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고린도후서 3장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새 언약의 영광”이라는 제목으로 고린도후서 3장 6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새 언약의 영광입니다.
이 말씀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여러분이 반드시 이해해야 할 몇 가지를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부분은 고린도후서 전체를 통틀어 가장 어려운 본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해석하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렵습니다.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면서 집중하지 않으면 결코 뜻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자주 경험하는 것처럼, 그 어려움을 잘 극복하면 이 서신 전체에서 가장 깊은 의미가 드러납니다. 이 본문은 매우 깊은 말씀입니다. 바울은 이 부분을 놀라울 정도로 치밀하게 전개하고 있습니다. 뜻이 매우 광범위하고 깊어서 이 본문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이 본문은 성경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그런 말씀입니다. 영향력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전환점과 같은 본문입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핵심을 잘 이해하면 구약 그리고 신약을 모두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모세 율법과 복음을 모두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매우 깊고도 전략적인 말씀입니다.
또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가 서 있는 미국 복음주의 교회의 현실과도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마 이 본문을 처음 읽으시는 분은 한 절 한 절 읽어갈 때마다 다소 혼란을 느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읽는 것만으로는 풀리지가 않습니다. 자세히 살피고, 분별하고, 또 깊이 연구해야 비로소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렇게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해도, 여전히 이런 질문이 남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살아가는 현실과, 이 시대 이 지역의 교회와 도대체 관련이 있기는 한건가?”라는 질문입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매우 깊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뿐만 아니라 앞으로 이어질 이 시리즈 전체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확인하게 될 겁니다.
저는 이 본문을 조금 오래 붙들고 가려고 합니다. 가끔 그래왔던 것처럼 말입니다. 서두르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분명하게 이해하기를 바라기 때문이죠. 기초를 다지는 그런 과정이 될 것입니다. 이번 주 설교 위에 또 다음 주 설교가 쌓이는, 그렇게 쌓이고 쌓이는 과정을 거칠 것인데 제가 매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이 말씀을 정말로 이해하고, 이 말씀의 엄청난 의미와 영향력을 붙들기 원하신다면, 여러분이 힘써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매 주일마다 이 자리에 빠지지 않고 나오시는 겁니다. 한 주를 빠지면 말씀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게 될 겁니다. 그리고 또 그 다음 주에 계속 이어가는 것도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저는 여러분이 신실하기를 정말 바랍니다. 깊이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의 깊게 따라오시기를 바랍니다. 단지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우리 교회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역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요청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이 본문에 담긴 역동성을 가능한 한 천천히, 그리고 깊이 생각하면서 풀어가려고 합니다. 이런 기회가 오기를 정말 오랫동안 기다려 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이제 이 본문으로 설교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가능한 천천히 다루려고 합니다. 아마 설교라기보다는 강의처럼 들릴 겁니다. 교수가 마치 강의를 하는 것처럼 그렇게 들릴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예배라기보다 강의실에 앉아 있는 그런 느낌을 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감동을 받기보다는 배우고 있다는 느낌을 더 강하게 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또 실제적이라기보다는 신학적이라고 느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참고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매우, 정말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니까 주의해서 참고 잘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서론의 서론이었습니다. 자,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서론입니다. 기독교 교회와 기독교 사역자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 또 그리스 정교회, 그리고 의식주의적인 개신교 집단들이 만들어낸 성례주의적 교회주의와 형식적인 의식으로 인해서 아주 심각하게 흐려져 버렸습니다. 새 언약의 순수하고 참되고 분명한 복음, 참된 기독교 신앙은 로마 가톨릭주의와 그리스 정교회, 형식주의적인 개신교 전통, 고교회주의적 의식주의로 인해서 크게 위협받고 있습니다.
사실 종교개혁은 바로 이 싸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참된 복음주의가 형식주의와 의식주의, 그리고 사제주의, 그러니까 성례주의라고 불리는 기계적인 기독교에서 분리되어 나온 것이죠. 성례주의란 교회가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존재가 되어서, 외적인 의식, 형식, 성례, 사제의 기능을 통해 사람들을 교회에 묶어 두는 그런 구조입니다. 참된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교회가 그 위에 올라서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으로 행하는 의식으로 인해 교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이 현실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아마도 이 그레이스 교회에 속한 성도들 가운데 절반 정도는 로마 가톨릭이나 다른 성례주의적 배경에서 벗어나서 참된 구원을 받으셨을 겁니다. 대부분은 로마 가톨릭 교회 배경을 가지고 있을 것인데, 그런 전통을 가진 곳에서 행하는 예배는 의식적이고 형식적이고 기계적이고 외적인 요소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사역자들은 자신을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으로, 그러니까 제사장이나 성직자로 이해합니다. 어떤 특정한 행동을 하고, 정해진 동작을 수행하고, 정해진 의식을 집행하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여깁니다.
모든 것이 참된 기독교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죠. 참된 기독교의 예배는 진실하고, 영적이고, 마음의 중심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리고 사역자는 단순한 제사장이나 성직자가 아니고, 선지자요, 전하는 자요, 종이요, 목자요, 교사입니다. 이 둘 간의 차이는 성경이 말하는 옛 언약과 새 언약만큼이나 큽니다.
성례 중심의 종교는 역사적으로 정통 기독교 안에서 심각한 이단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리고 이 이단은 중세 시대 이후로 교회를 끊임없이 괴롭혔습니다. 내적인 예배를 대신하는 외적인 의식, 참된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대리적 그리스도, 인격적인 구원을 대신하는 비인격적인 의식, 은혜의 상징이어야 할 성례를 은혜의 수단으로 바꿔버린 왜곡, 이 모든 것이 결국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했죠.
참된 기독교 신앙의 사역자는 교회의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의식을 집행하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임재 가운데서 나아와 하나님의 백성에게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언제나 그래왔듯이 오늘날에도 이 성례주의적 왜곡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3장에서 바로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대적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로마 가톨릭이나 그리스 정교회, 혹은 고교회주의적인 성공회와 같은 형태의 성례주의가 아닙니다. 바울이 맞서고 있는 것은 처음부터 교회를 괴롭혔던 의식주의의 원조, 그러니까 유대주의입니다. 그러나 사실 본질적으로는 똑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이 본문은 참된 기독교 신앙을 의식주의에서 분리해서 바르게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정말 매우 놀랍고 풍성한 말씀입니다. 외적인 수단을 통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그 착각, 속이고 정죄로 이끄는 그 거짓된 환상과 이단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그런 말씀입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에도 의식주의는 교회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주의 형태로 교회 안으로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구원에 모세의 율법에 따른 의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심지어 육체적인 할례까지 행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할례당”이라고 불렀죠. 의식과 안식일과 초하루와 절기와 여러 예식들을 굳게 붙들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의식이 은혜의 수단이고, 축복을 얻는 그런 길이라고 그들은 주장했습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도 직면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교회의 순수성을 위협하는 요소이죠. 아마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이미 들어보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지난주에 제 책상 위에 서류가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25쪽이나 되는 서류입니다. 로마 가톨릭 학자들과, 또 잘 알려진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함께 작성한 문서랍니다. 가톨릭과 복음주의 교회의 연합 성명서, 이런 제목이 붙었습니다.
이들이 함께 모여서 참된 복음주의 교회와 로마 가톨릭 사이의 협력, 조화, 그리고 연합을 선언하는 그런 성명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런데 매우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정말로 심각한 문제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문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은 로마 가톨릭 신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로 인정해야 한다.” 물론 저는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도 참된 신자들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매우 예외적인 경우일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로마 가톨릭 신자들을 개종시키려 했던 우리의 죄를 고백해야 하며, 그것이 죄였음을 인정해야 한다.”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우리는 몇 가지 의견 차이가 있지만, 그 차이 때문에 우리가 나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러분, 그 차이가 뭔지 아십니까? 이런 겁니다. 가톨릭은 세례를 은혜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례를 은혜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보죠. 차이가 아주 큽니다. 그런데 이 성명서는 이런 차이가 우리의 연합을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례를 은혜의 수단으로 보면,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과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이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25쪽 내내 같은 이야기를 계속해서 반복합니다. 로마 가톨릭과 기독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그런 이야기를 강조합니다. 기계적인 방식으로 대체된 그리스도, 의식과 형식에 묶인 교회를 참된 교회와 동일시합니다. 아주 두려운 일입니다. 정말 두렵습니다. 종교개혁을 거꾸로 되돌리는 일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로마 가톨릭 지도자들 가운데는 이 연합을 아주 강하게 요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자신들의 체계 안으로 흡수하려는 거죠. 가톨릭은 영적인 의미에서는 새 언약을 포함하고, 형식적인 의미에서는 옛 언약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유일한 참된 기독교다, 라고 주장을 하면서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그런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옛 언약이 이미 끝났고, 더 이상 의식과 형식이 설 자리가 없이 그 모든 것이 이미 폐하여졌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겁니다. 바로 이런 배경 속에서 바울이 오늘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부터 본문을 이해하실 수 있도록 기초를 조금 놓아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는 바울의 서신 가운데 가장 개인적인 내용이 담긴 편지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모습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6장 11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정말 정직한 고백이죠. ‘나는 위선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다. 할 말을 모두 다했다. 나의 마음을 활짝 열었다. 너희는 지금 내 영혼 깊은 곳까지 볼 수 있다.’
이 편지는 바울이 쓴 서신 가운데 자신의 내면을 가장 많이 드러낸 그런 편지입니다. 신약에 있는 열세 개의 서신 가운데서도, 이 편지에서 우리는 바울의 마음 깊은 곳을 가장 선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편지에서 가장 솔직하고, 가장 투명하고, 가장 깊이 자신을 드러냅니다. 동시에 바울이 가장 사랑한 교회에 보낸 편지이기도 합니다.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바울은 이 교회를 특별하고도 독특하게 사랑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14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내 사랑하는 자녀”라고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도 바울은 같은 마음을 드러냅니다. 14절에서 고린도 성도들을 “어린 아이” 이렇게 말하고, 또 이어서 15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 다시 말해서 바울은 “나는 너희를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주겠다. 내 생명까지도 내어주겠다”라고 하면서 이렇게 묻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할수록 너희는 나를 덜 사랑할 것이냐?”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가장 사랑한 교회이기 때문에, 동시에 바울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줄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쬬. 또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바울은 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마음을 활짝 열었습니다. 완전히 자신을 드러냈습니다. 누구보다 깊이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마음을 깊이 찌르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이 교회를 향한 깊은 사랑 때문에 진심으로 슬퍼했습니다. 죄와 반역 때문에 마음이 병들 정도로 괴로웠습니다. 바울의 마음을 낙심하게 만드는 문제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날마다 생명을 위협하는 음모와 위협을 받고, 거의 죽음에 이를 만큼의 병을 앓고 있었을 가능성도 큽니다. 이 편지 전반에 걸쳐서 “죽을 지경”이라는 표현이 아주 여러 차례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4장 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절입니다.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절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11절입니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12절입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6장 4절입니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7장 5절입니다. “...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11장 23절 이하로는 더욱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리고 이 모든 것보다 더 힘든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28절에 나오는 ‘메림나(merimna)’, 염려입니다. 신실하지 못한 신자들을 상대해야 하는 그 염려입니다. 이 교회는 하루에도 수없이 바울의 마음을 무너뜨렸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5절에서 7절을 보면 고린도 교인들은 모든 지식과 모든 지혜가 풍족했습니다. 모든 은사도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많은 은사를 받은 교회였습니다. 지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고, 거의 2년 동안 바울이 직접 목회한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토록 많은 것을 받은 교회죠. 그런데도 무너졌습니다. 교회 안에 갈등과 분열과 혼란이 가득했습니다. 파벌이며, 시기며, 교만이며, 음행이며, 근친상간이 가득했습니다. 성도들끼리 서로 고소하고, 음란하고, 결혼을 왜곡하고, 연약한 성도들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우상 숭배에 빠지고, 성찬식을 더럽히고, 성찬식 전에 함께 식사하는 애찬식에 술에 취해서 참석하기도 하고, 영적인 은사를 왜곡해서 사용하고, 심지어 그리스도를 저주하기까지 했습니다. 예배는 아주 혼란스러웠습니다. 부활에 대해 잘못 가르쳤습니다. 가난한 성도들을 돕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 모든 문제를 고린도전서에서 다루면서 책망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파괴적인 이단이라고 할 수 있는 성례주의입니다. 할례당, 그러니까 유대주의자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옛 체제를 지켜야 한다. 안식일도 지켜야 하고, 율법도 지켜야 하고, 의식과 정결 예식과 모든 형식들을 다 따라야 한다.” 바울은 이 일로 다시 한 번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외적인 의식주의를 하나님을 향한 참된 마음과 혼동하는 이 치명적인 혼란이 바울을 몹시 괴롭혔습니다.
거의 죽음에 이를 만큼의 병을 앓고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었습니다. 첫번째 편지에서 다루었던 그 많은 죄들 때문에 슬퍼하고 괴로워했던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디도가 오기를 혼자 외롭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 에베소에서 사역하다가 폭동을 만나서 겨우 목숨을 건져 도망쳐야 했던 일도 있었습니다. 드로아에 갔을 때는 마음이 너무 무너지고 낙심한 상태였기 때문에, 사역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떠나야 했죠. 이처럼 사역하는 가운데 이미 충분히 많은 고통을 겪었는데, 여기에 더해서 가장 큰 고통이 오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고린도 교회가 성례주의와 의식주의, 형식주의에 빠져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A.T. 로버트슨(A.T. Robertson)은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은 설교자의 삶의 밝은 면을 볼 줄 아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어두운 면도 잘 알고 있다. 바울의 삶에는 빛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많은 구름이 있다. 실제로 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유대주의자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랑해야 할 상황에 이르렀을 때, 바울이 내세운 것은 자신의 업적이 아니라 고난의 목록이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혔고, 매를 맞았고, 파선을 당했고, 여러 위험을 겪었고, 자지 못하는 날들이 많았고, 굶주림과 목마름을 겪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그러나 바울은 지금 자신의 약함조차 자랑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아무것도 자랑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A.T. 로버트슨은 바울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영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 바울의 실제 모습입니다.
여러분이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목회자나 설교자는 바울의 이 상태를 잘 압니다. 왜냐고요? 이것이 바로 우리 목회자가 살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괴롭게 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도들의 죄입니다. 또 하나는 성도들의 교리적 이탈입니다. 고린도에서 바울이 직면하고 있었던 문제이죠. 첫 번째 편지는 죄의 문제를 다루었고, 두 번째 편지는 교리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제가 감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바울의 감정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 역시 동일한 부담을 느끼고 있고, 영혼 깊은 곳에서 동일한 압박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문제에 대해 동일한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것과 싸우는 일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치열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입니다. 그리고 교리적 이탈입니다.
사람들이 저한테 이렇게 묻습니다. “아니, 왜 그런 책들을 쓰세요?” 이유가 뭐냐고요? 분명합니다. 사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자신의 부르심에 충실한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는 교회가 죄에 빠지고 오류에 빠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강한 사명에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진정성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는 것은 부차적인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주말에만 해야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계속 해야 할 일입니다.
저는 2장 14절부터 17절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사역의 승리와 영광을 이해합니다. 사역을 하면 기쁘고 승리를 맛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고, 우리를 이끄셔서 복음 사역 가운데 승리의 행렬 속에 서게 하신다는 것, 저도 이해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 놀라운 부르심 속에 승리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우리는 항상 두 개의 전선에 서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는 교회의 삶이 거룩하게 유지되도록 지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교회의 신학이 순수하게 보존되도록 지키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의 삶을 무너뜨리고, 성도들의 생각을 왜곡시키는 그 누구도 결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참된 사역자의 정체성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 전체를 여는 핵심입니다. 6절입니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다시 말해서 “유대주의자들에게 말해라. 옛 언약은 끝났다. 이미 지나간 역사다. 그 모든 제사와 모든 의식과 함께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유대교는 제사를 끝도 없이 반복했습니다. 제사를 지내고, 제사를 지내고, 또 제사를 지냈습니다. 로마 가톨릭도 마찬가지죠. 미사를 드리고, 미사를 드리고, 또 미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미사가 뭡니까? 그리스도의 희생을 반복하는 겁니다. 신약 교회를 유대주의적으로 왜곡하는 것과 구조가 똑같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사역의 진정성, 정당성을 유대주의자들 앞에서 변호하면서 뭐라고 말합니까? “참된 사역자는 새 언약을 전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어떤 의식의 집행자나 형식적인 종교인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참된 사역자가 아닙니다. 참된 사역자는 새 언약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내용을 바울은 이 장 전체로 확장합니다. 이 장 전체는 새 언약의 영광에 대한 말씀입니다. 새 언약의 영광, 그리고 옛 언약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로마 가톨릭, 그리스 정교회, 고교회주의적인 개신교 전통은 본질적으로 옛 언약 방식의 종교입니다. 외적인 종교입니다. 그런 교회에 있다가 나오신 분들이 아마 많이 계실 겁니다. 잘 아시죠? 여러 해 동안 그곳에 계셨던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러나 그때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또 그리스도도 알지 못했고, 구원을 확신하지도 못하셨을 겁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거기에는 구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단지 어떤 위원회가 모여서, 로마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회와 성례주의자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한 형제자매라고 선언해 버린다면, 이것은 복음 전도에 가장 치명적인 공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그런 체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말아야 하는 겁니까? 얼마나 끔찍한 생각입니까? 의식적이고 외적인 종교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죄라고 고백하고, 그들의 영적 필요를 외면하자는 겁니까? 의식주의는 치명적인 이단입니다. 정말입니다. 이단으로 봐야만 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새 언약의 일꾼이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새 언약이란 무엇일까요? 이제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새 언약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다음 주부터 본문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오늘은 먼저 새 언약이 무엇인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주 주의 깊게 들으셔야 합니다. 기초를 잘 다지셔야 합니다.
마태복음 26장 28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다락방에서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면서 잔을 들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다시 말해서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피이다. 죄 사함을 위해 흘리는 피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 언약의 본질입니다. 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죄 사함을 제공하는 언약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말씀드릴 것들이 많습니다. 제가 오늘 설명을 드려도, 여전히 질문이 남을 겁니다. 앞으로 이어질 시간들을 통해서 하나씩 하나씩 함께 풀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 성도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새 언약,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성찬식을 경험했기 때문이죠. 바울이 목회자로 있으면서 이 모든 것을 다 가르쳤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새 언약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성찬을 나눌 때마다 새 언약을 기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이 언약을 통해 죄가 영원히, 그리고 완전히 용서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희생제사를 반복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알고 있었다면, 새 언약이 죄를 용서하고 완전한 구원을 제공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도대체 왜 옛날로 돌아갔을까요? 어떻게 그런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성례와 의식과 외적인 형식이 은혜의 수단이 된다는 거짓말을 믿을 수가 있었을까요?”
여러분이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옛 언약이 아무리 놀랍고 영광스러운 것이었다고 해도, 단지 구원자를 예표하는 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옛 언약은 상징이었습니다. 모든 제사들, 정결 예식, 의식, 할례까지 모두 상징일 뿐입니다. 그것 자체가 실체가 아니라, 실체를 예표하는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자와 상징을 실체와 동일시해 버리면, 결국에는 실체를 왜곡하게 됩니다. 상징을 구원의 수단으로 만들어 버리면, 구원을 완전히 혼동하게 되는 겁니다. 바울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이렇게까지 강하게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고린도 교인들은 알고 있었을 텐데요.” 그렇습니다. 바로 이 점이 놀라운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직접 가르쳤는데도 이 치명적인 이단을 받아들였죠. 바울이 직접 목회했던 교회라면 당연히 더 분별을 잘했어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심각한 문제라는 겁니다.
잘 들으십시오. 바울이 목회했던 교회조차도 이런 문제에 빠졌다면, 우리 교회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에게는 바울이 아니라 저 같은 사람밖에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파수꾼이 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반드시 새 언약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제 히브리서 8장으로 가겠습니다. 히브리서 8장입니다. 새 언약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히브리서 8장이야말로 새 언약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말씀입니다. 내용을 모두 다 다룰 수는 없지만, 핵심은 분명하게 붙잡을 수 있으실 겁니다다. 자, 6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아론이나 레위 제사장들보다 더 나은 대제사장이시라는 문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새 언약이 무엇입니까? 더 좋은 언약입니다. 왜 더 좋은 언약입니까? 첫째로, 중보자가 더 좋은 분이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언약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좋은 중보자로 인해서 더 좋은 언약입니다.
중보자(Mediator)란 무엇입니까? 두 당사자 사이에 서서 서로를 연결하는 사람입니다. 갈등 관계에 있거나 단절된 양쪽을 이어주는 그런 존재이죠. 그리고 진정으로 완전한 중보자가 되려면 양쪽을 모두 대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구약에도 중보자가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9절, 출애굽기 20장 19절, 신명기 5장 5절을 보면 모세가 중보자로 등장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서 있었습니다. 선지자들도 일종의 중보자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전했기 때문이죠. 제사장들도 사람들의 필요와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중보자였습니다. 모세도 중보자였고, 선지자들도 중보자였고, 제사장들도 중보자였습니다.
그러나 치명적인 한계가 있었습니다. 양쪽을 온전하게 대표하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사람이었을 뿐이지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선지자들도 사람이었을 뿐이지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제사장들도 사람이었을 뿐이지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완전한 중보자는 반드시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구약의 중보자들은 그림자입니다. 참된 중보자를 예표하는 모형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거짓 중보자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중보자 맞습니다. 어떤 거짓 종교들은 완전히 거짓된 중보자를 내세우지만, 유대교의 중보자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실제 중보자들이었습니다. 단지 불완전했죠. 충분하지 않았죠. 그림자에 불과했죠. 하나님을 온전하게 대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새 언약에서는 더 이상 그런 중보자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이어 줄 제사장이 따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더이상 어떤 사람도, 어떤 성인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찾아다닐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마리아에게 가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 달라고 요청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은 더 좋은 언약입니다. 중보자가 더 좋은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더 좋은 약속이기 때문에 더 좋은 언약입니다. 모든 언약은 약속 위에 세워집니다. 언약은 그런 겁니다. 옛 언약에도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더 좋은 약속을 합니다. 어떤 약속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희생으로, 단번에, 우리의 죄를 영원히 제거하신다는 약속입니다. 더 좋은 약속입니다. 단 한 번의 희생,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죄가 완전히, 영원히 용서된다는 약속입니다. 다시 말해서, 새 언약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을 보면 어떻습니까? 미사를 행할 때마다 희생이 계속 반복적으로 이어집니다. 성직자들은 제사장처럼 이렇게 서 있습니다. 교황과 추기경이 그런 구조를 유지합니다. 결국 옛 언약을 다른 형태로 계속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 언약과 섞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참된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이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그런 것을 받아들이라는 말은, 마치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에 이렇게 기록했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편지를 짧게 쓰겠다. 너희가 유대주의를 잘 받아들여서 너무 기쁘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렇게 말했습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히브리서 8장 7절입니다.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만일 첫 번째 언약이 완전했다면 두 번째 언약이 필요하지 않았을 거라는 말이죠.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언약은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그리고 8절부터 12절까지의 내용은 예레미야 31장에서 직접 인용한 말씀입니다. 예레미야가 새 언약을 예언했고, 그 말씀이 그대로 인용된 겁니다.
옛 언약은 한계가 분명했습니다. 결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언약이 필요했죠. 그리고 이제 새 언약의 본질을 보여주는 일곱 가지 특징이 나옵니다. 첫번째, 새 언약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새 언약을 세우리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계획이고, 창세 전부터 정하신 것입니다.
두번째입니다. 새 언약은 옛 언약과 다릅니다. 9절입니다.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같지 않다고 합니다. 보완된 언약이 아닙니다. 완전히 새로운 겁니다. 본질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새 언약’이라는 말은 단순히 새롭다는 의미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런 의미입니다.
세번째,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 언약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입니다. 옛 언약이 그랬던 것처럼, 이 새 언약도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10절에서도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이렇게 말합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방인과 언약을 맺으신 적이 없습니다. 한 번도 없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요한복음 4장 22절에서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난다”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이방인은 제외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결코 제외되지 않았습니다. 모세 언약보다 훨씬 이전에 있었던 아브라함 언약에서, 하나님은 이미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브라함의 허리를 통해 한 백성을 일으킬 것이고, 그 백성을 통해 땅의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의 민족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그러나 그 언약이 그 민족에게만 제한되지는 않습니다. 언약을 맺은 민족은 단지 언약을 세상에 드러내고 대표하는 통로일 뿐입니다. 이방인들도 믿음을 통해 새 언약의 복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옛 언약에서도 이방인들이 그 혜택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이방인들도 모세 언약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이방인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모세의 율법에 순종하고 제사를 드리는 삶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새 언약도 마찬가지죠. 이방인들은 믿음을 통해 새 언약 안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메시아의 계보가 이스라엘을 통해 이어졌고, 메시아께서도 이스라엘을 통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속 계획도 이스라엘을 통해 전개되었습니다. 선지자들의 메시지도 이스라엘을 통해 주어졌습니다. 제사장 직분도 아브라함의 후손에서 나온 레위 지파를 통해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방인이든지 믿으면,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실 것을 미리 아시고,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이어서 29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다만, 이 언약을 이스라엘과 맺으신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방인들도 그 안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실제로 새 언약 안에는 유대인보다 이방인이 더 많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거부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로마서는 언젠가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될 그날이 온다고 말합니다.
자, 그러니까 정리를 해 보면, 새 언약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언약입니다. 옛 언약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언약입니다.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언약입니다. 새롭다는 것은 옛 언약이 폐기되었다는 뜻입니다.
네번째입니다. 새 언약은 율법적인 언약이 아닙니다. 9절을 보십시오.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새 언약에서는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옛 언약처럼 다시 돌아가서 또다시 제사를 드리고, 모든 과정을 반복하면서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얻으려고 애쓸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다섯번째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이고, 옛 언약과 다른 언약이고,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이고, 율법적인 언약이 아닐뿐 아니라, 외적이지 않고 내적인 언약입니다. 10절입니다.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완전히 확정된, 영구적인, 내적 관계입니다. 생각과 마음에 기록됩니다. 돌판에 새기는 것이 아닙니다. 양피지에 기록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적이지 않습니다. 내적입니다.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 성령을 두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내적인 것이죠. 외적이지 않죠.
여섯번쨰입니다. 이 언약은 인격적 언약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다시 말해서, 외부에서 계속해서 “주를 알아라, 주를 알아라” 이렇게 외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하나님의 법이 우리 안에 있고,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마지막으로, 새 언약은 죄를 완전하게 사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것이 새 언약의 정점입니다. 사람이 무엇보다도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죠. 최종적이고, 완전한 죄 사함입니다.
그리고 13절에서 이 주제와 관련해서 매우 강력한 선언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31장에서 “새” 이렇게 말씀하시는 그 순간, 첫 번째 언약은 무엇이 되었습니까? 낡은 것이 되었습니다. 폐기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식주의와 형식주의, 상징적인 종교를 모두 낡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은 온갖 장식과 의식적인 요소들을 행하지 않는 것이죠. 온갖 장식물이며, 상징적인 도구들, 벽에 걸린 종교적인 장비들, 향을 피우고 연기를 올리고 제단을 세우는 그런 것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왜냐고요? 이미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을 다시 들여오면 결국은 유대주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참된 복음주의 안에 그런 모든 것들을 끌어들여 포함시킬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종교개혁의 이유 아닙니까? “어떤 그리스도인에게는 세례가 은혜의 수단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은혜의 상징이다”라고 말해 버리면, 세례 문제로 순교했던 수많은 재세례파 신자들에게 “당신들은 별것 아닌 문제로 죽었어” 이렇게 말하는 꼴이 됩니다.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지나간 것들을 다시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됩니다.
1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낡아지고 쇠하여 가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유대인들에게 하신 매우 충격적인 선언입니다. 만일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다음에 이스라엘 하시딤 회당에 가서 “옛 언약은 끝났다” 이렇게 말해 보십시오. 무사히 나올 수 있을지 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옛 언약은 끝났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에게 큰 걸림돌이 되는 문제입니다. 유대인은 율법, 의식, 형식으로 이루어진 옛 언약이 단지 그림자였고, 이제 실체가 오셨기 때문에 그 모든 상징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진 사건이 바로 증거입니다.
그리고 이 히브리서가 기록된 지 채 5년도 지나지 않아서 예루살렘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성전이 사라지고 예배를 드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나 버렸습니다. 로마 장군 디도(Titus)가 철저하게 파괴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 제사 제도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지금까지도 잔해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죠. 그런데 성례주의라는 이름으로 기독교 안에 들여오는, 이미 죽고 사라진 것을 다시 살려내는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기독교 신앙의 명료함을 흐리고 왜곡하는 짓입니다. 옛 언약은 이미 완전히 새 언약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히브리서 9장을 잠깐 보겠습니다. 11절입니다. 새 언약을 정리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새 언약에는 더 좋은 대제사장이 있고, 더 좋은 약속이 있고, 더 좋은 장막이 있습니다.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이 창조에 속하지 않은 하늘의 장막입니다.
잘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얼마나 자주 성소에 들어가야 했습니까? 성소에 매일 매일 끊임없이 들어가야 했습니다. 지성소에는 일 년에 한 번씩 들어갔죠.
그러나 예수님은 단 한 번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다음 미사 전까지만 유효한 일시적인 속죄를 이루신 것이 아니라,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옛 언약의 제사는 육체를 정결하게 하는 효력이 일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완전한 정결을 이루셨습니다. 영원한 정결입니다.
15절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무엇이라구요? 새 언약입니다.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그리스도의 죽음은 옛 언약 아래 있던 사람들의 죄까지도 씻어 주었습니다. 옛 언약에는 죄를 씻어 줄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에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옛 언약 아래 있던 사람들까지도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옛 언약을 올바르게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옛 언약을 장차 오실 중보자를 가리키는 상징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다는 말씀 기억하십니까? 본질 그대로, 상징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과 바울을 대적했던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그 상징들이 메시아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오히려 그 상징들을 종교로 만들어 버렸죠.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기계적인 종교를 만들어 낸 겁니다. 일종의 대리된 신앙 체계 같은 그런 겁니다.
만약 옛 것들이 좋은 상징이었다면, 그 상징이 예표하는 실체는 얼마나 더 뛰어나겠습니까? 외적이고 육체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데 사용되었다면, 내적이고 영적이고 영원한 언약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영원한 목적을 얼마나 더 온전히 이루겠습니까? 우리에게는 더 나은 대제사장이 계십니다. 더 나은 성소, 더 나은 희생, 더 나은 약속이 있습니다. 일시적인 속죄가 아니라 영원한 속죄입니다. 단 한 번으로 완전하게 이루어진 죄 사함입니다.
아이작 왓츠(Isaac Watts)는 이렇게 썼습니다. “유대인의 제단 위에서 드려진 모든 짐승의 피도 죄책에 눌린 양심을 평안하게 할 수 없고 죄의 더러움을 씻어낼 수 없다네. 그러나 하늘의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제거하시니, 그분의 희생은 훨씬 더 고귀한 이름과 더 풍성한 피를 가진 희생이라네.” 이것이 바로 새 언약입니다. 그리고 참된 사역자와 참된 교회는 새 언약 위에 서 있는 존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이제 이 진리들을 막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진리를 우리 마음에 분명하게 비춰 주시니 감사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신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셨음을 감사합니다. 이 옛 의식과 형식에서 벗어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니 이 또한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모든 일이 성령을 통해 하나님께 순종하신 것임을 믿습니다. 특히 이 최고의 희생으로써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죄책을 제거하시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악한 양심으로부터 깨끗하게 씻기고, 맑은 물로 몸을 씻은 자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옛 제사장들은 외적인 것만을 상징적으로, 불완전하게, 일시적으로 정결하게 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내면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외적인 것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마음의 본질에 충실하게 하여 주옵소서. 참된 새 언약의 교회가 되게 하시고, 새 언약의 신자가 되게 하시고, 새 언약의 사역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이러한 새로운 시대에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요. 옛 선지자들이 바라보고 사모하던 그 시대, 이제 모든 것이 이루어진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새 언약에 신실하게 하여 주옵소서. 오래된 거짓과 치명적인 이단, 의식주의가 교회 안으로 스며들지 못하게 우리를 지켜 주옵소서.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영적 필요를 따라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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