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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는 누가복음을 계속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를 사로잡는 아주 흥미진진한 말씀입니다. 누가복음을 살펴보는 모든 순간이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휴가를 보내고, 이탈리아 출장을 다녀오는 동안 정말 아쉽게도 누가복음 강해를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순리대로라면 오늘 아침에는 당연히 누가복음으로 돌아가야 하겠지만 제 마음이 끌리는 다른 주제가 있습니다. 지난 몇 달 동안 누가복음을 살펴보면서 ‘건지심(deliverance)’에 관한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몇 번 말씀드렸죠. 제가 그런 말을 두어 번 정도 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 자리를 비운 동안에 여러 책을 읽으면서 생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제가 이곳을 떠나 있는 동안에 여기 있을 때처럼 사방에서 밀려드는 온갖 일에 짓눌리지 않는 유익을 누렸습니다. 평소에는 시간을 내기 어려워서 읽지 못했던 것들을 읽을 수 있었고, 제가 생각하고 싶었던 것들을 생각할 시간도 생겼습니다. 그런데 ‘건지심’이라는 주제가 계속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래서 떠나 있는 동안에 이 주제에 관해 아주 많이 생각했습니다. 많이 묵상하고, 책도 많이 읽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늘 아침 이 주제를 꼭 다루어야겠다는 마음이 굳게 들었습니다. 오늘 아침뿐 아니라 누가복음 공부를 잠시 멈추고 몇 차례 더 이 주제를 다루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제가 ‘건지심’이라는 주제를 생각하기 시작한 것도 누가복음과 예수님의 사역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누가복음 4장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사람들을 건져내시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짧은 연구에 <건지심: 방치된 교리(Deliverance: The Neglected Doctrine)>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건지심: 방치된 교리>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이 주제를 여러분에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물론 제가 이 주제에 관해 말씀드리고 싶은 모든 내용을 오늘 다 다루지는 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은 서론에 가깝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단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건지심’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사용하는 말은 아닙니다. 제 평생 ‘건지심’에 관한 설교를 들어 본 기억이 없습니다. 제가 세계 여러 곳에서 저와 소통이 가능한 언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과 대화를 나누어 보았지만, 귀신이나 축사에 관련된 문맥을 제외하고는 ‘건지심’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본 적도 없습니다. ‘건지심’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사용하는 어휘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실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건지심’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구속 목적을 아주 분명하게 밝혀 주는 진리의 중요한 영역을 열어 주기 때문입니다.

제가 예배 초반에 시편 91편을 읽어 드렸는데, 기억하시죠? 거기에서 하나님은 세 번이나 자기 백성을 건져내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사실 이 ‘건지심’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은혜와 능력으로 우리 삶에 행하시는 일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말일 수도 있고, 가장 포괄적인 말일 수도 있고, 그 의미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거의 사용되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 신학 서적을 찾아보면서 책 뒤에 있는 주제 색인까지 살펴보면서 ‘건지심’을 다룬 내용이 있는지 세밀하게 살펴봤습니다. 거의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건지심’은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영어로도 아주 좋은 말이죠. 영어로 ‘deliverance’인데요, 모험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극적인 느낌이 듭니다. 영어로 ‘deliverance’와 비슷한 말을 하나 대보라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rescue’입니다. ‘구출’입니다. ‘건져낸다’라고 하면 매우 위험한 상황에서 구출하는 것을 생각하죠. 실제 이 단어의 뜻이 그렇습니다. 이 말에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사람이 자신보다 더 큰 힘에 의해 어떻게든 구출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살펴보면 ‘건지심’이라는 말이 바로 그런 뜻으로 사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풍성한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극적인 긴장감과 모험으로 가득 찬 단어입니다.

구약에는 ‘건져내다’로 번역되는 히브리어가 세 개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나찰(natsal)’인데요, ‘구출하다’, ‘건져내다’, 이런 뜻입니다. 이 단어는 실제로 육체적인 위험에서 구출하거나 건져내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3장 8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을 구출하여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고, 아름답고 광대한 땅인 가나안 땅으로 데려가시겠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하나님은 극적이고 놀라운 방법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출하여 건져내시고 약속의 땅으로 데려가셨습니다. 이처럼 히브리어 ‘나찰(natsal)’은 실제로 육체적인 위험에서 건져내고 구출하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이 ‘나찰(natsal)’은 영적으로 건져내는 것을 말할 때도 여러 차례 사용되었습니다. 시편에서 그런 용례를 여러 번 찾아볼 수 있는데, 시편 39편 8절, 51편 14절, 69편 14절, 79편 9절을 비롯한 여러 구절에서 ‘나찰(natsal)’은 영적인 구출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죄인을 심판과 죄 등에서 건져내는 것을 가리킵니다.

두 번째는 팔라트(palat)입니다. 이 단어 역시 히브리어로, 나찰(natsal)과 뜻이 같습니다. ‘구원하다’, ‘건져내다’, 이런 뜻입니다. 구약에서는 시적인 본문에서 사용됩니다. 사실 구약의 시가서에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아주 자주 찾아볼 수 있고, 그 밖에도 구약에서 시적인 내용이 나오는 여러 곳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 역시 ‘건져내다’, ‘건지심’이라는 뜻이고, ‘피하게 하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세 번째 단어는 ‘야샤(yasha)’인데요, 세 단어 가운데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건져내다’, ‘구원하다’, ‘구출하다’, 이런 뜻입니다. 결국 모두 뜻이 같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건져내다’ 또는 ‘구원하다’, 이렇게 번역됩니다.

이 단어들은 모두 개념이 같죠. 누군가를 구출하는 것, 스스로의 힘으로는 충분히 벗어날 수 없는 위험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극적으로 건져내는 뜻입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이 세 단어가 사용될 때는 대개 하나님이 행위의 주체이시고 인간은 그 행위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이 구출하시고 인간은 구출받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건지심’입니다. 하나님은 건져내시고 인간은 건짐을 받는데, 그 방편을 마련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신약으로 와도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구약의 히브리어에서 신약이 기록된 헬라어로 넘어가면, 신약에서 아주 익숙한 단어인 ‘소조(sōzō)’를 만납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이나 신약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단어이죠. 대부분 ‘구원하다’, ‘구원받다’, 또는 ‘구원’으로 번역됩니다. 이 단어의 뜻은 ‘구출받다’, ‘건짐을 받다’, 이런 뜻입니다. 실제로 신약성경이 구원이나 구원받는 것에 대해서 말할 때 가장 흔히 사용하는 단어가 ‘소조(sōzō)’입니다. 이 단어는 육체적인 위험에서 구출되는 것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위험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실제로 구출하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영적인 위험에서 건짐받는 것을 가리키는데, 흔히 ‘구원하다’ 또는 ‘구원’으로 번역됩니다. 신약에는’ 뤼오마이(rhuomai)’라는 단어도 있습니다. 신약에서 약 18번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도 같은 뜻입니다. ‘건져내다’, ‘구출하다’, 이런 뜻입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1장 13절에서 이 단어를 사용해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에는 이 두 단어가 사용되고, 구약에는 여러 단어가 있는데, 이 모든 단어가 한 가지 개념을 말합니다. 건짐받고, 구출되고, 위험한 처지에서 빠져나와 더 나은 상태로 옮겨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느 모로 보나 ‘건지심’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개념은 ‘구원받다’, 혹은 ‘구원’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에 가려져 버렸습니다. 물론 구원, 그러니까 ‘salvation’이라는 단어도 아주 훌륭하고 분명히 의미가 있지만, 일상에서는 흔히 사용하지 않습니다. 영어권에서는 ‘deliver‘, ‘deliverance’가 ‘salvation’보다 훨씬 흔하고 훨씬 쉽게 이해됩니다. 사실 ‘saved’라는 말은 무언가를 안전하게 보관해 둔다거나, 어딘가에 어떤 것을 저장해 둔다거나, 나중에 사용하려고 남겨 두는 경우가 아니면 일상생활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죠. 위험에서 구출된다는 뜻으로는 대개 ‘saved’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흔히 ‘rescue’나 ‘deliverance’를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구출하시는 하나님, 건져내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건져내실 계획도 하나님께서 마련하셨다고 했죠. 그래서 시편 68편 20절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원문에는 ‘건지심들(deliverances)’ 이렇게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내시는 분이라는 사실에는 여러 측면이 있습니다. 시편 40편 17절은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말합니다. 같은 말씀이 시편 70편 5절에도 나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시편 144편 1절과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반석이신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성경을 읽다가 “구원하다(save)”, 이런 단어가 나오면, 그 자리에 “건져내다(deliver)”라는 말을 넣어도 됩니다. 구원이라는 뜻으로 의미가 같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구원의 실체를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은 건져내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치명적인 것들, 영혼을 영원히 멸망에 빠뜨릴 수 있는 것들로부터 건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구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은 건져내시는 일입니다. 죄인을 멸망시키고 정죄에 빠뜨리는 삶의 여러 요소로부터 극적으로 구출해 내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전도도 사람을 구출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죄인들에게 하나님께 구원의 계획이 있다고 전하라고 보냄을 받았습니다. 본질상 구원하시는 분이시며 유일한 구원자이신 하나님께서 죄인을 정죄에 빠뜨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건져내시는 구원을 계획하셨습니다.

믿는 죄인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이해하려면, 성령님이 우리를 건져내는 일을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회심, 중생, 새로 태어나는 것, 거듭나는 것, 새 생명과 변화, 다시 말해서 은혜의 역사는 성령님이 우리를 건져내시는 사역입니다.

사실 앞으로 이 시리즈에서 살펴보겠지만, 이 ‘건지심’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규정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치명적이고 정죄에 이르게 하는 것들로부터, 잘 들으십시오, 영원히 건짐받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단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만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어떤 정해진 형식의 기도를 드린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인 것도 아닙니다.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서, 소위 “기독교” 기관에 속해 있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인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건짐받은 사람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두고 혼란이 너무나 많습니다. 답은 이겁니다. 그리스도인은 건짐받은 사람이다.

칭의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법률적 선언입니다. 물론 구원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의를 우리의 것으로 여겨 주시고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께 담당시키셔서 그리스도께서 그 형벌을 치르게 하시는 것이 바로 칭의죠. 하나님의 법적 행위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말하는 것은 칭의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칭의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리신 법적 선언으로는 그리스도인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유일한 그리스도인 판별법은 변화된 삶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인지 판단하려면 그 사람이 실제로 건짐을 받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7장에서 말씀하셨듯이, 심판 날에 많은 사람이 주님께 이렇게 말할 겁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그러니까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 크게 속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은 주님께 속해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수도 있고, 예수님에 관한 어떤 사실을 믿을 수도 있고, 어떤 방식으로든 예수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한 번도 건짐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3장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자신이 참된 그리스도인인지 확인하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살펴보아야 할까요? 하나님이 내리신 법적 선언을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 가운데 행하시는 일을 들여다볼 수도 없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인지 판단하려면 자신의 삶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과거 어느 시점에 기도했다는 사실이라거나, 결신하려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거나, 손을 들었다는 사실이나, 초청에 응했다거나, 어떤 충동이나 감정을 느꼈다는 사실을 돌아보는 것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의 삶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나를 건지셨는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죄인을 멸망에 이르게 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건져내시는 구원 계획을 하나님이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1장 26절은 이렇게 위대하게 선언합니다.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건져내시는 겁니다.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셔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십니다. 없애십니다. 27절입니다.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건져내십니다. 경건하지 않은 삶에서 경건한 삶으로 돌이키고, 죄에서 의로 돌이키는 건짐입니다. 실제로 일어나는 참된 건짐입니다.

이제 이것을 오늘날의 상황에 적용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저를 충분히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제가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열정적이라는 것을 아실 겁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을 가르치는 일뿐 아니라 교회에 대해서도 열정이 있습니다. 교회 전체를 바라보면, 지금 교회는 심각한 어려움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 지역 교회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소위 “복음주의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덮치고 있는 심각한 병폐가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바라보면서 저는 매우 슬픕니다. 제 마음이 이렇게 슬픈 것은, 성경이 밝히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참 모습을 제가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의 모습은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저는 늘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이 이야기가 지금 말씀드리는 내용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해드리죠. 제가 여러 곳을 다니다 보면 늘 질문을 이런 받습니다. 여러분도 저에게 질문을 많이 하시고, 다른 곳에 가도 사람들이 끊임없이 저에게 질문합니다. 성경에 관한 질문도 하시고요, 성경과 관련된 여러 문제에 대해서도 질문하십니다. 그런데 항상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목사님이 보시기에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요?” 제가 이탈리아에 있을 때도 여러 차례 이 질문을 받았습니다. 우리 일행 가운데서도 사람들이 저에게 “목사님, 목사님이 보시기에 교회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인가요?”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거의 똑같이 대답합니다. 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분별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입니다. 교회가 진리와 거짓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교회의 면역 체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말하자면 교회가 영적인 에이즈에 걸린 것입니다. 교회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류와 싸울 능력이 없습니다. 오류를 물리칠 만큼 충분한 진리 항체가 없습니다. 무지합니다. 그런데도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이 그저 무지 속에 안주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너무나 쉽게 오류의 희생물이 됩니다.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빈약한 신학, 얕고 피상적인 성경 지식, 그리고 예레미야가 말한 거짓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부르심도 받지 않았고 자격도 갖추지 못했고 하나님께서 보내시지도 않은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강단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으로 말씀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온갖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고 있고, 교회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피상적인 성경 지식과 빈약한 신학, 교회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온갖 오류가 교회의 분별력을 마비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용납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기독교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문제를 제기하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진리가 아니다. 오류다”라고 말하면, 사랑이 없다느니, 분열을 일으킨다느니, 연합을 깨뜨린다느니 하는 비난을 받습니다. 결과적으로 오류가 교회 안으로 밀려 들어오고 있습니다. 교회는 신학과 성경에 대한 무지 때문에 오류와 싸울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서 관용을 마치 최고의 덕목인 것처럼 여기는 문화가 이 문제를 더욱 부추기며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1절의 명령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교회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과 사탄의 거짓말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이제 이 문제를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분별해야 할 문제가 아주 많습니다. 교회 안에 혼란이 많고, 수많은 문제에 관해 오류가 많습니다.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성령의 인격에 대해서 온갖 견해가 다양합니다. 성경의 여러 본문에 대해서, 성화 과정에 대해서, 세례 방식과 영적 은사에 대해서도 견해가 정말로 다양합니다. 구원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목적과 사역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의지에 대해서도 견해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야말로 만가지 문제에 대해 만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분별력이 부족한 것도 모자라 분별하려는 의지마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중요한 문제 가운데 가장 우선되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반드시 분별해야 할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게 뭡니까? 누가 그리스도인인가? 모든 문제 가운데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가장 결정적인 문제입니다. 제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을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별하지 못하면 원수를 우리 진영 안으로 불러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과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교회에 관한 글도 많이 읽었고요, 교회의 역사와 교회의 신학에 관한 글도 많이 읽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살펴본 결과 제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지금 이 시대에, 그리고 사실 20세기 내내 오랫동안 그래 왔지만,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참된 그리스도인과 거짓 그리스도인을 구별하지 못하고 또 구별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 그대로 교회를 죽이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을 다니다 보면 자칭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기독교 교회라고 자칭하는 동유럽 정교회를 보았습니다. 자신들이 동유럽에서 유일하게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믿습니다. 서유럽은 또 어떤가요. 올해 초에 프랑스에 갔고 최근 몇 주 동안은 이탈리아에 갔었죠. 그곳에는 로마 가톨릭이라는 거대한 체계가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도 스스로 이 세상에서 유일한 참된 기독교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믿는 것과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이 교황을 훌륭하고 탁월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전도 집회를 열면서 모든 가톨릭 신자들에게 협력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도 마찬가지 문제입니다. 빌 브라이트(Bill Bright)가 교황을 훌륭하고 탁월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미국의 기독교 지도자들 가운데 ECT에 참여한 사람들이 로마 가톨릭 신자들을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모두 같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모두 같은 하나님을 같은 방식으로 섬깁니다. 이들은 모두 우리의 그리스도인 형제자매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 역시 문제입니다. 이런 종교 기관들이 있다는 것 자체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을 모두 참된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정교회와 로마 카톨릭을 모두 받아들이면 분명하게 그어야 할 경계선이 완전히 사라져 버립니다. 원수를 우리 진영 안으로 불러들이게 됩니다. 결국 교회는 처참하게 무너지고 맙니다.

텔레비전을 켜서 TBN을 보십시오. 그곳에 나오는 사람은 누구든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거짓 교사들로 가득합니다. 분명히 건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인데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기만 하면 누구든 그리스도인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더 나아가 이 문제를 분명히 하려고 하면, 오히려 문제를 일으키고 분열을 조장하고 교회를 갈라놓는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1960년대 영국에서는 자유주의 성공회가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성공회 안에는 복음주의자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성공회 안으로 들어가서 이 교회를 바로잡아야 한다. 그리고 이 형제들과 함께해야 한다. 이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다. 이런 문제들이 우리를 갈라놓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교회다.” 그때 데이비드 마틴 로이드 존스(David Martyn Lloyd-Jones)가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우리는 분리되어야 한다.” 그 결과 아주 심한 비난을 받으며 주변으로 밀려났습니다. 결국 배척당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남아 있던 복음주의 세력마저 자유주의 힘에 굴복했고, 교회는 오염되었습니다. 시간이 증명했듯이 마틴 로이드 존스의 말이 옳았습니다. 미국의 교단들을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랜 역사의 장로교 교단들과 감리교, 성공회, 상당수의 루터교를 비롯한 여러 교단을 보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이 문제의 뿌리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기독교 학교와 신학교에 이 자칭 그리스도인을 불러들여서 가르치게 했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주장은 했지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들어와서 기관을 장악하고 마침내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심지어 복음주의 교회들까지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를 편안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제 생각에 저는 잃을 것이 별로 없습니다. 저는 주님 앞에서 저에게 맡겨진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제는 일어나서 “모든 것을 성경으로 검증해야 한다”, 이러헥 외쳐야 할 때입니다. ‘암스테르담 2000(Amsterdam 2000)’ 같은 행사를 열 수도 있고, 소위 전도자라고 하는 5천 명을 모아 연합을 축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정말 그리스도인인지 확인하고 있습니까? 가톨릭에서도 오고, 정교회에서도 오고, 주변부의 여러 단체에서도 오고, 온갖 이상한 단체에서도 오고, 심지어 일부 이단에서도 옵니다. 바로 이번 주에도 어떤 사람과 제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사람이 몰몬교도 가운데도 천국에 갈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답니다. 이런 현상이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일어나서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한다고 말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누가 참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문제는 교회와 사역의 중심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반드시 수호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6장이 말하듯이, 빛과 어둠이 서로 사귈 수 없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와 사탄이 서로 조화를 이룰 수도 없습니다.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떻게 함께 걸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들 가운데서 나와 구별되어야 하고요,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는 이 모든 것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제는 상황이 너무나 혼란스러워져서 교회 자체가 누가 그리스도인인지조차 모릅니다. 솔직히 말하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기만 하면 실제로 그리스도인인지는 관심조차 없는 것 같습니다.

제 친구 이언 머레이(Iain Murray)는 뛰어난 신학자이자 훌륭한 전기 작가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에 대한 방대한 전기를 썼고,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를 비롯한 많은 인물에 관한 책도 썼습니다. 영국에서 매우 존경받는 인물이고 우리 교회에도 여러 차례 방문했습니다. 저는 머레이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머레이가 최근 <분열된 복음주의(Evangelicalism Divided)>라는 책을 썼습니다. 저도 지난 몇 주 동안 이탈리아에 있으면서 그야말로 빠져들어서 읽었습니다. 비행기에서도 읽고, 버스 뒷자리에서도 읽고, 방에서도 읽고, 가는 곳마다 읽었습니다. 그 책에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 머레이는 이 책에서 20세기 복음주의 쇠퇴의 원인을 추적했습니다. 역사서이지만 많은 것을 아주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복음주의 교회가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을 구별하지 못한 것이 “20세기 영어권에서 교회가 저지른 가장 큰 실패이다”라는 머레이의 말이 저도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합니다.

머레이는 이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규정해 버리면 교회만의 뚜렷한 정체성이 사라집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오류를 대표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오류를 용납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만들어지죠. 머레이는 이어서 아주 중요하고 통찰력 있는 말을 합니다. 역사가로서 이 문제를 매우 면밀하게 추적해 온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의 건강은 언제나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의 차이를 얼마나 분명하고 뚜렷하게 지켜 왔는가에 비례해 왔다.” 전적으로 옳은 말입니다. 교회는 누가 구원받았고 누가 구원받지 않았는지를 분명하게 하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것이 분명하지 않으면 누가 우리 편인지 알 수도 없고, 우리가 실제로 누구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한 백성을 세우기 시작하신 때부터 사탄은 그 안으로 침투하려고 애써 왔습니다. 창세기 6장에서 귀신들이 사람의 딸들과 동거한 때부터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을 오염시키고 뒤섞으려고 해 왔고요, 결국 밀 가운데 가라지를 뿌리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머레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을 가장 교묘하게 대적해 온 세력은 세속화된 교회 안에서 나왔다.” 제가 최대한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복음은 NBC에서보다 TBN에서 더 자주 공격받습니다. 소위 “복음주의자들”이 받아들인 자유주의가 남긴 유산입니다. 은사주의 운동이 남긴 유산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 운동에 속한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체로 은사주의 운동은 신학적인 면에서 누구의 견해든 그저 용납합니다. 구도자 중심의 실용주의 운동이 남긴 유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정교회와 가톨릭을 비롯한 모든 사람을 다시 끌어안으려는 복음주의 에큐메니즘, 세계교회주의가 남긴 유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은 교회의 가장 밑에서부터 최고 지도층에 이르기까지 넓게 퍼져 있습니다. 저는 복음주의의 최고 지성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지만, 그들 역시 누가 그리스도인인지 분명하게 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매우 유능하고 뛰어난 신학자이자 저술가인 J. I. 패커(J. I. Packer)와 대화를 나누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참된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구분하십니까?”라고 물었죠. 그는 이렇게 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좋은 질문이군요” 이 말뿐이었습니다. 20세기 후반의 대부분, 다시 말해서 지난 50년 동안 성경적이지도 않고 정당하지도 않은 대중적인 기독교의 정의를 만들어 내고 퍼뜨리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다시 분명하게 규정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다시 이 건지심 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문제와 건지심 교리가 이렇게 연결됩니다. 건지심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참된 그리스도인을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사람의 마음 자체를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능력 밖의 일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밀과 가라지를 구별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의 열매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들을 알리라.” 그러므로 누군가가 실제로 건지심을 받았는지는 삶에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잘 들으십시오. 건지심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경험합니다. 삶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지금 우리는 법적인 일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실제로 일어나는 변화를 말하는 겁니다. 삶이 극적으로 변하고 본성이 변합니다. 성령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위험으로부터 구출되어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것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200년 전인 1820년대에 토머스 스콧(Thomas Scott)이 쓴 글을 보십시오. “아무리 사람의 지각이 어둠에 가려져 있다 해도, 자신이 의로운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정당하게 정죄받은 죄인임을 느끼고 그에 합당하게 살아가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그에게서 회개와 상한 마음이 나타나지 않고,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고 은혜만이 자신의 유일한 소망임을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기뻐하고, 거룩함을 갈망하며, 율법이 요구하는 바로 그 거룩함을 추구하고, 그리하여 진실하고 참되게 거룩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성경에 따르면 그는 구원받을 수 없다.” 토머스 스콧이 뭐라고 합니까? 삶이 변하지 않았다면 구원받은 것이 아니랍니다. 구원받았다면 건져진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기뻐하고, 거룩함을 갈망하고, 진실하고 참되게 거룩한 삶을 살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구원받지 않은 겁니다. 스콧도 200년 전에 똑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왜입니까? 사탄은 언제나 누가 구원을 받았는지, 누가 참된 그리스도인인지를 두고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야 교회 안으로 침투해서 장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탄은 수많은 기관과 교단에서 그렇게 해 왔습니다. 다시 이안 머레이(Iain Murray)의 글을 봅시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배교에서 회복되었을 때, 예를 들어 종교개혁 시대나 18세기 복음주의 부흥 시대에,” 다시 말해서 웨슬리(Wesley)에서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에 이르는 시대를 말합니다. “교회가 회복된 것은 언제나,” 저는 이 표현이 정말 좋습니다. “그처럼 분별력 있는 설교와 실천으로 돌아갔을 때였다.”

그러니까 이런 말입니다. 교회가 배교의 시대에서 회복된 때는, 언제나 설교가 분별력 있게 바뀌었을 때였다는 겁니다. ‘분별하다(discriminate)’가 무슨 뜻입니까? “분별력 있게 선택하라”,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여러 가지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골라낼 줄 안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다른 점을 구별할 줄 안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유일한 소망은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분명하게 가려내는 분별력 있는 설교입니다. 저는 어떤 조직적인 해결책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임이나 세미나가 더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강단에 서서 참과 거짓을 분명하게 가려 주는 설교를 전할 설교자입니다. 머레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20세기 영어권 교회가 크게 쇠퇴한 것을 생각할 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를 다시 분명하게 선언하는 일이다.” 교회의 가장 큰 소망은 무엇보다도 누가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문제를 분명하게 가려 주는 설교에 있습니다.

복음주의 지도자로 아무리 널리 알려진 사람이라고 해도 저는 개의치 않습니다. 로마 가톨릭 신자들과 교황을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분별력 있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과연 분별력이 있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참된 교회를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혹시 자신이 그 교회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 분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를 분별할 수 없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이 교회를 제대로 분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교회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복음주의 안에서 영향력 있는 위치에 올라가 복음주의를 광범위하게 규정해 온 사람들 가운데 이런 분별력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안 머레이(Iain Murray)가 말한 바로 그겁니다.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분명하게 가려 주는 설교가 필요합니다. 이제 다시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할 때입니다. 유감스럽지만 그렇게 하려면 인기를 잃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저에게 묻습니다. “왜 사람들이 그렇게 할까요? 왜 타협할까요? 왜 분별하지 않을까요? 왜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을까요? ‘지금의 모습은 기독교 기관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라고 왜 말하지 않을까요? 왜 분명하게 선을 긋지 않을까요? 왜 그렇게 하지 않는 걸까요?” 제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이겁니다. 대체로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머레이도 책에서 이 점에 대해 저와 같은 견해를 밝힙니다. 사람들에게 배척당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인기를 얻고 싶기 때문입니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받아들여지고 싶기 때문입니다. 좋은 평판을 얻고 싶기 때문입니다. 주변으로 밀려나서 구석에 내몰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용납하고 자신도 용납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면 어느 정도 인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세계 안에서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인정을 구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님께 인정받는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사람의 인정을 구한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참과 거짓을 분명하게 가려 주는 설교자가 되려고 하면, 그 상황 속에 진리를 분명하게 제시하려고 하면 오히려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으로 취급받습니다.

이것 역시 새로운 일은 아닙니다. 존 웨슬리(John Wesley)는 <웨슬리 전집(Wesley’s Works)> 제 8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시대에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사실상 사람들의 비난거리가 되는 것이다.” 18세기 영국의 배교한 교회 한가운데 웨슬리가 있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참된 복음을 전했고, 그것 때문에 심한 비난을 받았습니다. 결국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참되게 믿는 자들을 박해한 것이 교회였다는 사실이 흥미롭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미국으로 건너와 나라를 세웠을 때 종교의 자유를 찾아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아시죠? 박해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박해한 것은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박해했습니까? 교회입니다. 배교한 교회가 그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참된 그리스도인인지 어떻게 선을 그어 알 수 있을까요? 제가 아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성경적인 방법은 참된 교회가 건짐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겁니다. 물론 ‘건짐받은 자들의 제일교회’는 이런 이름은 교회 이름으로 그리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뜻은 맞습니다. 참된 교회는 건짐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건져내신 사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다음 주에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여러분이 꼭 기억하실 수 있도록 먼저 개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건지심을 다섯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참된 그리스도인은 거짓에서 진리로, 오류에서 진리로 건지심을 받았습니다. 아주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죄에서 덕으로, 다시 말해서 경건하지 않은 삶에서 경건한 삶으로 건지심을 받았습니다. 셋째, 두려움에서 기쁨으로 건지심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진노에서 복으로 건지셨습니다. 넷째, 세상을 사랑하는 데서 교회를 사랑하는 데로 건지심을 받았습니다. 다섯째, 사탄에게서 하나님께로 건지심을 받았습니다. 이 모든 변화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중요한 것은 언제 어디서 어떤 결단을 내렸는가가 아닙니다. 어떤 곳에 소속되어 있느냐도 아닙니다. 어떤 식으로든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느냐도 아닙니다. 교회는 건지심을 받은 사람들, 구출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여러분, 이 문제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다시 복음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실제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곳입니다. 제가 <예수님이 전해주신 복음(The Gospel According to Jesus)>을 쓴 지도 벌써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저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하는 괜찮은 책 한 권을 쓰겠다는 생각으로 그 책을 썼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서 10장이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이 정도면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라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 책을 쓰자 엄청난 논쟁이 불붙었습니다. 거의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논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교회 안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지 않고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주장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으려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해야 한다는, 소위 매우 분열을 일으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어떤 곳에서는 사실상 저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수없이 많은 문제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참과 거짓을 분명하게 가려내려고 할 때, 분별하려고 할 때, 성경적으로 말하려고 할 때, 분명하게 말하고 신학적으로 정확하게 말하려고 할 때, 오류에 빠진 사람들이 얼마나 취약한지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진리를 위해서,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서, 교회의 정결함을 위해서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진리를 지키기 위한 싸움은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진리를 선포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선포할 겁니다. 그리고 이번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저는 이 일을 좀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런 혼란이 이곳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이제는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음 주에는 건지심을 받은 사람들의 특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을 분별할 수 있도록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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