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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4장입니다. 베드로전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드디어 4장입니다. 오늘은 처음 여섯 절을 보겠습니다. 4장에서도 놀라운 진리들을 살펴보게 될 것을 기대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절부터 6절까지 제가 읽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저는 이 여섯 절에 <죄를 멀리하기 위해 기억할 것들>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싶습니다. 1669년에 출간된 <재앙 중의 재앙(The Plagues of Plagues)>이라는 깊이 있는 책에서 랄프 베닝(Ralph Venning)은 죄에 대해서 이렇게 썼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죄는 모든 악 가운데 가장 악한 것이며, 악 중의 악이고, 사실상 유일한 악이다. 죄만큼 악한 것은 없다. 죄 외에는 참된 악이 없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것처럼, 이 세상의 고난이나 장차 올 세상의 고난 역시 죄라는 악과 비교할 수 없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고 사람을 파괴하는 것은 오직 죄라는 악뿐이다. 죄는 고난보다 더 악하고, 죽음보다 더 악하고, 마귀보다 더 악하고, 지옥보다 더 악하다. 고난은 죄만큼 고통스럽지 않고, 죽음은 죄만큼 치명적이지 않으며, 마귀는 죄만큼 마귀 같지 않고, 지옥은 죄만큼 지옥 같지 않다. 이것은 죄의 죄됨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준다. 특별히 죄가 인간의 선을 거스르고 대적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방금 언급한 네 가지 악은 참으로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모든 것으로부터 ‘선하신 주님, 우리를 건져 주옵소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다 합친다 해도 죄만큼 악하지는 않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무엇보다 죄로부터 건짐 받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다른 어떤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으신다 해도, 적어도 이 기도만큼은 ‘선하신 주님, 우리의 간구를 들어 주옵소서’라고 간청해야 한다.” 랄프 베닝은 독특하면서도 낯설고 흥미로운 표현을 통해서 죄가 얼마나 악한지를 깨닫게 합니다. 죄는 고난보다 더 악합니다. 죽음보다 더 악합니다. 마귀보다 더 악합니다. 지옥보다 더 악합니다.

신자는 죄를 미워합니다. 죄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죄로부터 자유하기를 갈망합니다. 여러분도 살면서 한번쯤은, 어떤 방식으로든간에, 어떤 말로든 이렇게 외친 적이 있을 겁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는 모두 자신의 비참함에 탄식합니다. 또한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기죠. 죄가 모든 악 가운데 가장 큰 악이고, 사실상 유일한 악이고, 우리가 죄를 미워하고 죄에서 자유롭게 되고자 한다면, 어떻게 죄를 피할 수 있을까?

우리가 죄에서 멀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분명한 건 이것입니다. 죄를 피하는 일은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싸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든 신자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합니다. 그런데 죄를 피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세 가지 시제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미래, 현재, 과거.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죄를 피하려면 미래를 살필 줄 알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유혹이 아직 오지 않았더라도 방심하지 말고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미래를 바라보아야 한다. 제자들이 하지 못했던 것이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늘 경계해야 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닥쳐올지 내다보며 살아야 합니다.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지혜롭게 행해야 합니다.

또 우리는 현재를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앞으로 다가올 유혹을 경계하며 살아야 할 뿐만 아니라, 지금의 형편도 분별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에 빠지지 않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현재의 삶에 대한 명령입니다. 눈앞에 악한 것이 보이면 미워해야 합니다. 선한 것이 보이면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또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그리고 로마서 13장 14절에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미래를 살피며 다가올 죄를 경계해야 합니다. 동시에 현재를 세심하게 살피면서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과거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모든 악 가운데 가장 큰 악, 아니 유일한 악인 죄를 다루기 위해서 정말 필요한 능력은 잘 기억하는 것입니다. 기억하는 겁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핵심입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죄를 멀리하도록 돕는 몇 가지 사실을 기억하라고 권면합니다. 이 본문의 핵심은 2절에 있습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이 육체 가운데 남아 있는 나머지 삶을 더 이상 사람의 정욕을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앞으로 다가올 유혹을 경계하며 미래를 살펴야 합니다. 또 현재를 분별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과거를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기억력이 좋아야 합니다. 이제 이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먼저 우리가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전서는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3장 끝부분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이것을 기억하면 고난 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 승리의 본이 누구이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베드로는 3장 18절부터 22절에서 예수님이 부당한 고난 가운데서 어떻게 승리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사실 예수님은 가장 큰 고난의 순간에 가장 위대한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지난 시간에 함께 살펴봤죠. 예수님이 부당하게 죽임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억울한 대우를 받으시고, 미움과 거절 속에서 형벌을 받으실 때, 바로 그 순간 의로우신 분이 불의한 자들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죄를 이기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지옥의 마귀 세력과 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까지도 맞서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22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는 최고의 영광을 얻고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죽으시는 순간에 죄를 이기셨습니다. 죄만 이기신 것이 아닙니다. 지옥의 마귀 세력을 이겼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시고 승리하셨습니다. 모든 피조 세계를 상대로 승리하셨습니다. 가장 큰 고난의 순간에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베드로가 말하고자 하는 겁니다. 고난을 당할 때 기억하라. 그 순간이 어쩌면 가장 큰 승리의 순간이 될 수 있다. 예수님처럼 우리의 고난도 승리를 이룰 수 있다.

이런 배경 속에서 1절을 보겠습니다. 영어 성경으로 보면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분명히 앞에서 말한 3장의 내용과 연결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베드로가 앞에서 말한 내용을 요약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그러므로”라고 한 것이죠. 너희는 예수님이 육체를 입고 고난받으신 것을 보았다. 그 고난은 승리로 이어졌다. 그러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어떤 마음입니까? 육체의 고난을 기꺼이 감당하려는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고난이 가장 위대한 승리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베드로가 말해온 모든 내용을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말씀입니다. 세상과 함께 죄 가운데서 고난받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왜냐하면 의를 위해 받는 고난, 옳은 일을 하다가 받는 고난,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 핍박과 불공평한 대우와 냉혹한 대우를 받는 바로 그 고난이야말로 가장 큰 영적 승리를 이루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와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아야, 무장을 해야 합니다.

자, 이제 이 말씀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처음에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우실 수도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표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말합니다. 앞 장인 3장 18절 상반절은 “그리스도께서도… 죽으사”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절은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이렇게 말합니다. 18절의 “육체로 죽임을 당하셨다”라는 표현과 4장 1절의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다”라는 표현은 같은 의미입니다. 둘 다 예수님의 죽음을 가리킵니다. 베드로는 계속해서 이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고, 그 죽음을 통해 위대한 승리를 이루셨으니 같은 마음으로 무장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장하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군사 용어입니다. 군인이 싸우기 위해 무기를 갖추는 모습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에베소서 6장 11절에서는 “전신갑주”로 번역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라는 말씀이죠. 무장하라는 겁니다. 무기를 들라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삶이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무기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 무기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헬라어로는 ‘엔노이아(ennoia)’입니다. 같은 마음, 같은 정신, 같은 원리, 같은 태도를 의미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잘 들어보십시오.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 나타난 깨달음, 마음, 원리로 무장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죽음 속에서도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원리입니까? 승리할 수 있다. 이런 강한 마음으로 무장하라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잘 들으십시오. 죽을 각오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강한 마음으로 무장하라는 겁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겁니다. 매우 간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같은 마음으로 무장하십시오. 죽을 각오를 하십시오. 왜냐하면 죽음 속에 승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선택지도 있습니다. 핍박을 받거나 생명이 위협받을 때, 그냥 믿음을 저버릴 수도 있겠죠.

그냥 그리스도를 부인할 수도 있겠죠. 그냥 도망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선택지를 두면 안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베드로의 말은 이런 겁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16장에서 말씀하신 일이 우리의 삶 속에 실제로 일어날 것이다. 핍박을 받을 것이다. 죽임을 당할 것이다. 순교자가 될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무장하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음 속에 승리가 있다는 것을 아셨기에 기꺼이 죽으셨던 것처럼 같은 마음을 가지라는 겁니다. 의를 위해 기꺼이 죽을 준비를 하라는 겁니다. 왜냐고요? 그 죽음에 승리가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주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죽음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일부로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놀라셨습니까? 마태복음 10장 38절부터 39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예수님은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씀하신 걸까요?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죽을 각오를 하라는 뜻입니다. 어떤 신비로운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영적으로 헌신하라, 그런 것도 아닙니다. 당시 사람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라는 뜻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사람을 처형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나를 위해 죽을 준비를 하라. 기꺼이 생명을 내어놓으라.” 그리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담대하게 말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무슨 뜻입니까? 늘 죽음의 경계선 위에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짐은,”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언제나 죽음의 문턱 위에 서 있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를 위해 죽었습니다. 바울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마지막 편지인 디모데후서를 쓰면서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미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무장하고 있었던 겁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바라보았고, 그 죽음 속에서 예수님이 승리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무장했던 것입니다. “나도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죽겠다”라는 마음이죠. 그리고 베드로전서 4장에서 베드로도 바울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궁극적인 무기입니다.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보십시오. 사람들이 우리에게 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이 우리를 죽이는 것인데, 우리의 관점에서 가장 좋은 일이 죽는 것이라면, 결국 우리를 무너뜨릴 수 없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그래서 교회 역사 속의 수많은 순교자들이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였던 겁니다. 왜냐고요?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죽음 속에 위대한 승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심으로 죄를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만일 제가 죽는다면, 1절을 보십시오.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여기서 “육체의 고난을 받았다”라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죽는다는 뜻입니다. 죽으면 죄를 그치게 된다, 이런 것입니다. 이해하셨습니까? 죽음이 그렇게 나쁜 겁니까? 사람이 죽으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좋은 일 아닙니까? 왜냐하면 우리는 죄를 미워하기 때문이죠. 죄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죠. 경건하고, 덕스럽고, 정결하고, 거룩하고, 흠 없는 삶을 살고 싶기 때문이죠. 그런데 제가 죄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고, 그 목표가 죽음을 통해서만 완성된다면, 누군가가 저에게 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일이 결국 저를 죽이는 것이라면, 오히려 저에게 있어서 가장 간절히 바라는 것을 이루어주는 셈이 되고 마는 것이죠. 그러니까 결국 저를 무너뜨릴 방법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 속에 있는 승리를 바라보라고 말하는 겁니다. 적대적이고 핍박하는 세상이 신자에게 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죽이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기꺼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죽음은 더 이상 위협이 될 수 없습니다.

<폭스의 순교사(Foxe’s Book of Martyrs)>, 존 스탬(John Stam)과 베티 스탬(Betty Stam)의 이야기, 에콰도르 선교사들의 이야기, 그리스도를 위해 죽임당한 선교사들의 이야기, 공산주의 국가나 이방 문화 속에서 믿음 때문에 생명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 이런 이야기들을 읽을 때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되죠. “어떻게 그런 일을 견딜 수 있었을까?” 죽음을 승리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에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죄가 완전히 끝나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죽음도 달콤하지 않을까요?

죽은 자는 죄를 그칩니다. 여기 사용된 동사는 완료형입니다. 어떤 상태나 조건에 들어가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죠. 다시 말해서 영원히 죄에서 자유로운 상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왜 이게 나쁜 일입니까? 우리 삶의 목표가 죄에서 영원히 자유로워지는 일이라면 결코 나쁜 일이 아니죠.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삶 속에서 무엇을 없애려고 애쓰고 있습니까? 죄이죠. 그런데 단 한순간에 완전히 사라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좋다. 나를 죽여라. 그러면 나는 내가 그렇게도 가고 싶어하던 곳에 가게 될 것이다.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모든 두려움이 사라져 버립니다. 아무리 핍박하고 위협해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신자가 죽으면 영원히 죄에서 자유로운 상태에 들어갑니다. 예수님이 이미 본을 보이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묻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잠깐만요,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셨잖아요.” 맞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죄를 지으신 적이 없습니다.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잘 들으십시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로마서 8장 3절은 예수님이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을 뿐 아니라 죄를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악한 사람들의 모든 악한 행위를 몸소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죄가 가져오는 고통을 실제로 짊어지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 말씀처럼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을 우리를 대신해 죄로 삼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 말씀처럼 예수님은 친히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습니다. 죄인들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악한 일을 직접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죄로 여김을 받으셨고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어떻게 되셨습니까? 죄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되셨습니다. 성육신 가운데서 감당하셨던 모든 고난이 완전히 끝난 것입니다. 더 이상 죄 있는 육신에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영화로운 몸을 입으셨습니다. 다시는 악한 사람들과 마귀들에게 고난당하지 않으십니다. 다시는 죄를 담당하지 않으십니다. 단번에 이미 끝나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죽으심으로 죄와 완전히 단절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더 이상 죄와 아무 관계가 없으십니다. 죄도 더 이상 예수님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말합니다.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우리의 궁극적인 무기는 죽는 순간 우리가 영원히 죄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을 듣고도 “아닙니다. 저는 지금 이 상태가 더 좋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정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말이 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육체가 죽어야 합니다. 사실 이 구절은 완전주의자들에게 아주 좋은 말씀입니다. 이 땅에서 완전해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분명히 말합니다. 죄를 완전히 그치는 유일한 길은 죽는 것이다, 라고 말이죠. 죄 없는 사람은 육체적으로 죽음을 맞이한 사람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죽은 사람뿐입니다. 아직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죽으심으로 죄의 세력에서 자유롭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육신을 통해서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셨고, 십자가에서 사람의 죄를 담당하심으로 스스로 죄의 세력 아래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죽으심으로 그 모든 것에서 완전히 벗어나셨습니다. 히브리서에서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의 마음속에도 바로 이런 생각이 있었을 겁니다. 그 기쁨이 무엇입니까? 영원히 죄에서 자유롭게 되는 기쁨입니다.

우리도 죽음을 고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7장 5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그렇습니다. 우리가 육신 안에 있는 한 죄의 정욕은 계속해서 역사합니다. 또 로마서 7장 18절입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그리고 23절입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이 육신 안에 살고 있는 한 죄의 문제는 계속됩니다. 그리고 그 문제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순간은 이 육신을 떠나는 때입니다. 육신이 죽는 순간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입니다. 42절에서 바울은 부활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49절입니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우리가 죽기 전까지는 그 썩지 않는 몸, 영광스러운 몸, 강한 몸, 신령한 하늘의 몸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가 죽을 때에야 비로소 죄가 영원히 제거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신자라면 결국 천국에 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조금 일찍 가는 것이 그렇게 나쁜 일입니까? 가능한 한 오래 죄와 함께 육신 안에 머물며 살아가는 편이 더 좋습니까? 이제 왜 생각이 깊은 그리스도인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지 이해하시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천국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결국 죄 없는 완전한 상태라는 복에 이르게 될 겁니다. 그렇게 정말 깊이 생각해 본다면 이렇게 말하게 될 겁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더 좋다.” 이것이 우리의 목표이고 우리의 운명이라면 우리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고요? 고난이 우리에게 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우리를 죽이는 것뿐인데, 바로 그 죽음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목표를 이루어주고 죄가 없는 완전한 존재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화형을 당하거나,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히거나, 발목 사이에 쇠꼬챙이가 박힌 채 매달리거나, 혹은 학살을 당한다 해도, 물론 그런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생각합니다만, 핍박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들은 지금 나에게 엄청난 은혜를 베풀고 있다. 왜냐하면 나를 죄가 없는 완전한 영광으로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나를 구원하신 목적이다. 그러니 당신은 나를 영원히 완전하게 하는 귀한 선물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깊은 감사를 전하고 싶다.”

이상하게 들리십니까?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런 마음으로 갑옷을 삼아야 할까요? 2절을 보십시오.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무장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어떻게 연결되는 걸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보십시오. 만일 우리 삶의 최종 목표가 죄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라면, 우리는 지금 그 길을 향해 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죄를 멀리하며 살아야 합니다. 죽음을 통해 죄를 완전히 그치는 그날까지, 이 육체 가운데 머무는 동안 더 이상 사람의 정욕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삶의 목표가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그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남은 삶 동안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합니까? 죄를 피하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이 “살다”라는 단어는 우리가 “생명”이라는 단어에서 사용하는 어근과 연결된 표현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남은 시간 동안, 이 육체 안에서 머무는 동안 더 이상 사람의 정욕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이든지 간에 말이죠. 이 죄된 육체 안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아있든지 간에, 더 이상 사람의 정욕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됩니다. 더 이상 에피뒤미아(epithumia), 그러니까 악한 욕망에 의해 움직이면 안 됩니다. 이제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악한 욕망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우리에게 죄를 멀리하라고 권면합니다. 더 이상 육신에 뿌리를 둔 악한 욕망에 끌려다니며 살아가지 말라는 겁니다. 만일 악한 욕망에 끌려 살아가는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알고 싶으시다면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인 에베소서를 떠올리면 됩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 바울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우리가 살았던 방식이죠.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남은 삶 동안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죄를 피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죄를 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미래를 바라보게 하거나 현재를 살피게 하는 방식이 아니라 기억을 되살리는, 기억하라는 방식입니다. 오늘 저녁에는 두 가지 정도만 말씀드리고 나머지는 다음 시간에 이어서 하겠습니다. 죄를 멀리하도록 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좋은 기억력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죄가 예수 그리스도께 어떤 일을 했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가 예수님께 어떤 일을 했는지를 기억하면서 죄를 미워해야 합니다.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죄를 피해야 합니다. 우리의 긴 인생을 마치며 결국 죽음을 통해 죄를 완전히 그치는 그날까지, 우리는 죄를 피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 죄를 피하고 싶다면 먼저 죄를 진심으로 미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를 진심으로 미워하려면 죄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죄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알려면 먼저 죄가 예수님께 어떤 짓을 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죄가 예수님께 무슨 일을 했습니까? 1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죄가 예수님께 무슨 일을 했습니까? 한 단어로 말해보십시오. 죽였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빼앗았습니다. 그런데도 죄를 즐길 수 있으십니까? 죄가 예수님께 한 짓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예수님이 죄인 취급 받으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우리 죄를 몸에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다”라고 하신 말씀대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시겠느냐는 말입니다. 죄와는 아무 관계도 없으셨던, 흠 없고 순결하고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두 번째 위격께서 죄로 여기심을 받으시고 세상의 죄를 몸에 지시고 결국 죽임당하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과 단절되셔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셔야 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고, 손과 발에 못이 박히시고, 머리에는 가시관이 눌려 씌워지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창에 찔리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그 모든 일이 죄 때문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죄를 미워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만일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말이죠.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해를 입으면 복수심으로 가득 차지 않습니까? 음주운전 사고로 자녀를 잃은 부모의 심경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질병으로 자녀를 잃은 부모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 죄가 없는데 범죄의 희생양이 되어서 배우자를 잃은 사람은 또 어떻습니까? 범죄자를 향한 증오와 복수심이 쏟아져 나올 겁니다. 물론 저는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친구로서 그 마음을 이해합니다. 저 역시 낯선 사람이 저희 집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던 그날이 기억납니다. 어떤 남자가 칼을 들고 서서 아직 어린아이였던 저희 딸 멜린다를 데려가겠다고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그때의 감정이 기억납니다. 야구방망이를 손에 들고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한 발짝만 더 움직이면 가만두지 않겠다.”

만일 멜린다가 문을 열어 주었더라면, 제가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저는 잘 압니다. 다행히도 이중 잠금장치 덕분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사건이 벌어졌더라면 아버지로서 제가 어떤 감정으로 행했을지 정말 잘 압니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저는 아주 소중한 것이 공격당하고, 짓밟히고, 파괴되고, 죽임을 당할 때 마음속에서 강한 증오가 솟아오른다는 사실을 압니다. 사람 자체를 미워하지는 않더라도, 그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깊은 증오가 생기는 것이죠.

그리고 분명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만든 것이 죄라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죄를 미워해야 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결론 아닙니까? 그러니까 기억력이 좋으면 죄를 멀리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가장 먼저 죄가 예수 그리스도께 한 짓을 기억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기억해야 할 것은 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짓입니다. 죄가 신자들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를 기억하셔야 합니다. “죄가 우리에게 무슨 일을 했다는 말입니까?” 이렇게 물으실 수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죄는 우리를 완전히 망가뜨렸습니다. 사실 죄는 우리를 너무 철저하게 망가뜨려 놓았기 때문에 우리가 죄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무엇입니까? 죽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사는 것이 싫지 않으십니까? 단 일주일만이라도 죄 없이 살아보고 싶지 않으세요? 죄는 우리를 그렇게나 망가뜨려 버렸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죄는 우리를 너무 깊이 오염시켜 놓았기 때문에 죄를 완전히 그치는 유일한 방법은 죽는 것뿐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계속해서 죄의 공격을 받습니다. 로마서 7장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이렇게 탄식합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그래서 바울은 외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그리고 로마서 8장에서는 온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날 것을 기다리며 함께 탄식한다고 말합니다. 온 피조물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아십니까? 죽음입니다. 그리고 부활입니다. 피조세계도 새 창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죠. 그러니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나는 준비되었다”라는 말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바울은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라고 말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18절에서는 이렇게 말하죠.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나는 죽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죽는 순간 주님이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안전하게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바울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한 겁니다. “이제 나는 갈 준비가 되었다. 이제 나를 데려가 달라. 나는 충분히 싸웠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가능한 한 오래 이 세상에 머물고 싶어합니다.

디도서 2장 14절입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래 우리를 부르신 그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죄를 미워합니다. 단지 죄가 예수님께 한 짓 때문만이 아닙니다. 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짓을 알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목사로서 완전한 사람들을 섬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완전한 목사가 되어서 완전한 사람들을 섬긴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불완전한 목사가 불완전한 사람들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죄 있는 지도자가 죄 있는 사람들을 인도하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짓을 기억하면 죄를 점점 더 미워하게 됩니다. 제가 한 가지 말씀을 더 드리겠습니다. 사역을 오래 할수록 죄를 더 미워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오래 살아갈수록 죄를 더 미워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죄가 신자들의 삶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에 대한 기록이 계속 쌓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황폐하게 만드는지 점점 더 잘 알게 되기 때문이죠. 결국 죽음 외에는 완전한 해방이 없다는 사실까지 깨닫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베드로가 여기에서 말한 내용의 일부일 뿐입니다. 아직 한 절밖에 살펴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또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는 다음 시간에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밤 우리에게 죄를 미워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셨던 예수님의 마음으로 갑옷을 삼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니 또한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죄와 완전히 단절되실 것을 아셨습니다. 모든 것이 끝날 것을 아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죄가 예수님께 한 짓을, 또 신자들에게 한 짓을 깨달아 알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죄를 미워하게 하옵소서. 죄를 충분히 미워하여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무장하게 하옵소서. 죽는다는 것은 영원히 죄에서 해방되는 것이니 기꺼이 죽을 준비를 하게 하여 주옵소서. 죽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이요 기쁨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히 죄에서 자유롭게 되는 은혜를 허락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영원한 지옥밖에 없습니다. 죄가 영원히 존재하는 곳입니다. 죄만 존재하는 곳입니다. 정말 생각조차 하기 싫은 두려운 현실입니다. 그러나 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영원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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