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에도 로마서 12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 삶의 실천적인 면을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천천히 하나씩 다루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9절부터 21절에서 우리에게 주는 권면, 명령,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 모두를 충분히 다루고 싶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기독교인의 실천적 의무>라는 주제의 세 번째 시간입니다.
공산주의자인 레닌(Lenin)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 삶을 바칠 헌신된 사람 몇 명만 있다면 나는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레닌은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공산주의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이 일은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레닌은 세상이 절제할 줄 아는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세상은 헌신된 사람들의 것입니다. 자신이 믿는 대의를 위해 자기 삶을 기꺼이 내어놓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정말 맞는 말입니다. 세상은 절제할 줄 아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미국 문화를 비롯해서 세계 곳곳의 현실을 바라보면 정말 두렵습니다. 점점 자기 절제와 훈련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회는 휴식과 오락을 강조합니다. 사람들이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답니다. 너무 빠른 속도로 살아가다 보니 정신병원에 가고, 약물에 의존하고, 심지어 자살까지 하는 사람들이 많답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무절제한 삶이 만들어낸 광적인 행동일 뿐입니다.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은 결코 통제력을 잃지 않습니다. 통제되지 않는 삶이란 절제되지 않은 삶입니다. 많은 경우에 이런 무절제하고 통제되지 않은 삶은 자기 발전, 자기 성취, 성공, 돈, 물질, 지금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하는 강한 욕망에서 비롯됩니다. 거기에 약물과 술에 대한 욕망까지 뒤섞여 버립니다. 그러면서 인생을 마음껏 즐기는 일에 광적으로 집착합니다. 결국 절제는 뒤로 밀려나 버립니다. 현대 사회는 오락을 정말로 사랑합니다. 현대 사회의 스포츠는 이미 균형 잡힌 수준을 훨씬 넘어섰습니다. 균형을 잃고 오락의 비중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은 타락한 사회의 특징입니다. 철학적 주장이 아닙니다.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위대한 사상가, 위대한 작가, 위대한 예술가, 위대한 음악가, 위대한 신학자, 위대한 기술자, 위대한 의사, 위대한 변호사, 위대한 지도자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에 엄청난 절제력이 필요합니다. 엄청난 자기 절제와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야구 경기를 보는 데에는 아무런 절제력도 필요하지 않죠. 테니스나 골프를 치는 데에도 사실 절제력이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정신적으로 절제를 필요로 하거나 절제를 훈련하지 않습니다. 그저 휴식의 시간일 뿐입니다.
절제에 대한 흥미로운 글을 쓴 리처드 셸리 테일러(Richard Shelley Taylor)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때 대학 토론 대회는 수많은 관중을 끌어모았다. 그러나 이제 토론 대회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사람들은 농구 경기장에서 환호하고 있다. 지적인 것에서 오락으로 관심이 옮겨간 이 현상은 기독교 대학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그만큼 휴식과 오락이 강조되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반드시 분명히 말해야 한다. 사람들의 관심이 토론에서 농구로 옮겨갔다는 사실은 문화가 쇠퇴하고 있다는 징조이다.” 피상적이고 천박한 사회, 지나친 자기 만족에 빠진 사회의 특징입니다. 오락, 휴식, 게임, 재미는 사람들이 쏟아붓는 것만큼의 가치를 결코 사회에 돌려줄 수 없습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성경이 뭐라고 말합니까?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약간 뿐입니다.
정신적 절제는 훨씬 높은 차원입니다. 사역 현장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젊은 사역자들을 만나보면, 정신을 절제하고 눈앞의 사명에 집중하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테디 루스벨트(Teddy Roosevelt)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번영을 추구하는 것,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평화를 추구하는 것, 의무보다 안전을 먼저 생각하는 것, 안락한 삶만을 추구하는 것, 그리고 부자가 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것이 결국 미국을 무너뜨릴 것이다.” 그렇습니다. 루스벨트가 두려워했던 일이 지금 현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상과의 싸움에서, 진리를 위한 싸움에서, 사회와 문화를 지켜내기 위한 싸움에서 이기려면 정신을 훈련해야 합니다. 정신을 훈련하면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평가할 수 있고, 분석할 수 있고, 비판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고, 계획할 수 있고, 집중할 수 있고, 정확하게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도 정신적 절제가 사라져 가는 모습을 봅니다. 무엇이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생활조차 오락처럼 즐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최근에 목회자들이 모이는 대규모 집회에 참여했습니다. 집회 마지막에는 참석한 목회자들이 각자의 지역 사회로 돌아가서 그리스도를 위해 사역하고 공동체를 정복하라는 강력한 메시지로 마무리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강사가 나와서 휴식과 오락을 즐기는 방법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그러자 모두가 “그래, 며칠 더 쉬어야겠군”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회를 준비했던 사람들은 정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지금 이런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매우 슬픈 일입니다. 결국 우리는 정신을 절제하지 못하는 세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석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비판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평가하지 못하고,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세대가 되고 말 것입니다. 정신을 절제하는 사람은 자신을 더 분명하게 표현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논리와 이성을 통해서 사람들을 설득할 가능성도 훨씬 높습니다. 그런데 복음주의자들의 정신이 훈련되고 절제되지 않으면 결국 설득력을 잃습니다. 설교에 능력이 없어집니다. 절제는 삶 속에서 균형을 이루는 사람의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기능과 힘과 능력을 통제 아래 두어 균형을 이루는 사람에게 절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제가 앞서 말씀드렸던 테일러(Taylor)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절제하는 사람은 용기 있게, 때로는 영웅적으로 삶을 맞서고 정복해 나간다. 자신의 책임을 단호하게 감당한다. 책임감에 의해 움직인다. 연약한 사람들은 결코 가질 수 없는 깊은 내면의 자원과 예비된 힘을 가지고 있다. 역경마저 자신을 섬기게 만든다.” 그리고 마담 기용(Madame Guyon)에 대해서 말합니다. “마담 기용은 강인한 인격을 가졌기에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영적으로 일어나 찬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새장에 둘러싸여 있어 밖으로 날아갈 수 없다네. 비록 내 날개는 묶여 있지만 내 마음은 자유롭다네. 감옥의 벽은 내 영혼이 자유롭게 비상하는 것을 막지 못하네.’”
이런 삶에 능력이 있습니다. 훈련되고 강인한 인격을 가진 삶에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오직 절제할 줄 아는 사람만이 큰 책임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산업계든, 교육계든, 비즈니스든, 교회든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공하고자 하는 큰 야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열망과 목표와 꿈과 포부가 아주 큽니다. 그러나 평생 이루지 못할 겁니다. 왜냐하면 절제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적 능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절제의 문제입니다. 타고난 재능이나 은사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인격이 문제입니다. 쉽게 말해서, 묵묵히 자리에 앉아서 끝까지 버텨내는 힘이 없는 겁니다.
예를 들면 많은 젊은이들이 의사가 되고 싶어합니다. 대기업 총수가 되고 싶어합니다. 교수나 교사가 되고 싶어합니다. 회사에서 승진하고 싶어합니다.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되고 싶어합니다. 최고의 과학자, 엔지니어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현실로 이루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절제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에 이르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야 하는, 혹독하게 공부하는 시간을 견디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음악 분야에서 예술성과 완성도를 갖추고 싶어합니다. 예술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을 갖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날마다, 또 해마다 반복되는 지루한 연습을 견디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 출석 중인 크리스 파크닝(Chris Parkening)은 아마 세계 최고의 클래식 기타 연주자일 겁니다. 저는 크리스와 이 주제를 두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크리스는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이미 기타를 완전히 지배하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결코 쉽게 이룬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는 어린 시절 내내 게임도 하고 싶었고, 재미있는 일도 하고 싶었고, 스포츠도 즐기고 싶었답니다. 그러나 하루에 적어도 다섯 시간씩 기타를 연습해야 했습니다. 열두 살, 열세 살, 열네 살, 그런 나이에는 정말 힘든 일이죠. 저는 크리스가 그 일을 해낸 것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수준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누구보다 뛰어난 기타 솜씨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는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달콤한 성취감을 평생 누리면서 살 겁니다. 세상에는 타고난 재능만 믿고 살아가는 음악가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예술가는 많지 않습니다. 과연 오늘날 우리 세대에서 위대한 예술가들이 얼마나 나오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여러분에게 절제의 시급성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에서도 너무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저는 교회 안에서 절제력이 부족한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봅니다. 만일 교회가 무절제한 방식의 신앙생활을 허용하게 되면, 결국 절제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 세대를 만들어내게 될 겁니다. 그리고 바로 그 세대에서 미래의 지도자들이 나오게 될 것인데, 결국 절제력의 부족은 평범함과 무기력함을 만들어내고 말 겁니다.
그렇다면 절제란 무엇일까요? 저는 지금 아주 천천히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조금 돌아서 가고 있습니다.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절제란 무엇일까요? 제가 내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정의는 이겁니다. 여러분이 들어본 최고의 정의는 아닐지 몰라도 제가 말하고 싶은 핵심을 담은 정의입니다. 자기 절제란 충동이나 욕망이나 압박이나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원칙과 바른 판단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다스리는 능력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자기 절제란 충동이나 욕망이나 사람들의 압박이나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원칙에 따라, 그리스도인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원칙에 따라, 그리고 바른 판단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다스리는 능력입니다. 이해되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충동적으로 행동합니다. 욕망에 따라 행동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따라갑니다. 사회 분위기를 따라 행동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절제가 아닙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자기 절제란 자신을 복종시키는 능력입니다. 옳은 것과 가장 선한 것 아래에 자신의 몸과 감정을 복종시키는 능력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몸을 복종시키는 법을 모릅니다. 자기 감정을 복종시키는 법을 모릅니다. 다시 말해서 통제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갑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흐름을 따라갑니다. 마치 물살을 따라 떠내려가는 죽은 물고기처럼 흐름에 맞서 싸우는 법을 모릅니다. 자기 절제란 자신을 복종시키는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자기 절제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 욕망과 감정과 느낌과 내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아래에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목표로 합니다. 자신을 절제하는 영적인 삶입니다.
하나님께 참 감사한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 절제하기 위해서 싸우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제 인생의 어느 시점에선가,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절제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결단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제 사역의 밑바탕을 이루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제가 특별히 머리가 좋거나 지적인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똑똑하거나 탁월해서도 아닙니다. 정말 제 안에서 나온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어느 순간 제 마음이 움직여졌고, 절제하는 삶을 훈련하겠다는 선택을 했던 겁니다. 그리스도를 믿은 것 다음으로 제 인생에서 가장 복된 결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옳은 것과 가장 선한 것 아래 내 삶을 복종시키며 살아가려고 애쓰는 삶입니다.
이와 같이 절제를 반드시 훈련해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절제를 가르치기 위해서 정말 애쓰셔야 합니다. 자녀에게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큼은 반드시 가르치십시오. 자기 절제를 가르치십시오. 자기 욕망을 옳은 것 아래 복종시키는 법을 가르치십시오. 자기 감정을 선하고 바른 것 아래에 복종시키는 법을 가르치십시오. 마음대로 잘못된 행동을 하게 두지 마십시오. 단순한 충동이나 감정으로 행동하도록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옳든 그르든 자기 욕망대로 행동하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제멋대로 행동하도록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떼를 쓰도록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그러면 안 됩니다. 사랑으로 자녀에게 절제를 가르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범죄자를 키우게 될 겁니다. 꼭 감옥에 가는 범죄자가 아닐 수는 있어도, 사회를 거스르는 사람, 반사회적인 사람으로 자라게 될 겁니다.
성경은 자녀들에게 올바른 원칙을 가르치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녀가 절제력을 잃었을 때에는 징계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무절제한 행동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배우게 해야 합니다. 대가를 치르지 않으며 절제를 배우는 아이는 없습니다. 결국 아이들은 무절제한 삶의 결과가 너무 고통스럽다는 것을 배우면서 절제를 배웁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잘못된 행동을 할 때마다 충분한 대가를 치르게 되면 결국 그 행동을 멈출 겁니다. 자기 절제를 가르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그렇다면 어른들은 어떻습니까?” 물론 어른들도 절제가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절제가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책임 아래에 두어야 합니다. 절제해야 합니다. 규칙이 필요합니다. 법이 필요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니까 아무 규칙 없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자유를 핑계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뜻이 전혀 아닙니다. 우리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규칙과 법 아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규칙과 법을 지키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만일 어기면 반드시 결과가 따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거역하면 주님께서 징계하신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잘못된 행동의 결과가 고통스러워야 다시 옳은 길로 돌아오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 절제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법과 원칙을 주셨습니다. 로마서 12장에는 절제하며 사는 삶에 나타나는 원리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바라보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내 안에 이러한 모습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본다면, 영적인 절제의 삶을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말씀 아래 복종시켜야 합니다. 우리의 욕망을 말씀 아래 복종시켜야 합니다. 우리의 자아와 고집을 하나님의 말씀 아래 복종시켜야 합니다.
때로 위선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인간에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악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누군가 내 영역을 침범하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반응하면서 불친절하게 대하는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게으른 것도, 다른 사람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 편하게 살려고 하는 것도, 누군가 나에게 못되게 굴면 화를 내는 것도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은 더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덜 좋아하는 차별도 그렇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상처를 주면 똑같이 갚아주고 싶어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복수하고 싶은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원수가 굶주리는 것을 보면서 속으로 기뻐하는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잘못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절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더 이상 인간적인 본능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옳고 선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위선을 버리고 진실하게 사랑하며, 악을 버리고 선으로 삶을 채우고,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겸손하고 이타적인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해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태도로 자기 만족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상처준 사람을 미워하는 대신에 사랑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모두 동일하게 대해야 합니다. 상처 받은 만큼 되갚는 대신 사랑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복수심을 품지 않아야 합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도대체 그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바로 절제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본성적인 욕망을 통제하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지배적인 원리 아래 자신을 복종시키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이것이 신자가 절제하며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저는 절제하는 삶의 시작점이 로마서 12장 1절과 2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자신을, 우리의 몸과 영혼과 생각과 의지를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새롭게 변화가 되어서 더 이상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변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갑니다. 의지와 감정과 충동과 욕망과 사람들의 압박과 사회적 분위기를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 복종시킵니다. 바로 이겁니다. 로마서 12장의 원리를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절제를 배운 사람입니다. 자기 절제를 배운 사람입니다.
그러면 또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존 목사님,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절제를 배울 수 있나요? 저는 절제하는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제가 절제를 시작할 수 있을까요?” 이제 아주 실천적인 몇 가지를 말씀드리고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기 절제를 배울 수 있을까요? 절제하는 방법을 배우고 싶으십니까? 실제적인 조언을 하나 하겠습니다. 성경 말씀은 아닙니다. 한번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무절제한 사람이다. 지난 몇 주 동안 살펴본 9절부터 21절의 원리들을 바라보면 내 삶 속에는 그런 모습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절제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우선 제가 여러분에게 제안하고 싶은 것은 아주 작은 일부터 시작하라는 겁니다. 정말 작은 일부터 시작하십시오. 제가 간단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의 방에서부터 시작하십시오. 방을 정리하시고 계속 잘 유지하십시오. 뭔가 어질러져 있을 때 다시 정리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물건을 제자리에 갖다 놓으십시오. 버려야 할 것은 버리십시오. 그리고 나서 이제 집 전체를 바라보십시오. 웃는 분들이 보이네요. “우리집은 이미 회복 불가능한 상태야”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원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시간을 지키십시오. 별로 영적인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원리입니다. 시간을 지키십시오. 여러분이 있어야 할 그 시간에 그 자리에 계십시오. 여러분의 욕망과 행위와 여러분을 붙잡아 당기는 수많은 것들을 내려놓고, 가야 할 자리에 제시간에 도착하는 훈련을 하십시오. 이렇게 어질러진 것을 치우고 시간을 지키는 아주 작은 일들이 절제력을 길러줄 겁니다.
세 번째입니다. 저에게 정말 큰 도움이 된 원리입니다. 가장 힘든 일을 먼저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점점 스스로를 절제할 수 있게 됩니다.
네 번째입니다. 삶을 정리하십시오. 계획하며 살아가십시오. 그저 반응하며 살지 마시고 계획하십시오. 종이 한 장을 꺼내서 이렇게 적어보세요. “오늘 나는 이 일을 하겠다.” 그냥 상황에 끌려다니며 반응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자신의 삶을 통제하지 않으면 다른 것들이 여러분의 삶을 통제할 겁니다. 정말 그렇게 됩니다.
다섯 번째입니다. 책망과 교훈을 감사함으로 받으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을 더 절제할 수 있게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비판받는 것을 피하지 마십시오.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또 하나의 원리가 있습니다. 저에게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자기 부인을 훈련하십시오. 그리고 아주 단순히 실천하십시오.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으십니까? 그럼 대신 차를 주문하십시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저는 마른 체질인데요.” 살이 찌고 마르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 절제를 훈련하는 문제입니다. 스스로에게 “안 돼”라고 말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저는 평생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했습니다. 언제나 욕망을 다 채우지는 않으려고 훈련했습니다. 커다란 도넛이 너무 먹고 싶을 때 저는 제 자신에게 말합니다. “안 돼, 먹으면 안 돼.” 제가 자제력이 없는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도넛 하나 먹는다고 인생이 끝나는 것도 아니죠. 그러나 저는 절제를 훈련해야 합니다. 스스로를 통제 아래에 두는 법을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훈련은 결국 영적인 영역으로까지 이어집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원리는 책임져야 할 일을 기꺼이 맡으라는 겁니다. 책임을 기쁘게 맡으십시오. 해야 할 일이 생기고 기회가 있다면 자원하십시오. 책임을 받아들이십시오. 왜냐하면 책임감이 스스로를 절제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자, 아주 간단합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작은 것부터 시작하십시오. 여러분의 방, 집, 자동차를 정리하십시오. 시간을 잘 지키십시오. 가장 어려운 일을 먼저 하십시오. 그리고 삶을 계획하십시오. 비판을 받을 때 감사하십시오. 자기 부인과 자기 절제를 훈련하십시오. 그리고 책임을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정말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런 작은 일들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절제력을 길러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우리는 자녀들에게 끊임없이 가르칩니다. “방 정리해라, 방 정리해.” 왜 그렇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구경시키려고 그러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것 아니죠. 저는 사람들을 초대해서 아이들 방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매트의 방이나 마시의 방을 구경해 보세요” 이렇게 써붙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작은 일을 실천하며 배우는 과정 자체가 절제를 가르쳐줍니다.
시간을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딜 가야 한다면 늦지 마십시오. 제시간에 가십시오. 저는 그렇게 훈련했습니다. 그랬더니 영적인 영역으로 이어졌습니다. 저는 지금 가능한 한 실천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적 절제의 삶이라는 것이 마치 아주 멀리 떨어진 특별한 세계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게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주 극도로 거룩한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하고 싶습니다. 결국 우리의 삶 속에서 습관을 만들어가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런 습관들이 결국 절제하며 살게 만듭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본문으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살펴보기 시작했던 원리들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로마서 12장을 보겠습니다. 오늘 저녁에 길게 다루지는 않겠지만, 지난 시간에 시작했던 부분을 조금 더 말씀드리고, 다음 주에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절제하는 삶을 실제로 살아가려면 반드시 알아야 할 원리들이 있다. 절제하는 삶의 실천적 의무이다.” 9절부터 21절까지를 보면 이 원리들은 네 가지 단계, 혹은 네 부분으로 나뉩니다. 마치 점점 커지는 원 같습니다. 새로운 단계가 나올 때마다 이전의 내용까지 포함하면서도 점점 범위가 넓어집니다. 첫 번째 단계는 개인적인 영역에 관한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그리스도인 가족 공동체에 관한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모든 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네 번째 단계는 우리에게 해를 끼친 원수들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절제하는 삶이 감당해야 할 책임의 범위를 점점 넓혀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9절 기억하십니까? 첫 번째 단계, 개인적인 영역입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다시 말해 진실하게 사랑하라는 것이죠.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절제하는 삶을 위한 세 가지 기본 태도입니다. 진실하게 사랑하십시오. 악을 미워하십시오. 선에 속하십시오. 절제하는 삶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이어서 10절부터 13절까지에서 그 원이 조금 더 넓어집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의 의무라는 원을 넓혀서 그리스도인의 가족, 다른 신자들까지 포함시키겠다.” 10절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지난 시간에 그리스도인이 한 가족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살펴보았죠. 가족이 사랑하듯이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절제하는 삶,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또 하나 매우 중요한 요소는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따뜻한 애정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그 애정을 실제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사랑하며 필요를 채우기 위해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다시 말해서 겸손히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친절과 애정을 갖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를 존경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존경하는 일을 주저하지 말고 먼저 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높이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이어서 11절에는 또 다른 세 가지 중요한 태도가 나옵니다. 지난 시간에 바로 이 부분에서 마쳤죠.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하나님의 가족을 섬길 때 반드시 필요한 세 가지 자세입니다.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힘써야 합니다. 어떤 일입니까? 주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절제하는 삶입니다. 온전히 사랑하는 삶입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서로를 돌보고 존중하는 삶입니다. 열심으로 열정으로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자신을 드리는 삶입니다.
C.T. 스터드는(C.T. Studd)는 부자였지만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선교지로 떠나면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 종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나는 지옥의 문 앞에서 영혼을 구하는 사역을 하고 싶다.” 저는 이런 영성을 좋아합니다. 스터드는 실제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존 웨슬리(John Wesley) 역시 열정적이었습니다. 웨슬리의 말입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죄 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백 명만 내게 달라. 그러면 내가 세상을 움직이겠다.”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짐 엘리엇(Jim Elliot)은 에콰도르에서 순교한 참으로 놀라운 청년입니다. 어느 날 히브리서 1장 7절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라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런 일기를 썼습니다. “하나님, 저는 불붙기 쉬운 사람입니까? 온갖 잡다한 것들로 뒤덮여 있는 삶에서 저를 건지소서.”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성령의 기름으로 저를 흠뻑 적셔주셔서 불꽃이 되게 하옵소서. 그러나 불꽃은 잠깐 타오르다가 사라집니다. 제 영혼은 불꽃 같은 짧은 삶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 안에는 하나님의 집을 위한 열심으로 자신을 불태우셨던 위대한 분의 영이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 저를 주님의 연료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불꽃이 되게 하옵소서.” 정말 위대한 고백입니다.
짐 엘리엇은 이렇게 말한 겁니다. “비록 오래 타지 못한다 하더라도 저는 불꽃이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저는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아주 짧은 생애를 사셨던 또 다른 분, 곧 우리 주 예수님과 자신을 동일시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도 짧았습니다. 그날 엘리엇이 썼던 “하나님, 저를 주님의 연료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불꽃이 되게 하옵소서”라는 이 문장은 에이미 카마이클(Amy Carmichael)이 쓴 시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시입니다. 제가 마지막 연만 읽겠습니다. “길을 인도하는 사랑을 제게 주소서.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은 믿음을 주소서. 그 어떤 실망에도 지치지 않는 소망을 주소서. 불처럼 타오르는 열정을 주소서. 흙덩이처럼 살아가지 않게 하소서. 하나님, 저를 주님의 연료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불꽃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리버풀 주교였던 라일(J. C. Ryle)은 참된 신자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신앙 안에서 열심 있는 사람은 무엇보다 한 가지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단순히 진지하고, 열정적이고, 타협하지 않고, 철저하고, 마음을 다하고, 영으로 뜨거운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는 오직 하나만 본다. 오직 하나만 마음에 둔다. 오직 하나만 위해 살아간다. 오직 하나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다.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살든지 죽든지, 건강하든 병들든, 부하든 가난하든, 사람을 기쁘게 하든 미움을 받든, 지혜롭다는 말을 듣든 어리석다는 말을 듣든, 비난을 받든 칭찬을 받든, 존귀를 얻든 수치를 당하든, 열심인 사람은 그런 것들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 오직 하나를 위해 불타오른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게 불타올라 자신이 소모된다 해도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만족한다. 자신이 마치 등불처럼 타오르도록 만들어졌다고 느낀다. 타오르다 소모된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일을 한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열심을 쏟을 자리를 찾는다. 만일 설교를 할 수도 없고, 사역도 할 수 없고, 헌금도 할 수 없다면 울고 탄식하면서 기도할 것이다.” 바로 이런 사람이 열심인 사람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절제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절제하는 삶의 본입니다. 정말 놀라운 사람입니다. 원리 그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방식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오직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의 뜨거운 열정을 아주 특별하게 묘사한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주 인상적인 글입니다. 이렇습니다. “바울은 친구를 만들려는 관심도 없고, 세상의 유익을 얻으려는 소망이나 욕심도 없고, 세상의 손해를 두려워하지도 않고, 자기 생명을 염려하지도 않고, 죽음을 무서워하지도 않는 사람이다. 지위에도, 나라에도, 환경에도 관심을 두지 않은 사람이다. 오직 한 가지만 생각한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오직 한 가지 목적만 가진 사람이다.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어리석은 자로 여김받는 사람이다. 사람들이 자신을 열광주의자라고 부르든, 광신도라고 부르든, 떠드는 자라 부르든,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별난 사람이라고 부르든 상관하지 않았다. 바울은 어떤 부류로 정의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만일 사람들이 바울을 반역자나 가장이나 시민이나 부자나 세상 사람이나 학자나 상식적인 사람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면 바울의 정체성은 끝나버린 것이다. 바울은 외쳐야만 하는 사람이다. 아니면 죽어야 하는 사람이다. 죽는다 해도 여전히 말할 것이다. 바울은 쉴 곳이 없다. 육지를 넘어 바다를 건너고, 바위를 넘고, 길 없는 사막을 지나 달려가도 크게 외치며 멈추지 않는다. 누구도 막지 못한다. 감옥 안에서도 목소리를 높인다.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서도 침묵하지 않는다. 두려운 공회 앞에서도, 왕들의 보좌 앞에서도 진리를 위해 증언한다. 죽음 외에는 아무것도 바울의 목소리를 잠재울 수 없다. 그리고 심지어 죽음의 순간에도, 칼이 목과 몸을 가르기 전까지 바울은 계속 말한다. 기도한다. 증언한다. 신앙을 고백한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이 말이 맞습니다. 누군가 바울을 향해 열광주의자라고 하든, 광신도라고 하든지, 떠벌이라고 하든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아, 바울은 로마 시민이야. 부자야. 세상 사람이야. 학식 있는 사람이야”, 이렇게 말했다면 바울은 몹시 괴로워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으로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불타는 열정으로 오직 한 가지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11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부지런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고난이 따르기 때문이죠. 자기를 절제하는 삶, 진실하게 사랑하는 삶, 악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붙드는 삶, 다른 사람들을 향해 손을 내미는 삶, 다른 사람을 높이는 삶, 게으르지 않은 삶, 열정으로 뜨거운 삶,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다 보면 반드시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12절은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이렇게 말합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이 또한 절제하는 삶의 중요한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절제하는 삶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죠. 때로는 최선을 다해도 결과가 너무 낙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믿는 일을 이루기 위해서 온 힘을 다했는데 결국 돌아오는 열매는 너무 적을 때가 있습니다. 정말 미미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미 경험해 보셨겠지만 크게 낙심이 됩니다. 저 역시도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순간에 저는 12절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것이죠. 이 땅에서는 언제나 힘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러나 언젠가 영광의 날이 온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언젠가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뵐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수고가 끝날 것입니다. 저는 지금 절제하며 살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 대가를 치르는 것도 괜찮습니다. 사실 저는 지금보다 훨씬 더 절제를 해야 합니다. 더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 애쓰며 살아가는 이 작은 절제의 삶조차 저는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언젠가 이 모든 것이 끝나고 구주와 함께 완전한 영광 가운데 영원한 안식을 누릴 날이 올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소망으로 기뻐합니다.
저도 지칠 때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견딜 수 있는 한계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 모르겠지만 저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 한계 가까이에서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게 이렇게 말합니다. “왜 자꾸 더 많은 일을 맡으세요? 조금은 쉬셔야 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저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두신 일을 생각하면 제가 하지 않을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역을 감당하면서 또 앞으로를 바라보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은퇴할 날을 기대하지 않으세요?” 저는 절대 은퇴하지 않을 겁니다. 무엇에서 은퇴합니까? 복음을 전하는 일에서요? 제가 준비되기도 전에 여러분이 저를 내려놓을 수는 있겠지만, 저는 평생 헌신할 것입니다. 제 정신이 온전한 한 계속할 것입니다. 영원을 바라보면 지금 이 시간의 절제는 너무 작게 느껴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바로 그런 소망이 우리로 하여금 환난 가운데서도 참고 견디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를 끝까지 붙들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말합니다. 문자 그대로 말하면 기도에 끊임없이 매달리라는 뜻입니다. 기도는 절제하는 삶을 유지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기준대로 살아가는 삶을 유지하게 합니다. 우리는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저를 신실하게 붙들어 주옵소서. 절제하며 살게 하옵소서. 끝까지 달려가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자신의 의지와 욕망과 감정과 충동과 사람들의 압박과 사회적 분위기를 하나님의 우선순위 아래 복종시키며 살기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이것이 제가 우리 그레이스 교회의 사역을 하면서 힘써온 핵심입니다. 절제하는 삶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원하는 사람을 세우도록 힘씁니다. 그리고 저는 지난 세월 동안 그레이스 교회에서 여러분의 삶 속에 그런 모습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기뻐합니다. 정말 기쁩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우리 아이들이 성경 대회에 나가서 모든 부문에서 우승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 정말 기쁩니다. 왜냐고요? 아이들이 자기 욕망과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 복종시키는 법을 배우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세대에 대한 소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흐름은 매우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진실하게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해야 합니다. 다른 신자들을 향해 따뜻한 애정을 가져야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존경을 받으려 하기보다 먼저 다른 사람을 존경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섬겨야 합니다. 열정적이어야 합니다.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뜨거운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순종하고 부지런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아갈 때 반드시 찾아오는 시험과 어려움은 장차 나타날 영광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바라보는 소망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소망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을 참고 견디게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자신을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돌보심에 맡기게 됩니다. 바로 그런 삶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13절에서 그리스도의 가족과 관련된 이 부분을 두 가지 원리로 마무리합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아주 간단한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오래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성도들의 필요를 채우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받기 위해서 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주기 위해 삽니다. 바울이 말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으로 향하지 않습니다. 밖으로 흘러갑니다. 여기서 이 “공급하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정말 아름다운 단어입니다. 헬라어로는 코이노니아(koinonia)입니다. 교제, 나눔, 동역, 친교, 이런 뜻입니다. 교제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 성도들의 필요에 함께 참여하고 함께 나누며 함께 짐을 지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다른 성도들과 동역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성도에게 필요가 생기면 그 필요는 우리의 문제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서로를 위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실 저는 아무것도 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세상적인 의미에서 제 소유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에서는 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저는 주님을 위해 맡아 관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필요하다면 제가 가진 것은 그 사람의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동역자로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함께 나누는 동역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사도행전 2장과 4장을 보면 초대교회의 모습이 나옵니다. 필요가 생기면 자기의 것을 팔았습니다. 팔아서 나온 돈을 필요한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당시 교회의 모습입니다. 모두 그렇게 살았습니다. 누군가 필요가 생기면 어떤 사람은 자기 것을 팔고, 또 다른 사람은 그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3장 16절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가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바로 나누는 것입니다.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7절입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우리는 부한 자입니다.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입니까? 이것 역시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다른 성도를 자신의 동역자로 여기는 겁니다. 함께 나누는 자로 여기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성도에게 필요가 있다면 나의 것을 기꺼이 나누는 것입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잠깐만요. 그렇다면 누구에게 주어야 하는지는 어떻게 압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으셨을 때를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죠. 이 이야기의 핵심은, 우리의 이웃은 우리가 가는 길 위에 하나님께서 두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돈을 봉투에 넣어서 해외로 보내고 누군가 대신해서 나눠주게 하라”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가는 길 위에 필요를 가진 사람을 두시면 네가 가진 것으로 그 필요를 채워주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에 한 목사님과 점심을 먹는데 저에게 이렇게 물으시더군요. “성도들의 필요를 나누는 문제에 대해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가끔 수표 한 장을 써서 구호 단체에 보내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일도 필요합니다. 기근으로 고통받는 세계 여러 지역에는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그레이스 교회도 그런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죠. 그래서 우리도 그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필요를 나눈다”는 것은 믿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서의 핵심은 이겁니다. 여러분이 가는 길 위에 어떤 사람이 서서 필요를 요구한다면 여러분이 그 필요를 채워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전화를 받으면서 제가 놀랄 때가 있습니다. “존 목사님, 혹시 아무개 집사님 가정에 큰 필요가 있다는 것 알고 계십니까? 그래서 교회에서 돈을 좀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늘 똑같이 대답을 합니다. “그 필요를 당신은 알고 있었습니까?” “네.” “혹시 하나님께서 그 필요를 당신 앞에 두신 이유가 당신이 그 필요를 채우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러면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요, 하나님이 그러신 걸까요?” 그래서 제가 대답을 하죠.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레이스 교회는 어떤 별개의 존재가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이 그레이스 교회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의 필요를 이야기하면서 “교회가 도와줘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결국 우리는 여러분 말고 또 다른 누군가를 찾아서 그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 모두 기꺼이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핵심은 이겁니다. 그리스도인은 서로 동역자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겁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이 원리를 아무리 잘 이해해도 언제나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제가 관심 가져야 할 필요들에 충분히 민감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늘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훈련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여러분의 동역자로 생각하십시오. 이 원리를 가장 잘 이해하는 길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함께 나누는 동역자로 생각하십시오.
13절 하반절입니다. 오늘 저녁에 마지막으로 살펴볼 내용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아주 강한 표현입니다. “낯선 사람 사랑하기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라.”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고, 또 누가 우리 집에 옵니까? 또 누가 밥을 먹으러 옵니까? 더는 못 하겠습니다”, 이런 태도로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태도가 아닙니다.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입니다. 적극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억지로 하지 말고 힘써 하라는 겁니다. 낯선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당시에는 어떤 집에 머물지 않으면 형편없는 여관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여관은 정말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한 곳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손 대접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여러 마을과 지역을 다니면서 사역을 할 때에 그 지역의 성도들은 자기 집을 열어주었습니다. 여행하는 그리스도인들과 순회 설교자들을 위해서 자기 집을 내어주었습니다. 가장 안전하고 좋은 숙소였기 때문이죠. 그래서 신약성경에는 이런 이야기가 정말 많이 나옵니다.
디도서 1장을 보면 장로는 “손 대접하기를 좋아하는 자”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지못해 손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라 손님 대접하기를 즐거워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손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며 자기 가진 것을 함께 나눠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9절도 이렇게 말합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보십시오. 성경은 손님 대접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망 없이 하라는 겁니다. 기꺼이 하라는 겁니다. 적극적으로 하라고 합니다. 장로는 손님 대접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사실 의무감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좋아하며 하라고 합니다. 기꺼이 하라고 합니다. 손님들에게 너그럽게 대하고, 우리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내어주고, 사랑으로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 (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 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얼마나 귀한 사람입니까? 오네시보로의 집은 바울의 필요를 섬겼습니다. 너그럽고 은혜롭게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이것 역시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아주 실제적인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 14장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잔치를 베풀 때 친구들만 초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몸이 불편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이미 늘 초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초대받지 못했던 사람들을 초대하라는 겁니다. 특별히 요즘 같은 연말이나 명절 때에 모두가 깊이 생각해봐야 할 말씀 아닙니까? 여러분 삶 속에서 이런 마음을 기르십시오. 그리스도의 가족 안에 속한 모든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여러분의 동역자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필요가 있다면 여러분 역시 함께 나누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것은 단지 여러분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사랑하는 마음을 길러가십시오. 기꺼이 손을 내밀고 다가가십시오. 원망 없이 하십시오.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감당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이런 삶에 헌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절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행하기 위해 자신을 다스리며 절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도우셔서 성경이 말하는 기준 아래 기쁨과 감사함으로 자원하여 자신을 복종시키고 살아가는 그런 절제하는 삶을 살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자, 다음 시간에는 이 본문에서 세 번째와 네 번째 원의 단계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잠시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성령님이 여러분 마음에 확증해 주시도록 구하십시오.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마다 늘 그렇듯이, 오늘도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하셨고, 아마 여러분에게도 특별한 방식으로 말씀하셨을 겁니다. 여러분 삶 속에서 변화되기를 원하는 부분, 아직 통제하지 못한 태도, 주님께 영광 돌리는 절제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싶은 마음 말입니다. 잠시 기도하면서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저녁 허락하신 이 교제에 감사합니다. 얼마나 복된 시간이었는지요. 오늘 우리는 작고 귀여운 아이들을 보았습니다. 이 아이들이 주님의 절제를 배우며 자라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가 삶 속에 흩어져 있는 무질서한 영역들을 통제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식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세상의 변덕이나 사회적 분위기나 사람들의 압박이나 욕망이나 감정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절제를 배워 옳은 일을 행하게 하옵소서. 단지 인간적인 습관을 만들어가는 수준이 아니라 성령님께 복종함으로써 절제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잠시 한 가지를 더 나누고 싶습니다.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오늘 설교 전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녹음본에도 꼭 남겨두고 싶습니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모두는 절제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자신을 훈련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몇 가지 실천적인 원리들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에 오스왈드 샌더스(Oswald Sanders)의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누리는 삶(Enjoying Intimacy with God)>이라는 책에서 정말 도움이 되는 글을 읽었습니다. 반드시 덧붙여야 하는 균형잡힌 시각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지금까지 여러 실천적인 방법들을 말씀드렸지만 여러분이 반드시 이해하셔야 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절제하며 살기 위해서는 단지 좋은 습관을 갖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샌더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 신화 이야기입니다. “율리시스와 부하들이 정복 여행을 떠났을 때, 키르케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세이렌을 피하라고 경고했다. 키르케는 세이렌의 노래가 너무나 매혹적이지만 그 노래를 듣기 위해 멈춰선 사람들에게 치명타를 가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나무처럼 그 자리에 붙들려 떠나지 못했고 결국 굶어 죽었다. 키르케는 율리시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부하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으십시오. 당신이 그 노래를 듣고 싶다면 먼저 부하들에게 당신을 돛대에 단단히 묶게 하십시오.’ 율리시스는 그녀의 충고를 따라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만일 그 노래가 나를 유혹하거든 내 말에 순종하지 말고 오히려 더 힘써 노를 저어라.’ 마침내 율리시스는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들었다. 노래는 율리시스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어 몸을 압도하고 의지를 무너뜨렸다. 음악이 점점 더 달콤해질수록 고향에 대한 사랑은 약해졌다. 수치심 속에서 몸부림쳤지만 결국 세이렌의 마법 같은 목소리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는 소리쳤다. ‘나를 풀어라. 세이렌들과 함께 머물겠다.’ 그는 위협도 하고 애원도 했다. 귀에 밀랍이 들어 있어 듣지 못하는 부하들에게 온갖 금은보화를 약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하들은 오히려 그를 더 단단히 묶었다. 그는 분노하며 결박을 끊으려 몸부림쳤다.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은 그에게 큰 고통이었다. 부하들은 마지막 음악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풀어주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유혹의 길을 지났다. 한편 이아손과 아르고호 원정대는 황금 양털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났다. 메데이아는 세이렌이 얼마나 위험한지 경고했다. 세이렌의 매혹적인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해변에 세이렌의 유혹에 넘어가 죽은 사람들의 뼈가 널려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그 배 안에는 음유시인의 왕 오르페우스가 타고 있었다. 그는 세이렌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저들의 노래를 내 노래와 겨루게 하라.’ 달빛 비친 바다 위로 은빛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와 선원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갈매기들이 줄지어 날아왔고 물고기 떼도 그 노래를 들으려고 몰려왔다. 이아손의 용사들은 최면에 걸린 것처럼 노를 손에서 떨어뜨렸고, 고개가 떨구어지고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그때 메데이아가 오르페우스를 향해 외쳤다. ‘더 크게 노래하십시오. 저 게으른 자들을 깨우십시오.’ 그러자 오르페우스는 수금 줄 위로 능숙한 손을 움직였고 그의 음악은 마치 나팔 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그 음악은 유혹에 빠진 사람들의 영혼을 깊이 파고들었고 그들의 영혼은 다시 깨어나기 시작했다. 오르페우스는 계속 노래했고 또 노래했다. 마침내 그의 목소리가 세이렌의 목소리를 완전히 덮어버렸다. 그러자 아르고호의 사람들은 다시 노를 붙잡았다. 그리고 이아손과 그의 부하들은 마침내 승리를 향해 나아갔다. 그들은 외쳤다. ‘오르페우스여, 다시 노래해주소서. 다시 그 노래를 들려주소서.’”
샌더스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두 이야기는 육신의 욕망을 이기는 두 가지 방식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준다. 하나는 금지하는 것이다. 그것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고 분명히 필요하다. 율리시스는 묶여 있었기 때문에 욕망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의 부하들도 귀를 밀랍으로 막았기 때문에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아무리 육신의 욕망을 이기기 위해서라도, 계속 욕망 그 자체에 집중하면 오히려 욕망이 더 강해진다는 것이다. 율리시스의 밀랍보다 오르페우스의 음악이 훨씬 더 좋은 방법이 아니겠는가? 하늘의 오르페우스가 우리 배 안에 있어서 우리가 하늘의 음악을 듣게 되면, 세이렌의 목소리는 더 이상 우리를 유혹할 힘을 잃게 되고 우리의 영혼은 자유를 얻게 된다.” 얼마나 생생한 비유인지 모르겠습니다.
금지 사항만 붙들고 사는 것보다 성령님의 능력 안에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금지 사항과 규칙도 어느 정도 도움은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만 계속 집중하면서 살아가면 결국 욕망만 더 강해질 뿐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아름다운 음성을 들으면 그 음성이 유혹의 목소리를 덮어버립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 이야기가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함께 일어나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복된 하루를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으로 빚어 주옵소서. 그리스도를 위해 그렇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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