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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계속해서 누가복음 23장을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주후 30년 봄의 갈보리 언덕으로 다시 가 보죠. 이 날은 유월절 금요일이었습니다. 32절부터 43절을 통해 전체적인 상황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회개한 강도의 이야기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에만 나오죠. 39절부터 43절에 보면 예수님 옆에서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기적적으로 회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쩌면 설명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조금 명확하지 않다고 느끼실 수도 있습니다.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 또는 요한복음 중 어디에서라도 이 이야기를 좀 다른 시각으로 다루어주었더라면 좋았겠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누가복음 뿐입니다. 앞서 우리는 갈보리에서의 촌극이자 풍자극, 광대극, 조롱, 농담거리가 된 십자가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왕이라는 사실이 웃음거리가 되고 만 것을 살펴봤습니다. 사람들은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며 조롱했죠. 또 우리는 갈보리의 촌극뿐만 아니라 갈보리에서의 대조도 살펴봤습니다. 사람들이 인류 역사상 최악의 범죄를 저지르고 있을 때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예수님의 용서와 사람들의 증오가 이루는 극명한 대조를 살펴봤습니다.

이제부터는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의 구원 이야기인 갈보리에서의 회심 사건을 살펴볼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얼핏 보기에는 이 이야기의 내용이 조금 짧고 별로 시사하는 바가 없어서 뭔가 부족해 보이지만, 오늘 설교를 다 듣고 나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실 겁니다. 갈보리에는 다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역설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릴 당시의 예수님은 아무도 구원하지 못하고 심지어 자신도 구원하지 못한다고 조롱을 당하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예수님은 자신이 아니라 강도를 구원하셨습니다. 역설적인 장면이 계속 이어집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왕이라고 주장하며 로마에 반역을 꾀한다는 이유로 고발했습니다. 예수님이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처형해야 한다고 사람들이 생각했던 거죠. 동시에 예수님은 예수님이 로마에 반역하지 못하게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바로 그 사람들로부터 무능하고 무력한 자라는 조롱과 멸시를 받았습니다. 잔인하게 비꼬는 농담으로만 왕 대접을 받으셨던 예수님이 사실은 하나님의 참된 왕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인 자신을 모독하는 자들로부터 신성모독죄로 고발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신성모독자들이 신성모독을 당하시는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고발을 한 겁니다. 또 하나의 역설은 의인 중에서도 가장 의로우신 예수님께서 불의한 죄인들에게 처형을 당하셨다는 겁니다. 정의가 뒤집힌 거지요. 또 역설적인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미워하는 원수들로부터도 저주를 받으셨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는 훨씬 더 큰 저주를 받으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비롯한 그 누구도 구원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스스로를 구원하려 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오히려 세상의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자 생명 그 자체이셨지만, 죽은 자들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죽으셔야만 했기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 옆에 달려 있던 강도도 그 죽은 죄인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 강도에게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으로, 주권적으로, 강력하게, 즉각적이고 변혁적으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게 다가 아닙니다. 역설은 계속됩니다. 또 다른 역설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예표하는 유월절을 계속 치르기 위해서 서둘러 예수님을 죽이려 했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그 어떤 죄도 없앨 수 없는 짐승에 불과한 어린 양들을 죽여서 죄 사함을 받기를 원했지만, 자신들을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참된 어린 양인 예수님은 거부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이면 아무 능력도 없는 어린 양들을 죽였는데, 하나님은 참된 어린 양인 예수님을 거부한 바로 그 유대인의 손으로 모든 구원의 능력이 되시는 어린 양 예수님을 죽이게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하나님께서 바로의 권세에서 구해 주신 날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유월절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실 유월절은 그보다 훨씬 더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구출된 것도 기념할 일이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큰 구원의 의미가 있습니다. 유월절이 무엇인지 기억하시나요? 당시 하나님은 애굽 사람과 유대인 모두를 강력하게 심판하실 거라는 말씀을 하셨고, 그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그 집을 덮쳐서 장자의 생명을 앗아갈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이든지 애굽 사람이든지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르지 않은 모든 집에 진노와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모든 장자의 생명을 취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유월절은 바로의 권세와 진노에서만 구원받은 게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바로의 권세와 진노에서만 구원을 받았다고 왜곡해서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유월절의 일부만을 기념했고 진정한 유월절의 의미, 즉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잊어버렸던 거죠. 모든 죄인은 예수님의 피로 덮이지 않는 한 언제나 진노의 대상이 되며, 소와 염소의 피로는 죄를 없앨 수도 없고 죄인을 가릴 수도 없습니다. 그 이름을 믿는 모든 자들을 자신의 피로 보호하기 위해 참되신 유월절 어린 양이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고 있을 때, 유대인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유대인들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예수님은 자신을 구원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자신조차 구원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도 구원할 수 없을 것이라니 정말 왜곡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말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모든 상황이 이런 왜곡된 생각을 부추겼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분별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도자도, 백성도, 로마인도, 대제사장도 그랬습니다. 그 누구도 제대로 알지를 못했습니다. 모두가 왜곡되고 뒤틀리게 이해하고 있었던 이 모든 상황 속에서 단 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깨달았습니다.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빛이 밝아오는 것을 느꼈던 겁니다. 생명은 죽음에서 피어납니다. 지식은 무지에서 나옵니다. 빛은 어둠을 몰아냅니다. 바로 우리가 회개한 강도라고 부르는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이 한 사람입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한 개인의 구원 이야기이지만 모든 이들이 경험하는 구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의 이야기와는 다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뭔가 부족한, 그저 오래된 역사 속의 짧은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하죠. 과연 이 강도가 구원에 필요한 조건을 갖췄다는 걸 알려주는 증거가 충분할까요? 네, 그렇습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정말 충분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구원받은 강도의 이야기에는 언뜻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담겨 있습니다. 강도 개인의 이야기이지만 모든 죄인이 겪는 일이기 때문에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신자라면 이것은 여러분의 이야기이자 저의 이야기입니다. 이제 함께 이 이야기를 좀 자세히 살펴봅시다. 39절입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조롱하며 비꼬는 투죠. 32절로 돌아가보면, 두 명의 강도가 예수님과 함께 죽임당하기 위해 끌려가고 있었고, 33절에서는 오른편과 왼편에 각각 못 박혔다고 말합니다. 39절에서는 강도 중 한 명이 예수님께 욕설을 퍼부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태와 마가는 두 강도가 모두 욕설을 퍼부었다고 증언합니다. 두 강도 모두 말입니다. 두 사람 모두 조롱과 신성 모독이라는 촌극에 동참을 했습니다. 즉, 오전 9시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 순간부터 두 강도는 이 촌극에 동참했습니다. 백성들과 로마군인들에 이어 강도들까지도 유대인 지도자들이 주도하고 조장한 이 신성모독에 완전히 가담했습니다. 심지어 두 강도는 십자가에 매달려서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겪으셨던 것과 똑같은 고통을 견디며 고문을 당하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을 향해 욕설을 퍼붓고 신성모독을 하는 데 온 힘을 다했던 겁니다. 얼마나 강렬한 순간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증오는 전염성이 강했습니다. 말하자면 두 강도는 있는 모든 힘을 짜내서 예수님을 모욕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 따르면 그 중 한 명이 갑자기 침묵을 지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한 명만 예수님에게 욕설을 퍼붓고 있습니다. 다른 한 강도에게 무언가 변화가 일어난 겁니다.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시간이 흐르면서 완전히 타락했던 두 명 중 한 명, 흉악한 강도짓을 일삼던 한 악한 범죄자가 엄청난 변화를 겪었습니다.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180도 달라졌습니다. 조롱이 침묵으로 바뀌었습니다. 강도의 몸은 십자가에 못 박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 고통을 견뎌내기 위해 정신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흐려졌을 겁니다. 그리고 견딜 수 없는 고통에서 자신을 보호하려고 일종의 쇼크상태에 들어갔을 겁니다. 우리 몸은 극심한 고통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몸을 쇼크상태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강도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이 최악의 고통의 순간에 정신이 완전히 맑아졌습니다. 평생 처음으로 현실과 진실을 제대로 인식하게 된 겁니다. 그뿐 아니라 무언가를 깨닫게 된 겁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게 정말로 틀림없습니다. 갑자기 친구 강도에게로 고개를 돌리고는 방금 전까지 자신도 했던 바로 그 행동을 꾸짖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이 강도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기적을 행하신 겁니다.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또 있었습니다. 바로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경험한 사건입니다. 정말 비슷한 이야기죠. 바울은 예수님을 증오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처형하려고 했죠. 공소장을 가지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처형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하나님께서 바울의 삶에 개입하셔서 땅에 엎드러지게 하시고 눈을 멀게 한 후에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구원이 이루어지는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기적을 행하셔서 일어나는 일이 구원입니다.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때로는 이렇게 극적입니다. 회심한 강도의 이야기는 다메섹 도상에서 일어난 바울의 회심과 평행을 이룹니다. 두 이야기 모두 사람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강도 이야기로 돌아와 보면, 이 강도는 아주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눈에는 악인 중의 악인으로 보였을 겁니다. 종교적인 유대인들의 눈에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였을 겁니다. 또 이와 비슷한 인물이 있다면 탕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강도는 악한 사람이었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극적으로 변화되었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이 강도는 원래 예수님을 모욕하던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예수님을 모욕하는 다른 범죄자를 보며 치를 떠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예수님을 대하는 방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다른 강도는 아무런 변화도 없이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며 조롱하며 비꼬는 말로 예수님께 계속 욕설을 퍼붓습니다. 그러자 반대편에서 변화된 강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40절입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변화된 강도가 이렇게 반문하며 책망하니 욕을 퍼붓던 다른 강도가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도대체 저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난 후로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변화된 강도는 동료 범죄자의 입에서 나오는 조롱이 혐오스럽고 소름끼치게 느껴졌습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의 입에서도 동일한 조롱의 말이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변화된 강도가 동료 범죄자에게 한 말이 바로 마음이 변화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기적이며 이렇게 기적같이 나타납니다. 이 기적에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먼저, 변화된 강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그리스도가 죄 없는 분임을 고백하고 메시아 되심과 구세주 되심을 고백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강도의 어두운 마음에 하나님의 영이 기적적으로, 주권적으로 역사하셔서 나타나는 반응입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며 어둠을 몰아내는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이러한 변화의 역사를 행하셨다는 분명한 증거가 되는 요소들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다른 강도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심판에 대한 두려움, 죄의식, 정의감, 죄책감, 용서에 대한 갈망, 의에 대한 갈망, 화해의 갈망이 전혀 없었습니다. 변화된 강도는 방금 전까지 똑같은 상태였는데 갑자기 이 비극적인 상황을 반대편에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변화된 강도는 더 이상 다른 강도를 이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비극의 일부였던 존재에서 한순간에 비극을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행동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두렵지 않소? 당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고 있다는 것을 모르오? 이 예수라는 사람이 의롭다는 걸 모르겠소?” 이렇게 고백합니다. 엄청난 변화입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한 강도가 예수님을 향해 욕설을 퍼붓자 변화된 강도가 꾸짖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쓰인 ‘꾸짖다’라는 단어는 헬라어 ‘에피티마오’ 인데요, 굉장히 강한 표현입니다. 강도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서 회개케 하신다는 첫 번째 증거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겁니다. 뭐라구요?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게 되는 겁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께로 돌아와 거듭나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이전 것은 지나가고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도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진정으로 회심했다면 가장 먼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겁니다. 변화된 강도는 자신을 십자가에서 벗어나게 해줄 사람을 찾지 않았습니다. 육체의 죽음에서 구해줄 사람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이 땅에서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섰을 때가 문제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자라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배웠을 겁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율법을 잘 알고 있었고, 또 순종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대놓고 어긴 사람이었죠.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것으로 악명높은 사람이었습니다. 재판을 통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은 죄인으로 판결받은 자였고 그에 합당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인간의 법에는 하나님의 율법이 반영되어 있고, 이스라엘에서는 더욱 그랬습니다. 이걸 잘 알고 있었던 강도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죄로 사람들에게 십자가형을 받는다면, 과연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어떤 심판을 내리실까?’ 갑자기 어린 시절 배웠던 율법과 죄, 심판에 대한 개념이 명확해졌을 겁니다. 강도는 자신이 율법을 어겼다는 걸 알았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내적으로도 유죄 판결을 받았고, 인간 재판장에게 받은 판결은 하나님께 받을 판결의 모형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된 죄에 메시아를 향해 저지른 신성모독이 더해져 엄청난 죄가 되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모든 것이 선명해지는 경험을 하면서 자신이 한 모든 일, 자신이 예수님께 내뱉은 말들을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고, 옆에 있던 동료 강도가 예수님께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게 됐습니다. 40절을 보면 변화된 강도는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라고 말합니다. 두 강도는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지금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고 있지만,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두렵지 않느냐?" 누가복음 12장 4절로 5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것을 잘 기억해 두십시오. 로마서 3장 18절은 타락한 인간의 본질과 죄성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로마서 10장 3절부터 18절에서도 인간의 죄성을 이야기하며 이렇게 끝맺습니다.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말합니다. “나 꽤 괜찮게 살았어. 분명히 하나님께서 천국에 데려가실 거야.” 로마서 10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를 깨닫지 못한 유대인들처럼 말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죄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전히 예수님께 욕설을 퍼붓는 이 강도는 다른 모든 죄인들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강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매우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이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은 죄인들에게 예수님이 행복하게 해 주실 것이라고, 예수님이 더 나은 삶을 주실 것이라고, 예수님이 고통을 해결해 주시고 원하는 것을 이뤄 주실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메시지는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어긴 죄인이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참된 회심을 보면 누가복음 18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개를 숙이고 땅을 바라보며 가슴을 치는 세리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요? “그런 정의는 필요 없어요. 저를 심판하지 마세요.”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나요?

복음을 전하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구원받았다고 말할 때,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건가요?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겁니다.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은 겁니다. 하나님의 공의로부터 구원받은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은 겁니다. 지옥으로부터 구원받은 겁니다. 이 강도는 죄인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설 것이며,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자신을 구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명확하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것, 바로 이것이 사람의 마음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첫 번째 증거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의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함께 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것은 함께 나타납니다. 41절에서 구원 받은 강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자신이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자기 상태에 대한 정확한 평가입니다. 돼지들과 어울려 먹으려다 죽음의 위기에 처한 탕자와 같습니다. 예수님도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탕자가 스스로 돌이켜 정신을 차렸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정신을 차릴 때 시작됩니다. 변화된 강도는 자신의 죄를 깨달았고,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했으며, 죄인이라고 인정했습니다. “저는 제가 죄인이라는 걸 압니다. 제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진짜 회개하는 사람이 보이는 태도입니다. 자신이 행한 일로 심판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자신이 엇나갔고 악한 영향을 받아서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네 살 때 성추행을 당해서 그랬다거나 하는 그런 변명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행한 일에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그대로 받고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정의는 실현되고 있으며 인간의 세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에서도 실현될 것입니다. 유대교에서는 행위에 의한 구원, 자기 노력에 의한 구원, 제사에 의한 구원 등을 가르쳤지만, 영적 현실에서 분명한 것은 진정한 회심자는 자기가 완전히 죄인이라는 것과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을 고백할 뿐 아무것도 변명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드릴 것도 없고 자신을 칭찬할 만한 것도 없습니다. 탕자처럼 악취를 풍기면서 죽어가며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자비와 은혜가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자격이 없는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죄를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증거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비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확실하게 깨닫는 겁니다. 그런데 죄인은 완전히 의로우신 분 앞에 서기 전까지는 자신의 죄를 온전히 깨닫지 못합니다.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라고 말했던 이사야처럼 말입니다. 이사야는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하나님의 심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고 자신의 죄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변화된 강도의 마음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세 번째 증거는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강도는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진정한 회심을 나타내는 두 가지 요소, 즉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는 것과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을 살펴봤고, 이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살펴볼 겁니다. 변화된 강도는 예수님에 관해 짧지만 놀라운 말을 했습니다. 41절 말미에서 그는 죄인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말을 합니다. 자신을 그리스도의 완전하심과 비교하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를 평가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말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심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혐의에 대해서만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을 넘어서서 훨씬 더 광범위한 말을 합니다. 예수님이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합법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는 범죄를 찾으려고 얼마나 많이 시도했는지를 그 강도가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가 사람들로부터 어떤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주님은 3년 동안 자신의 온전하심을 모두 보여 주셨고, 그 누구도 그분에게 합법적인 혐의를 제기할 수 없었습니다. 강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고 있는 죄인으로서 십자가에 달린 것과, 자기 옆에 마땅히 받지 않아야 할 것을 받고 있는 의로운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강도는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42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강도는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 걸까요? 바로 용서입니다. 그렇죠? 용서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 강도가 구약의 미가가 한 말, “주와 같이 용서하시는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를 알고 있었을까요? 아마 알고 있었을 겁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이 강도는 알고 있었을까요? 구약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었다면 알았을 겁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스스로 내세울 것이 없었습니다. 용서를 받아야 했습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요? 바로 앞서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정도로 하나님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었고, 이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메시아, 하나님의 그리스도, 약속된 왕, 약속된 메시아임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으며, 바로 옆에서 자신을 모독하는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자신이 그 용서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예수님께 묻고 있는 것입니다. 강도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무엇인가요? 바로 은혜와 자비를 통한 용서입니다.

이 갈보리 십자가에서 구원받은 강도 이야기를 통해 회심의 모든 구성 요소를 볼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영이 회심의 역사를 일으켜 빛을 비추면 가장 먼저 하나님의 진노가 드러납니다. 두 번째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세 번째로 그리스도의 영광과 용서를 향한 소망이 드러납니다. 세리가 기도한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저를 용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강도는 예수님이 하신 기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는 기도를 듣고 정말 놀랐을 겁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면서 기뻐하며 조롱했고 비아냥거리며 경멸을 퍼부었습니다. 그래서 그 강도는 만약 하나님께서 저런 자들도 용서해 주시고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면, 나에게도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 용서해 주실 거라고 결론을 내렸던 겁니다. 어쩌면 나도 그 용서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그리고 나서 강도가 예수님을 부릅니다. “예수여.” 히브리어로는 “예슈아” 입니다. 전 이 부분을 참 좋아합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태복음 1장 21절 말씀입니다. 강도는 예수님께서 의로운 분이시라는 걸 알아봤습니다. 예수님이 용서와 은혜와 자비의 원천이심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 너무나 자비롭고 은혜로우셔서 백성들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오히려 용서하기 원하신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강도가 그리스도에 관한 진실을 알아야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강도의 모든 경험을 통해, 또 대화를 통해 이 모든 것을 명확하게 알게 해 주셨던 것 같습니다. 강도가 한 이 “예수여” 라는 말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냐고요?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왜 이런 부탁을 했을까요?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강도는 예수님께 “선생님, 저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주실 수 있나요?”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저 같은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분과 연결해 주실 수 있나요?"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절 구원해 주세요. 기억해 주세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냥 생각해 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기억하다’라는 말을 생각할 때 뭔가 흐릿하고 어렴풋한 안개 같은 것을 떠올립니다. 강도가 말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훨씬 더 큰 것이었습니다. 은혜와 용서를 구하는 상한 마음의 참회이자, 자격 없는 죄인의 간청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에서 저를 구해 주세요. 용서해 주세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기도하셨잖아요. 저도 그 중 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제가 강도가 한 이 말을 정말로 좋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뭐라고 했는지 다시 보겠습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마치 기독론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한 말 같지 않습니까? 구약의 종말론을 가지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무엇을 가르쳐 주나요? 구약성경은 메시아가 마지막 때에 영광스럽게 오셔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모든 약속과 다윗에게 주신 모든 약속을 성취할 것이라고, 또 이스라엘에 대한 새 언약의 구원을 포함해서 선지자들이 반복해서 언급한 구약의 모든 약속을 성취하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것이라고 아주 자세하게 정의하고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구원받고 예루살렘이 높임을 받으며 메시아가 예루살렘에 왕좌를 세워 세상을 다스리고, 세상은 지식과 평화로 가득 차며, 철장과 의와 영광으로 다스리는 실제 지상 왕국이 세워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강도는 메시아에 관해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메시아가 왕국을 세울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말한 겁니다. 또한 아무도 십자가에서 살아남지 못했으니, 예수님도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나라를 이룰 것이라고 믿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상당히 훌륭한 기독론입니다. 강도가 말한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라는 말이 가지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예수님의 끝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백부장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확실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 강도는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 강도는 예수님께 죽음을 이기는 권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모든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강도들은 예수님께 욕설을 퍼부었고, 지나가는 자들은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라며 부활을 주장하는 예수님을 조롱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십자가 밑에서 부활 이야기를 문제삼은 겁니다. 강도는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아주 깊이 이해하게 됐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걸 알게 됐고,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주실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택함 받은 왕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예수님이 의로운 분이라는 걸 알게 됐고,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실 것이며, 그의 나라에 임하셔서 그에게 속한 성도들을 데리러 오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자신도 그 중 하나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강도의 이 물음은 종말론적인 간구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유대인들은 죽음을 일종의 기다림으로 여겼습니다. 마지막 날이 임하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올 때를 기다리는 기다림 말입니다. 죽음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스올과 무덤에 관해 이야기했을 것이고, 아마도 죽었다가 마지막 날에 성도들과 함께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의 영광의 장소로 옮겨질 것을 다니엘 12장을 통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저도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라고 물었던 강도는, 그것이 전적인 은혜로, 전적인 자비로 이루어진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저를 일으켜 주셔서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물었던 겁니다. 그리스도가 영원토록 통치하시는 영원한 나라, 즉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옮겨가는 마지막 때의 메시아 왕국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영광스런 나라에서 성도들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제가 합당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알지만 저를 기억해 주시겠습니까? 주님의 왕국에 들어갈 때 저를 데려가 주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강도의 질문에 놀라운 대답을 하십니다. 4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왜 진실로라는 말을 덧붙이셨을까요? 믿기 어려운 말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믿기 어려운 말입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입니다. 이것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또 다른 충격을 주었는데, 마치 아버지가 탕자에게 달려가서 머리에 입을 맞추고 겉옷과 반지와 신발을 입히고 다시 아들로 온전히 받아들여 집으로 데려가 축하 파티를 벌이는 것과 같았습니다. 평생을 죄 가운데 살아온 탕자와 같은 비참한 죄인을 받아 주시고, 다시 아들삼아 주시고, 모든 물질을 사용하게 해 주신 것은 정말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이 강도는 십자가에 매달린 탕자였습니다. 십자가는 탕자가 받아야 하는 마땅한 벌이었습니다. 모든 이들이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강도는 십자가에 못 박혔고 예수님이 강도에게 하신 말씀은 터무니없게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믿기 어려운 말을 진심을 담아 던지십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만약 예수님이 로마 가톨릭 신자였다면 이렇게 말씀하셨을 겁니다. “그래, 내 나라가 임하면 연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야.” 또는 유대교의 율법 체계에 속해 있었다면 이렇게 말씀하셨을 겁니다. “네 태도는 마음에 들지만, 내 나라에 들어가기에는 시간이 별로 없어. 넌 죽어가고 있어. 너에게는 희망이 별로 없어.” 그런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오늘이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낙원 변두리에 있다가 영적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 중심부로 옮겨간다는 그런 말도 아닙니다. “오늘 네가” 다음에 뭐라고 하셨죠?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 강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자격이 있었나요? 자격이라니요? 말도 안되지요? “나와 함께”라뇨? 그것도 바로 오늘 말입니다. 강도가 그런 자격을 얻으려고 뭘 했나요?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뭘 해보기도 전에 이미 죽었을 겁니다. 이게 은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마치 탕자의 아버지가 탕자에게 입맞춤하는 것과 같습니다. 완전한 화해입니다. 즉각적인 화해입니다. 바로 오늘 낙원에 있으리라. 낙원은 영어로 파라다이스, 헬라어로는 파라데이소스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정원을 뜻하는 고대 페르시아어입니다. 천국과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2절에서 “셋째 하늘로 이끌려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4절에서 낙원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같은 말입니다. 셋째 하늘, 첫째 하늘, 공중, 둘째 하늘, 천상, 하나님의 처소 셋째 하늘, 모두 낙원을 뜻합니다. 또 요한계시록 2장 7절을 보면 예수님은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을 보면 생명나무는 하늘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어떤 말도 하지 않으시고 다만 오늘 천국에서 나와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죽고 나서 대기하는 곳은 없습니다. (연옥 같은 곳 말이죠.) 중간에 가야 하는 곳도 없습니다. 육신을 떠나 곧바로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위대한 은혜의 예시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강도는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한순간에 주권자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명확하게 알게 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해 주셨고, 같은 날 하늘에서 만나 교제하셨습니다. 행위로 의롭게 되는 율법 체계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놀라운 사실이 또 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자신이 정말 그리스도인인지 궁금했던 적이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나요? 내가 정말 구원받았는지 궁금해 하지요.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고민합니다. 만약 우리가 구원받은 순간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너는 나와 천국에 함께 있을 거야"라고 말씀하신다면 정말 좋지 않을까요? 이런 확신이 주어진다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친절하고 위로가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죄에 압도되어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이해하려고 애썼을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강도는 아마 평생을 죄 가운데 살아왔다는 현실에 갉아먹히며 괴로워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어떤 것도 의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강도의 이런 불안을 없애기 위해서 “나와 함께” 있을 거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와 함께.” 천국은 단순히 예수님을 보러 가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과 함께 거하실 것입니다. 강도는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의 처소를 구했고, 그리스도께서는 그 날 그리고 그 이후에도 영원히 주님의 임재 가운데 함께 거할 처소를 주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상상도 못했을 일이었을 겁니다. 즉각적인 천국이었습니다. 강도는 이 땅의 왕국, 곧 메시아의 왕국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가 성도들로 채워질 것이고 메시아가 통치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이시고, 예수님이 구세주이시며, 예수님만이 의로우시고, 예수님께서 은혜로운 용서를 베푸신다고 믿었고, 그 용서를 예수님께 구했고 용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조롱하던 자들이 틀렸습니다.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구원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죄인을 구원하실 유일한 방법은 자신을 구원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구원받은 강도는 그 순간 예수님이 실제로 십자가에 매달려 계셨다는 것과 죄가 없으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강도의 죄를 짊어지고 계신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까요?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세리가 "죄인인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하며 가슴을 쳤던 것은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이전에는 세리가 하는 행동이 구약에 나타나는 회심의 전형적인 예이지만, 강도의 회심에는 구약의 회심 그 이상의 것이 담겨 있었습니다. 강도는 그리스도에게로 왔고 자신이 알았던 것만큼 그리스도에 관한 진실을 믿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조롱하던 사람들은 완전히 틀렸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구원할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셔야만 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한 사람의 이야기이자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강도처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어둠 가운데서 빛을, 죽음 가운데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죄의 실체, 그리스도의 진리를 깨닫고 은혜와 용서를 구했을 때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너무도 간절한 마음으로 여러분이 구하는 즉시 ‘오늘’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싶어하십니다. “오늘 네가 죽는다면 나와 함께 있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사흘 동안 지옥에 가셨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곳에 가셔서 승리를 선포하신 동시에 같은 날 천국에서 그 강도와 함께 계셨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이것이 용서를 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은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성경의 명료성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그 풍요로움에 감사드립니다. 주님, 저희는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말로는 감사를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주권적인 능력으로 우리를 어둠에서 건져주시고, 죽음에서 건져주시고 생명을 주시니 영원히 감사할 뿐입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구원은 행위가 아닌 믿음을 통해 은혜로 얻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높이는 일입니다. 이 구원의 방식은 하나님의 사랑과 연민과 자비와 은혜의 영광을 아주 장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 모두는 참회한 강도와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해주지 않으시면 우리를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던 바로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크고 영광스러운 자비인지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셔서 진리를 알게 하시니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오늘 아침 예배와 교제의 축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찬양할 수 있는 기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기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오늘 교회에 방문해주신 분들로 인해 감사합니다. 주님, 진리를 저희 마음 속 깊이 부어 주셔서 주님을 알게 하시고, 주님의 구원의 위대함을 충만히 아는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오늘 저녁 다시 모여 교제할 때 큰 기대를 품고 주님의 말씀을 듣게 하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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