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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야고보서 1장을 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13절부터 18절까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야고보서 1장 13절부터 18절입니다. 오늘 저녁에 다 다루지 못하면 다음 주일 저녁에 남은 부분을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아마 그때는 찬양하는 시간도 함께 가질 예정인데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이 모든 것이 잘 어우러져서 아름다운 예배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13절부터 18절까지를 읽는 동안에 눈으로 함께 읽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14절을 보겠습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시험은 ‘유혹’입니다. 이 말씀이 참인지 아닌지는 우리 모두가 증언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유혹을 받으니 말이죠. 유혹은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겪는 경험입니다.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예외가 없습니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사람이 감당할 만한 유혹’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한 고대의 저술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세례가 우리의 육신을 익사시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유혹은 모든 사람에게 옵니다. 모든 사람이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유혹이라는 싸움 앞에 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유혹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우리의 믿음이 진짜인지 아닌지, 참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2절부터 12절에서 우리가 시련을 맞이하고 반응하는 법이 참된 믿음을 시험하는 기준이었던 것처럼, 유혹을 다루는 법 역시 참된 믿음을 가늠하는 시험 기준입니다.

구속받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의 죄성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유혹을 받고 죄에 빠질 때에, 그 책임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아주 전형적인 반응입니다.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행동을 책임지지 않으려는 습성을 타고 납니다. 어린 아이를 한번 꾸짖어 보십시오. 거의 반사적으로 “제가 안 했어요” 이렇게 말하죠. “제 잘못이 아니에요”, “사정이 있었어요” 이럽니다. 인간은 연약함과 유혹에 대해 전적으로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죄책감을 회피하고, 자라서 어른이 되어서도 거의 같은 일을 반복합니다. 이 본문에서 야고보는 유혹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리고 그 책임을 어디에 두는지가 그 사람의 믿음이 참된지 아닌지를 드러내는 또 하나의 지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편 12절과 13절은 다소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앞서 시련에 대해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강하게 하시기 위해 삶 속에 허락하시는 시련과 환난을 설명하면서, 동사 페이라조(peirazō), 명사로는 페이라스모스(peirasmos)를 계속 사용했습니다. 이 두 단어를 사용해서, 시련을 말했던 야고보가 이제 유혹의 문제로 초점을 옮기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바로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련을 견디는 사람은 복이 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이 시련은 외적인 환경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고 영적 성장을 만들어 내는 외적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시련이 동시에 유혹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영적 성장을 이루는 수단이 되지 않고, 오히려 악으로 이끄는 유혹의 통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내 삶에 찾아오는 모든 어려움의 결과는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돌보심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면 시련을 통해 성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고, 순종하는 대신 편한 길을 택하면, 그 순간 악으로 이끄는 유혹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악으로 끌어당기는 유혹을 뜻하는 단어가, 동시에 시련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됩니다. 차이는 상황이 아니라 우리의 반응에 있습니다. 시련에 순종으로 반응하면 영적 성장을 이루는 수단이 되지만 시련에 불순종으로 반응하면, 유혹으로 바뀌고 우리는 그 유혹의 희생물이 됩니다. 모든 시련은 우리의 반응에 따라 유혹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야고보는 성장과 복으로 이어지는 시련에서, 죄와 죽음으로 이어지는 유혹으로 초점을 전환합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삶의 모든 상황은 선택을 요구합니다. 선택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인내할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믿음으로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불순종이 더 쉬운 길이라는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고 죄로 떨어질 것인가?

그렇다면 만약 내가 죄에 빠졌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시련을 허락하신 하나님 책임일까요? 아니면 환경이 책임일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만드셨으니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책임을 돌려야 할까요? 도대체 누구의 책임일까요? 하나님께서 시련을 주셨다면, 그 시련이 유혹이 되었을 때도 하나님께 책임이 있는 것일까요? 유혹에 있어서 죄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문제가 바로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죄만큼이나 아주 오래된 문제입니다. 성경 창세기 3장으로 넘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3장입니다. 11절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해서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9절에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그러자 아담이 말하죠.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전에는 결코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죄를 범한 이후, 아담은 무한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두려워 숨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1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이전에는 없던 자기의식이 갑자기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으십니다.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의 말을 한번 잘 들어보십시오. 아담은 이렇게 말해야 했습니다. “네, 제가 먹었습니다”라고 말이죠. 그런데 그 대신에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누구의 책임이라고 합니까? 표면적으로는 여자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아담은 전날 밤 잠에 들기 전까지 평생 여자를 본 적도 없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떠 보니까 결혼을 한 상태가 되어 있는 거죠. 여자라는 개념도 없었던 사람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아담이 하와를 탓하고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 표현을 잘 보십시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누구의 책임이라는 말입니까? 하나님 책임이라고 합니다. 다른 여자를 주실 수도 있는데 왜 이 여자를 주셨느냐는 거죠. 왜 그런 일을 할 여자를 만드셨느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은 아담만 한 것이 아닙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주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도 “제가 했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렇게 합니다. 다시 말해, 남편과 똑같이 마찬가지로 자신도 하나님이 만드신 존재의 피해자라고 말하는 겁니다. 평화로운 동산에 있었는데, 갑자기 뱀이 나타났다는 겁니다. 여자는 그 뱀을 자신이 만들지도 않았고, 말을 할 수 있게 한 것도 자신은 아니라고 합니다. 결국 책임이 하나님께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지금까지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만드셨다, 하나님이 나를 죄성을 가진 존재로 만드셨다, 하나님이 이런 환경을 주셨다, 하나님이 이 결혼의 상황 속에 나를 두셨다, 하나님이 내 주변을 이렇게 만드셨다, 하나님이 이 모든 장면을 만들어 놓으셨으니 내 잘못이 아니다, 라고 주장합니다. 이사야 63장 17절을 보면 이런 충격적인 말이 나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타락한 육신의 본성은 하나님을 탓합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심지어 하나님께 그 책임을 전가하려 합니다.

우리는 모두 유혹을 받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를 짓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탓합니다. 상황을 탓하고, 자신의 연약함을 탓하고, 타고난 성향을 탓하고, 환경을 탓하고, 친구를 탓하고, 친척을 탓하고, 가족을 탓하고, 경제적 형편을 탓하고, 무엇이든지 남탓을 합니다. 그래서 13절에서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을 탓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유혹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일을 단호하게 금하는 말씀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시인 로버트 번스(Robert Burns)는 이렇게 썼습니다. “주께서 나를 거칠고 강한 정욕으로 지으신 것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 유혹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내가 종종 잘못된 길로 이끌렸나이다.” 로버트 번스는 수세기 동안 사람들이 품어 왔던 생각을 정확히 표현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거칠고 강한 정욕을 가진 존재로 만드셨다면,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것 외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느냐는 생각 말이죠. 고대 유대 랍비들 가운데서도 이런 생각을 가진 이들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악한 충동을 ‘예체르 하라(yetzer hara)’라고 부르면서, 선한 충동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이해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인간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면, 이 악한 충동 역시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니냐고 추론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랍비적 표현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인간 안에 악한 성향을 만든 것을 후회한다. 만일 그런 악한 성향을 만들지 않았다면, 인간은 나를 거역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인간 안에 악한 성향을 만들었고, 그것을 치유하기 위한 수단으로 율법을 만들었다. 네가 율법을 지키는 데 힘쓰면 그 지배 아래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어떤 랍비들은 하나님이 인간의 오른편에는 선한 성향을, 왼편에는 악한 성향을 두셨다고까지 했습니다. 이런 생각의 밑바탕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죄와 유혹의 책임을 결국 하나님께 돌리려는 인간의 아주 오래된 경향이죠.

유혹과 죄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은 이상해 보이지만, 사실 매우 오래된 생각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런 생각을 단호하게 금합니다. 오히려 야고보는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 앞에서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탓할 생각 자체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암시합니다. 물론 우리가 한 순간도 그런 식의 암시나 말을 할 때가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속적인 태도로 그렇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제 13절을 다시 보십시오. 현재 수동 분사로 표현되었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라는 말은, 유혹과 싸우는 중 일때를 말합니다. 유혹과 한창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에, 유혹을 받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스스로 변명하면서 책임에서 빠져나오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만든 거야”라고 말하지 말라는 겁니다. 여전히 유혹을 받는 중에 거의 넘어가기 직전인 상황에서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유혹을 받고 있다” 이런 식으로 핑계를 대지 말라는 말입니다. 야고보는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라는 말을, 마치 그 상황에 있는 사람이 실제로 내뱉는 말인 것처럼 인용하듯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점을 하나 볼 수 있습니다. 이 절에서 사용된 전치사입니다. 영어에는 ‘of’라는 단어가 하나뿐이지만, 헬라어에는 영어의 ‘of’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가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아포(apo)이고요, 다른 하나는 휘포(upo)입니다. 이 두 단어는 매우 중요합니다. 아포는 거리, 분리, 간접적인 관계를 의미합니다. 반면에 휘포는 직접적인 행위 주체, 실제로 그 일을 행하는 주체를 뜻합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단어는 휘포가 아니라 아포입니다. 그러니까 야고보의 말은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를 유혹하신다고 말하지 않아야 할 뿐만 아니라, 멀리서, 간접적으로 하나님이 이 문제의 진짜 원인이라는 주장조차 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창조하셨고, 이런 환경을 만드셨고, 이런 상황 속에 두셨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셨으니 결국 하나님께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직접 악을 행하도록 부추기신다고까지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을 만드셨고, 실패할 가능성을 허락하셨으니 간접적으로는 하나님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매우 흔합니다. 바로 아포, 간접적 책임이죠. 그러니까 야고보의 말은 이겁니다. 하나님은 유혹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실 뿐만 아니라, 간접적인 원인조차도 아니다.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말아라. 자신을 하나님의 섭리나, 하나님의 창조나, 하나님이 허락하신 상황의 피해자로 여기지 말아라. 사탄을 탓하는 것도, 귀신을 탓하는 것도, 세상이나 다른 사람을 탓하는 것도 안 된다. 야고보는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탓하는 것을 금합니다. 잠언 19장 3절입니다.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

1세기 유대인 사상가 필로(Philo)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성이 죄를 범하고 덕에서 멀어지면, 그 책임을 신적인 원인에게 돌린다.” 아주 정확하게 표현했습니다. 인간은 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일을 즐깁니다. 그리고 그 책임을 어딘가에로 떠넘기다 보면, 결국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로 책임이 돌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유혹의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고까지 말을 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시나요? 마태복음 6장 13절을 떠올려 보십시오. 주기도문에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라는 기도가 있죠. 제가 이번 주에 글을 하나 읽었는데, 필자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 달라고 간구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으로 이끄실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해야 한다.”

야고보는 이런 어리석은 숙명론을 받아들일 여지를 전혀 남겨두지 않습니다. 마치 가난을 이유로 도둑질을 하고, 자신은 가난하니 훔쳐도 된다고 생각하면서 상황을 탓하는 사람하고 똑같습니다. 혹은 술에 취해서 차를 몰다가 사고로 사람을 죽여 놓고는, 결혼 생활을 불행하게 만든 아내를 탓하거나, 자신을 술로 몰아넣은 사업 문제를 탓하거나, 압박과 스트레스를 탓하면서 스스로의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는 사람하고 똑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변명은 결코 책임을 없애 주지 못합니다. 야고보는 이러한 태도를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기 안의 정욕을 하나님 탓으로 돌립니다. 자기 삶의 환경을 하나님 탓으로 돌립니다. 앞서 말씀드린 스코틀랜드의 시인 로버트 번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욕에 이끌려 살았지만, 나를 잘못된 길로 인도한 그 빛은 사실 하늘로부터 온 빛이었다.” 오랫동안 사람들이 품어 온 생각을 그대로 드러낸 말이죠. 결국 사람들은 자신이 그런 존재가 된 책임이 자기에게 있지 않고, 그렇게 만들어진 탓이라고 말하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런 생각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유혹하지 않으신다면, 그 유혹으로부터 생겨나는 죄에도 책임이 없으십니다.

13절의 권면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야고보는 다섯 가지 근거를 제시합니다. 다섯 가지 근거입니다. 매우 실제적인 근거입니다. 하나님은 유혹하지 않으시고, 따라서 죄에도 책임이 없으시다는 다섯 가지 증거입니다. 첫번째, 악의 본성입니다. 악의 본성. 13절을 보겠습니다. “사람이 유혹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유혹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그 이유가 바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유혹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헬라어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하나님은 악을 경험하실 수 없는 분이시고, 이런 뜻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친히 아무도 유혹하지 아니하시느니라.”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방 종교의 신들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죠. 고대의 이방 신들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스 신화를 읽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고대 아시아의 신들에 관한 이야기, 읽어보신 적 있으세요? 인류학적 연구를 통해 인간 종교의 신들을 살펴보면, 이방 신들은 언제나 악에 쉽게 유혹을 받는 존재로 묘사가 됩니다. 신들이 죄를 짓고, 다른 이들을 죄로 유혹하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모든 거짓 신들은 타락한 인간의 마음, 혹은 타락한 악한 영의 마음에서 만들어진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방 신들이 부패한 이유는 신을 만든 존재가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시냇물도 그 근원보다 더 높이 솟아오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유혹을 받으실 수 없다. 여기 사용된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오직 여기에만 나오는 단어인데, ‘아페이라스토스(apeirastos)’입니다. 하나님은 악을 경험하실 수 없다,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은 악을 경험해 본 적이 없으십니다. 악을 행하는 능력이 없으십니다. 악에 대해 취약한 부분이 전혀 없으십니다. 참고로 여기서 ‘악’이라는 단어는 중성 복수형으로 관사가 없이 사용되어서, 어떤 특정한 악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일반적인 악 전체를 가리킵니다. 비열하고,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성격을 지닌 악은 하나님의 본성 안으로 조금도 침투할 수 없습니다. 모든 악은 하나님께 속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 안에서 그 어떤 자리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악의 본성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는 무한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2절은 여호와는 거룩하시다, 이렇게 말합니다. 레위기 20장 26절도 여호와는 거룩하다고 했습니다. 이사야 6장에서는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이렇게 선포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16절에서도 여호와는 거룩하시다고 했습니다. 죄가 침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악의 본성은 하나님과 완전히 구별됩니다. 하나님을 악한 의도로 유혹할 수 없습니다. 저는 욥기 1장에서 사탄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참된 성도인 욥 안에서 의로운 성품을 유지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게 만들려 했다고 생각합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0절은 사탄을 두고 ‘우리 형제들을 밤낮 참소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와 맺은 언약을 파기하시도록 유혹하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다는 이유로 말이죠. 로마서 8장을 보면, 누군가 우리를 정죄하고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려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의롭다 하셨기 때문이죠. 저는 사탄이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약점이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악의 본성과 하나님의 본성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악의 공격에 절대 뚫리지 않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영원히 섞이지 않습니다. 하박국 1장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하나님은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고,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악의 본성 자체가 하나님께서 유혹을 받으시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또한 하나님이 사람을 유혹하시는 것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다른 사람을 유혹한다는 것은 누군가가 악을 행하는 것을 기뻐한다는 뜻이 되는데, 악을 전혀 알지 못하시는 분은 악을 기뻐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무엘하 24장에 아주 흥미로운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궁금해하실 것 같으니까 잠시 살펴봅시다.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다윗은 이때 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백성의 수와 힘을 의지하려 했던 인구 조사라는 죄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을 향해 일어나 다윗을 격동시키셨다고 말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친히 다윗을 유혹하신 것처럼 보이죠. 성경 전체에서 이런 인상을 주는 곳은 여기 한 곳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께서 기록하게 하신 병행 본문이 역대상 21장에 있습니다.

역대상 21장은 같은 사건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유혹의 실제 주체를 명확하게 역대하 21장 1절에서 설명합니다. 사탄이라고 말이죠. 분명하게 말합니다. 사무엘하가 보여 주는 더 큰 그림은, 다윗이 사탄의 유혹에 응답할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 일을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으로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에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사무엘하 24장에서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역대상 21장을 보면 사탄이 그렇게 했다고 명확하게 밝힙니다. 사무엘서의 저자가 말하려는 바는, 다윗이 실제로 악을 선택할 경우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이 허용하신 범위 안에서만 그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은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이끄셔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예수님을 유혹으로 이끄신 것이 아니냐.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이 시험을 받게 하셨고,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시험을 통과하셨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실제로는 유혹으로 변질되지 않았습니다. 무엇으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죄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시험들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증명되었고, 천사들이 나아와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면 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마태복음 6장 13절의 “우리를 유혹에 빠지게 하지 마옵시고”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것 역시 시험에 관한 말씀입니다.

성도의 마음에서 나오는 부르짖음이죠. ‘하나님, 기도합니다.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시험 속으로 저를 이끌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서 유혹이 되어 버리는 그런 시험 속으로는 이끌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이렇게 말하죠.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당하게 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이죠. 마태복음 6장 말씀은 이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야고보서의 진리는 견고합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유혹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시고, 다윗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선택할 뿐, 하나님께서는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 허락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시험을 받도록 허락하시지만, 언제나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허락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다면 승리를 위한 길도 반드시 함께 주십니다.

“우리를 시험이나 유혹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부르짖는 것은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죠. ‘하나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대로 행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을 결코 주지 않으시겠다는 그 약속을 지켜 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러니까 악의 본성을 볼 때 하나님께서 유혹을 받으실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경험하실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누구도 유혹하실 수 없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누군가를 유혹하려면 유혹과 그 죄 자체를 기뻐해야 하는데, 하나님은 그런 일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오직 정결하고 거룩한 것만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니까 야고보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 혹은 악의 본성 자체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유혹과 죄의 근원이 되실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악은 하나님의 본성과 모순되기 때문이죠. 둘째, 인간의 본성입니다. 인간의 본성입니다. 악이 아니라 인간의 문제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매우 흥미롭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문자적으로는 ‘헤카스토스(hekastos)’, 곧 각 사람, 각 개인입니다. 각 사람, 각 개인이 유혹을 받습니다. 여기서 “오직”이라는 단어가 먼저 나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유혹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우리 각자에게서 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이 범주 밖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유혹을 받습니다. 현재 시제입니다. 반복적으로 유혹을 경험한다는 뜻이죠. 무엇입니까?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잘 보십시오. 밑줄을 그어도 좋습니다. “자기 욕심”입니다. “끌려”와 “미혹되어”라는 이 두 단어는 매우 흥미롭죠. 둘 다 분사형입니다. 첫번째 ‘끌려’라는 단어는 사냥에서 나온 말입니다. 짐승을 덫으로 유인하려는 것을 가리킵니다. 덫에 미끼를 놓고 짐승을 유인하는 것이죠. 헬라어 동사 헬코(helkō)는 내적인 힘에 의해 끌려간다, 이런 뜻입니다. 안에서 작용하는 힘입니다. ‘이끌리다, 끌어내다, 충동을 받아 끌려가다, 덫에 유인되다’ 이런 의미이죠. 미끼에 이끌려 붙잡히는 것을 말합니다. 사냥 용어입니다. 두 번째 단어인 “미혹되다”는 낚시 용어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잡다, 붙잡다’ 이런 뜻인데, 원래 의미는 미끼로 물고기를 낚는다, 이런 뜻입니다. 바늘에 미끼를 달아 잡는 것이죠. 베드로후서 2장 14절, 그리고 18절에서는 “꾀다”, “유혹하다” 이렇게 번역됩니다. ‘델레아조메노스(deleazomenos)’인데요, 미끼로 물고기를 유인해 잡다, 이런 뜻입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모든 사람은 덫에 미끼가 놓여 있거나 바늘에 미끼가 달려 있을 때에, 자기 욕심에 의해 끌려가고, 잡히고, 속아 넘어가서 유혹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 잘 보세요. 유혹을 받는 사람은 속임을 당해 끌려가서 결국 죄에 넘어지고 덫에 걸립니다.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짐승이 미끼에 걸려 잡히고, 물고기가 미끼에 걸려 잡히는 이유는 미끼가 좋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매력적으로 보여서 끌리기 때문이죠. 그래서 미끼만 보고 달려든 겁니다. 그러나 미끼를 물었을 때 기대했던 즐거움 대신 붙잡혀 죽는 고통이 찾아옵니다. 유혹도 그렇습니다. 유혹은 눈앞에 아른아른 거리면서 즐거운 방종을 약속합니다. 만족스러운 한 입을 약속합니다. 더 큰 즐거움과 재미와 보상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그 약속에 속은 희생자를 덫과 바늘로 끌어들여서 치명적인 길로 이끕니다. 그런데, 뭐가 그렇게 한다고요?

뭐가 그렇게 합니까?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강하게 미끼 쪽으로 끌어당깁니까? 하나님입니까? 아닙니다. 사탄입니까? 아니죠. 사탄이 바늘에 미끼를 달고, 세상이 바늘에 미끼를 달고, 귀신들이 바늘에 미끼를 달고, 사람들이 바늘에 미끼를 달고, 많은 존재들이 바늘에 미끼를 답니다. 그러나 우리를 그 바늘로 끌어당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우리를 덫으로 끌어당깁니까? 무엇입니까? 욕심입니다. 바로 인간의 본성입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 안에는 악을 향한 욕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단순히 욕심에 끌린다고 말하지 않고, 자기 욕심에 끌린다고 했습니다.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자기 자신의 욕심.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작용하는 어떤 일반적인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 헤카스토스, 그러니까 각 개인이 저마다 가진 고유한 욕심의 방향과 성향을 뜻합니다. 바로 그 욕심이 각 사람을 미끼로 끌어당기는 요소입니다. 한 사람에게 강하게 작용하는 정욕이 다른 사람에게는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서 동성애로 빠져듭니다. 저에게는 전혀 견딜 수 없는 혐오의 대상인데 말이에요. 제 앞에서 이 동성애라는 미끼를 아무리 흔들어 봐도, 저는 반대 방향으로 갈 겁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성품이라는 말은 쓰고 싶지 않지만, 각자의 욕심이 가진 특정한 성품이 있어서 어떤 미끼와 덫은 다른 것들보다 우리를 더 강하게 유혹합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자기 욕심이라고 말하면서 이 문제를 개인화하고 있는 겁니다. 어떤 것을 즐기거나 얻고자 하는 각 영혼의 성향을 가리킵니다.

욕심이라는 단어는 ‘에피뒤미아(epithumia)’입니다. 중심이 되는 단어는 ‘뒤모스(thumos)’이고요, 여기에 전치사가 붙어 있는 형태입니다. 영혼의 욕망, 이런 뜻입니다. 영혼의 열망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데 있어서 문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사탄도 아닙니다. 귀신도 아닙니다. 세상이나 악한 사람들도 아닙니다. 잘 들으십시오. 악한 사람, 귀신, 그리고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 동안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결코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는 ‘에피뒤미아’, 욕망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끌림이 없었습니다. 바늘에 달린 그 어떤 미끼도 예수님을 조금도 끌어당기지 못했습니다. 보십시오. 문제는 외부에 있는 유혹이 아닙니다. 플립 윌슨(Flip Wilson)이 한 말과는 달리, 마귀가 당신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밖에 있는 유혹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배신자입니다. 이 놈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유혹에 넘어가는 이유는 인간의 본성 때문입니다. 각 사람 안에 있는 고유한 욕망 때문입니다. 각 사람의 영혼은 환경과 성장 배경과 개인적인 선택의 결과로 형성된 고유한 육신의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이 사람들로 신체 일부를 잘라내는 어리석은 일을 하게 할까요? 문제는 인간의 본성 안에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서 다른 만족을 주는 것을 갈망하는 성향이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 미끼를 물 수 있는 능력이 인간 안에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봅시다. “자기 욕심에 끌려”에서, ‘~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휘포(hupo)’입니다. 실제로 유혹하는 직접적이고 가까운 행위자, 그리고 죄에 대한 책임 있는 원인은 ‘욕심’, ‘정욕’입니다. 포고(Pogo)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적을 만나는데, 그 적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아주 정확한 말입니다. 매우 깊이 있는 말입니다. 적은 우리 자신입니다. 로마서 7장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이전에 살펴보았던 것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겠습니다. 로마서 7장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문제의 핵심을 말해 줍니다. 15절부터 보겠습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여기서 바울은 신자로서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하지 않고, 하기 싫은 것을 하고 있다.’ 익숙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다시 말해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고 있고, 옳은 것을 하고 싶고, 그른 것을 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으니 율법은 선하다, 이런 말입니다. 율법은 올바른 신호를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유혹에 넘어가는 주체는 진짜 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듭난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거하는 죄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문제를 이렇게 짚습니다. 내가 유혹받기 쉬운 것은 내 안에 거하는 죄와 관련이 있다, 육신과 관련이 있다. 바울은 1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그리고 23절에서는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그리고 25절에서 자신을 가리켜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구속을 받았고, 새 본성을 받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았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는 적이 있습니다. 바로 정욕이죠. 만족을 얻고자 하는 갈망이죠. 그 자체로는 선하다 할 수도 있는 것을 향한 갈망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욕심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선물이 비틀어지고 왜곡된 겁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잠이라는 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지나치게 탐해서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은 몸을 가리고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 옷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옷에 집착합니다. 사람들이 자기 옷을 봐 주는 데서 얻는 만족에 사로잡혀서 자신의 모든 재산과 삶을 옷에 쏟아붓습니다. 하나님은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거처, 사생활을 보장받는 공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조용히 삶을 꾸릴 수 있는 공간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인간에게 필요한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공간을 가지려고 집착합니다. 또 목마름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몸에 유익한 일을 하도록 주신 욕구이죠.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술에 빠져 인생을 망칩니다. 음식도 잘못이 없죠.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탐식에 빠집니다. 필요가 채워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필요를 왜곡해서 실제 필요를 훨씬 지나치게 만들기도 매우 쉽습니다. 성 문제도 역시 마찬가지죠. 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놀랍고 영광스러운 선물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왜곡될 때에 정욕에 이끌린 사람을 덫에 걸어 버리는 미끼가 됩니다.

유혹에 넘어가게 만드는 것은 사탄이 아닙니다. 귀신들도 아닙니다. 심지어 세상도 아닙니다. 오직 육신 안에 거하는 정욕일 뿐입니다. 정욕만만으로도 미끼가 달린 바늘을 향해 나아갑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대부분의 경우 그 근본적인 정욕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선물이 비틀어지고 어그러진 것입니다. 무엇인가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간 거죠. 그러므로 우리가 유혹을 받는 일과 우리가 죄를 짓는 일에 하나님의 책임은 없습니다. 악의 본성이 확인해 줍니다. 악은 하나님의 본성 안에서 어떤 부분도 차지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둘째로, 인간의 본성이 문제의 근원을 말해 줍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범인은 욕심입니다. 이제 야고보는 이 두번째 논점을 확장해서 세번째 증거로 우리를 이끕니다.

하나님께서 죄의 근원이 아니시라는 세번째 증거는 욕심의 본성입니다. 인간의 본성 안에서 욕심을 지목한 후에, 야고보는 이제 15절과 16절에서 매우 실제적이고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이 말씀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삶을 향한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야고보는 15절에 이르러서 사냥과 낚시의 비유에서 이제 출산의 비유로 전환하면서 욕심의 본성을 설명합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욕심을 어머니가 아이를 잉태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해서 아이를 낳는데 그 아이가 바로 죄이다. 그리고 죄는 태어나면 다른 아무것도 낳지 않고 무엇만 낳습니까? 죽음만 낳습니다. 정말로 매우, 매우 도움이 되는 설명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를 하나의 단독적인 행위나 여러 행위, 혹은 어떤 행동의 집합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기서 죄가 하나의 행위가 아니라 과정의 결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시겠습니까? 죄는 과정의 결과입니다. 무엇으로 시작하나요? 제가 기억하기 쉽게 D로 시작하는 단어들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욕망(desire), 에피뒤미아(epithumia), 정욕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간단하게 정리해 드리자면, 이 욕망(desire)이라는 단어 옆에 감정(emotion)이라고 적어 두세요. 욕망은 감정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느낌에서 시작합니다. 만족감을 원하는 느낌에서 시작합니다. 나를 만족시켜 줄 어떤 것을 얻고 싶다는 느낌입니다. 새로 나온 어떤 것, 눈앞에 매달려 있는 어떤 것, 보석 가게에서 보이던 것, 자동차 매장에서 보는 것, 쇼핑몰에서 보았던 것, 혹은 계속 쳐다보는 어떤 집에 대한 느낌입니다. 전적으로 감정의 문제입니다. 내 안에서 어떤 반응을 일으키죠. 갈망하게 만들죠. 바로 거기서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죄는 욕망에서 시작됩니다.

두번째 D는 속임수(deception)입니다. 속임수라는 단어 옆에 마음(mind)이라고 적으십시오. 마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감정에서 시작한 욕망이 마음에서 속임수로 이어집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패턴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14절에서 말하는 끌려 미혹된다는 말이 바로 이 말입니다. 바늘에 달린 미끼가, 덫에 놓인 미끼가 지성을 속입니다. 지성은 미끼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는 저것을 가질 권리가 있어. 좋아 보여. 나를 만족시켜 줄 거야. 내 필요를 채워줄 거야. 내 욕망을 해소해 줄 거야.

그러니까 감정(emotion)에서 시작된 욕망(desire)은 마음(mind)에서 속임수(deception)로 변화되고, 정말로 그것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믿게 합니다. 내 앞에 보이는 저것이, 아름답고, 만족을 주고, 욕구를 채워 줄 것이라고 믿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어떻게 됩니까? 욕심이 잉태합니다. 여기에서 세번째 D가 나옵니다. 계획(design)입니다. 이제 그 죄를 어떻게 실행할 것인지에 대해 계획을 시작합니다. 이것은 의지(will)에서 일어납니다. 감정(emotion)에서 마음(mind)으로, 그리고 이제 의지(will)가 작동합니다. 마음으로 이미 결론 내린 것을, 의지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거죠.

욕심이 잉태하면, 이때 계획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참고로 ‘잉태’라는 헬라어 ‘술라부사(sullabousa)’는, 문자적으로는 임신하다, 이런 뜻입니다. 욕심이 마치 미끼가 달린 갈고리의 음란한 유혹에 끌려 넘어가듯이 유혹을 받아 잉태되는 겁니다. 그 계획은 한 사람의 영혼의 태 안에 자리잡습니다. 감정에서 시작된 욕망, 만족감을 느끼고 싶다는 잘못된 욕망에서 시작합니다. 욕심이 마음으로 옮겨 가서, 충분히 소유할 권리가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합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고 나면 그 죄가 잉태됩니다. 죄가 마음에 잉태되는 것이죠. 여기서 네번째 D가 등장합니다. 불순종(disobedience)입니다. 행동이 일어납니다. 죄를 낳습니다.

어떤 아이든 태어나는 과정은 모두 동일합니다. 먼저 남자와 여자 사이에 욕망이 생기죠. 아이를 갖고자 하는 그 욕망이 먼저 생깁니다. 그 욕망은 곧 마음에서 작동합니다. 아이를 갖기로 결정합니다. 아이를 갖고 싶다고 마음을 정하죠. 그리고 나서 그 아이를 잉태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그 아이를 낳습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감정 속에서 욕망으로 잉태됩니다. 그 다음 마음에서 정당화됩니다. 그리고 의지 안에서 잉태되고, 행동으로 옮겨집니다. 순서가 이렇습니다. “죄를 낳고”라는 표현이 보이시나요? 여기에 사용된 단어는 ‘틱토(tiktō)’로, 낳다, 출산하다, 이런 뜻입니다. 행동에서 불순종을 실행합니다. 그러므로 불순종(disobedience) 옆에 행동(behavior)이라고 적으십시오. 감정에서 마음으로, 마음에서 의지로, 의지에서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감정은 마음으로 하여금 합리화하게 만들고, 합리화된 마음은 의지를 움직여 계획하게 만듭니다. 이제 아이가 태어나 행동이 이루어집니다. 이 모든 것은 욕망에서 시작됩니다. 이제 매우 실제적인 한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삶의 어느 지점에서 죄를 다루어야 할까요? 행동의 단계일까요? 아닙니다. 훨씬 앞선 단계에서 다뤄야 합니다. 욕망의 단계에서 다뤄야 합니다. 자신의 감정적 반응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만이 죄를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습니다. 혹은 감정적 반응이 일어날 때, 그 감정이 마음으로 넘어왔을 때 거기서 멈출 수 있을 만큼 거룩해진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만약 그것이 의지까지 가서 잉태되면, 반드시 태어납니다. 잉태된 아이는 반드시 태어납니다. 그 아이는 반드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에서 맨 마지막 단계에서만 죄를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감정이 미끼가 달린 바늘에 노출되도록 허용한다면, 이미 문제가 시작된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 악한 사회의 모든 것이 여러분의 감정을 공략합니다. 모든 극적인 요소, 영화와 텔레비전 책, 음악, 옷, 우리의 주의를 끄는 모든 매혹적인 장면과 소리, 그런 것들은 모두 처음부터 감정을 사로잡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유혹하기 위한 화려한 겉치레일 뿐입니다. 텔레비전 광고만 봐도 정말 놀라울 정도입니다. 자동차를 파는 방식을 한번 보십시오. 그 자동차가 어떤 기계인지, 구조가 어떤지,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우스꽝스러운 연출, 요란한 음악,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미래 지향적인 이미지들뿐이죠. 아니 도대체 그게 자동차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겨냥하고 있습니까? 바로 여러분의 감정입니다. 감정입니다. 모든 것이 이 감정에서 시작됩니다. 바로 거기에서 시작됩니다.

한 여인이 향수를 뿌리고 지나가면서 흔적을 남깁니다. 지성을 겨냥한 것이 아니죠. 감정을 겨냥한 것이죠. 우리는 감정의 차원에서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두번째로는 마음의 차원에서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마음이 그리스도께 사로잡혀야 하는 겁니다. 얼마나 위대한 진리입니까? 모든 생각과 마음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합니다. 보호받지 못하고, 통제되지 않고,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은 마음은 악한 이미지로 가득 차게 될 겁니다. 자, 그러니까 우리는 감정을 통제해야 하고, 마음을 통제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바로 거기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 감정이 하나님께 드려지기를 원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정말 놀라운 축복이 있습니다. 바로 좋은 기독교 음악입니다. 저는 음악을 참 사랑합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으세요? 음악은 기본적으로 인지적인 요소도 많지만, 그보다 훨씬 더 감정적인 영역에 속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음악을 통해서 감정적인 즐거움을 누리고, 노래하는 영혼으로 음악이 주는 감정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지 모르겠습니다. 또 아이들이 자라면서 좋은 기독교 음악을 배우게 되면, 아이들의 감정적 반응과 기쁨과 슬픔이 세상의 음악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음악에 맞추어 형성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는 감정을 다루는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에서 우리를 끌어내리는 것에 감정을 계속 노출시키면서도 아무 대가를 치르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큰 대가를 치르고 맙니다. 그리고 마음의 문제는 매우 단순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새로워진 마음이 필요합니다. 위의 것에 마음을 두고 땅의 것에 두지 않는 그런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 안에 풍성히 거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마음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여러분의 마음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마음을 채우고 있습니까? 만약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받고 있다면, 죄는 아주 초기 단계에서 멈추게 될 겁니다. 만약 여러분의 감정이 하나님의 성령의 다스림 아래 있고, 여러분의 느낌이 성령님께 사로잡혀 있다면, 죄는 시작되는 지점에서 차단될 겁니다. 그러나 감정을 풀어 놓고 세상이 던져 주는 모든 것에 노출시키고, 아무 것이나 다 드나들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깊이 갈아엎고 경작하지 않는다면, 죄를 잉태하게 되고 결국 죄를 낳게 될 겁니다. 그리고 15절에서 야고보가 덧붙이는 말을 기억하십시오. 죄가 장성한즉, 여기 사용된 단어는 ‘아포퀴에오(apokueō)’로, 출산하다라는 뜻입니다. 앞서 사용된 틱토(tiktō)와 동의어입니다. 죄가 태어나고, 죄가 태어나면 그것이 낳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죽음이죠. 죄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살인자로 태어납니다. 얼마나 강력합니까? 감정이 생기고, 감정에서 결정이 나오고, 결정에서 의지가 잉태되고, 그 다음에 행동이 나옵니다. 이렇게 출산의 여정이 끝까지 이어지다가 마침내 태어난 아이가 살인자입니다.

죄는 살인자입니다. 죄의 삯은 무엇입니까? 사망입니다. 영적 사망은 영혼이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이고, 육체적 사망은 영혼이 몸과 분리되는 겁니다. 영원한 사망은 영혼과 몸이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겁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특별히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을 구분하여서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죄가 항상 낳는 것은 죽음뿐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자에게도 육체적 죽음이 될 수 있습니다. 신자도 육체적으로 죽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과 요한일서 5장 16절이 보여주듯이, 온갖 종류의 사망이 죄로부터 흘러나옵니다. 그러므로 유혹이 어떤 만족스러운 행동을 삶 속에 가져온다는 생각은 거짓입니다. 우리의 욕심은 죄를 낳을 뿐이고, 모든 죄는 오직 사망만 가져올 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1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더 이상 미혹되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 사용된 헬라어 ‘플라나오’는 길을 잃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닌다는 의미입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요점은 이겁니다.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탓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그냥 무작정 살아가면서 아무 생각 없이 다 받아들이고는 하나님을 탓하지 말라는 겁니다. 자기 안에 원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겁니다. 그 원수는 자기 자신의 타락한 본성이죠. 자기 자신의 욕심이죠. 그 원수는 반드시 제대로 다루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감정을 유혹하는 모든 것에 자신을 그대로 노출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들에 마음이 사로잡히도록 내버려 두면 안 됩니다.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알고 속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문제 발생 지점에서 다루어야 합니다. 시작 지점에서 멈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들로 마음을 채우십시오. 그러면 유혹이 감정과 결합해서 의지 안에서 죄를 잉태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감정이 통제되거나 마음이 통제되면, 이 둘 중의 하나만이라도 통제되면 죄를 잉태할 짝이 사라집니다. 악의 본성, 인간의 본성, 욕심의 본성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로 유혹하실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제 직접적인 증거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정말 놀랍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꼭 붙드십시오. 누구도 죄에 대해 하나님을 탓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각종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무엇이 내려옵니까? 선한 것뿐입니다. 온전한 것뿐입니다. 우리는 죄를 낳는 본성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본성은 오직 선만 낳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결코 죄를 만들어 내실 수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은 오직 좋은 것들만, 선한 것들만 쏟아 부어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만족을 얻기 위해서 미끼가 달린 바늘을 따라가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가 만족하도록 모든 것을 부어 주고 계신데 말이에요. 하나님은 악을 결코 만들어 내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죠. 또 하나님은 언제나 좋은 것만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선하심이 은혜로 주어지고 있는데도, 미끼가 달린 바늘이나 덫에 이끌리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우리 육신은 더러운 물이 고여 있는 우물과 같습니다. 그런데 왜 그 우물에서 물을 마시려고 합니까?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데 말이에요. 하나님은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주십니다. 여기서 “온갖”, “모든” 이렇게 표현이 두 번 반복됩니다. 모든, 모든입니다. 전부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선물”이라는 말도 두 번 나옵니다. 하나는 도시스(dosis), 주는 행위 자체를 뜻하고, 다른 하나는 도레마(dōrēma), 주어진 선물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선물, 우리가 받는 모든 선물은 모두 선하고 온전합니다. “선하다”는 말에는 비교급이 없습니다. 더 선하다, 가장 선하다, 이런 것 없습니다. 그냥 선한 겁니다. 완전합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충분합니다. 온전합니다. 포괄적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선물은 온전하고 유익하고 절대적으로 완전합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에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라고 하신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만약 여러분의 영혼 안에서 참으로 옳고 선한 것을 구하고 하나님께 간구한다면,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타락한 아버지들조차도 사랑하는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누가복음 11장 1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많은 것을 주시는데, 왜 욕심에 이끌려 미끼가 달린 바늘과 덫을 향해 달려가겠습니까? 하나님은 끝없이 공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온갖, 모든 좋은 선물과 온전한 선물을 주십니다. 어떤 여인이 평생에 처음으로 바다를 보고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렇게 바다의 물처럼 충분한 것이 있다니 참 놀랍다.” 하나님의 복을 바라볼 때, 우리는 바로 그렇게 충분한 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17절로 돌아가 보십시오. 모든 좋은 은사와 모든 온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내려옵니다. 전부 위로부터 옵니다. 전부 위에서 흘러내려옵니다. 그런데 왜 죄의 미끼에 손을 대겠습니까? 왜 덫 안으로 스스로 기어들어 가겠습니까? 모든 좋은 선물과 모든 온전한 선물이 하늘에서 비처럼 우리 위로 쏟아지고 있는데 말이에요. 사탄은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숨기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좋은 것을 주지 않으신다, 네가 직접 그 만족을 붙잡아야 한다, 네가 직접 최고의 것을 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최고의 것을 감추고 있다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하와는 그 거짓말을 믿었습니다. 욕심이 잉태하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죽음이라는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아이는 바로 죽음입니다. 오늘 오후에 떠오른 장면이 있습니다. 사무엘하 12장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끔찍한 죄를 범한 후의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나단이 다윗에게 나아옵니다. 7절입니다. “당신이 그 사람입니다. 당신이 죄인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했습니다. 당신이 간음자이고, 당신이 살인자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여호와의 말씀을 다윗에게 전합니다.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다윗아, 내가 무엇이든 주었을 텐데, 무엇이든 다 주었을 텐데, 왜 내가 금한 것을 붙잡았느냐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선한 것, 모든 온전한 것을 기쁨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위로부터 내려온다는 표현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빛들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참으로 위대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부르던 고대 유대인들의 표현 방식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빛들이란 해와 달과 별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빛들의 아버지이십니다. 천체들의 창조주이십니다. 그렇다면 왜 이 호칭을 사용하고 있을까요? 야고보의 비유와 정확히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빛들의 아버지이시지만,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십니다. 매우 생생한 표현입니다. 정말로 생생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별과 모든 천체를 창조하신 분이지만, 그 천체들과 같지 않으십니다. 그것들은 변하죠. 바뀝니다. 어두워졌다가 밝아지고, 빛을 비추다가 그림자를 만듭니다. 낮에만 있고 밤에는 사라집니다. 또 밤에만 있고 낮에는 사라지기도 하죠. 우리에게 주는 유익도 왔다가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 선하신 빛, 은혜의 빛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 ‘변함’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파랄라게(parallagē)’인데요, 영어로 패럴랙스(parallax), ‘변위’라는 단어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상태로 옮겨 가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림자가 생기지 않습니다. 어두워지는 일이 없습니다. 요한일서 1장 5절은 하나님께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고 했습니다. 말라기 3장 6절에서는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적 은사를 주지 않으시는 날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적 빛을 주지 않으시는 날도 없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오는 선한 것들의 흐름은 결코 변하지 않고,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다윗아, 다윗아,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솔직히 말하면 배부른 물고기는 미끼를 물지 않습니다. 이해하시겠어요? 하나님의 자원으로 충만하다면, 도대체 왜 그 미끼가 달린 바늘을 탐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선물로 가득 여러분을 채우십시오. 모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나아가 마음을 은혜의 노래로 조율하십시오. 끊임없이 흐르는 긍휼의 강물은 가장 큰 찬양을 부르도록 만듭니다. 긍휼의 흐름은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가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막을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흘러내리는 빛을 끊을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마귀의 미끼를 물지 마십시오. 잉태하고 태어나 결국 죽음을 가져오는 아이를 낳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오직 선한 것들만, 모든 선한 것을 주십니다. 그렇다면 죄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증거가 하나 더 있는데, 오늘은 언급만 하고 다음 시간에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마지막 증거가 하나 더 있습니다. 거듭남의 본성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다음 주에 자세히 다룰 겁니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잘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로 유혹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짓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자기와 같은 존재가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의 본성 자체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로 이끄시는 일을 배제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욕심은 죽음을 낳지만, 하나님은 생명을 낳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악을 행하도록 유혹하지 않으시고, 선을 행하도록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첫 열매로, 하나님께 사랑받는 소유로 삼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죄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를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위대한 성도였던 어거스틴은 회심하기 전에 창녀와 함께 살았습니다. 어거스틴이 놀랍게 구원받은 후에 어느 날 길을 걷고 있는데, 그 창녀가 어거스틴을 보았습니다. 어거스틴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계속 걸어가기만 했습니다. 창녀를 봤지만 앞만 보고 걸어갔습니다. 창녀가 계속해서 어거스틴을 부르면서 뒤따라갑니다. 마침내 창녀가 말합니다. “어거스틴, 나예요.” 그때 어거스틴이 대답합니다. “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지난날의 내가 아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셔서 자신의 소유인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는 은혜의 수단을 사용할 때 악을 이길 수 있는 새로운 내가 있습니다.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닌 영적 싸움의 무기가 있습니다. 기도, 하나님의 말씀 연구, 절제된 마음이죠. 죄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멈추게 하는 영적 책무의 힘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제가 아마도 시간을 너무 많이 쓴 것 같습니다. 너무 중요한 내용이어서 그랬습니다. 자, 이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저녁 실제적이고 근본적인 진리를 배우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삶 속에서 주시는 승리를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 승리를 통해 우리의 육신이 정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행하면 육신의 욕망을 이루지 않게 된다는 약속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의 풍성함으로 채우면 우리의 행동을 다스릴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드립니다. 성령님의 사역 안에 있는 이 놀라운 소망에 감사합니다. 우리가 타락했음을 인정합니다. 유혹받기 쉽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복되신 성령님의 능력 안에 있는 승리로 인해 기뻐합니다. 성령님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감정과 마음의 다스림을 받는 이에게 주시는 승리를 찬양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런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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