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제 우리 주 예수님의 생애가 기록된 누가복음 23장의 마지막 단락에 왔습니다. 성경 누가복음 23장 50절부터 56절까지를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누가는 예수님의 장례를 다루고 있는데요, 제목을 어떻게 지을까 생각하다가 "초자연적인 예수님의 장례"라는, 얼핏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이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약간 모순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장례가 초자연적일 수가 있나?’ 하는 의문이 들면서 말이죠.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십자가 사건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어둠이 임하고, 지진이 일어나고, 바위가 갈라지고, 성전 휘장이 찢어지고, 죽은 자가 부활하는 등 여러 초자연적 기적을 보았습니다. 오늘 살펴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도 기적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그리스도 자신의 몸에 생명을 불어넣으신 것은 분명 엄청난 초자연적 기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장례’가 초자연적이라면, 과연 어떤 점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마 예수님의 장례를 깊이 생각해 본 분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보통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만 기념하지만, 그리스도의 장례 역시 성육신 사건의 다른 어떤 부분들 만큼이나 초자연적이고 신성한 사건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장례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네 명의 복음서 기자 모두가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세한 기록은 예수님의 장례에 있는 초자연적인 요소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고 육체적 죽음을 맞으신 그 순간,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셔서 천국에 있는 하나님께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장례에 관한 모든 세부 사항을 통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장례식을 계획하셨을 뿐만 아니라 계획한 대로 진행하셨습니다. 미리 계획되었고, 예언되었고, 권능으로 실행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장례에 나타나는 이러한 특징들은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목적, 다시 말해 모든 것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주권, 성경의 정확성, 그리스도의 주장의 진실성이라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예수님 장례식의 모든 요소가 증거입니다. 매우 중요한 사실을 증명하는 증거입니다. 역사에 하나님의 목적이 있는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주관자이신지, 성경이 참된지, 그리스도가 정말 자신이 주장한 그런 분인지를 고민하는 분들에게 답이 되는 충분한 증거들입니다.
먼저 여러분이 알아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에 직접 개입하시는 방식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기적입니다. 이 기적은 하나님께서 자연 법칙과 흐름을 방해하거나 중단시킴으로써 목적을 성취하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셨고, 그 우주를 운행하는 법칙과 절차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주 드물게, 아주 아주 드물게 그 우주의 운행을 직접 중단하십니다. 우주의 운행을 잠시 멈추어서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기적적이고 초자연적인 일을 행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기적은 정말로 매우 드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기적을 세어보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을 봐도 예수님과 사도들의 사역이 끝난 후에는 기적이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메시아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리고 사도들이 복음의 사자라는 것을 확인하고 증명하기 위해서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기적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옵니다. 하지만 사도 시대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기적이 점점 사라집니다. 기적은 인류 역사에서 매우 드문 일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기적이 폭발적으로 일어났지만, 그 이후에는 매우 드물게 일어납니다.
기적이 매우 드물게 일어나는 반면 하나님의 섭리는 항상 진행 중입니다. 이 하나님의 섭리가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시는 두 번째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섭리를 통해서 이 세상에서 일하십니다. 가끔 일하시는게 아닙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하지 않는 순간은 단 1초도 없습니다. 섭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자연 법칙을 중단하지 않고, 자연의 흐름을 멈추지 않고, 자유로운 인간과 영적 존재들이 선택하고 행하는 무한한 태도, 표현, 행위, 행동을 모두 취하시면서도 딱 맞게 완벽하게 엮어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 섭리는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이며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악마들의 무한한 행동을 세심하고 정확하게 엮어서 하나님 자신의 뜻을 정확하게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신적 능력을 자연 법칙이 일시적으로 중단되는 기적보다 훨씬 강력하게 보여줍니다.
또한 하나님의 섭리는 지속적입니다. 항상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그리고 놀랍도록 발휘됩니다. 매 순간마다 작동되며, 모든 일, 모든 말, 모든 행동을 취하여 하나님의 계획에 완벽하게 엮어서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 모습의 구속사라는 걸작품이 완성됩니다. 성경에 이런 사례가 여러번 나오는데요, 저는 예수님의 장례식이 바로 이 하나님의 섭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장례식에는 하나님도 계셨고, 예수님도 계셨고, 성령님도 계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게 이 사건에서 함께 일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장례식에는 세 집단의 사람들이 참여했습니다. 중립적인 군인들, 예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 그리고 종교 지도자와 혐오스러운 죄인들로 구성된 증오에 찬 적들입니다. 군인, 성도, 죄인 이렇게 세 집단이 참여했습니다. 한 집단은 중립적이고, 또 한 집단은 긍정적이며, 나머지 집단은 부정적입니다. 이 사건에 정말 아무것도 걸지 않은 사람도 있고,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을 증오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립적이든, 사랑하든, 증오하든, 이들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서로 맞물려 영향을 미쳤습니다.
군인들은 군인에게 주어진 임무가 있었기 때문에 늘 하던 대로 행동했습니다. 성도들은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과 이스라엘의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계속되는 증오심에 이끌려 행동했습니다. 자신들이 이미 이뤄놓은 것들이 잘못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겁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행동을 이끄는 마음의 동기가 무엇이었든,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주관하셨습니다. 운명론적인 방식이 아니라 지혜와 능력의 거대한 발현으로써, 사람들의 자유로운 선택을 엮어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권자라는 것을, 성경이 참되다는 것을, 그리고 그리스도가 실제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완벽한 작품을 만드셨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장례를 자세히 살펴보면서 이 세 집단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3장 말씀을 보기 전에 앞서 말씀드린 내용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 예수님 장례 사건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모두 기록할 정도로 중요한 사건입니다. 먼저 첫 번째 요점은 중립적이었던 군인들의 행동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누가가 이야기하는 부분으로 넘어가기 전에 시간 순서를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장례에 앞서 어떤 일이 먼저 일어났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1절입니다.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요한복음에서 "유대인들"이라는 표현은 대부분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지칭합니다. 따라서 이 ‘유대인들’은 산헤드린 공회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사람들이죠. 그러니까 이 “유대인들”이라는 표현은 유대 민족 자체를 비하하는 말이 아니라, 증오에 찬 영적 지도자들을 부르는 말이었습니다.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준비일이란 유월절을 준비하는 날을 의미합니다. 유월절은 항상 니산월 14일입니다. 그런데 이 해의 니산월 14일이 토요일이라서, 안식일과 겹쳤습니다. 유월절이 격상된 것입니다. 유월절이면서 안식일이기에 큰 날이 되었습니다. 다시 들어보십시오.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군중을 이끄는 이 유대인 지도자들이 얼마나 까다롭고 신경질적이며 위선적인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치 율법주의자가 되기가 얼마나 힘든지, 위선자가 되기가 얼마나 힘든지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죽었든지 살았든지 그대로 매달려 있으면 가장 큰 안식일인 유월절 안식일이 부정하게 될까봐서 아주 신경이 쓰이는 겁니다. 죽었든 살았든 사람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것 자체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그대로 매달아 두고 싶지가 않았던 겁니다. 유월절이 부정해질까봐 염려했던 거죠. 그래서 빌라도에게 갔는데, 이렇게 빌라도에게 가는 것 자체가 자신들의 기준을 거스르는 일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8장 28절을 보면, 여기에서는 유대인들이 빌라도를 만날 때 빌라도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앞두고 부정해지지 않으려고 관정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로마 관정은 이방인의 장소였기 때문에, 부정해질 것을 염려한 유대인들이 결국 빌라도를 나오게 한 겁니다. 그런데 19장 31절에서는 유월절 준비일에 유대인들이 빌라도와 역시 대화를 나누는데, 빌라도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요구하기 위해서 또 다른 정결법을 어기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결법을 어기면서까지 유대인들은 빌라도에게 갔던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스스로 생명을 바치셨다는 겁니다. 사실 죽음은 예수님 말고는 누구에게나 갑자기 닥치는 일입니다. 30절 말미에 보면 예수님의 "영혼이 떠나가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문 번역본에는 “영혼을 바치시니라”로 되어 있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지 6시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고 오후 3시가 되자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보통은 이렇게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 죽기까지 2~3일이 걸렸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을 바치셨을 때 두 강도는 아직 살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처럼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율법에 따르면 죽었든 살았든 세 사람 모두를 십자가에 그대로 둘 경우 안식일이자 유월절인 그 큰 날이 부정해질 위험에 처했습니다. 시신을 내려야 했습니다.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는 말은 결국 이런 말입니다. “세 사람을 빨리 죽게 해서 십자가에서 내려 달라. 그대로 둔다면 우리 땅이 부정해질 것이다.”
유대인들은 아마도 신명기 21장 22절에서 23절에 나오는 사형 집행, 시신 수습, 그리고 시신 처리법을 적용하려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해가 지는 6시가 되기 전에 그 모든 시체들을 내리고자 했던 겁니다. 유대인들은 일곱 번이나 무죄 판결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것은 거리끼지 않았으면서도, 전통적인 정결법은 깐깐하게 지키려고 했습니다. 시체를 내려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 또 다른 정결법을 어기면서까지 말이죠. 유대인들은 십자가형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땅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유대인이 3만 명에 달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죠. 그렇기에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을 보통 이틀이나 사흘 동안 매달아 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매우 빠르게, 단 몇 분 만에 죽이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31절에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다리를 어떻게 꺾었는가 하니,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아주 끔찍하게도 거대한 쇠망치로 양쪽 다리를 쳐서 부러뜨렸다고 합니다. 정말이지 끔찍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양쪽 다리가 부러지면 거의 즉시 사망하게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충격에다가 추가로 충격이 가해지기 때문이거나 출혈이 심해져서 그럴 수도 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질식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살아서 숨을 쉬는 위한 유일한 방법은 몸을 다리로 밀어 올리고 팔로 당겨 올리는 방법 뿐입니다. 그런데 더 이상 다리로 몸을 밀어 올릴 수 없게 되면 폐가 짓눌려서 숨을 쉴 수 없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곧바로 죽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두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죽여서 내리기를 원했습니다. 안식일을 부정하게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몰랐던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죽으셨고, 하나님도 예수님이 죽어서 그 뼈가 상하지 않은 채로 십자가에서 내려지기를 원하셨다는 사실 말입니다. 결국 유대인들의 그릇된 동기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완전히 겁을 먹은 빌라도가 허락을 합니다. 32절입니다.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이 두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혔던 보통의 경우처럼 아직 살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절을 보면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군인들은 죽음에 관한 한 전문가들입니다. 시체를 보면 바로 알아봅니다. 늘 자신들이 하는 일입니다. 직업입니다. 사형집행자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시체를 보면 바로 알아봅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죽으셨습니다. 제가 왜 이렇게 강조할까요? 부활을 부인하는 아주 오래된 이단 중에서 예수님이 실제로는 죽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신 것이 아니라 그냥 반 혼수상태로 무덤에 옮겨져서 서늘한 곳에 누워 계셨다가, 향품을 바르자 의식이 돌아왔고, 그렇게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서 걸어 나오신 거라는 그런 주장을 합니다. 만약 오직 요한만 예수님이 죽으셨다고 증언했다면 아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19장 35절입니다.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이를 본 자’란 요한을 가리킵니다. 우리에게 요한의 증언뿐이라면 비평가들은 분명히 이렇게 주장할 것입니다. “요한은 편향된 증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믿을 수 없어"라고 말이죠. 하지만 우리에게는 무관심하고 중립적인 군인들의 증언이 있습니다. 이들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일이었고 죽은 사람을 보면 바로 알아봤습니다. 군인들은 이 문제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죽으셨습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다리는 부러뜨리지 않았던 겁니다.
군인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는 마지막 행동이 34절에 나옵니다.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것은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여기서 피뿐만 아니라 물이 나왔다는 것은, 심장을 에워싸고 있는 심낭에 들어 있는 심낭액이 나왔다는 겁니다. 심장이 파열된 것이죠. 말 그대로 예수님이 자신의 뜻대로 심장을 파열하신 것이며, 그래서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온 겁니다. 이것은 시편 69편 20절의 내용과 일치합니다. 시편 69편에는 십자가 사건과 예수님이 목마르다 하실 때 신 포도주를 마시게 했다는 것이 언급되어 있는데, 20절에는 "비방이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라고 적혀 있습니다. 어쩌면 마음이 상했다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으로 상한 것이 아니라 실제 심장이 파열되었다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죽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이 왜 중요할까요?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36절입니다.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시편 34편 20절 말씀입니다.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수백년 전에 메시아의 죽음을 묘사하면서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출애굽기 12장 46절에 유월절 어린 양의 뼈를 꺾지 말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은 흠도 없고 점도 없고 뼈가 꺾이지 않은 양이었습니다. 그리고 메시아가 오셔서 궁극적인 희생을 치르실 때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습니다. 그 예언이 성취된 겁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요한은 37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뭐라고요? “찌른 자”를 보리라고 했습니다. 스가랴는 스가랴 12장 10절에서 유대인들이 훗날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군인들이 한 행동은 하나님의 통제 아래에 있었습니다. 성경의 약속을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약속의 성취라는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확실하게 하고 실제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이 죽지 않으셨다면 부활하실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써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위선적인 유대인이, 겁에 질려 있었던 로마 총독 빌라도가, 그리고 군인들이 자유롭게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자신의 몸을 다루는 것까지 통제하셨던 겁니다.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는 베드로의 말을 빌려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몸은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지만, 영은 살아 계셔서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이 무관심한 군인들의 행동은 하나님께서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섭리적으로 사용하신 것으로써, 성경의 진실성을 보여주고,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의 성취자로서 참되신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실제로 죽으셨다는 것을 확인해 줌으로써 부활을 입증해 주었습니다. 이제 다시 누가복음 23장 50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십자가에서 시신을 실제로 내리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체액이 흘러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매달려 계십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빌라도에게 가서 빨리 죽여서 내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빌라도가 군인들을 보내서 그렇게 하도록 했습니다. 군인들이 두 사람에게는 십자가 처형법인 다리를 부러뜨리는 방법을 사용했지만 예수님께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는 이런 사실을 몰랐습니다. 이 때 한 사람이 빌라도를 찾아왔습니다. 50절입니다.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한 성도를 발견합니다. 무관심하고 중립적인 군인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한 성도 요셉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요셉을 통해서 역사했습니다. 요셉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사실 요셉 입장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요셉은 공회 의원, 즉 산헤드린 공회 의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최고 엘리트 70명과 대제사장까지 합치면 총 71명 중 한 명으로서 이스라엘 최고 법정에 소속된 사람입니다. 요셉이 제사장이었는지 평신도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산헤드린 공회는 제사장과 평신도 둘 다로 구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요셉이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그 전에도 후에도 다른 곳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에도 나오고, 마가복음에도 나오고, 누가복음에도 나오고, 요한복음에도 나옵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 정도로 중요한 인물입니다. 공회 의원이었던 요셉, 이 장면이 그가 성경에 등장하는 유일한 장면인데, 정말 놀랍습니다. 성경은 요셉이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짧지만 아주 놀랍습니다.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예상치 못한, 다소 충격적인 믿음의 간증입니다. 온 나라가 거부하고 나머지 공회 의원들이 적대시하는 가운데 나온 간증입니다. 71명 중 적어도 한 명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점에서는 십자가에 달린 강도와 같지만 또 다르기도 합니다. 강도는 버림받은 자였고 백부장은 이방인이었지만 요셉은 내부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엘리트 지도자들 중에서 구원받은 영혼입니다. 귀족과 권력자, 그리고 저명한 사람들 중 구원받은 몇 안되는 사람입니다. 누가는 이 유일한 반론자인 "선하고 의로운" 요셉을 영적인 의미에서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의로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카이오스’는 47절에서 백부장이 예수님에게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다”고 말했을 때 사용한 단어와 동일합니다. 예수님은 의인이셨고 요셉 또한 의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의로우셨고, 요셉은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둘은 같은 의로움입니다. 여러분이 의롭게 되었다면 하나님과, 예수님과 같은 의로움을 갖고 있는 겁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은 자신이 가진 의가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전가된 하나님의 의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요셉도 예수님이 의로우신 것처럼 의롭지만, 요셉의 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고, 예수님의 의는 본질적 속성의 일부입니다. 둘 다 의롭습니다. 예수님은 본성적으로 의로우시고, 요셉은 은혜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이런 사람들이 몇 명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의 시작 부분인 1장 5절로 돌아가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두 사람이 나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의 부모죠. 누가복음 1장 5절입니다.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과 같이 의롭고 선한, 즉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2장 25절을 보면,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앞서 나온 두 가지가 다시 등장합니다. 의롭게 되어 순종합니다. 시므온 역시 사가랴와 엘리사벳처럼 이스라엘의 위로와 구세주를 찾으며, 구원을 바라고,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는 사람입니다. 37절로 내려가 보면 안나라는 과부가 나옵니다.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이 타락한 나라 한복판에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 즉 경건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하나님 나라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왕이 오시기를 바랐습니다. 구원받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구세주를 기다렸습니다. 참된 신자들이었습니다. 남은 자들이었습니다. 여러분, 구속의 역사는 남은 자들, 믿는 자들을 통해 진행됩니다. 이 세상의 나머지 사람들은 부수적인 존재입니다. 구속사는 구속받은 자들을 통해서 진행되는데, 구속받은 자들은 항상 남은 자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목적이 계속해서 흘러가는 방식입니다. 이 세대에도 마찬가집니다. 이스라엘이 배교했을 때에도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남은 자들이 있었고, 그 남은 자들은 항상 구속사의 흐름을 이어갔습니다. 아리마대 요셉도 그 중 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확증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성경에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적혀 있기 때문일까요? 마태가 요셉을 예수님의 제자라고 기록했다는 것은 요셉이 예수님께 헌신했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요셉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요한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정말 놀랍습니다. 성경은 믿음을 숨기는 제자들을 높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요한복음 12장 42절과 43절에는 진정한 신자가 아니었던 숨어 있는 제자들의 예가 나옵니다. 예수님께 끌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가 솔깃했지만, 진짜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반면 요셉은 진짜였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을 초래하는 데 관여한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이라는 부담을 아직 극복하지 못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믿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아직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비겁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23장 51절에 따르면 요셉은 적어도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였습니다. 투표가 진행되는 자리에 가지 않았거나 구석에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찬성하지 않는 행동으로 표현했습니다. 비록 공개적으로 고백하지는 못했지만 말이죠. 요셉은 당원들의 결의에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예수님께 저지른 짓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참된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인 요셉에게는 정말이지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요셉은 진정으로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고, 순종을 통해 그것을 증명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구원에 몰두했고, 하나님 나라를 임하게 할 메시아를 찾고 있었습니다. 왕이 없는 왕국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요셉은 유대인의 동네인 아리마대 출신이었으며,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유대 지방이었을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무엘의 고향이었던 라마사임 조핌이었을 것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로드(Lydda) 근처 마을이었을 거라고도 하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당시에는 알려진 지역이었을 것이고, 요셉이 신자가 되었기 때문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훗날 교회가 그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도 그랬고 시므온과 안나도 그랬고 세례 요한도 그랬듯이 말입니다. 유대인 중에서도 진정한 유대인이었고, 믿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정말로 마음이 아팠을 겁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했을까요? 왜 자신을 드러냈을까요? 아마도 자신을 숨기는 데 지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나서는 것이 메시아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약속을 믿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이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었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요셉도 강도처럼 확신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강도의 말을 기억하십니까?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십자가에 달린 강도는 예수님이 죽으신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왕이신 예수님의 나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요셉 역시 최소한 강도가 믿었던 것을 믿었을 것입니다. 이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선포하지 않으면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요셉에게는 강도와 달리 자신의 사랑을 보여줄 기회가 생겼습니다. 강도에게는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할 기회가 없었지만, 요셉에게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요셉은 공개적으로 그리스도 편에 설 뜻이 있었을까요? 있었다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요? 요셉이 생각할 수 있었던 가장 고귀한 일은 십자가에 못 박힌 범죄자들과 함께 구덩이에 던져지는 마지막 치욕에서 예수님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범죄자들을 향한 마지막 모독이 바로 시체를 구덩이에 버리는 것이었으니까요.
마가복음 15장 4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요셉에게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왜냐구요? 유대인들이 빌라도와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장소가 매우 협소했을 것이고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요셉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유대인들은 빌라도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죠.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빌라도에게 이런 요구를 했습니다. 빌라도가 병사들을 보냈고, 아직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고받지를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나오고 있을 때 요셉이 들어왔습니다. 유대인들과 거리에서 마주쳤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랬을 겁니다. 서로 눈이 마주쳤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요셉이 빌라도에게 무슨 일로 가는지 궁금해 했겠지만 요셉에게 그런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신앙을 더이상 숨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음 속에 있는 모든 용기를 내서 빌라도에게 갔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었지만, 다른 지도자들이 저지른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8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다리를 꺾어 달라고 요구한 직후에 요셉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 따르면, 요셉이 들어가서 빌라도에게 시체를 달라고 요구할 때, 빌라도는 예수님이 어떻게 됐는지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러 간 사람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시신을 내어주기 전에 소식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43절부터 45절에 따르면, 빌라도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내기 위해서 백부장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만큼 이 상황이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났습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이 요청을 하고 떠났습니다. 그리고는 요셉이 들어옵니다. 시체를 달라고 합니다. 빌라도는 아직 소식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짧은 시간에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사실 빌라도는 백부장을 불러서 예수님이 실제로 죽었는지 여부를 확인해야 했습니다. 요셉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리스도를 사랑했기 때문에 마지막 치욕을 면하게 해 드리고 싶어서였을까요? 아마 그랬을 겁니다. 요셉은 제자라는 것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자신을 갉아먹고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공개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선언하고 싶어했습니다. 신명기 21장 22절과 23절에 따라서 비록 사형당한 범죄자라 할지라도 적절한 장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하물며 무죄한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죠.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이 쓰레기같은 범죄자들과 함께 구덩이에 던져지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또한 로마 역사책을 통해 로마인들이 사형당한 범죄자의 시신을 가족에게 준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드물게 그런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어쩌면 요셉은 예수님이 무죄 판결을 여러 번 받았기 때문에 빌라도가 그렇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자신이 제자임을 숨긴 것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빌라도는 무고한 자를 처형했기 때문에 더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마지막으로 선한 일을 할 기회를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일 수도 있지만, 이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에 관해 우리가 좀 더 알아야 하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요셉이 부자였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27장 57절에 따르면 요셉은 부자였습니다. 60절에 따르면 요셉은 자기 무덤을 가지고 있었고, 그 무덤은 가족을 묻을 무덤이었으며, 자신도 그곳에 묻힐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자신의 무덤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매우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무덤에 아직 아무도 묻히지 않은 것을 보면 아마도 비교적 젊은 사람이었을 것이고 가족들은 모두 살아 있었을 겁니다. 그렇기에 요셉은 아직 아무도 묻히지 않은 자신의 무덤을 가진 부자로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 내게는 무덤이 있다”라고 말하기에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묻히지 않은 무덤은 왕이신 예수님에게 가장 적합한 무덤이었을 겁니다.
이 모든 것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야기가 기록된 이사야 53장을 읽어보십시다. 4절입니다.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절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6절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절입니다.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계속해서 봅니다. 9절입니다.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다른 범죄자들과 함께 구덩이에 던져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9절을 계속해서 보면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무덤은 원래 악인들과 함께 있었지만, 대신 부자의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자유롭게 행했습니다.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사랑과, 신앙의 음지에서 나오려는 열망에 이끌려서 말이죠. 안식일을 어길까봐 두려워서 서둘렀던 것이 아닙니다. 빌라도에게 간 것만으로도 이미 스스로 부정해졌습니다. 시체를 만짐으로써 자신을 더욱 부정하게 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자유로운 동기와 선택에 의해서 이 일을 진행했지만, 그 이면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범죄자들과 함께 시체 더미에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부자와 함께 무덤에 들어가심으로써 이사야 53장 9절이 성취되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속도에 따라 하나님의 방향으로 움직인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이 적절하고 영예롭게 장사되셨을 뿐 아니라 이사야 53장 9절이 성취되었습니다.
성취된 예언이 또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40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2장 40절입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예수님의 장례에 관한 예언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장례에 관해서 구약성경의 예언으로는 이사야 53장 9절이 있고, 신약성경의 예언으로는 마태복음 12장 40절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낮과 밤은 하루 또는 하루의 일부를 의미합니다. 구약성경의 여러 본문에서 이렇게 사용된 예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땅 속에 사흘 동안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무덤에서 머무는 사흘의 일부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금요일에 무덤에 계셔야 했고, 토요일에도 무덤에 계셔야 했고, 일요일에도 무덤에 계셔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금요일과 일요일은 일부, 토요일은 전체가 해당되는데, 이는 예수님이 금요일에도 무덤에 계시려면 해가 지기 전에 묻혀야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누가복음으로 돌아가서, 요셉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리는 일을 맡았습니다. 요셉 외에는 아무도 자원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시신을 누가 가져갈 것인지에 관해서는 논쟁이 없었습니다. 요셉이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가려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범죄자들의 시신 구덩이에 버려졌을 것이고, 이사야 53장의 예언은 성취되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아닌 다른 날 시체를 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토요일과 일요일뿐만 아니라 금요일에도 예수님이 확실하게 무덤에 계시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 때 갑자기 요셉이 등장합니다. 요셉이 허락을 받았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백부장을 보냈고, 백부장은 빌라도에게 죽었다고 확인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기다리던 요셉에게 "시체를 가져가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빌라도가 시체를 넘겨주는데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53절이 이어집니다. "이를 내려." 마가복음 15장 46절을 보면 요셉이 직접 그렇게 했습니다. 십자가를 땅에 눕혔을 겁니다. 손에 박힌 못을 빼내고, 두 발을 관통한 못을 조심스럽게 빼냈을 겁니다. 죽으신 예수님의 이마에 박힌 가시를 뽑아냈을 겁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의 시신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씻어냈을 겁니다. 땀과 흙과 피 속에 쌓인 먼지를 모두 씻어냈을 겁니다. 왕이신 예수님의 시신을 혼자서 씻었습니다. 분명 가슴 아픈 순간이고 믿을 수 없는 순간이었을 겁니다.
그런 다음에 "세마포로 싸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46절에 따르면 요셉은 예수님을 내려다가 사두었던 세마포로 감쌌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집트인들과 달리 시신에 방부처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시신을 천으로 감싸고 그 안에 향품을 뿌려서 썩어가는 살의 악취를 덮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나사로의 무덤에서 누이 마르다가 말하기를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난다고 했던 겁니다. 그리고 요셉에게는 향품이 없었습니다. 성경 그 어디에도 요셉이 향품을 가져왔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세마포만 사서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요한복음 19장입니다. 요한복음 19장에 또 다른 사람이 등장합니다. 38절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39절입니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니고데모를 기억하십니까? 요한복음 3장에서 밤에 예수님께 찾아와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위대한 복음을 전해 들었던 니고데모입니다. 당시에는 믿지 않았던 니고데모, 믿지 않으면 정죄를 받을 것이라는 경고를 들었던 그 니고데모가 왔습니다. 3장의 내용은 예수님이 영적 지도자와 나눈 매우 혹독한 대화였습니다. 이제 니고데모는 결심을 굳히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처음 예수님께 왔을 때는 밤에 아무도 모르게 찾아왔습니다. 지금은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져왔습니다. 제가 계산해 보니까 약 35킬로그램 정도인데, 왕이 사망했을 때에나 사용했던 그런 양입니다. 엄청난 비용이 들었을 겁니다. 니고데모에게는 그럴 만한 재산이 있었죠. 그 많은 향품을 들고 니고데모가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저는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어디 있는가? 안드레는 어디 있죠? 제자들은 도대체 어디 있는 겁니까? 지금 나타난 이 사람들은 완전히 낯선 사람들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위해 헌신한 적이 없었습니다. 비록 성경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말이죠. 그리고 요셉은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장사한 사람은 이 두 사람입니다.
몰약은 향료인데 몰약나무 진액이 굳은 것을 가루로 만든 겁니다. 향이 매우 강하죠. 그리고 침향은 백단향 잎에서 추출한 향기로운 가루입니다. 이 모든 것을 섞어서 말 그대로 악취를 다른 향으로 덮어버릴 수가 있기 때문에, 다량의 향품을 부은 조각 천으로 시신을 감싼 후에 세마포로 쌌습니다. 참고로 ‘토리노의 수의’는 가짜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많은 증거가 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의 시신을 감싼 조각 천 위에 세마포로 만든 일종의 수의를 입혔을 겁니다.
그런 다음, 다시 누가복음 23장을 보면, 53절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무덤에 넣어 두니." 그 무덤은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를 파내 만든 요셉의 무덤으로서, 왕이신 예수님께 아주 적합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어서 악인들과 함께 던져져야 했지만, 오히려 부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야 53장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또 예수님 자신의 예언인 마태복음 12장 40절도 성취되었습니다. 향품과 세마포에 싸인 예수님이 무덤에 들어가신 때가 아직 금요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9장 41절에 따르면 이 무덤은 마침 동산 안에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두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둘이 서로를 알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니고데모가 요셉이 하는 일을 어떻게 알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니고데모도 공회 의원이었을지도 모르죠. 요셉과 친했거나 알고 지내는 사이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언된 일이 이뤄지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예수님이 땅 속에 사흘 동안 계실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이런 종류의 무덤은 일반적으로 안쪽을 여러 칸으로 나누어서 여러 구의 시신을 넣을 수 있게 했습니다. 그리고 각 칸의 시신이 완전히 부패하고 뼈만 남으면 작은 유골함에 옮겨 담았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몸은 썩지 않았기 때문에 유골함은 없었습니다.
어떤 장례식이 이럴까요. 찬송가도 부르지 않았습니다. 기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설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사랑이 넘치고 정성이 가득한 장례는 없었습니다. 역대하 16장을 보면 유다 왕 아사의 장례가 나오는데, 그의 시신이 다윗 성 묘실에 장사되고 각양 향 재료를 가득 채운 상여에 실렸지만, 두 사람에 의해 치러진 예수님의 장례만큼 풍성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한 모든 행동은 하나님의 감독 하에 이루어졌습니다. 정말 중요한 사실입니다.
다시 누가복음 23장 54절입니다. "이 날은 준비일이요." 아직 금요일이었습니다. 안식일이 곧 시작될 때였습니다. 금요일에 예수님은 땅에 계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또 다른 사랑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갈릴리에서 주님과 함께 온 여인들입니다.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 그리고 두 마리아입니다. 49절에 따르면 이들은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봤습니다. 여인들은 갈릴리에서 주님을 따르며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이들은 요셉의 뒤를 따라가 그 무덤을 봤고 주님의 시신이 어떻게 안치되었는지를 보았습니다.
“지켜 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여인들은 여전히 충격에 빠져 있었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두 남자를 돕지 않았습니다. 그냥 지켜볼 뿐이었죠. 안으로 들어가서 보고만 있었습니다. 이게 왜 중요할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제기되는 두 번째로 큰 의혹이 무엇인가 하면, 부활이 있던 날 아침 여인들이 엉뚱한 무덤에 갔다는 주장입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생각한 이유가 엉뚱한 무덤에 갔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무덤에 아무도 없었던 것은 애초에 아무도 없던 무덤이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여인들이 장례식에 함께 있었으니 엉뚱한 무덤에 갔을 가능성은 배제됩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이 어디에 묻히셨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묻을 때 그곳에 가서 예수님이 어떻게 묻히셨는지 보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인들이 엉뚱한 무덤에 갔다는 생각은 터무니없는 겁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아무런 참여 없이 지켜보기만 했던 여인들의 행동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끔찍한 거짓말을 막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장례식이 정말 감동적이었나 봅니다. 여인들은 두 사람이 한 일을 보았습니다.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56절을 보면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인들은 니고데모와 요셉만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게 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금요일이 가기 전에, 아마도 한 시간 정도 되는 시간에 서둘러 향품과 향유를 준비했습니다. 낯선 두 사람에게 뒤쳐지지 않으려고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는 쉬었습니다. 여인들은 성실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성경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유대인 여성들이었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출애굽기 20장 10절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들은 안식일 전날 금요일 밤에 모든 향품을 준비하고 안식일에 쉬었다가 다음날 새벽 무덤에 갔습니다. 24장 1절입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그리고 그곳에 간 여인들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여인들은 무덤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지난 금요일에 갔었기 때문이죠. 중립적인 군인에서부터 예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까지,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을 통제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증오에 차있던 종교 지도자들은 어땠을까요? 하나님께서 이 종교 지도자들까지 사용하셨을까요? 물론입니다. 마태복음 27장으로 돌아가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7장 62절, 이 구절을 읽어드리고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준비일 다음 날이니까 토요일이겠죠? 토요일입니다. 토요일에 예수님은 무덤에 계셨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세운 기준에 스스로를 더럽히는 것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인 유월절 토요일에 빌라도를 만나러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예수님에 대해서 뭐라고 했나요? “속이던 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지도자들은 제자들이 와서 주님의 시신을 훔쳐 갈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제자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제자들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습니다. 죽은 시체를 훔쳐서 살아있는 척하고 거짓을 위해서 순교자로 목숨을 바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게다가 제자들은 유감스럽게도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제자들이 와서 주님의 시체를 훔쳐 갈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이렇게 답합니다. 65절입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지도자들은 맹수가 입맛을 다시듯 제자들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66절입니다.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제자들은 로마의 봉인인 인봉을 절대 깰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시체를 훔치지 못하도록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어리석게도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기 위해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갔다는 거짓말을 합니다. 말도 안 되고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증오에 찬 눈으로 바라봤습니다. 자신들이 거짓이라고 여기는 일을 막기 위해 훨씬 더 큰 거짓말, 즉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통치하고 계십니다.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일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례에서도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그리스도의 장례가 풍성하게 담겨 있는 이 기록에 담긴 영광으로 인하여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참으로 강력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항상, 끊임없이 다스리시는 방법의 축소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압니다. 기적은 매우 드물게 일어나지만, 섭리는 끊임없이 계속된다는 사실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무한한 지혜와 정확성으로 모든 것을 지휘하시는 섭리에 감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는 죽으셨지만 영으로는 살아계셔서 모든 일들을 이루시고 성경을 성취하시며 메시아이심을 증명하시고, 하나님께서 역사의 통치자이자 무관심한 사람이든, 신자이든, 증오하는 불신자이든 모든 생명에 대하여 주권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세주이시라는 진리를 아는 지식으로 기뻐하며, 주님의 영광과 우리의 영원한 기쁨을 위해 예수님을 주님과 구주로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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