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ce to You Resources
Grace to You - Resource

오늘 아침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는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영으로 예배합니다. 영으로 예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진리를 이제 살펴보겠습니다. 성경 고린도후서 3장을 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드디어 3장입니다. 6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을 “새 언약의 영광”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새 언약의 영광입니다.

이 단락은 6절에서 이렇게 시작됩니다. 제가 읽습니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여기까지 읽겠습니다. 새 언약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이 새 언약의 본질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본질과 정의를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언약과의 관계, 특히 모세를 통해 주어진 이른바 ‘옛 언약’, 그러니까 율법과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바르게 이해해야 구속사 전체,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을 함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언약들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면, 성경을 잘못 이해하게 되고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도 놓치고 맙니다. 안타깝게도 이 주제에 대해서 과거부터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그 오해를 풀어드릴 뿐 아니라, 분명한 구분선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서 새 언약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먼저 히브리서 11장으로 가겠습니다. 히브리서 11장으로 오늘의 서론을 삼겠습니다. 히브리서 11장입니다. ‘기독교 명예의 전당’, 혹은 ‘믿음의 명예의 전당’, ‘믿음의 영웅들’ 이렇게 불리는 장이죠. 구약 시대의 영웅들, 구약 성도들의 이름과 행적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명예의 전당’이라는 개념이 낯설지 않죠. 다양한 분야, 또 영역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기리는 곳이 바로 명예의 전당입니다. 명예의 전당은 영웅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그들의 업적과 성취를 드러내서 모든 세대가 기억하도록 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바로 히브리서 11장에 그런 명예의 전당이 나옵니다.

사실 이곳에 모든 이름이 나오는 것은 아니고, 대표적인 인물들만 나옵니다. 구약의 정말 귀한 성도들 중 일부가 여기에 등장합니다. 이름은 언급되지 않고 행한 일만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히브리서 11장은 명예의 전당이 분명합니다. 성령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기록하신 영웅들을 기념하는 자리입니다. 믿음에 대한 찬사입니다. 매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특별하고 깊이 있는 믿음으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킨 남녀를 향한 찬사입니다.

이 믿음의 영웅들은 우리의 본보기입니다. 왜냐하면 12장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이 사람들은 우리의 본보기입니다. 모범입니다.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증인입니까? 무엇을 증언하고 있습니까? 믿음의 진정성입니다. 믿음이 가져오는 유익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의 탁월함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이 가져오는 복입니다. 이들은 믿음에 대한 살아 있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영웅입니다. 우리의 본보기입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이제 다시 히브리서 11장 처음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2절입니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여기서 ‘이로써’가 등장합니다.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그들이 인정받은 이유는 바로 이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하신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들입니다.

아벨이 있었습니다. 4절에 에녹이 나오고, 7절에는 노아가 나오고, 8절에는 아브라함이 나옵니다. 11절에는 사라, 20절에는 이삭, 21절에는 야곱, 22절에는 요셉, 23절에는 모세가 나옵니다. 어쩌면 예상 밖의 인물일 수도 있지만, 31절의 라합, 기생이죠, 기생 라합도 믿음의 본보기로 등장합니다. 32절에서는 대표적인 인물들을 묶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그리고 이사야, 다니엘, 예레미야, 에스겔과 같은 선지자들이 나옵니다.

이들이 바로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입니다. 모두는 아니지만,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리고 이 외에도 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3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또 이렇게 이어집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정말 놀라운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명예의 전당이라고 할만 합니다.

그리고 나서 매우 충격적인 말씀이 이어집니다. 39절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2절하고 내용이 똑같죠. 동일하게 시작되고 끝납니다. 이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삶이 참으로 위대했고, 그 믿음이 혹독한 시험을 통과했고,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증명되었고, 우리의 본보기로써 탁월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이자 기준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39절 하반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이렇게 탁월한 믿음의 본을 보인 사람들이, 극도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전혀 흔들리지 않고 살아가는 삶의 기준을 세운 사람들이, 구약 구속사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들이, 큰 믿음을 가졌다고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들이 약속된 것을 받지 못했단 말입니까?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40절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사는 바로 지금 이 시대를 말하죠.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에서 ‘온전하게 하다’라는 말은 구원과 똑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잘 보셔야 합니다. 이들의 믿음이 아무리 위대하고, 아무리 고귀하고, 아무리 본이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에 성취될 약속이 없이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새 언약이 없다면, 옛 언약 아래 있던 성도들에게도 구원이 없었을 겁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아니 잠깐만요, 그러면 구약 성도들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말이에요?” 아닙니다. 그들은 분명히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켜서, 모세의 율법을 행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로는 육체가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죠. 그들 안에 어떤 공로가 있어서, 그 공로를 근거로 해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구약 성도들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은 무엇일까요? 잘 따라오십시오. 죄의 값은 치루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 속죄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집니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죽음을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셨기 때문에, 장차 이루어질 그 일을 과거에 살던 이들에게도 적용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새 언약이 없었다면, 구약의 성도들 역시 결코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겁니다.

반드시 이해하셔야 하는 매우 중요한 진리입니다. 이들이 아무리 충성되고, 모세의 율법 체계를 따라서 살기 위해서 아무리 헌신을 하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아무리 크고, 죄에 대해 아무리 깊이 회개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세 전부터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아니셨다면, 결코 그들은 구원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오셨습니다. 실제로 죽으셨습니다. 실제로 죄를 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완전한 구속을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알고 계셨고, 이루기시로 작정하셨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그 장차 이루어질 일을 과거에 살던 사람들에게 적용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을까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생각하셔야 합니다. 단순히 ‘믿었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믿음을 받으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죄를 담당하실 것이 보장되었기 때문이죠. 죄를 위한 희생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고 있는 겁니다.

구약에서 위대한 믿음의 본을 보인 사람들을 한번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극한의 상황을 겪으면서도 믿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던 사람들이죠. 그런데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믿음이 아무리 위대했다 해도, 아무리 종교적으로 열심이었다 해도, 아무리 헌신적이었다 해도,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려고 애썼다 해도, 살아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다 해도,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결국 멸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오지 않았다면 온전하게 될 수 없었습니다. 우리 시대에 이루어진 일, 그러니까 복음이 없이는 온전하게 될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구약 성도들은 바로 이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소망했습니다. 실제로 히브리서 11장 10절에서는 아브라함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아브라함은 자신의 삶과 시대와 환경을 넘어 그 너머를 바라보았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25절입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왜 그렇게 했습니까?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더 큰 가치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잠깐만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알았겠습니까? 어떻게 그리스도에 대해 알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더 큰 선지자에 대해서 계시해 주셨기 때문이죠.

모세는 하나님께서 구속자를 보내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드렸던 모든 동물 희생 제사가 상징으로 예표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고난을 감수하면서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기꺼이 감당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구약의 성도들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없애 주실 희생 제사를 준비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일을 그리스도로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았고, 죽지 않으셨다면, 구약 역사 속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들, 가장 종교적이었던 사람들, 가장 신실했던 사람들, 가장 충성되었던 사람들, 가장 헌신적이었던 영웅들조차도 영원히 지옥에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는 구원받을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는 과거와 미래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모든 믿는 사람의 죄를 덮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습니다. 구약 성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율법의 언약이 있었죠. 율법의 언약도 선했습니다. 옳았습니다. 진리였죠. 그러나 반드시 더해져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언약이 하는 일은 결국 죄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니까 아벨에서 시작해서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요셉, 모세를 거쳐서 라합,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을 비롯해서 선지자들과 그 밖의 모든 성도들까지, 이 모든 사람들은 더 좋은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온전한 구속을 소망했습니다. 그리고 그 구속은 주 예수 그리스도 없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제 베드로전서 1장 10절입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선지자들이 하나님께서 죄를 제거하실 것이고, 희생 제사를 준비하실 것이고, 죄가 제거될 것이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기록하면서 어떻게 했다고요?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무슨 뜻입니까? 자신이 기록하고 있는 바로 그 내용을 깊게 들여다봤다는 겁니다. 그리고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인지, 누구를 통해 이루어질 것인지, 바로 그것을 선지자들은 알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고난 받는 종이 오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구속자가 오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구속자 이후에 영광이 있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제, 누구를 통해 이루어질지는 몰랐던 겁니다. 이들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구속자를 보내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는 믿음 위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용서를 믿음으로써 구원받았습니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기만 할 뿐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구약 성도들의 구원이 장차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희생 없이는 완성될 수 없었다고 해서, 수준이 낮은 신자로 볼 수는 없습니다.

결코 수준 낮은 신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정말로 가장 수준 높은 신자들입니다. 가장 탁월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이들은 우리가 따라야 할 영웅으로 나옵니다.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의 삶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구름같이 허다한 많은 증인들입니다.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를 다루고 있습니다. 옛 언약에는 새 언약을 상징하고 예표하는 분명한 기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이 이미 도래한 지금, 히브리서 8장 13절이 분명하게 말하듯이, 옛 언약은 이제 낡고 쇠하여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서 옛 언약을 가르쳤습니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 모든 의식과 규례와 제사를 따라야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그 가르침에 휩쓸리고 말았습니다. 신자들에게 새 언약뿐 아니라 옛 언약도 따르며 살아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분명한 이단입니다. 옛 언약의 목적은 새 언약이 오면서 성취되었습니다.

이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문제는 신약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신약 시대가 바로 그 전환기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이 문제 때문에 사도 바울에게 극도로 분노했습니다. 생명까지 노렸죠. 옛 언약이 폐하여지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언약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놀랍게도 교회에 다니면서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도 여전히 옛 언약의 관습을 붙잡으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의 일부는 고린도 교회의 거짓 교사들처럼, 옛 언약의 의식들을 지키는 것이 구원의 필수 요소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구원 교리를 뒤섞어서 결국에는 구원에 이를 수 없을 정도로 왜곡해 버렸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께 나아와 회개하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들은 것입니다. “이제 구원을 받았으니, 모세의 율법을 모두 지켜야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안식일도 지키고, 어떤 사람들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죠. 심지어 이방인들에게도 할례를 요구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음식 규례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두 가지 문제를 모두 다루어야 했습니다. 하나는 구원 교리에 행위와 의식을 더해서 구원을 왜곡하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순수한 복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와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순종의 문제로써 모세의 모든 의식을 덧붙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런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 두 경우 모두 잘못된 겁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모세의 의식들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자가 된 이후에 율법을 계속 지켜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이미 폐하여졌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고린도후서 3장에서 바울은 고린도에 들어와 있던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자들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의식 중심의 종교, 성례 중심의 종교를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모든 상징과 그림자와 예표에 불과했던 것들이 이제는 다 사라졌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6절에 “새 언약의 일꾼”이 나옵니다. 우리는 새 언약의 일꾼입니다. 그리고 이 새 언약에는 일곱 가지 특징이 분명하게 있습니다. 일곱 가지입니다. 이제 말씀드리겠습니다. 생명을 줍니다. 의를 이룹니다. 영원합니다. 분명합니다. 그리스도 중심입니다. 자유롭게 합니다. 그리고 변화시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생명을 줍니다. 의를 이룹니다. 영원합니다. 분명합니다. 그리스도 중심입니다. 자유롭게 합니다. 그리고 변화시킵니다. 이 일곱 가지가 바로 앞으로 우리가 살펴볼 본문에 나타나는 새 언약의 영광입니다. 참으로 놀랍고도 놀라운 새 언약의 영광입니다.

자, 첫 번째를 살펴봅시다. 이 부분은 몇 주 전에 이미 6절을 다루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서, 이전에 말씀드렸던 것에 몇 가지를 덧붙이겠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첫 번째입니다. 새 언약은 생명을 줍니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이 말씀을 분명하게 이해하셔야 합니다. 매우 중요한 내용이니까 깊이 생각하십시오.

7절을 보면 옛 언약, 그러니까 율법을 “죽게 하는 직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9절에서는 “정죄의 직분”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사람을 죽이는 역할을 합니다. 지난번에도 이미 제가 말씀드린 내용이죠.

이제 아주 주의 깊게 따라오십시오. 구약은 사람을 죽이는 역할을 합니다. 잠시 6절을 뒤로 하고, 이 ‘죽게 하는 직분’, ‘정죄의 직분’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율법을 주셨습니까? 사도 바울은 “율법은 범법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진 것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드러내기 위해 율법을 주셨습니다. 바울은 또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교사와 같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절실하게 구속자가 필요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기준, 하나의 법만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은 선하고, 고귀하고,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죄인인 인간입니다. 인간은 그 율법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이제 잘 들으십시오.

율법에는 결코 변하지 않는 절대적이고 도덕적인 원리가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동시에 율법에는 장차 올 구속을 보여주는 상징도 있습니다. 그래서 옛 언약 아래 있던 유대인들은 한편으로는 그 율법의 도덕적 기준을 지키려고 애쓰면서, 동시에 그 도덕성과 장차 올 구속을 상징하는 의식들을 행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의식들은 그들의 죄됨, 그 도덕적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 그것을 드러내는 역할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할례는 마음이 정결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수없이 씻어내고, 정결 예식과 의식들을 행하면서 우리가 씻겨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실제적인 도덕적 기준이 되는 것도 있었고, 동시에 그와 함께 외적으로 행해야 하는 상징도 있다, 이런 말입니다. 도덕적 기준은 내면과 관련된 것이고, 의식들은 외면과 관련된 것입니다. 도덕적 기준은 삶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이고, 그 상징들은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구속 사역을 보여주는 그림이요, 모형이요, 예고편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이제 도덕적인 측면을 봅시다. 율법이 생명의 길이기는 하지만, 죄인은 그것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도 자신을 꽤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런 말을 우리는 자주 듣죠. “가만 보면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야. 악을 행하기보다는 선행을 훨씬 더 많이 했잖아.”

사도 바울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로마서 7장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잘 따라오십시오. 바울은 “계명이 이르매 나는 죽었도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율법은 세 가지 방식으로 바울을 죽였습니다. 첫번째는 산 죽음을 만들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살아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율법이 이르자 죽은 겁니다. 무슨 뜻입니까? 좌절, 슬픔, 절망, 죄책감, 수치 속에 빠졌다는 말입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같은 상태이죠. 율법은 바울의 기쁨을 무너뜨렸습니다. 평안을 무너뜨렸습니다. 확신을 무너뜨렸습니다. 소망을 무너뜨렸습니다. 자기 만족을 무너뜨렸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을 제대로 깨닫자, “나는 괜찮지 않다. 큰 문제가 나한테 있다” 이 사실을 깨닫고는, 깊은 절망 속으로 떨어졌습니다. 이게 바로 산 죽음입니다.

두번째, 율법은 단지 산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울을 죽였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죽음이죠. 갈라디아서 3장은 이것을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만일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행위로 이 의로운 율법을 지키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저주 아래에 있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다시 말해서 단 하나의 율법이라도 어기면, 그 사람은 정죄받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저주는 단지 좌절하고, 수치를 느끼고 죄책감을 느끼는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끊어지는 그런 저주입니다. 율법은 바울을 완전히 죽였습니다. 바울 자신이 생각했던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냈고, 바울의 삶을 좌절과 공허로 가득 찬 산 죽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바울은 영원한 저주 아래 있다고 선언해 버렸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바로 이 지점에서 율법은 자기 역할을 다한 것입니다. 율법이 해야 할 일이죠. 율법은 사람을 막다른 데로 몰아넣습니다. 다시 말해서 도망칠 곳이 없는 상태로 가둬서, 자신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현실을 깨닫게 만듭니다. 율법의 목적입니다. 따라서 율법이 그렇게 했다면 정확히 자기 역할을 잘 수행한 것입니다. 율법은 생명의 길입니다. 그러나 도달할 수 없는 생명의 길입니다. 그 결과로 죄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사실상 죽은 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율법이 죽게 하는 직분이자 정죄의 직분인 이유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역할을 합니다. 완전히 죽여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제 구약 성도 중의 한 사람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뭐 아무라도 좋습니다. 모세나 이사야나 예레미야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 사람들은 구원이 믿음으로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게 여기셨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습니다. 구약의 이 사람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노아가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노아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자, 그러니까 구약 시대에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아가서 은혜를 받을 때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자신의 죄에 대한 자각, 무기력함에 대한 자각, 소망 없음에 대한 자각입니다. 인간의 이 타락한 본성은 스스로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무너지고, 완전히 파산한 상태에 이르기 전까지는, 자신에게 아무런 소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부르짖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세리를 기억하십니까? 성전에서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신약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율법 아래에서 죄를 깨달았던 구약 시대의 죄인의 상태였죠. 그리고 율법은 그의 삶에서 정확히 자기 역할을 했습니다. 그를 구석으로 몰아넣어서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렇게 고백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목적입니다. 사람을 막다른 데로 몰아넣는 것이죠.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인간은 자신의 죄악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온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은 하나님께서 그 무지의 시대를 지나도록 용납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고 더 관대하게 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명확하고 분명한 기준인 율법이 아직 완전히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주어지면서 기준이 명확해졌습니다.

그러니까 이렇습니다. 구약 시대 사람들도, 유대인이든 이방인 개종자든, 하나님의 율법을 접하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깨닫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율법을 가장 간단하게 요약한 말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를 접하면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죠. “나는 하나님을 내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지 못한다. 내 마음 안에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이 너무 많이 자리잡고 있다”라고 말입니다.

구약 시대 사람은 율법, 그러니까 십계명을 통해서 깨달았을 수도 있습니다. 십계명 앞부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루고, 뒷부분은 사람과의 관계를 다룹니다. 각 계명들을 보면서 자신이 어떤 하나님의 법을 어겼는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모세 율법 체계 안에서 주어진 아주 방대한 율법 조항들, 곧 모세 오경에 기록된 율법들을 통해서 깨달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의 율법과 마주하게 되면,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나는 이것을 지킬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의 무능함과 무력함과 소망 없음을 깨닫고 이렇게 고백하고 맙니다. “나는 망했다. 나는 끝났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그리고 세리가 말했던 것처럼, 가슴을 치면서 이렇게 부르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는 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나는 죽은 자입니다. 나는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입니다. 나는 영원한 죽음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상태에서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습니까?” 그리고는 하나님께 나아가죠. 하나님이 은혜의 하나님이시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이렇게 말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나의 은혜와 긍휼을 보이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은혜로운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이후에도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이 은혜로우신 분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구속의 길로 이끄셨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죠. 그래서 자신의 죄로 인한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의 율법에 비추어 자신의 죄가 분명히 드러난 그 상태에서, 그 사람은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가슴을 치며 부르짖던 그 세리처럼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나는 어디로도 갈 수 없습니다. 나에게는 아무 자원이 없습니다. 나는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율법이 나를 죽이고 있습니다. 나는 죽은 자입니다. 이제 나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에 나를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구원해 주옵소서.”

이와 같이 구약 성도들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들의 죄를 사해 주실 수 있었습니까?” 이렇게 물으신다면,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바로 그 죄를 자신의 몸에 담당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 사람들도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율법은 단지 죄를 깨닫는 지점까지 몰아가는 그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은혜의 역할이죠. 이것이 율법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율법은 앞서 말씀드린 두 가지 방식으로 사람을 죽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방식이 있습니다. 이 방식은 정말로 치명타를 가합니다. 실제로 죽입니다. 로마서 9장 31절입니다. 주의 깊게 따라오셔야 합니다.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으로 의를 이루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율법에는 의로 나아가게 하는 기능이 있었습니다. 어떤 방식입니까? 사람의 죄를 드러내고, 그 깨달음 속에서 절망하게 만들고, 그 절망 속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과 은혜에 자신을 던지도록 만드는 그런 방식이죠.

이러한 방식이라면 율법은 사람을 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은혜로운 목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비록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해서, 구원받을 수는 없지만, 자신의 불완전함을 깨닫게 하고, 그 깨달음을 통해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로 나아가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율법의 참된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32절입니다.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왜 도달하지 못했다고요? 믿음이 아니라 행위로 의롭게 되려 했기 때문입니다. 행위가 아니라 도덕법을 바라보면서 “나는 부족하다. 나는 살아 있으나 죽은 자다. 하나님 없이는 영원한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렇게 고백해야 했는데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이 알려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상태에 대한 평가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어디로 갔습니까? 의식을 행하는 영역으로 옮겨갔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길이 있다. 모든 의식을 지키면 된다.” 그렇게 해서 성례 중심의 종교, 제사 중심의 종교, 의식 중심의 종교, 형식적인 종교 체계를 만들어 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 법에 이르지 못하였다”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결코 그 지점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의 의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행위로 이루려고 했기 때문이죠. 도덕법을 온전히 지킬 수는 없었지만, 의식은 얼마든지 행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어떤 모습하고 닮지 않았습니까? 그리스 정교회, 로마 가톨릭, 그리고 형식적인 예전을 강조하는 일부 개신교 전통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모습 아닙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덕법이 자신을 절망과 회개, 깨어짐과 통회로 이끌어야 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직면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형식으로 대체해 버립니다. 일어났다가 앉고, 촛불도 켜고, 모든 절차를 따라, 정해진 방식대로 예배 의식을 수행합니다. 그렇게 모든 과정을 행하고 나면 하나님께서 참된 믿음으로 여기시고 의롭다 해주실 것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형식주의는 사람을 속이고 기만하고, 결국은 멸망으로 이끌어 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미워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본래의 목적에 이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죠. 로마서 10장 3절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다” 이렇게 말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런 겁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보다 덜 의로우시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실제보다 덜 의로우신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자신들은 실제보다 더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괜찮다고 여긴 거죠. 얼마나 끔찍한 속임수입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시대에 가장 종교적이고, 가장 철저히 율법을 지키고, 의식과 율법에 가장 집착했던 사람들,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에도 이런 모습이 보입니다. 유대주의적 의식주의가 아니라, 로마 가톨릭의 의식주의나 정교회의 의식주의, 형식적인 전례 중심의 신앙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상징, 형식에만 매여 있을 뿐, 자신의 영적인 죽음이라는 도덕적 문제를 제대로 직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깨어지지도 않고, 회개도 하지 않고, 통회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지도 않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죽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의 본래 목적 자체를 완전히 왜곡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죽은 상태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모든 설명이 바로 이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6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미 살펴본 부분입니다. 그런데 다시 보십시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이제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사실 옛 언약 아래에서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되었습니다. 율법 조문은 죽였고, 영은 살렸습니다. 옛 언약 아래에서도 동일했죠.

그렇다면 여기 이 “율법 조문”, 도대체 뭘까요? 여기서 말하는 율법 조문은 단순히 그 율법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율법과 동의어가 아닙니다. 율법의 본래 의도가 왜곡된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율법의 본래 의도는 뭡니까?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됨을 깨닫게 하고, 자신의 무능함과 무력함과 소망 없음을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 자신의 죄 가운데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자신을 맡기며 믿게 하는 것이죠. 그렇게 믿음을 의지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용서하십니다. 분명히 용서하십니다.

이사야 55장 6절부터 7절은 그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선지서 곳곳에서도 같은 진리가 반복됩니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율법 조문”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율법을 오해하거나 잘못 사용할 때 남게 되는 결과를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율법 자체는 영적인 것이기 때문이죠. 로마서 7장 14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 조문”은 율법의 영, 그러니까 그 참된 성격과 분리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로마서 주석가 크랜필드(Cranfield)가 말한 것처럼, “본래의 성격이 제거된 율법”입니다. 그 목적이 제거된 상태의 율법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원래 자신의 죄를 드러내고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해야 할 그 율법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율법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율법의 영, 그러니까 율법의 의도와 본질을 붙들어야 했습니다. 내면의 문제를 다루어야 했죠. 성령님과도 연결되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영”이라는 표현은 소문자로 이해해서 율법의 의도와 도덕적 본질로 볼 수도 있고, 대문자로 이해해서 성령님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저는 두 가지 견해 모두 가능하다고 봅니다.

우리는 새 언약의 일꾼입니다. 그리고 새 언약은 성령을 다룹니다. 마음의 일들을 다룹니다. 영적인 것들, 내면의 것들을 다룹니다. 외적인 의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외적인 의식은 사람을 죽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 성령님은 생명을 주십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 구절만 더 보고 마치겠습니다. 로마서 2장 27절입니다. 이 내용을 설명하는 지금도 제 머릿속에서 계속 정리가 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앞으로 계속 더 살펴볼 겁니다. 다음 주에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2장 27절은 반드시 제가 오늘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율법 조문”이라는 표현, 원문에서는 단순히 “조문”이라고 되어 있는 이 부분을 주목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여기서 “율법 조문”과 율법 그 자체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에서 제가 말씀드린 내용을 뒷받침해 주는 내용이 나옵니다. “율법 조문”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율법의 도덕적이고 영적인 본질을 제거해 버리고, 단지 외적인 것으로만 만들어 버린 잘못된 모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28절이 말하듯이 그렇게 하는 사람은 참된 유대인이 아닙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여기서도 바울은 일관되게 “율법 조문”이라는 표현을 “율법”과 다른 의미로 사용합니다. 율법을 잘못 받아들이고, 본래 의미를 놓쳐버린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죠.

율법 조문을 지킨다는 것은 결국 외적인 의식들을 반복하면서도, 율법의 도덕적인 측면은 전혀 다루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죄와 씨름하지 않습니다. 참된 회개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지도 않습니다. 그저 모든 상징, 형식만 붙잡고 맴돌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아닙니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정말로 죽이는 겁니다. 아주 치명적입니다. 회복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율법이 본래 의도한 방식으로 사람을 죽이는 경우에, 그러니까 자신의 비참함 때문에 절망하게 만드는 그 죽음에서는 회복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이끌기 때문이죠. 그러나 절망을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식적 종교로 방향을 틀어버리면, 그때부터는 죄에 대한 자각을 무시한 채로, 멸망으로 이끄는 속임수에 깊이 잠기게 되는 겁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날에는 그 당시 같은 유대주의적 문제는 없지만, 여전히 성례 중심, 의식 중심의 종교라는 문제는 존재합니다. 특히 로마 가톨릭 체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정한 외적인 의식을 반복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속임수는 매우 두렵고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팔을 벌리고 그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라고 선언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단지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 지난주에 제가 말씀드렸던 성명서라고 하는 것이 요구하는 것처럼, 가톨릭 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했던 것을 우리의 죄로 고백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역시, 결국 그 이단에 동참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영혼이 달린 문제이고, 동시에 하나님의 진리의 순전함도 달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다음 주에 더 이어서 살펴보겠습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언약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새 언약만이 성령님을 통해 생명을 주시는 언약입니다. 성령님은 죄가 해결된 마음에만 들어오셔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새 언약이 이 땅에 도래함으로 옛 언약은 이제 사라졌습니다. 그 모든 외적인 의식과 예식, 그러니까 참된 정결과 참된 희생과 참된 씻음을 가리키던 모든 상징들이 이제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제는 실체인 새 언약이 이곳에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에 의해 죽임을 당했지만, 그리스도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바로 그 동일한 율법이 이제는 순종의 길, 생명의 길, 복의 길, 기쁨의 길, 참된 만족의 길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율법에 순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말한 것처럼, 율법은 우리를 죽였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살리셨고, 이제 율법은 우리에게 친구가 되었습니다. 생명이 되었습니다. 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외적인 종교의 속임수 가운데 붙잡혀서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도 맺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다가가게 하여 주옵소서. 그들이 의식이 아니라 말씀을 바라보게 하여 주옵소서. 그 말씀이 그들의 비참함과 죄됨을 드러내고, 그리스도께로 이끌게 하옵소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해 그들이 책망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도록 돕게 하옵소서. 그래서 참으로 회개하여 하나님이 준비하신 용서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그리스도 안에서 옛 성도들에게 베푸신 동일한 은혜로 인해 감사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없이 온전하게 될 수 없었습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은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만일 신약의 성도들을 위한 명예의 전당이 있어서 그곳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면 큰 기쁨일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긍휼에 자신을 맡긴 회개하는 죄인으로서, 믿음의 본이 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This sermon series includes the following messages:

Please contact the publisher to obtain copies of this resource.

Publisher Information
Unleashing God’s Truth, One Verse at a Time
Since 1969

Welcome!

Enter your email address and we will send you instructions on how to reset your password.

Back to Log In

Unleashing God’s Truth, One Verse at a Time
Since 1969
Minimize
View Wishlist

Cart

Cart is empty.

Subject to Import Tax

Please be aware that these items are sent out from our office in the UK. Since the UK is now no longer a member of the EU, you may be charged an import tax on this item by the customs authorities in your country of residence, which is beyond our control.

Because we don’t want you to incur expenditure for which you are not prepared, could you please confirm whether you are willing to pay this charge, if necessary?

ECFA Accredited
Unleashing God’s Truth, One Verse at a Time
Since 1969
Back to Cart

Checkout as:

Not ? Log out

Log in to speed up the checkout process.

Unleashing God’s Truth, One Verse at a Time
Since 1969
Minimiz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