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고린도후서 3장을 묵상하면서 큰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사실 이 말씀이 너무 풍성해서, 어쩌면 휴거 때까지 여기에 머물러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고린도후서 3장을 보겠습니다. 성경을 펴 주십시오. 6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을 중심으로 “새 언약의 영광”이라는 제목으로 네 번째 시간입니다. 이 시리즈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이 끝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본문은 정말로 귀합니다. 결코 가볍게 다룰 수가 없습니다. 이 말씀 안에 담긴 풍성함을 최대한 많이 누려 보려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3장 6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은 마치 히브리서 전체를 축약해 놓은 듯합니다. 히브리서가 강조하는 핵심, 새 언약의 탁월함이라는 위대한 주제를 이 짧은 구절 안에 압축해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깊이 들어가 보면, 단순히 이 구절에만 머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확장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히브리서에 나타난 내용들, 그리고 성경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진리들을 함께 끌어안아야만 이 말씀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6절부터 18절까지를 통해서 바울은 새 언약이 옛 언약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정말 중요합니다. 바울이 그렇게 충성스럽게 섬기면서 세운 고린도 교회에 거짓 교사들과 거짓 사도들이 들어와서 이렇게 주장을 했습니다. 옛 언약이 새 언약과 동등하다. 모세 율법에 속한 의식과 예식과 규례들을 계속 지켜야 한다. 옛 언약이 새 언약만큼 지속적이고 영원하다, 이렇게 주장을 했습니다. 또 옛 언약이 중요성에 있어서도 새 언약과 동등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거짓 교사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간결하고 본질적인 복음에, 할례를 비롯한 모세 율법의 모든 규례들을 덧씌웠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복음의 본질을 흐렸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성례 중심의 신앙과 ‘사제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제사장 중심의 사역 방식, 그리고 의식, 예식, 반복되는 외적인 행동들은 영적인 실체를 가립니다.
고린도후서를 보면 바울은 분명하게 자신의 사역과 진실성을 변론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 전체가 바로 바울의 입장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을 변론하는 중요한 근거로, 자신을 새 언약의 일꾼, 이렇게 제시합니다. 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으로 충분하게 하셨다. 여전히 옛 언약의 일꾼으로 머물러 있는 거짓 교사들과 아주 분명하게 대조를 이룹니다.
바울은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새 언약은 훨씬 더 뛰어나다. 그리고 참된 하나님의 일꾼이라면 반드시 새 언약의 복음, 새 언약의 진리를 전해야 한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옛 언약의 의식이나 율법주의가 아니라 새 언약입니다. 그리고 이 새 언약은 교회의 역사 전체를 통하여, 모든 신실한 설교자들이 한결같이 전해 온 메시지입니다.
자, 그러니까 바울은 자신의 사역과 자신을 변론하는 과정에서 이 새 언약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묻습니다. “왜 너희는 새 언약을 신실하게 전하는 나를 떠나서, 옛 언약을 전하는 거짓 교사들에게로 돌아가려 하느냐? 새 언약이 이처럼 탁월한데, 왜 그런 선택을 하려고 하느냐?”
바울은 자신이 참된 목자이고, 참된 사도이고, 참된 설교자이고, 참된 교사라고 말합니다. 그 근거도 분명히 제시합니다. 새 언약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단순히 변론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새 언약의 풍성함을 보여줍니다. 변론을 넘어서, 비록 짧지만 새 언약의 신학을 깊이 있게 펼쳐 보입니다.
바울은 행위로 얻는 구원을 분명하게 거부합니다. 할례로 얻는 구원도 거부합니다. 의식이나 예식을 통해 얻는 구원도 완전히 거부합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거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구원은 의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종류의 의식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은 예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례의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새 언약 안에만 있습니다.
그러면 새 언약이 무엇입니까? 새 언약은 단순합니다. 약속입니다. ‘언약’이라는 말 자체가 약속을 의미합니다. 새 언약은 구원의 약속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죄가 완전히 용서받는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제거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죄를 멀리 옮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로 말미암아 죄를 완전히, 철저하게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약속입니다. 새 언약, 복음입니다.
새 언약과 복음은 같은 뜻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다. 나는 새 언약을 전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모든 신실한 설교자 역시 마찬가지로 새 언약,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옛 언약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미 지난 3주 동안 이 부분을 살펴봤습니다. 다시 길게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옛 언약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시민법, 의식법, 그리고 도덕법입니다. 시민법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 시대의 이방 민족으로부터 구별되어 분리된 삶을 살도록 규정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독특한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했죠. 오늘날로 말하면 ‘코셔’와 같은 삶의 방식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변 민족들의 영향을 받아서 더럽혀지는 것을 막고,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증거가 무너지는 것을 방지했습니다.
율법의 의식적인 부분, 곧 모든 상징과 제사 제도, 할례에서부터 안식일과 각종 절기와 축제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은 구속의 목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구속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구속을 어떻게 이루실 것인지를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상징이었습니다. 그림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을 독특한 민족으로 구별하여 주었던 시민법은 이제는 폐하여졌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교회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의식법 역시 폐하여졌습니다. 실체가 오면 그림자는 사라지는 것이죠. 그리고 그 실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났습니다.
율법의 세 번째 요소는 도덕법입니다. 영구적이고 영원합니다. 왜냐하면 도덕법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품과 인간을 향한 뜻을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도덕법 역시 사람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의식법이 사람을 구원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의식법은 단지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시민법도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단지 외적인 삶의 방식일 뿐이었죠.
도덕법 역시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도덕법이 하는 일은 단 하나입니다. 자신의 죄를 있는 그대로 보게 만들죠. 그리고 그 절망 속에서 하나님께 달려가 긍휼과 은혜를 구하게 만듭니다. 구약 시대 성도가 그렇게 했습니다. 남은 자들도 그랬습니다. 참된 유대인이 그렇게 했습니다. 율법을 대면하여, 자신의 삶을 바라보며 이렇게 고백했죠. “나는 이 율법을 지킬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긍휼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안타깝게도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도덕법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것을 제대로 지킬 수 없다. 그렇다면 구원은 의식법에 있겠구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도덕법을 지킬 수 없으니, 의식법을 구원의 수단으로 삼으려고 한 것이죠.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를 만들었습니다. 도덕법이 이미 그들을 정죄했는데, 거기에 더해 의식법의 문자적인 규정을 도덕법 위에 얹어서, 그것이 마치 구원을 주는 요소인 것처럼 만들어 버린 겁니다. 그래서 결국 완전하게 죽게 되었습니다. 율법 조문은 참으로 치명적입니다. 여기서 ‘조문’이라는 것은 외적인 의식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의식법을 주신 이유는, 상징과 그림을 통해 인간에게 구속의 필요를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민법을 주신 이유는, 자신의 백성을 구별하여 세상 가운데 증인이 되게 하시고, 다른 민족들과의 무분별한 교류로 인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도덕법을 주신 이유는, 인간의 교만을 꺾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인간이 그 뜻을 결코 완전히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결국 인간이 하나님의 긍휼에 자신을 맡기게 하려 하신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은혜와 긍휼로, 제사 제도를 통해 예표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용서하십니다.
우리는 이 모든 내용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더 이상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 이제 본문을 보겠습니다. 바울은 더 나은 언약, 새 언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더 탁월한 언약, 바로 새 언약입니다. 그리고 새 언약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여덟 가지로 그 탁월함을 설명합니다. 동시에 옛 언약을 분명하게 배격합니다.
첫 번째로 새 언약은 생명을 줍니다. 이미 6절에서 이 부분을 살펴봤죠. 다시 반복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새 언약은 생명을 주는 언약입니다. 옛 언약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율법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이죠, 사람을 죽이는 겁니다. 생명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7절에서는 옛 언약을 가리켜서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이라고 했습니다. 옛 언약은 사람을 죽이는 역할을 합니다. 율법은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바라보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그 순간 이미 죽은 상태임을 깨닫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수치, 죄책감, 후회, 무능, 좌절감, 이 모든 감정 속에서 살아가는 일종의 ‘산 죽음’이죠. 하나님의 율법을 결코 온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결국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3장 10절과 13절이 말하는 것처럼, 저주 아래 놓인 것입니다. 이때 저주는 영원한 정죄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 아래 두고, 멸망으로 이끄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생명을 줍니다.
두번째입니다. 7절에서 새 언약은 의를 가져옵니다. 이제 그 말씀을 보겠습니다. 7절입니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바울은 여기서 매우 분명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율법의 직분은 정죄입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직분은 의입니다.
새 언약은 의를 가져옵니다. 우리에게 의를 줍니다. 매우 중요한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장이 말하는 것처럼,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의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께 “너는 거룩하고 의롭다”라고 인정받을 수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본 것처럼, 율법의 한 부분이라도 어기면 그 즉시 정죄 아래 놓이고 맙니다. 단 한 번만 어겨도 정죄를 받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죽게 하는 직분입니다. 9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정죄의 직분입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다릅니다. 새 언약은 의의 직분입니다. 의를 주는 직분입니다.
이 새 언약의 탁월함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구약성경으로 돌아갑니다. 구약에서 가장 놀랍고 특별하면서도 인상적인 사건 하나를 예로 가져옵니다. 출애굽기 34장 말씀입니다. 이제 출애굽기 34장으로 가보십시다. 29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이 장면은 모세의 시내산 경험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매우 놀랍고도 인상적인 사건이죠.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시내산에 올라가 율법을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씀을 나누었고,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 율법은 인간을 무너뜨리는 기준이 되었죠. 결국 하나님께 돌아와 은혜와 긍휼을 구하게 만드는 그런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는 죄인을 위해 이루실 사역을 근거로 그 긍휼을 베푸실 것이었습니다.
자, 이제 29절부터 보겠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함께 산 위에 있었습니다. 2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언약의 말씀, 그러니까 십계명을 돌판에 기록하셨습니다. 옛 언약을 요약한 겁니다.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하서 말씀을 나누고 내려오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은 육체와 뼈가 없기 때문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자신의 본질의 영광을 빛으로 나타내심으로써 자신을 보이셨습니다. ‘쉐키나’이죠.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출애굽기에는 이 쉐키나 영광이 여러 차례 나타납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 기둥으로 나타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셨던 것 기억하시죠? 출애굽기 마지막 부분에서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처럼, 찬란한 빛의 형태로 임하여서 그 성막 위에 머무셨습니다.
자,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빛으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기적과도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출애굽기 33장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내 영광을 일부 보여 주겠다”라고 하시면서 모세를 바위 틈에 두시고 자신의 영광이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그 영광은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도록 나타내신 찬란한 빛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습니다. 그렇게 산에서 내려왔는데, 자기 얼굴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말씀을 나눈 결과로 인해서 얼굴에 광채가 나는 줄을 몰랐습니다.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마치 빛을 발하는 전구 같이 밝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30절입니다.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사람들이 거리를 뒀습니다. 얼굴이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죠. 희미한 빛이 아니라, 눈부시게 타오르는 빛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강렬했습니다. 31절입니다. “모세가 그들을 부르매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다시 말해서 모세가 “이리 와라, 두려워하지 말라” 이렇게 불렀던 겁니다.
그 다음을 보겠습니다.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령하고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령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며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하나님과 말씀을 나누고 나서, 얼굴이 마치 타오르는 태양처럼 빛이 났습니다. 작은 태양같이 되었습니다. 그 빛이 너무 강렬해서 사람들이 직접 바라볼 수 없을 정도라고 했습니다. 그 빛을 정면으로 볼 수는 없고, 주변에서 그 광채를 느끼면서 음성을 들을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전하는 일을 마치면, 더 이상 그 영광으로 사람들을 눈멀게 하지 않기 위해서 얼굴에 수건을 덮었습니다. 눈을 멀게 할 만큼 강렬한 영광이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다시 하나님과 말씀을 나눌 때에는 수건을 벗었습니다. 다시 나와서 말씀을 전할 때는 수건을 벗은 채로 전하고, 말씀을 마치면 다시 수건을 덮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장면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울은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의 중요한 비유를 끌어냅니다. 바로 이 사건을 율법의 영광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이해합니다.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7절입니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여기서 잠시 멈춥시다. 이게 핵심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서 율법을 받고 산에서 내려올 때, 모세의 얼굴이 하나님의 영광, 쉐키나의 빛으로 빛났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유사한 장면을 찾아본다면 마태복음 17장이 떠오릅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변모하셨던 사건이죠. 그때 예수님께서 너무도 찬란하게 빛나셨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두려워했습니다. 제자들은 그 영광 앞에서 엎드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그 영광이 드러났습니다. 반면에 모세의 경우는 외부에서 비친 영광이죠. 모세는 마치 달처럼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가 아니라, 영광의 빛을 반사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7절을 보면, 율법도 영광 가운데 주어졌다,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가 율법을 전할 때 그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분명합니다. 율법 자체가 영광스럽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반영합니다. 바울은 유대주의자들과 할례파로부터 오해를 받았습니다. 바울이 율법을 반대하고, 무시하고, 깎아내리고, 가치를 낮춘다고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은 율법, 그러니까 옛 언약이 영광 가운데 주어졌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율법은 영광 가운데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을 때에, 모세는 그 율법을 가지고 내려오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 영광이 얼마나 컸는지,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조차 없었습니다. 얼굴에서 빛나는 영광이 너무도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쉐키나의 영광이 너무도 강하게 나타났기 때문이죠. 모세의 얼굴을 ‘주목하여’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하다’라는 말은 시선을 고정하여 응시하는 것을 의미하죠.
다시 말하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맑고 화창하게 햇빛이 강하게 비치는 날,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태양이 떠 있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 따뜻함과 밝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사진을 찍으려고 하면, 눈을 찡그리게 됩니다. 그때도 태양을 직접 바라보지는 않습니다.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면 눈이 멀어버리죠. 그래서 태양의 주변이나 아래쪽을 보면서 그 빛을 느낄 뿐이죠.
바로 그러한 일이 여기에서 일어난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모세는 그들이 늘 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모세의 모습은 전혀 달랐습니다. 이전에는 결코 없었던 그 무언가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 그에게 일어났습니다. 무엇인가 초월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율법이 주어진 사건이죠. 이 영광이 너무나도 찬란하고, 너무나도 강렬하고, 너무나도 위대했기 때문에, 마치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얼굴을 똑바로,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마친 후에는, 사람들과 교제하기 위해서 얼굴을 수건으로 가려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영광이 사람들을 눈멀게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율법이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올 때 그 영광은 모든 사람이 분명히 볼 수 있는 방식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죽게 하는 직분인 율법조차도 영광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그 율법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영광은 제한된 영광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은 분명하지만, 사람을 살리기보다 죽이기 때문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율법의 직분은 구원이 아니라 정죄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죽이는 역할을 합니다. 죄인이 자신의 죄를 깨닫도록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갇혀 있었습니다.
옛 언약은 시민법, 도덕법, 의식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명령할 뿐이죠. 보여줄 뿐이죠. 상징할 뿐입니다. 생명은 줄 수 없습니다. 의를 만들어 낼 수도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죽이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것이 ‘율법 조문’으로 축소될 때 더욱 그랬습니다. 여기서 ‘율법 조문’은 율법하고 동일한 의미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외적인 형식으로 전락해버린 율법을 가리킨다고 했죠. 로마서 2장 27절에서 29절을 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은 사람을 죽이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담고 영광 가운데 주어졌습니다.
만일 옛 언약에도 영광이 있었다면, 자, 8절을 보십시오.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바울은 새 언약을 가리켜서 “영의 직분”이라고 부릅니다. 새 언약을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돌판에 기록된 율법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마음에 기록하신 율법은 생명을 주고, 의를 이룹니다. 돌판에 기록된 율법은 정죄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마음에 새기신 율법은 구원합니다.
그러니까 이 새 언약은 옛 언약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뛰어납니다. 바울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묻습니다. 분명한 결론이죠. 이 점을 놓치면 안 됩니다. 여러 번 제가 강조했듯이, 구약의 성도,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모두 같은 방식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율법 앞에서 자신이 깨어지고,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긍휼과 은혜와 용서를 구한 사람입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심령으로, 온유하며 자신의 죄악을 애통해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말씀하신 복된 자와 태도가 같습니다. 그리고 세리처럼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부르짖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우시고 긍휼이 많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셨고, 장차 그리스도께서 그 죄인을 위해 이루실 사역을 근거로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구원의 방식은 언제나 이랬습니다. 한 번도 달라진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은혜로,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역을 근거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 이전이든 이후이든 동일합니다. 구약의 유대인이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게 되면, 그 순간 그에게 율법은 더 이상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전에는 자신을 정죄하던 도덕법이 이제는 복의 길입니다. 시편 119편의 다윗의 고백도 같은 고백입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그 법을 즐거워하고, 항상 묵상합니다. 이제 율법은 더 이상 죽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길입니다. 꿀보다 더 달고, 금보다 더 귀하게 여깁니다. 율법을 향한 태도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 율법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는 것입니다.
이제 9절을 보겠습니다.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논증을 전개해 갑니다.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며 멸망에 이르게 하는 율법에도 영광이 있었다면, 의를 이루는 직분에는 얼마나 더 큰 영광이 있겠습니까? 여기서 죽게 하는 직분은 또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데 심판의 직분, 멸망의 직분, 정죄의 직분입니다. 옛 언약에도 분명히 영광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니까요. 모세가 산에서 내려올 때 얼굴에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사람을 죽이고, 정죄하고, 멸망에 이르게 하는 옛 언약에도 영광이 있었다면, 의의 직분에는 영광이 얼마나 더 넘치겠습니까? 의의 직분이 무엇입니까? 바로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은 의를 이루기 때문에 영광이 넘칩니다.
로마서 3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20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러나 21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율법과 선지자들은 이 의를 증거해 왔습니다. 새 언약을 바라보았습니다. 22절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율법은 결코 의를 주지 못합니다. 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주어집니다.
새 언약이 무엇을 가져옵니까? 의입니다. 새 언약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시선을 바꿉니다. 하나님의 태도를 바꿉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 사람을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은 존재로 보십니다. 이사야는 이것을 “의의 옷을 입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로 덮인 상태입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된 상태입니다.
제가 좋은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빌립보서 3장으로 가서 바울의 예를 살펴보십시다. 성경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장입니다. 바울은 옛 언약이 영광 가운데 주어졌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누구라도 옛 언약을 구원의 수단이라고 전한다면, 그 사람은 복음의 원수입니다.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옛 언약을 구원의 방법으로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복음의 원수입니다.
빌립보서 3장 2절에서 바울은 그런 자들을 이렇게 부릅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할례나 모세의 의식, 또 율법에 따른 어떤 도덕적 수준을 이루는 것이 구원을 준다고 말하는 사람은 ‘개’입니다. ‘행악자’입니다. 당시에 이 ‘개’라는 표현은 매우 심한 멸시를 표시하는 표현이었습니다. 거리에서 떠돌면서 쓰레기를 뒤지는 더럽고 천한 존재를 가리켰습니다.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간다”는 말처럼 말이죠. 더럽고 버림받은 존재를 의미했습니다. 거리에서 떠돌아다니는 짐승과 같은 존재입니다. 바울은 옛 언약을 구원의 수단으로 삼거나, 구원에 어떤 방식으로든 기여한다고 가르치는 자들을 그렇게 ‘개’라고 규정합니다.
이제 바울 자신을 보겠습니다. 옛 언약 아래 있었던 사람이 바로 바울입니다. 회심 이전의 바울은 철저히 옛 언약 아래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율법 조문에 매인 자였습니다. 율법의 외적인 규례를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으려고 했던 사람이죠. 내용을 한번 살펴볼까요? 4절입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육체적인 업적으로 보자면 나 그 누구와도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육체로 구원을 얻는다면,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면, 인간의 노력과 의식과 예식과 반복적인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면 내 자격이 제일 크다.”
“나는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 율법이 요구하는대로 다 했다. 부모님이 그렇게 했다. 나는 이스라엘 민족, 곧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으로 태어났다. 또 베냐민 지파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되었을 때에 베냐민 지파와 유다 지파가 끝까지 신실하지 않았냐. 그러니 나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다.”
무슨 뜻입니까? “나는 전통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 끝까지 지켰다” 이런 뜻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매우 철저한 정통 유대인의 삶이죠. 전통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전통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율법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율법만 지키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당시에 한 6천 명 정도가 있었는데, 율법의 세세한 부분까지 집요하게 집착하는 사람들이죠. 바울은 모세 언약의 문자적인 요구를 최대한 철저하게 지키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바울은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나는 언약을 어기는 사람, 옛 언약보다 더 나은 것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다. 그만큼 나는 옛 언약에 열심이었다. 율법을 지켜서 얻는 의에 관해서라면, 나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모두 다 행했다. 누구도 나를 향해서 ‘이 점에서 잘못됐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바울은 그토록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율법 조문에 집착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이때의 바울이 아직 구원받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거듭나지 못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모든 율법을 지켜서 행하는 것에 자신의 구원을 걸고 있었기 때문이죠. 아직 로마서 7장에서 말하는 율법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그 앞에 무너지는 자리까지 이르지 못했던 겁니다. 다메섹 도상에서야 비로소 깨달았죠. 그때에야 비로소 바울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이후를 보십시오. 7절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바울은 이전에는 그 모든 것을 ‘유익’으로 여겼습니다. 자신의 구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율법으로 의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난 순간, 그 모든 것을 무엇으로 여겼습니까? ‘해’로 여겼습니다. 8절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다시 말해서 옛 언약을 구원의 수단으로 붙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도덕법 자체를 무시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옛 언약을 구원의 방법으로 삼는 태도를 버렸다는 의미입니다.
구원과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는 것이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으로 태어났다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구원은 의식으로 얻는 것이 아니고, 혈통으로 얻는 것도 아닙니다. 베냐민 지파 출신이라고 뭐가 어쨌다는 겁니까?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구원은 특권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구원은 전통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을 지켰다면 뭐가 달라집니까? 구원은 종교적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박해할 만큼 열심이었다고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구원은 열심으로 얻는 것도 아니고, 외적인 도덕성으로 얻는 것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헬라어로 ‘스퀴발론(skubalon)’입니다. 인간의 배설물이죠. 가장 더러운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이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것을 다시 보니 쓰레기였다. 더러운 것이었다.”
아마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 모든 것을 그렇게나 단호하게 버린 이유가 뭡니까?”
9절입니다.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바울은 계속 말합니다. “내가 그렇게 갈망하던 의를 발견했다. 그런데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자랑스럽게 여겼던 그 모든 것은 쓰레기이다.”
그렇습니다. 옛 언약에도 영광이 있습니다. 다시 고린도후서 3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옛 언약에도 분명히 영광이 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옛 언약에도 분명 영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뛰어난 영광 앞에서는, 마치 영광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울의 고백입니다. 옛 언약에도 영광이 있었지만 새 언약의 압도적인 영광과 비교하면 더 이상 영광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게 되죠. “배설물이로구나.”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유대주의적인 할례 신앙이나 신비주의적인 종교를 결코 받아들이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있는 그 본질적인 단순함을 무너뜨리는 의식주의를 선택하지 말라. 새 언약에는 너무나 큰 영광이 있기 때문에, 옛 언약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진짜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도덕법은 여전히 중요할까요? 물론입니다. 도덕법은 여전히 죄인의 교만을 꺾는 기준입니다. 죄인을 무너뜨리는 기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율법을 계속 전해야 합니다. 그 율법을 높이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도덕법은 신약에서도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시민법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 구분이 사라지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의식법도 더 이상 적용되지 않습니다. 안식일과 절기와 제사 제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전도 무너졌고, 제사도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도덕법은 신약에서도 반복해서 강조됩니다. 죄인에게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다시 제시됩니다.
그러나 옛 언약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죠. 그것만으로는 전혀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반사하는 그 고귀한 역할로도 사람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새 언약이 도래했습니다. 은혜로, 믿음을 통해, 옛 언약이 결코 줄 수 없었던 것을 제공합니다.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례 중심의 신앙, 사제 중심의 종교, 제사장적 구조를 가진 종교 형태, 예를 들어서 로마 가톨릭, 그리스 정교회, 또 형식과 전례에 치우친 개신교 전통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외적인 행동들, 일어나고 앉고, 촛불을 켜고, 절하고, 몸을 굽히고, 이런 모든 외적인 형식과 의식들은 본질을 흐리는 겁니다. 복음을 왜곡하는 겁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애초부터 성경적이지도 않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적어도 한때 영광이 있었던 언약 위에 서 있었습니다. 물론 그 영광은 사라지는 영광이었죠. 그러나 사람이 만들어낸 종교적 의식주의는 성경적인 근거조차 없습니다. 처음부터 영광이 없었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그런 것들은 모두 멀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와 믿음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본질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세 번째 중요한 점을 제시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보겠습니다. 새 언약이 왜 탁월한지 그 이유를 다시 한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새 언약은 생명을 주고, 의를 이룹니다. 그리고 이제 세 번째, 새 언약은 영원합니다. 7절 끝을 보십시오. 바울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덧붙입니다.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핵심은 이겁니다. 모세의 얼굴에 나타났던 그 영광은 일시적이었습니다. 그 경험 이후에 그 영광은 사라졌습니다. 점점 희미해졌습니다. 실제로 모세가 백성과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그 영광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건을 덮으면 그 영광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죠.
‘사라져 가는’ 영광입니다. 같은 단어가 고린도전서 2장 6절에서는 “없어질” 이렇게 번역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비유로 율법의 영광을 설명합니다. 그 놀라운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읽어냅니다. 율법에도 영광이 있었지만, 사라지는 영광이었고, 없어질 영광이었습니다. 율법은 결코 영원한 해답이 아닙니다. 율법은 죄인의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율법은 결코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최종적인 말씀이 될 수 없습니다.
제가 오래전에 이스라엘에 갔을 때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회당 바로 옆에 있는 호텔에 제가 머물고 있었는데, 방에서 손을 뻗으면 회당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유대인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소리를 몇 시간이고 계속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여전히 옛 언약 안에 갇혀 있구나, 새 언약을 받아들이지 않는구나,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는구나. 만일 누군가 새 언약을 전하면, 강하게 거부하면서 격렬하게 반응합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율법은 결코 죄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율법으로는 구원할 수 없다.”
율법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완전하게 드러내는 최종적인 계시로써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의를 이루는 방법으로 주어진 것도 아닙니다. 더 큰 것을 가리키는 역할을 할 뿐이죠. 율법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사람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보여줄 수는 있지만, 행할 능력을 주지는 못합니다. 옛 언약은 정죄의 근거는 될 수 있지만 구원의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심판의 근거는 될 수 있지만 의롭다 하심의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죄책을 드러낼 수는 있지만, 죄를 깨끗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다른 것이 더해져야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묻는 분이 계실 겁니다. “유대인들은 새 언약이 올 것을 알고 있었을까요? 그들이 미리 들은 적이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예레미야가 너무도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예레미야 31장 31절부터 읽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은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옛 언약으로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어야 합니다.
여기서의 대조는 분명합니다. 지나가고 없어질 것과, 영원히 남는 것이죠. 모세가 대표하는 것은 영광스럽지만 결국 사라지는 겁니다. 그 영광은 언젠가 반드시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다릅니다. 영원이 약속된 언약입니다. 새 언약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여러분,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옛 언약이 있었고, 이제는 새 언약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 다른 새로운 언약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이 언약으로 끝입니다. 영원한 언약입니다. 새 언약이 마지막 선언입니다. 은혜로, 믿음을 통해 주어지는 구원입니다.
죽게 하는 직분, 정죄의 직분에도 영광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이죠. 거룩하고, 의롭고, 선했습니다. 의의 기준을 세워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용서받고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복의 길입니다. 그러나 신약은 더 큰 영광을 보여줍니다. 새 언약은 더 큰 영광을 지니고 있습니다. 만일 새 언약이 없었다면, 옛 언약은 인류 전체를 그대로 지옥으로 밀어 넣는 역할만 했을 겁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사역이 무엇이었습니까? 계속해서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복해서 “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 이렇게 외쳤습니다. 세례 요한 때까지도 계속 같은 메시지를 외쳤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율법 앞에 설 때에, 율법이 죄를 드러내면, 그 결과로 회개하라는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유대인은 도덕법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스스로 구원의 길을 만들어 냈습니다. “우리는 도덕법을 지킬 수 없다. 그렇다면 의식법을 지키자. 의식법이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의식법을 도덕법 위에 얹고는 마치 구원의 수단인 것처럼 만들어 버렸습니다. ‘율법 조문대로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결과가 무엇입니까? 멸망입니다.
그러면 참된 유대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진정으로 믿었던 사람은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나아갔습니다. 은혜를 구하고, 긍휼을 구했습니다. 의식법을 보면서, 장차 하나님께서 이루실 구속의 그림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구원을 베푸실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맡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사역을 근거로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대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참된 남은 자를 제외한 대다수는 율법을 어기면서도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구원의 믿음을 갖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행위에 의지했습니다. 외적인 의식과 종교 행위를 붙들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죽이는 것이 되었죠. 그래서 선지자들이 계속해서 외쳤던 것입니다. “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 언제나 동일한 메시지로 외쳤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하라고 외치는 것이 언제나 중심 메시지가 되어야 합니다.
자, 그러니까 옛 언약에도 영광이 있었지만, 새 언약과 비교하면 영광이 없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죠. 이제 11절을 보겠습니다.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모세의 얼굴에 나타났던 영광은 점점 사라졌습니다. 그 영광은 내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반사된 것이었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을 때에는 그 영광이 반사되어서 나타났지만, 결국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영원한 영광을 지닙니다.
새 언약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완성된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언약입니다. 최종적인 선언입니다. 복음이 마지막입니다. 그 이상의 다른 메시지는 없습니다. 복음에 무엇을 더할 수도 없습니다. 옛 언약에 무엇을 더하고, 새 언약에 무엇을 더하고, 여기에 또 다른 어떤 전통이나 가르침을 덧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새 언약의 사역, 곧 복음이면 충분합니다. 신약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도 이겁니다.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이렇게 경고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새 언약의 사역은 계속될 것입니다. 결코 다른 것으로 대체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이루어질 것도 없고, 더해질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백성을 위한 구속을 단번에, 영원히 이루셨습니다. 이보다 더 높은 진리는 없습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우리가 성장하면서 복음의 풍성함을 더 깊이 깨닫게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복음을 넘어서는 일은 없습니다. 새 언약을 넘어서는 것도 없습니다. 그 이후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제3의 언약을 기다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고린도에 있던 거짓 사도들과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이 오래된 전통에 속한 것이라고 자랑했습니다. 모세의 의식과 예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장점으로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화려해 보이는 성전의 겉모습을 무너뜨리고, 사실은 위장된 감옥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참된 사역자, 참된 설교자는 새 언약을 전합니다. 정죄의 메시지가 아니라 소망의 메시지, 의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우리에게는 그 어떤 신비주의적 종교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실체를 전달한다고 주장하는 이국적인 의식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라는 실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 실체를 누립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돌판의 메시지가 아니라 십자가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되라고, 시내산의 메시지가 아니라 갈보리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되라고 촉구합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에 경고합니다. 유대주의적 의식주의자들, 신비한 종교를 전하는 자들, 시내산과 외적인 율법과 상징을 붙드는 자들, 그 종교적 형식주의의 썩어가는 본질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A. T. 로버트슨(A. T. Robertson)은 이 말씀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외적인 것에 대한 사랑은 내적인 생명을 죽였고, 영적인 생명을 강조하시며 형식적인 의식주의를 책망하신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만들었다.”
스데반은 바리새인들이 참된 신앙을 왜곡한 것을 책망하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의 나라를 영적으로 해석해 전하다가 결국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그대로 뒤따랐습니다. 바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박해하던 바리새인에서 돌이켜서, 예수님을 영적으로 해석해 전하는 사람이 되었고, 자신이 기뻐했던 스데반의 죽음 이후에 그 자리를 이어받았습니다.
예수님과 스데반은 당시 유대교 안에 자리 잡고 있던 공식적인 바리새주의와 싸웠습니다. 바울은 이 싸움을 교회 안으로 가져왔습니다. 왜냐하면 변질된 유대주의를 기독교 위에 덧씌우려는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율법의 멍에를 씌우려는 시도죠.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영혼이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다.” 바울은 영혼 깊이 위태로움을 느꼈습니다.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서 이 문제에 맞섰습니다. 이 싸움의 한가운데 서 있었습니다. 영적인 기독교를 무너뜨리려는 유대주의적 그리스도인들과 맞서 싸웠습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3장에서 유대주의와 기독교를 분명하게 대비시킵니다. 율법주의의 속박과 영적인 기독교 사이의 싸움은 결코 끝난 적이 없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와 갈라디아서, 로마서에서 그 기준을 분명히 세웠습니다. 그리고 수백 년 후 마틴 루터가 그 싸움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위험은 지금도 여전히 현실입니다.
새 언약은 탁월합니다. 생명을 주고, 의를 이루게 하고, 영원합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처럼 분명하고 능력 있는 진리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강하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의 삶 가운데 성령으로 역사하셔서 생명을 주시고, 의를 이루어 주시고, 구원하여 주옵소서. 죄인들을 구원하여 주옵소서. 회개하게 하시고, 마음 깊은 곳에서 통회하게 하옵소서. 아직 참으로 구주를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이 간절한 마음과 회개하는 심령으로 나아와,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며 용서를 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죽으셨음을 감사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믿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실 수 있음을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구원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율법주의의 속박에 매이지 않고, 믿음의 자유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은혜의 복을 누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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