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누가복음 강해에서 잠시 벗어나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몇 주 전부터 말씀드렸듯이, 저는 건지심(deliverance)을 주제로 책을 써야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건지심에 관한 신학은 지극히 성경적인데도 오늘날에는 거의 완전히 무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몇 주 동안 이탈리아에 가 있었을 때, 이 주제를 반드시 다루어야 한다는 생각이 제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말한 것처럼 제 마음이 불붙는 것 같이 되었습니다. 건지심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제 마음에 있는 것을 다 쏟아놓기 전에는 누가복음으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참, 지난주에 이 자리에 계시지 않았던 분들은 테이프를 구해서 꼭 들어보십시오. 지난주에 말씀드린 내용은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이 주제를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기초입니다. 들어도 되고 안 들어도 되는 그런 설교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반드시 이해해야 할 주제입니다. 그러니까 지난주 설교를 듣지 못하셨다면 오늘 테이프 센터에 가셔서 테이프를 꼭 구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지난주에 저는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단어 가운데 하나가 ‘건지심(deliverance)’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이 단어는 흔히 사용하는 단어는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신학자들조차 이 건지심의 진리에 대해 말로나 글로나 이야기하는 것을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건지심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건지심을 행하십니다. 그리고 ‘건지심’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은혜와 능력으로 행하시는 일을 설명하는 가장 좋고, 가장 분명하고, 가장 포괄적인 말입니다. 우리가 이 주제를 다루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사역을 하러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살펴보면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살펴보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구속 목적을 아우르는 더 큰 주제인 건지심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건지심(deliverance)에 관한 신학은 단지 학문적 연구 주제가 아닙니다. 단순히 신학적인 토론을 위한 주제가 아니라 실제적인 주제입니다. 대단히 실제적입니다. 그리고 모든 신자가 반드시 이해해야 할 주제입니다. 왜냐구요? 건지심에 관한 신학은 신자에게 구원의 실제를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건지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참된 구원(salvation)이란 건지심(deliverance)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죄인을 파멸시키고 정죄하여 지옥에 이르게 하는 삶의 모든 요소로부터 극적으로 건져내시는 겁니다. 구원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세상은 건지심을 받지 못한 사람과 건지심을 받은 사람으로 나뉩니다. 우리는 건지심을 받았습니다.
로마서 11장 2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메시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구원자로 나옵니다. 사실 성경에서 ‘구원하다(save)’, ‘구원받다(saved)’, ‘구원(salvation)’, ‘구주(Savior)’, 이런 말이 나올 때마다 ‘건져내다(deliver)’라는 말로 바꿔도 됩니다. 본질적으로 뜻이 같습니다. 영어의 ‘deliverance’가 구원의 의미를 아주 잘 전달해 줍니다.
지난주에 들으셨던 분들이라면 이 내용이 아직도 마음에 생생하게 남아 있기를 바랍니다. 건지심에 관한 신학과 건지심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참된 그리스도인의 여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리고 제가 말씀드렸듯이, 교회가 건강하고 온전하고 효과적으로 사역하는 데 있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사이의 경계를 흐려 버리면, 결국 원수를 진영 안으로 끌어들이게 되고, 교회의 정체성을 완전히 왜곡하게 되고, 사탄에게 발붙일 틈을 내주게 됩니다. 가라지가 밀 가운데 뿌려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거나, 심지어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부추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복음주의 안에서 실제로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복음주의 교회는 비그리스도인들을 교회 안으로 불러들인 다음에, 그리스도인이라고 새롭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듯이, 오늘날 그리고 지난 한 세기 동안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교회가 저지른 가장 큰 실패는 참된 그리스도인과 거짓 그리스도인을 구별하지 못한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상황이 더 심각합니다. 지난 한 세기 내내 계속되어 왔는데,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심각해졌습니다. 참된 교회는 건지심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아주 분명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주님은 순결한 교회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정결한 신부를 원하시고,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신부를 원하십니다. 교회는 반드시 참된 신자들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누가 진짜 그리스도인이고 누가 아닌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탄이 교회 안으로 침투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교회를 보호할 수 있고, 또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속는 것도 막을 수 있습니다. 비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이라고 규정하도록 내버려 두면 교회를 더럽힐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속이는 사탄을 도와주는 셈이 됩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이 자신이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여기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듯이, 사람들이 “교회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물으면 저는 “분별력이 없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교회가 도대체 무엇을 분별하지 못하는가 하면, 누가 그리스도인이고 누가 그리스도인이 아닌지를 분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치명적인 오류입니다.
지난주 말씀을 마치면서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듯이, 건지심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살펴보아야 할 몇 가지 영역이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몇 가지 중요한 부분에서 건짐받은 자입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첫번째를 살펴보겠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오류에서 진리로 건짐받은 사람입니다. 오류에서 진리로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이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로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고요? 첫째, 제 머릿속에 내용이 너무 많이 들어 있습니다. 정리해야 할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무엇을 말씀드려야 할지 가려내는 데 엄청난 정신적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그 과정에서 성령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라는 확신도 필요합니다.
둘째, 여러분도 저와 함께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이 내용을 살펴보면서 이해해야 할 것들 중에는 미묘한 것도 있고, 그다지 미묘하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정말 중요합니다. 실제로는 그리스도인이 아닌데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일은 없습니다. 비그리스도인을 마치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보다 교회에 더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일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는 교회의 정체성에 있어 가장 중심의 문제이고, 교회에 나아오는 모든 사람의 삶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건지심의 교리, 다시 말해서 건지심의 신학에 관해서, 참된 그리스도인은 오류에서 진리로 건지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펴고 골로새서 1장을 보십시오. 거기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가능한 한 빠르게 살펴보려고 하기 때문에 몇 가지는 생략할 수밖에 없습니다. 골로새서 1장에서 좋은 출발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건지심이라는 위대한 기적을 잘 보여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구절은 13절입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입니다. “그가 우리를…” 여기에서 ‘그’는 12절에 나오는 아버지를 가리킵니다. “그가,”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2절로 돌아가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성경에 아주 익숙하게 등장하는 어둠과 빛의 대조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셨습니다. 헬라어를 문자 그대로 옮기면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건져내셨습니다. 빛 가운데 있는 성도들로 이루어진 나라이죠. 어둠은 무지, 오류와 같은 의미입니다. 빛은 진리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오류에서, 어둠에서 건짐을 받아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빛의 나라로 들어왔습니다. 건지심의 첫 번째 영역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압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왔습니다. 오류에서 진리로 왔습니다. 시편 119편 130절은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라고 했습니다. 시편 119편 105절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건지심의 첫 번째 영역입니다. 오류의 어둠에서 건짐을 받아 밝은 진리의 빛으로 들어왔습니다.
사도행전 26장 18절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죄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오게 하라는 복음 전파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어둠과 빛은 각각 오류와 진리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13절을 보십시오. 여기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의미가 같습니다. 우리는 사탄의 나라인 흑암의 권세에서 건짐을 받아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셨죠. 빛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빛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건짐을 받은 사람들, 다시 말해서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가장 먼저 나타나는 특징은 더 이상 오류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빛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진리로 왔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6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둠의 영적 세력과 싸우고 있지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었기 때문에 승리합니다. 그리고 그 전신갑주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바로 진리의 허리띠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알고, 사탄의 거짓말에서 하나님의 진리로 건짐을 받았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따르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진리를 알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적어 두세요. 디모데전서 2장 4절입니다.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이 둘은 같은 뜻입니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알 수 없는 신비한 체험을 하거나 뭔지 모를 어떤 느낌이 아닙니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진리를 아는 데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오순절 날 복음이 전해졌을 때 삼천 명이 믿었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계속해서 따랐다고 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통해 믿은 후에도 계속해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무지에서 건짐받아 진리의 영역으로 옮겨진 사람입니다. 진리를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진리 안에 머뭅니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진리를 아는 데 이르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알고, 진리를 믿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복음주의 안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심지어 복음주의 지도자들과 목회자들과 저술가들 중에도 오류에서 진리로 건짐받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입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이나 외딴 곳에 있는 부족들 중에서 성경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도 하나님이 은혜롭고 자비롭게 대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진리를 한 번도 듣지 못했는데도 구원받는답니다. 그러나 거짓말입니다. 로마서 1장이 말하는 대로 자신에게 비춘 빛을 따라 살아갈 수 있고, 창조된 세계를 통해 창조주를 보고 이성을 통해 그분을 깨달을 수 있고, 또 로마서 2장이 말하는 대로 양심을 따라 율법을 주신 분에게까지 이를 수 있다면, 다시 말해 자신에게 비춘 빛을 따라 살아갈 수 있다면, 요한복음 1장 9절이 말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추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더 많은 빛을 나타내셨을 겁니다. 하나님이 더 큰 빛을 주셨기 때문에 더 큰 빛으로 나아왔을 겁니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데 이르지 않고 구원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진리를 알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믿으세요? 그렇다면 모든 선교사를 불러들이십시오. 예수님이 명하신 복음 전파를 멈추세요.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오류에서 진리로 건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새로운 사고의 틀 속으로, 새로운 영역으로, 새로운 권세 아래로, 빛의 나라로 들어왔습니다. 요한복음 6장 45절입니다.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건짐받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고, 다른 모든 가르침과는 확연하게 구별되는 하나님이 주시는 깨달음이 있습니다. 참된 신자는 오류와 진리를 구별하고 진리를 이해합니다. 거듭남을 통해 새로운 본성을 받고,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얻습니다. 신자의 새로운 본성은 진리를 좋아합니다. 신자의 새로운 본성은 진리에 헌신합니다. 진리를 사랑합니다. 요한일서 2장 27절이 말하듯이 우리는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았고, 진리가 우리 안에 거하기 때문에 아무도 우리를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에 대해 설명해 줄 인간 교사가 더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인생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 낸 어떤 철학적 접근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람이나 마귀가 만들어 낸 종교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건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리 안에서 살아갑니다.
잘 들으십시오. 요한복음 14장 17절에 따르면 우리는 “진리의 영”을 받았습니다. 진리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이해합니다. 바로 그 진리가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러므로 디모데전서 2장 4절이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요약해 줍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았다는 것은 진리를 아는 데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진리를 믿고, 참되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하고, 그 진리에 복종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어떻게 한다고 하셨습니까? “자유롭게 하리라.” 이제 진리를 찾아 헤매는 일은 끝났습니다. 여러분은 어둠에서 나왔습니다. 더 이상 눈먼 채 어둠 속을 헤매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해방되었습니다.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했습니다. 잘 들으세요. 죄인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진리뿐입니다. 죄인이 진리에 이르기 전까지는 어둠에 갇혀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8절에서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저는 이 말씀이 정말 좋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이보다 어떻게 더 분명하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간단히 말해서, 구원받으려면 반드시 진리를 온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를 믿지 않는다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건짐을 받으려면 반드시 우리를 건지시는 진리를 믿어야 합니다.
제가 한 여성분에게서 이런 편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기독교도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은 선불교에 심취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희 라디오 방송을 듣는 이유는 찬양을 들으면 카르마가 편안해지기 때문이랍니다. 그런데 제가 다른 어떤 종교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으면 너무 편협하고 좁기 때문에 그 카르마를 깨뜨린답니다. 그래서 좀 더 열린 마음을 가지라고 권면을 하려고 저에게 편지를 썼답니다. 그 여성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그대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무엇을 믿는지에는 관심이 없어요. 믿기만 하면 되죠. 하나님은 무엇을 믿느냐에는 관심이 없어요. 진실하게 믿기만 하면 돼요. 모든 종교는 결국 똑같은 결말에 이르게 하죠. 어느 길로 가든 상관없어요.”
지금 현 시대의 생각을 상당히 잘 보여 주지 않습니까? 무엇을 믿느냐는 중요하지 않고, 무언가를 믿기만 하면 되고, 진실하게 믿기만 하면 된다는 거짓말이 아주 널리 퍼져 있습니다. 어차피 결국에는 모두가 같은 곳에 이르게 된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다고 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걸어가는 종교의 길입니다. 또 잠언 14장 12절은 이렇게 말하죠.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물론 오늘날에는 이렇게 폭넓게 모든 것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일로 여겨진다는 것을 저도 압니다. 우리의 종교만이 옳고, 우리의 신앙만이 옳고, 우리의 믿음만이 옳을 뿐 다른 모든 사람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로 여겨진다는 것도 압니다. 진리에 관심이 없는 포스트모던 세계에서는 그런 말을 받아들이지 않지 않습니까? 포스트모더니즘이 추구하는 중요한 목표는 사람이 무엇을 믿든 모든 신앙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죠. 누구에게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믿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이 무슨 권리로 유일한 진리가 있다고 말합니까? 우리 모두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결국 개인의 취향 문제일 뿐입니다. 무엇이든 당신의 기분을 좋게 해 준다면 그것을 믿으세요. 그러나 그것이 진리이고 그 밖의 모든 것은 오류라고 말하지는 마십시오.”
그런데 진리를 아무렇게나 다루는 관점, 아니 진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관점이 너무나 널리 퍼져서 이제는 말 그대로 복음주의까지 감염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서 말씀드렸듯이, 오늘날 사람들은 세계 곳곳의 외딴 구석에 살면서 진리를 전혀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천국으로 데려가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몇 주 전에 이탈리아에서 가르칠 때 언급했던 책이 하나 있는데, <종교 연합을 위한 투쟁, 에큐메니컬 지하드(Ecumenical Jihad)>라는 책입니다. ‘지하드’는 성전, 그러니까 거룩한 전쟁이라는 뜻입니다. 이 책을 쓴 피터 크리프트(Peter Kreeft)는 가톨릭 변증가인데, 우리가 이 거룩한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다시 말해서 문화를 둘러싼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모두 함께 싸워야 한다고 합니다. 세상을 좀 더 도덕적으로 만들고, 사람들이 좀 더 바르게 행동하게 하고, 전쟁과 범죄와 그 밖의 모든 문제를 끝내고 도덕적인 세상을 만들려면 거룩한 전쟁을 다른 종교와 함께 치러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종교의 장벽을 넘어 연합해야 하고, 혼자서는 할 수 없으니 모두가 하나되어야 한답니다.
그래서 크리프트는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자녀라고 인정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같은 천국으로 가는 같은 길을 따라가고 있답니다. 이 책은 아주 기발하게 시작합니다. 크리프트는 캘리포니아에서 서핑을 하다가 파도에 휩쓸려 뒤집히고 바닥에 부딪힌 뒤에 유체 이탈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천국에 갔답니다. 놀랍게도 천국에서 부처를 보았답니다. 모습이 워낙 특이하니까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었겠죠. 아마 알아차리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을 겁니다. 부처를 만나서 도대체 기독교인이 아닌 불교도가 어떻게 천국에 왔냐고 물었더니 부처가 이렇게 대답을 했답니다. “글쎄요, 아시다시피 저는 명상과 평화와 평안을 추구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예수님에 대해 몰랐던 것들은 제가 이곳에 온 후에 하나님께서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조금 더 걸어가다가 이번에는 무함마드를 만나서 이렇게 물었답니다. “당신은 어떻게 여기에 오셨습니까? 예수님을 여러 선지자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여기지 않으셨나요? 그런데 지금 여기서 뭘 하고 계세요? 여기에 어떻게 오셨어요?” 그러자 무함마드가 “우리는 도덕적인 삶을 추구했습니다”,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실제로 크리프트는 자신의 책에서 무슬림이 그리스도인보다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했습니다. 무슬림은 음행이나 간음이나 동성애 행위를 비롯한 여러 가지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 행위들이 무슬림의 도덕 기준에 어긋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보다 그런 일을 덜 하고, 따라서 실제로는 그리스도인보다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무함마드가 또 이렇게 말했답니다. “제가 예수님에 대해 몰랐던 것은 제가 이곳에 온 후에 하나님께서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크리프트는 조금 더 가다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유대인들을 만났답니다. 유대인들은 참 하나님, 구약의 하나님을 예배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 역시도 예수님에 대해 몰랐던 것은 천국에 도착한 뒤에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무신론자들을 만났답니다. 그 무신론자들은 진리를 찾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진리이시기 때문에 사실 그들은 하나님을 찾고 있었던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천국에 갈 수 있었답니다.
피터 크리프트가 말하려는 요점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어차피 거기서 모두 만나게 될 텐데, 왜 여기서 서로 싸우고 있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모두 하나가 되어 이 전쟁에서 승리하자고 말합니다. 제가 지금 내용을 상당히 빠르게 훑고 있습니다. 그런데 책의 끝부분에 가면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장군이 필요하다. 이 전쟁을 치르려면 우리를 이끌어 줄 위대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모든 무슬림과 모든 불교도와 모든 유대인과 모든 무신론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 물론 그 외에 다른 사람들도 많이 언급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위대한 지도자가 한 분 있다.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위대한 승리자이다.” 크리프트가 위대한 지도자라고 일컫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교황입니다. 교황이 우리의 지도자랍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내적인 능력도 필요하기 때문에 모두가 마리아에게 헌신해야 한답니다. 마리아가 위대한 영적 능력이자 위대한 영적 원천이랍니다. 그러니까 모두 하나가 되어 마리아를 숭배하고, 교황을 우리의 지도자로 삼아서 서로를 받아들이면 이 지하드, 성전, 거룩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답니다.
여러분, 이 말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상당히 기괴하다고 하실 겁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책의 뒷표지에 척 콜슨(Chuck Colson)이 쓴 추천사가 실려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 피터 크리프트는 오늘날 미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변증가이며, 이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용감한 지성의 전사이다.”
피터 크리프트는 사람을 속이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변증가가 아닙니다. 그런데 더욱 충격적인 것은 J. I. 패커(J. I. Packer)의 추천사입니다. 그 책의 내용을 이야기한 다음에, 짧은 추천사의 마지막에 이렇게 묻습니다. “만일 크리프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니, 이 질문을 할 만한 가치가 있나요? 크리프트의 말이 옳습니까? 사람이 무엇을 믿든 상관없이 모두 천국에 간다는 말이 과연 맞습니까? 이렇게 묻는 분이 계실 겁니다. “선불교에 심취한 그 여성이 그렇게 관용적인 생각을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주의 지도자들까지 그렇다는 말입니까?”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협회 후원으로 암스테르담에서 열었던 그 대규모 전도 집회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로마 가톨릭 신자가 개회 기도를 했고,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캔터베리 대주교가 설교자 중 한명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것을 받아들이면서 기독교라고 할 수 있습니까? 도대체 어디까지 허용을 하려는 겁니까?
거짓말을 믿는 것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건짐을 받지 못한 사람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건짐을 받은 사람의 본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거짓에서 건짐을 받아 어디로 왔습니까? 진리로 왔습니다. 우리는 그 거짓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꼭 알려드려야겠습니다. 제가 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는데, 지금 나누는 내용과 직접 관련이 있는 내용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입니다. 좀 서둘러야겠군요. 고린도후서 10장 4절입니다. 바울은, 아니 3절을 먼저 보겠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전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육신으로 싸울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무기, 인간의 기지, 인간의 영리함, 인간의 생각과 이론과 사상과 기법과 마케팅 같은 것으로는 싸울 수 없다. 그것이 무엇이든 인간의 무기로는 이 싸움을 싸울 수 없다고 했습니다. 4절입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다시 말해서 인간의 능력으로 싸워 이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다시 말해서 견고한 진은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우리는 영적인 전쟁을 하고 있다. 우리가 싸우고 있는 이 영적 전쟁은 결코 만만한 싸움이 아니다. 우리는 거대한 요새를 공격하는 것이다. 엄청나게 견고한 성채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거대한 화강암으로 지은 요새 같은 것 말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가서 무너뜨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아주 강력한 무기가 있는데, 인간이 생각해 낸 이런저런 기발한 생각으로는 안 되고, 요새들을 반드시 무너뜨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 요새의 정체가 뭘까요? 4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그 정체가 나옵니다.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NASB 성경은 ‘이론’이라고 번역했고요, 다른 번역본은 ‘생각’이라고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이 거대한 요새, 이 거대한 감옥들은 다름 아닌 사람들의 이론과 생각입니다. 헬라어로는 ‘로기스모스(logismos)’입니다. 사상이나 이념, 이데올로기를 뜻하죠. 어떤 이데올로기입니까? 5절입니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입니다. 성경적이지 않은 모든 생각, 하나님의 진리에 어긋나는 모든 것들입니다. 모두 다 무너뜨려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5절이 말하는 것처럼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은 온갖 사상과 거짓과 오류와 어둠과 눈멂 속에 갇힌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우리의 책임은 가서 그런 사상을 산산이 무너뜨리는 겁니다. 그래야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요새가 그들의 감옥이 되고, 결국에는 무덤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책임입니다. ‘높아진 것’이라는 말은 지적으로 교만하게 높아진 것, 복잡하게 만들어진 사상 체계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철학이든 종교든 신학이든 심리학이든 무엇이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어긋나는 모든 생각을 공격해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 거짓말에 사로잡힌 채 죽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상 체계를 무너뜨리고 모든 사람의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려는 겁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대로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진리를 보고, 진리를 알고, 진리를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이 요새를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을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오류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뭘까요? 진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글쎄요, 목사님의 설교는 너무 단정적이고 너무…” 그러나 저는 그저 진리를 전하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오류를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진리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전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지 못합니다. 오류에서 진리로 나오지 못합니다. 건짐받지 못합니다. 결국 자기 죄 가운데서 죽고 맙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는 특징은 이겁니다. 그리스도인, 참된 그리스도인은 말로만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류에서 진리로 나온 사람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이 무엇을 믿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진실하게 믿는다고 해도, 사람들이 믿는 것이 진리만 아니면 사탄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중요한 부분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이 무엇을 믿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온갖 종류의 종교를 만들어 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종교 중에, 진리가 아닌 모든 종교를 사탄이 배후에서 조종합니다. 그 모든 것의 배후에 사탄이 있습니다. 사탄은 모든 사람의 취향에 맞출 만큼 충분히 다양한 종교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누구도 거부하기 어려울 만큼 온갖 것을 차려 놓은 뷔페 같습니다. 누구든 자신에게 맞는 곳을 찾아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탄은 사람들이 무엇을 믿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사탄은 사람들이 진심을 다해 믿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인도에는 자기 살에 갈고리를 꿰어 매다는 기이하고 괴상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스스로 몸을 희생하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 진지한 나머지 허리띠 안쪽에 바늘을 박아 놓고는 매일 걸어 다닐 때마다 허릿살이 찢어지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든 자기 죄를 속하려고 하죠.
사탄은 이런 행위들을 정말 좋아합니다. 사람들이 진심을 다하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믿든, 또 얼마나 진실하게 믿든 사탄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진리만 믿지 않으면 됩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것을 믿으면 정죄받고, 옳은 것을 믿으면 구원받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어떻게 된다고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다른 이에게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붙들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 정죄받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을 보십시오. 6절입니다. 바울은 소위 ‘다른 복음’에 관해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와서 다른 복음을 전했답니다.
그런데 잘 들으십시오. 사실 다른 복음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복음’은 좋은 소식이라는 뜻인데, 좋은 소식은 오직 하나뿐이죠. 나머지는 모두 나쁜 소식입니다. 사람들이 좋은 소식이라고 말할지는 몰라도 실제로는 나쁜 소식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6절에서 ‘다른 복음’이라고 부른 다음에, 7절에서는 “다른 복음은 없나니”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 외에는 다른 좋은 소식이 없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여기서 바울은 일종의 과장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주를 받을지어다.” 저주를 받으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조금은 포용적이어야 합니다. 조금 더 폭넓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좀 더 친절하게 대해야 합니다. 감히 어떻게 누가 옳고 누가 틀렸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요즘 학계에 새로운 해석학이 등장했습니다. 어두운 마음으로 성경을 공격하는 자유주의자들이 새로운 해석학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상당히 그럴듯한 이름을 붙였습니다. ‘겸손의 해석학’. 이 ‘해석학(hermeneutics)’이라는 영어 단어는 ‘해석하다’ 또는 ‘설명하다’, 이런 뜻인데요, 헬라어 ‘헤르메뉴오(hermeneuō)’에서 나왔습니다. 해석학은 성경을 설명하는 방법을 가리키는 말이죠. 성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정한 해석 원리가 있습니다. 언어를 살피고, 문법을 살피고, 배경 역사를 살피고, 말씀의 문맥을 살피는 것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그런 해석 원리들을 모두 사용해서 성경을 해석합니다. 그런데 ‘겸손의 해석학’이라고 부르는 이 새로운 해석학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 저는 제가 한 성경 해석이 결코 옳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겸손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해석이 틀릴 수도 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을 만큼 겸손합니다.”
정말 너그럽고 도량이 넓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람을 정죄에 이르게 합니다. 올바른 성경 해석이 있고 틀린 해석이 있습니다. 그런데 ‘겸손의 해석학’이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사실 ‘어둠의 해석학’입니다. 기독교가 진리이고, 오직 기독교만이 진리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에 어긋나는 것은 무엇이든 거짓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입니다. 이런 말이 현대 문화의 상대주의적 가치관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저도 압니다. 잘 압니다. 오늘날 다원주의가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지고 다양성이 중요한 화두라는 것도 압니다. 그래서 다원주의와 관용을 진리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려놓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공직을 놓고 경쟁하는 후보들이 거짓말을 해도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이 사회에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이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거짓말하는 지도자들에게 너무나 익숙해져 버려서 이제 진실을 말하면 오히려 불편하게 느낄 뿐이죠. 어차피 그 말을 믿지도 않을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무엇을 믿느냐는 상관하지 않고요, 기독교라는 이름만 갔다 붙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기독교’라는 이름표만 붙이면 됩니다. 이름표 하나면 충분하답니다.
죄인이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로마 가톨릭부터,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왜곡하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왜곡하고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를 왜곡하며 구원을 부와 건강을 얻는 수단으로 만들어 버리는 극단적인 은사주의 말씀-믿음 운동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받아들입니다. 성경에 의문을 제기하고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 자유주의자들까지도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들을 전도 집회에 강사로 세웁니다. 모두 함께하자고 합니다. 자유주의자도, 가톨릭 신자도, 극단적인 변두리 은사주의자들도, 모두 다 데려오랍니다. 왜냐하면 교리를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교회는 오랫동안 순결을 지키기 위해 싸워 왔습니다. 다만 복음주의자들에게서 이런 태도가 나타난 것이 새로울 뿐입니다.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교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게 만들려고 합니다. 교리가 사람들을 갈라놓는다고 말하면서 모든 것을 용납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서로 명백하게 모순되는 신앙 체계까지도 용납하려 한다는 사실이 저는 놀랍습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 동방 정교회, 극단적인 은사주의자, 자유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영적으로 연합합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6장이 너무나 분명하게 말하지 않습니까?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건짐 받은 사람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교리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침례 방식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나 교회의 휴거의 시기에 관해서도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교회와 이스라엘을 어떻게 다루시는지에 대해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구원받는 데 반드시 필요한 믿음을 이루는 교리만큼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습니다. 바로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입니다. 반드시 믿어야 할 신앙의 근본 진리가 존재합니다. 그 진리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관계를 끊어야 합니다. 빛과 어둠은 함께 걸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함께 사역할 수도 없습니다. 성경은 참과 거짓을 구분하지 않는 문제를 그 무엇보다 심각하게 다룹니다. 그리고 사탄은 바로 그 경계를 우리가 알지 못하도록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탄과 그의 모든 귀신들이 무슨 천사로 가장합니까? 빛의 천사로 가장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둠입니다. 모두 어둠입니다. 어둠일 뿐입니다. 그들은 흑암의 권세 아래 있으면서도 빛의 천사처럼 보이려고 합니다. 참과 거짓의 경계를 흐리기 위해서죠. 그 경계가 흐려지면 사탄은 자기 사람들을 교회 안에 심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능력을 잃고, 그 선포되는 말씀도 일관성을 잃어버립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변화시키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교회가 보려고 하지 않는 것조차 세상은 잘 알아봅니다. 그리고 변화되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우리의 증언을 무너뜨립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장 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거짓 선지자들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온 세상에 널려 있습니다. 마치 개미 떼처럼 곳곳에 있습니다. 사탄의 전략입니다. 거짓된 이론과 거짓된 이데올로기와 거짓된 신앙 체계로 견고한 요새를 세우는 것이죠. 그리고 사람들을 그 요새 안에 가두어 포로로 만들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 붙잡아 두어서 결국 지옥으로 가게 해서 사탄의 지옥을 그들로 채우려는 겁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사탄의 전략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분별해야 합니다. 요한이서가 바로 이 점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요한이서 9절부터 11절입니다.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참된 교리, 복음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참된 가르침입니다. 사람이 그 안에 거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모시지 못한” 것입니다. 진리가 없으면 하나님도 거기 계시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그런 사람을 여러분 교회 강단에 세우지 마십시오. 전도 집회나 그 밖의 어떤 모임에도 참여시키지 마십시오. TV 프로그램에도 출연시키지 마십시오. 집에 들이지 마십시오. 인사하지도 마십시오. 여기서 말하는 인사는 그 사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종의 환영을 뜻하는 인사입니다. 이들을 집에 들이는 것은 악한 일에 참여하는 겁니다.
자, 이보다 어떻게 더 분명하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가 없는 자는 여러분의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정하지도 말고, 환영하지도 마십시오. 집에 들이는 것은 그 사람과 공모하는 겁니다. 이 말씀은 복음의 본질적인 진리를 왜곡하는 사람들과 영적으로 분리되어 있으라고 명령합니다. 이 성경 말씀은 매우 엄중합니다. 정말로 엄중합니다. 타락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어둠을 믿으면서 마치 빛인 것처럼 퍼뜨리는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저주가 선언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우리에게도 엄중하고 강력한 경고가 주어졌습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참된 그리스도인이 거짓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가장 악한 일입니다. 신앙 체계와 가르침으로 신약의 복음을 왜곡하는 사람과 영적으로 연합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런 질문으로 이어지죠. 우리를 건지시는 진리의 내용은 뭘까요? 반드시 믿어야 하는 진리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반드시 믿어야 할 구체적인 진리의 내용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크고 분명하고 단호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본질적인 진리들을 왜곡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은 가장 강력한 정죄의 말을 쏟아붓습니다. 성경에는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가는 진리들이 있습니다. 구원의 복음은 반드시 믿고,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그 복음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필요한 진리로 어떤 게 있을까요? 가장 먼저, 가장 근본적인 것부터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진리는 성경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몰몬교는 여기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성경 외에도 <몰몬경(The Book of Mormon)>, <값진 진주(The Pearl of Great Price)>, <교리와 성약(Doctrine and Covenants)>을 통해 자신들에게 말씀하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건짐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시가 오직 성경에 담겨 있다고 믿습니다. 전통도 아니고, 교황의 교령도 아니고, 현대의 환상도 아니고, 예언도 아니고, 직관도 아니고, 그 밖의 어떤 권위의 원천도 아닙니다. 건지심을 받은 사람들은 오직 성경이 능히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고, 오직 성경이 사람을 온전하게 하여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구원의 근본이 되는 모든 것,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이 성경에 담겨 있다고 믿습니다. 바로 여기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성경에 대한 확신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셔서 이런 확신을 갖게 하신다고 믿습니다. 성령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역사 중의 하나입니다.
사실 저는 사람이 성경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인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편 기자처럼 성경을 사모합니까? 성경을 사랑합니까? 성경을 갈망합니까? 자, 보십시오. 거듭나지 않은 사람, 건지심을 받지 못한 사람은 성경에 이렇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바르게 반응할 수 있는 도덕적 능력이 그들에겐 없습니다. 성경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도 없고, 성경에 순종할 수 있는 능력도 없습니다. 사실 성경에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보십시오. 건짐받지 못한 사람들은 성경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정말 흥미로운 말씀 아닙니까? ‘내가 너희에게 거짓말을 했다면 믿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거짓말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지. 너희는 흑암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에 거짓과 속임수는 이해하지만 진리는 이해하지 못해.’ 가끔 사람들이 제게 이런 말을 합니다. “저는 정말 대학에 들어가서 진리를 가르치고 싶어요.” 그런데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어쩌다 한 번씩 진리가 조금씩 스며들게 할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환경에 들어가서 진리를 가르쳐 보십시오.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오히려 불쾌하게 여기고, 거부하고, 미워할 겁니다.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그리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면 어둠 속에 있는 것이고, 오류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반면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보십시오. 거듭나서 삶이 변화되면, 놀랍게도 말씀이 마음을 뚫고 들어옵니다. 그러면 그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하고 순종하기를 갈망하게 됩니다. 요한일서 4장 5절부터 6절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제가 참된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구별하는지 아십니까? 참된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듣고, 말씀을 이해하고, 말씀을 깨닫고,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말씀에 반응합니다.
제가 하는 말을 듣고는 저를 비난하고 헐뜯는 편지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이렇게 생각하죠.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이 빛을 이해하기를 기대할 필요가 없다. 앞에서 말씀드린 그 여성도 제게 편지를 썼죠. 그 여성은 선불교에 심취해 있고 자기 카르마가 편안해지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제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죠.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그 여성은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기독교, 아니 복음주의가 진리에 헌신하지도 않고, 진리를 이해하지도 않고, 진리를 알지도 못하는 이런 사람들을 마치 빨아들이듯이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들 중의 많은 사람이 지도자의 자리에까지 올라가고, 오류를 가르칠 수 있는 자리와 기회를 얻습니다. 그러면서 그 오류에 ‘기독교’라는 이름을 붙여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것은 성경을 믿는 데서 시작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만이 권위가 있고 그 말씀만이 하나님의 진리를 말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오직 성경입니다. 보십시오. 로마 가톨릭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황의 교령이나 교회 공의회의 교리를 의심하는 사람은 영원히 정죄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예를 들어서, 트리엔트 공의회(Council of Trent) 제7회기 제1법규는 그 공의회가 정한 일곱 성사보다 성사의 수가 더 많거나 적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아나데마(anathema), 그러니까 정죄를 선언합니다. 일곱 성사를 부인하면, 다시 말해서 여섯 개라고 하거나 여덟 개라고 하면 지옥에 간답니다.
그 말은 가톨릭 신자가 견진성사나 고해성사나 종부성사를 의심하기만 해도 지옥에 간다는 뜻입니다. 하물며 그 모든 것을 의문시하는 개신교인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그런 내용은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단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견진성사, 고해성사, 종부성사는 성경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런 것들에 의문을 제기하면 파문의 대상이고요, 가톨릭교회의 관점에서는 영원한 정죄를 받아 마땅한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트리엔트 공의회의 법규와 교령에는 이런 아나테마가 수십 개, 아니죠. 수십 개를 넘어서, 거의 백 개에 이를 정도입니다. 한 저술가의 표현을 빌리면, 자기들이 만든 나무와 풀과 지푸라기까지도 근본적인 진리라고 선언할 만큼 뻔뻔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성경이라는 거룩한 기록 외에는 소위 그 어떤 영적 권위도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이 오직 성경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메리 베이커 에디 패터슨 글로버 프라이(Mary Baker Eddy Patterson Glover Frye)의 글도 필요하지 않고, 엘렌 G. 화이트(Ellen G. White)도 필요하지 않고, 마담 블라바츠키(Madame Blavatsky)도 필요하지 않고, 러더퍼드 판사(Judge Rutherford)도 필요하지 않고, 조셉 스미스(Joseph Smith)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 누구의 글도 필요하지 않고, 교황이며, 공의회도, 구전 전통도, 이 시대에 새롭게 주어졌다고 주장하는 그 어떤 예언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둘째, 우리는 오직 성경이 진리의 근원이라고 믿을 뿐 아니라, 구원에 근본적으로 필요한 진리들이 성경에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은밀하게 감추어진 것, 어떤 신비, 글자를 거꾸로 쓰거나 뒤집어 놓거나 비스듬히 가로질러 써 놓아서 풀어내야 하는 암호 같은 메시지가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런 것들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나타내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가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수수께끼가 아닙니다. 암호도 아닙니다. 비밀 코드도 아닙니다. 거꾸로 써 놓은 글도 아닙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진리가 아주 분명하게 계시되어 있습니다. 어떤 진리는 특정한 성경 구절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고, 어떤 진리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종합해서 알 수 있지만, 모두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구원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지 성경에 너무나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것’의 의미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아주 내용이 난해합니다. 또 구약의 어떤 본문들은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완전히 재구성할 수 없기 때문에 세세한 의미를 모두 다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 성경에 너무나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첫째, 우리는 오직 성경이 구원의 진리의 근원이라고 믿습니다. 둘째, 우리는 그 진리가 분명하게 계시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셋째, 영생의 교리를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으로 갑니다. 성경에서 분명하게 계시된 영생과 관련된 것을 찾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영생과 관련되어 있을까요? 히브리서 11장에 따르면 반드시 믿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아무 신이나 믿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새롭게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며칠 전에 어떤 사람이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있잖아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몰몬교도들이 천국에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대답했죠. “어떻게 몰몬교도들이 천국에 있을 수 있습니까? 그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이라고 믿지 않고,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도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천국에 간다는 말이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하나님을 믿으려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러이러했으면 좋겠다고 자기가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어 낸 신을 믿으면 안 됩니다. 알라를 믿으면 안 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신을 믿으면 안 됩니다. 유대인들처럼 구약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거기에서 멈춰서도 안 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어떤 신학자가 표현한 것처럼 단지 ‘거룩한 타자’로서의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계시하는 바로 그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삼위일체를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이 되신 하나님,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시고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죄 없는 삶을 사셨고,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셨고, 사흘 만에 실제로 육체로 부활하셨고, 하늘로 올라가셨으며, 성령을 보내셨고,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고,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구원 진리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육신을 입으시고 성육신하셔서 자신을 나타내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과 똑같이 예배와 존귀와 사랑과 경배를 받으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삶에는 아무 죄도 없으신 완전한 제물로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셨고, 말씀-믿음 운동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신의 죄 때문에 고통받으려고 지옥에 가신 것도 아닙니다. 흠도 점도 없는 완전한 어린양이셨습니다. 죽으실 이유가 전혀 없으셨지만 완전한 대속물로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었고, 그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의로운 삶이 우리에게 전가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죽음을 이기시려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로마서 10장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어떻게 된다고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여러분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시고, 성육신하셨고, 동정녀에게서 나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수 있는 길은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완전한 삶을 사셨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단순히 사실이라고 머리로 믿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참되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기까지 믿는다면 구원받은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은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합니다. 아나데마(anathema), 저주를 받을 겁니다.
또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을 뿐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로마서 4장 4절부터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행위로 구원받지 않습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이 놀라운 표현을 보십시오. 여러분은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한 사람, 선한 행위를 많이 해서 경건해진 사람을 의롭다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경건하지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십니다. 악한 자를, 사악한 자를, 죄인을 의롭다 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저에게는 선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저는 경건하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하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죄인을 의롭다 하십니다. 신약성경 전체에서 가장 놀라운 표현입니다. 로마서 4장 5절입니다.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 이 말씀은 행위가 들어설 자리를 완전히 없애 버립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기 위해 먼저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악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부르짖기만 하면 됩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것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한 사람을 의롭다 하신다고 믿습니다. 세례와 미사와 다른 성사들을 통해 주입된 그 사람 안에 스며든 은혜를 받고, 거기에 선한 행위를 더하고 또 선한 행위를 더하고 계속해서 선행을 충분히 쌓으면, 하나님께서 그 선한 사람을 의롭다 하신다고 믿습니다. 자유주의 신학도 그렇게 믿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버림받은 이유도, 이스라엘이 배교하게 된 이유도, 이 의롭다 하심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몰랐습니다. 로마서 10장 3절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정확히 로마 가톨릭주의가 범하는 오류입니다. 행위를 통해 구원받으려는 모든 체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종교 체계와 모든 이단 종파, 그리고 기독교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으면서 진리에서 벗어난 모든 것이 똑같은 오류를 범합니다.
죄에 관한 교리를 믿어야 합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하나님을 무엇으로 만드는 겁니까? 거짓쟁이로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1장 8절과 10절도 그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지 아니하니라.”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자신이 경건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는 구원받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대가를 지불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경건하지 않은 자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습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반드시 믿어야 하는 진리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무슬림은 이것을 믿지 않습니다. 불교도도 믿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도 이것을 믿지 않습니다. 무신론자도 믿지 않습니다. 몰몬교도도 이것을 믿지 않습니다. 다른 종교나 집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저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말하기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자신이 고백하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무엇을 하셨는지, 십자가에서 무엇을 이루셔서 구원을 값 주고 사셨는지를 모른 채, 성경에 계시된 그대로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 모든 내용을 완전하게 이해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계시된 핵심은 이해해야 합니다. 칭의 교리가 함축하는 모든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반드시 이해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죄인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아무런 자격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예수님이 누구신지, 왜 오셨는지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면 적그리스도의 영입니다.
보십시오. 사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믿어야 할 모든 진리는 그리스도 안에 다 담겨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삼위일체를 봅니다. 삼위일체의 한 위격으로서 사람의 육신을 입고 성육신하셨죠.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하고 의로운 기준이 실제 삶으로 나타난 것을 봅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대신하신 십자가의 죽음을 보고,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능력도 봅니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다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믿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여러분이 건짐받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 주십니다. 우리는 또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위대한 교리를 믿습니다. 우리는 히브리어로 ‘여호와 치드케누(Jehovah-Tsidkenu)’, ‘여호와는 우리의 의’이심을 믿습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의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정녀에게서 나셨음을 믿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죄 없으신 완전한 인간이심을 믿습니다.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해 죽으셨음을 믿습니다. 부활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믿고, 행하신 모든 기적이 실제 사건이라고 믿습니다. 요한이서 9절을 다시 보십시오.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자, 정리해 보겠습니다.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진리가 있습니다.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오직 성경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진리, 솔라 피데(Sola Fide), 오직 믿음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받는다는 진리, 솔루스 크리스투스(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모든 것을 정확하게 이해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핵심적인 문제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된 그리스도인은 오류에서 이 진리로 건지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거짓을 믿는 사람은 누구라도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처음에 말씀드렸던 문제로 다시 돌아가 보면, 오늘날 교회는 참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사이의 경계를 흐리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 있으면서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교회의 교제 안으로 받아들여서 영적인 유대를 맺을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 자신도 끔찍한 죄를 범하는 겁니다. 악한 일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마치 교만했던 고린도 교인들과 같습니다. 기억하시지요? 극도로 심각한 죄를 짓고 있던 사람, 자기 아버지의 아내와 성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사람을 교회 안으로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라고 했죠.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이 부도덕한 성적 관계를 맺는 것이 교회를 더럽힌다면, 거짓을 가지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교회를 어떻게 만들겠습니까? 거짓 교사들은 절대로 자신이 거짓 교사라고 써 붙이고 다니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3절이 말하는 것처럼 언제나 무엇으로 가장해서 옵니까? 빛의 천사로 가장해서 옵니다. 정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언제나 자신들이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순결하게 지켜야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이 분명히 알도록 계속 일깨워 주어야 합니다. 지금 교회에 성경적인 분별력을 회복하는 것보다 더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분별력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서부터 회복되어야 합니다. 바로 누가 그리스도인이고 누가 그리스도인이 아닌지를 분별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건지심의 첫 번째 영역은 오류에서 진리로 건지심을 받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주님의 말씀은 빛입니다. 오늘 아침 그 빛이 우리에게 밝게 비추었습니다. 우리는 예레미야를 통해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이 세상에는 주님께서 보내지 않으신 사람들과 주님께서 아무런 말씀도 주지 않으신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빛의 천사로 가장했는데, 교회가 너무나 쉽게 속아 넘어갑니다. 주님의 백성을 보호해 주십시오. 빛과 진리를 향한 뜨거운 열망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누가 참된 그리스도인인지 알게 해 주십시오. 참된 그리스도인은 거짓에서, 속임수에서, 어둠에서 나와 선명하고 찬란하게 빛나는 진리의 밝은 빛으로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빛으로 건져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이 건져내셨습니다. 우리는 결코 스스로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둠 속에 있었고 죽었기 때문에 빛을 볼 수도 없었고, 빛을 깨달을 수도 없었습니다. 빛에 대해 눈멀어 있었고, 귀먹었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명과 빛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건져내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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