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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에도 계속해서 창세기 1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우주의 기원’ 중에서 여섯째 날, 창조의 절정을 함께 보겠습니다. 정말 놀라운 시간입니다. 최근 몇 년간 제가 전한 어떤 시리즈보다도 열렬한 반응을 여러분이 보여주고 계십니다. 앞으로 몇 주 안에 창조 시리즈를 마무리하게 될 텐데, 그 후에 이 시리즈를 라디오 방송으로 전하려고 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창세기의 위대한 증언과 진리를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절정, 그러니까 인간 창조가 이루어진 여섯째 날에 이르렀습니다. 창세기 1장 24절부터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이보다 더 분명한 창조 기록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섯째 날에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아주 정확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땅의 생물을 만드셨습니다. 세 가지 부류로 나뉘는데, 먼저 집에서 기르는 동물인 가축이 있고, ‘땅의 짐승’이라 불린 들짐승, 그리고 곤충과 파충류, 양서류, 쥐, 다람쥐처럼 땅 위를 낮게 기는 모든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 종류의 생물을 만드셨습니다. 공중의 새와 바다의 생물은 전날에 이미 창조하셨죠. 그러므로 이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든 창조를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장 26절과 27절에 기록된 대로 사람을 지으심으로 마무리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이 여섯째 날, 24시간 동안에 일어났습니다. 31절 끝부분에서 말하듯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즉, 빛과 어둠이 한번 지나가는 시간, 다시 말해 지구가 한 바퀴 자전하는 동안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원수들이, 성경의 원수들이 이 계시된 말씀을 부정합니다. 인간이 수백만, 수십억 년에 걸쳐 진화했다고 주장합니다. 오늘날의 인류는 돌연변이의 결과로, 무작위적으로 자기 의지로 유전적 변화를 이루어낸 결과라고 말합니다. ‘적자생존’의 산물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제가 방금 읽어드린 본문에 분명히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2장 7절에서 다시 한번 반복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이제 19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여자의 창조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 모두 직접 즉각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5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성경은 반복해서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날’이 있었다고 말이죠. 그날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지으셨다고 말입니다. 성경 전체가 이 진리를 증언합니다. 이사야 45장 12절에서도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욥기 33장 4절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라고 고백합니다. 신명기 4장 32절 역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여러분, 보시다시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이 사실을 성경 여러 곳에서 반복적으로 선언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명확한 가르침, 창세기의 분명한 기록, 여러 성경 구절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자들은 이것을 부정합니다. 그들 중 일부는 자칭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른바 유신진화론자라고 주장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진화를 통해 인간이 생겨나게 하셨다는 겁니다. 이러한 진화론자들은 하나님께서 하루 만에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성경의 분명한 증언을 거슬러, 인간이 진화했다고, 모든 것이 하나의 단세포 생물에서 시작되어 수중 생물, 양서류, 유인원을 거쳐 마침내 직립 보행하는 인간, 곧 창조의 정점에 이르렀다고 주장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부정하는 과학자들조차도 인간을 포함한 그 어떤 것의 진화 증거도 찾지 못했습니다.

진화에 대한 증거를 찾을 수 없는 이유는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증거를 찾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진화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섯 번의 24시간, 그러니까 태양일 6일 동안에 온 우주와 지구와 그 안의 모든 생물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계속 말해온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약 6천 년에서 7천 년 전에 이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제 화석 문제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이 부분은 꼭 다뤄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여러분 중에서도 많은 분들이 초등학교부터 중고등학교, 심지어 대학에 이르기까지 진화론의 증거라 주장하는 이른바 ‘화석 기록’을 배우셨을 겁니다. 어떤 네 발 달린 유인원 비슷한 생물로부터 사람으로 진화했다고 가르치죠. 그렇다면 우리는 이 주장, 즉 화석이 진화를 증명한다는 주장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과연 ‘잃어버린 연결고리(missing links)’, 즉 중간 단계의 화석이 정말 있을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몇 년마다, 어떤 때는 몇 달마다 새로운 ‘인간과 원숭이의 중간 형태’를 발견했다고 보고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런 ‘잃어버린 연결고리’가 있을까요? 제가 단호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절대 없습니다. 절대로 없습니다.

<태초에(In the Beginning)>라는 매우 흥미로운 책이 있습니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월터 브라운(Walter Brown) 박사가 쓴 책입니다. 21년 동안 공군대학원(Air War College)에서 과학기술연구 책임자로, 그리고 공군사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던 아주 훌륭한 과학자입니다. 브라운 박사는 진화론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만들어낸 여러 거짓들을 폭로했습니다. 브라운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원시적인 유인원의 화석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들은 매우 과장된 주장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어, 필트다운인(Piltdown man)은 완전한 조작이었다는 것을 전 세계가 지금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교과서에 여전히 남아서 사실처럼 가르치고 있습니다.

1978년 이전까지 라마피테쿠스(Ramapithecus)에 대한 증거는 단 몇 개의 이빨과 턱뼈 조각뿐이었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듯이, 한때는 라마피테쿠스를 ‘인간과 유인원 사이의 과도기적 존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예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단지 몇 개의 이빨과 턱뼈 조각에서 비롯된 주장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제 라마피테쿠스는 단순한 유인원에 불과하다는 것이 아주 명백해졌습니다. 한때 ‘최초의 인간’으로 여겨졌던 라마피테쿠스가 그 지위를 잃은 것은 진화론 진영에 아주 큰 타격이 되었습니다. 현재 과학자들은 라마피테쿠스가 멸종된 오랑우탄의 친척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내용은 마빈 루베노(Marvin Lubenow)가 쓴 <논쟁 중인 뼈들(Bones of Contention)>이라는 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제가 이 책에 대해서 말씀드렸죠.

또 다른 이른바 ‘과도기 형태’ 중의 하나로 알려진 것이 네브래스카인(Nebraska man)입니다. 그런데 네브래스카인의 유일한 증거는 돼지 이빨로 밝혀졌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비약이었죠. 그 유명한 베이징인(Peking man)의 두개골은 많은 전문가들에 의해서 인간이 음식으로 먹기 위해 목만 베어낸 원숭이의 유해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류는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애초에 만들어져서는 안 될 범주라고 봅니다. 최근에는 처음으로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의 팔다리뼈가 확인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뼈의 비율이 원숭이 뼈와 아주 똑같습니다. 따라서 결코 인류로 분류될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말씀드린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ines)는 대부분 남아프리카에서 발견이 되었습니다. 루이스와 메리 리키(Louis and Mary Leakey) 부부에 의해서 아주 유명해졌는데 인간과는 확연히 구별됩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 대한 여러 정밀 컴퓨터 연구에 따르면, 그 신체 비율이 인간과 살아 있는 유인원 사이의 중간 형태가 아니었습니다. 균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내이 구조를 추가로 연구한 결과, 침팬지나 고릴라와 매우 흡사하지만 인간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팔이 길고 1미터 정도의 키에 몸무게가 27킬로그램 정도인 ‘루시(Lucy)’, 여러분 기억하실 겁니다. 루시는 한때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인간처럼 직립 보행했다는 증거로 제시되었습니다. 그러나 무릎 관절 하나만이 아니라 해부학적 구조 전체를 연구한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루시는,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긴 싫지만, 나무를 타고 다녔습니다.

약 백 년 동안 세상은 네안데르탈인(Neanderthal man)이 구부정하고 유인원처럼 생겼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런 잘못된 믿음은 관절염이나 구루병 같은 뼈 질환으로 인해 신체가 변형된 극히 일부 네안데르탈인들의 화석을 근거로 한 것이었습니다. 네안데르탈인(Neanderthal man), 하이델베르크인(Heidelberg man), 크로마뇽인(Cro-Magnon man)은 모두 중간 단계가 아닌 완전한 인간입니다. 특히 이 뼈에 살을 붙인 화가들의 복원 그림들은 상상에 불과합니다. 증거가 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진화론자들의 연대 측정법에도 심각한 오류가 있습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그 어떤 단계의 중간 화석도 없다. 그 어떤 진화의 증거도 없다.’ 특히 인간 진화에 대한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인간 진화를 증명하기 어려운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증명할 수도 없는 것이죠.

실제로 있었던 일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첫째 날, 아니죠, 여섯째 날, 24절과 25절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육상 동물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 가축은 길들여져 집에서 사용하는 짐승을 말하고, 기는 것은 땅에 낮게 붙어 사는 모든 생물을 말합니다. 짐승은 네 발로 걷는 들짐승을 뜻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짐승들을 만드신 후에, 26절과 27절에 이르러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무에서(ex nihilo) 즉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존재를 한순간에 존재하게 하신 겁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완전한 성인으로 창조하셨습니다. 2장에 기록된 대로, 그 후에 돕는 배필인 하와 역시 완전하게, 성숙한 모습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사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기 전까지 만들어진 모든 것은 인간이 살아가고 하나님이 주신 복을 누리며,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놀랍고, 아무리 선하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신 모든 피조물이 아무리 정교하고 복잡하고 광대하다고 해도,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다른 피조물들은, 인간과는 본질상 건널 수 없는 커다란 간격이 있습니다. 어떤 자연적 과정도 그 간격을 결코 메울 수 없습니다. 어떤 것도 사람으로 변할 수는 없습니다. 물고기도, 바다의 포유류도, 파충류도, 원숭이도, 유인원도, 고릴라도, 그 어떤 생물도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살펴보았습니다. DNA의 유전 암호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DNA에서는 찾을 수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놀랍도록 신비한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26절에서 이렇게 소개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리고 2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또 제가 이전에 읽어드린 창세기 5장 1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이것이 인간의 독특한 정체성입니다. 유전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시험관에 담을 수 없는 신비한 영적인 부분입니다. 돌연변이나 진화 과정을 통해서 생겨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제 26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리고 27절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라고 말합니다. 공식이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창조하십니다. 사실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있으라” 말씀하시고, 그대로 이루십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주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처음으로 큰 전환이 일어납니다. 지금까지 본문 어디에서도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는 표현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복수형으로 말씀하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언제나 “있으라, 있으라, 있으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인격적인 명령의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어떤 것도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사람 이외의 다른 것들을 창조하실 때에는 비인격적인 언어를 쓰셨습니다. “있으라.” “~하라.” 그리고 말씀하신 그대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그 어떤 것과도 인격적으로 동일시하지 않으셨습니다. 빛과도, 물과도, 또 어떤 원소들과도, 해와 달과 별들 같은 천체와도, 땅과도, 바다와 분리된 육지와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않으셨습니다. 새들과도, 물속 생물들과도, 육지의 짐승들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떤 인격적인 관계도, 그 어떤 인격적인 교류도 없었습니다. 시간 속에서도, 영원 속에서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은 새는 없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려 죄송합니다만,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은 개나 고양이도 없습니다.

이전까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진 피조물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이 순간 하나님은 인격적인 존재로 나타나십니다. 관계적인 언어로 말씀하기 시작하십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성경에서 처음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관계 안에서 드러내십니다. 지금까지는 그냥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자신을 복수 대명사를 사용하여 정의하십니다. ‘나’가 아니라 ‘우리’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 안에 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관계는 오직 둘 이상일 때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처음으로 삼위로서의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물론 그 전에도 ‘엘로힘’이 복수형 어미를 가지고 있어 암시된 바가 있지만, 이번에는 암시가 아닌 분명한 선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동시에 복수로 계시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라는 말씀을 통해 삼위일체의 관계가 드러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안에 관계가 존재한다는 위대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곧 하나님 안에는 신적 위원회, 신적 회의라고 부를 수 있는 내적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절에서 그 단서를 조금 엿볼 수 있습니다. 1절에서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2절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고 말합니다. 이미 성부와 성령의 구분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신약의 요한복음으로 가면, 또 다른 창조의 기록이 나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서 ‘말씀’은 삼위일체의 두번째 위격인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장에서 우리는 삼위일체의 두번째 위격이신 ‘말씀’, 곧 육신이 되신 말씀, 요한복음 1장 14절이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예수님이 바로 창조주이십니다. 창세기 1장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또 그 창조 가운데 하나님의 영의 역사 장면을 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장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곧 말씀이신 예수님이 창조의 주체로 나타나십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이 한 분이시지만 한 위격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경 전체의 증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삼위로 존재하시는 한 분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자, 이제 관계가 등장합니다.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이전처럼 비인격적인 “있으라”라는 명령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다른 이들과 소통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언어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과정에서 다른 인격적 존재와 교제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 부분을 잘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정말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것은 삼위일체에 대한 명확하고 분명하며 반박할 수 없는 언급입니다. 비록 신약에 가서야 삼위일체 교리가 완전하게 드러나지만, 그 씨앗은 여기에서 이미 심겼습니다. 삼위일체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두번째 위격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사건과, 세번째 위격이신 성령께서 오순절에 오셔서 능력의 역사를 시작하신 사건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교리의 시작, 삼위일체의 씨앗은 바로 이 창조의 장면 속에 이미 담겨 있습니다.

창세기의 독자들이 1장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할 수 있다고 기대한다면 과장된 주장일 겁니다. 지나친 해석입니다. 여기에서 명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프린스턴의 위대한 신학자인 B. B. 워필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본체 안에 있는 삼위일체의 계시의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 하나님의 때가 차서 아들을 보내어 구속하게 하시고 성령을 보내어 성화하게 하실 때가 되어야만 했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성령께서 보내심을 받으시기 전까지는 삼위일체의 충만한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을 삼위일체의 교리 증거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육신과 성령의 오심이라는 관점에서 돌아보면, 이 말씀의 의미 속에 담긴 풍성함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약을 통해 완전한 계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구약 전체를 보면 삼위일체 하나님 안의 교통을 보여주는 구절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편 2편 7절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여기서 삼위일체의 첫번째 위격이신 아버지께서 두번째 위격이신 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서 성취될 예언입니다. 히브리서 1장에서 다시 언급됩니다.

시편 45편에도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 토대이므로 잠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시편 45편 7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왕에게 부어 왕의 동료보다 뛰어나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히브리서에도 다시 인용되며, 삼위일체의 두번째 위격이신 아들께 하신 말씀으로 설명됩니다. 다시 말해, 여기에서도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교제가 드러납니다. 아마 여러분에게 더 익숙한 구절은 시편 110편 1절일 겁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여기서도 두 분의 ‘주’가 등장합니다. 첫번째 ‘여호와’는 성부 하나님을, 두번째 ‘내 주’는 성자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한 분이 다른 한 분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이죠. 이 말씀 역시 신약성경에서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인용됩니다.

이사야 48장 16절을 봐도 같은 맥락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삼위의 하나님 사이에 서로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육신 사건을 보기 전에는 삼위일체의 두번째 위격이신 아들의 정체를 온전히 볼 수 없고, 사도행전에서 성령께서 오시는 장면을 보기 전에는 세번째 위격이신 성령의 완전한 나타나심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창세기로 돌아가 보면,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스스로와 관계를 맺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관계 안에서 존재하시는 복수의 인격체이십니다. 이제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26절에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는 말씀은 창조의 행위에 삼위일체 전체가 관여하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삼위의 하나님께서 함께 이 일을 이루십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리고 이어서 2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을 한 분으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27절에서는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을 여러 위격으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26절에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우리가 아는 대로 세 위격으로 존재하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인류 창조의 목적을 위해 함께 모여 일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때가 된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잠시 멈추겠습니다. 성경의 의도를 충실히 따르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저는 여러 해 동안 여러분께 하나님께서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계획하신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드리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목적은 아들에게 줄 신부를 택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에게 사랑의 표현으로 신부를 주고 싶으셨습니다. 아들을 사랑하고, 찬양하고, 경배하며, 영원히 영광 돌리고 섬기도록 주어질 구속받은 인류입니다. 하나님의 그 영원한 목적이,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 회의 속에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만 짧게 다시 상기시켜 드리겠습니다. 너무나도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중요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20절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예수님은 여러분을 위해 이 마지막 때에 나타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여러분의 구주가 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창세 전에 이미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 1장 이전에, 창조의 첫째 날이 시작되기도 전에, 하나님은 이미 구속의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구속받을 백성을 만드시기 전에, 먼저 구속의 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창조보다 앞서 구속을 계획하섰습니다.

조금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디도서 1장을 잠시 보면, 1절과 2절에서 바울은 복음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을 위하여 일한다고 말합니다. 택하심을 받은 자들의 구원받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또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구원하는 믿음을 포함합니다. 택하심을 포함합니다. 진리의 지식을 포함합니다. 경건함을 포함합니다. 또 영생의 약속과 소망을 포함합니다.

하지만 잘 보십시오. 하나님의 온전한 구원 계획, 그 계획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입니다. 언제 약속하셨습니까? 디도서 1장 2절은 영원 전이라고 말합니다. 헬라어로는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간이 언제 시작되었습니까? 첫째 날입니다. 그러니까 첫째 날 이전에 하나님은 이미 복음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에는 오래전에 약속된 한 요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믿음을 주시고, 진리의 지식을 주시고, 그들 안에 경건을 이루시고, 영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첫째 날 이전에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누구에게 하셨을까요?

인간에게 하신 약속이 아닙니다. 인간은 창조 여섯째 날에 가서야 비로소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천사들에게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앞서 말씀드렸듯이, 천사들은 다른 모든 피조물과 함께 창조되었습니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천사들에게 구원의 약속을 하신 적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구원을 경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천사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상태로, 영원히 그렇게 남습니다. 천사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도대체 누구에게 구원을 약속하신 것일까요?

디모데후서 1장 9절을 보면 좀 더 깊은 설명이 나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일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라고 덧붙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여기서 “영원 전부터”라고 번역된 표현이, 디도서 1장 2절의 “영원 전부터”와 정확히 같은 헬라어라는 것입니다. 어떤 번역본에서는 ‘옛적에’로, 또 다른 번역본에서는 ‘영원 전부터’로 번역되었지만, 원래는 같은 말입니다. 즉, 시간이 시작되기 전이라는 뜻입니다. 디도서에서는 하나님께서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구원을 약속하셨다고 말했고, 여기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가지셨던 하나님의 목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은 약속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실 피조물의 일부를 구속하시기로 약속하셨는데,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구속하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삼위 중 두번째 위격이신 예수님과 함께 성육신의 필요성, 세상에 들어오셔야 할 필요성, 죄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어야 할 필요성 등을 논의하셨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계획된 일이었습니다.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지금 여러분을 창세기 1장 이전으로 데려가고 있습니다. 시간이 시작되기 전, 세상이 그 기초를 얻기 전, 어떤 피조물도 존재하지 않았던 그때, 하나님의 계획 속으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장차 창조될 인류 가운데서 구속받을 사람들을 정하시고, 성자이신 삼위일체의 두번째 위격을 통해 성육신과 희생의 방법으로 그들을 구속하시고 영광에 이르게 하시기로 계획하셨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은 더 나아가 그들이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이신 성령의 사역을 통해 구속받게 될 것을 보여줍니다. 성령은 그들의 마음을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깨닫게 하시고, 마음의 눈을 밝히셔서 진리를 이해하게 하시며, 거듭나게 하시고 새 생명을 얻게 하십니다. 그 순간 그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고 하나님의 소유가 됩니다. 이런 모든 일을 경험하게 될 사람들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 곧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입니다.

에베소서 1장 3절은 하나님의 목적을 말합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왜 복을 주셨습니까?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하나님의 계획은 세상이 만들어지기 이전, 시간이 시작되기 이전에 이미 정해졌습니다. 이 모든 일은 삼위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4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에 따라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 계획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사람을 창조하고 구속할 것이다. 이들을 내 아들에게 사랑의 선물로 주겠다.” 실제로 요한복음 6장과 17장을 보면, 예수님은 반복해서 모든 믿는 자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이라고 부르십니다. 기억하시죠?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그리고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예수님은 믿는 자들을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로 부르십니다. 바로 여기서 이 구속의 계획이 구체적으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사랑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은 최고의 사랑입니다. 하나님만이 아시는 완전하고 영원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성도들을 아들에게 주실 때에 완성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사람을 창조하고 구속하시고, 마침내 영광 가운데로 이끄시기로 계획하셨습니다. 그리고 영광에 이르게 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습니다. 빌립보서 3장은 우리가 예수님의 영광의 몸과 같이 변화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한일서 3장은 우리가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뵐 때 그와 같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비추는 존재, 곧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영광을 반사하며,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고 존귀히 여기며 영광 돌리며 섬기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사랑의 선물입니다.

놀라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가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고린도전서 15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이 아버지께로부터 구속받은 인류를 받을 때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그 구속받은 인류를 주실 때에, 그들이 모두 영광에 이르게 될 때에, 우리가 모두 그곳에 있고 시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서게 될 때에, 그리고 아버지께서 우리를 아들에게 주실 때에, 아버지가 완전한 구속받은 인류를 아들에게 주실 때에, 고린도전서 15장은 아들이 곧바로 그것을 다시 아버지께 돌려드린다고 말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만유 안에 계실 것입니다.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구속받은 온 인류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영원히 채울 것입니다. 오직 한 가지 목적,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을 섬기고 찬양하며 영광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이제 요한계시록 13장과 17장으로 가면, 이 진리가 훨씬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차원에서 드러납니다. 두 번이나 같은 표현이 반복되는데, 바로 요한계시록 13장 8절과 17장 8절입니다. 이 두 구절 모두 믿는 자들을 가리켜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입니다.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창세 이전으로 돌아갑니다. 이제 이것을 염두에 두고 창세기 1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 일을 계획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 안에서 서로의 뜻을 나누고 교제하는 회의가 있었습니다. 여섯째 날보다 훨씬 이전에,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이전에, ‘이전’이라는 개념조차 존재하기 전에, 시간 자체가 생기기 이전에 있던 일입니다. 창조가 있기 전에 계획이 이미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나와 아무런 인격적 관계가 없다. 다른 모든 것은 불타 사라진다. 내가 만든 모든 것은 소멸한다.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다. 이 우주는 결국 사라질 것이다.” 베드로후서에서 베드로는 이 사실을 말합니다. 모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마치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일처럼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조가 거꾸로 되돌려져서 ‘창조 이전’이 되고, 우주의 모든 원자가 해체되어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원자적 해체’의 순간이 올 것입니다. 모든 것이 불타 없어질 것입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물리적 피조물은 오직 인간뿐입니다. 결국 하나님께 진정한 의미에서 중요했던 것도 오직 인간입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은 단지 인간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영광 돌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안에서 자신의 놀라운 능력과 지혜와 지성을 드러내셨습니다. 분명히 우주의 복잡성과 다양성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불타 없어집니다.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관심을 두신 존재는 오직 인간뿐이었습니다. 인간만이 삼위 하나님의 교통과 교제 가운데서 탄생한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도 동물처럼 ‘생물’입니다. 생물이란 움직이고 의식이 있다는 뜻이죠. 인간이 생명의 숨을 받은 것도 사실입니다. 창세기 2장 7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그러나 이것은 동물들에게도 해당되는 표현입니다. 창세기 7장 22절을 보면 “육지에 있어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은 다 죽었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든 동물도 생명의 호흡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물들도 살아 있습니다. ‘생물’이라는 표현은 의식이 있고 움직이는 존재, 즉 식물이 아닌 생명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인간도 이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그러나 유사성은 여기까지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다른 어떤 피조물과도 같지 않은 존재, 결코 진화로 도달할 수 없는 전혀 다른 피조물을 계획하셨습니다.

이 부분에서 인간에 대해 언급된 네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번째 특징은 분명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여기서 ‘형상’과 ‘모양’은 동의어입니다. 히브리어에서는 이 두 단어의 의미에 차이가 없습니다. 단지 강조를 위해서 반복된 표현일 뿐입니다. 이런 반복은 히브리어에서 매우 일반적입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라는 말은 같은 뜻의 반복입니다. 27절에서도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라고 반복됩니다. 이렇게 네 번이나 반복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고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무슨 뜻일까요? 무엇을 뜻하든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부분이 인간과 다른 모든 피조물, 심지어 의식 있는 동물들까지 포함한 모든 피조물과의 차이를 결정짓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답은 다시 한 번 분명히 알려줍니다. 인간은 진화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향해 진화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유전자의 변이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염색체 속에서 발견되는 것도 아닙니다. DNA 속에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일까요? 히브리어로 ‘형상’을 뜻하는 ‘첼렘(tzelem)’의 어근에는 ‘새기다’, 혹은 ‘깎아내다’ 이런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하나님께서 깎아내신 조각과도 같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치 무언가를 다듬고 조각하듯이 사람을 만드셨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존귀한 존재로, 하나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직접 깎고 다듬으신 작품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늘의 본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 말하자면, 하나님의 본, 곧 신적 본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영원한 본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하는 그 어떤 피조물도 이와 같은 본을 따라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다른 피조물들과 생물학적 특징을 공유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같은 환경 속에서 함께 살도록 설계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물학적 환경을 함께 나누기 때문에, 생물학적 특징도 공유해야만 합니다. 식물과도 일정한 생물학적 상호작용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산화탄소를 내쉬면, 식물은 무엇을 만듭니까? 우리가 필요로 하는 산소를 만듭니다. 우리는 식물을 먹음으로써 식물과 상호관계를 맺습니다. 동물과도, 물과도, 해와 달과도,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과 상호작용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 생물학적 환경 속에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물리적으로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는 유인원에서 진화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존재이기 때문에 초월적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분명 동물에게는 없는 인간의 본성을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자의식입니다. 동물은 의식이 있지만, 자의식은 없습니다. 동물은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채 단지 환경에 반응할 뿐입니다. 또 하나는 이성입니다. 동물은 추상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 즉 논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거듭 증명된 사실입니다. 또한 아름다움과 미에 대한 감상, 감정을 느끼는 능력, 도덕적 감수성과 도덕적 의식도 인간만이 가진 특징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졌다는 점입니다. 인간에게는 다른 사람과, 특히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을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인격’입니다. 우리는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우리는 인격적인 존재로서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관계입니다. 우리는 교제를 이해합니다. 사랑을 이해합니다. 함께 나누는 친밀함을 이해합니다. 우리는 대화를 이해합니다. 우리는 생각을 나누고, 태도를 나누고, 생각과 경험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곧바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왜일까요? 하나님의 형상은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격은 관계 속에서만 기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이 관계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드러내셨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관계적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외롭고 고립된 개인으로 존재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관계 안에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며, 둘째 위격은 아들이시며, 셋째 위격은 성령이십니다. 4세기의 위대한 교부 아타나시우스(St. Athanasius)가 말한 것처럼, 아버지는 결코 아들이 없이 존재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인격, 곧 인격성의 기원에 담긴 놀라운 신비는 한 하나님이 한 존재, 한 본질, 한 실체 안에서 세 인격으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실체,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인격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실 때에 우리를 인격적인 존재로, 다시 말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인격적인 존재이기에 자기 인식이 가능하고, 따라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만약 제가 단순한 동물이라면, 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도 인식할 수 없겠죠. 그러나 저는 인격적인 존재이기에 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여러분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고,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도 압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 동시에 삼위로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관계 속에 존재하십니다. 저는 관계를 위해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이것이 존재론적 측면, 즉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본질적 측면입니다. 인격과 관계입니다.

동시에 윤리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인간에게는 자아를 인식하는 인격체로서 윤리적 특성이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압니다. 덕을 압니다. 도덕을 이해합니다. 의로움과 죄를 이해합니다. 거룩함을 이해합니다. 불순종과 반역을 이해합니다. 옳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잘못된 일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와 거룩하고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알고, 성령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격체로서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제가 육체적 존재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살로 이루어져 있고, 다른 피조물과 같은 구성 요소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같은 원소, 같은 물질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동물과 구별되는 점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제 DNA 속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염색체 속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 보이지 않는 자아, 참된 인격이 저를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만듭니다. 하나님과, 그리고 여러분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래서 오랜 세월 동안 이런 질문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육체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졌을까?’ 아닙니다. 가장 순수하고 참된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철학적인 논쟁으로 들어가고 싶진 않지만, 우리는 결국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 육체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격은 영원합니다. 하나님과 닮은 부분은 인격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서로, 그리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영원히 누릴 수 있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육체는 하나님의 형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는 통로로 쓰임을 받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몸이 없다면, 여러분과 관계를 맺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비록 몸이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할지라도,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고, 육체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의 몸은 이 물질적 세상, 이 육체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게 하는 도구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는 인간의 육체가 이성적 영혼에 알맞은 이유가, 생김새나 사지의 구조 때문이 아니라, 곧게 서서 하늘을 바라볼 수 있고 위의 세계를 향해 시선을 둘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존 칼빈(John Calvin)도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설 수 있게 하셔서 서로를 마주볼 수 있게 하시고, 또 하나님을 향해 얼굴을 들 수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표지입니다. 육체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은 아니지만, 육체는 그 형상을 드러내는 도구입니다. 헨리 모리스(Henry Morris)는 이렇게 썼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물리적인 육체를 가지신 분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육체 없이도 하실 수 있는 일을 우리는 육체를 통해 할 수 있도록 설계하셨다.”

하나님께는 눈, 귀, 코, 손, 입이라는 실체가 없으시지만 창세기 8장 2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보시고, 들으시고, 냄새 맡으시고, 손으로 만지시고, 말씀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물리적인 신체 기관이 없어도 그런 모든 기능을 완전히 수행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보이시기로 뜻하셨을 때는 종종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셨습니다. 예를 들어서 창세기 18장처럼 하나님은 육체의 형상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천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사들은 본래 영이지만, 때로는 육체를 가진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헨리 모리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몸에는 하나님께서 때때로 자신을 나타내실 때 사용하시기에 특별히 알맞은 특징이 있다. 하나님은 그것을 염두에 두고 사람의 몸을 설계하셨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사람의 몸을 동물처럼 만들지 않으시고, 곧게 선 자세로 위를 바라볼 수 있는 얼굴, 감정에 따라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얼굴, 그리고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두뇌와 혀를 가진 존재로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은 때가 차면 친히 사람이 되실 것을 아셨다. 그리고 그날에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위해 한 인간의 몸을 예비하셨다. 그 몸은 사람의 형상으로 지어질 것이며,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던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정말 잘 표현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인격과 관계, 그리고 옳고 그름과 도덕을 이해하는 능력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함한 모든 관계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단수와 복수의 사용입니다. 26절을 보면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하셨고, 이어서 “그들로”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어로 보면 ‘man’이라는 단수를 사용했는데, 뒤의 대명사는 복수입니다.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흥미롭지 않습니까? 이어지는 27절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는 ‘사람’을 단수로 표현하고, 그에 맞는 단수 대명사를 사용했습니다. 즉 ‘사람’은 문맥에 따라서 단수로도, 인류 전체를 가리키는 복수 개념으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창조하셨지만, 그 시작은 한 사람, 남자를 창조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 둘을 통해 나머지 인류가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사람’이라는 단어는 한 개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2장을 보면 아담이 먼저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담’이라는 이름은 남자와 여자를 포함하는 일반적인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복수 대명사 ‘그들’이 쓰인 겁니다. 남자와 여자의 구별된 창조는 2장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먼저 남자가 창조되었고,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줬습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짐승들의 이름을 다 지을 때까지 아내를 주지 않으신 이유가 분명하다고요. 두번째 의견을 듣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게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혼자가 아니었다면 시간이 조금 더 걸렸을지도 모르겠다고만, 그 정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여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단지 또 다른 의견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여기에는 다룰 내용이 정말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이 “그들”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27절 끝부분에서 알 수 있습니다. 거기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라고 표현된 이유입니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기 때문이죠. 두번째 요점으로 이어집니다. 아마 이 부분은 다음 시간에 다루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사람의 창조가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네 가지 특징을 간단하게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인격과 관계를 위해 지음받았습니다. 둘째, 사람은 땅의 왕으로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고 복종시키도록 지음받았습니다. 셋째, 사람은 인류를 번성하게 하여 땅을 채우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넷째, 사람은 풍성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모든 창조 세계를 누릴 수 있는 존재로 지음받았습니다. 모든 동물보다 훨씬 뛰어난 존재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구별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만약 인격과 관계를 말하려면 반드시 언어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말을 할 수 없다면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할 수 있는 게 그저 으르렁 으르렁거리고 의미없는 소리를 내는 것뿐이라면, 얼마나 관계가 제한되겠습니까? “딱 제 남편하고의 관계를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라고 하실지도 모르겠네요. 네, 그런 경우도 있겠죠.

관계는 결국 소통으로 귀결됩니다. 동물은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자기 인식이 없고 인격이 없고,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본능적으로 움직일 뿐입니다. 오직 하나의 목적, 곧 생존과 먹이를 얻기 위한 행동만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인간은 언어를 가진 존재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몇 주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뉴스위크(Newsweek)>지에 의하면 과학자들이 인간이 어떻게 언어를 구사하게 되었는지를 밝히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이 추상적으로 말하고, 추상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언어학자 올라(Oller)와 암달(Amdahl)은 이렇게 말합니다. “명백히 인간만이 세상에 존재하는 5천 개 이상의 언어 체계를 습득할 수 있도록 특별히 설계된 존재로 보인다.” 정말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세상에는 약 5천 개의 언어가 있지만, 그 언어들을 배울 수 있는 존재는 인간 뿐입니다. “그럼 돌고래는요? ‘점프!’라고 하면 뛰지 않나요?” 이렇게 말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돌고래가 뛰는 이유는 “점프”라는 단어의 문자적 의미를 이해해서가 아닙니다. 그저 어떤 소리를 들었을 때에 물고기를 얻는다는 연관성을 배운 것일 뿐입니다. 즉, 언어의 개념적 의미를 이해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조건반사적 반응일 뿐입니다.

올라(Oller)와 암달(Amdahl)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의 어떤 시기에는 어휘 습득 속도가 매우 빠르고, 습득되는 개념의 정확성과 섬세함이 놀라울 정도여서, 단어와 연결되는 개념 체계가 이미 상당 부분 자리 잡고 있다고 결론내리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놀라운 말입니다. 이건 인간의 뇌 안에 있는 추상적 사고 능력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능력이 언어 습득을 요구한다는 겁니다. 자녀들을 키우면서 실제로 확인할 수 있지 않습니까? 아이들이 말을 배우기 시작하고, 언어를 통해서 복잡한 의사소통 능력을 점점 습득해 가는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위대한 유대인 언어학자인 노암 촘스키(Noam Chomsky)는 언어를 배우는 능력이 인간에게만 주어진 본질적인 특성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가장 지능이 높은 유인원조차도 수 체계나 공간의 추상적 속성, 혹은 일반적인 추상 표현 체계를 다룰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촘스키는 인간 안에 선천적으로 주어진 마음의 구조, 그리고 ‘심층 구조’에 대해 말하면서, 이것이 보편 문법을 낳는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언어 구조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언어든 다른 언어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언어의 구조적 요소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형상의 일부이며, 우리가 인격을 가진 관계적 존재로서 서로 연결될 수 있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미 모든 본능적 구조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참고로 노암 촘스키의 연구는 인간 종이 언어와 관련해 얼마나 독특한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매우 설득력 있는 연구입니다. 그래서 진화론자들의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진화론자들은 촘스키를 창조론자라고 하지만, 촘스키는 자신을 창조론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유인원이나 다른 생명체들과 달리, 인간의 언어 능력은 영원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서로 소통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창조주와 소통하도록 하늘의 본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요구합니다. 올라와 암달은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의 언어 능력은 어떤 제한된 시간 안의 경험에서 비롯될 수 없다. 공간과 시간이 무한히 이어진다 해도, 물질 세계는 인간이 언어라는 선물을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추상적 개념들을 결코 설명할 수 없다.” 놀라운 일입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만이 말하는 인간을 만드실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시고, 우리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다음주에는 나머지 세 가지 특징, 그러니까 사람이 땅의 왕으로 세워졌다는 것, 생명을 퍼뜨리는 자로 부름받았다는 것, 그리고 풍성한 복을 받은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이 저녁 예배가 얼마나 복된 시간인지요. 말씀을 통해 우리의 마음 속에서 불신자들이 심어놓은 혼란과 거짓의 거미줄이 걷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에 감사합니다. 우리가 그 말씀에 언제나 충실하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만드셨고, 우리가 그 관계를 이루기 전까지는 결코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시고, 서로를 알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인생의 가장 귀한 축복이 인격적인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관계 중의 가장 복된 것은 우리의 창조주요 구원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임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큰 특권과 복을 누리게 하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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