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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야고보서 1장을 보겠습니다. 야고보서 1장 2절부터 12절까지 읽겠습니다. 야고보서 1장 2절부터 12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G.K. 체스터턴(G.K. Chesterto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고난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우리를 깨끗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이 과연 진짜인지를 시험해 볼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역경보다 더 좋은 시험은 없습니다. 슬픔과 시련의 시험이죠. 고난을 대하는 태도는 그 사람의 믿음을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고난이 찾아오면 우리의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야고보서의 목적이 우리 믿음이 살아 있는 믿음인지를 시험하는 것이라면, 야고보가 가장 먼저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시련입니다. 시련은 여러분의 믿음이 살아 있는 믿음인지 죽은 믿음인지, 참된 믿음인지 흉내 낸 믿음인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인지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인지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은 시련을 겪으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타락한 죄인으로서 타락하고 죄된 사회 한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끊임없는 고난을 겪습니다. 고난은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설령 떠난다 해도 아주 잠깐일 뿐입니다. 욥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욥기 5장 7절입니다.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불 같아서 불꽃이 튀듯 고난을 낳는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타락이라는 불이 자연스럽게 고난이라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말입니다. 또 욥기 14장 1절에서 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분명히 우리 모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어떻다구요?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

시편 22편 11절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또 이사야 8장 22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세상에 임한 심판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또 인간 지혜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보여주는 전도서를 읽어보셨다면, 2장에 나오는 이 익숙한 말씀을 기억하실 겁니다.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미워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에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로다.” 그리고 2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고난, 고난, 고난, 헛됨입니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인생은 고난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리스도인에게,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도 고난은 끊임없이 마주해야 하는 삶의 현실입니다. 매우 혼란스러운 이 세상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시련과 마주하며 살아갑니다. 심지어 나름대로 나만의 작은 세상을 정리해 놓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누군가가 그 안으로 들어와서 모든 것을 망가뜨려 버립니다. 최근에 아이들을 집에 초대하신 적이 있다면 아마 잘 아실 겁니다. 아무리 잘 꾸려놓고 보호를 해 놓아도 아이들은 반드시 그 질서를 무너뜨려 버리죠. 삶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아주 작은 예입니다. 우리는 완전한 평안과 안락함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 해보지만, 외부에서든 내부에서든 고난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시편을 보십시오. 이번주에 제가 시편을 다시 살펴보면서 새삼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고난에서 건져 달라고 반복해서 간구하지만, 그 고난 자체를 없애 달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할 뿐입니다. “고난을 없애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저를 건져 주십시오.”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는 결혼을 “생명의 은혜”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디저트 위의 휘핑크림 같은 겁니다. 인생에서 가장 좋은 선물이라는 뜻이죠. 그러나 결혼조차도 예외는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7장 2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혼자 살아가는 것도 쉽지 않은데, 다른 사람과 함께 살면서 자기 뜻대로 살아가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반드시 고난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좋은 것에도 고난은 존재합니다.

예수님도 고난을 피하실 수 없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고난은 예상되는 일입니다. 어디에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으로 탄식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33절에 기록되어 있고, 요한복음 12장 27절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요한복음 13장에도, 아마 20절이나 21절쯤일 겁니다, 다시 한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괴로움이 무엇인지 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도 실제로 근심하셨습니다. 바울도 고린도후서 4장 8절에서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예상합니다. 가정에서의 고난을 예상합니다. 친구로부터 겪는 고난을 예상합니다. 직장에서의 고난을 예상합니다. 학교에서도 그렇습니다. 경제적인 영역에서도 고난을 예상합니다. 비판으로 인한 고난을 예상합니다. 질병과 연약함이라는 형태로 찾아오는 고난도 예상합니다. 심지어 우리와 아주 가까운 사람들에게 죽음이 임할 때, 그 죽음이라는 형태로 고난이 우리 삶에 들어오는 것까지도 우리는 예상합니다. 고난은 박해를 통해서도 찾아옵니다. 인생에는 늘 고난이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혼자만 이런 일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주변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하신 겁니다. 모두가 똑같은 상황 속에 있습니다.

야고보는 사실 이런 말을 한 겁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진짜라면, 반드시 고난 속에서 그 믿음이 드러나야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고난을 당할 때에 아무 소용이 없다면 믿음이 뭐가 쓸모가 있겠습니까. 정말로 필요한 상황에서 믿음을 발휘할 수 없다면 애초에 필요하지 않은 겁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모든 일이 잘될 때만 발휘되는 것이라면, 그 믿음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믿음은 모든 것이 무너질 때 우리를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난 속에서 믿음으로 서 있는지를 시험해 보면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trials)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여기서 ‘여러 가지’라는 말은 헬라어로 ‘포이킬로스(poikilos)’인데, ‘다채로운, 여러 색깔의, 다양한’ 이런 뜻입니다. 고난(trouble)의 ‘개수’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종류’가 있다고 강조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많이 겪을 것이라기보다는, 온갖 종류의 고난을 겪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원래 이 단어는 ‘여러 색깔의’ 이런 뜻입니다. 크기도 다르고, 모양도 다르고, 형태도 다른 온갖 종류의 고난이 찾아온다는 뜻입니다. 가정에서 오는 고난, 가족 관계에서 오는 고난, 수많은 실망을 가져오는 고난 등등등, 말 그대로 모든 종류의 고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시험’ 이라는 단어입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익숙한 단어인데요, 헬라어로 ‘페이라스모스(peirasmos)’입니다. ‘시련’을 뜻하기도 합니다. 기본적으로 고난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고, 평온함을 깨뜨리고, 평화와 안락함과 기쁨과 행복을 무너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야고보가 이 편지를 쓸 당시에 구체적으로 어떤 시험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 가운데 어떤 시험이 있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모르는 게 오히려 좋습니다. 왜냐하면 인생 자체가 너무나 다양한 시험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야고보 당시의 수신자들뿐 아니라 오늘의 우리 모두에게도 매우 폭넓게 적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가 ‘여러 가지 시험’, ‘다채로운 시험’, ‘다양한 시험’이라고 한 것을 보면, 시험이 온갖 형태로 찾아온다는 사실을 이미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시험을 의미하는지는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험’이라는 단어가 반드시 악한 일로 이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꼭 ‘유혹(temptation)’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떤 점에서는 킹제임스 성경에서 ‘유혹’으로 번역한 것이 다소 아쉽습니다. 어떤 판본에서는 이 단어를 ‘시험(trials)’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2절에 나오는 같은 단어가 킹제임스 성경 12절에서는 ‘유혹’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번역자들이 이 부분에서 약간 혼란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단어는 말 그대로 ‘시험’을 뜻합니다. 악한 일로 이끌어들이는 유혹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여기서도 문맥을 살펴보면, 악한 일로 이끈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게 아니라, 믿음을 입증하고 강화하기 위한 어려움(difficulty)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시험 자체는 악으로 이끄는 유혹이 아닙니다. 단지 삶에 찾아오는 어려움을 뜻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를 드러내는 시험입니다.

덧붙여 말씀을 드리자면, 헬라어 사전을 집필한 몰튼과 밀리건(Moulton/Milligan)이라는 뛰어난 학자들은 ‘페이라스모스’가 언제나 ‘시험’을 뜻한다고 말했습니다. 늘 시험을 뜻합니다. 이 단어는 일상 헬라어로는 사실 매우 드물게 사용이 됐습니다만, 성경에서는 아주 자주 사용됩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시험이 영적 삶에서 너무나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페이라스모스(peirasmos)’의 동사형인 ‘페이라조(peirazō)’는 ‘누군가를 시험하다’, ‘시험대에 올려놓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핵심은 결과가 선하냐 악하냐가 아니라, 시험 그 자체에 있습니다. 시험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에 상관없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시험을 받는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찾아오는 모든 고난과 시련은 크기에 상관없이 믿음을 시험합니다. 시험을 통과하거나 혹은 실패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 점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시험을 통과하면 시련으로 남습니다. 그러나 시험에 실패하면 ‘유혹’으로 바뀝니다. 그 결과가 죄로 이어진다면 유혹이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나 승리로 끝난다면 시험에 통과한 것이 됩니다. 유혹은 여러분을 죄로 이끌어 넘어지게 합니다. 시련은 여러분을 강건하게 해서 서게 합니다. 그러므로 시련은 믿음의 진정성과 강도를 드러내기 위한 시험입니다. 시련은 한편으로는 여러분의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를 드러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믿음이 얼마나 강한지를 드러냅니다. 시련을 통과하면서 여러분이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여러분이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지,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인지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얼마나 강한지도 함께 드러냅니다.

자, 이제부터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야고보서를 두고 행함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책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야고보는 행함만큼이나, 아니 행함보다도 먼저 믿음을 매우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야고보는 균형을 잃지 않았습니다. 행함만이 아니라 믿음에 대해서도 매우 분명하고 강하게 말합니다.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같은 서신이다”라고 말하면서 행위로 의를 얻는 사상을 가르친다고 여겼던 마르틴 루터는 사실 핵심을 놓친 겁니다. 야고보는 본질적으로 믿음을 매우 강하게 강조합니다. ‘행함은 그 믿음이 드러나는 한 가지 표현일 뿐이고, 참된 믿음을 시험하는 하나의 증거일 뿐이다’라고 한 겁니다.

이제 한 가지를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내적인 시련과 외적인 시련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구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 삶을 한번 돌아보면, 모든 외적인 시련은 결국 뭐가 됩니까? 반드시 내적인 시련이 됩니다. 제가 경험한 어떤 시련도 끝까지 외부에만 머문 적이 없습니다. 만일 외부에만 머문다면, 사실 그게 그리 큰 시련도 아니죠. 시련이 진짜 시련이 되는 순간은 제 안으로 들어와서 제 마음속에서 곪기 시작할 때죠. 그러니까 야고보는 “이 시련은 외적인 것이고, 나중에 다룰 유혹은 내적인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시련은 외적이면서 동시에 내적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이런 구분이 없습니다. 그저 ‘시련’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삶은 바로 이런 시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시련은 실망, 좌절, 오해, 이루어지지 않은 꿈, 채워지지 않은 기대, 큰 상실, 깊은 외로움, 두려움, 비판, 박해, 갈등, 이런 형태로 찾아옵니다. 처음에는 외부에서 시작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머지않아 반드시 안으로 들어옵니다. 내적인 시련이 되죠.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시련에는, 3절을 보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한 목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참된지 아닌지를 보게 하고, 그 믿음이 얼마나 강한지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시련은 참된 믿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믿음의 진정성을 시험하는 도구가 되고, 동시에 그 믿음의 강함을 시험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험은 불신자에게도, 신자에게도 모두 적용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기억하십시오. 야고보서의 목적은 믿음을 시험하는 데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시련을 겪을 때에는 그 시련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그 시련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통해서 여러분의 믿음이 어떠한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시련을 통해 바로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삶으로 시련을 인내하며 지나가고,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믿음이 참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여러 해 전에 야고보서를 주석한 로버트 존스톤(Robert Johnstone)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고보서는 견고하고 지성적인 진리의 확신 위에 서 있지 않은 공허한 신앙 고백이나, 막연하고 몽상적인 감정에 불과한 신앙은 고난이라는 불 속에서 모두 타 버리고 말 것임을 보여 준다. 그러나 참된 믿음이 있는 곳에는, 환난이 다른 어떤 상황보다도 죄와 그 결과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마음을 자기 의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킨다. 연약함의 근원은 하나님 앞에서 진지하게 씨름하는 기도로 이끌고, 그렇게 하나님의 붙드시는 은혜를 경험하면 장래를 향한 소망이 더욱 강건해지고 기쁨으로 가득해진다.” 매우 밀도 있고 무게 있는 말입니다. 핵심은 이겁니다. ‘거짓된 그리스도인을 시험하면 필연적으로 무너지고 타 버린다. 그러나 참된 신자를 시험하면, 자신의 연약함 앞에서 절망하고, 자신의 연약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도록 기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련은 믿음을 흉내 내는 가짜 신앙을 태워 버립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에 대한 시험은 고통을 가져옵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깨닫게 하는 고통입니다. 자기 의로부터 돌아서게 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의지하게 합니다. 그러니까 고난, 곧 환난은 살아 있는 믿음을 시험하는 야고보의 첫번째 시험입니다. 지금까지 야고보가 이 단락을 어떻게 시작했는지 살펴봤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이 단락을 어떻게 마무리하는지를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12절로 내려가 봅시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말하자면 팔복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이 팔복을 말씀하신 것과 똑같은 맥락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듯이, 팔복과 산상수훈이 야고보서를 밑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야고보서 전체에서 확인하시게 될 겁니다. 야고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시련(trial)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여기서 야고보는 시험을 통과한 사람이 받는 복을 선언합니다. “복이 있다”라는 말은 행복하다, 이런 뜻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만족한다, 이런 뜻입니다. 더 나아가면 내적인 기쁨으로 충만하다, 이런 뜻입니다. 내적인 기쁨으로 충만한 상태, 영혼이 기쁨으로 황홀한 상태를 말합니다. 실제로 야고보서 5장 11절에서도 같은 말을 합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그리고 이어서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이렇게 말합니다. 시험을 참고 끝까지 통과한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시련이 없어서 얻는 행복이 아닙니다. 시련을 이겨서 얻는 행복입니다.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갈등을 전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누리는 피상적인 행복이 아닙니다. 싸워서 이긴 사람이 누리는 벅찬 기쁨입니다. 구경꾼의 행복이 아닙니다. 참여자의 행복입니다. 시험을 참는 사람은 행복하고, 만족하고, 내적인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죄로 유혹받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만약 12절이 죄의 유혹을 참는 문제를 말하는 것이라면 “참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유혹을 물리치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렇게 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 이렇게 말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2절과 3절도 똑같이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그리고 4절에서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라고 합니다. 따라서 12절이 2절과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 두 절은 그 사이에 있는 말씀을 양쪽에서 감싸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전체 단락은 시험을 이기는 승리에 관한 것입니다. 2절과 12절에서 같은 주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합니다. 3절에서 “너희 믿음의 시험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이라고 한 것과 정확히 같은 내용입니다. 12절에서 말하는 “참는 자”는 인내하며 승리로 견디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를테면 “아, 이를 악물고 버텼다, 숨을 참고 그냥 참아냈다” 이런 식으로 참는 게 아닙니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수동적인 인내가 아닙니다. 간신히 살아남는 수준의 그런 인내가 아닙니다. 이 단어는 승리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헬라어로 ‘휘포메노(hupomenō)’입니다. 현재 능동 직설법입니다. 인내하며 승리할 때까지 끝까지 서 있는 것을 말합니다. 요지는 단순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시험을 통과해서 승리하면, 다시 말해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버리지 않는다면 참된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됩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누구라도 쉽게 이런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인가 하니 교회에 나와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세례도 받습니다. 그런데 인생에 문제가 닥치면 없어져 버립니다. 정말로 사라집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관계에서 큰 상처를 받습니다. 마음에 두었던 사람에게 거절당할 수도 있고, 어떤 이유에서든 깊이 상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교회에 나오다가 큰 시련을 겪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나 가족을 잃으면 그 고통이 너무 커서 결국 하나님을 향해 주먹질을 하며 떠나 버리죠.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시련 가운데서 끝까지 견디는 인내야말로 살아 있는 믿음의 증거입니다. 12절에서 야고보는 그렇게 인내하는 사람들을 “주를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구원에 관하여 주님을 향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지의 문제입니다. 단순한 거래가 아닙니다. 우리의 태도가 어떻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한 번 구원받고 나면 어떤 태도로 살아도 괜찮다는 식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깊이 사랑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을 정의하는 놀라운 표현으로 “주를 사랑하는 자들”이라는 말씀에 밑줄을 그어 두십시오. 요한일서 2장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세상을 사랑하든지 둘 중 하나이지, 둘 다 사랑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아주 기본적인 진리입니다. 더 나아가 요한일서 2장 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요한의 말은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세상을 사랑하느냐라는 시험이 왔을 때, 세상을 사랑해서 떠나갔다는 겁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애초에 우리에게 속한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시련 가운데서 참된 사랑이 드러납니다. 베드로전서 1장을 잠깐 보겠습니다. 베드로도 같은 내용을 말합니다. 6절에서 여러 가지 시험, 그러니까 야고보가 말한 여러 시험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7절에서 야고보의 생각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 것처럼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다시 말해서 베드로는 우리 믿음이 시험을 받는 것은 믿음의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시험을 받아 참된 것으로 드러나야 주님이 오실 때 그 앞에 설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8절에서 참된 믿음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그 다음에 뭐라고 말합니까? “사랑하는도다...” 다시 똑같은 개념입니다. 믿음의 시험을 통과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편 기자의 메아리를 듣습니다. 아마 시편 97편일 겁니다. 10절입니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여호와를 사랑하는 자들”로 규정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의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어느 한 시점에서만 진리를 믿게 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랑을 시험 가운데서도 굳게 붙들고 가는 사람입니다. 인간적인 사랑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 문제가 없을 때만 유지되는 사랑이라면, 그런 사랑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요점은 아주 분명합니다. 주를 사랑하는 자들이란 어떤 시험이 와도 사랑으로 하나님을 붙드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믿음이 참됨을 증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반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어떻게 합니까?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한복음 14장 15절, 요한복음 15장 9절부터 10절, 요한일서 2장 5절부터 6절, 요한일서 4장 16절, 요한일서 5장 1절부터 3절까지 모두 똑같은 말을 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진정성은 사랑 위에 세워집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참된 것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험을 거쳐야 합니다. 그리고 참된 사랑이라면 반드시 그 시험을 통과하고 끝까지 순종합니다. 이제 다시 12절로 돌아가서 조금 더 살펴봅시다.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로서 우리는 반드시 시험을 받게 됩니다. 그 시험을 통과한다면 비록 씨름하고 의심할지라도 우리의 믿음은 무너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붙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결국 복을 받습니다.

이 개념을 정리해 보면 시험의 목적은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믿음의 질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계속 말씀드렸듯이 시험은 여러분이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드러내기 위서 옵니다. 12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문자적으로는 시험을 거쳐 인정받게 되었을 때, 이런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시험과 어려움과 환난이 닥쳐올 때에, 죽음을 겪을 때에, 외로움을 겪을 때에, 상실감을 느낄 때에, 문제가 생길 때에, 이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진정한 믿음을 시험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인정받은 자로 세우고 계십니다. 불에 넣는 것처럼 여러분을 시험하셔서 찌꺼기는 태워버리고 참된 믿음은 밝게 빛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시험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는 사람들, 시험이 계속되어도 믿음이 무너지지 않는 사람들은 산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산 믿음의 소유자들입니다.

이제 잠시 다른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이 매우 중요한 진리, 매우 중요한 신학적 사상을 이야기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성도의 견인(the perseverance of the saints)”이라는 표현, 한번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아주 익숙하고, 참으로 아름다운 신학적 표현입니다. 이 개념에 대해서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도의 견인”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성도의 견인을 믿는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참된 성도들은 결코 자신의 믿음을 버리지 않고, 모든 시련 가운데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믿으며 견딜 수 있음을 믿는다, 이런 뜻입니다. 성도의 견인입니다. 다시 말하면, 잠시 믿다가 중간에 포기하는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끝까지 인내합니다. 그 어떤 시련도 믿음을 포기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참된 성도들에게는 언제나 피할 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참된 성도들은 반드시 끝까지 견딥니다. 이것은 매우,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왜 중요한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자라면서 신자의 “영원한 안전(eternal security)”이라는 표현을 자주 들었습니다. 여러분도 들어보셨습니까? 우리는 영원한 안전을 믿습니다. 좋은 표현입니다. 사실 저는 이런 표현도 많이 들었습니다. “구원을 받았다면,” 여러분도 아시죠, “그 구원은 영원하다.” 맞습니다. 구원을 받았다면 그 구원은 영원합니다. 이 말은 아주 흔한 표현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믿고 싶어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저는 “구원을 받았어도 영원히 그런 것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해보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런 구원은 원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았다면 그 구원은 영원하다”라고 강조하는 것 자체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 말의 의미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매우 불안해합니다. “잠깐만요, 구원을 받았다면 그 구원은 영원하다는 말은, 무슨 짓을 하든지 하나님이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을 붙들고 있으셔야 한다는 뜻 아닙니까?” 이렇게 말이죠. “영원한 안전”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붙드시는 능력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약속 안에서 안전합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 안에서 안전합니다. 성경은 이 점을 분명하게 강조합니다. 우리는 안전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안전합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조금만 더 풀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 때문에 안전합니다. 요한복음 10장을 기억하십니까? 영원한 안전을 다룰 때 흔히 인용되는 말씀이죠. 요한복음 10장 28절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왜 그렇습니까?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으로 영원히 안전합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다시 말해서, 영원한 안전은 하나님의 약속이자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로 인해 안전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중보하고 계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면서 그 죄값은 이미 예수님이 치르셨다고, 따라서 용서를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단 한 사람도 버리지 않으십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예수님께 주신 사람들 모두를 위해 기도하시고, 구원의 충만함에 이르도록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반드시 응답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22장에서는 베드로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베드로는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기도로 안전했던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중보자이시며, 대언자이십니다.

세번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 그리스도의 기도뿐만 아니라, 성령님의 임재로도 안전합니다. 성령님의 임재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며, 장차 올 영광에 대한 보증이 되십니다. 에베소서 1장은 우리가 성령의 보증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임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로부터 오는 영원한 안전을 강조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히 안전하게 붙들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 중에 그 누구도 결코 버려지지 않습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영원한 안전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과 우리의 안전은,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흠 없이 보전되기를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이어서 2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에 근거해서 안전합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배교로부터 보호하십니다. 탈선으로부터 보호하십니다. 그리고 모두 하늘나라로 인도하십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들어보십시오. 시편 31편입니다.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37편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37편 2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또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를 받으나...” 참으로 놀랍습니다. 시편 41편 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시편 97편 10절입니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시편 116편 6절은 “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참 감사한 말씀 아닙니까?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또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로마서 16장 25절입니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디모데후서 1장 12절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이 말씀 기억하십니까? 내가 의탁한 것을 것을 지키실 수 있다고 합니다. 무엇을 맡겼습니까? 영혼이죠. 디모데후서 4장 18절입니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베드로전서 1장 5절입니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유다서 1절입니다. “...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유다서 24절입니다.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영원한 구원의 안전에 대해서 성경은 매우 강력하게 말합니다. 하지만 덧붙일 것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또 다른 한 면이 있습니다. 또 다른 면입니다.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인간의 관점으로 보면 우리 역시 끝까지 견뎌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련의 한가운데서 믿음을 내던져 버린다면 하나님께 붙들려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하나님이 행하시는 역사와 인간이 걸어가는 길 사이에 있는 명백한 역설을 만납니다. 우리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기 때문에 구원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믿음으로 행하지 않아도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죠?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 때문에 안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내하지 않아도 안전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안전은, 성령님의 능력이 참된 신자에게 힘을 주셔서 모든 시련 가운데서 믿음 안에 머물며 견디게 하시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아주 탁월한 신학자인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는 인내(perseverance)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인내란 신자 안에서 성령께서 지속적으로 역사하셔서 마음속에 시작된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을 계속 이어 가며 마침내 완성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몫은 견디는(endure) 것, 참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마태복음 24장 13절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조금 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제 관점을 바꿔 보니 모순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순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는 방식입니다. 성령으로 우리를 일으켜 세우셔서 끝까지 견디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31절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고린도전서 15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붙들지 않는다면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골로새서 1장을 들어보십시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얼마나 놀라운 구원입니까.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워집니다. 그런데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끝까지 견딜 때 안전합니다. 끝까지 견딜 때입니다. 인내(endurance)는 바로 그 안전(security)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수단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2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하랍니다. 히브리서 3장 14절입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히브리서 4장 14절입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히브리서 6장 12절입니다.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잘 들으십시오,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이것이 바로 성도의 견인입니다. 우리는 견딥니다. 히브리서 10장 39절입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1장 10절에서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따라서 요점은 이겁니다. 끝까지 견디지 않는 사람은 안전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끝까지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요한일서 2장 19절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어떻다고 합니까?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참된 믿음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겁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을 분명히 붙드십시오. 어떤 시련도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을 주님에게서 떼어 놓을 만큼 크지는 않습니다. 시련은 단지 그 믿음이 참된지를 드러내기 위한 시험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안전이라는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구원을 받았다면 그 구원은 영원하다. 그러니 무엇을 믿든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인내하지 않는다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주님을 붙들지 않는다면, 삶의 모든 시련 가운데서 계속 주님을 사랑하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이 합법적인 믿음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교회에 잠시 다니다가 작은 고난이 오자 떠나 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했지만 견디지 못하고 인내하지 못하고, 주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순종하면서 살지도 않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나오는 “성도의 견인”이 참으로 좋습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아들이시고, 효과적으로 부르시며, 그의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에서 전적으로나 최종적으로 결코 떨어질 수 없고, 반드시 끝까지 그 안에 견디며 영원히 구원을 받게 된다. 이 성도의 견인은 그들 자신의 자유의지에 근거한 것이 아니요, 선택의 작정의 불변성에 근거한 것이며, 이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유롭고 변함없는 사랑에서 흘러나오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의 효력과, 성령의 거하심과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씨와, 은혜의 언약의 본성에 근거한 것이므로, 이 모든 것들로부터 그 확실성과 무오성이 생겨난다. 그러나 그들은 사탄과 세상의 유혹과 그들 안에 남아 있는 부패의 세력과 그들의 보존을 위한 수단들을 소홀히 함으로 말미암아 심각한 죄에 빠질 수 있으며, 한동안 그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다. 그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고 그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며, 그들의 은혜와 위로의 일부를 상실하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해지고 그들의 양심이 상처를 입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걸림돌이 되며, 그들 자신에게는 일시적인 징계를 초래하게 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말하는 요지는 이겁니다. ‘그리스도인이 큰 고난에 빠질 수는 있지만, 결코 최종적으로 자신의 믿음을 내던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반드시 끝까지 견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련은 참된 믿음을 증명합니다.

이 찬송가의 가사를 한번 묵상해 보십시오. “구주께 사랑받는 자들보다 더 안전한 이는 결코 없다네. 저 높은 하늘에 머무는 별과도 둥지에 숨어 있는 새와도 비교할 수 없다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돌보시고 기르시며, 거룩한 뜰에서 번성하게 하시네. 인자한 아버지처럼 아끼시고, 사랑의 팔로 안으시네. 삶도 죽음도 결코 주님의 자녀들을 주님에게서 떼어 놓을 수 없다네. 하나님의 사랑과 깊은 긍휼이 환난 가운데서 위로하시네. 작은 무리여, 이제 기쁨으로 나아가라, 야곱의 하나님이 항상 너를 보호하시리. 이 수호자 안에서 안전히 쉬어라, 하나님의 뜻 앞에서 모든 원수는 굴복하리라. 하나님이 가져가시든, 주시든, 그 모든 것은 아버지의 귀한 사랑을 보여 주는 것,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네, 그 뜻은 오직 하나님 자녀의 유익을 위함이라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되 끝까지 견디도록 붙드십니다. 이런 찬양도 있습니다. “예수 살아 계시니 나도 살리라. 사망아, 네 권세는 끝이 났도다. 나를 위해 죽으신 주께서 살아계셔 죽음의 결박을 끊으셨도다. 티끌 속에 묻힌 나를 일으키실 예수는 나의 소망, 나의 믿음이라. 예수 살아 계시고 다스리시니 그 나라는 영원히 무너지지 않네. 나도 그와 함께 살며 다스려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리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대로 반드시 이루시리니 예수는 나의 소망, 나의 믿음이라. 예수 살아 계셔서 은혜를 베푸시고 정욕의 싸움에 승리를 주시네. 마음과 길을 깨끗이 하사 그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시네. 티끌 속에서 나를 다시 일으키실 예수는 나의 소망, 나의 믿음이라. 예수 살아 계심을 내가 분명히 아노니 생명도 죽음도 어둠의 권세도 기쁨도 슬픔도 나를 주께서 끊지 못하네. 그의 성도 가운데 하나도 잃지 않으시니 예수는 나의 소망, 나의 믿음이라. 예수 살아 계시니 이제 죽음은 영광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었네. 담대하라 내 영혼아, 네 앞에 생명의 면류관 있도다. 마침내 네 소망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게 되리니 예수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이라.”

우리의 삶에 시련이 찾아올 때마다, 그 시련은 인내할 기회를 줌으로써 우리 믿음의 진정성을 증명합니다. 그리고 인내한 후에 우리는 뒤를 돌아보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 나는 주님께 속한 사람이다.”

제가 잠깐 더 말씀드리고 싶은 두번째 목적이 있습니다. 시련은 믿음의 진정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믿음을 강하게 합니다. 믿음을 강하게 합니다. 이 목적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시련은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합니다. 그런 점에서 매우 선한 목적을 이룹니다. 시련을 겪고도 무너지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 12절을 보겠습니다. “...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헬라어를 공부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조금 더 덧붙이자면, 이른바 ‘동격 속격(appositional genitive)’입니다.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생명인 면류관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면류관이 곧 생명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요지는 이겁니다. ‘그 면류관은 곧 영원한 생명이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은 바로 영원한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영원한 생명이 우리의 최종 상급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받지 않았나요?” 그렇습니다. 약속으로는 받았지만 그때가 되어서야 실제로, 충만하게 받게 될 겁니다. 우리는 구원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장차 주어질 상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래 시제로 되어 있는 겁니다.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그 면류관이 무엇입니까? 영원한 생명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충만함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8절이 떠오릅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주님께로 데려가시는 그때, 면류관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 면류관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 면류관은 의입니다. 그때가 되면 영원한 의와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됩니다. 저는 이 면류관이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에 우리가 받게 될 영원한 생명을 가리킨다고 믿습니다.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상급은 궁극적으로 영원한 생명 안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2절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약속된 영원한 생명의 충만함을 붙들라는 말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4절입니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따라서 생명의 면류관은 영원한 생명이요, 의요, 영광입니다.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나누어 주어지는 면류관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속한 면류관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의와 영원한 영광을 얻게 됩니다. 참고로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서도 다시 생명의 면류관이 언급되는데, 거기서도 죽기까지 충성한 자들, 곧 시험을 통과한 자들에게 약속되어 있습니다. 문맥은 동일합니다.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보면 잠시 동안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환난 가운데서, 설령 죽을지라도 끝까지 충성한다면,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으로 상급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제 분명히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인내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인내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내는 참된 믿음과 참된 사랑의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참된 믿음과 사랑에 대해 영원한 생명으로 상급을 주십니다. 구별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영원한 생명은 인내로 얻는 것이 아니라, 인내를 통해 드러난 구원하는 믿음의 진정성에 주어지는 상급입니다. 참고로 “면류관”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스테파노스(stephanos)’입니다. 이 단어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용되지만, 신약 시대에는 대체로 운동 경기에서 승리한 사람의 머리에 씌워 주는 화관을 가리켰습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운동 경기라는 개념 자체에 상당히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많은 경우에 남성들이 거의 벗은 채로 경기하는 모습이 유대인들에게 큰 거부감을 주었기 때문에, 야고보가 그런 경기의 승리 화관을 가리켜 ‘스테파노스’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저는 문제를 회피하는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세푸스(Josephus)의 고대사 기록을 보면, 헤롯 대왕이 통치할 때에 예루살렘 성 안에서는 그러한 경기들이 실제로 열렸던 것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승리자의 면류관으로서의 ‘스테파노스’를 충분히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시험을 끝까지 견딘다는 문맥을 생각해 보면 이 단어가 정확히 들어맞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스테파노스가 왕의 면류관을 가리키거나, 결혼식이나 잔치, 축제 때 씌우는 화환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면서, 기쁨의 면류관, 즐거움의 면류관, 축하의 면류관으로 이해하려 합니다. 물론 그 안에는 번영, 기쁨, 존귀함,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 이런 개념들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는 반드시 승리자의 면류관이라는 의미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스테파노스’가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익숙했기 때문에, 야고보가 바로 그 면류관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자, 그러니까 야고보는 이렇게 말한 겁니다. ‘주님께서는 인내함으로 참된 구원을 소유했음이 드러난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상급을 주신다.’ 야고보는 인생이 시련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합니다.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그 시련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우리 믿음의 진정성, 혹은 믿음 없음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견디고, 끝까지 인내하고, 승리한다면, 우리는 참된 구원하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임을 증명하게 되고, 마침내 그 구원하는 믿음의 상급, 곧 지속적인 사랑이라는 상급을 받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의 충만함이요, 영원한 의요, 영원한 영화입니다. 참된 믿음이 입증된 사람들에게 이러한 것들이 주어집니다.

이제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2절과 12절을 살펴본 후에 드는 질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실제로 어떻게 시련을 견뎌낼 수 있을까요? 어떻게 가능합니까? 실제로 어떻게 인내할 수 있을까요? 바로 이것이 야고보서가 다루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매우 실제적입니다. 단순히 “참아야만 해”라는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인내하지? 어떻게 참아야 하지?”라는 질문이 필요합니다. 잠시 개요를 보시고, 제가 제시한 다섯 가지를 따라가 보십시오. 인내하는 믿음의 실제적인 요소입니다. 몇 가지가 요구됩니다. 먼저 기뻐하는 태도입니다. 2절입니다.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다음으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3절이죠. “너희가 앎이라.” 그 다음은 순종하는 의지입니다. 4절이죠.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그 일이 이루어지도록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마음입니다. 6절에서는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참된 믿음으로 구하라는 것입니다. 8절에서는 두 마음을 품지 말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9절부터 11절까지는 겸손한 영에 대해 말합니다. 시험을 승리로 통과하는 길은 기쁨의 태도로, 시험이 실제로 있다는 것과 그 목적을 인식하고, 주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아래로 들어가 주님이 가르치시려는 것을 배우려는 순종하는 의지로, 결코 흔들리지 않는 믿는 마음으로, 그리고 무엇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겸손한 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련을 다루는 방법입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이 모든 내용을 다음 주에 하나씩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정말 풍성하고 실제적인 내용을 다룰 겁니다. 그래서 한 가지 과제를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습니다. 다음 주에는 혼자 오지 마십시오. 어제 대학교 졸업식을 해서 학생들이 모두 떠났습니다. 떠난 학생들이 그립습니다만, 시험과 시련 가운데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제적인 내용을 다루게 될 다음 주를 위해서 빈자리를 채울 분들을 여러분들이 데려와 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의 진리를 함께 나누며 우리의 마음이 감사와 소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다양한 시련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셔서 우리의 참된 믿음이 드러나게 하시고, 시험을 통과하게 하셔서 순종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임이 드러나게 하시고, 그 결과로 복을 받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께 속한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소망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신실하심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실 뿐 아니라, 성령으로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인내하게 하시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승리를 누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복을 내려 주옵소서. 이번 주에 맞이하게 될 시련들이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의 근원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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