니다. 과거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제는 달라졌다고 고백합니다.
다른 유대인들도 언젠가 미래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인 자신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기 위해 하나님께서 택하신 어린 양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깨달은 후에 5절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찔리신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예수님이 상하신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며, 예수님이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말입니다. 이 표현은 정말 놀랍도록 사실적입니다. 찔림, 상함, 징계, 채찍… 이런 표현은 매우 강한 어조의 단어입니다. 이 부분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지식이 없었습니다. 이사야는 700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습니다. 성령님이 이사야를 도우셔서 이 단어들을 선택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단어들이 어떤 면에서 은유적으로 쓰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혹은 이 단어들이 찔리고 상하고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는 것을 말하는 일반적인 단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을 사실적이고 극적이며 다소 혐오스럽게 묘사하고자 고른 단어들이라고 말입니다. 다소 일반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가령, 어떤 히브리어 학자는 “찔리다”라는 단어가 잔혹한 죽음을 의미하는 강렬한 히브리어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의미로 이해해서 “그렇다면 이 사람이 누구든 잔혹하게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상하다”라는 단어를 보고, 그 단어가 글자 그대로 짓밟혀 죽는 것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34절에서처럼 글자 그대로 발에 밟히며 매를 맞고 상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좀 약화된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상하다”는 누군가의 삶이 파괴되는 것을 의미하는 굉장히 광범위한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 단어는 짓밟혀 죽는 것으로부터 심하게 다치는 것까지 무엇이든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징계’라는 단어는 매우 흥미로운 단어입니다. 유일하게 형벌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형벌은 전문적인 용어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법률적 용어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단어는 분명히 처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옳을지도 모릅니다. “채찍질하다”라는 단어도 일반적인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매질한다거나, 채찍을 휘두른다거나, 상처를 입히는 등의 의미로 말입니다. 이사야가 본문을 기록했을 때 이런 일반적인 의미를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끔찍하고 무서운 죽음을 묘사하기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단어들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단어들이 일반적인 의미의 용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단어가 예수님께 구체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양쪽 손과 발, 옆구리까지 다섯 번 찔리셨습니다. 시편 22편은 십자가를 예견합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신 고백입니다. 시편 22편 16절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스가랴 12장 10절에 의하면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리고 그들은 정말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찔렀습니다. 그 일은 정말로 일어났습니다. 요한복음 19장에는 이와 관련된 몇 구절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4절입니다.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계속해서 37절입니다.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네, 그들은 예수님을 찔렀습니다. 얼마나 구체적인 예언입니까?
상함이라는 단어는 어떤가요?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이 단어는 심한 상처를 의미하는 것에서부터 짓밟혀 죽는 것까지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뺨을 맞으셨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절을 보면, 한 군인이 손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때렸습니다. 또 마태복음 27장 30절에 따르면 로마 군인이 갈대를 빼앗아 예수님의 머리를 쳤습니다. 얼굴을 치고, 뺨을 때리고, 갈대로 머리와 얼굴을 치는 행위는 상처를 내고 매자국을 남길 것입니다. “상함”이라는 단어에 정말 잘 들어맞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징계를 보겠습니다. 징계는 형벌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처형은 일종의 형벌이었나요? 네, 분명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기소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과 거짓 증인들을 불러모았고, 예수님께 불리한 거짓말을 하도록 한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기소장은 안나스와 가야바의 집을 오갔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헤롯에게 넘겼다가 다시 돌려보냈습니다. 기소 내용을 실제 범죄로 몰고 가려고 했던 거짓 재판의 연속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처형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빌라도 앞으로 데려갔습니다. 빌라도는 위협과 협박을 받아 예수님께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예수님께 내려진 사형은 로마 정부가 내리는 공식 형벌이었습니다. 사형은 기소와 재판, 평결, 선고의 결과로 주어진 형벌이었습니다. 공식적인 형벌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제 “채찍”이라는 단어를 살펴보겠습니다. 이것도 일반적인 용어일까요? 마가복음 15장 15절에 의하면 예수님은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육중한 막대기에 뼈조각과 돌조각, 유리조각이 박힌 가죽 끈이 달려 있는 채찍으로, 이 채찍이 계속해서 예수님의 몸에 박히고 살을 찢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알고 있죠. 유대인들은 이 예수라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찔리고 상하고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알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 구원받는 날에는 과거를 돌아보며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그렇게 대하셨던 것은 예수님을 짓밟으려던 것이 아니었음을 말이죠. 하나님이 예수님을 그렇게 대하셨던 것은 예수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죄 때문에 그렇게 대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차이점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허물 때문에, 우리 죄악 때문에, 우리의 평화와 나음을 위하여 일어났다고 말입니다.
이런 일이 언젠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그 날이 오기까지 여러분들이 구원받는 유일한 방법은 이 고백을 바로 지금 하는 것입니다. 지금 고백하십시오. 이제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을 살펴보고 마무리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을 보면 바울은 2절에서 이사야 49장을 인용합니다. 이사야 49장 8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하신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내가 너희 말을 들을 때가 이르렀다. 이는 구원의 날이다. 내가 너희를 도울 것이다.” 바울은 이 말씀을 현재로 가져옵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이스라엘의 국가적 구원은 미래에 일어날 일입니다. 우리가 대환란이라고 부르는 마지막 때에 일어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구원의 날입니다. 바로 지금이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은혜 받을 만한 때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미래에 있을 이스라엘의 구원 사이에는 슬픈 현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 여러 세대의 유대인들이 영원한 형벌을 받고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치료제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 여러 나라, 여러 세대의 이방인들도 영원한 형벌을 받고 있습니다. 이들에게도 치료제는 없습니다.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에 부흥이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엄청난 부흥이 일어나고 복음이 전 세계로 퍼질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따르면 하늘의 천사들이 복음을 선포할 것이고, 죽임당했던 두 증인도 다시 일어나 복음을 선포할 것입니다. 각 지파에서 12,000명의 유대인들이 나올 것이고, 총 144,000명의 유대인들이 복음을 선포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믿게 될 것이고, 모든 나라와 족속의 사람들도 믿게 될 것입니다. 복음이 그야말로 엄청나게 쏟아부어질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지막 때에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사람들이 계속해서 죽고, 치료제 없이 영원히 멸망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입니다. 지금은 구원의 날입니다. 여러분이 선물을 받아들인다면 말입니다. 지금이 “확실히” 그 순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틀렸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우리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와 슬픔, 질병, 불행, 재앙, 죄를 스스로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값을 전부 치르셨고, 죄의 결과들도 영원히 제거하셨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저는 여러분이 그렇게 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다같이 엎드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우리는 이 장에 담긴 놀라운 사실에 깊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일어나기 수백년 전에 알려주시고 계시해 주신 세부적인 내용들은 분명히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를 때에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주님, 오늘이 구원의 날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군가에게 은혜 받을 만한 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돌아보게 하시고 그 모든 것이 분명하게 이해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참된 회개를 통해 그리스도께 나아오게 하옵소서. 자신들의 죄와 허물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지는 용서를 간구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믿는 자에게 약속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 심령 가운데 역사하여 주옵소서. 이 아침 우리가 선포한 진리로 우리를 기쁨으로 채워 주옵소서. 아직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주옵소서.
마지막 기도를 마치기 전에 기도실이 언제나 열려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앞에 보시면 제 오른쪽으로 기도실이 있습니다. 출구 표시가 있는 앞쪽 문 앞에 기도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와 구원과 영생, 회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거나, 기도하고 싶거나, 어떤 도움이 필요하다면, 저희는 여러분을 섬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먼저 주님께 여러분의 마음을 털어놓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진리를 들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오셨고 왜 죽으셨는지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또한 부활에 도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구원자이자 주님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오늘 그렇게 하시길 바랍니다. 미루지 마십시오. 불확실한 미래의 일로 남겨두지 마십시오. 기도가 끝나면 여기 앞에 있는 기도실이 열려 있을 것입니다. 저희가 여러분을 도와드릴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얼마나 긴박한 시대에 살고 있는지 깨닫기를 원합니다. 복음을 들어야 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달하는 일이 다급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선포하는 자가 없다면 그들이 복음을 들을 방도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우리가 선포하도록 도와주시고,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임을 죄인들에게 전하게 도와 주옵소서. 그들이 그리스도께 나아온다면 오늘이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우리 심령 가운데 역사하셔서 우리가 하늘의 것과 중요한 것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삶과 증언이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안내하는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주님의 은혜로 죄인들이 구원 받기를 소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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