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ce to You Resources
Grace to You - Resource

우리는 누가복음을 살펴보는 중에 성탄절을 맞아 몇 차례 흐름이 끊겼고, 그보다 앞서 제가 잠시 중단을 했습니다. 아니죠, 정확히 말씀드리면 건지심(deliverance) 시리즈를 통해서 누가복음을 더 깊이 있게 살펴보려고 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들으셨죠. 또 앞으로도 더 많은 분들이 들으실 텐데, 참 감사합니다. 그런데 건지심 시리즈에서 제가 다루지 않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과 다음 주일 아침에 이 문제를 다루고 나서, 그 다음에 다시 누가복음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성경을 강해하다 보면 한 책을 아주 오랜 기간 다룰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반드시 다루어야 할 문제들이 생깁니다. 그래서 때로는 어떤 문제를 다루기 위해 큰길에서 잠시 벗어나 샛길로 들어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럴 때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복음주의 기독교 안에 있는 사람,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복음이 기독교의 핵심이고, 그 복음은 오직 성경에서만 찾을 수 있고, 그 복음을 땅끝까지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저는 어려서부터 그렇게 알고 자랐습니다. 신학 교육을 통해서도 확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여러 해 동안 성경을 연구하면서 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복음은 신약성경에 나옵니다. 복음의 기초는 구약성경에 나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어야 합니다. 복음 전파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믿어 왔습니다. 바로 이 믿음이 교회를 움직여 왔습니다. 교회는 이 명령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내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다른 방식으로도 말씀하셨죠.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교회가 받은 명령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그렇게 믿었습니다. 참된 교회는 언제나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면 구원받을 수 없고, 구원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지옥에서 영원을 보내게 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바로 그 사실에 이끌려 복음을 전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단지 복음을 듣는 데서 그치면 안 됩니다. 복음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만이 사람을 구원하는 유일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처럼 분명한 성경의 명령에 이끌려 여러 세기에 걸쳐 구원의 메시지를 땅끝까지 전해 왔습니다. 세대를 이어 계속해 왔습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교회의 목표였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아직 이 땅에 남아 있는 이유는 오직 이것뿐입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고 영원토록 보증받았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책임 외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남겨 두실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아주 분명하게 가르친다고 믿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복음을 듣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듣고 이해하려면 누군가 그 메시지를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 그 메시지를 전하려면 보냄을 받아야 합니다. 로마서 10장 말씀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관해 듣지 못하면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 누군가 전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에 관해 들을 수 없다. 그리고 보냄을 받지 않으면 아무도 전할 수 없다.” 우리는 이 명령을 받았고, 오순절에 교회가 탄생한 이후로 계속된 교회의 사명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가 시작된 때부터 지금까지, 셀 수 없이 많은 돈, 엄청난 수고와 노력을 들여서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희생하면서 유일한 구원의 메시지를 땅끝까지 전했습니다. 성경도 번역했습니다. 아직 문자조차 없는 언어의 철자를 만들고, 그 언어를 문자로 기록할 방법을 개발하고, 자기 언어로 된 글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읽는 법을 가르치는 이 모든 과정은 대단히 고되고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그런 다음 그들에게 성경과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습니다. 수십 년이 걸리는 고된 사역입니다. 그리고 온갖 언어로 자료를 인쇄하고, 설교하고, 가르치고, 복음을 전해 왔습니다. 교회가 부르심을 받은 이후, 오순절에 성령께서 임하신 이후로 교회가 계속해온 일입니다. 사람들을 영원한 심판에서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이죠.

이제 우리는 새 천년이 시작되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공식적인 시작은 2001년입니다.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는 지금, 우리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복음을 땅끝까지 전할 수 있는 더 다양한 수단이 있습니다. 기술의 발전으로 온갖 통신 매체를 활용하면서,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게 복음을 땅끝까지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지 않습니까? 바로 이런 시점에 사람들의 영혼을 대적하는 자,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 하나님의 가장 큰 원수인 사탄이 이것을 막기 위해 더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방법은 아주 흥미롭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복음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겁니다. 지난 15년 동안 저는 저와 뜻을 같이하는 분들과 함께 바로 이 싸움에 뛰어들어서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힘써 왔습니다. 복음의 메시지를 모른다면 아무리 좋은 기술이 있어도, 아무리 좋은 기회가 있어도, 아무리 충분한 재정이 있어도 소용없습니다. 땅끝까지 전할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영혼을 대적하는 원수가 교회로 하여금 복음이 무엇인지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대단히 교묘한 전략입니다.

저도 소위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분명히 알려주는 책을 써 왔습니다. 교회가 복음이 무엇인지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죠. 예수님이 정말 주님이신지, 주님이셔야 하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합니다. 교회가 이제는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참된 성경적 칭의 교리를 이해하는 것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것과 회개를 전해야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회개를 전하면 은혜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속과 전가의 교리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모든 죄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대속자에게 온전히 전가되었고, 그 대속자를 믿는 것 외에는 우리의 구원에 아무것도 보탤 수 없다는 참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복음주의 교회는 무엇이 복음인지 분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몇 주 전에 말씀드렸듯이, 아주 큰 복음주의 교회의 목사가 “종교개혁의 중요성은 지나치게 높이 평가되었다”,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복음을 분명하게 정의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복음을 정확하게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한지조차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극적인 일입니다. 우리는 지금 복음을 땅끝까지 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시대에 살고 있는데도, 정작 복음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교회의 깊이는 점점 얕아졌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솔직히 말해서 성경의 진리를 깊이 있게 정의할 만한 신학적 배경도 없고 제대로 훈련받지도 못한 목회자들이 이끄는 교회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는 겁니다. 또 다른 이유는 아무도 불쾌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하고, 교회를 재미있고 즐거운 곳으로 만들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사람을 구원할 만큼의 진리조차 담겨 있지 않은, 일종의 인위적인 복음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심각한 상태이기에 우리는 지금까지 이런 문제들을 다루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복음주의 세계에 훨씬 끔찍한 새로운 흐름이 나타났습니다. 복음을 굳이 땅끝까지 전할 필요가 없다는 흐름입니다.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답니다. 사람들이 복음 없이도 구원받고 있답니다. 복음이 없어도 말입니다. 이런 견해를 가리키는 몇 가지 명칭이 있습니다. 오늘은 잠시 신학 수업을 하겠습니다. 제가 이해할 수 있다면 여러분도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복음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이런 사상을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데 이를 수 있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데 이를 수 있고, 자신의 이성과 옳은 일을 하고자 하는 타고난 욕구를 통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데까지 이를 수 있다고 합니다. ‘초자연적’이라는 말의 반대 의미로 ‘자연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초자연적 신학은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인간을 구원하셔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 자연신학은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께 올라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겁니다. 인간에게 성경 없이도 자연적인 사고 과정과 이성의 능력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구원받는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경의 계시와는 상관없이 인간의 이성만으로 하나님의 존재, 속성, 본성을 모두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 없이도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알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답니다. 인간의 이성만으로 충분하답니다. 물론 이런 견해는 개혁주의의 인간의 전적 타락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타고난 이성적 능력이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추구하고 의를 추구할 수 있을 만큼 선하다고 믿어야 하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이런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전적 타락에 대해 잘못된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인간이 성경 없이도, 복음 없이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것처럼 이렇게 선교에 힘쓸 이유가 있습니까? 사도행전 20장에서 바울이 전해야 했다고 한,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자들이 복음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번역 사역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외딴 지역의 작은 부족들에게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을 구원하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기 삶을 희생하는 이 모든 사람들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음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죠.

몇 주 전에 저는 가톨릭교회가 이렇게 믿는다는 사실을 보여 드리기 위해서 12월 9일 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스(LA Times)>에 실린 교황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Pope John Paul II)는 “예수 그리스도와 로마 가톨릭교회를 믿지 않더라도 의로운 삶을 사는 모든 사람은 구원받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이어서 교황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복음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 마음이 청결한 사람, 삶의 고난을 사랑으로 견디는 사람처럼 팔복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가르친다.” 교황은 구원에 대해 포괄주의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불합리하고 잔인한 것으로 여기며 거부합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교도들도 그저 선한 삶을 살고, 심령이 가난하고, 마음이 청결하고, 옳은 것을 추구하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선한 삶을 살고 진실하기만 하다면 무엇을 믿느냐는 중요하지 않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 연합을 위한 투쟁(Ecumenical Jihad)>를 쓴 가톨릭 변증가 피터 크리프트(Peter Kreeft)가 불교도도, 힌두교도도, 유교도도, 무슬림도, 무신론자도, 정통파 유대교인도 모두 천국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거죠.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중요하지 않고, 복음도, 성경도 중요하지 않고, 오히려 진실함과 선함, 이 두 가지를 중요하게 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연신학 사상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자연적인 능력, 다시 말해서 이성의 능력과 어느 정도 타고난 선함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데 이를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구원을 얻는다는 겁니다. 성경을 단 한 번도 못 봐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해도 구원을 받는답니다. 교황은 가톨릭 신학이 오랫동안 믿어 온 것을 그대로 확인해 준 것뿐입니다.

이런 생각은 어떤 인간적인 공정성의 개념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어디에 사는 누구든 복음을 직접 접할 기회가 없다는 이유로 구원받을 수 없다면, 왠지 공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톨릭만의 견해가 아닙니다. 몇 주 전에 여러분에게 읽어 드렸던 내용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녹음본에 제가 꼭 남겨 두고 싶습니다.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와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목사가 <아워 오브 파워(Hour of Power)>에서 나눈 인터뷰가 있습니다. 녹취록도 있습니다. 대화는 이렇습니다. 슐러 박사가 묻습니다. “기독교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이라고 보십니까?” 그레이엄 목사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전 세계의 기독교 집단에서 나오기도 하고, 기독교 집단 밖에서도 나오기도 합니다. 저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거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모두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 온 세상을 그리스도께로 돌이키는 거대한 부흥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말은 그리스도에 관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 중에도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사람들이 있으므로 모두 그리스도께로 나아올 것이라고 기대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다른 길을 통해서도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레이엄 목사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불러내시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행하고 계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세상에서 사람들을 불러내고 계십니다. 이슬람 세계에서 나오든, 불교 세계에서 나오든, 기독교 세계에서 나오든, 불신앙의 세계에서 나오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조차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에게 없는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알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빛을 향해 돌아섭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이 구원받았으며, 천국에서 우리와 함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슐러 박사가 말했습니다. “제가 들은 바로는, 어떤 사람이 어둠 가운데 태어나 성경에 관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고 성경을 접할 기회조차 전혀 없었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의 마음과 영혼과 삶에 들어오실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제가 말씀하신 뜻을 정확하게 이해한 것입니까?” 그레이엄 목사가 대답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저는 세계 여러 지역의 부족 사회에서 그런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성경을 본 적도 없고 성경에 관해 들어 본 적도 없고, 예수님에 관해서도 전혀 들어 본 적이 없지만 마음으로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었고, 자신이 살고 있는 주변 공동체 사람들과는 상당히 다른 삶을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슐러 박사가 대답합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니 정말 기쁘군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참으로 크고 넓습니다.” 그레이엄 박사가 화답합니다. “그렇습니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이 사상은 분명하게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에서 가톨릭교회로 넘어왔습니다. 이제는 복음주의 개신교 안으로까지 들어왔습니다. 이제는 일종의 개신교적 견해까지 생겨났습니다. 무슬림이든 힌두교도든 누구든 성경을 한 번이라도 접했는지, 복음을 한 번이라도 들었는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알고는 있는지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몸에 속했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구원받아서 천국에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Billy Graham Organization)는 이 입장이 빌리 그레이엄이 1960년에 <디시전(Decision)> 잡지에 쓴 글에서 밝힌 견해와 동일하다고 확인했습니다. 따라서 새롭게 생겨난 견해가 아닙니다. 이 사상의 복음주의적 형태를 살펴봅시다. 오늘날 이 사상의 복음주의적 형태를 가리키는 용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더 넓은 자비의 견해(wider mercy view)’입니다. ‘자연신학적 견해’보다는 조금 쉬운 표현이죠. 타락한 상태에 있는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의로운 삶을 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주장은 성경으로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자연신학자로 내세우기보다는 초자연적 신학자로 보이고 싶은 겁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자비에는 더 넓은 측면이 있다면서 ‘더 넓은 자비의 견해’라는 다른 명칭을 만들어 냅니다. 모든 사람을 포괄하는 하나님의 자비로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품으신다는 겁니다. 결국 이 견해가 말하는 핵심은 어떤 종교를 믿든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클라크 피녹(Clark Pinnock)은 제가 신학생이었을 때 <너희의 변론을 제시하라(Set Forth Your Case)>라는, 정말 훌륭한 기독교 변증서이자 기독교 신앙의 증거를 제시하는 책을 썼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아주 강력하게 변호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후로 거의 배교 수준으로, 이제는 아마도 이 ‘더 넓은 자비의 견해(wider mercy view)’를 가장 앞장서서 주장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그의 말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우리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다가갈 때,”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 이런 말입니다, “우리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어떻게 말씀해 오셨는지,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관해 우리 자신이 무엇을 새롭게 이해하게 될지 알아보기 위해서이다. 다른 민족, 다른 문화, 다른 종교에 다가갈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신발을 벗는 일이다. 우리가 다가가는 곳은 거룩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꿈을 짓밟게 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셨다는 사실을 잊을 수도 있다.” 그야말로 선교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정의합니다. 어떤 부족에게 다가갈 때에 “이 사람들은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멸망할 자들이고 어둠 가운데 있다”라는 생각 대신에, 그곳이 거룩한 땅이라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이교 신앙이라는 형태로 하나님께서 이미 그곳에 계셨다는 겁니다. 피녹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속 사역은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일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다.”

정말 파괴적인 견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일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다고요? 이게 무슨 뜻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 모든 구속 역사에서 단 하나뿐인 가장 위대한 사건이 아니라, 수많은 사건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 구원의 길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면요, 그분의 성육신, 동정녀 탄생, 죄 없는 삶, 대속의 죽음, 육체의 부활, 승천, 중보, 재림까지 모든 가치를 떨어뜨리는 겁니다. 사도 요한이 맞서 싸웠던 오래된 헬라 이단, 그러니까 ‘보편적 로고스(universal logos)’라는 사상을 다시 끄집어낸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여기저기 떠다니면서 모든 종교 속에 그리스도의 영을 불어넣는다는 사상입니다. 또 삼위일체도 공격합니다. 하나님께서 삼위일체이심을 확증하는 것은 오직 성경적 기독교뿐입니다. 몰몬교도 삼위일체를 부인합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혼란스러우실 겁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저도 잘 압니다. 제가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아마 여러분도 저와 비슷하게 생각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것을 믿을 수가 있지?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이런 것을 믿을 수가 있지?’, 이런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에서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라고 말씀하셨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약성경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수님을 믿는 것이 구원받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구원자는 없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전서에서 말한 것처럼 중보자도 오직 한 분뿐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중보자는 오직 한 분뿐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런 성경 말씀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이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텔레비전에 나올 때마다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사람들 앞에 서서 말할 때마다 예수님에 대해 말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무슨 주장을 하는 겁니까?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라고,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무슬림과 불교도, 또 정령숭배자를 비롯한 온갖 사람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게 되고,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모두 천국에 가게 된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이 두 가지가 양립할 수 있습니까? 대답은 이겁니다. 클라크 피녹(Clark Pinnock)이나 샌더스(Sanders)를 비롯해 이 문제에 관해 글을 쓴 사람들의 저술에서 그들이 제시하는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만이 구원의 유일한 근거이지만, 구원받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랍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종교를 믿든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된답니다. 그 하나님을 어떤 모습으로 생각하든 상관이 없고, 옳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고 선한 일을 하려고 노력하고 종교적으로 살아가려고 한다면, 그리스도를 전혀 모르더라도 결국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삼위일체이신 것을 몰라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것을 몰라도,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몰라도, 그런 사실을 전혀 몰라도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그 사람의 구원자가 되신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그 사람의 죗값을 치르셨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라고 말하면서도, 평생 성경도 그리스도도 전혀 몰라도, 그리스도께서 속죄하시기 위하여 그 죗값을 그들을 위해 치르셨다고 주장합니다. 구원에 관한 것을 전혀 몰라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역의 유익을 직접 받는답니다.

마더 테레사, 테레사 수녀(Mother Teresa)는 가톨릭 신앙에 아주 충실했습니다. 제가 가족들과 함께 캘커타에 갔을 때 테레사 수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쓴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The Gospel According to Jesus)>을 한 권 드렸는데, 꽤 흥미로운 만남이었습니다. 아주 친절하셨습니다. 체구는 작았지만 강인하면서도 매우 친절하셨습니다. 저희 아이들이 책을 직접 전하고 싶어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받으면서 읽어 보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테레사 수녀는 자신의 가톨릭 신앙에 대단히 충실했습니다. 철저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가톨릭교를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사인을 해 주면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쓰더군요. 그러니까 마리아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가톨릭 신앙에 매우 충실했습니다. 그런 모습이 또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캘커타에 있는 테레사 요양원에 갔는데요,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곳이었죠. 그런데 벽에는 힌두교 신들의 그림이 걸려 있었습니다. 팔이 여러 개 달린 기괴한 모습의 힌두교 신들, 또 신상들의 그림이 이 가톨릭 시설의 벽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제가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본 적이 없을 만큼 가장 혐오스럽고 타락한 사원이 바로 옆에 붙어 있었습니다. 캘커타에 있는 힌두교 사원인데요, 피의 제물로 소처럼 큰 짐승까지도 바쳤습니다. 너무 타락한 의식이어서 제가 차마 입에 담기조차 꺼려질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두 곳이 바로 딱 붙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지금 제가 알고 있는 것들을 몰랐죠. 그래서 저는 어떻게 테레사 수녀가 바로 옆의 그 타락한 장소와 관련된 힌두교 신들의 그림을 자기 시설 안에 걸어 둘 수 있는지 의아했습니다. 저는 단지 정치적인 배려라고 생각했습니다. 캘커타에서 계속 활동하려면 인도를 지배하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죠. 그래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게 된 것은 이것이 힌두교 신학 체계의 일부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체계 자체가 그런 겁니다. 어떻게 작동하는지 말씀드리죠. 라이문도 파니카르(Raimundo Panikkar)라는 사람이 <힌두교의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도(The Unknown Christ of Hinduism)>라는 책을 썼습니다. 제목이 참 흥미롭죠? <힌두교의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도(The Unknown Christ of Hinduism)>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선하고 진실한 힌두교인은 힌두교에 의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받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힌두교인을 구원하시는 것은 힌두교의 성례를 통해서이고, 힌두교가 전해 주는 도덕과 선한 삶의 가르침을 통해서이다. 힌두교를 통해 전해지는 신비주의를 통해서이다.”

종교가 무엇이든 어떤 신앙을 가졌든 모두 구원받는답니다. 힌두교인이든, 불교인이든 선하기만 하다면 말이죠.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보았을 법한 사람들, 입술에 뼈를 꿰고 창을 들고 돌아다니는 사람들까지도 말입니다. 선하기만 하면 모두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이런 생각이 복음주의 안으로 파고들었다는 게 얼마나 믿기 어려운 일인지 아시겠어요? 만일 이런 주장이 뉴욕의 유니언 신학교(Union Seminary)에서 나왔다거나, 이미 동성애자를 성직자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자유주의적 입장을 내세우던 자유주의 교단에서 나왔다면 그나마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얼마 전에 말씀드렸던 사람들입니다. 피터 크리프트(Peter Kreeft)의 책을 지지했던 사람들, 그리고 J. I. 패커(J. I. Packer) 같은 사람이 “그가 옳을 수도 있지 않은가?”라고 말했던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피터 크리프트가 쓴 <종교 연합을 위한 투쟁(Ecumenical Jihad)>이라는 책의 전체적인 논지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생기죠. “어떻게 이런 생각이 복음주의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을까? 어떻게 이런 생각에 굴복했을까? 어떻게 이런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어떻게 목회자들이 ‘아, 종교개혁은 그렇게 사실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쩌면 우리는 선교라는 개념 자체를 완전히 새롭게 정의해야 할지도 모른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바로 그런 일이 지금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 제가 이 모든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여러분에게만 말씀을 전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께서 제게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레이스 투 유(Grace to You)> 라디오 방송이 거의 하루에 2천 번씩 방송되고 있기 때문에 영어로 많은 사람들이 듣고 있고, 지금은 스페인어로도 하루에 약 5백 번 방송되고 있습니다. 복음주의 세계를 향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언제라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반드시 다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문제를 다루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성경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제 의견을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제 의견은 아무런 가치가 없죠. 성경이 이 문제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가 핵심입니다. 구원에 관한 배타주의(exclusivism)에 대한 성경적 근거가 있을까요? 복음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믿음의 근거가 성경에 있을까요?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자연신학으로는 아무도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믿음도 성경에 근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가 지극히 좁다는 사실도 성경에 근거합니다. 실제로 성경에 ‘좁다(narrow)’라는 단어가 성경 마태복음 7장에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나님의 자비는 좁습니다. 구원은 초자연적인 계시에 의한 것입니다. 이제 성경을 통해서 제가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지금은 그냥 들으십시오. 당장은 성경을 펴지 마시고 그냥 듣기만 하십시오. 창세기 3장을 전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시죠? 창세기 1장과 2장은 창조에 관한 말씀입니다. 창세기 3장은 인간의 타락에 관한 말씀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죠. 하나님은 이어서 아담의 동반자인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렇게 아담과 하와가 완전한 상태로 창조되었습니다. 육제와 정신과 이성이 모두 완전했죠. 그렇죠? 전혀 오염되지 않은 완전한 환경에서 살았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도 완전한 관계를 누렸습니다. 모든 것이 완전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에덴동산의 환경은 완전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완전한 정신이 있었습니다.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완전하게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었습니다. 완전하게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창조의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알았고, 자신들보다 훨씬 강력한 존재가 자신들을 창조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뛰어난 지성, 아름다움, 질서, 정교한 설계를 추구하고, 능력이 있고, 생명을 부여한 존재가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창조의 이유는 알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알려주지 않는 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주변 환경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동산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죠.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으면 알 수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저것은 먹지 마라. 먹으면 죽을 것이다”,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또 “이 여자가 네 아내다. 자녀를 낳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닐면서 대화했던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살아가는 세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해 특별계시를 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자연신학자들은 아담이 자신의 완전한 이성만으로는 하나님의 진리를 알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아담은 완전한 이성과 완전한 지성을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먹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야 한다는 것, 이런 사실을 알 수 없었습니다. 동산을 경작하고 돌보아야 한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셔야 했습니다. 로버트 모리(Robert Morey)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담은 진리와 정의와 도덕과 의미와 아름다움의 근원이 되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다. 창조주께서는 동산에서 인간과 함께 거니셨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특별계시의 시간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창조 이유와 동산에서 할 일을 계시하셨다. 또한 무엇을 먹을 수 있고 무엇을 먹을 수 없는지도 계시하셨다.” 다시 말해서 진리, 정의, 도덕, 의미, 아름다움의 근원, 모든 것의 출발점은 하나님이셨고, 인간의 책임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진리의 근원이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였습니다.

물론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에 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해 주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는 알 수 없었을 겁니다. 사실 우리는 창세기 1장, 2장, 3장이 없었다면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어떤 상태였는지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타락한 상태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시겠어요? 세상의 종교들을 연구하고, 세상의 철학자들을 연구하고, 세상의 신학자들을 연구해 보십시오. 그 누구도 인간의 창조, 인간의 타락에 대해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무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타락한 이성으로는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사탄은 에덴 동산에서 완전한 인간, 완전한 정신, 완전한 이해력과 완전한 이성을 가진 인간에게 다가왔습니다. 바로 그런 상태에서 사탄이 들어와서 아담과 하와가 무엇을 불신하게 하려고 했습니까? 사탄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느냐?”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없다”라고 한 겁니다. 보십시오. 사탄이 언제나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특별계시를 불신하고 우리의 이성을 신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탄은 이 시나리오를 통해 하와를 한 걸음씩 이끌어 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말합니다. “아, 너희는 죽지 않을 거야. 하나님을 믿을 수 없어.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시는 거야.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너희가 죽는다고? 아니야, 죽지 않아. 하나님처럼 될 거야. 하나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경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는 거야.” 사탄은 인간이 이성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계시를 거부하도록 유혹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특별계시를 주셨습니다. “먹지 마라.” 그러자 사탄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믿지 마. 네 이성을 믿어”라고 했습니다. 본질적으로 자연신학의 믿음이죠. 동산에서 사탄이 했던 거짓말을 계속, 계속, 계속 반복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너희의 이성으로 그곳에 도달할 수 있어. 성경은 신경 쓰지 마. 복음도 신경 쓰지 마. 그런 것은 필요 없어. 너희 자신의 이성으로 그곳에 도달할 수 있어.”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완전한 세상에 있던 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이성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알 수 없었다면, 저주받은 세상에 있는 타락한 인간이 어떻게 왜곡된 이성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다면 아담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지 않으신다면 그 누구도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담과 하와보다 훨씬 더 열악한 상태입니다. 사탄은 언제나 똑같은 일을 합니다. 언제나 특별계시의 가치를 떨어뜨리려고 합니다. 얼마나 훌륭한 전략입니까? 교회가 복음을 전할 필요조차 없다고 믿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죠. 이 전략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하늘에서 왔습니까? 이 이단적인 가르침이 어디에서 왔는지 한번 말해 보십시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누가 가장 원할까요?

자, 로마서 1장을 살펴봅시다. 지금은 두 곳 정도만 보겠습니다. 한 여덟 군데 정도 있는데, 나머지는 다음 시간에 보겠습니다. 자, 집중해 주십시오. 매우 중요한 내용이지만 빠르게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 1장 18절부터 23절입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내용이 아주 광범위합니다. 여기서 인간을 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에 대한 관점, 성경적 인간론입니다. 18절부터 읽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매우 익숙한 본문이죠. 이제 정리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증거가 있다고 말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이성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20절을 보면 이성은 창조 세계를 바라보면서 “분명히 창조주가 계실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성은 창조 세계의 다양성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은 엄청난 지성을 가지고 계실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설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합니다. 아름다움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은 아름다움과 조화의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하죠. 방대한 다양성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과 복잡성을 지니신 분이시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모두 사실입니다. 이성으로 창조 세계를 바라보면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보인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기 때문에, 20절은 그것이 “분명히 보여 알려졌다”라고 말합니다. 우주라는 결과에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사실, 창조주가 계시다는 사실을 부인하려면 정말 이성을 완전히 죽여버려야 겨우 가능할 정도입니다. 너무나 분명하게 보입니다. 20절 하반절에 나오는 것처럼 너무나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핑계거리가 없습니다. 진화론자의 그 어떠한 핑계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정말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터무니없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사용하는 ‘어리석은 자’라는 표현도 바로 그런 뜻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누군가가 만들었다고 누구나 생각합니다. 하물며 우주는 분명히 창조주를 요구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이성을 주셨습니다. 이성은 창조 세계를 바라보면서 창조주의 능력과 본성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핑계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성이 인간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참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18절로 돌아가 보십시오. “불의로 진리를 막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너무나 악합니다. 타락했습니다. 본성이 부패했습니다. 사악하고, 너무나 경건하지 않기 때문에, 타락한 본성이 자연적인 능력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가능성을 차단해 버립니다. 오히려 진리를 억누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주변에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의 뜻이나 구원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창조주가 계시다는 사실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창조주를 영화롭게 하지 않습니다.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타락한 인간이 하는 일입니다. 아담도 그랬습니다. 교만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떠나 자신의 인간적 이성을 따름으로써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돌아섭니다. 진리를 억누릅니다. 그 결과 생각이 허망해집니다. 텅 비어 버립니다. 진리가 아닌 어리석은 생각들을 만들어 냅니다. 진화론 같은 거대한 거짓말도 그렇습니다. 진화론은 사실이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철학이나 거짓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이 아닌 공허한 인간의 생각들을 만들어 내고, 그 결과 어리석은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빛이 없습니다. 결국 남은 것은 뒤엉키고 왜곡된 이해뿐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타락의 핵심 요소 가운데 하나인 자기중심적인 교만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지혜롭다고 주장합니다. 박사 학위를 스스로 수여하고, 화려한 성직자 복장을 걸치고, 원뿔 모양의 모자를 쓰고, 마치 위대한 종교적 현자라도 되는 것처럼 행진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헬라어로 말하면 멍청한 자들입니다. 정말 우스꽝스러운 사람들입니다. 사실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피조물들을 신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결국 어디까지 갑니까? 벌레를 숭배하고, 인간을 숭배하고, 무엇이든지 숭배합니다. 결국 그렇게 됩니다. 자연인은 그렇게 흘러갑니다. 물론 이성은 “분명히 하나님이 계실 것이다. 창조주가 계실 것이다. 강력하시고, 복잡한 질서를 이루시는 분일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너무나 악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그리고 다음 주에 더 말씀드리겠지만, 진리를 억누릅니다. 죄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진리를 눌러 버립니다. 진리를 억누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없고, 그 죽음의 상태에서 빠져나올 수도 없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죽었습니다. 현실에 대해서도 죽었습니다. 바로 그 죽음의 상태에서 진리를 억누릅니다. 의도 억누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거짓 종교 체계를 만들어 내고, 공허하고 어리석은 철학을 만들어 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의 결말은 무엇입니까? 이 모든 것의 끝은 결국 어디입니까? 인간의 철학과 인간의 종교가 결국 어디에 이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진노가.” 바로 이것이 핵심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특별계시의 도움을 받지 못한 자연인이 자신의 자연신학을 가지고 결국 도달하는 곳은 변명의 여지 없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다. 어떤 부족이 악어 같은 것을 숭배하고 있다고 해서 그곳에 가서 “아, 여기는 거룩한 땅이구나. 내가 오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여기 계셨구나”,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기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거기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진리가 아닙니다. 현실이 아닙니다. 참되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 썩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른 것을 세워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공허한 철학을 만들어 내거나, 어리석은 종교를 만들어 내거나, 우상을 만들어 낸 것뿐입니다. 자연인은 결국 그곳에 이릅니다.

로마서 1장은 자연인에 대한 진단입니다. 자연인은 종교적인 사람이 되지만,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지옥으로 내려갑니다. 하나님께로 절대로 올라가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해서, 진리를 억누르고 자신의 악함을 사랑한 결과, 상상으로 만들어 낸 거짓 신으로 점점 내려갑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다. 결코, 어떤 의미에서도 ‘그리스도의 몸’ 안에 그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도달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진노, 심판, 심판입니다.

말씀 한 곳만 더 보겠습니다. 로마서 1장과 짝을 이루는 본문인 고린도전서 1장입니다.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우리가 본 것은 인간이 종교적 교만의 최고 단계에 이르게 되면 결국 어리석은 자가 되고, 멍청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인다는 것입니다. 그 종교가 세련되지 못한 애니미즘이든, 아주 정교한 서구식 종교이든, 혹은 동양식 종교이든 상관없습니다. 결국 모두 같은 곳에 이릅니다.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봅시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무엇입니까? 보십시오. 이 어리석은 자들은 우리가 전하는 것이 어리석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가 어리석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리고 여기에 또 하나의 심판이 나옵니다. 이사야 29 장 14절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여기에서 “멸하고”, “폐하리라”, 이 두 표현 모두 최종적인 심판과 처형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좋다. 가장 지혜로운 자들을 모두 세워 보아라. 가장 총명한 자들을 모두 줄 세워 보아라. 내가 모두 쳐서 쓰러뜨리겠다.”

다시 말해서, 종교적인 지혜를 성취하고, 소위 하나님과 영적인 것들에 대해 높은 수준에 도달한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이 멸하시고 폐하실 것입니다. 로마서 1장 18절의 진노와 같습니다. 여기에서는 멸망과 폐함,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 것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리고 2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거의 빈정거리는 말투이죠. “선비가 어디 있느냐?” 평생 동안 종교적인 것들을 꼼꼼하게 기록하는 데 인생을 바친 사람입니다.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자신의 철학과 신학을 가지고 토론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을 모두 데려와봐라. 세상의 지혜를 모두 데려와봐라. 엘리트 종교 지도자들을 데려와봐라. 각자의 종교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들을 데려와봐라. 교황이든, 힌두교의 지도자든,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든, 몰몬교 사도이든, 누구든 상관없다. 인간이 고안해 낸 종교 체계의 정점에 도달한 사람들을 모두 데려와봐라. 지혜로운 자들, 서기관들, 위대한 저술가들과 신학자들, 논쟁하는 자들, 자신의 주장을 논증해서 상대를 이길 수 있는 사람들, 그 모든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두를 어리석게 만드실 것입니다. 은혜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하나님이 그들을 멸하고 폐하실 것입니다.

그 이유가 21절에 나옵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잘 기억해 두십시오. 밑줄을 그어 두세요. 세상은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세상이 종교적 성취와 지적 성취에 있어서 아무리 최고의 수준에 이르렀다고 해도, 세상이 가장 지혜로운 수준에 도달했다 해도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는 없습니다. 결코 알 수 없습니다. 21절 하반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18절의 십자가의 도를 가리키죠. 여러분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십자가의 도를 믿는 것입니다. 유일한 방법입니다.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릴까요? 여러분 자신의 지혜와 이성과 종교심과 철학으로는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미련해 보이는 메시지, 십자가,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메시지를 통해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무엇을 믿습니까? 바로 십자가의 도입니다. 아무거나 믿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십자가의 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은 인간의 이성이 만들어 낸 산물이 아닙니다. 무엇입니까? 계시입니다. 계시.

그렇다면 십자가에 관한 계시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이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 않습니까? 사탄은 오늘날에도 동산에 들어와 사람들을 끌어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특별계시로 말씀하신 것을 정말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네 이성을 믿어. 네 이성을 믿으라고.” 이게 바로 자연 신학자들이 하고 있는 짓입니다. 그저 사탄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죠. 오직 십자가의 도만이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 외의 것은 무엇이든지 ‘모리아(mōria)’, 어리석은 것입니다. 미련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8장 9절입니다.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며 두려워 떨다가 잡히리라 보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거부하고, 특별계시를 거부하고, 주님의 말씀을 거부한다면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다는 말입니까? 야고보가 그 질문에 답합니다. 야고보서 3장 15절입니다.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아주 직설적이지 않습니까? 단순히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것도 아닙니다. 귀신의 것입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위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면 아래에서 올라온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2절, 아니죠, 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인간의 생각이나 이성을 가지고 온 게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라고 합니다. 바울이 전하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가 전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이 구원하기 때문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그러니까 이 십자가의 도가 구원하기 때문입니다. 이것만 전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만이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증거를 전하고, 하나님의 비밀, 이전에는 감추어져 있었으나 이제 계시된 것을 펼쳐 보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그 모든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사건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구원은 오직 이 십자가의 도를 믿는 것뿐입니다.

지혜 있는 자들이 있나요? 하나도 없습니다. 선비는요, 서기관은요, 있습니까?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저는 지금 <미국의 몰몬교(Mormon America)>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한 절반쯤 읽은 것 같습니다. 거의 한 500쪽쯤 되는 책인데요, 몰몬교는 정말 복잡한 조직입니다. 수십억 달러가 움직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리저리 오갑니다. 관계가 아주 복잡합니다. 온갖 복잡한 일들이 얽혀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모두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물론 온갖 높은 곳에까지 올라갔습니다. 에즈라 태프트 벤슨 같은 사람도 있고,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상원의원들도 있고, 권력가들도 있고, 대통령 내각에서 일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신들의 종교 안에서도, 그리고 기업 조직으로서도 복잡한 조직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카드로 쌓은 거대하고 거대한 집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언젠가 불어 무너뜨리실 것입니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정말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결국 멸망할 겁니다. 그들이 경험하게 될 것은 하나님의 진노뿐입니다. 그들 자신의 체계를 통해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다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 메시지를 듣기 전에는 결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난 오랜 세월 동안 복음을 전한 이유입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사람들이 복음을 가지고 땅끝까지 나아갔던 이유도 바로 이겁니다. 성경이 이렇게 가르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죠. 자연인은 자기 자신에게 맡겨 두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됩니다. 고린도전서가 말하는 것처럼 멸망 아래 놓이게 되고, 결국 아무것도 아닌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맙니다. 19절에서 말하듯이 가장 지혜로운 자들을 데려오고, 가장 총명한 자들을 데려와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모두 쓸어버리실 겁니다. 그러한 것으로는 하나님께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적인 이성으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진리를 알 수 없습니다. 종교적인 직관으로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하는 진리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특별계시뿐입니다. 바로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힌두교를 통해 구원받는다고 말하거나, 다른 종교를 통해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에 속했고, 그리스도인이고, 하나님의 나라에 있으며, 천국에 간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거짓말하는 겁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다음 주에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다시 한번 안타깝게도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밖에 없는 일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아픈 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깊이 주님께서는 주님을 욕되게 하는 일의 고통을 느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사실을 바로 세우고 우리가 맡은 책임을 충실하게 감당하고자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으로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이 무엇인지 분명히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계속해서 나아가고, 이러한 거짓말과 속임수와 이단들이 주님의 영광스러운 사역을 공격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의 교회를 지켜 주시고, 주님의 백성을 지켜 주시고, 진리를 전하는 신실한 사람들이 영향력 있는 자리에서 계속해서 사역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백성이 진리를 듣고 이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들에게 분별력을 주셔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분별의 기준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옵소서.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신실하게 전하도록 도와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믿는 믿음 외에는 천국에 이르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바울처럼 우리가 십자가를 전하게 하시고,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라고 고백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This sermon series includes the following messages:

Please contact the publisher to obtain copies of this resource.

Publisher Information
Unleashing God’s Truth, One Verse at a Time
Since 1969

Welcome!

Enter your email address and we will send you instructions on how to reset your password.

Back to Log In

Unleashing God’s Truth, One Verse at a Time
Since 1969
Minimize
View Wishlist

Cart

Cart is empty.

Subject to Import Tax

Please be aware that these items are sent out from our office in the UK. Since the UK is now no longer a member of the EU, you may be charged an import tax on this item by the customs authorities in your country of residence, which is beyond our control.

Because we don’t want you to incur expenditure for which you are not prepared, could you please confirm whether you are willing to pay this charge, if necessary?

ECFA Accredited
Unleashing God’s Truth, One Verse at a Time
Since 1969
Back to Cart

Checkout as:

Not ? Log out

Log in to speed up the checkout process.

Unleashing God’s Truth, One Verse at a Time
Since 1969
Minimiz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