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저는 ‘예수님이 전해주신 복음’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전해준 복음’도 썼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바울이 전해준 복음’을 쓰고 있는데요, 이 책을 끝으로 삼부작을 완성할 예정입니다. 오늘날에는 이 바울이 전해준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합니다. 복음이 세상의 공격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 신학자들은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이라는 사상을 만들고서는 바울이 성경에서 제시한 칭의 교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약성경에 기록된 복음, 즉 바울이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한 복음을 정확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목요일 저녁부터 며칠동안 계속 살펴보고 있는 거죠. 먼저 고린도후서 4장을 통해 복음의 영광을 살펴봤습니다. 다음으로 로마서 3장에서 만족하게 하는 복음을 살펴봤고, 고린도후서 5장을 통해 화목하게 하는 복음을 살펴봤습니다. 어제는 주권적인 복음을 살펴봤죠. 이제 마지막으로 오늘 아침에는 겸손하게 하는 복음을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보통 설교할 때는 몇 구절을 심도있게 다루곤 하는데요,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제한된 시간 내에 가능한 한 성경의 많은 부분을 다루고 싶었습니다. 때로는 몇 장을 한 번에 훑어 보기도 했습니다. 바로 어제 토요일에 로마서 9장, 10장, 11장을 한꺼번에 살펴봤죠. 바울이 전해준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전반적인 내용을 살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럼 오늘 아침에는 고린도전서 1장과 2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평소처럼 한 구절씩 자세히 살펴보기보다는 전체적으로, 개괄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주제와 관련된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겸손하게 하는 복음’을 살펴볼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필요한 다른 것들을 먼저 살펴본 후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일단 질문을 먼저 드립니다. 우리는 왜 성경을 사랑할까요? 이 컨퍼런스(Truth Matters Conference)에는 왜 오셨습니까? 왜 그레이스 커뮤티니 교회에 나오시나요? 왜 매주 교회에 나오십니까? 왜 소그룹 모임에 참석하고, Grace to You 웹사이트에 방문해서는 설교를 다운로드 하십니까?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이런 갈급함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생기는 걸까요? 무슨 이유로 이런 식을 줄 모르는 열정을 갖고 계십니까? 재미도 없고 단지 하나님 말씀만 집중적으로 다루는 이 교회에, 여러분의 소중한 물질과 시간을 들여 가면서 왜 찾아오셨습니까? 이러한 사랑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여러분은 왜 성경을 사랑하십니까? 복음을 왜 사랑하십니까?
참으로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다른 사람들보다 똑똑하거나 더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걸까요?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보다 설득력 있는 주장을 들었기 때문일까요? 어떤 사람이 성경에 대한 변증을 했는데 그 변증이 너무나도 합리적이서 성경을 받아들이게 된 걸까요? 우리 마음에 있는 성경에 대한 이러한 사랑은 도대체 어디서 생겨난 걸까요? 아마 우리 교회 출석하시는 성도님들 모두가 경험하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굶주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음식과도 같습니다. 그 어떤 음식도 우리 육체를 영원히 배부르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끼니 때마다 먹어야 하는 것처럼, 영적으로도 계속해서 말씀을 섭취해야 합니다. 이런 갈망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왜 성경과 복음에 대해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걸까요? 복음을 이해하고 믿은 후에도, 왜 복음 설교를 들을 때마다 우리는 다시 마음이 뜨거워지는 걸까요? 왜 엠마오로 가는 길에 있었던 제자들처럼 말씀이 이해될 때 마음이 뜨거워질까요? 어떻게 된 걸까요? 어떻게 해서 우리가 성경에 무관심하고 적대적인 세상과는 다른 사람이 된 걸까요? 세상 사람들은 성경에 전혀 관심이 없는데 말입니다.
사실 많은 교회들은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보다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만 제공하려고 합니다. 성경은 사람들을 지루하게 하는 것을 넘어서 불쾌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어째서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어떻게 전 세계에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는 걸까요? 성경에 그 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은, 여러분이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성경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성경을 사랑할 것입니다. 시편 19편은 바로 우리의 고백입니다. 시편 19편 10절에서는 말씀이 금보다 귀하다고 말합니다.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진리의 말씀이 이처럼 꿀보다 더 단 이유가 뭘까요? 말씀이 왜 이토록 귀하게 느껴질까요? 시편 119편 97절에 나오는 다윗의 고백을 여러분도 할 수 있으십니까?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다윗은 시편에서 다섯 번이나 “주의 법을 사모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여러 차례 “주의 법을 기뻐하고 주의 법을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의 법이란 주의 말씀입니다. “주의 계명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기독교인을 일컬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10절에서 “불신자들은 진리를 사랑하기를 거부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또 사도 요한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갈망으로 드러납니다. 그 말씀이 명령과 계명일지라도 말이죠. 요한은 이점을 여러 차례 언급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5장, 요한일서 5장 2절과 3절에서 말입니다. 시편 40편 8절에서는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라고 합니다. 참된 신자에게는 성경과 진리, 복음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에서 우리가 갓난 아기들이 젖을 사모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한다고 합니다. 이 갈망은 절대로 채워질 수 없는 영원한 갈망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무리를 가르치실 때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을 전하시자 사람들이 떠났습니다. 요한복음 6장 66절입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님은 남은 제자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베드로가 참 신자의 대표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는 주님의 말씀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성경을 향한 갈망, 즉 말씀을 향한 갈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육체를 위한 음식을 먹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떡으로만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삽니다. 하나님의 참된 교회는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거룩한 진리의 말씀에 굶주려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이해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포용하고, 선포하고, 삶에 적용하고, 이 모든 것들로 인해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참된 교회와 반대되는 거짓 교회의 입맛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성도를 먹이기 위한 진지한 성경 공부와 성실한 노력이 우선이 아닌듯 합니다. 몇 년 전에, 제임스 패커(James Packer)가 ‘기독교 생활 지침(The Christian Directory)’이라는 아주 오래된 책의 서문을 썼습니다. 책이 정말 두껍습니다. 이 ‘기독교 생활 지침’은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가 쓴 책입니다. 리처드 벡스터는 1615년에 태어나서 1691년까지 76년을 살았던 청교도였습니다. 말씀에 대한 통찰이 정말 깊었죠. 저도 이 책을 가지고 있지만 분량이 참 방대합니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성경을 통해 설명하는 지침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의 서문에서 패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날의 복음주의는 자기중심적이고, 우스꽝스럽고, 단순하며, 퇴보적이고, 반은 마법 주문과 같은 헛소리로 가득한 일련의 방법론이다. 오늘날의 복음주의를 리처드 백스터의 ‘기독교 생활 지침’과 비교해보자. 이 책은 수백만 단어로 쓰였으며 성경에 대한 심오한 해석과 적용이 담겨 있다. 고도의 지성과 성경을 기반으로 한 신학적 지혜가 명료하게 담겨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교회는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요? 신학자 R.C 스프로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대 문화는 평범함을 자랑스럽게 여김과 동시에 싸구려 예술, 싸구려 음악, 싸구려 사고에 갇혀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교회로 들여와 싸구려 교회로 바꿔버렸다.” 사람들은 평범한 것을 원합니다. 현대 문화는 평범한 것을 갈망합니다. 그냥 원한다기 보다 갈망한다는 표현이 맞습니다. 그래서 현대 교회는 이 평범함에 순응하기 위해 일종의 기독교 대중문화를 만들어냈습니다. 이러한 자칭 교회들은 초월적인 내용들을 제거하고, 심오하고도 깊은 신학도, 성경도, 주석도 모두 버렸습니다. 그 대신 평범함을 제공합니다. 굶주린 대중들이 원하는 것을 주고 참 성도들은 굶기기로 결정한 겁니다. 여러분은 기독교 대중문화로 만족하실 수 있으십니까? 만족하십니까?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 교회에 계시지 않습니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것들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사랑합니다. 신학을 사랑합니다. 신학에 정통한 예배를 사랑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말씀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연구하고, 암송하고, 나누고, 가르치고, 삶에 적용하는 걸까요? 우리가 세상 사람들보다 더 나아서입니까? 더 똑똑하고 지적이어서 그런 겁니까? 우리에게 성경이 믿을 만하고 신뢰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증거가 주어져서 그런 겁니까? 힌트가 될 만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은 연구한다고 해서, 언어에 재능이 있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이 도와주셔야만 이해할 수 있다.” 취리히의 개혁파 츠빙글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도에게서 직접 예수님의 복음을 들었다 할지라도 하늘의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시지 않고 성령님이 이끄시지 않는다면 반응할 수 없다.” 존 칼빈의 견해도 똑같습니다. 칼빈은 성경을 믿고, 이해하고, 순종하고, 사랑하려면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통해 거듭나게 하시고 죽은 죄인에게 생명을 주셔야만 한다고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왜 성경을 믿으십니까? 왜 성경을 사랑하시나요? 왜 성경에 굶주려 계십니까? 왜 성경의 진리를 들으려 하십니까? 왜 성경의 진리를 파헤치면서 기쁨을 느끼며 찬양하고 예배하고 싶어질까요? 그것은 성령님이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강력한 일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진실로 여러분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좀더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이 문제에 관한 실마리는 오늘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과 2장 18절부터 2장 끝까지의 내용입니다. 넓게 보면서 핵심을 찾아보겠습니다. 본문을 통해 두 가지만 이해하시면 됩니다. 딱 두 가지입니다. 첫째, 왜 불신자들은 성경을 거부할까? 둘째, 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사랑할까?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서로 겹치는 부분도 많고 얽히고설킨 부분들이 많지만, 전부 자세히 다루지는 않고 전체적인 그림만 그리도록 하겠습니다. 첫번째 질문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왜 불신자들은 성경을 거부할까요? 다섯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이 그 다섯 가지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알려줍니다. 이 질문을 성경에 계시된 복음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이렇게 질문해도 무방할 겁니다. 왜 불신자들은 성경의 복음을 믿지 않을까? 그 이유가 뭘까? 그 첫번째 이유는 복음이 비합리적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인간의 사고방식으로는 성경의 복음은 비이성적으로 들립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사고에 흠뻑 취해서 살아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쩌면 계몽시대 이전에는 이렇게까지 심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그때로부터 수 세기가 지난 현재, 우리는 인간의 이성을 숭배하는 사람들의 후손입니다. 말 그대로 이성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성경이 설 자리가 없는 그런 시대입니다. 성경의 복음이 설 자리가 없는 그런 시대입니다. 18절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멸망하는 자들이란 지옥으로 향하는 길에 있는 자들입니다. 지옥으로 향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복음,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대한 메시지는 미련하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미련함’이라는 단어는 오늘 본문의 도입부에 여섯 번이나 등장합니다. 정말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헬라어로 ‘모리아’입니다. 영어로는 여러분도 잘 아시는 ‘모란(moran)’입니다. 바보 천치 멍청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들입니다.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하나뿐이라는 것, 그 길은 하나님이면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만 말미암는다는 것,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는 로마인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 자기 백성에게 거부당했다는 것, 그리고 구원은 자신의 선한 행위를 버리고 비참한 죄를 인정하고 그리스도가 이루신 대속을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것.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지혜와는 정반대되는 것들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이성은 스스로를 선하다고 여깁니다. 나아가서 우리가 정말 선하다면 모든 것이 다 괜찮을 거라고 말합니다. 교만이 지배하는 타락한 인간 이성의 실체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고 어리석다는 말은 다시 설명드리지 않아도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3일 동안 말씀드렸으니까요. 세상 사람들에게 ‘당신은 지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아무 조치도 취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하고 싶어하지도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에 부합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상태를 바꿀 이성적인 능력도, 도덕적인 능력도, 영적인 능력도 없습니다. 교만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무력하다는 사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바로 이 점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성경을 좋아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겁니다. 성경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다가 성경이 실제로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적대감을 갖습니다. 그리고 성경 전체의 내용과 성경이 말하는 복음을 불합리한 것이고 비이성적이며 미련한 것이라고 여깁니다.
둘째입니다. 복음은 인간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이유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타락한 사람들은 모든 곳에 이성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모든 문제를 자신의 이성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합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성을 주셔서 물리적 영역에서 특정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성을 영적 영역까지 확장해서 적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힘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곧 알게 됩니다. 가끔 보면 자신이 정말 영적인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해리포터에 나오는 마법 세계에 속한 사람처럼 말이죠. 이런 분들은 사람들이 날아다니고,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영적인 존재들이 역사하는 곳으로 자신을 내던지려 합니다. 그리고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영적인 영역을 인식하고 그 영역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영적인 사람이란 무슨 뜻인가요? 우리의 생각이나 직관, 감각을 통해서 성경이 말하는 복음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믿고,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정말 큰 착각입니다. 19절을 보겠습니다.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의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인간의 지혜로는 하나님께 이를 수 없습니다. 비록 우리 생각에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이더라도 말입니다.
19절은 칠십인역 이사야 29장 14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신약 기자들은 당시 헬라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헬라어로 기록된 칠십인역에서 인용한 겁니다. 이사야가 북왕국 이스라엘에게 경고했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 국경을 위협하던 앗수르왕 산헤립을 통해 이르게 될 심판에 대해 경고한 겁니다. 이사야는 협박에 가까운 아주 강한 경고를 했습니다. 구원이 사람에게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만약 어떤 구원이 있다 하더라도, 어떤 형태의 도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의 지혜로부터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당시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모든 지혜와 전략으로도, 모든 지혜 있는 자들과 현자들과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의논했는데도 앗수르를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이사야 37장 36절을 보면,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직접 해결하십니다. 천사를 보내셔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명을 치신 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지혜로는 불가능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차원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북이스라엘은 자신들의 국경에서 일어난 침략조차 인간의 지혜로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예레미야 8장 9절입니다.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여 두려워 떨다가 잡히리라 보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 지혜롭다 하던 자들에게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전서 1장 20절에서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기는 하냐고 묻는 겁니다. 읽습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또 고린도전서 1장 20절은 이사야 19장 12절과 33장 18절을 암시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미련하게 하신 애굽의 모사들과 앗수르의 학자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들은 모두 미련한 자들입니다. 모두 어리석은 자입니다. 바울은 ‘이런 자들을 모두 데리고 와봐라’ 하면서 2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알지 못함으로.” 바울은 익숙한 구약성경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세상의 모든 지혜와 모든 똑똑한 자들의 지식을 모아도, 모든 변호사와 모든 변론가와 철학자들이 다 함께 모여도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대학의 지식인들이 지혜를 모을지라도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지혜롭다 하더라도 인간의 지혜로는 하나님께 다가갈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불신자들은 성경을 거부할까요? 왜 성경을 싫어할까요? 왜 성경에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일까요? 세상 사람들에게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은 비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혹시라도 복음을 이해하게 되더라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복음을 믿을 수 없습니다. 물론 중복되는 말이긴 합니다. 22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문제는 바로 십자가입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은 어떤 표적을 원했습니까? 주님의 오심과 약속된 왕국이 세워질 것을 예언한 선지자들이 말했던 달과 별의 표적을 기대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수많은 표적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질병, 귀신, 죽음, 자연을 다스리는 능력이 있으셨고, 실제로 이스라엘 땅에서 공생애 기간 동안 많은 질병을 고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위대한 능력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기적을 무시하거나 깎아내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지도자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병사들에게 뇌물을 주어서 예수님의 시체가 도둑맞았다고 거짓 증언을 하게 했습니다.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죠. 아무리 기적을 많이 행해도 사람들은 설득되지 않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대중들에게 소위 기적을 행하면 복음을 믿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자들의 행동은 잘못된 것입니다. 기적은 사람을 복음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많은 가짜 기적을 행해도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믿을 수 있는 이유는 성령님이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선포된 진리로 역사하시는 겁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 말씀과 같이 진리의 말씀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서 이 모든 것은 믿기가 참 어렵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원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큰 표적을 원했습니다. 메시아가 오시면서 천국의 징조들을 보여주길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아가 자신들의 종교를 인정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율법을 정말 잘 지켰다고 유대인들을 인정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을 가장 가혹한 말로 비난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을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종교 지도자들은 메시아가 그렇게 말씀하실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메시아가 오셔서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로마인들을 공격할 것이라고 기대했었죠. 그런데 오히려 메시아는 로마인들에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것은 정말이지 큰 걸림돌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자신들과 지도자들에게 거부당하고 로마인들에게 죽임을 당한 자가 메시아가 될 수 있을까?’ 헬라인에게는 이것이 터무니없게 보였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유대인? 로마 제국의 변두리 땅에서도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 로마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고 자신의 백성에게 버림받은 한 유대인이 영원한 하나님이라고? 그분만이 유일한 참 하나님이고, 죄인들을 위해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고, 구원하기 위해 대신 죽으셨고, 이것을 믿는 것이 구원받는 유일한 길이라고?” 헬라인들에게는 정말 말도 안되는 이야기처럼 들렸습니다.
로마에 있는 키르쿠스 막시무스 근처에 가보시면 유적지 가운데 돌에 새겨진 낙서가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나귀 머리를 한 남자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고, 그 아래에서 한 사람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밑에 “알렉사메노스가 자기 신을 숭배하고 있음”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기독교를 조롱하는 겁니다. ‘누가 십자가에 못 박힌 바보를 숭배하는가? 정말 어리석어 보인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솔직히 말하면, 복음은 미련한 것이고, 어리석으며, 믿기 어렵습니다. 더욱이 사람들은 이성으로만 접근하기 때문에 복음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걸려 넘어진 상태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어떻게 복음을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너무 이상해 보이기 때문이죠.
이제 왜 사람들이 복음을 믿지 않는지에 대한 네 번째 이유를 보겠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보잘것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비합리적이며, 이해할 수 없고, 믿을 수 없을 뿐더러 믿는 사람들이 특별해 보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 복음이 더 잘 전해지려면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맡기셔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더 잘 믿지 않겠어요?” 정말 그럴까요? 하나님의 계획은 다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세 번씩이나 “많지 아니하며”, “많지 아니하며”,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말합니다. 믿는 사람들 대부분은 특별해 보이지 않습니다. 특히 세상의 지성인들이 보기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엘리트 지성인들이 아닙니다. 영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권력이 높지도 않습니다. 상류층도 아닙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왕족이나 귀족도 아니고, 재벌도 아니고, 고위층도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27절에 의하면 “미련한 것들, 약한 것들”이며, 28절에 의하면 “천한 것들, 멸시 받는 것들, 없는 것들”입니다. 바울은 대조를 사용해서 의미를 더욱 살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혜있는 자가 아닌 미련한 것들입니다. 우리는 강한 자들이 아닌 약한 것들입니다. 우리는 있는 자들이 아닌 천하고 멸시 받고 없는 것들입니다.
28절에 나오는 ‘천하다’라는 단어를 보겠습니다. 세상의 천한 것들이란 무슨 뜻일까요? 헬라어로 ‘천하다’는 ‘아게네스’입니다. ‘게노스’는 ‘태어나다’라는 의미로, 제네틱스, 즉 유전학이라는 단어의 뿌리입니다. 그렇다면 ‘아게네스’는 무슨 뜻일까요? ‘아’는 부정어로,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뜻입니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게네스는 우리가 의미없다, 하찮다, 이런 뜻입니다. 우리는 선동가나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기서 바울은 더 깊이 들어갑니다. ‘아게네스’, 즉 출생하지 않은 상태, 심지어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도 이미 충분한데, 더 나아가 “멸시 받는 것들”이라고 하며, 하나님께서 “없는 것들”을 택하셨다고 합니다. “없는”은 동사 ‘에이미’의 현재분사형입니다. 헬라어에서 가장 경멸스러운 표현입니다. “너는 존재하지 않아”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누군가를 비하하고 싶을 때 “너는 존재하지도 않아”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천한 것들, 멸시 받는 것들, 없는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셨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 교리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으시다면 하나님께서 택하셨다는 표현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셨습니다. 네 번이나 하나님이 택하셨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29절입니다.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저는 지금 우리 믿는 자들이 보잘것없어 보인다는 사실을 계속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첫 번째 설교에서도 말씀드렸던 것 같습니다. 제가 오래 전에 텔레비전 토크쇼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그 때 촬영 중간에 디팩 초프라(Deepak Chopra)씨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초프라씨는 힌두교 신비주의자이면서 의사였습니다. 아주 똑똑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돈을 잘 뜯어낼 수 있을까를 스스로 깨우친 사람입니다. 그만큼 똑똑하기도 한데 문제는 자신이 신이라고 믿는 겁니다. 그런 주장을 담은 글도 많이 썼습니다. 매우 영적이면서도 힌두교에 심취해 있는 사람이었는데, 저를 대하는 걸 매우 어려워했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대화를 하다가 초프라씨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은 모를 겁니다. 제가 말하는 것들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사실 다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이 말하는 철학을 알고 있고 그 이론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도 다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조금 설명을 해 주고 “사실 저는 당신이 말하는 그 철학과 이론에 관한 책도 썼습니다.” 그랬더니 초프라씨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나는 당신이 쓴 그 어떤 책도 읽지 않겠습니다.” 그렇겠죠. 그 사람에게 저는 아게네스, 즉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이니까요. 그러더니 또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내가 사는 세상에서는 당신이 누군지 아무도 몰라요. 그냥 저리 가세요.” 지성인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이 이렇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서 감명을 받지 않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에 감명을 받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에게서만 감명을 받죠. 하지만 문제는 이겁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성을 따라가고 싶어하는데 그렇게 해서는 결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죠.
또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보잘것없어 보일 뿐더러,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들도 세상 유행에 뒤처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하고 교회를 세웠을 때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요? 고린도 사람들에게 익숙했던 선생들과 철학자들이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을 추구했다는 겁니다. 헬라인들은 웅변술, 수사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일종의 지적 미궁에 빠지기를 좋아했습니다. 복잡한 철학 주제와 다층적인 논쟁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헬라인들에게는 복음이 너무 단순해 보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거부한 이유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린도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또 그 바보 같고 어리석은 남자와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만 하시는군요. 심오한 지식은 어디 없습니까? 합리적인 추론은 어디에 있죠? 논리적인 철학은요?” 그래서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고린도후서 10장 10절에서 바울에 대해 이렇게 말한 겁니다.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누가 이런 사람의 말을 듣겠습니까? 바울은 똑똑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철학적 지식도 없고, 정교하지도 않고, 세련되지도 않고, 지혜도 없어 보였습니다. 정리합니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불쾌하게 느껴지고,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보잘것없어 보이며, 설교자들은 세상 유행에 뒤처져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2절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러니까 고린도 사람들이 보기에는 바울이 계속 어떤 남자가 죽었다는 얘기만 했다는 겁니다. 또 3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자신있고 당당한 모습은 어디 없습니까? 좀 뻐기는 모습도 있어야죠. 자신감을 가지고 상황을 좀 통제해야 하지 않습니까? 고대의 우쭐한 철학자와 선생들 사이에서 바울은 약한 모습을 보이며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습니다. 4절을 보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했습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은 변증하고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납득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지성을 올바른 방향으로 사용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이성을 바로잡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타락한 사람들입니다. 본성적으로 어둠에 속해 있습니다. 본성적으로 죽은 자들입니다. 사탄에 의해 눈이 가려진 자들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 있기에 믿을 수도 없고 믿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불신자들은 성경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세상의 새로운 유행과 지식을 사용해서 사람들이 복음을 좋아하게 만들려고 하거나 호감을 얻으려고 해도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예수님도 알 수 없으며, 복음도 알 수 없고, 구원도 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물리적인 이 세상, 임시적인 세상에서는 인간의 지혜로 놀라운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과학, 기술, 유전학, 의학, 산업, 예술, 문화, 학문 등의 영역에서 다양한 업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인간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도 구원받을 수도 없습니다. 물론 로마서 1장에 의하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장에 의하면 하나님의 도덕법도 인식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복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만족시키는 이성으로 진리를 찾으려 하지만, 그런 방법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복음을 믿게 되었을까요? 이제부터 방향을 바꿔 보겠습니다. 시간이 조금밖에 남지 않았네요. 여러분은 왜 복음을 믿으십니까? 우리가 세상 사람들보다 똑똑하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6절입니다. “그러나.” 극적으로 방향이 바뀝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사람들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이 지구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지금 이 순간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예배당에 모인 우리가 가장 지혜롭고, 순수하고, 진실하고, 깊이 있고, 정확하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지혜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슬픈 것은, 밖에 있는 사람들은 모든 정답을 가진 우리에게 물어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지혜를 말합니다. 저는 항상 저 멀리 워싱턴이나 어디서든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냥 물어봐 주고 질문해 준다면 좋겠습니다. 한번은 어떤 분이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저를 조롱하려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느 로스쿨 나오셨나요?” 그래서 “저는 로스쿨 같은 곳은 다니지 않았는데요. 그저 성경만 읽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말이 그 사람을 더 화나게 했습니다.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여기에 첫번째 해답이 있습니다. “온전한”이라는 단어입니다. 헬라어로 텔레이오스(teleios), 완성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완전합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어떻게 해서 우리는 지혜를 압니까? 왜 지혜를 말합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를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세상 사람들보다 똑똑해서가 아닙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빛을 비추시고, 우리를 재촉하시고, 눈을 뜨게 하셔서 진리의 복음을 볼 수 있도록 도우셨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셨고, 성령님의 역사로 우리의 생명에 불을 밝혀 주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사랑하는 이유는 성령님의 역사 덕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음식을 섭취해야 유지됩니다. 육체적 생명처럼 영적인 생명도 음식으로 유지되는데, 이 영적 음식이 무엇일까요? 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6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라고 합니다. 이 지혜는 세상의 지혜가 아닙니다. 야고보는 이 지혜를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라고 합니다. 야고보서 3장 17절에 의하면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는 성결하고, 화평하고, 관용하며 양순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참된 지혜가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문화는 어떤가요? 세상의 권력을 잡은 자들은 모든 기독교 신자들과 모든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합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우리로부터 어떤 것도 듣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진 지혜는 세상의 지혜와 정반대입니다. 우리가 가진 지혜는 영원한 지혜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말한다고 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를 알고 계십니까? 우리는 유행에 뒤처져 있습니다. 저는 세상이 즐기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눈에 보잘것없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저도 그렇고 우리는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우리가 그분의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 지혜는 감추어졌던 신비입니다. 바울이 말한 ‘뮈스테리온’, 즉 신비는 구약에서 감춰져 있었던 복음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 복음은 신약에서 완전하게 계시되었습니다. 우리는 지혜를 말합니다. 신비의 지혜를 말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복음의 지혜는 하나님께서 이 때와 이 시대에 드러내기 위해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자들입니다.
8절을 보겠습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예수님 시대에 지구상에서 가장 고도의 훈련을 받고 성경에 정통했던 바리새인들과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당시 유일한 하나님의 계시였던 구약 성경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대로 이해했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을 겁니다. 왜 이해하지 못했을까요? 9절을 보겠습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경험론인 이성으로는 복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볼 수도 없습니다. 들을 수도 없습니다. 즉, 복음은 외적인 것에서 얻을 수 없습니다. 경험으로, 실험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계속 보겠습니다.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내적인 것에서도 얻을 수 없습니다. 신비인 이 복음, 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은 내적으로도 알 수 없습니다. 외적 경험으로도, 내적 직관이나 마음으로도 알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10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생명을 주신 다음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후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거듭난다 한들 지혜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아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지혜를 우리가 갖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 다음에 말씀을 주신 겁니다. 우리는 왜 성경을 사랑할까요? 성령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후에 계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성경의 저자이십니다. 이것은 감추어진 지혜였는데 이제 완전한 복음의 형태로 계시되었고,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10절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시느니라.” 성경에 의하면 성령님은 우리로 어떻게 해 주십니까?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게 하십니다. 얼마나 놀라운가요. 성경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한 책으로서, 전지하신 성령 하나님이 성경 기자들에게 계시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귀한 보물인가요.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값진 보물입니다.
이는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11절은 비유입니다. “사람의 일은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의 영은 우리를 압니다. 이것이 사람과 동물의 차이입니다. 동물은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인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생각을 압니다. 그리고 우리 생각을 평가합니다. 영이 우리를 알듯 성령님은 하나님을 온전히 아십니다. 성령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성령님은 온전히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아시는 모든 것을 아시며, 하나님께서 아시는 바 가능한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님을 통해 생명과 경건함에 필요한 것을 갖추게 하는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겁니다. 14절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육에 속한 자는 영적으로 죽은 자입니다. 하지만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우리는 말 그대로 이 세상 한복판에 살면서 성경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판단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저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성경의 말씀대로 말해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저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제 세 번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사랑하는 이유는 거듭났기 때문이고,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셋째로 성령님의 조명을, 가르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13절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친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성령님은 어디에 거하십니까? 어디에 계시죠?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요한일서 2장 20절과 27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우리 안에 진리의 교사이신 성령님이 거하십니다. 이렇게 우리를 가르치시는 성령님이 모든 진리를 계시하신 성경의 저자일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모든 것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영생을 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 안에 거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왜 성경을 사랑합니까? 성령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고, 계시해 주셨고, 그리고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16절 말씀이 참 좋습니다. 정말 좋습니다. 16절은 이사야 40장 13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겠느냐?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느냐?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겠는가?”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겠습니까?” 저는 압니다. 그 다음 부분을 봅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이보다 더 멋진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습니다. 한 번은 제가 대학 철학 강의시간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려 드리려고 여기에 왔습니다. 그분은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그분을 통해 창조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분은 우주의 심판자이십니다.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시는 분이시며, 도덕, 모든 관계, 진리와 참된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시며, 모든 악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가 생각하시는 모든 것을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저는 노스리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철학 강의 시간에 정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생들을 뒤집어 놓았죠. 학생들은 “뭐죠? 저 사람은 누구죠?”이런 반응이었습니다. 철학과 크래머 교수님은 근본주의자를 강의에 초대하고자 했고, 그래서 제가 가서 그렇게 말한 겁니다. “자 보십시오. 저는 하나님의 생각을 다 알기 때문에 진리의 모든 것을 말씀드릴 겁니다.” 그러자 4학년 학생들이 미심쩍은 눈초리로 쳐다봤습니다.
저는 계속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말씀드려야 할 것은 여러분은 제 어떤 말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네? 저희가 믿지 않을 거라고요? 무슨 뜻이죠? 왜죠?” “왜냐하면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의 이 말 때문에 학생들은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저에게 자신들이 믿을 수 있다는 걸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이어서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모든 진리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건 제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고 싶다고 하면서 이런 저런 것들을 알려주셨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완전히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빨간 차를 사야 할지 파란 차를 사야 할지 알려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와 결혼해야 할지 알려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예수님이 여기 이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알고 있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요한복음 15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어디를 가든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모든 것을 정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은 많지만 받을 사람이 적다는 것이 참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것이 우리가 말씀을 사랑하며 말씀에 굶주려 있는 이유입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마음이 뜨거워지는 교제가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일어난 마음의 교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걸으시며 성경을 풀어 주시자 마음이 뜨거워졌다는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마음을 뜨겁게 하는 교제입니다. 우리는 왜 성경을 사랑합니까?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생명을 주셨고 우리를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얻었습니다. 또한 주님은 우리에게 성경을 계시하시고 가르쳐 주셔서 이해하게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주님은 교회에 교사들과 지도자들을 세우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교사들과 목자들이 하늘의 진리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게 인도하십니다.
‘겸손하게 하는 복음’에 대해 언제 이야기하나 생각하고 계시죠?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사랑하고 성경과 진리를 사랑하게 된 이유를 들어보겠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누가 이루신 것이죠? 누구죠?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이 되셨으니”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우리에게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었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과 구원을 주셨습니다. 예레미야 9장에 기록된 대로 우리가 아닌 하나님을 자랑하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겸손하게 하는 복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겸손하게 하는 복음’입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난 며칠간 저희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경을 우리에게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강력합니다. 너무나도 귀하고 소중합니다. 미국 전역과 세계 각지에서 성도들을 모이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교회에서 충성스럽게 섬기고 서로를 사랑하게 하시는 것 감사합니다. 교회 안팎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아름답게 나타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일에 감사드립니다. 충성된 리더들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자리에 있는 성도들을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형제 자매로 세우시고 섬기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세계에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해 저희들을 부르셨음을 압니다. 이 교회가 계속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말씀에 대한 사랑 안에서 성장하게 하옵소서. 성경을 더욱 깊이 사랑하고 경험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생각을 압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사랑함으로 아버지께 온전히 순종하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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