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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도 고린도후서 3장을 보겠습니다. 오늘로 이번 시리즈를 마치려고 했던 저의 계획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아마 다음 주일까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더 잘됐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간에 다루지 못하는 내용도 한 편의 설교 말씀으로 삼기에 충분하기 때문이죠. 우리는 고린도후서 3장을 통해서 ‘새 언약의 영광’을 보고 있습니다. 오늘 처음 오신 분들이나 한동안 자리를 비우셨던 분들에게는 죄송합니다만, 오늘이 벌써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앞의 내용은 모두 녹음되어 있습니다. 다른 시리즈보다도 더 중요한 내용들이니 꼭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장에서 우리는 새 언약의 영광을 주제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내용을 아주 간단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좋은 소식,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죄를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좋은 소식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는 죄인입니다. 누구도 자기 힘으로 자신의 죄의 결과에서 스스로를 건져낼 수 없습니다. 그 결과는 영원한 지옥이죠.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서 끝이 없는 형벌입니다. 나쁜 소식입니다. 온 세상은 지옥행을 선고받았습니다. 모든 입은 막혔습니다. 온 세상은 죄 아래 있습니다. 과거의 사람도, 현재의 사람도, 미래의 사람도 모두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은 지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의 죄를 대신하여 형벌을 담당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대신해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도, 하나님의 공의도 모두 충족시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값이 이미 치러졌기 때문에 죄인을 용서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역에 힘입은 죄 사함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새 언약은 흘린 피로 확증된 언약입니다. 새 언약, 복음, 좋은 소식, 기독교의 메시지는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죄 사함을 약속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한 형벌을 완전히 담당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예수님 자신을 위한 죽음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과 저를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하고 믿을 때에 완전한 용서를 약속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새 언약입니다. 예수님의 피의 약속입니다.

6절부터 18절까지에서 성령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이 새 언약이 모세를 통해 주어진 옛 언약보다 얼마나 뛰어난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7절에서 옛 언약을 “죽음의 직분”이라고 부르고, 9절에서는 “정죄의 직분”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보았을 때 나는 죽었다.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보았다. 그 율법이 나를 죽였다.” 율법은 죄인을 절망으로 몰아넣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절망 가운데서 죄인은 하나님께 달려가 이렇게 말하게 되죠. “저는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 기준에 이를 수 없습니다. 저는 죽음의 저주 아래 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옵소서.” 그렇게 통회하고, 상하고, 겸손한 심령으로 죄인은 자신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에 자신을 맡깁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시편 99편에서 읽은 것처럼,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이시고, 구하는 자에게 은혜와 긍휼과 용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그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행위로, 도덕으로, 의식으로, 의례로, 어떤 공로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는 모든 메시지를 거부합니다. 참된 설교자는 6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새 언약의 일꾼”입니다. 구원을 얻기 원하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예수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24절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새 언약의 중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훨씬 이전에 살았지만, 하나님께 나아가 긍휼과 은혜를 구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요청도 받아주셨습니다. 무엇을 근거로 말입니까?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장차 일어날 그리스도의 죽으심이죠. 그 죽으심은 시간을 거슬러 효력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물론 그들은 완전히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원을 준비하신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어린 양을 준비하실 것을 알았던 것과 같습니다. 보지는 못했지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효력은 시간을 거슬러 적용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의 죄를 용서하시면서도 여전히 의로우시고 공의로우실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 시대 사람들의 죄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의 희생으로 속죄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서 옛 언약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참된 교사가 아니다. 참된 사도가 아니다.” 참된 설교자, 참된 교사, 참된 사도는 새 언약의 일꾼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합니다. 새 언약, 좋은 소식을 전합니다. 바울은 이 서신에서 자신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참된 설교자라고 변호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새 언약의 진리를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 6절에서부터 새 언약의 탁월함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새 언약은 여러 가지 이유로 옛 언약보다 뛰어납니다.

이제 우리가 이미 살펴본 내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번째, 새 언약은 생명을 줍니다. 6절입니다. 옛 언약은 죽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새 언약은 생명을 줍니다. 두번째, 새 언약은 의를 줍니다. 옛 언약은 7절에서 죽음의 직분이고, 9절에서 정죄의 직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9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영광 가운데 넘치는 의의 직분입니다.

세번째, 새 언약은 영원합니다. 영원합니다. 11절 하반절이죠.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사라지지 않습니다. 길이 있습니다. 다시 또 다른 언약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마지막입니다. 완성입니다. 절정입니다. 끝입니다. 새 언약은 생명을 주고, 의를 주고, 영원합니다.

네번째, 새 언약은 소망을 줍니다.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새 언약은 소망의 언약입니다. 다섯번째, 새 언약은 감추인 것이 없습니다. 이 모든 내용은 출애굽기 34장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린 그 사건이죠.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령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며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바울이 말하는 것은 옛 언약이 가려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흐릿했습니다. 옛 언약은 감추어졌고, 가려졌고, 닫혀 있었습니다. 바울은 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무엇인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무엇인가 어둡습니다. 무엇인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도 볼 수 있습니다. 옛 언약을 아주 잘 아는 유대인들, 전통적인 옛 언약을 연구하는 유대인들을 한번 보십시오. 그렇게 열심히 연구를 하는데도 여전히 모릅니다. 다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디로 향하는 겁니까? 무슨 의미입니까? 결국 어디로 가는 겁니까? 가려져 있습니다. 흐릿합니다. 마음이 완악하고 생각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수건이 마음을 덮고 있습니다.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새 언약은 그렇지 않습니다. 13절입니다. 모세 율법과 같지 않고 뚜렷합니다. 완전히 선명합니다. 우리가 이미 보았습니다. 새 언약에 이르면 모든 것이 뚜렷해집니다.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어린아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간단합니다. 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새 약속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옛 언약에는 상징, 신비, 모호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실체입니다. 신비하지도 모호하지도 않습니다. 복음은 선명하고 분명합니다.

이제 여섯 번째로 넘어가겠습니다. 지금까지는 복습이었습니다. 새 언약이 뛰어난 이유는 그리스도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입니다.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입니다. 14절 하반절입니다.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그리스도께 나아갈 때 모든 그림자와 상징과 모형, 모호함, 모든 신비가 강한 바람에 안개가 사라지듯이 전부 사라집니다. 새 언약의 실체 안에서는 수건이 벗겨집니다. 사랑받는 선지자 이사야도 이것을 보았고,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했습니다. 이사야 25장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장차 행하실 일,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높이실 때 일어날 일을 말합니다. 6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아주 큰 잔치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7절입니다. 분명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이 그리스도를 알게 될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종말의 때를 가리킵니다. 7절입니다.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시며.” 수건이 벗겨지는 때가 옵니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찌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됩니다. 더 이상 모호함과 혼란과 적대감을 갖고 바라보지 않죠.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예수님의 얼굴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죠.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수건이 벗겨집니다. 하나님의 율법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 옛 언약과 그 목적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볼 때 모든 것이 분명해집니다. 구약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이 무엇인지 깨달았던 사람들은 그 율법으로 인해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긍휼과 은혜를 간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그들을 위해 죽으실 그리스도의 공로를 근거로 하여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구약 성도들은 새 언약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모든 영광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왜냐고요? 아직 그리스도를 몰랐기 때문이죠. 그리스도께서 아직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죠.

모세를 기억하십시오. 모세가 다시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뵐 때에, 34장 34절입니다.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할 때에는 수건을 벗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드러내 주시는 영광을 바라보았습니다. 물론 그 영광의 일부만을 본 것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의 모습입니다. 수건이 벗겨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안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이제 4장 6절을 보겠습니다. 6절입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빛을 비추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켜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고, 그 안에서 비추는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누군가가 여러분 앞에서 기가 막힌 논리를 펼쳤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뜨고 “이제 이해가 되네”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이해되는 게 아닙니다. 어떤 논리를 따라가다 보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말씀을 근거로 그분이 하나님이실지도 모른다고 설득되어서 일어나는 일도 아닙니다. 어느 날 여러분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게 되고, 그 얼굴 안에서 타오르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분 안에 빛을 비추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분명해진 겁니다.

그러나 신약이 기록되기 전에는 구속의 모든 과정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도들은 우리가 보는 것처럼 그렇게 분명하게 보지 못했습니다. 새 언약이 훨씬 더 뛰어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죠. 이보다 더 분명하게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구약 성도는 아마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하늘에 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성막이나 성전에 임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한 번 보았다.”

사도들도 아마 이렇게 말할 겁니다. “나는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그러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성경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려진 것이 없이 모두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과는 그 어느 것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육신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믿음의 눈과 깨달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죠. 새 언약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얼굴을 직접 바라보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수건이 벗겨졌습니다. 우리는 산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얼굴에서 빛나는 하나님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예언의 말씀을 붙들고 누구를 말하는 건지, 언제 이루어질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인지를 헤아리면서 애써 이해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이상 모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타오르듯 드러난 계시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안에서 직접 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바로 드러난 하나님의 속성이죠. 그 모든 속성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영광을 보았습니다. 영광이 무엇입니까? 은혜와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 속에서 드러났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긍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느 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사람을 지으신 분이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율법을 주신 분이 율법 아래에 태어나셨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존귀와 위엄으로 옷 입으신 분이 강보에 싸이신 것을 보았습니다. 연약함 가운데 오신 분이 권능 가운데 다시 오실 것을 보았습니다. 그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모든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이신 분이 자라가며 지혜와 키가 더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보라 너희 하나님이시라”라고 선포된 분이 빌라도 앞에서 “보라 이 사람이로다”라고 선포된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모든 무릎을 꿇게 하실 분이 친히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시고, 죄를 짓지도 않으시고, 죄가 없으신 분, 그 안에 죄가 전혀 없으신 분께서 우리의 죄를 친히 몸에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보았습니다. 어느 날 빛이 비추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 세상에서 버림받으신 분이 하늘에서는 받으신 바 된 분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시 면류관을 쓰셨던 분이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받으실 분이심을 보았습니다. 나무에 달리셨던 분이 보좌에 앉으실 분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죄를 없애기 위해 나타나셨던 분이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고 계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죽으러 오셨던 분이 다시 오셔서 다스리실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분명해졌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빛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16절입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더 이상 모호하지 않습니다.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구원을 의미합니다. 죄에서 돌이켜 주께로 돌아갈 때, 그 수건이 벗겨집니다. 더 이상 가려진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모든 것이 그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싶으십니까? 예수님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시는지 알고 싶으십니까? 예수님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어떻게 반응하시는지 알고 싶으십니까?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빛을 비추지 않으시면 그 영광을 결코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계시를 깨닫게 하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이제 이 위대한 진리를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한 구절을 보겠습니다. 새 언약이 얼마나 그리스도 중심인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다…” 여기서 잠시 멈추겠습니다. “우리가 다”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모세의 경험을 예로 설명을 해 왔는데요, 그 장면에서 수건을 벗고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은 단 한 사람, 모세뿐이었습니다. 모세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모세만이 산에 올라가서, 34장 34절이죠, 수건을 벗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바울은 말합니다. 더 이상 한 사람이 아니다, 특정한 한 순간도 아니다, “우리가 다”입니다. 선지자만이 아니다, 사도만이 아니다, 설교자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 다이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우리 모두가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다시 그림자로 돌아가려고 합니까? 왜 다시 모형과 의식과 상징과 의례로 돌아가려고 합니까? 그런 형식적인 예배로 돌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높이며 예배할 뿐이죠. 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도구나 형식에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의식, 절차, 반복에 의존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상징을 보여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실체를 붙잡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수건이 벗겨졌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바라보고 있습니다.

바울은 아주 간결하게 표현했습니다.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왜 이런 표현을 썼을까요? 공감대가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거울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부연 설명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죠. 거울이 얼마나 깨끗했는가가 초점이 아닙니다.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는 도구라는 게 초점입니다. 당시의 거울은 금속의 표면을 곱게 갈아서 만들었습니다. 안경도 없는데다가 사람들의 시력이 그렇게 썩 좋지가 않았기 때문에 사물을 뚜렷하게 보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주 잘 연마된 금속 거울처럼 정교하게 다듬어진 표면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또렷하게 볼 수 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바라보는 것이죠. 바울은 지금 이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새 언약 안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매우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아무리 잘 두드리고 펴서 만든다 하더라도 그 금속 거울이라는 것은 완벽할 수가 없습니다. 늘 어느 정도의 굴곡이 남아 있죠. 오늘처럼 아주 정교한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완전히 평평하게 만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표면에 비추는 것보다는 선명하게 볼 수 있었지만, 완전한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또 하나를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지는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거울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있지만, 완전한 모습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고린도전서 13장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장차 완전한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보는 이 다소 불완전한 시야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은 장엄하고, 놀랍고, 그리고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가로막는 것 없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 영광을 분명하게 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신 분입니다. 마태복음 17장을 보면, 산에 올라가셨을 때에 예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육신의 수건을 잠시 거두신 것이죠. 1절부터 2절입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베드로도 이 사건에 대해서 기록했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믿음의 눈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도 그 영광은 보지 못합니다. 로마 사람들도 보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았을 뿐이죠. 유대 지도자들도 보지 못했습니다. 침을 뱉고 저주하고 조롱하면서 자기들 위에 왕 노릇하지 못하도록 막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국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삶입니다. 수건을 벗기고, 믿음의 눈으로 가리워지지 않은 그리스도를 보게 하는 능력, 그 능력은 오직 새 언약 안에 있습니다. 바울에게도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아주 두꺼운 수건이 있었죠. 회심하기 전의 바울은 매우 경건하고 종교적이고 열심 있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바울은 자기 의로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그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없죠.

바울의 간증을 보면,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깨어지고 부서진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나옵니다. 영적인 교만으로 아주 가득했던 사람도 나옵니다. 저는 바울이 진정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던 구약의 참된 성도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일 정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다면,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겠습니까? 좀 더 자연스럽게 신약의 믿음으로 이어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바울이 교만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잘못 적용해서 구원을 얻으려고 했던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저는 바울이 진실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간증을 보면 분명히 자기 의를 세우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했죠. 빌립보서 3장을 보면서 바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문자주의자였습니다. 생명을 주지 못하는 율법 조문 아래에서, 결코 이룰 수 없는 방법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애쓰던 사람이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4절입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육체를 자랑하려면 내가 가장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다.

육체적으로 얼마나 많이 성취했는지 말하고 싶어? 언제든지 비교해 봐. 내가 제일이야. 영적인 사람의 말이 아니죠. 참된 성도의 말입니까? 죄로 인해 깨지고 부서져서 하나님 앞에 통회하는 마음으로 긍휼과 은혜를 구하는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전혀 아니죠. 자신감으로 가득 찬 사람의 말이죠.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보아라.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의식으로 구원을 얻었다면 내가 그렇다. “이스라엘 족속이요,” 혈통으로 구원을 얻었다면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야. “베냐민 지파요,” 특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바로 나야.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전통으로 구원을 얻어? 그건 나지. 전통을 철저하게 지켰다는 말입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종교로, 율법주의로 구원을 얻는다고? 그게 바로 나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들로서, 당시 약 6천 명 정도가 있었습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열심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내가 그랬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도덕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나지. 의식, 혈통, 특권, 전통, 종교, 열심, 도덕, 이 모든 것을 나는 다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전에는 이런 것들이 유익하다고 여겼다. 구원을 이루어 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는 완전히 달라졌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셨습니다. 안에서만이 아니라 밖에서도 빛을 비추셨습니다. 하늘의 빛으로 바울을 비추셨습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밝아졌습니다. 그동안 유익하다고 여겼던 것들을 7절에서 무엇으로 여긴다고 합니까? 해로 여긴다고 합니다. 수건이 벗겨진 것입니다.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다른 모든 것은 다 해로 여깁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모든 것은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가 전부입니다,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얻는 것, 그것만 원했습니다. 그리스도만을 원한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은 율법에서 의를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불가능했죠.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그리고 이제 수건이 벗겨졌습니다. 그 후에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9절입니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더 이상 율법에서 나온 자기 의를 붙들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를 붙듭니다.

수건이 벗겨졌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전부가 되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배설물 같았습니다. 쓰레기였습니다. 아무 가치 없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더럽고 가치 없는 것을 가리키는 헬라어 표현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리스도가 전부입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것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다시 그림자와 모형으로 돌아가려고 할까요? 왜 구원할 수 없는 것들, 그림자에 불과한 것들로 돌아가려고 할까요? 왜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뒤로 하고, 상징과 의식과 형식과 절차에 머무르려고 할까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끊임없이 이런 간증을 듣습니다. 한 주도 빠짐없이 듣습니다. 제가 직접 듣거나, 세례 간증을 통해 듣거나, 편지를 통해 읽습니다. 이렇게 말하죠. “저는 오랫동안 가톨릭 교회에 있었지만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감리교회에 있었지만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기독교라고 불리는 종교 안에 있었지만,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그동안 수건이 덮여 있었던 것이죠. 보지 못했던 것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었습니다. 새 언약 안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붙드시고 변화시키시며 빛을 비추셨을 때에 비로소 이 일이 일어났습니다. 새 언약이 뛰어난 이유는 생명을 주고, 의를 가져오고, 영원하고, 소망을 주고, 분명하고, 그리스도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일곱 번째로 넘어가겠습니다. 오늘은 일곱 번째 일부만 말씀을 드릴 겁니다. 새 언약의 능력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타납니다. 새 언약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역사합니다.

앞에서 짧게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다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옛 언약에는 순종하게 하는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에는 성령의 능력이 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매우 놀라운 진리를 열어 줍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율법이 뭡니까? 간단히 말하면 율법은 속박입니다. 율법은 죄인을 가두는 감옥입니다. 율법은 죄인을 죽음과 지옥 아래에 가두어 둡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자유를 줍니다. 그 자유를 이루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6절에 나옵니다.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새 언약은 죄수에게 자유를 줍니다. 감옥의 문을 열어젖힙니다. 수치와 죄책과 후회와 실패와 두려움과 공포와 죽음과 지옥이라는 감옥에서 죄인을 끌어내 자유롭게 합니다.

“언제든지”라는 단어를 보십시오. 무슨 뜻입니까?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바로 주님께서 자유를 주시는 영이시라는 뜻입니다. 옛 언약의 지배가 끝나고, 새 언약의 죄를 사하는 약속이 시작될 때에, 죄수를 자유롭게 하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자유를 주시는 성령이십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저는 이 새 언약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나님이 주신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왜냐하면 여호와의 언약, 하나님의 언약이라면 분명히 구약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주님은 새 언약 안에서 자유를 주시는 성령이십니다. 같은 여호와이십니다.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새 언약의 자유는 옛 언약의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옛 언약만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옛 언약을 통해 사람을 절망에 이르게 하고, 그 절망 가운데서 긍휼과 은혜를 구하도록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새 언약에 근거하여 그 은혜를 베푸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죠.

그러므로 새 언약을 통한 구원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분명합니다. 주님이신 성령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언제나 그렇습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언제나 동일합니다. 모든 구원은 그리스도의 새 언약 사역에 근거합니다. 그리고 모든 구원은 언제나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집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 사람들이 왜 그렇게 혼란스러워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혼란을 느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주의 영, 성령께서 구원의 주체이십니다. 과거에도 그러셨고, 지금도 그러시고, 앞으로도 항상 그러실 겁니다. 성령님은 언제나 새 언약의 구원과 그 모든 은혜를, 회개하는 신자에게 적용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느 시대든지 동일합니다. 성령님의 사역은 곧 거듭나게 하는 사역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서 질문이 한 가지 생깁니다. 다음 시간에 조금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아주 간단하게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약에서 성령님은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무엇을 하셨습니까? 구약 전체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 답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어렵지가 않습니다.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죠.

아주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약 전체를 살펴보면 성령님의 사역은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성령님은 네 가지 방식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제가 이 네 가지를 나누어 말씀드리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혼란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특히 시대를 구분해서 성령께서 각 시대마다 전혀 다른 일을 하신 것처럼 말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성령님의 사역은 본질적으로 항상 동일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성령님의 사역은 본질적으로 언제나 동일합니다.

이제 구약 시대에 성령님이 하신 네 가지 사역을 살펴보겠습니다. 첫번째, 창조입니다. 창조입니다. 성령님이 창조에 중요한 역할을 하신 것은 매우 분명합니다.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창조(ex nihilo)는 아닙니다. 요한복음 1장은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가 없이는 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시간, 공간, 물질, 에너지, 이 모든 창조의 근본 요소를 만드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을 보십시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리고 이어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로서, 그리스도를 통해 무에서 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형태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때 성령님이 그 위에 운행하셨습니다. 성령의 역할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창조의 형태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신 아들을 통해 물질과 시간과 공간과 에너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공허하고 혼돈한 상태였습니다. 성령님이 그 위에 운행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질서와 형태로 만드셨습니다. 욥기 33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4절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시편 104편, 또 다른 시편에서도 동일한 강조점이 나타납니다.

제가 덧붙여 말씀드리고 싶은 본문은 이사야 40장입니다. 여기에는 성령님의 창조 사역이 매우 흥미로운 방식으로 언급됩니다. 12절부터 보면 이렇습니다.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쟀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접시 저울로 산들을, 막대 저울로 언덕들을 달아 보았으랴.” 모든 게 창조 사역입니다. 그리고 다음 13절입니다.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누가 성령님이 창조하시는 일을 도왔겠습니까? 여기서 강조하려는 핵심입니다. 성령님은 창조하고 계셨고, 그 창조를 위해 아무 도움도 필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창조에 있어서 삼위 하나님의 사역 가운데 성령님께 맡겨진 역할은 여섯째 날의 창조 사역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설계대로 질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절정은 물론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에서 유를,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그렇게 창조된 실체와 생명의 원리를 가지고, 아버지께서 설계하신 모든 것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창조 세계의 모습으로 빚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구약 전체를 통해 성령님이 창조에 관여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둘째는 능력을 주시는 사역입니다. 구약에 이런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누구누구에게 임하매 그가 이런 일을 하였다.” 이런 표현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구약 전체에 걸쳐서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때로는 “여호와의 영이 떠나셨다”라고도 합니다. 아주 자주 나오는 표현입니다.

자, 이제 잘 들으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이 표현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구약 시대 신자들과 성령님 사이의 일반적인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의도가 아닙니다. 결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만일 성령님이 떠나신다면, 누가 신자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요? 어느 시대든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생명은 인간이 스스로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성령님이 임하셨다가 떠나셨다고 말하는 것은 신자의 일반적인 경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상한 경우, 그러니까 능력을 주시는 사역을 말하는 겁니다. 성령님이 특별한 사람들에게 임하셔서,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을 이루도록 하시는 경우를 가리킵니다. 특별한 사명을 위한 것이죠.

잘 들으십시오. 성령님이 어떤 사람에게 임하셨다거나 떠나셨다라고 말을 할 때마다, 언제나 특별한 능력이 부여되었다는 뜻입니다. 결코 개인의 구원 문제와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이 모든 본문을 모아 보면, 성령님이 임하셨거나 떠나셨다고 기록된 사람들은 네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네 부류입니다. 첫째는 사사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막중한 책임을 맡았던 사람들이죠. 성령께서 임하셨다가 떠나셨던 사사는 네 명이 있습니다. 옷니엘, 입다, 기드온, 삼손입니다. 사사기를 보시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 네 사람에게만 해당이 되는 사항입니다. 그리고 매번 그때마다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매우 특별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삼손에게서 하나님의 영이 떠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어떻게 됐죠? 약해졌습니다. 힘이 빠졌죠. 다른 사람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이 다시 삼손에게 임하셨을 때는 어떻게 됐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을 쳐 죽일 수 있었죠. 건물 전체를 무너뜨릴 수도 있었습니다. 삼손이나 그 어떤 인간의 능력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옷니엘, 입다, 기드온, 삼손, 이 사람들은 성령님이 임하셨던 사사입니다.

두 번째는 장인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과 관련된 작업을 맡았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사용될 물품들을 만들어야 했죠. 매우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께서 특별한 능력을 주셔서 그 일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지도자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통치자입니다. 네 사람이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모세, 다윗, 사울, 여호수아입니다. 이들은 모두 동일한 경험을 했습니다. 성령님이 임하셨다가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죠. 일반적인 영적 삶의 모습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매우 중요한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주어진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이 내용은 시편 51편 11절에서 아주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시편에서 다윗이 밧세바와 죄를 범하고서 남편을 죽게 한 이후에, 자신의 죄에 대해 깊이 통회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영께서 다윗에게 죄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무슨 말일까요? “제 구원을 거두지 마세요” 이런 말일까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진노하시면 구원받지 못한 상태로 만들어 버리신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서 성령을 거두셔서 성령 없이 신앙생활을 하게 하신다는 뜻일까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다윗의 말은 이런 뜻입니다. “제가 왕으로서 통치할 수 있도록 주셨던 능력을 거두지 마옵소서.” 바로 이겁니다. 구원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왕으로서의 직무와 관련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왕의 책임과 연결된 것이죠. 다윗은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신정 국가의 왕으로 세움을 받았죠. 그 책임은 인간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통해 그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죠.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께 이렇게 간구한 겁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효과적으로 왕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시는 그 특별한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거두지 마옵소서.”

성령께서 임하셨다고 말하는 또 하나의 범주가 있습니다. 네 번째이죠. 선지자들입니다. 선지자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누구에게 임하셔서 말하였다” 이런 표현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계시를 위한 것입니다. 아하시야, 야하시엘, 스가랴, 발람, 아마새가 있었고, 엘리야, 엘리사, 미가, 이런 선지자도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성령이 임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아주 독특하고 특별한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에스겔 11장 5절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주 전형적인 표현이죠. 성령께서 임하셔서 말씀하십니다. 선지자들에게 반복해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입니까? 사사들에게 임하신 성령님의 사역은 매우 특별한 형태였습니다. 사사들은 구원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세워진 사람들이죠. 지도력에 있어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개입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또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과 관련된 영역에서 특별하게 쓰임받은 장인들도 있었습니다. 또 지도자들이 있었죠. 모세, 다윗, 사울, 여호수아와 같은 인물들입니다. 핵심적인 지도자들입니다. 성령이 임하셨다고 명시적으로 기록된 경우는 이 네 사람뿐입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선지자입니다.

자, 그러니까 구약에서 성령 하나님의 첫번째 사역은 창조입니다. 두번째 사역은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특정한 사명을 감당하게 하기 위해서 특별히 부여된 능력입니다. 세번째 사역은 계시입니다.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저자도 근본적으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숨입니다. 프뉴마(pneuma),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은 성령으로부터 나옵니다.

베드로후서 1장 20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성령님이 성경의 저자이십니다. 스가랴 7장 12절입니다.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영으로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스가랴 7장 12절입니다.

구약 시대에 성령님은 무엇을 하셨을까요? 창조에 관여하셨습니다. 모든 형태와 구조를 이루셨습니다. 능력을 주시는 일에 관여하셨습니다. 계시에 관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네번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거듭남에 관여하셨습니다. 자, 이제 여기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성령님은 구약 시대에도 거듭남에 관여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구약이 거듭남을 가르치나요?” 어떤 사람들은 가르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구약에는 새로 태어나는 것도 없고, 거듭남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생각, 잘못된 겁니다. 성령님께서는 생명을 주시는 영이십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아직 완전히 성취되지 않았던 새 언약을 근거로 해서, 구약 신자들의 삶 속에서도 성령의 능력이 역사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신자들도 실제로 거듭났습니다. 실제로 새롭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변화되었습니다.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에 거듭남이 없다고 가르치면 안 됩니다.

거듭남 이전에 성령님은 무엇을 하십니까? 무엇을 하실까요? 신약의 말씀을 보면, 요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신약에 와서야 새롭게 이 일을 시작하셨습니까? 성령께서 이전에는 이런 일을 하신 적이 없으셨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창세기 6장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하나님의 영께서 죄된 인간의 마음과 씨름하시는 일은 신약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죄를 깨닫게 하시는 사역도 신약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성령님이 죄가 세상에 들어온 그때부터 계속해서 죄를 책망해 오셨다고 믿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전적 타락은 칼빈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가 정리하고 설명했을 뿐이죠. 전적 타락은 타락 이후부터 계속되어 온 현실입니다. 전적 타락은 우리가 그것을 이해한 순간부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신약에서 갑자기 시작된 것도 아닙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그대로 두면 스스로 죄책을 깨닫지 못합니다. 깊이 살피시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악함과 죄됨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구약 시대의 사람들도 오늘날 사람들과 똑같이 타락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십자가 이전이냐 이후냐가 인간의 타락을 바꾸지 못합니다. 이 문제는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아담이 타락했을 때, 온 인류가 함께 타락을 했고 그 이후부터 계속 그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구약 시대 사람들도 타락해 있었습니다. 타락했다는 것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본질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동일한 정도로 악한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자신의 죄 문제에 대해서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는 동일합니다.

신약에서 타락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한번 들어보십시오. 로마서 3장입니다. 사도 바울이 십자가 이후에 기록한 말씀이죠. 분명히 신약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부터 시작해서 타락의 상태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이 모든 말씀이 어디에서 온지 아십니까? 구약입니다. 대부분 시편의 인간 타락에 대한 묘사에서 가져온 말씀입니다.

이렇게 완전히 타락한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성령 하나님이 개입하셔야만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개입하셨을 때, 그 사람이 갑자기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이렇게 고백할 수 있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만일 그 사람의 구원이 단지 법적인 선언, 그러니까 외적인 선언에 불과하고 거듭남이 전혀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자리까지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의 규례를 기쁨으로 여기고, 입에 꿀보다 더 달고 정금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그런 자리까지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기를 원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까지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만일 단지 법적인 의,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만 하시고 실제로 거듭나게 하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시편과 같은 마음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럴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의 책망하시는 사역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성령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사역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인간 존재는 깊은 곳까지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전적으로 타락했습니다. 죄를 이길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예레미야가 말했죠.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결코 바꾸지 못하죠. 그렇다면 어떻게 노아가 의인이자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불릴 수가 있었을까요? 성령님이 아니고서야 가능이나 했을까요? 스스로 그렇게 될 수 있었을까요? 아브라함은 또 어떻습니까?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그렇게 될 수 있었을까요?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치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자리까지 나아갔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모세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었을까요? 또 열왕기상 15장 3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어떻게 다윗의 마음이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더 나아가, 로마서 4장과 갈라디아서 3장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거듭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거듭난 믿음의 본이 될 수 있겠습니까? 단지 법적인 선언, 외적인 선언, 형식적인 선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변화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아브라함을 그렇게 변화시켰습니까?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히브리서 11장으로 가 보십시오.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모두 구약 시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믿음의 삶이 얼마나 참된 것인지를 우리에게 증명해 주었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아브라함, 야곱, 사라, 모세를 비롯해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모두 구약 시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우리가 본받아야 할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었을까? 그들은 반드시 거듭났어야 합니다. 그 교리가 신약에서 더 분명하게 정리되었다고 해서, 그 사실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한 가지 예를 들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요한복음 3장입니다. 잘 들으셔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은 이미 성경의 절반 이상을 지나서 신약에 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새 언약 시대에 들어선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아직 죽지 않으셨고, 부활하지도 않으셨고, 성령님도 아직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예수님과 니고데모라는 유대 지도자 사이에 이루어진, 구약 시대 상황 속에서의 대화입니다. 니고데모와의 대화입니다. 이 대화의 내용은 십자가나 부활, 오순절 성령 강림과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아직 그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죠.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께 찾아와서 하나님 나라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교회에 찾아가서 새신자 등록 방법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물은 겁니다. 그때 3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반드시 변화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언약에만 해당되는 진리입니까? 아니죠. 십자가 이전에 살던 유대인에게도 적용되는 아주 기초적인 진리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거듭나야 합니다.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단순히 의롭다고 선언된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거듭나서, 새로운 생명의 원리를 소유한 사람에게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이 말로 인해서 니고데모를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니고데모가 어리석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니고데모는 매우 뛰어난 학자였습니다. 이런 의미로 물은 겁니다. “제가 이미 종교의 길을 여기까지 걸어왔는데, 어떻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까? 저보고 어쩌라는 말씀입니까?”

유대인에게 종교란 평생에 걸쳐서 의를 쌓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방식이죠. 그러니까 이런 말입니다. “제가 이미 여기까지 왔고, 바울처럼 수많은 것을 쌓아 놓았는데, 어떻게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여기서 물과 성령은 에스겔 36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새 언약인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실 구원 안에 있는 씻음이죠. 정결하게 하시는 씻음입니다. 물이 가리키는 의미이죠. 그리고 성령의 사역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그리고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육에서 나오는 것은 계속해서 육일 뿐입니다. 인간적인 의를 계속해서 쌓아가도 결국 더 많은 육일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 영적인 나라는 성령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눈으로 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영적인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 시대에도 거듭남이 필요했다는 증거입니다. 죄로부터 정결하게 되어야 하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하는 장면, 구약의 회심입니다. 바로 이겁니다. 증거가 분명합니다. 성령님이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님이 죄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믿음을 일으키실 때, 곧 구약의 성도 안에 믿음을 이루실 때에, 그 사람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 사람이 어떤 존재였든지 간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꾸십니다. 진리를 사랑하고, 율법을 사랑하고, 순종하기를 원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고, 예배하기를 원하고, 섬기기를 원하는 사람으로 바꾸십니다. 이 모든 ‘소원’은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사역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사역에 대해서 아주 일부분만을 나눴습니다. 아직 할 말이 많습니다. 다음 주에 계속해서 이어가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진리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지금 우리가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성령님이 이 진리를 우리 마음 깊이 실제적으로 적용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래서 예배와 찬양과 감사의 삶을 실제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관성에 감사드립니다. 새 언약의 복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에 감사합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음을 감사합니다. 성령님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음에 감사합니다. 율법은 죽이는 것이었지만 성령님은 살리시는 분이심에 감사합니다. 성령님은 과거에도 지금도 언제나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노아에게 생명을 주셨고, 모세에게 생명을 주셨고, 다윗에게 생명을 주셨고,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모든 믿음의 사람들과 그 외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게도 생명을 주셨습니다.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자유와 해방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고, 예배하고 찬양하고 순종하기를 갈망하게 하시며, 죄를 미워하고 회개하는 마음을 갖게 하신 성령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사역에 감사드립니다. 이 모든 것은 거듭나게 하시는 능력의 증거들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이 변함없이 일관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감사합니다. 그 사역이 지금 이 십자가 이후의 시대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는 더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영광이 가려지지 않은 채로 드러난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무 자격도 없는 우리에게 이 모든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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