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3장을 펴시기 바랍니다. 오늘 아침에도 6절부터 18절까지를 보겠습니다. ‘새 언약의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에게도 이 본문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어렵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제 예상보다도 훨씬 더 깊고 방대합니다. 그래서 다루고 싶은 주제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살펴보고 있습니다.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사도 바울은 지금 자신을 거짓 교사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에 맞서 변론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서 자신이 왜 참된 교사인지를 밝힙니다. 그중에서도 자신이 새 언약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6절에서 자신을 새 언약의 일꾼,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새 언약과 연결시킨 뒤에, 자연스럽게 새 언약과 옛 언약을 비교하며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 유대에서 온 할례당 사람들이 옛 언약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참된 하나님의 종, 참된 사역자, 참된 설교자, 참된 선지자, 참된 사도는 옛 언약이 아니라 새 언약의 진리를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기를 원했습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새 언약을 전하는 설교자임을 밝힌 후에, 이제 새 언약이 옛 언약보다 얼마나 탁월한지를 설명합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지난 4주 동안 살펴보았고, 오늘이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이제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한 배경을 조금 정리해 보겠습니다. 사탄의 가장 효과적인 속임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합니다.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두 어둠과 멸망에 속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납니다.
사탄의 가장 교묘하고도 강력한 영향력은,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면서도 마치 하나님과의 관계가 괜찮은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종교를 다양하게 만들어 냈습니다. 이 세상은 바로 그런 사탄의 속임수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습니다. 구원하지 못하는 종교, 오히려 사람을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뜨리는 종교로 가득합니다. 의식과 형식의 종교, 자기 의로움의 종교, 행위의 종교, 인간의 노력에 의존하는 종교, 성례와 형식에 매이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종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실제 상태를 깨닫지 못한 채 하나님 없는 영원한 죽음으로 들어가게 만듭니다.
제가 여러 해 동안 계속해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세상에는 단 두 가지 종교만이 존재합니다. 단 두 가지 뿐입니다. 하나는 참된 기독교이죠. 은혜로, 믿음을 통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인간의 성취, 인간의 노력, 인간의 행위, 인간의 의식에 기초한 종교입니다. 참된 기독교를 제외한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결국 이 하나의 거짓된 속임수의 또 다른 형태일 뿐입니다. 외적인 노력으로, 도덕적인 행위로, 종교적인 의식을 통해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속이는 것이죠. 이 속임수는 사람을 멸망으로 이끄는 아주 치명적인 거짓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교황이 불교도들도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 형제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무슬림들도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형제자매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도 이겁니다. 캘커타에서 병든 자들과 죽어가는 자들을 돌보았던 마더 테레사의 사역 현장에 힌두 신 그림이 있었던 이유도 이겁니다. 결국 모두 의식을 행하는 종교, 인간 성취의 종교, 스스로 이루어낸 의로움, 혹은 성례와 의식과 형식을 통해 얻는 의로움에 근거한 종교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일부 그리스 정교회, 그리고 또 일부 전통적인 고교회 개신교는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보다 오히려 비기독교 종교들과 공통점이 더 많습니다. 왜냐하면 외적인 행위, 의식, 성례, 수행, 형식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참된 기독교보다 오히려 다른 종교들과 더 많이 닮아 있습니다. 그래서 교황이 명백히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까지 포용하는 발언을 할 수 있는 겁니다.
반대로 우리는 분명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로마 가톨릭의 이방적인 형식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주장하는 종교일지라도, 다양한 형태의 유사 기독교 종교로부터 순수한 복음을 구별하여 지키는 것은 설교자에게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사명입니다. 바울도 고린도에서 바로 그 싸움을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면서 거의 2년 동안 머무르면서 고린도 교회를 세웠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잘 되어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물론 죄의 문제는 있었지만, 적어도 복음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유대인들이 들어와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단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구약의 의식과 형식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식과 형식과 행위를 더해야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 겁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구원은 새 언약과 옛 언약이 함께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새 언약만이 구원을 줍니다. 거짓 교사들은 할례라는 의식, 혹은 다양한 종교적 형식과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면서 순수한 복음의 흐름을 더럽혔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내면서 자신이 전한 것이 참된 진리, 새 언약의 복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신실한 목회자는 반드시 바울처럼 해야 합니다. 거짓 종교라는 형태로 들어오는 사탄의 속임수로부터 성도들을 지켜내야 합니다. 사탄은 매우 교묘하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기독교라는 이름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슬며시 끌어들입니다. 그래서 6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세우신 참된 사역자들, 새 언약의 일꾼들은 반드시 바울이 지고 있는 책임을 함께 져야 합니다. 구원을 주지 못하는 속이는 종교, 사탄의 종교, 사람을 멸망으로 이끄는 종교가 무엇이든지 간에,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든 아니든, 그것이 거짓이라면 분명하게 경고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뿐만이 아니라 모든 교회는 행위, 의식, 형식을 통해서 복음을 왜곡시키려는 모든 시도를 철저히 거부해야 합니다. 지난주에 이러한 내용을 함께 살펴봤습니다. 지금까지가 복습입니다. 이제부터는 바울이 새 언약이 어떻게 옛 언약을 대체했는지를 말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바울은 옛 언약이 폐하여졌다는 사실을 고린도 교회가 분명히 알기를 원했습니다. 히브리서 8장이 말하는 것처럼 옛 언약은 이제 지나갔습니다. 히브리서 전체가 새 언약을 옛 언약과 비교해서 설명한 내용을 고린도후서가 압축해서 보여줍니다. 히브리서를 통해서 이 문제를 다시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9장 15절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여기서 “그”는 14절에서 언급된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잘 따라오십시오.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보셨습니까?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첫 언약 아래 살았던 사람들이 범한 죄까지도 속량하셨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런 말씀입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아주 분명한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옛 언약 아래 살았던 사람들,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아직 태어나시기 전에, 아직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에, 다시 말해서 이 복음의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조차도 결국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일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반드시 이해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위한 완전한 희생의 죽음을 이루심으로써 새롭고 더 나은 언약의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죄에 대한 형벌의 삯을 죽음으로 완전히 지불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시대에 걸쳐서 회개하고 믿는 자들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이 값을 대신 지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리가 되셨습니다.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영원히 연결하는 유일한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 단번에 자신을 드리심으로써, 옛 언약의 제사장들이 수없이 드렸던 제사로도 결코 이룰 수 없었던 일을 이루셨다고 합니다. 그 제사는 단지 상징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으로 실제로 죄의 값이 대신 지불되었습니다. 그 대가를 완전히 치르셨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하나님과 영원히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죄입니까? 누구의 죄입니까? 바로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입니다. 이 부분을 사람들이 왜 혼동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약 시대의 사람들이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마음속에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구약 성도들도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했을 겁니다. 그 노력도 나름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분명히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율법을 생명의 길로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연약함 속에서도 기꺼이 순종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 준수 자체가, 혹은 메시아를 소망하는 것 자체가 구원을 가져온다고 생각한다면, 본질을 놓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구원한 유일한 근거는 십자가에서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뿐입니다. 성경은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예수님이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과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효력을 발휘합니다. 과거의 죄까지도 덮는 죽음이었습니다. 로마서 3장 24절과 2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금까지 복음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강조해서 설명해 왔습니다. 오랫동안 강조해 왔고, 책도 여러 권 썼습니다. 왜냐하면 이 부분에 대해서 혼란스러워 하는 것을 제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바로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 로마서 3장 24절부터 25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의롭다 하심은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속량을 통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덮으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이 은혜를 받게 하셨습니다. 계속 읽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에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들의 죄를 간과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죄의 간과가 의로운 일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가 오셔야 했습니다. 이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무 대가 없이 죄를 그냥 넘어가셨다면, 하나님은 의로우실 수 없습니다. 아무 근거 없이 죄를 용서하셨다면 하나님은 불의한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지 않겠어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시기에 죄를 그냥 넘어가십니까? 죄를 위한 희생은요? 공의는요? 어디 있습니까? 의로움은요? 율법의 요구는 또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떻게 그런 죄인들을 그냥 용서하실 수가 있습니까? 아무런 대가 없이 자비와 은혜를 베푸실 수가 있느냐는 말이에요.” 잘 따라오셔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완전한 속죄의 희생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불의하신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낮아진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얼마나 의로우신 분인지 반드시를 드러내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 시대에는 이미 지은 죄들을 간과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누구의 죄는 그냥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공의는 어딨습니까? 의로움은 어딨습니까? 거룩함은 도대체 어딨습니까? 죄를 지은 영혼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원리는 어디다 두셨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공개적으로 나타내셨습니다. 그로써 하나님께서 참으로 의로우신 분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공의로우신 분이시고, 완전히 의로우신 분이시며, 자신의 변하지 않는 법을 철저히 준수하셔야 하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래서 죄는 완전한 희생의 죽음 없이는 결코 용서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에 너무도 철저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바로 그 사건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공의와 의로움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자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과거에 죄를 간과하신 것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죄를 위한 희생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흘려지기까지 수백 년, 혹은 수천 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지만 말이죠.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훨씬 이전에 살았던 구약의 신자들에게 구원은 말하자면 외상으로 주어졌습니다. 외상입니다. 회개해야 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믿어야 했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많은 것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받기 위해서 무엇을 믿어야 했을까요? 하나님이 드러내신 계시를 믿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긍휼과 은혜의 하나님이시고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했습니다. 또 자기 안에는 그 죄를 해결할 아무 능력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죄를 위한 속죄를 마련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마음과 생각으로 믿어야 했습니다. 자, 그러므로 구약 시대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그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에 자신을 맡기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합당한 희생을 마련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요구되었습니다. 바로 그 믿음과 회개를 근거로 해서 하나님께서는 구약 성도들에게 외상으로 구원을 주셨습니다. 장차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죽음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셨고, 참으로 회개하고 믿는 자들의 죄를 간과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들의 죄를 실제로 해결하실 때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자, 잘 들으십시오. 옛 언약의 의식과 제사들은 실제로 구원을 이루는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희생을 상징할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구원은 언제나 은혜로, 언제나 믿음을 통해, 언제나 새 언약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역을 통해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도대체 왜 너희는 구원을 받기 위해 옛 언약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바울은 이 기회를 통해서 거짓 교사들에게 맞서 변론하면서, 동시에 새 언약이 옛 언약보다 얼마나 뛰어난지를 보여줍니다. 자,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새 언약이 더 뛰어나다는 사실은 이제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번째, 새 언약은 생명을 줍니다. 6절에서 살펴보았죠. 두번째, 새 언약은 의를 이룹니다. 7절, 8절, 9절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세번째, 새 언약은 영원합니다. 10절과 11절에서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이처럼 새 언약과 새 언약의 일꾼들은 탁월합니다. 새 언약은 생명을 주고, 의를 이루게 하며,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네 번째로 넘어가겠습니다. 새 언약은 소망을 줍니다. 12절입니다.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새 언약은 소망을 줍니다. 옛 언약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 많은 제사도 결코 마지막 제사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항상 또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으로 이제 제사는 완전히 끝났습니다. 그래서 참된 소망을 제공합니다. 죄가 실제로 완전히 해결됨으로써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너무나 확실합니다. 견고합니다.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확정된 소망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복음을 담대하게 전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소망이란 무엇일까요? 아주 분명합니다. 새 언약의 모든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입니다. 그렇다면 새 언약은 무엇을 약속합니까? 완전하고도 철저하며 영원히 지속되는 죄 사함을 약속합니다.
우리의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옮기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에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말해서, 이 모든 것은 결국 새 언약에서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사역을 근거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새 언약은 풍성한 새 생명을 주고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하늘의 소망을 줍니다.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새 언약의 영광은 너무나 크지만, 아직 완전히 드러난 것은 아닙니다. 새 언약 안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새 언약은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까지 보증합니다. 영광스러운 미래를 보증합니다. 새 언약은 과거 십자가에서 확증되었고, 현재는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적용이 되고 있고, 미래에는 그 충만함을 경험할 것입니다. 우리는 새 언약 안에 있지만, 그 모든 충만함을 아직 다 경험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로마서 8장을 보십시오. 바울은 우리가 소망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새 언약은 소망을 품고 있습니다. 옛 언약은 이제 어떤 의미에서 소망이 없습니다. 옛 언약은 사람의 죄를 계속해서 드러내면서 끊임없이 죄인을 찌르고, 찌르고, 또 찌르고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소망을 줍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고난을 겪어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나타날 영광을 소망하기 때문이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그 날, 그 영광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직 완전히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우리는 소망 가운데 구원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새 언약 안에는 본질적으로 소망이 담겨 있다. 영광스럽고, 가슴 벅차고, 놀라운 기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 가운데 나타날 그 날을 바라보는 소망입니다. 이어서 로마서 15장 13절에서 바울은 축도로 이렇게 말합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소망 가운데 살아갑니다.
제가 어제 병문안을 다녀왔습니다. 최근에 가벼운 뇌졸중을 경험한 허브 클링겐(Herb Clingen)씨와 한 시간 정도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의료진이 심장에 영향이 있는지, 손상이 있는지 확인을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검사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허브 성도와 함께 80세를 넘기면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허브 형제는기쁘고 생기가 넘치고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죽음의 가능성도 있는 지금의 현실에 대해서도 아주 담대하게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시더라구요. 왜냐하면 허브 형제에게 죽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망을 가진 자의 삶의 모범입니다. 소망의 삶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13장에서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라고 했습니다. 구원의 어떤 측면일까요? 충만함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5절에서도 새 언약 안에 있는 소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저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또한 여전히 소망 가운데 살아갑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으십니까? 로마서 7장에 나오는 바울의 고백을 저는 이해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여러분, 그렇지 않으세요?
저는 이 바울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완전히 구속받은 사람으로서 여전히 구속되지 않은 육신 안에 살면서 끊임없이 경험하는 전쟁, 이 전쟁을 저는 이해합니다. 그러나 언젠가 이 싸움이 끝나고, 완전하고 온전하게 의롭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위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자, 그러니까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도 바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우리가 무엇을 소망해야 하는지를 알기를 원했습니다. 영원한 상급이 무엇인지를 알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하늘의 영광, 의로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그 완전함을 바라보기를 원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바라보십시오. 앞을 바라보십시오.
지금은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지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날이 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우리가 그를 있는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죠. 우리의 큰 소망입니다. 우리는 이 소망 가운데 구원을 받았습니다. 에베소서 4장 4절에서 바울이 말한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가 말하는 소망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이 소망을 분명히 바라보았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3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우리의 소망이 어떻다고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얻는 것입니다. 하늘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큰 소망입니다. 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 우리에게 주어질 은혜를 소망하라는 것입니다. 21절입니다.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바울은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새 언약 안에 있는 이 소망 때문에 우리는 담대하게 말합니다. 거리낌이 없습니다. 숨기지 않습니다. 주저하지 않습니다. 망설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분명하게, 공개적으로, 솔직하게 이 진리를 전합니다.
우리는 새 언약의 진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주저하지 않고 전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새 언약은 유대인들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새 언약은 소망으로 가득 차 있으므로 우리는 어떤 충격이 있더라도, 그로 인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더라도 두려움 없이 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바울이 치른 대가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담대히’라는 단어를 잠시 보겠습니다. 헬라어로 파레시아(parrhēsía)인데요, 용기 있게 거리낌 없이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주어지는 새 언약의 약속에 대해 나는 확신한다. 그 확신이 내 마음을 소망으로 가득 채운다. 옛 언약이 결코 줄 수 없었던 소망이다. 절망과 두려움과 의심을 제거하고, 기쁨과 평강과 소망을 가져다 준다.
나는 이 사실을 너무나 확신하기 때문에 담대하게 거리낌 없이 말한다.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어떤 박해가 오더라도 주저하지 않는다. 나는 이 진리를 감출 수 없다. 멈출 수 없다. 주저할 수 없다. 이제 바울은 자신의 이러한 담대한 태도를 모세와 대조합니다. 이 본문의 배경이 되는 출애굽기 34장을 보십시오.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율법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사건입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살펴본 내용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모세는 얼굴에 수건을 썼습니다. 매우 의미 있는 장면입니다. 모세는 바울처럼 담대할 수 없었습니다. 율법을 그대로 바라보면 사람을 눈멀게 할 수도 있고, 태우기도 하고, 상하게 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모세는 얼굴을 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은 출애굽기 34장을 배경으로 자신의 사역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율법을 전달한 후에는 곧바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율법을 받을 때 임했던 하나님의 빛나는 영광이 사람들에게 그대로 드러나 버리면 사람들을 태워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죠. 마치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과 같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이 타버릴 것 같은 강렬한 빛이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영광스럽지만 동시에 사람을 무너뜨리고 상하게 하는 그런 언약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새 언약은 소망을 준다. 영원하다. 의를 이루게 한다. 생명을 준다. 자, 이제 다섯 번째로 넘어갑니다.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다시 모세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잠시 출애굽기 34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은 이 사건을 하나의 비유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출애굽기를 함께 살펴봐야 하는 겁니다. 출애굽기 34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함께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바울은 새 언약이 옛 언약보다 얼마나 뛰어난지를 설명하면서, 모세가 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건을 예로 사용합니다. 모세가 내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던 그 사건입니다.
바울은 그 사건에서 여러 가지 영적인 의미를 끌어냅니다. 이제 33절 이하를 보겠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기억하십시오. 모세는 얼굴에 영광의 빛이 나는 상태로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백성들은 그 빛을 정면으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옆으로 시선을 돌려야 했습니다. 빛이 나는 것은 보았지만, 직접 볼 수는 없었습니다. 모세는 말을 마친 이후에 일상적인 생활을 위해서 자신의 얼굴을 가렸습니다. 영광의 빛을 가려서 백성들 사이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수건으로 얼굴을 덮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령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며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모세의 얼굴 피부가 빛났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다시 수건으로 얼굴을 덮었습니다.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서 말씀을 들을 때에는 그 수건을 벗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수건을 벗고, 말씀을 전할 때에도 수건을 벗은 상태로 전했습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은 모세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율법이 전달될 때 나타나는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다시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무슨 의미입니까? 옛 언약의 사라져 가는 영광은 본질적으로 가려져야 했습니다. 너무나 강렬했고, 너무나 치명적이고, 너무나 두려운 것이었죠. 계속해서 그대로 드러내면 사람을 눈멀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뿐만이 아닙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보면,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옛 언약 전체가 본질적으로 그림자로써 가려진 상태였다는 겁니다. 잠깐 비쳐 보였다가 다시 가려지는 모형이요, 그림이요, 상징이요, 신비였습니다. 수건이 바로 그 사실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모세는 옛 언약의 영광을 전할 때 일부를 가렸습니다.
모세는 그 영광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 얼굴에 나타난 영광은 밝고 강렬했지만,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까지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 영광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었습니다. 모세가 항상 수건을 쓰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영광을 받은 직후에만 수건을 썼습니다. 하나님과 말씀을 나눌 때에는 수건을 벗었고, 말씀을 전할 때에도 수건을 벗은 상태였습니다. 그 영광이 사라질 때까지 수건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동안에는 가려져야 했다는 사실이죠.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핵심입니다. 모세는 수건으로 영광을 가렸습니다.
옛 언약에는 무엇가 가려진 것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구약의 선지자들은 기록하고 나서도 자신들이 기록한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기 위해서 계속해서 연구했습니다. 그 안에 신비가 있었습니다. 이 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좋은 예가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오랫동안 연구해 왔죠. 그 말씀을 통해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이해하려고 최선을 다합니다만, 솔직히 말해서, 여전히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해석하려고 하지만,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나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그 뜻을 온전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계속해서 찾고, 또 찾고, 또 찾죠. 짐 스티칭거(Jim Stitzinger)가 2주 전에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존 칼빈(John Calvin)은 신약의 거의 모든 책에 주석을 썼지만, 요한계시록만은 쓰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다. 그만큼 어려운 책입니다. 우리가 많은 부분을 이해한다고 해도, 결국 계시록에 기록된 내용을 그대로 현실로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완전히 이해하게 될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선지자들이 자신들이 기록한 것을 두고 그 의미를 찾으려고 애썼던 것처럼, 계속해서 탐구하는 것입니다. 옛 언약에는 덮여 있는 부분, 가려진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옛 언약은 가려진 언약이요, 사라져 가는 언약이었습니다. 그 언약이 결국 폐하여질 것임을 보여주는 상징이죠.
그 수건은 또한 옛 언약이 가려져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복음에는 가려진 것이 없습니다. 사라져 가는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여러 서신에서 그동안 감춰져 있던 비밀이 이제 드러났다고 말합니다. 이제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모세 시대의 사람들이 그 영광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던 이유는, 그것을 바라보면 눈이 멀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세가 수건을 쓴 것이다. 13절을 다시 보십시오.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여기서 “주목하다”라는 말은 시선을 고정해서 똑바로 바라본다, 이런 말입니다. 누가복음 4장 20절에서도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7절에서도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 있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옛 언약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은 사라져 갔습니다. 영원한 언약이 아니었습니다. 새 언약은 그렇지 않습니다. 새 언약은 영원합니다. 옛 언약이 가려졌던 또 다른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날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그들의 마음이 완고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수건이 무엇입니까? 바로 믿지 않는 마음입니다. 불신앙 때문에 옛 언약의 참된 영광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불신앙 때문에 그 모든 의미가 가려져 있었습니다. 본래도 어느 정도 가려졌지만, 불신앙이 완전히 어둡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히브리서 3장 8절입니다.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히브리서 3장 15절입니다.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히브리서 4장 7절도 같은 말씀을 반복합니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완고해졌습니다. 헬라어로 포로시스(porōsis)이죠. 둔감함, 영적인 무감각, 지적인 눈멂, 이런 뜻입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으로 옛 언약의 영광을 보여주려고 했을 때, 유대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영광을 알아보는 대신에 의도적으로 둔감해져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시대에도 여전히 그 상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까지도.” 그때까지도 그랬다는 것이죠.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구약을 읽었습니다. 누가복음 4장 17절부터 21절에 나오는 것처럼 회당에 모여서 율법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그 수건은 여전히 벗겨지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에게 옛 언약은 여전히 흐릿하고 모호했습니다. 율법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옛 언약이 자신들을 구원한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옛 언약이 요구하는 도덕적 기준을 낮추어서 이해했고, 그 의로움을 과소평가했습니다. 죄를 드러내기 위한 도구였던 율법을 오히려 자신의 의를 증명하는 수단으로 사용해 버렸습니다.
또 의식적인 율법은 장차 이루어질 구속과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상징이었지만,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도덕적 율법의 의미도 왜곡했고, 의식적 율법의 목적도 놓쳐 버렸습니다. 너무도 무지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온 예루살렘을 다니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고난을 받고 죽으셔야 했다는 사실을,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전해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옛 언약의 의미에 대한 무지와 불신앙은 결국 새 언약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옛 언약의 목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도덕적 율법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의식적 율법을 통해 구주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게 하려는 것이 옛 언약의 목적이었지만, 그 모든 것을 놓쳐 버렸습니다. 그래서 새 언약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 시대의 유대인들은 옛 언약의 목적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새 언약의 목적도 볼 수 없었습니다. 율법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율법의 성취이신 예수님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멸망으로 향했던 조상들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간 후손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죽이고 돌로 쳤던 바로 그 조상들의 길을 그대로 따라갔습니다.
요한복음 5장 46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만일 모세를 믿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옛 언약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결코 새 언약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어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 언약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왜 이해하지 못합니까? 옛 언약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옛 언약이 자신의 죄에 대해 절망하게 만들고, 다양한 상징과 모형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보여주고, 결국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옛 언약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새 언약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무지의 수건이 완고한 마음을 가리고 있어서 옛 언약의 의미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옛 언약은 유대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보지 못했고 깨닫지 못했습니다. 사실 제자들조차도 이러한 무지를 그대로 드러낸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만일 구약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았다면 이해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해서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옛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새 것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사실을 본문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수건이 그때까지도 그들 위에 그대로 덮여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5장 3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물론 역사 속에서, 그리고 그 시대의 일부 유대인들은 옛 언약의 참된 영광을 보았습니다. 죄의 죄됨을 깨닫고, 구속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시므온이 있었고, 또 안나도 있었고,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13절이 말하는 그 안타까운 사실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모세 시대에도 이스라엘 자손들은 사라져 가는 그 영광을 똑바로 보지 못했습니다. 마음이 완고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시대에도,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옛 언약이 읽힐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않은 채로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여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모세의 글을 읽고 들을 때마다 마음 위에 수건이 덮여 있습니다. 지적인 완고함이죠. 옛 언약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옛 언약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새 언약에서도 완전히 차단되고 맙니다. 히브리서 10장 28절을 보십시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옛 언약을 어기는 것도 두려운 일이지만, 새 언약을 거부하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무서운 일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그 시대의 유대인들이 눈먼 상태로 인해 옛 언약을 어기고 있었고, 그 결과 이제는 새 언약까지도 거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옛 언약은 부분적으로 가려져 있고, 흐릿하고, 신비롭고, 감추어진 언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려진, 사라져 가는 언약으로서 장차 성취될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바르게 이해했다면, 새 언약을 받아들였을 겁니다. 옛 언약 안에 있는 모형과 상징,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자연스럽게 새 언약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새 언약은 분명하고 명확합니다. 모세의 율법을 바르게 믿었다면, 그 믿음은 결국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다시 누가복음 18장의 세리를 떠올려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율법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이 얼마나 드뭅니까? 바울 시대의 유대인들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옛 언약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새 언약을 거부합니다. 의식에 만족합니다. 형식에 만족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도덕적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신의 문제를 가리려고 의식적 요소를 붙잡고 그것으로 자신을 정당화합니다.
모세 역시 이들의 영적 눈먼 상태를 보면서도 깊이 슬퍼했습니다. 그 시대에도 동일한 일이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눈이 가려져 있었고, 마음이 완고했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 32장 32절에서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모세는 백성의 죄와 어둠을 보고 너무나 괴로워서 이렇게까지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지 않으신다면 차라리 자신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달라고 간구할 만큼, 그들의 상태를 깊이 탄식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도 똑같습니다. 로마서 9장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이스라엘 민족은 오늘까지도 거듭나지 않은 상태로 마음 위에 수건이 덮여 있습니다. 옛 언약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새 언약의 분명하고 드러난 의미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옛 언약을 바르게 믿었다면 그 수건은 벗겨졌을 것입니다. 새 언약의 참된 의미를 보았을 것입니다.
새 언약은 탁월합니다. 생명을 주고, 의를 이루게 하고, 영원하고, 소망을 주고, 분명하고 흐릿하지 않습니다. 이제 여섯 번째로 넘어가겠습니다. 아마 다 끝내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만, 시작은 해 보겠습니다. 새 언약은 그리스도 중심입니다. 다시 14절 끝부분을 보십시오.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수건이 벗겨집니다.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없이 구약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약 없이는 구약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나아가면 모든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수건이 벗겨집니다.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순간, 그 수건이 제거됩니다. 영적으로 인식되면서 모든 것이 분명해집니다.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사도행전 13장 27절과 15장 21절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율법을 꾸준히 읽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27절입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안식일마다 율법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의미는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읽기는 했지만 이해는 못한 겁니다. 왜 그랬습니까? 마음이 완고했기 때문입니다. 완고한 마음이란 무엇입니까?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마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의식을 지키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선한 행위를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마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율법이 나를 무너뜨리고, 산산이 깨뜨리고, 완전히 무너뜨렸다. 그래서 나는 회개하는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온유한 마음으로, 죄를 슬퍼하는 마음으로, 울며 의를 갈망하고, 긍휼과 용서를 구한다.’ 이게 바로 상한 마음이고 통회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완고한 마음은 다르게 반응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기준을 내가 봤어. 내가 그 기준을 지키겠어. 내 힘을 다해서 지켜내겠어.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지? 그리고 여러 가지 의식들을 행하면서 내 부족함을 덮어버리겠어.’ 도덕적인 결단으로 구원을 얻고, 종교적인 의식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세상의 모든 종교가 하는 방식 아닙니까? 모두 똑같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읽으면서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옛 언약을 읽으면서도 그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사도행전 15장 21절입니다.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유대인들은 구약을 계속해서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로 인해 무너져 내리면서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의지해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5절에서 말합니다. “오늘까지도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매 안식일마다 반복되는 일이죠. 문제는 언약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깨지기를 거부하는 마음, 죄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마음,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마음입니다. 저는 이 점을 오랫동안 계속해서 말씀드려 왔습니다. 언제든, 어디서든, 누구이든, 회개 없는 구원을 주장한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너무나 이상한 일입니다.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회개는 구원의 본질입니다. 구원의 핵심입니다. 구원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완고했던 이유는 깨어지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옛 언약의 참된 의미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긍휼과 은혜로 용서하시는 하나님께 맡기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신자들도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선지자가 이렇게 말했죠.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1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사람이 주께로 돌아올 때마다 그 수건은 벗겨집니다. 바울은 이 표현을 사용해서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갈 때 일어나는 일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들어갈 때에는 수건을 벗었습니다. 직접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기 위해서였죠.
모세는 백성들이 누릴 수 없었던 것을 누렸습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어떻게 그 영광을 견딜 수 있었을까요?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 백성들은 모세의 얼굴에 비친 영광조차도 똑바로 볼 수 없었는데, 모세는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바라볼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완전히 직면한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출애굽기 33장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모세는 완전한 영광이 아니라 제한된 형태를 보았을 겁니다. 그러나 그 영광은 너무나 크고 강렬해서 모세에게 그대로 남았습니다. 영광이 모세에게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모세가 본 영광은 백성들이 모세를 통해 본 영광보다 더 큰 영광이었습니다.
이 비유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주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갈 때에, 곧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때에, 수건이 벗겨지고 직접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돌아설 때에, 그 수건은 완전히 제거됩니다.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6절이죠.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얼마나 놀라운 진리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갈 때, 주 예수께 나아갈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집니다. 영광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이 우리의 마음에 비춰지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안에서 그 영광을 보게 됩니다.
신학자 필립 휴즈(Philip Hughes)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변화산 사건을 생각해 볼 때 더 분명해진다. 산 위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났지만, 하늘의 영광으로 변화된 분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뿐이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의 눈앞에서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옷이 희고 눈부시게 된 분은 오직 그리스도였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들려온 음성도 오직 그분을 가리키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후에 제자들은 오직 예수님만 보았다.” 휴즈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영광 가운데 나타났던 모세와 엘리야의 영광은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이었다. 그 영광은 창세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가지셨던 영광이다.”
“광야에서 모세의 얼굴에 비친 영광이 여호와의 영광을 반사한 것이었던 것처럼, 변화산에서 그리스도를 둘러싼 영광도 동일한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충만한 영광이시며, 지속되는 영광이시며, 복음의 영광이시다.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것은 세상의 빛이신 분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더 이상 어둠 가운데 행하지 않고 생명의 빛을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사람이 주께로 돌아오면 그 수건이 즉시 벗겨진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수건을 제거하십니다. 참된 이해가 영혼 안에 밀려옵니다. 복음이 분명해집니다. 수건이 벗겨집니다. 바울은 이 복잡하고 깊은 논증 속에서 다시 출애굽기의 장면을 예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4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그리스도는 율법의 목적이시고, 율법이 지향하던 결론이십니다. 새 언약은 탁월한 언약입니다. 더 나은 언약입니다.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언약입니다. 바울이 지금까지 설명해 온 모든 이유 때문이죠. 새 언약은 생명을 줍니다. 옛 언약은 사람을 죽이는 역할을 했습니다. 새 언약은 의를 이루게 합니다. 옛 언약은 오히려 사람의 죄를 드러냈습니다. 옛 언약은 사라져 가는 것이었지만 새 언약은 영원합니다. 옛 언약에는 소망이 없었지만 새 언약은 소망을 줍니다. 옛 언약은 그림자와 모형에 가려 있었지만 새 언약은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새 언약은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입니다.
14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그리고 16절에서도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제 이쯤에서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이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성령님의 역할은 뭡니까? 옛 언약에서 성령님은 어떤 역할을 하셨습니까? 사람들은 거듭났나요? 새롭게 되었나요? 성령으로 태어났나요?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나요? 성령님의 능력을 받았을까요? 성령님은 무슨 역할을 하셨습니까? 17절이 바로 그 질문에 답을 합니다. 그래서 다음 주에 이번 시리즈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지만 오히려 잘 된 것 같습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 안에서 성령님의 역할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생각할 때마다 저는 압도되고 맙니다. 여러분도 동일하게 느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언약입니까? 이처럼 놀라운 새 언약을 두고 도대체 왜 성례 중심의 종교를 전한단 말입니까? 도대체 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다른 것을 전한단 말입니까?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이렇게 위대한 진리가 있는데, 도대체 왜 멸망으로 이끄는 거짓 교리와 속임수를 붙잡으려 한단 말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분명히 경고합니다. 도덕적 행위나 성례, 의식, 형식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는 그 어떤 종교에도 휩쓸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런 체계 안에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고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몇 주 전에 복음주의 교회와 가톨릭 연합이 성명서를 내고는 복음주의자들에게 로마 가톨릭 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죄로 인정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요구했다는 사실을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그 말씀을 드린 후에 한 부부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아내 되시는 분이 눈물을 흘리면서, 만일 누군가가 자신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을 전해 주지 않았다면 가톨릭 안에 갇혀 지옥을 향해 가고 있었을 것이라고 저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단 한 순간도 착각하지 마십시오. 행위, 의로움, 의식, 종교적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런 방법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이 메시지를 종교가 없는 사람들에게 전할 것이고, 종교가 있는 사람들에게도 전할 것입니다. 이방 종교 체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전할 것이고, “기독교적 종교 체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전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참된 구원의 길을 깨닫게 될 때까지 계속 전할 것입니다. 아멘.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가렸던 수건을 벗겨 주시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의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이 영원하고 완전하다는 사실에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망으로 채우시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리로 이끄셔서 그 영광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가려진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가려지지 않은 얼굴로 그 영광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세상적으로 볼 때 뛰어나지도 않고, 능력이 많지도 않고, 지혜롭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평범한 낮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종교적 엘리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들에게 가려져 있는 영광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긍휼이 우리를 압도합니다. 이 은혜에 감사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This article is also available and sold as a bookl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