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5장을 보겠습니다. 21절부터 22절입니다. 우리는 2주 전부터 데살로니가전서 5장 21절부터 22절의 진리를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아침 그리고 다음 주일까지 이어서 살펴볼 예정입니다.
이 진리의 말씀을 다시 읽습니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분별하라고 합니다. “범사에 헤아려…”
사랑하는 여러분, 분별력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정말로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가장 정확한 삶입니다. 가장 엄격하게 생각과 행동을 훈련하는 삶입니다. 이해하고 행하는 데 있어서 철저하게 정확해야 합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에 부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께서 친히 명령하시고 능력을 주신, 변함없는 법에 완전히, 그리고 온전히 순응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만큼 정확하고 엄격한 삶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외적인 면에서만이 아니라, 생각과 믿음이라는 내적인 면에서도 정확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무 고민 없이 되는 대로 상황에 따라 적당히 처신하고, 아무런 제약 없이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기분 내키는 대로 하며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해 변하지 않는 분명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기독교는 시대에 따라 교리가 바뀌지 않습니다. 가치관도 도덕도 윤리도 바뀌지 않습니다.
지난 몇 주 동안 감리교와 성공회, 그리고 장로교를 비롯한 주요 교단들이 모여서 새로운 신학을 정하고, 새로운 도덕을 정하고, 새로운 윤리적 기준을 정하고, 과거부터 믿어 온 전통을 바꾸려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저는 참 놀랐습니다. 제가 장로교 지도자 한 분이 라디오 인터뷰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날의 현실에 맞게 우리의 도덕 기준을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는 교인들을 모두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는 시대에 따라 도덕이 바뀌지 않습니다. 가치관도, 윤리도, 교리도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는 훈련되어서 절제된 방식으로 생각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훈련되어 정확한 삶의 밑바탕에 분별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리와 오류를 분별할 뿐만 아니라, 진리와 반쪽짜리 진리도 분별할 줄 알어야 합니다. 교회가 분별하는 능력을 잃어버리면 정확한 신학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정확한 도덕과 가치관과 윤리와 교리도 잃어버리게 되고, 결국 정확하게 살고 정확하게 행할 수 있는 소망도 사라집니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 부도덕이 가득하고 거룩한 삶을 향한 헌신도 매우 약해진 이유는, 그런 부정확한 행실이 부정확한 생각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부정확한 생각은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복음주의 기독교는 지금 심각한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믿음의 대상과 기준을 분명하게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도 분명하지 않고, 생각이 분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물에 물을 탄 것처럼 희석되고 약해진 신학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깊은 경외심도, 깊은 예배도, 깊은 회개도, 깊은 겸손함도 생겨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의 성품과 역사와 사역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법과 기준과 원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신학으로는 사람들의 삶을 하나님 중심으로 이끌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교리도, 도덕도 모두 상대주의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 결국 정확하고 분명한 삶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분별력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바울이 분별력을 포함시킨 이유가 그것입니다. 16절부터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들을 종합해서 제시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 여기에서의 예언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 다시 말해서 계시된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어서 범사에 헤아리라고 합니다.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을 이루는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이 “범사에 헤아리라”는 말은 우리에게 아주 근본적인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분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인간의 생각은 타락했습니다. 인간의 사고방식은 비뚤어져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주관적으로 판단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또 인간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구속받지 않은 육신은 죄를 향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분별력을 약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연약함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타락했습니다.
두 번째는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어둠의 왕이며 이 세상의 통치자인 사탄은 끊임없이 교회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무엇이 진리인지 분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는, 우리를 둘러싼 경건하지 않은 세상이 물밀듯 쏟아붓는 강력한 영향력입니다. 세상과 육신과 마귀, 이 세 가지로 인해서 영적인 분별력은 아주 쉽게 약해질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교회는 이런 공격을 받으면서 무질서와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참과 거짓을 분별하지 못하고 선과 악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부정확한 교리가 생겨나고 부정확한 행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실 분별하여 구별하는 것은 정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하지만, 오늘날에는 교회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합니다. 어떤 문제에 대한 분명하고 단호한 입장을 취하면 오히려 사람들이 비난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는 분별하라는 권면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여러분에게 분별을 촉구하고 이 두 절의 진리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 분명하게 밝히 드러내기 위해서 세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오늘은 첫번째 질문만 살펴보고 나머지 질문은 다음 주일에 살펴보겠습니다. 이제 지난번에 살펴보았던 첫 번째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왜 이렇게 분별력이 부족할까요? 지난 시간에 배후에 작용하는 영향들을 말씀드렸습니다. 육신의 연약함, 사탄의 속임수, 세상의 영향력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왜 이런 것들에 희생당하게 된 것일까요? 무엇이 교회를 이처럼 분별력을 잃어버리게 만들었을까요? 어떤 요인들이 이러한 분별력 부족을 가져왔을까요? 먼저 지난 시간에 살펴본 내용을 복습한 다음에, 몇 가지를 더 살펴보겠습니다.
지난주에 교리적 명료함과 확신의 약화가 지금의 분별력 부족을 초래한 가장 큰 요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교리적 명료함과 확신이 약해졌습니다. 오늘날 교리는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리에 대한 모든 공격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공격입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하나님의 진리를 바르게 아는 것을 공격하는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성품을 공격하는 겁니다. 또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것을 공격하는 것이고, 도덕에 대한 공격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교리 자체를 중요한 관심사로 여기지 않습니다. 물론 예외도 있지만, 대부분의 교회가 주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우리가 어떤 모습이든 간에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하나가 되어야 하고, 분열을 일으키지 않아야 하고, 관계를 중요하게 여겨야 하고, 대립하지 않아야 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체험을 중요하게 여기고 싶어합니다. 사람들의 느낌과 감정을 다루고 싶어합니다. 사람들이 자기 삶에 대해 더 좋은 기분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성취감과 만족을 누리기를 원하고, 편안함을 느끼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지배적인 성경 해석 방식도 이 모든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제가 2주 전에 말씀드렸듯이,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신학을 받아들이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신에 자신들의 해석학을 받아들이게 했습니다. 해석학이란 무엇입니까? ‘해석하다’라는 뜻의 헬라어 “헤르메뉴오(hermeneuō)”에서 나온 말입니다. 신학을 받아들이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기들이 성경을 해석하는 원리를 받아들이게 한 것이죠.
자유주의자들의 해석 원리는 이런 겁니다. 무엇이 사랑을 이루는가, 무엇이 하나 되게 하는가, 무엇이 사람들에게 위협을 주지 않는가, 무엇이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가, 무엇이 대립을 일으키지 않게 하는가, 무엇이 분열을 일으키지 않게 하는가를 기준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하고 편안하게 해 주는가, 무엇이 좋은 관계를 이루게 하는가, 무엇이 사람들에게 기쁨과 만족과 행복과 자아실현을 가져다주는가를 기준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겁니다. 이런 것들을 모두 해석의 원리로 삼아서 성경에 접근한다면 결국 자유주의 신학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니까 자유주의자들은 우리가 자신들의 신학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신학 대신 해석학을 받아들이게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결과는 똑같습니다.
실제로 시대에 맞는 기독교라면 교리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듣습니다. 이번 주에 어떤 교회가 만든 전단지 광고를 제가 하나 봤는데, 거기에 이런 문구가 있었습니다. “전통적인 교회 예배에 지치셨습니까? 지루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설교에 지치셨습니까?” 정확한 표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략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전통적인 것이든, 성경적인 것이든, 성경 본문을 강해하는 것이든, 그런 것은 모두 마치 오늘날의 삶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여기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겁니다. 이런 생각이 아주 상당히 널리 퍼져 있습니다.
몇 달 전에 한 청년이 자기가 쓴 박사 논문을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저와 다른 유명한 설교자의 설교를 비교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에 대한 마지막 단락에서 저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맥아더는 정확하지만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진리를 말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의 삶과는 관련이 없다.” 저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 어떻게 사람들의 삶과 무관할 수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는 뭔가요? 거짓을 말하지만 사람들의 삶과는 관련이 있다는 뜻일 텐데,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날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교리에 대해 확고한 입장을 취하고, 진리를 단호하게 말하는 것을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예배와 설교와 삶의 모습에도 이렇게 약해진 교리적 확신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지난 5년에서 10년 사이에 수많은 변화가 생겨났습니다.
심지어 예전에는 우리가 설교하는 내용이라면 무엇이든 기꺼이 방송하려고 했던 라디오 방송국조차 이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문제, 혹은 저 문제를 다루시면 저희가 방송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내용은 일부 청취자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고,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고 싶기 때문이에요.” 우리도 사랑합니다. 그러나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생각이 모호하고 흐릿한 분위기에서는 분별력이 제대로 자라날 수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잠시 디모데후서 4장을 보겠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절에서 디모데는 매우 엄중한 명령을 받습니다. 상당히 두려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는 명령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다시 말해서 이런 뜻입니다. “나는 네가 이 명령을 아주 엄중하게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이 명령을 반드시 수행해야 한다는 강한 책임감을 느끼기를 원한다. 하나님께서 너를 지켜보고 계시고, 모든 것을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께서도 너를 지켜보고 계신다. 그러므로 디모데야, 내가 네게 명한다.” 2절입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인기가 있든 없든, 환영을 받든 거부를 당하든 말씀을 전파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말씀은 어떤 일을 하겠습니까? 사람들의 잘못을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할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전파해야 합니다.
이렇게 전파된 말씀은 사람들을 책망하고 죄를 깨닫게 할 것입니다. 꾸짖어서 자신의 행동과 믿음이 얼마나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지를 직면하게 할 겁니다. 또 권면할 겁니다. 여기서 권면한다는 말은 심판을 경고하고 행실을 바꾸라고 촉구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3절입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모든 설교자와 모든 목회자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책임은 자기 교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바른 교훈, 바른 교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꼭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귀를 즐겁게 해주고 기분 좋게 해주는 교사들을 자기 주위에 잔뜩 모으고, 자기 욕망을 따라 듣고 싶은 것만 들려주는 사람들을 찾기 시작하면, 결국 진리에서 벗어나 허탄한 이야기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오늘날과 같은 분위기에서는 분별력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교리적 혼란이 만연합니다.
지난번 말씀에서 저는 이런 분별력의 부재를 낳는 두 번째 원인을 대립적으로 사고하지 못하는 것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 원인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오늘날의 문화는 서로 대립되는 것을 분명하게 구별하려 하지 않습니다. 논쟁하려 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것을 논박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상대적인 것으로 보려고 합니다.
오래전부터 실존주의와 주관주의가 침투해 들어온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그저 상대성이라는 넓은 범위 안에 놓고 보려고 합니다. 옳고 그름이 분명한 문제는 없고 절대적인 문제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설교와 가르침은 절대적입니다. 성경은 옳고 그름을 가르고, 잘못된 것과 맞서고, 구별하고, 판단하고, 죄를 깨닫게 하고,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그런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은 재미와 즐거움, 그런 것을 추구하는 시대입니다. 어떤 문제든 가볍게 건드리고 지나가면서 아무도 불쾌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하는 시대입니다. 논쟁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잘못된 것을 논박하는 시대도 아닙니다. 분명하게 선을 긋고 “여기까지가 진리이고, 이 선 너머에 있는 것은 모두 오류이다”라고 말하는 시대도 아닙니다.
분명히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여기는 시대, 서로 대립되는 두 주장을 분명하게 세워 놓고 무엇이 진리인지 가려내려 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는, 다시 말해서 교리적 상대주의가 지배하는 시대에는 분별력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디도서 1장 9절을 보십시오. 디도서 1장 9절에는 장로와 목회자에게 주어진 지침이 나옵니다.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리와 오류를 분명하게 대립시켜 구별하고, 오류에 맞서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을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용납하지 않는 곳에서는, 분명하게 선을 긋는 것도 허용하지 않고, “당신이 틀렸다, 그것은 오류다, 바로잡아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 곳에서는 분별력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사랑과 연합과 관계를 중시하는 해석의 틀이 모든 것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분별력이 사라지는 데 영향을 미친 세 번째 원인은 복음 전도의 핵심을 이미지와 영향력에 두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복음을 전하려면 세상에서 인기를 얻어야 한다는 거짓말을 교회가 받아들였습니다. 친절해야 하고,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아야 하고, 모든 사람을 받아 주고, 맞춰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죄인들이 편안함을 느끼게 해 주어야 하고, 교회를 따뜻하고 환영받는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죄인들이 교회에서 편안하고 행복하게 느끼고 즐거움을 누리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좋아하게 되면 예수님도 좋아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능력 있는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 좋은 이미지와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이 복음 전도에 더 강력한 수단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교리적 혼란이 지배하는 분위기에서는 분별력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도덕적 상대주의가 지배하는 분위기에서도 분별력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과 타협하는 분위기에서도 분별력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는 바로 그런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는 모든 일을 거듭나지 않은 세상에 맞추면서 인정을 받으려고 합니다. 어떻게든 인정을 받으려고 합니다. 빛을 비추어 죄를 드러내는 대신에, 오히려 너무 어두워져서 사람들이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도 자기 죄를 진지하게 직면할 필요가 없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저 우리가 얼마나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인지 알고 즐기기만 하게 하려고 합니다.
물론 저도 사랑과 은혜로 대하려고 합니다. 죄인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의 죄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지적을 받아서 자신에게 영원한 멸망이 기다리고 있다는 현실을 직면하는 것뿐입니다.
제가 전에 말씀드렸던 고린도전서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사역에 대해 상당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11절입니다.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비방을 받고 박해를 받고 모욕을 당하고,” 1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교회는 결코 세상의 인기를 추구해 오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인기를 얻으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는 식으로 영향력을 얻으려고 한 적도 없습니다. 이미지가 핵심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학문적 지식과 깊이가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생각한 적도 없습니다. 예배가 얼마나 재미있고 즐거운지가 사람들을 끌어들인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아무런 부담도 주지 않으면서 사랑으로 품어 주고 모든 것을 용납해 주는 태도가 사람을 얻는 길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대정신은 그렇습니다. 빈약한 신학, 교리에 관해 절대적인 진리를 분명하게 말하려 하지 않는 태도, 이미지와 영향력과 명성을 통해 복음을 세상에 효과적으로 팔아 보려는 전략에 몰두하는 것이 분별력을 죽여 버렸습니다.
이제 네 번째 원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저를 잘 아시기 때문에 제가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 문제인지 아실 겁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저는 대학 시절부터 성경 해석 방법을 정말 배우고 싶었습니다. 해석학을 배우기 위해서는 꼭 밟아야 할 과정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대학교 1학년 때 첫 학기에 헬라어 5학점, 둘째 학기에 헬라어 5학점을 신청해서 모두 10학점을 들었습니다. 2학년에는 매 학기마다 3학점씩 들었고, 3학년에도 3학점씩 들었습니다. 4학년에는 2학점씩 들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학부 내내 헬라어 공부를 했습니다. 계속했습니다. 제가 주로 다루게 될 성경이 신약성경이었기 때문에, 신약성경을 제대로 해석하려면 원어를 통해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신학교에 가서 헬라어를 3년을 더 공부했고, 히브리어도 몇 년 동안 공부했습니다. 신학 공부도 했고, 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저의 삶을 스스로를 훈련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또 교회사와 역사적 배경, 문화, 철학을 비롯해서, 성경의 문맥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성경을 더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배우려고 힘썼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동안 제가 배운 것들을 실제로 적용해서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려고 계속 힘써 왔습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능력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저처럼 말씀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야고보서 3장 1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가르치는 일에 성급하게 뛰어드는 사람은 선생이라는 자리에 서는 순간, 더 큰 심판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이제는 자신이 무엇을 믿고 무엇이 옳다고 말하는지에 대해서만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말을 듣고 믿은 모든 사람에게 무엇을 믿게 하고 무엇이 옳다고 받아들이게 했는지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죠.
성경 해석에는 매우 엄밀한 원리와 방법이 있습니다. 대단히 엄밀합니다. 얼마 전에 우리 교회 사역자 몇 사람이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미국의 한 유명한 설교자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중 한 사람이 그에게 물었답니다. “이번 주일에는 무엇을 설교하실 건가요?” 아마 주중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그 설교자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토요일 밤에 설교를 준비하는 사람이거든요.”
하나님의 말씀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성경 해석은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는 성경 해석의 엄밀한 원리와 방법을 익히고 그에 따르는 훈련을 하지 않는 설교자들이 많습니다. 그 결과 성경의 깊은 의미를 파고들지 않고 그저 표면만 가볍게 훑고 지나갑니다. 인간관계에 초점을 맞춘 설교를 하거나, 기독교적인 색채를 조금 입힌 심리학 같은 것을 전하거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들려줍니다. 형태가 어떻든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할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모든 사람을 마치 성경 전문가인 것처럼 여기는 새로운 풍조가 생겨났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좋은 가르침을 충분히 받아 왔거나, 성경 해석에 관한 좋은 책들을 충분히 읽고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줄 아는 사람에게 방법을 배우지 않았다면, 아무리 영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고 그리스도를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진리의 말씀을 정확하게 분별할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성경에 대해서는 제대로 훈련받지 않았으면서 다른 분야에서는 고도의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자신이 그 전문 분야에서 성경 해석으로 그대로 그냥 넘어와서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많은 사람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별다른 훈련을 받지 않아도 스스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세심하게 풀어 주는 가르침을 받아 본 적도 없고,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는 사람의 설명을 들으면서 해석하는 법을 배운 적도 없으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된 일인지 모든 사람을 똑같은 수준에 올려놓았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이든, 성경을 해석할 준비가 얼마나 부족하든 상관없이 누구나 똑같이 성경에 관한 책을 쓸 수 있고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올바른 성경 해석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문제를 덧붙일 수 있습니다. 바로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은사주의 운동입니다. 은사주의 운동은 기본적으로 성경을 그냥 읽기만 하면 어떻게든 예수님께서 그 뜻을 알려 주신다고 말합니다. 성경의 의미가 어떤 신비로운 방식으로 자기 안에서 저절로 떠오른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성경을 해석하는 과정 자체가 전혀 필요 없게 되죠.
그런데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지금까지 생겨난 거의 모든 이단과 거짓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어떤 새로운 계시를 주셨다는 전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이런 현상이 너무나 널리 퍼져 있습니다. 기독교 라디오 방송을 듣거나 텔레비전의 기독교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이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의 말을 끊임없이 듣습니다. 자기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고 하나님께서 저렇게 말씀하셨다, 그런 식으로 하면서 성경을 해석할 필요가 없답니다. 그 의미가 자기 안에서 그저 저절로 나오기 때문이랍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은사주의 예언 사역 단체의 네트워크를 이끌고 있는 빌 헤이먼(Bill Hayman)은 진리를 분별하려 할 때 이성과 논리와 감각을 무시하라고 조언합니다. 진리를 분별하려 할 때 이성과 논리와 감각을 무시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썼습니다. 제가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우리의 전통과 신념과 견해는 예언적 진리를 증언하는 참된 증거가 아니다. 영적인 반응은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서 일어난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그에 따른 감각이 신체적으로 느껴지는 위치를 상복부라고 설명한다.”
여러분,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시겠어요? 진리는 상복부에서 일어나는 어떤 반응을 통해 알 수 있답니다. 제가 계속 읽어보겠습니다. “어떤 메시지에 대해 ‘안 된다. 조심하라’ 또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부정적인 증거가 나타날 때는 대개 긴장되고 불안하거나 마음이 편치 않은 느낌으로 나타난다.” 자, 그러니까 성경을 읽은 다음에, 여러분의 상복부에서 무슨 반응이 일어나는지를 기다리고 살피라는 겁니다.
계속 읽습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깊고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각이 있다. 이런 감각은 우리가 우리의 생각보다 우리의 영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때에만 신뢰할 수 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말장난입니다. 터무니없는 소리입니다. 또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의 생각이 이런 감각을 일으키는 것이라면, 혼에서 나오는 반응일 뿐이다.” 그러니까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이성도 사용하지 말고, 감각도 사용하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앉아서 상복부가 움찔움찔하거나 긴장이 되거나 불안한 느낌이 생기는지를 기다려 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느낌이 생기면 그 해석은 진리가 아니랍니다. 그러면 다른 해석을 찾아내야 한다고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어떤 예언의 말씀이 옳다고 우리의 영과 더불어 증언하시면, 우리는 진리를 발견한 것이고, 그때 우리의 영은 성령의 열매로 반응한다. 우리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깊은 평안과 기쁨, 따뜻하고 사랑이 가득한 느낌이 생기며, 심지어 우리의 영이 흥분해서 펄쩍펄쩍 뛰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런 감각은 비록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모든 것이 올바르다는 것을 성령께서 우리의 영과 더불어 증언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다시 말해서 이런 말입니다. 생각은 무시하고, 무엇을 믿는지도 잊어버리고, 신학은 제쳐 두고, 상식은 내버리라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절대로 텀스(Tums) 같은 제산제를 먹지 마십시오. 그러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게 되니까요. 상복부에는 절대로 손을 대시면 안 됩니다. 만일에 손을 대시면 성령께서 여러분을 인도하실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참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완전히 터무니없는 소리입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읽은 다음에 가만히 앉아서 상복부에 어떤 느낌이 오는지를 기다리고, 그 느낌으로 무엇이 진리인지 판단하라니요? 소화불량이나 심장에 문제가 있어도 똑같은 느낌,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센 느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런 조언을 따르는지 모릅니다. 수백만 명입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로 교적을 옮기고요, 평생 모은 돈을 그런 사역 단체에 헌금합니다. 은사주의적 신비주의와 주관주의를 따르는 대가가 너무나 큽니다. 이제는 누구나 자기 상복부가 말해 주는 대로 무엇이든 마음대로 행하고, 말하고, 가르칠 수 있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 성경 해석이 지닌 고유한 중요성과 중심성, 성경을 반드시 올바르게 해석해야 한다는 필요성 자체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자, 그러니까 한쪽에는 성경을 해석할 능력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성경 해석은 제쳐 두고 기독교 심리학과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다른 쪽에는 성경을 해석하는 데 필요한 도구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으면서도 어떻게든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 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 번째로는 무엇이 옳은지 알려줄 어떤 느낌이 오기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은사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성경을 대하는 방식 자체가 완전히 잘못되어 있습니다.
은사주의 운동에 속한 한 청년이 제가 아는 사람에게 보낸 편지가 있습니다. 성경을 대하는 그들의 전형적인 태도를 잘 보여줍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경험한 사랑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경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제 위에 쏟아져 내리던 십자가 아래에서 경험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저를 휘장 너머로 데리고 가셔서 예루살렘 성 안으로, 지성소 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예수님 안에 있는 저 자신을 보았고, 제 안에 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저는 불같은 성령 세례를 받았고, 그때부터 그분의 사랑이 제 안에 거합니다. 그때부터 저는 그분과 날마다 교제합니다.”
글쎄요, 이 문단 전체가 저에게는 상당히 신비주의적으로 들립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정말로 불세례를 받고 싶어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불세례는 심판을 뜻합니다. 하지만 일단 그 실수는 넘어가고 편지의 나머지 내용을 보겠습니다.
“저는 성경을 공부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제 안에서 자신을 계시해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예수님이 제 안에 거하시기에 제 안에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은 부차적인 자료일 뿐입니다.” 사람들이 왜 분별할 수 없는지 아시겠습니까? 분별의 기준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왜 텔레비전 토크쇼에 나와 앉아서 기괴하고 터무니없는 주장들을 계속 늘어놓는지 아시겠어요? 그런데도 아무도 “이제 그만하십시오. 그건 틀렸습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성경에 그런 내용은 없습니다. 성경으로 뒷받침할 수도 없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경험이 무엇이 참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함으로써 오류와 맞서 싸웠습니다. 이제 20세기의 교회도 똑같은 싸움을 해야 합니다. 다만 이번에는 로마 가톨릭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개신교 안에서 싸워야 합니다. 개신교도 성경을 다루는 데 있어서 똑같이 미숙하고 잘못된 방식에 빠져 버렸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올바르게 해석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하기만 한다면,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진리를 정확하게 우리에게 제시해 줄 것입니다. 잠시 디모데후서 2장을 보겠습니다. 이미 여러 번 다뤘지만 다시 한번 살펴보면 더욱 깊이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디모데후서 2장 15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아주 명확한 말씀입니다.
이 구절이 함축하는 뜻은 분명합니다. 말씀을 정확하게 다루지 않는다면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것이죠.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말씀을 정확하게 다루기를 원한다면, 상복부에서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 것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숙련된 일꾼, 그러니까 능숙한 장인처럼 성경을 똑바로 잘라 바르게 다루면서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 부지런히 연구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성경을 해석할 때 얼마나 정밀함이 요구되는지를 아주 잘 보여줍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사람들은 처음부터 거짓 교리에 빠지려고 작정하지 않습니다. 제 말은,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거짓 교리에 빠지고 싶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심각한 오류에 빠지는 것은 처음부터 의도했다거나 그런 동기를 가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경을 다루는 데 게으르고, 미숙하고, 부주의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제 17절로 내려가 보면, 바로 이런 사실을 보여 주는 두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후메내오(Hymenaeus)와 빌레도(Philetus)입니다. 18절은 이들이 “진리에 관하여는 그릇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잠시 멈추어 봅시다. “그릇되었다”라고 번역된 동사는 겨냥한 목표를 빗나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이들이 진리를 겨냥하고 있었지만 그만 빗나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오류를 만들어 내는 것은 오류를 찾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진리를 찾는 과정에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를 모르거나,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거나, 진리를 찾는 데 필요한 요소들을 제대로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오류에 빠지는 겁니다. 자신이 겨냥한 목표를 빗나가는 거죠. 목표 자체는 옳았을지도 모릅니다. 진리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빗나가 버렸습니다. 그렇게 진리에서 빗나간 결과 터무니없는 주장을 만들어 냅니다. 바로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는 주장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주장을 사람들에게 믿게 만들 수 있습니까? 사람들에게 이미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말하면 됩니까? 그러면 이렇게 말하지 않겠어요? “아니, 잠깐만요.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는지는 내가 알지요. 그런 말로는 나를 속일 수 없어요.” 물론 속일 수 있습니다. 아마 이것을 일종의 영적인 부활이라고 주장했을 겁니다. 앞으로 있을 부활은 육체적인 부활이 아니라 오직 영적인 부활뿐이고, 그 부활이 이미 일어났다고 주장했을 겁니다.
어쩌면 최초의 소멸론자였을지도 모릅니다. 사람이 죽으면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든지, 영혼이 잠든다든지, 혹은 그와 비슷한 주장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질 부활은 이미 모두 이루어졌기 때문에 앞으로 부활이 더 이상 없고, 그것도 영적인 부활이라고 주장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렸습니다. 아무리 황당한 주장이라도 반드시 따르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특히 이 남부 캘리포니아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수염을 기르고 목욕 가운 같은 옷을 걸친 다음에 해변에 나가서 여러분이 나는 모세다, 이렇게 말해 보십시오. 30분 안에 50명은 여러분 뒤를 따라올 겁니다. 언제나 이렇게 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처음부터 오류를 목표로 삼았던 것은 아닙니다. 진리를 목표로 삼기는 했지만, 미숙하고 부주의하고 게으르고 어리석게 진리를 찾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오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다시 15절을 보겠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후메내오와 빌레도처럼 되지 말고,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우리는 언제나 정확하게 판단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도록 진실하게 말씀을 다루어야 합니다.
말씀을 다루는 사람은 최선을 다해 연구하지 않았거나,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자료와 모든 노력을 쏟아붓지 않아서 제대로 된 연구를 하지 못하고 참된 해석에 이르지 못했다는 이유로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부끄러운 설교자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부끄러운 사람들 말입니다. 저 역시 진리를 조금이라도 잘못 전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허술하게 다루는 것은 결코 용서될 수 없습니다. 말씀은 정확하게 다루어야 하고, 옳게 분별해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당신이 이런 말을 하면서 이 사람도 틀렸고 저 사람도 틀렸고 이 해석도 틀렸다, 그렇게 말하면 어떡합니까? 역대상 16장 22절에 ‘나의 기름 부은 자에게 손을 대지 말라’라는 말씀이 있잖아요.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손대지 마세요. 주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손대지 말라고요. 주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손을 대지 마십시오.” 그러나 누군가가 오류를 가르치고 있다면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지키려는 것입니다.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하지 못하는 것이든, 세상에서 좋은 이미지를 얻는 데 몰두하는 것이든, 진리와 오류를 분명하게 대립시켜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든, 교리가 분명하지 않고 교리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이든, 이 중의 어느 하나만 있어도, 아니 이 모든 것이 분별력을 말 그대로 죽여 버립니다.
교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면 어떻게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상대주의를 버리고 “이것은 옳고 이것은 틀렸다”, 이렇게 분명하게 말하려 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과 타협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편안함을 느끼게 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분별하겠습니까?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방법조차 모른다면 도대체 어떻게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마무리하면서 두 가지를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교회에서 권징을 시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권징을 시행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겠지만, 제가 하는 말을 주의 깊게 들어 주십시오. 한 가지를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교회의 권징입니다. 교회의 권징이 무엇입니까? 각 사람의 삶 속에 있는 죄를 직면하게 하고 바로잡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형제가 죄 가운데 있다면 그에게 가십시오. 가서 그 죄를 직면하게 하십시오. 그렇게 일으켜 세우십시오. 바로 세우고 굳세게 하십시오. 회개하게 하십시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바울도 말했습니다. “그런 사람과는 함께 먹지도 말라. 사귀지도 말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
또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교회는 굳건하게 거룩하고 높은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죄를 반드시 직면하게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2주 전에도 우리 교회의 교인이 저를 데리고 가서 죄 가운데 있는 한 형제님을 만나서 죄를 직면하게 했습니다. 아내를 버리고 자기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형제님을 기다렸다가 이렇게 말했죠. “형제님께 거룩한 삶으로 돌아오라고 권하기 위해 저희가 왔습니다. 형제님을 위해 함께 기도하고 싶습니다.” 만일 그 형제님이 응하지 않았다면 여러분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정한 그 과정을 끝까지 따라야 했기 때문이죠.
이제 아주 주의 깊게 들어 주십시오. 교회에서 권징을 시행한다는 것은 죄를 분명하게 지적하고 직면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면 세상과 교회 사이의 경계가 분명해집니다. 정말입니다. 틀림없이 분명해집니다. 세상과 교회 사이의 경계가 아주 분명해집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의 죄를 지적했는데도 그가 죄를 버리지 않는다면 교회 밖으로 내보내기 때문이죠. 어쩌면 애초부터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과 교회의 경계가 아주 분명하게 유지됩니다.
이쪽에는 주님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저쪽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와 세상을 갈라놓는 경계선은 매우 중요합니다. 죄에 대한 권징을 중단하는 순간 경계선이 무너져 버립니다. 그러면 세상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뒤섞이고, 어떤 쪽이 교회이고 어떤 쪽이 세상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됩니다. 전혀 구별할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비신자도 교회에서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우리가 믿는 사람을 상대하는지 믿지 않는 사람을 상대하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됩니다. 여러분은 왜 주님께서 온 교회가 보는 앞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죽이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날 교회 마케팅이나 교회 성장 전략을 세우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아주 어리석은 일을 하셨다고 말할 겁니다. 교회의 평판을 아주 나쁘게 만들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당시 교회가 어떤 평판을 얻게 되었는지 아세요? “저 교회에는 들어가지 마라. 거기 들어가면 사람이 죽는다”, 이런 평판을 얻었습니다.
그 소문은 삽시간에 온 도시에 퍼졌습니다. 두 사람이 헌금을 하러 왔다가 하나님께 거짓을 말했는데, 그만 죽어 버렸습니다. 세상에, 저 교회에는 가까이 가지 말아야겠다,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이게 홍보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마치 식당을 하는데 손님 두 명이 죽은 것과 똑같습니다. 그런 식당에는 사람들이 가고 싶어하지 않을 겁니다. 사람이 죽었는데요.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저 교회는 죄를 지으면 가만두지 않는대. 정말 심각하게 다룬대. 누군가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알면 찾아가서 뭐라고 한대. 그런데도 계속 죄를 지으면 교회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알린대.”
이번 주에 어떤 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제가 들었습니다. 그 교회에는 이른바 ‘2년 원칙’이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 교회 성도님 중의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죄 가운데 살아가면서 교회에 오더라도 적어도 2년 동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답니다. 동성애자의 경우도 그렇답니다. 그 사람이 교회에서 충분히 편안함을 느끼고 자신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렇게 느낄 때까지 적어도 2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가, 그 후에야 죄를 다루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동성애자가 어떤 교회에 2년 동안 앉아 있으면서 편안함을 느끼고 자신이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느낄 수 있다면, 그 교회는 마땅히 전해야 하는 것을 전하지 않고 있는 겁니다. 저는 동성애자가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에 2년 동안 계속 다닐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편안하게 느끼든 불편하게 느끼든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이곳을 떠나야겠다. 이 사람의 말은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어. 누가 이런 사람의 말을 듣고 싶겠어?” 하고 떠나든지 아니면 회개하겠죠.
저는 편지를 참 많이 받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편지들이 많습니다. 그중에는 교회에 단 한 번 와보고는 편지를 보내는 동성애자들도 있습니다. 그 편지에는 아주 엄청난 분노와 적대감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그 밖의 여러 종류의 죄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도 그런 편지를 받습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죄든 용납하기 시작하면 결국 모든 죄를 용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의 거룩함을 무너뜨리고, 결국 교회는 분별할 수 없게 됩니다. 분별하지 않고서 도대체 어떻게 선을 긋겠습니까? 이미 선을 긋지 않겠다고 해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이 괜찮다고 느끼게 해 주려는 것이죠. 결국 분별하고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을 정도로 타협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7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은 그 의미가 더없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이제 구별하기 시작하라. 분리하기 시작하라. 죄를 직면하게 하라. 살펴보고 판단하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삶을 판단하기 시작하라. 죄 가운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그대로 용납하면 안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 안의 죄를 엄중하게 다룬다면, 거룩함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먼저 심판하기 원하신다면, 하나님을 거부하는 자들의 죄는 얼마나 더 엄중하게 심판하시겠는가.”
기준을 낮추면 안 됩니다. 죄 가운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그대로 교회 안에 둘 수도 없고, 죄 가운데 살아가는 불신자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죄를 제거하고, 권징하고, 가려내고,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자기 교회에 그렇게 하신다면, 불신자들에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교회를 향해서 심판과 징계와 순결을 선포한다면, 잃어버린 자들을 향해서도 심판과 징계와 구원을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인으로 하여금 죄를 분명하게 직면하게 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교회에서부터 시작하라”, 이렇게 외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가 순결하기를 원하시고, 교회가 순결하지 않으면 심판하신다면, 불신자들에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18절을 보십시오. 잠언을 인용한 아주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간신히 구원을 받는다면, 우리가 간신히 천국에 들어간다면,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죄를 지으면 주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주님의 징계하시는 손길을 경험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계속 죄에 걸려 넘어지고 그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셔야 하므로 이렇게 힘이 든다면, 경건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과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세상에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야 합니다. 무슨 메시지입니까? “우리 교회는 좋은 곳입니다. 여러분도 우리 교회를 좋아하시게 될 것입니다”가 아닙니다. “이곳은 죄를 엄중하게 다루는 거룩한 곳이다.” 우리는 반드시 이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는 즐거운 곳입니다”가 아니라, “교회는 거룩한 곳입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당신이 좋아할 만한 곳입니다”가 아니라, “당신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구주께로 나오지 않고, 거룩한 삶을 살려고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곳을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권징하지 않고 거룩하지 않다면 분별력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분별력이 이토록 심각하게 부족한 데 영향을 미치는 마지막 원인은 영적인 미성숙입니다. 영적인 미성숙입니다. 저는 교회 안의 많은 사람의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지식이 아주 피상적이라고 확신합니다. 정말 얕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유행하는 견해와 감정과 경험을 따라가고, 기적과 치유를 찾아다니고, 일상생활에서 겪는 여러 문제를 손쉽게 해결할 방법을 찾습니다. 또 자신의 편안함을 추구하고 개인적인 성공을 원합니다. 매우 피상적인 기독교 신앙입니다.
‘갓난아이 수준의 기독교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갓난아이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 주는 특징은 이기심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동의하지 않습니까? 갓난아이는 무엇을 받아도 “고맙습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얻지 못하면 소리를 지릅니다. 아주 이기적입니다.
미성숙한 사람의 특징은 바로 자기중심성과 이기심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한번 보십시오. 교회는 온통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자기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원하고, 자신이 더 편해지기를 원합니다. 찬송가 작사가가 표현한 것처럼 주님께 시선을 집중한 채 “놀라움과 사랑과 찬양” 속에 자신을 잊어버리는 모습 같은 것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교회가 이기적이 되었습니다. 미성숙하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자기중심적인 갓난아이 같습니다. 자신의 필요가 채워지고 자신의 욕구가 충족될 때까지 온 세상이 멈추고 자신에게 맞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성숙한 상태에서는 분별력이 생길 수 없습니다.
다시 에베소서 4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익숙한 구절을 보여 드리죠. 그러나 이 구절이 바로 이 점을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 에베소서 4장 14절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더 이상 어린아이가 되지 말라고 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린아이들은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영적으로 미성숙하면 사람들은 잘못된 가르침의 희생양이 됩니다. 쉽게 희생양이 되어 버립니다. 무엇이 옳은지 모릅니다. 무엇이 틀렸는지도 모릅니다.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온갖 바람에 휩쓸립니다. 너무나 쉽게 속아 넘어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바꿀 수 있습니까? 15절입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15절입니다.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함으로써 우리는 영적으로 자라나야 합니다.
교회는 어떻게 성장할까요? 진리 아래에서 성장합니다. 사랑 안에서 분명한 진리를 들을 때 성장합니다. 그러면 교회는 자라고 세워집니다. 16절 끝부분에서도 몸이 자라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미성숙한 사람들에게는 분별력이 없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바닥을 기어 다니다가 눈에 띄는 것은 무엇이든 입에 집어넣는 것과 같습니다. 분별력이 없기 때문이죠.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를 모릅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처럼 영적으로 미성숙하고, 미성숙하면 분별력이 부족해집니다. 피상적인 가르침과 설교의 직접적인 결과입니다. 은사주의 진영을 통해 교회의 많은 사람이 접하고 있는 이상하고 기괴하고 신비주의적인 가르침,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풀어내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가르침, 영적으로 성장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깊이 있는 내용이며 기초가 되는 교리는 결여된 채, 이야기와 인간관계에만 초점을 맞추는 설교들이 이런 결과를 낳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구절만 더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5장입니다. 이 말씀은 영적 미성숙이라는 마지막 요점을 확실하게 뒷받침해 줍니다. 히브리서 5장을 보십시오. 물론 여기서는 다른 문맥에서 하는 말이지만,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원리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5장 12절에서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다시 말하면, 신앙생활을 한 지 충분히 오래되었고 충분히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이제는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아직 어린아이 같다는 겁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신앙생활을 한 지 충분히 오래되어서 이제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계속 너희에게 젖을 먹여야 하다니, 계속 초보적인 것들을 가르쳐 주어야 하다니. 너희는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는구나. 의의 말씀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씀입니다.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온갖 체험이 있고, 수많은 이야기도 쌓여 있고, 감정적으로 강력한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말씀은 모릅니다.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분별력과 영적 성숙은 함께 갑니다. 분별력과 영적 성숙은 함께 갑니다. 꾸준히 말씀의 가르침을 받고, 의의 말씀을 이해하고, 단단한 음식을 받아들이고, 배운 말씀을 삶 속에서 계속 실천할 때, 우리의 지각이 훈련되어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리에 대한 확신의 부족이든, 이미지와 영향력을 복음 전도의 핵심으로 여기는 것이든, 절대적인 진리를 분명하게 말하려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보려는 태도이든,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것이든, 교회 권징의 부재나 영적 미성숙이든, 이 모든 것은 서로 겹쳐 있고 긴밀하게 얽혀 있습니다. 교회가 분별력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원인입니다.
교리에 대해서는 느슨하고,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가르치려고 하지도 않고, 논쟁거리를 만들고 싶어하지도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얻기 위해서는 교회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세상과 적당히 타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되는대로 해석하고, 영적으로도 미숙합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분별력이 생길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잠언 14장입니다. “명철한 자는 지식 얻기가 쉬우니라.” 잠언 14장 33절입니다. “지혜는 명철한 자의 마음에 머물거니와…” 잠언 16장 21절입니다.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명철하다 일컬음을 받고…” 잠언 17장 24절입니다. “지혜는 명철한 자 앞에 있거늘 미련한 자는 눈을 땅 끝에 두느니라.”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이리저리 끝없이 헤맵니다. 그러나 분별력 있는 사람은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거기에 집중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아주 뛰어난 분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먹는 음식에 대해서는 말이죠. 음식이 들어 있는 상자를 집어 들고는 포장지에 깨알같이 적힌 내용을 자세히 살펴봅니다. 지방이 몇 그램 들어 있는지, 어떤 영양소가 하루 권장량의 몇 퍼센트나 들어 있는지 아주 꼼꼼하게 읽어 봅니다. 농약이 들어간 음식은 어떻게든지 피하려고 아주 조심하고,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으려고 합니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분별하려고 애를 씁니다.
또 어떤 분들은 어디에 투자해야 할지를 결정할 때 분별하려고 아주 애쓰죠. 신문에 깨알같이 실린 주식 시장과 투자에 관한 온갖 자료를 아주 꼼꼼하게 읽습니다. 그런 것을 분별하는 데는 아주 능숙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수술을 받아야 할 때 아주 대단히 신중합니다. 경험이 풍부한 실력 있는 의사를 찾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정말 꼼꼼하게 알아봅니다. 충분히 검증을 받고 평판도 좋은 의사를 선택해서 다른 사람의 의견까지 경청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정치 분야를 대단히 분석적으로 바라보죠. 그 시대의 현안들을 분석하고, 여러 신문사의 사설을 인용합니다. 정부 시책, 외교 정책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모든 것을 분석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소파에 앉아서 경기를 분석하는 데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습니다. 어떤 공격 전술이든지 어떤 수비 전술이든지 분석할 수 있고, 무엇 때문에 이기고 무엇 때문에 지는지도 정확하게 분별해 냅니다. 어떤 분들은 모든 선수의 타율을 이미 외우고 있구요, 그 선수가 왜 그런 식으로 타격하는지, 또 어떻게 그렇게 치는지까지 알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어떤 문제든 끝까지 파고들어서 철저하게 분석합니다. 그런데 정작 성령과 말씀 안에서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를 분별하는 데는 분별력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리고 교회가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교회는 생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치명적인 독이 든 물을 마시고 있습니다.
자,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이 정도까지만 하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분별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다음 주에 살펴보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 말씀을 통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이 무엇인지 더 정확하게 진단하고 바로잡기 위해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정하게 하옵소서. 우리는 부끄러움을 당하고 싶지 않습니다.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여 과연 이것이 그러한가 살펴보았던 고귀한 베뢰아 사람들처럼 되고 싶습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분별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고, 성령을 주셨고, 가르치는 교사들,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들, 유익한 글을 써 주는 훌륭한 저술가들을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분별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배울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 우리가 참되고 확고한 신념을 기꺼이 세우고, 그 진리를 위해 싸우고,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 가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가 기꺼이 권징을 시행하고 거룩함을 추구하게 하시고, 우리의 지각이 선과 악을 분별하도록 훈련되어서 영적으로 성숙하게 하시고, 그리하여 우리가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분별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진리를 주셨고, 말씀을 주셨고, 기준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가르치도록 성령을 주셨습니다. 더욱 자세히 가르쳐 줄 모든 교사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신 이 모든 것을 잘 사용하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올바르게 분별하게 하여 주옵소서. 바로 주님의 진리입니다. 그 진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 낼 모든 일과, 그로 인해 주님께 돌아갈 영광을 생각하며 감사드립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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