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 마태복음 7장을 펴고 예수님이 전하신 산상수훈의 마지막 부분을 보겠습니다. 산상수훈은 복음적인 설교입니다. 유대인들의 거짓된 종교 형태에 대한 확신을 무너뜨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로 인도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죠. 산상수훈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은 초대하고 계십니다. 13절부터 시작되죠. 이 마지막 부분을 살펴볼 텐데, 그 중에서도 21절부터 23절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읽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은사주의 운동을 다루는 집회에서 이 말씀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거짓 신자들이 예언을 하고 귀신을 쫓고 기적을 행했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은사주의 진영의 주장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이 부분에서 예수님이 하신 마지막 말씀은 너무도 당연한 말씀입니다.
오래된 흑인 영가 중에 “천국을 말하는 모든 이가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라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신약 시대 이래로 계속된 일이죠. 잠언 30장 12절입니다.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도 자기의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여기에서 ‘무리’는 ‘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2절은 이스라엘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세상에는 외적인 기독교인, 자칭 기독교인들이 수백만 명이나 있습니다. 스스로를 기독교인처럼 느끼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도록 유도되었을 뿐입니다. 지옥에서 벗어나 천국에 가기를 바라겠지만 결국에는 가지 못하게 될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천국을 기대하지만 결국 지옥에 가게 될 사람들이 수백만 명이나 됩니다.
우리 주님은 사역 초기부터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2장 23절입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기적에 이끌려 예수님의 이름을 믿었습니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이 피상적인 믿음임을 아셨습니다. 경험과 기적에 이끌린 믿음이었습니다. 외적인 믿음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여 주여"라고 말하지만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이죠.
이제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로마서 10장 9절부터 10절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것은 구원에 필수적입니다. 이는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충격적인 것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지만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외쳐 부르더라도 지옥으로 향할 뿐입니다.
산상수훈의 끝부분에 있는 이 초대의 말씀을 읽는 모든 사람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거짓 믿음과 참된 믿음,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과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극명하게 대조되고 있습니다. 두 가지 길, 두 가지 방식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세상에 이렇게 수많은 종교가 있는데 어떻게 선택지가 두 개밖에 없단 말입니까?” 그 이유는 천국으로 가는 길이거나 그렇지 않은 길이거나 둘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은 길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을 수 있지만, 결국에는 같은 길입니다. 모두 같은 곳으로 향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교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인간의 성취를 강조하는 종교로서 선행이나 도덕, 종교 의식과 의례를 통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는 세상의 모든 종교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성취를 강조하는 종교로서 천국에 가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인정하는 자들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는 종교입니다. 행위와 육체, 공로, 각종 의식과 의례를 의지한다면 결국 지옥으로 가게 될 뿐입니다. 오직 믿음과 은혜와 성령을 의지하는 것만이 참된 길이죠.
첫 번째 길은 인간이 하는 일과 관련이 있고, 두 번째 길, 참된 길은 하나님이 하신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노력으로 천국에 가려고 한다면 율법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소망은 사라지고 오직 저주만이 남게 되죠.
반면에 우리가 하나님의 방식으로 천국을 구한다면, 은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은혜 아래에는 율법이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 소망이 생기고 저주가 사라집니다.
물론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인간의 성취를 강조하는 종교에 속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공로와 의, 종교 활동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얻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유대인들을 로마서 11장 28절에서 “복음에 관하여는 원수”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실제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로마서 10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니까 세상에는 자신의 공로, 자신의 참여, 자신의 도덕성, 자신의 의식, 자신의 좋은 감정, 자신의 태도, 자신의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경험을 통해 하나님과 천국에 다가가려는 그런 종교가 있습니다.
반면에 참된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죄인이 기여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점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구분하시는 부분입니다. 주님은 일련의 대조를 보여주십니다. 앞서 읽어드린 말씀을 떠올려 보겠습니다. 넓은 문과 좁은 문, 두 개의 문이 있습니다. 널찍한 길과 비좁은 길, 두 개의 길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과 적은 사람, 두 종류의 군중이 있습니다.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 말만 하는 자와 행하는 자,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반석과 모래, 무너지지 않는 집과 무너지는 집이 있습니다. 매우 명확한 대조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둘 다 천국을 약속합니다. 아무도 지옥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우리와 함께 지옥으로 갑시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천국”이란 팻말이 붙은 널찍한 길은 결국 지옥으로 향합니다. 하지만 그 길 위에 있는 사람은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게다가 사람들을 널찍한 길로 내몰고 있는 것에 아주 열심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15절부터 20절에 나오는 양의 옷을 입고 있는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겉은 양처럼 보이지만 속은 노략질하는 이리죠. 이들의 삶에 나타나는 나쁜 열매가 타락을 입증합니다.
이렇게 세상은 천국에 이르는 두 가지 길을 제안합니다. 하나는 거짓 길로 지옥으로 향합니다. 다른 하나는 참된 길로 천국으로 향합니다.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이제 이 대조를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3절에 나오는 두 개의 문에서 시작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두 길 모두 종교적입니다.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기독교를 부정하는 무신론이나 불가지론이 아닙니다. 또는 한 분 하나님을 부정하는 이교도주의, 범신론, 애니미즘이 아닙니다. 천국을 약속하는 두 가지 종교적인 길, 즉 하나님이 우리가 가기를 원하시는 길이며 천국으로 향하게 한다고 약속하는 두 가지 종교적인 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두 길 모두 천국을 약속하지만 오직 한 길만이 천국에 이르게 합니다.
이제 13절에서 우리는 한 가지 명령을 발견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이는 명령입니다. 지시입니다. 즉각적으로 반응해야 하는 부르심입니다. 다른 대안이 없는 부르심입니다. 이러한 부르심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깨닫게 됩니다. 몇 가지 요점을 통해서 이 중요한 말씀을 분석해 보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반드시 들어가야만 합니다. 반드시 들어가야 합니다. 천국으로 가는 참된 길은 명확히 제시되어 있습니다. 좁은 길입니다. 좁은 길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들어가야 합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저 감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공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비평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감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지옥은 예수님을 칭송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지옥은 심지어 산상수훈을 칭송했던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지옥은 기독교 교회와 기독교 단체에 속했던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들은 결코 좁은 길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저 감탄할 뿐이었습니다.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분석도 했겠죠. 하지만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들어가야 합니다. 반드시 들어가야 합니다. 완전히 들어가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반드시 이 문으로,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왜 좁은 문일까요? 오직 한 가지 방법으로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좁은 문인 이유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0장에서는 “내가 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통해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저주를 받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 점을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지만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안에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통하지 않아도 된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도 천국에 갈 수 있다.” 또 다른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방인들도 그리스도 없이 천국에 갈 수 있다. 하나님은 이들을 마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기 전에 살았던 것처럼 대하실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들어가야’ 합니다. 반드시 이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 문은 오직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뿐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요한복음 3장에 의하면, 멸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들어가야 합니다. 반드시 이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 문은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 참된 그리스도와 참된 복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번째입니다. 우리는 홀로 이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 문은 좁은 문입니다. 단체를 위한 문이 아닙니다. 군중을 뒤로하고 홀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은 은사주의 운동 안에서 일어나는 집단 광란과 관련하여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입니다. 이 집단 광란은 락(Rock) 콘서트에서 일어나는 것과 동일합니다. 사용되는 용어만 다를 뿐이죠. 예수님의 말씀을 사용하지만 많은 경우에 감정적으로 고조되어서 통제를 벗어난 광란일 뿐입니다.
우리가 들어가는 이 문은 매우 좁은 문입니다. 한 번에 한 명씩 지나갈 수 있는 회전문을 떠올려 보십시오. 회전문은 혼자만 지나갈 수 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이죠. 사실 회전문은 아주 좁아서 아버지나 어머니, 형제, 자매, 친구, 그 어떤 지인과도 같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회전문은 단체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한 번에 한 명씩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수년 동안 말씀드린 바가 있죠. 하나님 나라는 한 번에 한 사람만 들어가는 곳입니다. 한 번에 한 영혼만 들어갈 수 있죠. 우리는 반드시 홀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평생 동안 광란의 군중 속에서 달려왔고 집단에 속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어떤 기독교 단체는 이렇게 말합니다. “좋습니다, 모두 함께 데려오세요.” 그리고 감정적인 과장 속에서 집단적인 광란에 휩쓸립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부인하고, 가족을, 친구를, 여러분의 삶을 부인해야 하며, 여러분이 알고 있던 모든 것을, 아마도 여러분이 알고 있던 모든 사람을 거부하고 완전히 홀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처음으로 군중과 함께 달리는 것을 멈추는 순간입니다. 대중과 함께 떠다니는 일을 멈추고 홀로 들어가야 합니다.
저는 이런 메시지를 은사주의자들에게서 들은 적이 없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집단적 속임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홀로 들어가야 합니다.
넷째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들어가야 합니다. 반드시 이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반드시 이 문을 홀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이 문을 홀로 어렵게, 어렵게 들어가야 합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왜 어려운 거죠?” 14절 끝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찾는 자가 적음이라.” “찾는 자가 적음이라.” 왜 찾기가 어려울까요? 왜 그 문을 찾기가 어려울까요?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5절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삼가라.” 이들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도처에 있습니다.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을 다른 문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좁은 문을 찾는 자가 적은 겁니다.
그런데 그 문을 찾는다고 해도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누가복음 13장 24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요? 그만큼 힘든 일이라는 건가요? 저는 이 말씀을 전하는 은사주의자를 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여기서 “힘쓰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고니조마이(agōnizomai)’는 격렬한 투쟁, 고통을 의미합니다. 사실, 마태복음 11장 12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신자가 된다는 것은 침노하는 일, 직역하면 폭력을 행사하는 일입니다. 홀로 이 문을 통과한다는 것은 폭력적인 일입니다. 또 누가복음 16장 16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왜 그렇게 어려운 걸까요? 왜 그렇게 힘든 걸까요? 우선은 찾기가 어렵습니다. 누군가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이렇게 말한다고 합시다. “좁은 문을 찾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얼마나 많은 곳을 가봐야 할까요? 얼마나 많은 곳을 찾아다녀야 할까요? 그리고 일단 찾았다 하더라도 통과하려면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완전한 회개와 자기 부인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5장 6절부터 7절입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싶습니까? 회개하십시오. 악한 길을 버리십시오. 불의한 삶을 버리십시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아야 할 전부입니다.
예레미야는 이 점을 좀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묘사합니다. 예레미야 29장 13절, 예레미야 29장 13절입니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모든 것을 다 바쳐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게 됩니다. 이 길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그만큼 좁은 길입니다. 찾기도 어렵지만 찾았다고 해도 들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고통스러운 경험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던 모든 것을 밖에 두고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오직 열정적인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오직 전심전력을 다하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오직 깨어진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되는 파티가 아닙니다.
우리는 은사주의 운동을 바라보면서 그 운동이 얼마나 어리석고 우매하고 천박한지 알 수 있습니다. 때로는 자칭 “설교자”가 코미디언은 아닌지 의아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영혼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심각한 일이자 파괴적인 일입니다. 정말로 파괴적인 일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왜 어려울까요? 죄인들이 죄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다섯번째입니다. 우리는 이 ‘문’이신 그리스도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 문으로 홀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돌아서서 회개하는 어려움을 이겨내고 이 문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벌거벗은 채로 들어가야 합니다. 짐을 잔뜩 진 채로는 회전문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9장 23절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어느 정도로 부인해야 할까요? 요한복음 12장 25절에 따르면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정도까지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부터 46절에 있는 짧은 두 비유에서 예수님은 보화를 찾은 사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밭에서 보화를 발견한 후, 모든 것을 팔아 그 보화를 샀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 모든 것을 팔아 그 진주를 샀습니다. 이 짧은 두 이야기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발견할 때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두 비유에서 반복되는 핵심 내용은 그 사람이 모든 것을 팔았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바로 누가복음 9장과 마태복음 10장이 말하는 자기 부인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아까 “벌거벗고” 들어가야 한다고 말씀드린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자기 의를 가져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이룬 것, 자기 성취를 가져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팔복에서 말하는 상태로 나아가야 합니다. 무엇이었죠?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시작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자기 자신의 파산을 의미합니다. 자기 자신이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파산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자기 성취나 업적, 종교적 행위를 가지고 나올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벌거벗겨져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을 팔아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8장의 세리와도 같습니다. 세리는 성전에서 가슴을 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세리는 아무것도 바치지 않았습니다. 그 옆에는 이렇게 말하는 바리새인이 있었습니다.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자기 가슴을 치는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이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리려고 하는지 확인하시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소유를 전부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부자 청년은 돌아갔습니다. 너무 어려운 일이었던 겁니다.
처음부터 세례 요한은 회개를 전했습니다. 예수님도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가 영적으로 파산했고 공허한 상태임을 깨달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에 대해 애통하고, 죄로부터 돌아서려고 애쓰고, 죄의 심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팔복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영적으로 파산했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자신의 상태에 대해 애통하는 자입니다. 온유하고 상한 심령을 가진 자입니다. 자신에게 의가 없음을 알고,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른 자입니다.
저는 은사주의 운동에서 이런 종류의 설교를 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은사주의 운동에서 이런 종류의 초대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이렇게 말할 뿐입니다. “파티에 참여하세요. 유행을 따라가세요. 치유를 받으세요. 부자가 되세요. 예언을 받으세요,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말씀하시게 하세요, 그러면 행복해질 겁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과는 완전히 거리가 멉니다.
우리는 들어가야만 합니다. 이 문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이 문으로 홀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어려움을 이겨내고 들어가야만 합니다. 벌거벗은 채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복종하며 들어가야만 합니다. 몇 년 전에 저는 <노예>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우리는 정말 노예가 되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에는 노예제도가 존재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제도를 증오하면서 자유를 원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 겁니다. “복음을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노예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족을 버리고 미워해야 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 자매를 미워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생명도 미워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소유 전부를 내려 놓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께 전적으로 복종해야 합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어떤 신비한 경험인가요? 아닙니다. “기꺼이 죽을 각오를 하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요? 기꺼이 죽어야 할 만큼 중요한가요? 누군가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 봅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면 교수형에 처할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렇게 하실 건가요? 이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기꺼이 죽을 수 있습니까? 참된 신자라면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물론 나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할 것이다. 나는 언젠가 결국 죽게 될 것이고, 이 상태로 죽는다면 영원히 지옥에 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공허한 상태를 깨닫고, 죄에 대해 애통하며, 죄에서 돌아서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심판에서 구원받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여러분이 원하는 것이라면 모두 주시는 그런 분으로 선전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일입니다. 말하기만 하면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예수님이 모든 꿈을 이루어주실 거라고 믿는 것도 재고해 봐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4장에서 두 가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죠.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비용을, 치러야 할 대가를 계산해 보라고 하십니다. 치러야 할 대가는 무엇입니까? 모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이방 나라 곳곳을 다니며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힌 유대인의 노예가 되라고 외치는 모습이 상상이 되십니까?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제안입니다.
사실 그 당시에는 오늘날보다 훨씬 더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노예제도는 없지만 핵심 메시지는 동일합니다. 평생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는 초대입니다. 여러분이 그 문을 통과할 때는 모든 것을 밖에 남겨두고 들어가야 합니다. 여러분을 위한 모든 영적 공급은 예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실 것이며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시리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할 순간이 올 때까지 어떤 인간도 할 수 없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좁은 문 앞에 서기 전까지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죠. 이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 좁은 문과 대조되는 넓은 문이 있습니다. 넓은 문입니다. 정말 넓죠. 무슨 뜻일까요? 제약이 없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떼로 몰려오셔도 됩니다. 친구들과 함께 오세요. 음악에 취해 보세요. 재미를 느껴보세요. 체험해 보세요. 어려움도 없고 자기 부인도 없습니다. 교만해도 됩니다. 그저 죄를 고백하기만 하면 됩니다. 회개할 필요도 없습니다.’
거대한 종교인 무리가 자신들의 모든 짐과 소유물과 욕망을 가지고 넓은 길로 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나는 예수님께 가겠어, 예수님이 나를 부자로 만들어 주실 테니까." "나는 예수님께 가겠어, 예수님이 나를 건강하게 해주실 테니까." "나는 예수님께 가겠어, 예수님이 내 결혼 생활을 고쳐주실 테니까." "예수님이 나를 영향력 있게 만들어 주실 거야." "예수님이 나를 만족시켜 주실 거야." 한마디로 예수님을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의 육체적 욕망을 충족시켜 줄 분으로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거대한 무리가 넓은 문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두 개의 문, 좁은 문과 넓은 문이 있습니다. 이제 두 개의 길이 나옵니다. 매우 다른 길이죠. 13절에는 넓은 길이 있고, 14절에는 좁은 길이 있습니다. 넓은 길에는 다양한 교리를 위한 공간이 충분합니다. 여러분은 원하는 모든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논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은사주의자들은 우리가 분열을 일삼고 편협하며 사랑이 없다고 비난하죠. 모든 교리를 없애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넓은 길입니다. 그냥 오기만 하면 된답니다. 무엇을 말하든 무엇을 믿든 상관이 없답니다.
그래서 5억 명의 은사주의자 중에서 1억 2천만 명이 배교적이고 이단적이며 부패한 교리를 가진 로마 카톨릭 신자들인 겁니다. 2천 5백만 명은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오순절파입니다. 90%는 예수님이 우리를 부유하고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다는 번영복음을 믿습니다. 이들 중 대다수는 신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이 넓은 길이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그 길이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판매 방법입니다. 오늘 아침 나이지리아 출신의 한 목사님과 얘기를 나눴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저는 전에 은사주의 교회에 있었는데, 교인이 천 명이었죠. 그러다 진리를 깨닫고는 은사주의 교회를 떠났습니다. 이제 저는 참된 진리를 전합니다. 교인이요? 백 명 정도 됩니다.” 이것이 넓은 길의 실체입니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15절부터 20절에 나오는 입장권 판매원들은 거짓 선지자입니다. 자신들이 하는 일에 능숙합니다. 어둠의 왕국에 속해 있죠.
반면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참된 길은 좁습니다. 좁고 길이 협착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매우 제한적이라는 뜻입니다. 무엇이 제한적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죠? 지상대명령이 무엇입니까?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것이 우리가 사는 방식입니다.
복음주의 교계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인기 있는 접근법이 있는데 이런 주장을 합니다. “우리가 성화되기 위해서는 단지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슬픔을 느끼고 십자가에 감사하기만 하면 되죠.” 소위 십자가 중심의 성화랍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합니다. “의무감에서 순종한다면 그것은 죄가 된다.” 잘못된 신학입니다. 저는 사랑으로 순종하기도 하고 감사함으로 순종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솔직히 두려움 때문에 순종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항상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제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제가 하나님을 하나님 자체로 사랑하는 방식일 뿐이죠.
이것은 좁은 길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신학을 바꿀 수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부도덕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물질주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좁은 길에 있는 우리는 세속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비용을, 대가를 잘 계산해 봐야 합니다. 참된 복음은 치유를 약속하지 않습니다. 건강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완벽한 결혼 생활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돈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용서와 하나님의 축복, 능력 외에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것이 아닌 천국의 것들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두 가지 목적지가 나옵니다. 13절입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멸망은 지옥을 뜻합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문 팻말에 “천국”이라고는 쓰여 있지만 천국으로 인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옥으로 인도합니다. 영원히 형벌을 받고 눈물을 흘리고 통곡을 하고 이를 갈게 됩니다. 14절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생명으로 인도한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 천국의 영광스러운 복으로 인도한다는 뜻입니다.
넷째로, 두 무리가 나옵니다. 넓은 길에는 들어가는 자가 많습니다. 13절입니다.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좁은 길은 찾는 자가 적습니다. 사람이 적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믿습니다. 우리는 최근 몇 달 동안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은사주의 운동이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관여하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 그럴까요? 저는 오히려 사람들의 수가 적어야 진정한 하나님의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하나님을 제한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교리적 구별을 하지 않고, 구원받지 못한 육체가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넓은 길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좁은 길은 찾는 자가 적습니다.
누가복음 13장 23절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상황을 파악하려고 합니다. 메시아가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크게 기대했습니다. 메시아는 기적을 행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메시아를 사랑하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동참하려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누가복음 13장 23절입니다.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왜일까요? 자신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기꺼이 버리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2장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이사야 6장을 보면 이사야는 하나님의 위대한 환상을 봅니다. 그 끝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남은 자가 있을 것이다. 십분의 일, 그루터기, 거룩한 씨가 남아 있을 것이다.” 넓은 길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22절이 말하는 “많은 사람”일 뿐입니다. 13절 끝에 나오는 넓은 길에는 들어가는 자가 많습니다. 22절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여기에 두 가지 행동이 나옵니다. 두 가지 행동입니다. 말하는 자들과 행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거짓 고백은 일종의 모독입니다. 주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계명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멸망할 자들은 공허한 마음에서 나오는 공허한 말을 합니다. 진정한 회개가 없습니다. 진정한 믿음이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이 없습니다. 진정한 순종이 없습니다. “주여, 주여.” 물론 어느 정도의 열정이 있긴 하겠죠. 그렇죠? 어느 정도의 열정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존경심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 정통적입니다. “주여, 주여”라고 외칩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자신들이 기적을 행했다고 합니다. 반면에 이렇게 말하지는 않죠.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회개하지 않았나이까?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순종하지 않았나이까?”
22절을 보면 “주의 이름으로”가 세 번 나옵니다. 우리는 원하는 만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한 노래에서 50번을 부를 수도 있습니다. 흔한 일입니다. 정말 흔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오늘날의 은사주의자들을 염두에 두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주님께 속했다는 증거가 예언하고 귀신을 쫓아 내고 기적을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이런 일을 행했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당연히 아닙니다. 논쟁할 필요가 있을까요?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예수님은 자신의 나라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기적을 행하거나 사탄을 쫓아내거나 예언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계시할 능력을 주시지 않습니다. 거짓된 주장입니다. 거짓된 주장일 뿐입니다. 마치 현대의 은사주의자가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예언합니다. 우리는 귀신을 쫓아냅니다. 우리는 기적을 행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어떤 관계도 없습니다. 자신들의 영원한 운명이 사기에 불과한 표적으로 확증된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깝게도 지옥은 이처럼 예언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기적을 행한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예배자라고 주장합니다. “주여, 주여”라고 말하고 다시 "주여, 주여,"라고 말합니다. 21절에서 한 번, 22절에서 한 번 말합니다. 노래를 부릅니다. 에너지를 느낍니다. 그 경험의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날에, 23절입니다, 그들이 최후의 심판의 날에 나타날 때,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라고 하십니다.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내가 한때 너희를 알았는데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니다. 나는 너희를 전혀 알지 못했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지옥으로 가라는 것이죠. 이는 우리가 행하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거짓으로 유도될 수 있는 체험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헬라어로 직역하면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나는 너희를 결코 안 적이 없다.”
누군가의 영적 상태는 하나님의 율법을 행하는지 행하지 않는지에서 드러납니다. 거짓된 고백은 가치가 없습니다. 일종의 모독일 뿐입니다. 주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것입니다. 오래 전 영국의 주석가 G. 캠벨 모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소에서의 신성모독은 빈민가에서의 신성모독보다 더 끔찍하다.” 유다도 예수님께 “주여, 주여”라고 했으면서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결론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슬픈 일이지만, 저는 은사주의 운동에 휘말린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말을 듣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프 오하라는 몇 년 전에 이렇게 썼습니다. “왜 나를 '주여, 주여'라고 부르면서 내가 말한 것을 행하지 않느냐? 너희는 나를 '길'이라고 부르지만 나를 따르지 않는다. 너희는 나를 '생명'이라고 부르지만 나와 함께 살지 않는다. 너희는 나를 '주인'이라고 부르지만 순종하지 않는다. 내가 너희를 정죄해도 나를 탓하지 마라. 너희는 나를 ‘생명의 떡’이라고 부르지만 먹지 않는다. 너희는 나를 '진리'라고 부르지만 믿지 않는다. 너희는 나를 '주님'이라고 부르지만 섬기지 않는다. 내가 너희를 정죄해도 나를 탓하지 마라."
두 개의 문, 두 개의 길, 두 개의 목적지, 두 무리의 사람들, 두 가지 고백,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가지 기초가 있습니다. 24절부터 27절입니다. 강력한 비유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실제로 행하고 순종하는 자는, 말하자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좁은 문을 통해 좁은 길로 오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또는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그 집이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최후의 심판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두 집 모두에 대한 최후의 심판입니다. 동일한 폭풍이 두 집 모두를 강타합니다. 이 집들은 같은 위치, 같은 장소에 지어졌으며, 외관상으로는 똑같아 보입니다. 우리는 집을 볼 수 있지만 그 집의 기초까지는 볼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라지를 뽑아내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이유 중 하나는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심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두 사람, 두 무리의 사람들 모두 집을 지었습니다. 종교적 건물을 세웠습니다.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모두 교회에 가고, 여러 활동에 참여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고, 벽과 창문, 문과 지붕을 세우고, 종교적 활동의 구조를 세웠을 겁니다. 두 집 모두 동일한 장소에 지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동일한 폭풍에 맞기 때문입니다. 차이를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반석 위에 있고, 다른 하나는 모래 위에 있습니다.
반석이란 무엇일까요? 순종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예수님이 가라고 하신 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회개와 자기 부인의 태도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석 위에 세운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47절부터 48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반면에 쉬운 길을 선택한 사람들은 모두 감정적이며, 군중에 휩쓸리고, 지름길을 찾고, 빠른 해결책을 추구하고, 영혼의 확신을 가질 시간도 없고, 상한 마음을 가질 시간도 없으며, 회개의 고통을 겪을 시간도 없습니다. 희생할 시간도 없고, 모든 것을 버릴 시간도 없습니다. 죄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진정한 거룩이 무엇인지 이해할 시간도 없으며,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진정으로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다 심판의 폭풍, 즉 최후의 심판 때가 오면 모래 위에 세운 집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사라집니다. 그렇게 최후의 심판으로 집의 진정한 상태가 드러날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찬양이 있습니다.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주 나의 반석 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이 찬송가의 원문 가사를 보면 마지막 후렴구에서 예수님 외에는 모두 허물어지는 모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속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몇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집단에 의해 강화된 잘못된 소속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성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입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은사주의 운동의 설교자들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고 전하지 않습니다. 그저 활동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 활동은 외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닌 감정, 축복, 경험, 치유, 천사 등을 추구합니다. 건전한 교리에 무관심하고 은혜의 이름으로 지나친 방종에 빠지죠.
제가 은사주의자들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믿음 안에 있는지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는 겁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런 질문을 한다고 해 봅시다. “내가 과연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넓은 길에서 벗어나 좁은 길에 들어서기 위해, 좁은 문을 통해 좁은 길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마태복음 7장 7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처음 나오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구하라”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요?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게 좁은 문을 보여주세요. 그 안으로 들어가게 해주세요.” 또한 찾아야 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이것으로 충분할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구하라, 구하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다시금 풍성한 복을 받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토록 놀라운 예배의 정점에는 주님의 진리가 있습니다. 진리로 예배를 인도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오늘 말씀이 우리 마음에 깊이 새겨지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응답하실 것을 믿고 주님께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하옵소서.
주님, 이 다른 불에서 사람들을 끌어내어 구원하여 주옵소서. 은사주의 운동에 속고 있는 영혼들을 구원하여 주옵소서. 이들 역시 영원한 존재입니다. 저희를 주님의 백성을 부르시는 일에 사용하여 주신 것처럼,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사용하셔서 그들을 구원하여 주옵소서.
말씀이 선포될 때 헛되이 되돌아오지 않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헛되지 않습니다.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말씀을 통해 이루려 하신 것을 항상 이루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확신과 약속을 가지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존귀와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사람들을 좁은 문으로 인도하여 주시고, 그 문을 지나 생명으로 향하는 좁은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주님을 찬양하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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