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ce to You Resources
Grace to You - Resource

지난 몇 주 동안 우리는 ‘우주의 기원’이라는 주제로 시리즈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 주제에 집중하다 보니 우리가 속한 사회를 바라보는 저의 눈도 전보다 더 민감하게 열리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오늘날 이 우주가 진화로 생겨났다는 생각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정교하고 복잡하게 학문적으로 잘 포장된 거짓말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거짓말은 전 세계를 사로잡았습니다. 특히 서구 사회 대다수 사람들이 믿고 있습니다. 불가능하고 비이성적인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이 거짓말은 강력한 영향력과 막대한 학문적 노력으로 여전히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현대 진화론은 보편적인 수용을 요구했습니다. 실제로 그것이 받아들여졌습니다. 곧 이 우주를 지금의 모습으로 창조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고 우주는 우연히 존재하게 되었다, 끊임없는 변화와 돌연변이, 단순에서 복잡성으로의 상향적 전환을 통해 무작위 과정으로 발전해 왔다는 이론이 인간의 사고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 성경을 거부하는 사람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죄를 사랑하는 사람들, 도덕적 심판자나 도덕적 법을 원치 않는 사람들은 이런 식의 설명이 주는 편리한 이론에 만족감을 느낄 겁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이 진화론적 거짓말이 복음주의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도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신학자, 성경 해석가, 주석가들조차도 창세기 1장의 분명한 창조 기사를 부정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오늘 오후에 아주 권위 있고 유명한 저자가 쓴 창세기 주석을 제가 읽었습니다.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안된답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6일 동안 창조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분명 다른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과학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랍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진화론을 창세기 1장에 끼워 넣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 어떤 주석가나 해석가에게도 매우 어려운 과제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창조 기사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곳에도 진화론이라는 기괴한 해석을 허용할 만한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죠. 창세기 1장 1절부터 2장 3절까지 기록된 창조 기사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어떤 형태로든 진화론을 묘사하는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에 진화론을 억지로 끼워 넣으려는 사람들은 단순하고도 분명하고, 틀림없고, 확실하고, 명확한 역사적 창조 기록을 부정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창조 기사를 우화, 신화, 전설, 혹은 문학적 시적 양식으로 재분류하는 겁니다.

이들은 성경을 하나님 없이, 비합리적이고 불가능한 진화론에 맞추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 본문을 비유로 해석해야 할 근거, 아무데도 없습니다. 히브리어 창세기 본문에는 시적인 표현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신화나 전설처럼 들리는 구절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무신론적 진화론을 끼워 맞추기 위해서 그런 것들을 만들어냅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왜 그럽니까?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도대체 왜 그렇게 합니까?” 이유가 여러 가지 있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학계에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입니다. 대학이나 학계에서 지위를 유지하거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창조론자가 되면 안 되기 때문이죠.

둘째로, 참된 과학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과학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른바 거짓 과학에 속아 넘어간 것입니다.

셋째로, 다윈이 속았던 것과 똑같은 허상에 붙들리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윈은 전혀 DNA와 관계도 없고, 유전학과도 관련이 없는, 실제 일어나고 있는 현상과는 동떨어진 허상이라고 할 수 있는 관찰에 기초해서 진화론이라는 체계를 세웠습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그러니까 학계의 압력에 위축되고, 거짓 과학에 위축되고, 그리고 전해 내려온 관찰상의 허상에 위축되어서 결국 진화론을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진화론은 ‘균일성(uniformity)’이라는 개념 위에 세워진 이론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균일론(uniformitarian)이라고 부릅니다. 즉, 모든 것이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속도로 이어져 왔다는 생각입니다. 어떤 일정한 속도로 진행되는 것을 보고, 과거에도 항상 그 속도로 진행되어 왔다고 가정하고, 따라서 아주 단순한 것으로부터 시작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같은 속도로 발전해 왔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 과정이 200억 년에 이른다고 가정하는 것이죠.

그러나 성경은 그런 허상이나 착각을 전혀 허락하지 않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는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이렇게 조롱한다고 합니다.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조롱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재림을 부인하면서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모든 것이 똑같은 균일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변하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분명히 창조는 인정하지만, 창조 이후에는 균일한 과정이 깨진 적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창조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계속 읽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따라서 모든 것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져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늘이 옛적부터 있었고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되었고 또 온 세상이 물로 심판을 받아 멸망한 때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의 말은 모든 것이 처음부터 균일하게 이어져 왔다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두 차례의 대격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창조이고, 또 하나는 전 지구적 홍수입니다. 이 두 사건으로 인해서 우리가 아는 땅은 엄청난 변화를 겪었습니다. 창조 자체가 격변이었습니다. 하늘은 옛적부터 존재했고 땅은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되었습니다. 이 부분은 창세기로 돌아가서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이 물로 멸망당한 때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 대홍수가 지구 표면에 엄청난 격변을 일으켰습니다.

지구는 결코 균일한 과정 속에서 그대로 이어져오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창조와 홍수라는 두 번의 거대한 격변이 지금의 모습을 형성했습니다. 그러나 균일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지구가 수십억 년 되었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지층, 퇴적층, 화석, 그리고 지질학적 연대 측정의 화학적 근거가 모두 균일성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19세기 초의 균일설의 중심 전제는 ‘현재가 과거를 이해하는 열쇠’라는 것입니다. 즉 지금과 같이 예전에도 모든 것이 늘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다는 주장입니다. 이 사상은 제임스 허턴(James Hutton)과 찰스 라일(Charles Lyle)이 대중화 했습니다. 다윈에게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균일론은 만물의 기원과 발전을 오늘날 작동하는 동일한 자연 법칙과 과정만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균일론은 현대 역사 지질학의 근간이 되어서 지구가 수십억 년 되었다는 인식을 형성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균일론자들은 한때 지질학적 격변에 의해 생긴 것으로 여겼던 모든 지질학적 특징과 지층을 이제는 엄청나게 오랜 기간 동안 작동한 보통의 과정으로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진화론자들의 관점입니다. 스콧 헐스(Scott Hulse)는 <진화의 붕괴(Collapse of Evolution)>라는 책에서 이 정의를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창조론자들은 이에 맞서서 지질학적 증거가 균일이 아니라 격변을 지지한다고 반박합니다. 특히 지구 표면은 거대한 전 지구적 수력 격변, 그러니까 물과 관련된 격변을 보여줍니다. 창조 때는 문자 그대로 물에 덮인 지구가 격변적으로 재형성되었고, 홍수 때는 다시 지구를 덮은 홍수가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탁월한 신학자이자 과학자인 헨리 모리스(Henry Morris)와 존 휘트컴(John Whitcomb)은 자연 과정, 그러니까 홍수에 의한 대규모 수력학적 저항을 포함한 증거들을 통해서, 현재의 지질학적 구조는 현재의 느린 과정으로는 설명될 수 없으며 대홍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과학, 참된 과학은 결코 진화론자의 편이 아닙니다. 전 세계적으로 분포하는 퇴적암과 지층, 가장 높은 산 정상에서 발견되는 바다 조개껍데기, 빠르게 거의 순식간에 쌓인 화석, 엄청나게 크고 깊은 화석 무덤, 그리고 석탄과 가스의 압력 형성 같은 지질 현상은, 모두 느리고 점진적인 자연 과정이 아니라 물에 의한 대격변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 연구들이 점점 더 이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스콧 헐스(Scott Hulse)는 이 증거들을 간략하게 정리합니다. “창조론자들은 균일론적 원리로는 주요한 지질학적 특징들과 지층 대부분을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티베트 고원은 약 900미터 두께의 퇴적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현재 해수면보다 약 4,800미터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아프리카의 카루 지층에는 약 8천억 마리의 척추동물 화석이 들어 있다. 캘리포니아의 청어 화석층에는 약 10억 마리의 물고기가 10제곱킬로미터 면적 안에 모여 있다. 균일론적 개념으로는 미국 북서부의 컬럼비아 고원을 설명할 수 없다. 그곳은 두께가 수천 미터에 달하고 면적이 약 518,000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엄청난 용암 고원이다. 또한 균일론은 산맥 형성과 같은 중요한 지질학적 현상에 대해서도 합리적인 설명을 내놓지 못한다.” 이렇게 쭉 이어가지만 여기까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화석의 형성과 보존에는 갑작스럽고 극적인 변화, 빠른 매몰, 그리고 석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바다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산 정상에서 조개 화석이 발견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한때 그곳이 물로 덮여 있었다는 그런 가능성 뿐입니다.

더글러스 켈리는 자신의 저서 <창조와 변화(Creation and Change)>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수백만 년 동안의 지질학적 작용이 현재의 느리고 자연적인 과정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고 하는 균일론적 가정은 1980년 5월 18일 워싱턴 주의 세인트헬렌스산(Mount St. Helens) 폭발로 인해 심각한 의문에 직면하게 되었다. TNT 2천만 톤에 해당하는 막대한 에너지가 단 6분 만에 400제곱킬로미터의 숲을 파괴했고, 산의 지형을 바꾸었으며, 땅과 암석을 깊이 파내어 그랜드 캐니언의 일부와도 비슷한 지형을 남겼다. 최근의 세인트헬렌트산 현상에 대한 연구는, 만약 균일론적 이론에 따라 연대를 측정한다면 1980년에 형성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수백만 년의 형성 시간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임을 보여준다. 아이러니하게도 균일론적 연대 측정을 입증하는 중심 도구로 사용되는 지질주상도는, 자세히 살펴보면 실제로 격변론을 증언하고 있다.”

이외에도 우주가 젊다는 흥미로운 증거들이 많습니다. 그중에서 제가 아주 흥미롭게 여기는 것은 달의 먼지 문제입니다. 인간이 달 표면에 착륙하기 전에, 달의 나이가 아마도 35억 년일 것이라는 패러다임에 묶여 있었던 일부 과학자들은 달 표면에 아주 두꺼운 먼지층이 있을 것이라고 가정했습니다. 미국 우주 탐사 계획을 자문했던 천문학자인 R. A. 리틀턴(R. A. Littleton)은 이렇게 썼습니다. “달의 표면은 직접적인 햇빛에 노출되어 있으며, 강한 자외선과 X선이 노출된 암석의 표면층을 파괴하고 그것을 1년에 수만분의 몇 센티미터 정도의 비율로 먼지로 환원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 미세한 양만으로도 달의 나이 동안 충분히 수 킬로미터 두께의 층을 형성할 수 있다.” 그러니까 리틀턴은 달이 수 킬로미터 깊이의 먼지로 뒤덮여 있을 것이라는 이론을 세웠습니다.

우주비행사인 닐 암스트롱은 이 글을 읽고는 우주선에서 내려올 때 그 깊은 먼지 속에 빠져서 영원히 질식할 수도 있다는 걱정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먼지가 거의 없었습니다. 만약 먼지 축적 속도 계산이 정확하다면, 수십억 년인데 그런 양의 먼지는 없었습니다. 수백만 년치의 먼지도 없었습니다. 자외선에 의해 먼지가 그렇게 형성된다고 가정할 경우, 겨우 수천 년치 먼지만 있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석유 분출입니다. 석유 저장층이 시추로 뚫리면, 저류층 안의 엄청난 압력이 석유를 뿜어 올려 일종의 간헐천 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석유 형성을 둘러싼 이 강한 압력은 지구가 젊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하는 지질학자들도 있습니다. 딕키(Dickey)를 포함한 여러 연구자들이 이 문제에 관한 연구 결과를 사이언스(Science)지에 발표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어떤 저류층에서든 형성된 압력은 수천 년 안에 주변 암석으로 흘러 빠져나가 소멸해야 한다. 그러므로 석유층 안에서 발견되는 엄청난 압력은 그 연대가 수백만 년이라는 개념을 부정하고, 암석층과 그 안에 담긴 석유의 연대가 만 년 이하라는 젊은 나이를 가리킨다.”

또 제가 정말 좋아하는 사실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헨리 모리스(Henry Morris)는 <성경적 우주론과 현대 과학(Biblical Cosmology and Modern Science)>이라는 책을 썼는데요, 이 책의 6장은 세계 인구와 성경 연대기에 관한 내용입니다. 모리스는 수학적 계산을 통해서 세계 인구가 지구의 나이를 보여준다고 세밀하게 설명합니다. 나중에 모리스는 <과학적 창조론(Scientific Creationism)>이라는 책에서 매우 보수적인 인구 증가율, 그러니까 연평균 0.5%의 성장을 가정했습니다. 현재 인구 증가율의 약 4분의 1에 불과한 수치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그렇게 낮춰 계산해도 지구 인구는 불과 4천 년 만에 현재 수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 수치는 성경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성경 연대기에 의하면 4천 년 전이 대홍수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모리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인류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는 점이 점점 더 명백해지고 있다. 전통적인 성경 연대기가 진화론자들이 가정하는 인류의 수백만 년 역사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다.” 또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진화론자들의 주장이 옳아서 수백만 년이 흘렀다면, 지금 지구 인구는 10의 5000승에 달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결국 우주의 다른 모든 세계를 식민지화하고 성간 공간 곳곳에 우주 도시들을 세운다 해도, 전체 우주에 채울 수 있는 인구는 최대 10의 100승을 넘지 못할 것이다.”

이 문제를 정직한 과학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젊은 지구를 뒷받침하는 충분한 확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구와 하늘의 연대를 규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다양한 물리적 연대기와 화학적 측정 방법들을 살펴보면, 한 가지 사실만 이해한다면 과학은 정확한 답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지금과 동일한 상태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완전히 성숙한 상태로, 마치 오래된 것처럼 보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첫째 날에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만드셨습니다. 둘째 날에는 하늘을 만드셨습니다. 셋째 날에는 땅을 만드셨습니다. 넷째 날에는 빛을 내는 광명체들을 만드셨습니다. 다섯째 날에는 물고기와 새를 만드셨습니다. 여섯째 날에는 육지 생물들과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성숙하고 완전한 상태로 만드셨습니다. 씨앗이나 세포를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수백만 년 동안 끝없이 분열하도록 프로그램된 작은 세포 하나를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씨앗도 없었고, 배아도 없었고, 알도 없었습니다. 이미 다 자란 닭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부분적인 빛, 부분적인 기체, 부분적인 전자기장, 부분적인 핵에너지로 시작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래되어 보이는 성숙한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아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담은 배아가 아니었습니다. 갓난아기도 아니었습니다. 이미 다 자란 성인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자란 상태, 완전한 상태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라는 거대한 사건을 통해서 겉으로 오래되어 보이고 실제로도 연륜을 지닌 성숙한 피조물을 만드셨습니다.

만약에 에덴동산에서 떡갈나무를 발견했다면, 작은 톱을 들고 그 나무를 잘라서 나이테를 세어볼 수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 나이테를 세어보니 400년 된 나무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단 하루가 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성숙한 상태로 창조하셨기 때문이죠. 만약에 독수리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면 30년쯤 된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하루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코끼리들이 거닐고 있었다면 50년, 60년 된 것처럼 보였겠지만 실제로는 단 하루밖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산을 바라보았다면, 그 산과 협곡과 골짜기와 언덕이 바람과 물, 화산 폭발, 지진에 의해서 수천 년 동안 형성된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하루 만에 지어진 것이었습니다. 아담이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그 광대한 우주를 바라보고 얼마나 오래되었을까 궁금해했다면, 그 답은 단 48시간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을 때와 똑같습니다. 아무런 중간 과정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습니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즉각적인 창조였습니다.

진화는 불가능합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무것도 없이 모든 것이 생겨난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터무니없는 주장입니다. 전이형태도 존재하지 않고, 유전학은 진화가 아니라 퇴화를 보여줍니다. 유전자의 변이는 언제나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뿐이고,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질서가 무너지고 약화되는 방향으로만 작용할 뿐, 결코 더 나은 것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유전적 암호 자체가 어떤 전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구조가 아닙니다. 모든 생명체는 주어진 유전학적 한계 안에서만 존재할 뿐, 그 이상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우리가 보아온 것처럼 정직한 지질학은 오래된 세계나 진화하는 세계를 뒷받침하지 않습니다. 화석 기록은 연대를 입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격변을 입증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단지 과학계가 이 문제에서 정직해지길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배경을 두고 이제 창세기 1장으로 돌아가서 분명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주가 지금과 같이 존재하게 된 과정을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1절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히브리어에는 ‘우주’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그 대신에 히브리인들은 ‘하늘과 땅’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바로 ‘우주’를 뜻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바라(bārā), 그러니까 무(無)에서(ex nihilo) 유(有)를 창조하셨습니다. 이미 존재하는 물질도 없었고 이미 존재하는 에너지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는 기원이, 시작이 없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지만 처음부터 창조주이셨던 것은 아닙니다. 영원의 어느 시점에서 창조주가 되셨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창조하셨는가를 질문했고, 그 답을 찾았습니다. 말씀으로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3절이죠.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6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9절에도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계속 반복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만물이 존재하게 하심으로써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언제 창조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약 6천 년 전쯤에 6일 동안 창조하셨습니다. 어쩌면 그보다 조금 더 오래되었을 수도 있지만, 분명히 만 년 이상을 넘지 않은 6천 년에 훨씬 가까운 때입니다.

지난 시간에 다루지 않았던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창조하셨는가 하는 질문이죠. 물론 첫번째 답은 하나님께서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가장 정확하고 참된 대답입니다. 그렇다면 왜 원하셨을까요? 그 대답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조를 통해 하나님은 천사들에게도, 장차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 능력을 깨닫게 될 인류에게도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실 수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영원토록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이 엄청난 창조의 능력이 찬양과 영광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능력은 하나님의 위엄과 성품을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이사야 43장 7절, 또 43장 20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 내 영광을 위하여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창조 안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은 영광스럽고 위대한 지성, 위대한 능력, 위대한 지혜, 위대한 아름다움, 복잡성에 대한 사랑, 그리고 질서와 체계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창조 속에서 하나님은 본성을 무수히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을 창조하심으로써 하나님은 그 외에는 드러내실 수 없었던 은혜와 긍휼을 나타내실 기회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창조의 영광, 그리고 구속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또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에게 신부를 주시기 위해 창조하셨다고 말이죠. 제가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죠. 사실 그 어디서도 읽은 적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다가 문득 제 마음에 깊이 다가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완전한 사랑으로 아들을 사랑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너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 그래서 내가 창조한 인류 가운데서 한 무리를 구속하여 너의 신부로 삼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 신부를 영광으로 이끌 것이고, 그 신부는 영원히 의와 거룩으로 옷을 입을 것이다. 그 신부는 너의 형상을 닮을 것이고, 너를 예배하고 찬양하며 영원토록 섬길 것이다. 이것이 내가 너에게 주는 사랑의 선물이다.” 하나님의 이 영광스러운 계획은 삼위일체의 둘째 위격이신 사랑하는 아들에게 영원한 사랑의 표현으로 구속받은 인류를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인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며, 그리스도를 섬기고 찬양하며 영원히 살아갈 것입니다. 얼마나 크고 놀라운 생각입니까. 얼마나 영광스러운 계획입니까. 이것이 바로 창조 안에 담긴 하나님의 목적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제가 어디서 읽은 게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실망했던 것은, 12세기 저술가 리처드 오브 세인트 빅터(Richard of St. Victor)가 자신의 저서인 <삼위일체론(De Trinitate)>에서 이 엄청난 진리의 요지를 아주 정확히 담아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빅터는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동일하게 무한하신 아들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 아들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들로 채워질 유한한 물질 세계를 무에서 창조하셨다는 겁니다. 그 목적은 아들의 신부로서 그들이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을 따라 유한한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생명의 복에 합당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영원하신 아버지는 아들을 위한 아름다운 신부를 주시기 위해서 온 우주를 창조하셨고, 그 안에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세상을 창조하셔서 신부가 자라날 요람이자 집으로 삼으셨습니다. 이렇게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엄청난 선물은 무에서의 절대적 창조를 필요로 했습니다. 빅터의 가르침입니다. 이 말이 맞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 곧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태초에”라는 말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실재, 곧 시간을 여는 말입니다. 시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시기 전까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영원 속에서 어느 시점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셨고, 그 안에 시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과 물질은 모두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의 종입니다.

시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리고 시간은 창조의 틀을 제공했습니다.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의 창조가 가능했던 것은 시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공간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물질도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시간과 공간과 물질은 결국 없어질 겁니다. 물질 세계가 존재하기 전에, 공간 안에 물질이 존재하기 전에, 시간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피조물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시간을 시간 이전에서 찾는 것은 헛된 일이다. 영적이든 육체적이든 피조물이 움직이며 미래가 현재를 거쳐 과거가 되는 일이 없다면 시간도 있을 수 없다. 피조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움직일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가 시간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말해야지, 창조가 시간 속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둘 다 하나님에게서 왔기 때문이다. 만물이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시간을 다른 모든 것들과 함께 창조하셨습니다. 1절은 그 사실을 일반적으로 진술합니다. 그리고 2절부터 31절까지는 순서대로 나누어서 설명합니다. 이제 첫째 날을 살펴보겠습니다. 아주 정말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첫째 날입니다. 2절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조 첫째 날입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첫째 날이 시작될 때 우리는 지구가 아주 특별한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세 가지 표현으로 묘사됩니다. 혼돈하고 공허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첫째 날 창조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첫번째 표현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주어가 동사보다 먼저 나올 때는 새로운 강조점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땅에 대해 말하자면, 혼돈하고 공허하였다.” 즉, 새롭게 생겨난 이 지구, 앞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다시 창조될 때까지 구속의 이야기가 펼쳐질 무대가 되는 바로 이 지구, 그 새로운 땅이 ‘토후 와 보후(tohu wa bohu)’, 그러니까 혼돈하고 공허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토후 와 보후(tohu wa bohu)’, 혼돈하고 공허했다는 단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기독교 주석가들의 해석은 어느 정도 알기 때문에, 유대인 주석가인 움베르토 카수토(Umberto Cassuto)의 주석을 보았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이것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유대 학자들은 이 단어들의 어원을 어떻게 정의했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토후(tohu)는 황무지를 뜻합니다. 황폐한 곳을 뜻합니다. 폐허가 된 곳을 뜻합니다. 보후(bohu)는 비어 있다, 이런 뜻입니다. 비어 있는 황폐한 곳이 되겠죠. 이해가 되시죠? 비어 있는 황폐한 곳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더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왜냐하면 토후와 보후는 성경의 다른 구절에서도 함께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4장 23절을 보십시오. 아주 중요한 구절입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예레미야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였습니다. “나의 장막과 휘장은 갑자기 파멸되도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까? 바로 유다가 파괴되고 있었습니다. 유다의 멸망입니다. 예레미야는 창세기 1장의 언어를 빌려서 이렇게 말합니다. 23절입니다.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창세기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해서 이방 정복자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 유다의 처참한 현실을 묘사했습니다.

계속 읽습니다. “내가 산들을 본즉 다 진동하며 작은 산들도 요동하며,”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보라 내가 본즉 좋은 땅이 황무지가 되었으며,” 여기 황무지가 나옵니다, “그 모든 성읍이 여호와의 앞 그의 맹렬한 진노 앞에 무너졌으니.”

예레미야는 무엇을 보고 있는 겁니까? 외국 군대에 의해 황폐해진 땅을 보고 있는 겁니다. 연기와 불타는 잔해로 새들이 다 달아나 버린 땅, 사람은 다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끌려가 버려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땅, 완전히 황폐해진 땅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창세기의 언어를 빌려서 사용합니다. 토후와 보후는 사람 하나 없는, 아주 황폐하고 쓸모없게 된 땅을 가리킵니다. 본래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땅, 더 이상 형태도 없고 아름다움도 없는 땅, 학살과 피난으로 인해 아무도 남김없이 비어버린 황량한 땅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에서도 같은 표현이 사용됩니다. 34장 11절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열방에 내리실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34장 1절에서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열국이여 너희는 나아와 들을지어다 민족들이여 귀를 기울일지어다 땅과 땅에 충만한 것, 세계와 세계에서 나는 모든 것이여 들을지어다.” 곧 하나님께서 열방을 향한 분노와 진노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노가 임할 때 세상 나라들 위에 어떤 황폐함이 임할 것인지 설명합니다. 11절에 가면 여러 동물들의 상황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위에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를 드리우실 것인즉.” 여기서 ‘혼란’이 토후이고, ‘공허’가 보후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땅이 황폐하게 되고, 아무도 살지 않는 빈 곳이 될 것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이 단어들, 토후와 보후는 황무지, 사람이 살지 않는 황폐한 곳을 가리킵니다. 형체도 없고 사람도 없는 상태, 곧 황폐한 땅과 인구의 소멸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창세기에서 토후와 보후라는 단어가 쓰일 때는 어떤 기술적인 신학적 용어가 아니라 황폐함, 공허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땅은 황폐했고, 생명이 없었습니다. 이 두 단어의 정확한 의미입니다. 가장 분명하게 표현하자면, 그때 땅은 모양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거주하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첫째 날이 시작될 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질이 존재했습니다. 시간도 공간도 물질도 있었지만, 아직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습니다. 1절에 언급된 창조된 최초의 요소들, 그러니까 태초는 시간, 하늘은 공간, 땅은 물질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존재하게 하셨지만, 아직 구분되지 않았고, 나뉘지 않았고, 조직되지 않고 거주자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형성하지 않으셨고, 우주를 채우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1절에서 언급된 원재료는 바로 시간, 공간, 물질입니다. 형태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그리고 거주자가 없는 상태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두번째입니다. 더 자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2절입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직 빛을 창조하지 않으셨기 때문이죠. 그때까지 빛은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빛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직 어둠뿐이었습니다.

땅은 여전히 형태가 없고 비어 있는 상태였으며 완전히, 절대적 어둠 속에 잠겨 있었습니다. 빛이 전혀 없었고 어둠이 모든 것을 덮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여기서 “땅”이라고 하지 않고 “깊음”이라고 말합니다. 흥미로운 점입니다. 여기서 새로운 요소가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이 태초의 깊음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깊음”은 바다를 가리키는 동의어로 쓰입니다. 2절 하반절입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여기서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 깊음을 물로 정의하십니다. “깊음”이라는 단어는 바다의 동의어로 쓰였습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51장 9절과 10절을 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땅이 어둠 속에 덮여 있는데, 그 어둠이 땅의 표면을 덮을 때 사실상 물의 표면을 덮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땅은 물로 덮여 있었습니다. 땅의 전 표면이 물로 뒤덮여 있었던 것입니다. 깊음, 바다, 전 우주적 어둠에 둘러싸인 태초의 전 지구적 바다였습니다. 시편 104편 5절과 6절에도 동일하게 언급됩니다. “땅의 기초를 놓으사… 옷으로 덮음 같이 주께서 땅을 깊은 바다로 덮으시매…” 옷이 몸을 덮는 것처럼, 땅의 옷은 물이었습니다. 물이 산들 위에까지 덮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아직 형체가 없는 땅은 실제로 물로 덮여 있었습니다.

마치 토기장이가 아름다운 그릇을 빚어 쓰기 위해서 먼저 진흙덩이를 가져다가 물레 위에 올려 자기 뜻대로 빚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먼저 원재료를 만드셨는데, 물로 덮인 원소들의 혼합체로, 온 세상은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양을 주시기 전의 상태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5절에서 말하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땅은 물에서 나왔습니다.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라는 것은 대홍수를 가리킵니다.

잠언 8장 27절입니다.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처음에 물질은 둥근 공 모양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땅을 빚으실 때 사용하실 원소로 구성된 공 모양 덩어리가 있었는데, 물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세번째입니다. 첫째 날 땅의 상태에 대한 이 세번째 설명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저는 이 “운행하다”라는 단어를 사랑합니다. 어머니 새가 날개로 덮고 있는 것처럼 감싸고, 보호하는 것을 뜻합니다. 아직 형태가 없고 생명도 없는 물질이 물에 덮이고 어둠에 잠겨 있을 때에, 그 위를 하나님의 영, 루아흐 엘로힘(ruach elohim), 성령 하나님이 덮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돌보심과 감독하심을 나타냅니다. 욥기 33장 4절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운행하다, 영어로 “호버링(hovering)”이라는 단어는 참 아름다운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용례를 들어보자면 신명기 32장 11절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비유로 사용되었습니다. 거기서 이 단어는 둥지 속의 어린 독수리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됩니다. 아직 스스로 먹을 수도 없고, 스스로를 지킬 수도 없고, 스스로 생존하거나 성장할 수도 없는 어린 독수리들 말입니다. 완전히 부모의 돌봄에 의존합니다. 부모가 그 위를 맴돌며 먹을 것을 주고, 보호해주고, 따뜻하게 해주어야만 살아남고, 생명을 유지하고, 자라며 성장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모습이 이 단어에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왜냐하면 형체도 없고 생명도 없는 물질 덩어리가 물에 덮여 어둠에 잠겨 있을 때, 그 위를 성령님이 ‘운행하셨다’라는 표현에 동일한 히브리어 단어가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이 땅의 표면 위, 곧 물 위를 덮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임재와 돌보심이 마치 새끼를 품듯이 수면 위에 머물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부분은 창조 기사에서 아주 중요한 세부 사항입니다. 사소한 부분이 아닙니다. 한 가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성경적 세계관에서 하나님은 창조에 직접 관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물질 세계와 질서의 운행과 결코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그 위에 계셔서 감독하시고, 머무르시고, 덮으시고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이 창조를 시작해놓고는 떠나버렸다고 말하는 철학적 자연신론과 정반대입니다. 또한 선한 하나님과 영은 따로 있고 악한 세상과 물질은 따로 있다고 구분하는 신학적 이원론과도 반대입니다. 성경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물 위에 임재하시며 감독하시고, 돌보시고, 덮으시면서 창조 전체 과정을 직접 주관하신다고 말합니다. 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성령 하나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욥기 26장에 “그의 입김으로 하늘을 맑게 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33편도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봤던 것처럼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 입 기운”이 바로 하나님의 영, 곧 루아흐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형태를 주고, 질서를 세우고, 생명을 불어넣는 에너지를 제공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신 사역입니다.

창조의 첫번째 사건은 하나님께서 창조의 원재료를 마련하신 후에 일어났습니다. 3절, 곧 첫째 날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과학자들이 수십 년, 수세기 동안 빛이 어디서 왔는지를 두고 고민하고 논쟁하고 헤매고 있는데, 성경은 단 한 구절로 답을 줍니다. 빛이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자 빛이 생겨났습니다. 스스로 빛이신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여 존재하게 하신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6절에 따르면,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오직 어둠만 있던 자리에 창조된 빛이 존재하도록 명하셨고, 빛이 생겨났습니다.

더글러스 켈리(Douglas Kelly)는 이렇게 말합니다. “창조된 빛을 말씀으로 존재하게 하신 것은 창조주께서 혼돈을 질서 있는 우주로 바꾸시기 위해 행하신 세 가지 분리 가운데 첫번째이다. 첫째 날에는 빛이 낮과 밤을 분리했다. 둘째 날에는 궁창이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을 나누어 대기, 곧 호흡할 공간을 이루었다. 셋째 날에는 하늘 아래의 물들이 모여 바다가 되고, 뭍과 분리되었다. 이 세 가지 분리는 하나님의 강력한 손길이 어둡고 물로 뒤덮인 질료 덩어리를 아름다운 동산, 곧 식물과 동물과 인간이 거할 수 있는 합당하고도 아름다운 거처로 빚어가시는 것을 보여준다.”

빛이 창조되면서 낮과 밤, 밝음과 어둠이 교차하는 주기가 세워졌습니다. 5절을 보면 하나님은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로써 밤과 낮의 순환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은 곧 지구가 즉시 자전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지구 한쪽에는 태양과 같은 광원이 있어서 빛이 비추고 있었고, 다른 쪽에는 어둠이 드리워 있었습니다. 태양은 아직 창조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빛을 만드셨고 빛이 생겨났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존재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어두운 방 안에 흩어진 물건들을 정리하기 위해 들어가서 무엇보다 먼저 불을 켜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4절입니다.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이 ‘좋았더라’라는 표현은 10절, 12절, 18절, 21절, 25절, 그리고 31절에서도 반복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이 다 좋았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31절에서는 이렇게 요약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조주의 작품은 본질적으로 좋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이 다 좋았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아주 높은 기준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하나님 자신이 좋음의 기준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좋다고 하시면 좋은 것입니다. 좋음의 기준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오래 전 3세기 신학자인 노바티안(Novatian)이 이 점을 잘 표현했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분께 합당한 말이 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모든 숭고함보다 더 숭고하시고, 모든 높이보다 더 높으시고, 모든 깊이보다 더 깊으시고, 모든 빛보다 더 밝으시며, 모든 광휘보다 더 찬란하시며, 모든 영광보다 더 영광스러우시며, 모든 힘보다 더 강하시며, 모든 권능보다 더 크시며, 모든 아름다움보다 더 아름다우시며, 모든 진리보다 더 진실하시며, 모든 인내보다 더 오래 견디시며, 모든 위엄보다 더 위대하시며, 모든 권세보다 더 강력하시며, 모든 부요보다 더 풍성하시며, 모든 지혜보다 더 지혜로우시며, 모든 친절보다 더 친절하시며, 모든 선보다 더 선하시며, 모든 정의보다 더 정의로우시며, 모든 긍휼보다 더 긍휼이 많으시다. 모든 덕은 반드시 하나님보다 작을 수밖에 없으니, 하나님이야말로 모든 것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참으로 위대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모든 빛과 마른 땅과 바다와 다양한 종류의 동물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좋았다는 뜻입니다. 좋지 않게 된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타락 때문입니다. 인간의 반역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히 선한 창조가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시작은 좋았습니다.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이사야 45장 7절입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날들의 순환이 시작된 순간입니다.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나누셨습니다.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셨지만 어둠을 없애지는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원하신 것은 영원히 빛만 존재하는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빛과 어둠이 번갈아가며 운행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빛과 어둠이 일정한 주기 속에서 변함없이 연속적으로 운행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합당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땅이 자전하도록, 빛과 어둠이 번갈아 운행되도록 만드셨습니다.

5절에서 하나님은 이름을 주셨습니다.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죠. 첫째 날부터 빛이 있었고 어둠이 있었습니다. 낮이 있었고 밤이 있었습니다. 이 빛과 어둠, 낮과 밤의 끊임없는 순환이 첫째 날부터 지금까지 이 우주와 이 땅의 성격을 규정해 왔습니다. 그리고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낮이 지나면 어둠에 할당된 시간이 오는데 그것을 저녁이라고 불렀습니다. 밤이 지나면 빛에 할당된 시간이 오는데 그것을 아침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과 함께 성경은 최초의 하루가 완성되었음을 알려줍니다. 그날 무엇이 창조되었습니까? 빛입니다. 빛이 창조되었습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런데 해가 없는데 어떻게 빛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건 저도 모릅니다.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빛 자체는 창조를 못하시겠습니까?

첫째 날은 참으로 놀라운 날입니다. 혹시 이것이 어떤 진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5절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히브리어의 문자적인 번역입니다. 십억 년이 아니라 하루입니다. 빛과 어둠의 한 주기, 저녁과 아침, 그렇게 창조가 되었습니다. 다음주에 둘째 날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영국의 시인 존 드라이든(John Dryden)이 뛰어난 상상력을 가지고 성 체칠리아(St. Cecilia's Day)의 날을 위해 시를 하나 지었습니다. 아마 1687년쯤에 쓴 것으로 보입니다. 이 장엄한 창조에 관한 시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George Frederick Handel)이 곡을 붙였습니다. 노래를 부르지는 않고 가사만 읽어드리겠습니다. 드라이든은 창조를 주제로 이런 글을 썼습니다.

“자연이 충돌하는 원자 더미 아래 깔려 머리를 들지 못하고 있을 때, 위에서 선율의 음성이 들렸다. ‘일어나라, 죽은 자들보다 더 죽은 자들이여.’ 그러자 차가움과 뜨거움과 습함과 마름이 질서 있게 제자리를 찾아 뛰어올라 음악의 힘에 순종했다. 하늘의 화음으로부터 이 우주의 구조가 시작되었고, 화음에서 화음으로 음계를 따라 흘러가 마침내 인간 안에서 온전한 결말에 이르렀다. 거룩한 노래의 힘으로 천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위에 있는 모든 복된 자들에게 위대한 창조주의 찬송을 드렸다. 그러므로 마지막 두려운 때가 와서 이 무너져가는 무대가 삼켜질 때, 나팔 소리가 위에서 울려 퍼지고 죽은 자는 살아나고 산 자는 죽으며, 음악은 하늘의 질서를 해체할 것이다.”

정말이지 놀라운 시이지만 결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창조 세계는 타락으로 인해 부패하게 되었고 언젠가 그 부패 속에서 해체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결코 다시는 부패를 알지 못할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며 장차 그곳에서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말씀의 능력과 그 명확함에 감사드립니다. 첫째 날, 불과 몇 천 년 전 하나님께서 빛을 존재하게 하셨고,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우주와 땅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으신 그 분명한 기록으로 인해 감사드립니다. 모든 찬양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십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으셨고, 하나님이 없이는 지어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 곧 인간이 살아갈 세상을 주시고 그 가운데서 아들을 위해 신부를 택하여 영광으로 인도하시려는 목적으로 우리를 창조하시니 감사합니다. 창조의 그 크고 놀라운 목적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그 일부로 삼아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경외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우리에게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멘.

This sermon series includes the following messages:

Please contact the publisher to obtain copies of this resource.

Publisher Information
Unleashing God’s Truth, One Verse at a Time
Since 1969

Welcome!

Enter your email address and we will send you instructions on how to reset your password.

Back to Log In

Unleashing God’s Truth, One Verse at a Time
Since 1969
Minimize
View Wishlist

Cart

Cart is empty.

Subject to Import Tax

Please be aware that these items are sent out from our office in the UK. Since the UK is now no longer a member of the EU, you may be charged an import tax on this item by the customs authorities in your country of residence, which is beyond our control.

Because we don’t want you to incur expenditure for which you are not prepared, could you please confirm whether you are willing to pay this charge, if necessary?

ECFA Accredited
Unleashing God’s Truth, One Verse at a Time
Since 1969
Back to Cart

Checkout as:

Not ? Log out

Log in to speed up the checkout process.

Unleashing God’s Truth, One Verse at a Time
Since 1969
Minimiz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