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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 그레이스 교회는 오래 전부터 성경의 각 책을 차례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원래는 지금 누가복음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일에는 다시 누가복음으로 돌아가게 될 것 같습니다. 성경을 강해하다 보면 때때로 성경 본문과 관련해서 조금 더 깊게 살펴보아야 하는 주제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과 오늘 이 문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복음을 듣지 못한 이방인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를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몇 주 전부터 이 문제를 다루고 있죠. 지난 주일에는 그 중요성을 강조해서 말씀드렸고, 오늘은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일 지난주에 참석하지 못하신 분들이 계시다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요, 설교 테이프를 꼭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정말, 정말 중요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설교라기보다는 복음과 관련해서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여러분이 이해할 수 있도록, 관련된 성경 본문을 통해 풀어 설명해 드리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제가 준비한 내용을 말씀드리기 전에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탄이 교회에 가장 큰 피해를 입히는 방법은 교회가 복음에 대해 혼란을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제대로 모른다면 세상에서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아주 오랜 세월 그렇게 해 왔습니다. 자유주의와 거짓된 형태의 기독교만 복음에 대해 혼란을 겪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소위 복음주의 세계 안에도 복음에 대한 혼란이 존재합니다. 사실 복음주의는 전통적 경계를 벗어나 버렸습니다. 이제는 복음주의의 의미가 너무 모호하고 형태가 없는 개념이 되어 버렸습니다. 새로운 정의가 필요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모호한 “복음주의”라는 거대한 틀 안에서 복음에 관해서는 혼란이 더 큽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심각한데, 사탄은 또 하나의 혼란을 여기에 더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제는 복음을 전해야 할 필요조차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 없이도,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도, 성경 없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복음에 대해서만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대위임령에 대해서도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교회가 가진 위대한 능력이 제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건지심’ 시리즈를 통해서 복음의 정체성을 살펴보았습니다. 기억하시죠? 아마 여섯 편이었을 겁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복음을 듣지 못한 이방인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두 편의 메시지를 여러분에게 지금 전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에 나온 <크리스채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지를 어제 읽었습니다. 하나님이 복음 없이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지에 대해 따지고 논쟁하고 소란을 피울 필요가 없다, 그냥 다른 문제들로 넘어가자, 이런 주장의 내용이 있었습니다.

사실 복음을 전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저 의견 차이로, 쓸데없는 논쟁하는 정도로 축소해도 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느냐 전하지 않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만일 사탄이 복음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하찮은 것으로 만들고, 복음을 전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이해하는 것까지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면, 사탄은 엄청난 승리를 거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리즈를 통해 맞서 싸울 겁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복음 없이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성경을 통해 아주 분명하게 밝힐 겁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는 문이 좁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문은 좁습니다. 마태복음 7장입니다. 그리고 그 문을 찾는 사람이 적다고 하셨습니다. 여러 수단과 여러 종교를 통해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보편구원론을 주장하면 마태복음 7장의 말씀을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그 문이 매우, 매우 찾기 어렵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찾기가 어렵고 매우 좁아서 찾는 사람이 적고, 그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적습니다.

물론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그 문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사람들이라고 계속해서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역을 알아야 합니다. 알고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사실 때문에 주님께서는 친히 대위임령을 통해 우리에게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고, 모든 세대에 걸쳐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대위임령은 오순절 이후로 교회의 사명이자 의무이고 열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 의무를 없애버리고, 대위임령의 필요성을 제거하려는 새로운 신학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오래된 신학의 물결이 다시 살아났다고 해야 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필요로 하지 않고, 구원받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나 복음에 대해 알 필요조차 없다고 말합니다. 지난주에 저는 이러한 사상을 자연신학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인간이 자연적인 수단, 그러니까 인간의 직관과 인간의 이성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신학입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초자연적인 계시가 필요하지 않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자연적인 이성만으로 충분하다, 인간의 자연적인 이성과 자연적인 종교적 성향을 통해 성경도, 복음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지식이 없어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 복음을 알지 못한다는 상황을 고려할 때, 하나님께서 충분히 선한 노력으로 받아 주실 만한 믿음과 행동을 보이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이 로마 가톨릭의 주장일 뿐만 아니라, 이제 복음주의 지도자들의 주장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드렸습니다. 종교가 있는 상황에서든, 아예 종교가 없는 상황에서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정보와 자신의 자연적인 성향을 가지고 그저 최선을 다하기만 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일부 복음주의자들은 ‘더 넓은 자비’라는 관점을 주장합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보다 하나님의 자비는 더 넓답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이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하는 수준으로 아주 넓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으로 그저 최선을 다한다면 괜찮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유일성을 공격할 뿐만 아니라, 동정녀 탄생과 성육신, 그리스도의 죄 없으심, 대속적 죽음과 속죄, 부활, 승천, 중보, 그리고 재림까지도 공격합니다. 이 모든 그리스도의 사역을 하나님께 나아가는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일 뿐인 것처럼 만들어 버리는 것이죠.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 성경의 유일성까지 파괴합니다. 성경을 여러 계시와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이 과연 그것을 허용합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런 결론에 이를 수 있습니다. 철학적으로 생각해도 그런 결론에 이를 수 있겠죠. 공평하지 않다고 느끼면서 감정적으로도 그런 결론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늘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그러면 복음의 그 그 메시지를 듣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느냐 하는 말입니다.” 첫번째 대답입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받은 명령입니다. 두번째로, 하나님께서 주권적이고 영원한 선택의 목적 가운데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들이 복음을 듣게 하실 겁니다. 우리는 그 복음을 선포하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또 우리는 로마서 1장을 통해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창조를 통해 주어진 빛, 곧 창조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을 받아들인다면, 로마서 1장과 사도행전 17장이 보여주듯이 하나님이 매우 가까이 계시다는 것, 자신의 피조물 가운데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주신 양심과 마음에 기록하신 율법을 통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참되신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고 죄를 다루어 주시기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빛을 비추어 주신다고 약속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에서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라고 하셨죠. 그러나 오늘날 복음주의라는 모호한 경계 안에서 이단적인 사상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라고, 예수님만이 죄를 위한 유일한 희생제물이라고 말은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고, 예수님의 희생에 대해서도 모르고, 심지어 예수님이 존재하셨다는 사실조차 몰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지난주에 바로 이러한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요? 우리의 감정. 스스로 만들어 낸 신학, 철학, 이런 것을 찾아가면 안 됩니다. 우리의 이성도 안 됩니다. 이방인이 복음 없이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가야할 곳은 오직 한 곳입니다. 바로 성경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를 들어야 합니다. 구원이라는 영적인 영역에서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계시로 나아가지 않는 한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직관이나 이성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몇 가지 사실을 알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정죄받기에 충분할 만큼은 알 수 있지만, 구원받기에 충분할 만큼 알지는 못합니다. 변명할 수 없을 만큼 알 수는 있지만, 더듬어 찾을 만큼 알 수는 있지만, 진리를 알 만큼 충분히 알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성경의 계시를 통해서만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성경을 살펴봅시다. 지난주에는 창세기 3장과 로마서 1장 18절 이하, 그리고 고린도전서 1장 18절부터 21절까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계시의 도움 없이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초자연적인 계시의 도움 없이는,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사실 로마서 1장을 보면 인간은 이성을 통해 어느 정도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창조주가 계시다는 것을 압니다. 온 우주가 존재한다는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추론할 수 있고, 하나님의 신성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 수 있고, 로마서 2장이 말하는 것처럼 양심을 통해 하나님의 도덕적인 성품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핑계할 수 없을 만큼은 알 수 있지만 구원받을 만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길을 알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역사가 기록된 계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의 인간은 결국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있지만 그 지식을 거부하고, 어리석은 자가 되어,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우상과 형상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그렇게 진리를 왜곡하고 결국은 우상숭배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격렬한 진노 아래 놓이고 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도 같은 사실을 말합니다. 학식이 가장 높고, 교육을 제일 많이 받고, 가장 많이 배우고, 가장 뛰어난 엘리트이고, 가장 지혜로운 자들이 인간의 이성과 인간의 합리화, 인간이 만들어 낸 종교를 가장 높은 수준까지 끌어올리면 결국 어떻게 됩니까? 어리석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장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라고 합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께 이르지 못합니다. 어리석고, 공허하고,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1장은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라고 합니다. 자연신학을 통해서는 하나님께 이를 수 없습니다. 인간의 이성이나 직관이나 어떤 종교적 수행 과정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이를 수 없습니다. 지난주에 이런 내용을 살펴봤죠. 이제 오늘 아침에는 다른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으로 가 봅시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늘은 설교라기보다는 성경공부에 가깝습니다. 이 성경 본문들을 빠르게 짚어 보면서 핵심적인 내용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자세하게 다룰 시간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로마서, 사도행전을 보겠습니다. 제가 쓴 주석을 읽어 보시면 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2장을 통해서 “이방인이 복음 없이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해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10절입니다.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아주 간단한 원리가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을 알고 싶다면,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알고 싶다면,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을 알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론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몇 가지 사실을 알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시고, 질서의 하나님이시고, 복잡하지만 정교하시고, 아름다우시고, 생명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창조 세계를 보며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죠. 많은 것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표면에 드러나 있지 않은 것, 경험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 하나님의 영적인 영역에 대해 알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알고 싶거나,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알고 싶거나, 하나님의 의에 대해 알고 싶거나, 하나님의 구속에 대해 알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령님은 표면 아래에 있는 것, 깊은 것을 살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며 성부 하나님과 하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 표면에 드러나는 것, 인간의 감각을 통해 나타나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영적인 것들,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그런 것들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아십니다.

11절에서는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저는 여러분의 생각을 모릅니다. 여러분도 제 생각을 모르죠. 우리는 서로의 생각을 모릅니다. 서로 가까운 사이일 수도 있고, 부부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고, 같은 회사에 다닐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서로의 생각을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뿐이죠. 생각을 아는 유일한 존재는 그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의 영입니다. 이것은 비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를 대할 때와 같이 하나님에 대해서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 드러난 하나님의 사역은 볼 수 있죠, 그것을 통해 몇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깊은 것은 알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알 수 없는 것처럼 말이죠.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볼 수 있지만, 제가 여러분의 속을 알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영은 그 사람 속을 알고, 하나님의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에 관한 진리를 알고, 하나님의 깊은 진리와 영적인 진리를 알려면 우리에게 계시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11절은 “하나님의 생각은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우리’는 성경을 기록한 바울과 다른 사도들을 가리킵니다.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무엇을 주셨습니까? 죄의 용서, 구원, 영생의 소망, 칭의, 성화, 영화에 속한 모든 복입니다. 이런 것들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실험한다고 발견할 수도 없습니다. 논리적으로 추론한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계시해 주지 않는다면 천국에 대해서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직접 가 보지도 않고 천국에 대해 알 수는 없습니다. 성경이 알려주지 않는다면 구원에 대해서 알 수 없습니다. 용서받는 방법이나 구속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이 정보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신약성경에서 적어도 13개의 서신을 직접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바울을 포함한 성경 기자들을 뜻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부터 이것을 받았으니,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영적인 생각을 영적인 말로 표현한다는 뜻입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성령님은 생각만 주신 게 아닙니다. 무엇도 주셨습니까? 말씀, 그러니까 단어까지 주셨습니다. 사도들은 그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베드로전서에서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 기록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구속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죠. 구원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표면 아래에 있는,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영의 우물 깊은 곳까지 내려가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사도들에게 주신 것이 기록되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영적인 생각을 받아 영적인 말로 기록했습니다.

이제 14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자연신학을 주장하는 사람에게 제가 꼭 들려주고 싶습니다. 잘 보십시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여기 문제가 있습니다. 초자연적인 계시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성경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자연인은 하나님의 성령께서만 아시는 것들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어리석어 보입니다. 완전히 말도 안 되게 보인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파악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성이 아니라 영적으로만 분별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살펴볼 수 없습니다. 경험적 연구를 통해서도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직관으로 얻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연신학은 어디로 사람들을 이끕니까? 자연신학자들이 잘 봐야 할 구절입니다. 자연신학으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을 수 없습니다. 완전히 어리석게 보이고, 그저 말도 안 되는 것일 뿐입니다. 알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성령의 능력과 계시를 통해서만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성령님께 가르침을 받은 우리에게는, 16절 하반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정말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에 관한 설명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성부께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깊은 것, 곧 우리의 오감이나 인간의 이성으로 표면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을 정확히 아십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루는 영적인 진리의 모든 깊이를 아십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생각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압니다. 어떻게 압니까? 바로 성경에 계시되어 있기 때문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압니다.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압니다. 성령님이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기 때문에 구원에 대한 그리스도의 생각도 압니다. 성령을 통해 계시된 그리스도의 마음을 받지 못한 자연인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결국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로마서 1장에서 말한 것처럼 어리석은 자가 되고, 고린도전서 1장에서 말한 것처럼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 계속해서 같은 내용이 반복됩니다. 로마서 1장이든, 고린도전서 1장이든, 고린도전서 2장이든 결과는 똑같습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는 결국 어리석은 자가 되고 심판에 이릅니다.

구원과 관련된 하나님의 깊은 것들, 곧 하나님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경의 계시를 통해서뿐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4장 4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26절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님이 제자들을 가르치셔서 인간의 감각이나 인간의 직관으로는 분별할 수 없는 깊은 것들을 기록할 수 있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깊은 것들, 구원에 관한 것들을 알려면 성령의 계시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루는 것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정확히 알고,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도 정확히 압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 없이 참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없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 정반대입니다. 어리석게 됩니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무지 가운데 놓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지혜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최상의 결과는 세련된 무지, 세련된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이제 사도행전 17장으로 가봅시다. 할 이야기가 더 많지만,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 나머지 본문들까지 살펴보려면 아주 서둘러야 합니다. 저는 몇 차례 아덴의 아레오바고, 그러니까 그리스 아테네의 마르스 언덕에서 설교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아테네를 여행해 본 분들은 아마 가보셨을 겁니다. 파르테논 신전 바로 아래에 있죠. 당시 헬라 제국의 아크로폴리스에 있습니다. 거짓 종교 숭배로 유명하죠. 이 높은 곳과 낮은 곳, 그러니까 시장이었던 아고라 근처에 아레오바고라고 불리는 마르스 언덕이 있습니다. 철학자들이 늘 모이던 곳이었습니다. 고대에는 오늘날처럼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도, 인쇄 매체도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육성으로 전파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아레오바고에 올라가는 것이 학교에 가는 것과 같았습니다. 각 분야의 엘리트, 지식인, 철학자, 웅변가들이 모두 그곳에 모여 자기들의 철학을 이야기하고, 추종자 무리도 있었습니다. 각자의 철학을 가르치고 있었죠. 그래서 바울이 아레오바고에 올라간 것은 22절에 나오는 것처럼 당시로서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21절을 보면 그들은 새로운 이야기를 듣는 것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저 범사에 종교적인 사람이 되십시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여러분이 범사에 종교적이라면 하나님께서 괜찮다고 여기실 것이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몰라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얼마나 흥미롭습니까? 제단이 아주 수도 없이 많이 있었는데, 수많은 신들을 숭배하고 있었다는 얘기죠. 그런데 혹시 빠뜨린 신이 하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나 봅니다. 그 신에게 죄를 범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혹시라도 불필요한 화를 사지 않기 위해서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한 제단까지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다. 참 고상하다. 너희는 하나님을 모르는구나.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적도 없구나. 구약성경도 없구나. 창조주이신 하나님에 대해서도 모르는구나. 우주를 보존하시는 하나님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도,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 유일하신 참 하나님도 모르는구나. 너희는 이 하나님을 모르는구나. 하지만 아주 종교적이고, 너희가 할 수 있는 만큼 훌륭한 시도를 했다. 정말 잘했다. 초자연적인 계시가 없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데까지 했다. ‘알지 못하는 신’이라는 것까지 만들어 놓지 않았느냐.” 그리고 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너희가 알지 못하고 예배하고 있는 분이 누구인지 내가 알려주겠다. 너희는 종교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도 그 누구보다 무지하다. 그리고 이제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을 아셨죠. 바울도 그들이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무언가를 가득 담은 접시를 들고 나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화환을 목에 걸어 드릴 필요도 없습니다. 제물을 만들어 바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먹을 것을 바칠 필요도 없고요, 꽃을 갖다 놓을 필요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시죠. “...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26절입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하나님은 정말 위대하고, 대단하신 분이다. 천지의 주재이시다. 창조주이시다. 이 땅에 있는 모든 것과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다. 손으로 지은 전에 가두어 둘 수 없는 영이시다. 그런데 너희는 너희가 만들어 낸 온갖 신들을 위해 수많은 신전을 세워 놓았다. 하나님은 이런 하찮은 것들을 가져다 드려야 하는 그런 신이 아니다. 모든 것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모든 것을 보존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능력으로 모든 것을 지속시키신다. 어떤 민족이 존재할 것인지, 어디에 존재할 것인지, 언제 존재할 것인지 결정하시는 분이다. 그 민족의 시작과 끝까지 정하시는 분이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다. 그런데 바로 이 하나님을 너희는 모른다. 바로 이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다. 그렇다고 어떤 신을 하나 섬기면서 “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사실은 참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거야”라고 할 수 없다. 그렇지 않다. 너희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이 아니다. 27절에서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을 찾고 있을 가능성을 인정합니다.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죠. “우리가 충분히 더듬어 보고, 우리의 사색과 직관과 종교적 경험 속에서 이리저리 헤매다 보면 어쩌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라.” 이렇게 생각하면서 더듬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27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하나님이 얼마나 가까이 계신지 아십니까? 28절입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 얼마나 가까이 계십니까? 너무나 가까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십니다.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숨조차 쉴 수 없습니다. 그만큼 가까이 계십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하나님을 모릅니다. 여전히 더듬고 있고, 여전히 찾고 있고, 여전히 무지 가운데 있고, 여전히 발견하지 못합니다. 바로 곁에 계시는데도 말입니다. 하나님을 찾지 못합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심지어 그들 중의 한 시인도 이것을 인정했습니다. 28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진화론이 등장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과 결합해서 모든 것이 되었다는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아무도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무에서 나왔다는 것처럼 터무니없는 생각을 아무도 해낼 수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창조주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인격적인 창조주가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도덕적인 창조주가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도덕법을 이해하는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그런 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한 이방인 시인조차 “창조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우리가 그분에게서 나온 존재라는 것도 안다. 우리는 그분을 더듬어 찾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 계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힘입어 살고 움직인다. 하나님은 정말 가까이 계신다. 그런데 여러분은 더듬고 있다. 하나님이 이렇게나 가까이 계시는데 아무리 더듬어 찾아도 찾을 수 없다. 발견하지 못한다. 그런데 너희가 한 일이 무엇인지 아느냐?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29절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아십니까? 정확히 로마서 1장에서 말한 겁니다. 그들은 더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주 가까이 계시는데 말이에요. 그들의 감각은 창조주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말해 줍니다. 그들의 감각은, 그리고 그들의 이성은 하나님이 지혜로우시고, 복잡하고, 아름다움을 아시고,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 밖에도 많은 것을 말해 줍니다. 그들의 감각은 하나님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주 가까이 계십니다.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그들의 호흡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는 능력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주 가까이 계십니다. 그들은 더듬고 있죠. 하나님은 가까이 계십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참 하나님을 아는 대신에 우상을 만들어 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 그런 겁니다. 로마서 1장에서 정확히 그렇게 말하고 있죠. 우리가 고린도전서 2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신의 자연적 이성만으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들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구원의 방법이나 하나님과의 관계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상이나 만들어 낼 뿐입니다. 우상입니다. 그러니 참 하나님을 예배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을 돌덩어리로 만들어 놓고 “알지 못하는 신”이라고 부른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위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금덩어리나 은덩어리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아시겠지만 30절입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여러분이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는데도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셨다는 겁니다.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무엇을 하라고 하십니까? “회개하라 하셨으니.” 무엇을 회개해야 합니까? 잘못된 종교를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너희의 종교에서 돌이키라. 우상숭배를 회개하라. 거짓 신을 숭배한 것을 회개하라.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던 것을 회개하라. 회개하라.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회개라고 생각할 때 떠올리는 어떤 특정한 죄에서 돌이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반대쪽으로 180도 방향을 돌리는 것입니다. 거짓 종교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올바른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31절입니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하나님께서는 한 날을 정하셨습니다. 무슨 날입니까? “세상을 심판하실 날”입니다. 심판의 날을 말하는 겁니다. 심판의 날이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미 정하신 재판관을 통해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22절부터 27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예수님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겁니다. 세상을 의롭고, 참되고, 공정하고, 공평하고 의로운 기준에 따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이죠.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심판자로 세우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심판자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바울이 이제 복음을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더 많이 설명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32절에서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부활에 대해,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설명했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죽음을 설명하지 않고 어떻게 부활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분명히 십자가를 전했을 겁니다.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를 전했고, 부활을 전했고,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거짓 종교에서 회개해야 한다. 모든 면에서 종교적이라는 사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22절이 그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소생이라고 결론 내렸다는 것도 상관없다. 듣기에는 좋게 들린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주 가까이 계신다. 너희는 하나님을 더듬어 찾고 있다. 그러나 찾을 수 없다.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여기에 있다. 너희 죄를 대신하여 죽으셔서 죄의 대가를 지불하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이다.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 죽음이 죄의 대가를 온전히 치른 죽음임을 확증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고, 주와 심판자로 세우셨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길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들을 예수님이 심판하실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조롱하기 시작했습니다. 비웃었습니다. 조소했습니다. 그렇죠? 복음을 들었는데도 십자가의 도가 그들에게는 무엇이었습니까? 고린도전서 1장에서 말한 것처럼 미련하게 보인 것입니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잃어버린 상태에 있고, 복음을 듣고 나서도 그것을 조롱합니다. 미련한 것, 어리석은 일로 그들에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다시 듣고 싶습니다. 더 듣고 싶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몇 사람이 바울을 가까이하며 믿었죠. 그 중에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복음을 제대로 알아듣고 믿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분명한 말씀을 주십니다.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죠. “너희는 매우 종교적이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너희에게는 성경이 없고 복음도 없다.” 바울은 “그래도 괜찮아. 걱정하지 마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이렇게 말합니다. “회개하라, 회개하라. 돌아서서 반대 방향으로 가야 한다. 반대 방향은 이것이다. 너희가 하나님과 구원과 용서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한 심판자를 세우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죄인을 심판하실 심판자는 다름 아닌 한 분, 그리스도 예수이시다. 예수님은 죄를 위한 희생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 예수님이 충분하고 완전한 희생을 드리셨다는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로마서 10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믿고, 입으로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자연인은 무지합니다. 우상을 숭배합니다. 로마서 1장에서 자연인을 보면 무지하고 우상숭배에 빠져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는 어떤 모습입니까? 어리석으면서도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여기서 다시 같은 모습을 보죠. 가장 지혜롭다는 사람들, 지식인들, 엘리트, 아테네의 지식인 집단, 가장 종교적이고 가장 이성적이고 가장 학식이 높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으려고 더듬거리다가 결국 우상숭배자가 됩니다. 그리고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하시는 바로 그분,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구원을 주시는 그분에게 영원한 심판을 받습니다. 자연인은 무지합니다. 우상숭배자입니다. 그 어떠한 자연적인 노력으로도 하나님을 스스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단지 아무런 결론에도 이르지 못한 채 중립적인 상태에 머무는 것만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0장으로 가보십시오. 이 이단적인 사상을 정말 철저하게 무너뜨리는 본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입니다.

‘여러분이 고린도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상황을 가정해 보겠습니다. 거짓 종교에서 돌이켜 회심했고, 결혼을 했습니다. 물론 아내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해 봅시다. 두 사람 모두 그리스도께 나아와 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그런데 장모님은 여전히 디오니소스 같은 거짓 신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장모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있잖아, 신전에서 큰 연회가 열리는데 꼭 와야 해. 장인어른을 기리는 자리이고 온 가족이 다 참석할 거야. 그러니 정말 너희도 와야 해.” 그러자 그리스도인인 아내는 어머니의 말에 압박을 받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이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가고 싶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장모님과의 관계를 더 어렵게 만들고 싶지도 않아. 어떻게 해야 하지?” 결국 디오니소스의 신전으로 갔다고 해봅시다. 그곳에 들어가 보니 거짓 신을 위한 난잡한 연회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먹고 마시는 큰 잔치입니다. 여러분도 음식을 조금 먹습니다. 그런데 거짓 신에게 제물로 바쳤던 음식입니다. 그런 음식을 먹었다는 것 때문에 마음이 몹시 불편합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장모님의 압박이 상당하고, 아내도 그 압박을 받고 있으니 상황이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아내가 힘들어하면 여러분도 힘이 듭니다. 그래서 결국 그렇게 한 거죠. 여러분도 그 압박이 얼마나 클지 상상할 수 있으실 겁니다. 단지 가능한 상황을 하나 예로 들어 드린 것뿐입니다. 다른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 후에 다음번에 애찬식에 참여합니다. 성찬식에 참여합니다. 조금 전만 해도 거짓 신을 기리는 연회에 참석했고, 이제는 성찬식 자리에서 떡과 잔을 받으며 주님을 기념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실 분도 계실 겁니다. “글쎄요, 그 사람들은 달리 알 방법이 없잖아요. 진짜 하나님을 찾으려는 시도였으니 얼마나 좋은 시도입니까. 참 괜찮은 노력 아니에요? 그리고 자기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바르게 살려고 애를 쓴다면, 하나님께서 받아 주실지도 혹시 모르지 않아요?” 여러분, 상황을 제대로 보셔야 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바로 고린도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겁니다. 20절입니다. 바울은 우상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돌로 만든 우상도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이해하시겠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방인이 누구입니까? 유대인이 아닌 모든 사람들입니다. 헬라어로 에트노스(ethnos), 민족입니다. 모든 사람, 이교도, 불신자, 온 세상, 모든 사람입니다. 돌이나 은이나 금으로 만든 우상, 나무로 만든 우상, 혹은 무엇이든 자신들이 신이라고 생각하는 대상에게 바치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참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지옥의 세력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겁니다. 사탄과 귀신들과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잘못 아시면 안 됩니다.

또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글쎄요, 불쌍한 이교도잖아요.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자신들이 아는 최선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찾아가려고 애쓰고 있는 것뿐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 겁니다. 존재하지 않는 우상들을 흉내내고 가장하는 악한 영적 세력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참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있습니까? 없죠? 그런데 사람들은 다른 신들이 있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귀신들이 사람들이 숭배하는 신들로 가장하고, 사람들이 그 거짓 신들과 계속 연결되어 있도록 충분한 일들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거짓 신들인데도 말이죠. 단순히 중립적 입장이 아닙니다. 단순히 “안타깝게도 그들은 무지하다”, 이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어딘가 중간에 머물러 있다”, 이런 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자연적인 이성으로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면 결국 무지에 이릅니다. 자연적인 이성으로 하나님을 찾으려 하면 결국 우상숭배에 이릅니다. 자연적인 이성으로 하나님을 찾으려 하면 결국 귀신의 역사에 이릅니다. 모든 거짓 종교의 배후에는 귀신이 있습니다. 모든 철학적, 종교적 체계의 배후에도 귀신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 3절부터 5절에 나오는 놀라운 말씀처럼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의 배후에 귀신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은 모두 귀신에게서 나온 겁니다. 귀신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거짓된 것, 성경에 어긋나는 것은 그 무엇이든 귀신의 역사입니다.

사탄은 자기의 귀신들과 함께 빛의 천사나 빛의 사역자로 가장합니다. 불교의 신은 귀신입니다. 이슬람교의 신도 귀신입니다. 힌두교의 신도 귀신들입니다. 몰몬교의 신도 귀신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믿는 신도 귀신입니다.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다른 모든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부 귀신의 역사입니다.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모세오경, 그러니까 구약의 율법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신명기 32장 17절에 모세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귀신들에게 하였으니.” 시편 106편 37절도 함께 보십시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과 귀신에게 나아가는 겁니다. 이것을 잘 보여 주는 좋은 예가 요한이서에 나오는 세 구절입니다. 9절부터 11절입니다. 요한은 요한이서 9절, 10절, 11절에서 그리스도에 관해 성경이 가르치는 것에서 벗어난다면, 다시 말해 성경이 그리스도에 관해 가르치는 것에서 벗어난다면 어떻게 된다고 합니까? 그리스도를 부인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분이 사셨다는 사실이나 죽으셨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성경이 그리스도에 관해 가르치는 내용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무슨 뜻입니까? 삼위일체를 믿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믿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생애를 믿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믿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라고 한다면, 바로 그 점 하나만으로도 문제가 됩니다. 죄 없는 삶을 사셨다는 것을 부인한다면, 대속의 죽음을 부인한다면, 실제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부인한다면, 그리스도에 관해 성경이 계시한 것 가운데 무엇이든 하나라도 부인한다면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잘 들으십시오. 예수님에 대해서조차 잘못 알고 있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예수님에 대해 아예 들어 보지 못했다면 어떻겠습니까? 그저 귀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우리 사회에 사탄을 숭배하는 종교가 많냐고 묻습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를 제외한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참된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것은 어느 정도,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 사탄적입니다. 물론 모두가 사탄을 숭배한다는 그런 말은 아닙니다. 실제로 사탄을 직접 숭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사람은 사실상 사탄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으시죠?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분이십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21절은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라고 합니다. 그리고 22절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라고 합니다. 신명기 32장 21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하나님은 우상을 보시고 “오, 그래도 잘했어. 이 정도면 너희를 받아 주기에 충분하다”,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나를 질투하게 하고, 나를 진노하게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진노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하나님보다 강하지 않기 때문이죠. 하나님께 맞서고 싶은 건 아니시죠? 우리가 하나님보다 강할 때에나 하나님께 맞설 수 있을 텐데,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결국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좋은 종교,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이성으로 도달하는 곳은 어리석음과 무지와 우상숭배뿐입니다. 그리고 결국 지옥의 세력과 관계를 맺고, 그 세력을 자기 삶 속으로 끌어들이게 됩니다.

매우 중요한 또 하나의 본문을 이제 보겠습니다. 로마서 3장입니다. 충분히 자세하게 풀어 설명할 시간은 없지만, 몇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입니다. 한 군데만 더 보고 마치겠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 여기에는 인류 전체에 대한 보편적인 고발이 나옵니다. 로마서 3장 10절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얼마나 없습니까? “하나도 없으며.” 만일 이 말이 기록되지 않았다면 “저는 예외입니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니다. 너도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도 나오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지 않습니다. 자연적인 길을 통해서는 하나님께 이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다 치우쳐” 모두가 잘못된 길로 가고, 모두가 무익하게 됩니다. 선을 행하는 자가 없되 하나도 없습니다.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참된 선이 아닙니다. 존 거슈너가 늘 하던 표현처럼 말하면, “나쁜 선(bad good)”입니다.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선해 보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고, 좋은 사람이 되고, 자선이나 선행을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쁜 선’입니다. 그 동기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보다 못한 동기는 모두 잘못된 동기입니다. 그들은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사실 문제의 핵심은 그들의 내면이 비참하다는 겁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인류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의미합니까? 19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모든 입을 막고.” 모든 입을 닫게 합니다. 입을 열어 자신을 변호하려 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하나님, 저는 노력했어요. 저는 꽤 괜찮은 사람이에요. 저쪽에 있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낫죠. 제가 아는 어떤 사람들보다도 제가 훨씬 나아요. 하나님도 그 사람들을 아시잖아요”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입을 다무십시오. 입을 다무세요. 여러분은 오직 하나님 앞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연계시가 여러분에게 해 주는 일은 여러분을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로 만들고, 변명할 수 없게 만들고, 여러분의 입을 닫게 하는 것뿐입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20절에서 말하듯이 율법의 행위, 곧 여러분의 선행과 종교적인 행위로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행위를 통해서는 하나님께 이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잘 들으십시오. 만일 복음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면, 구원은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으로는 아무도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22절에서 설명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여러분은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23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좋습니다. 본문 하나만 더 보겠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8절입니다. 짧지만 매우 강력한 말씀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8절입니다. 7절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7절 중간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재림이죠. 기억하시지요? 사도행전 17장에서 말한 바로 그 날입니다. 예수님이 심판자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날입니다. 그 날이 오면 “주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불꽃 가운데 나타나실” 겁니다. 그리고 맹렬하고 최종적인 심판을 행하러 오실 것입니다. 자, 8절을 보십시오. 매우,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고.” 여기서 ‘형벌’이라는 말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대가를 치르게 한다는 뜻입니다. 처벌을 의미합니다. 누구에게 그렇게 하십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누구입니까?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헬라어 문법상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을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그리고”라고 번역된 말은 “곧”, “즉”, 이렇게 옮기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같은 사람들을 한층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이 불꽃 같은 최종 심판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임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이유는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됩니까?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복음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겁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심판을 받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어 보면 이 심판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아주 자세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러한 이단적인 포용주의, ‘더 넓은 자비’라는 견해, 혹은 어떤 저자가 ‘나중의 빛(later light)’이라고 부른 그 견해, 그리고 자연신학에 담겨 있는 함의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릅니다. ‘나중의 빛’이라는 말은 피터 크리프트가 한 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죽어서 천국에 가면, 여러분이 알지 못했던 것들이 그곳에서 바로잡힐 것입니다.” 이런 모든 주장에는 무서운 함의가 있습니다. 사람을 정죄와 멸망으로 이끄는 치명적인 이단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듣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우리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이죠. 오래전에 어거스터스 스트롱(Augustus Strong)이 자신의 조직신학에서, 정확히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존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지식의 유일한 근원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유일한 근원이시라면, 그 지식을 우리에게 알려 주셔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아시는 성령님을 통해 계시하시되, 성령님이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에게 계시하셔서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과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자연신학은 결국 사람을 무지한 우상숭배자로 만들고, 귀신과 관계하게 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향해 가게 합니다. 자연계시는 사람을 정죄하기에는 충분하지만, 구원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핑계할 수 없게 만들지만, 정죄에서 벗어나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명령과 의무는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라고 주님이 명령하셨습니다. 마가복음 마지막 부분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 내용을 마무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과 16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 사명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는 이 명령을 수행할 책임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는 진리를 들을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다시 한번 주의 말씀이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얼마나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지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 우리가 살펴볼 수 있는 다른 많은 본문들이 있고, 이 문제에 대해 증거하는 다른 말씀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이 문제에 대해 정당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도 의심이나 질문을 남기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알기에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가지고 땅끝까지 나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토록 열정과 확신과 희생을 가지고 나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복음을 들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우리를 사용하여 이 일을 하게 하여 주옵소서.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신실하게 전할 수 있도록 우리를 민감하게 하시고, 기꺼이 전하는 사람이 되게 해 주옵소서. 이것이 주님의 부르심이며, 우리의 사명이며, 우리의 명령입니다. 우리의 의무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특권입니다. 진리를 높이 세우시고 모든 거짓과 혼란을 무너뜨려 주옵소서. 주의 백성을 보호하셔서 주의 말씀에 계시된 주의 뜻을 바르게 알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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