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이 기록된 누가복음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위대한 복음서이죠. 누가복음 20장을 펴시기 바랍니다. 9절부터 시작되는 예언적 비유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하는 내용입니다.
지난 몇 주간 우리는 죽음을 앞둔 주님의 마지막 일주일, 그러니까 고난주간을 따라가며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 함께 볼 부분은 고난주간의 수요일입니다. 금요일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주님이 다시 살아나실 것입니다. 오늘 살펴볼 내용은 수요일에 일어난 일입니다.
20장 1절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이 수요일 내내 성전에서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전날인 화요일에는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19장 45절입니다.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월요일에 예수님은 개선장군처럼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 월요일이 거의 끝나갈 즈음에 성전에 들어가셨고, 거기서 벌어지는 일들을 목도하셨습니다. 그리고 화요일 아침에 다시 성전에 돌아오셔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성전 안에서 불법으로 장사하던 자들, 곧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성전을 더럽히던 자들을 전부 쫓아내셨습니다.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후에, 예수님은 성전을 가르침과 설교를 위한 장소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시고,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 먼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하지만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대제사장들과 제사장들의 비호 아래 성전에서 장사하는 것을 중단시키신 예수님의 행동은 말하자면 ‘결정적 한 방’이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 종교적 기득권 세력을 향한 최후의 일격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했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그렇게 하고 싶어했습니다. 어떻게든 예수님을 죽이려 안달하며 초조해하던 차에,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일은 지도자들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갔습니다.
예수님도 그 일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옳은 일이기에 그렇게 행하셨습니다. 그 일 때문에 금요일에 죽게 될 것도 아셨습니다. 금요일에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금요일은 유월절을 맞아 희생제물이 될 양들이 죽임을 당하는 날이었는데, 예수님이야말로 속죄를 위한 참되고 유일한 유월절 양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날 죽으셔야 했던 겁니다. 아직 금요일까지는 이틀이 더 남았습니다. 지금은 수요일입니다. 예수님은 긍휼과 자비, 온유, 선하심, 은혜를 마지막으로 한번 더 베푸시면서 복음을 전하십니다. 구원과 용서와 영생의 메시지를 백성들에게 선포하십니다. 수요일만이 아니라 그 다음 날인 목요일에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백성들은 성전에서 열심히 듣고 있습니다. 월요일에 예수님이 개선장군처럼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절정에 달했던 흥분이 아직 가시지 않은 채로 듣고 있는 중입니다. 백성들은 여전히 예수님이 약속된 왕이신 메시아로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된, 구약시대 전체에 걸쳐서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된 모든 것이 성취되리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기다려 온 구원자로서, 대적들을 물리치시고 마침내 이스라엘이 가장 영광스러운 왕국이 되도록 이끄실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백성들이 듣고 있습니다. 아주 집중해서 듣고 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 역시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가르침을 듣고 있는 군중들 틈에 섞여서 예수님 주변을 맴돌면서 다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어떻게든 구실을 찾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19장은 이렇게 끝납니다.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의 인기가 너무 많아서 유대 지도자들은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대적하는 것을 꺼렸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신들의 신학, 종교, 그리고 돈줄이 되는 성전을 송두리째 흔들고 위협하셨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은 백성들을 가르치시면서 비유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빗대어 유대 지도자들에 관해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9절부터 시작되는 이 비유의 말씀은 유대 지도자들을 빗댄 세 가지 비유 중 하나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이 세 가지가 모두 기록되어 있고, 누가복음에는 하나만 있습니다.
예수님은 수요일 이른 아침부터 내내 성전 안을 거니시면서 가르치셨을 겁니다. 이 비유의 말씀도 그럴 때마다 약간씩 달리해서 여러 차례 반복해서 말씀하셨을 겁니다. 마태의 기록은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본질적으로 누가복음의 비유 내용과 아주 똑같습니다. 마가복음 역시 몇몇 작은 차이점을 빼면 실질적으로 동일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모인 군중들 속을 옮겨 다니시면서 이 비유의 핵심 내용을 되풀이해서 말씀하셨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더라도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마태복음에는 두 가지 다른 비유가 더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이 비유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 중에서 두 번째 비유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이 비유 하나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9절부터 시작되는 이 예언적 비유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가 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지금부터 살펴볼 비유와 이어지는 예수님의 설명은 임박한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의 의미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아주 중요합니다. 이제 곧 일어날 일을 비유에 담아서 미리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스라엘의 과거 전체 역사를 되짚어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아주 간결하면서도 포괄적이고, 놀라우면서도 의미심장하며, 독특하면서도 충격적입니다.
이제부터 이 비유를 네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비유의 내용 그 자체입니다. 둘째는 해석입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는 비유의 확장 그리고 적용의 단계로 구분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비유의 내용 자체와 비유의 해석을 보겠습니다.
9절입니다. “그가 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예수님은 이틀 전에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을 때 예수님 주변을 에워쌌던 군중들에게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성전 주변에서 예수님이 군중들 한 가운데 섞여서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 중에는 유대 지도자들도 함께 뒤섞여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두가 듣는 데서 이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점은 이 비유가 지도자들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비유의 내용 자체는 쉽습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포도원은 이스라엘에서 아주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농부의 관점에서 보면, 또는 농업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스라엘 땅은 산비탈 구릉지대와 평지 이렇게 두 종류로 구분됩니다. 평지는 곡식을 심는 땅이고, 구릉지대는 포도원을 만드는 땅이죠. 유대인들은 산비탈 언덕에 계단식 포도원을 만들고, 돌로 포도원 둘레에 작은 담장을 만들고, 그 담 안에다가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아주 일반적이고 흔한 일이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이 비유가 좀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요, 예수님이 성전의 다른 곳에서 이 비유와 동일한 말씀을 약간 다르게 말씀하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포도원을 만든 사람이 얼마나 애를 써서 완벽한 포도원을 만들려고 했는지 묘사되어 있죠.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사람이 지킬 수 있게 해서 짐승의 습격이나 대적의 공격에 대비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포도원을 만드는 일은 이처럼 빈틈없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구릉지대는 이런 포도원으로 가득했습니다.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이것 역시 자주 있는 일이었습니다. 부재지주인 경우입니다. 실제 땅 주인이 자기가 소유한 땅에 살지 않는 경우죠. 땅을 소유하였지만 거기에 살지는 않는 그런 것입니다. 여기서 농부들은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소작농입니다. 혹은 계약직 농부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들은 특정한 농사 기술을 가지고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짓고 땅 주인에게 대가를 지불합니다. 빌린 땅에서 농사를 짓는 대신에, 그 땅에서 거두게 될 소출의 일정 비율을 대가로 지불할 것을 약속하고 농사를 짓는 겁니다. 농부들에게 세로 줬다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실제로 이 농부들은 모든 면에서 최상의 조건을 누립니다.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자유롭게 땅을 경작할 수 있습니다. 마음껏 독창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다. 어깨 너머로 눈치를 봐야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굉장한 기회입니다. 커다란 책임을 져야 하지만 동시에 커다란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겁니다. 농사를 열심히 지어서 많은 양을 수확하면, 땅 주인에게 대가로 지불하기로 계약한 몫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자기의 몫이 됩니다.
포도원 농부들은 땅을 사지 않고도 이처럼 땅을 최대한 잘 활용할 수 있었고 열심히 농사를 지어서 이익을 남길 수도 있었습니다. 계속 9절을 보겠습니다.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오래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장거리 여행 같습니다. 당시는 여행을 하려면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 땅 주인은 아주 긴 시간이 소요되는 장거리 여행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농부들과 계약을 하고, 작물을 심을 때부터 추수할 때까지 돌아오지 못할 만큼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야기를 듣던 그 당시 사람들은 모두가 이해하고 있었을 겁니다. 이스라엘에 살고 있지 않지만 이스라엘에 땅을 소유한 주인들이 있었습니다. 또 유대인으로서 자기 소유지가 아닌 이스라엘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그러다가 때가 왔습니다. 10절입니다.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여기서 종은 헬라어로 둘로스인데, 땅 주인의 권한을 위임받은 대리자입니다. 농부들이 거둔 포도원 소출 중의 일부를 받으러 온 겁니다. 계약에서 이미 합의된 내용이었을 겁니다. 포도원 농부들은 그렇게 하기로 다 동의했을 것이고, 주인 역시 합의했을 겁니다.
추수 때는 주인이 와서 자신이 받기로 되어 있는 몫을 땅에서 난 소출의 일부로 받는 때입니다. 주인이 자기 몫을 받을 때가 된 겁니다.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아주 통상적인 절차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방식으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작농은 오늘날까지 수세기 동안, 수천 년이 흐르는 동안 전 세계적으로 흔히 볼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포도원 농부들의 반응이 좀 이상합니다. 10절로 돌아갑니다.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매우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많은 이야기 중에는 범죄까지는 아니더라도, 충격적이고 받아들이기 힘들고 분노하게 만드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 역시 포도원 농부들이 배은망덕하고 사악한 불법을 저질렀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인에게 대가를 지불하지 않겠다는 것은 불법입니다. 종을 때리고 아무것도 없이 돌려보낸 것도 명백한 범죄입니다. “때렸다”라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 보자면 ‘전신을 연거푸 때리는 것’입니다. 실제적인 학대를 의미합니다. 아무것도 주지 않고 종을 돌려보냈습니다. 농부들의 행동에 대한 주인의 반응이 11절에 나옵니다.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영어 단어 “트라우마타이즈”, 즉 "정신적으로 충격을 주다"라는 말이 바로 여기 '때리고'라는 헬라어 단어에서 유래했습니다. 포도원 농부들은 다른 종도 빈손으로 돌려 보냈습니다. 12절입니다.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
마태복음에 따르면 주인은 많은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냈고, 농부들은 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다고 합니다. 계약을 한 이 포도원 농부들은 정말이지 분노가 절로 치밀어 오르는 기가 막힌 짓을 저질렀습니다. 이들에게는 특권이 있었습니다.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자유롭게 어떤 간섭도 없이 경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땅 주인과 계약을 맺으며 서약도 했습니다. 농부들은 이기적이고, 분노를 불러 일으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반역적이고, 명백한 범죄 행동을 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살인까지 했습니다. 정말이지 사악하고 파렴치한 범죄자들입니다.
대단한 인내를 보이고 있는 비유 속의 주인에게는 첫 번째 종이 맞고 돌아왔을 때 농부들을 고소로 응징하고 정의를 실현할 권리가 있었습니다만, 놀랍게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다시 두 번째 종을 보냈습니다. 자비로운 처사입니다. 참고 호의를 베푼 것이죠. 하지만 포도원 농부들은 두 번째 종에게도 똑같은 짓을 했습니다. 주인이 세 번째 종을 또 보냅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농부들은 똑같이 행동합니다. 주인은 농부들에게 옳은 일, 그들이 행하겠다고 약속했던 그 일, 그리고 실제로 그들이 동의했던 그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 계속해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겁니다.
13절에서 주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13절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주인이 자기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겁니다. 좀 바보스러운 질문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지금쯤이면 누구라도 주인이 할 수 있는 응징, 그러니까 첫 번째 종의 사건 이후로부터 그 농부들이 받아 마땅한 처벌을 하길 바랐을 겁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종의 사건 이후에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주인은 왜 이렇게 스스로 묻고 있는 걸까요? 왜 이런 혼잣말이 이 비유 속에 들어있을까요? 이렇게 물어볼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어찌할까”라니요? 대답은 아주 명백합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듣고 있는 군중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속으로 ‘주인이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다. 가서 응징하는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생명은 생명으로 응징해야 한다’ 이렇게 주인을 동정하며 주인의 편을 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주인은 더 큰 인내심을 발휘해서 한번 더 시도해 보기로 결정합니다. 13절 하반절입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마태복음에는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외아들을 마지막으로 보내면 농부들이 존중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내가 예상하는 대로 하겠지’라는 기대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여기 이 ‘존대’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엔트레포’인데, 문자 그대로 자신들의 행동을 부끄러워하며 아들을 존중하고 제대로 대해줄 것이라고 예상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지른 그 모든 부끄러운 행위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사랑하는 아들만큼은 농부들이 올바르게, 정중하게 대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겁니다. 어쩌면 농부들이 ‘종’을 보냈기 때문에 멸시하고 깔봐서 그랬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 당시에 세속적인 이방 세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종을 멸시하고 짐승처럼 천하게 여겼습니다. 주인은 종이 아닌 아들이 가면 농부들이 존경을 표하고 정중히 대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14절을 보겠습니다. “농부들이 그를 보고," 즉 아들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입을 열어서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농부들이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봤습니다.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디알로기조마이’입니다. 서로 심사숙고하며 상의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분명한 의도가 담긴 계획입니다. 농부들은 그가 누구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죽일 계획부터 세웠습니다. 그를 죽여서 유산을 자기들 마음대로 전부 다 차지하고자 한 겁니다. 아들이 끼어드는 것이 싫었습니다. 지금 자기들 것이라고 믿고 있는 그 어떤 것도 주인의 아들에게 빼앗기기가 싫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아들을 죽여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상속자인 아들이 찾아온 것을 보고 농부들은 아마도 주인이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주인에게서 아무 소식도 없었기 때문인데, 그래서 아들이 나타났을 때 농부들은 왕, 상속자, 주인이 죽어서 모든 재산을 아들에게 물려주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어떻게든지 아들을 죽이기만 하면 그 모든 유산이 자기들 소유가 될 거라고 추측했을 수도 있다’라고 말입니다.
탈무드에 의하면 3년이 지나도록 토지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이 아무도 나타나지 않을 경우 그 토지는 그 땅을 경작하고 있는 사람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에 아들이 왔을 거라는 가정 하에서는, 그 아들을 죽이면 그 땅이 농부들의 소유가 될 수 있었을 겁니다. 농부들은 포도원 주인의 유산이 완전히 자기들 소유가 되기를 원한 것입니다. 주인의 아들이 조금이라도 통제하거나, 어떤 권한을 갖거나, 무엇이라도 강요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농부들은 계획을 즉시 실행에 옮겼습니다. 15절입니다.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충격적인 일입니다. 주님의 다른 비유에서처럼 이 일은 말씀을 듣는 군중들이 포도원 농부에게 분노를 느끼도록 의도된 것입니다. 정말이지 경악을 금치 못할 일입니다. 이런 일은 율법을 준수하는 종교인들이 용납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자기 자신이 선한 사람,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 옳은 일을 행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짓입니다. 분노할 일입니다. 이방인들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 비유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군중들은 포도원 주인을 전적으로 동정하며 농부들에게 분노했을 겁니다.
15절 하반절입니다.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예수님이 이 비유를 듣고 있는 군중을 사로잡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포도원 주인은 농부들을 어떻게 할까요? 주인은 죽지 않았습니다. 살아있습니다. 주인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지금 이 비유를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완성해 보라고, 이 비유를 마무리해 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16절을 보면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자문자답하시면서 듣고 있는 청중들에게 미처 대답할 기회를 주지 않으셨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는 좀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는 것처럼, 이런 비유를 완전하게 이해하려면 다른 복음서에 기록된 동일한 비유를 잘 조합해서 봐야 합니다. 마태가 덧붙인 내용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1장 41절입니다.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여기서 ‘그들’은 예수님의 이 비유의 말씀을 듣고 있는 군중들입니다. 예수님이 군중에게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물으셨고, 이에 군중이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해야 마땅합니다” 이렇게 대답한 겁니다.
물론 질문에 대답하기는 아주 쉬웠습니다. 당연히 군중의 대답처럼 해야 했죠. 주목해야 할 점은 청중이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단언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 딱 잘라 말했습니다. “주인이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리고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군중들이 내린 결론입니다.
그렇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주인이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빌려줘야 한다는 겁니다. 상식적인 유일한 대답입니다. 정말 합리적인 대답입니다. 백성들이 예수님께 한 대답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도 본문 16절에서 그 주인이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고 단언하십니다. 이것이야말로 전적으로 정의로운 일 아닙니까? 모두 그렇게 여겼습니다. 분명한 것은 농부들을 진멸한다면 포도원을 관리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죠. 이렇게 하는 것은 적절한 판단입니다. 누구도 그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겁니다.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는 이 주인의 말은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백성들의 대답이기도 합니다. 주인이 한 말이 바로 청중이 대답한 말입니다. 청중은 비유에 나오는 주인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아주 적절한 대답을 한 겁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던 군중들이 이제는 비유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이 이야기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이 비유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는 큰 그림, 비유의 내용 그 자체를 봤습니다. 이제는 이 비유에 대한 해석을 들어봅시다. 16절 하반절입니다. “사람들이 듣고 이르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어딘가 이상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비유를 듣고 있는 군중들이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메 게노이토’인데, 헬라어에서 가장 강한 부정의 의미입니다. 말하자면 ‘절대로 안 됩니다,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뜻입니다.
방금 전에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다른 사람에게 빌려줘야 합니다” 이렇게 말해 놓고서는, 갑자기 왜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라고 할까요? 그 이유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비유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6절 하반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듣고 이르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들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듣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쿠오’입니다. 이 단어에서 영어의 ‘어쿠스틱’, 즉 ‘청각에 관련된’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아쿠오’는 ‘듣고서 인식하다’, ‘듣고서 깨닫다’, ‘파악하다’, ‘알아채다’ 이런 뜻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표현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계속해서 이 표현이 반복되는데, 여기서 들으라는 말은 물리적인 소리를 들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말 소리를 들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의미를 파악하고 깨달으라는 말입니다. 신약성경 전반에 걸쳐서 ‘아쿠오’라는 표현이 사용되는데, 듣고 깨달으라는 말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곧 깨닫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군중들이 예수님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곧바로 비유에 담긴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비유가 그 의미를 곧바로 깨닫게 할 만큼 명료했을 수도 있고, 예수님이 설명해 주셨을 수도 있지만, 어찌 되었든 이 비유의 의미를 즉시 깨닫고 이해하게 된 겁니다. 의미가 파악되자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결코 그래선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 농부들을 진멸해서도 안 되고, 포도원을 빼앗아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일들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겁니다. 군중들이 비유의 의미를 깨닫고는 겁에 질렸습니다.
무엇을 깨닫게 된 걸까요? 지금부터 알려드리겠습니다. 비유의 말씀을 차근차근 해석하면서 무엇을 깨달았을지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포도원을 만든 이 사람은 하나님이십니다. 포도원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분명히 이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을 일구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받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족장시대와 출애굽을 거쳐 국가를 이루며 번성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사실 이사야서 5장을 보면 이사야의 기막힌 예언이 7절부터 시작됩니다.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이사야 선지자가 포도원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5장 7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일구신 일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히 기름진 산에”, 가나안의 비옥한 땅에 심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으셨습니다. 말하자면, 유대인이 모든 인류 중에서 가장 고귀한 민족이라는 표현입니다. 이사야 5장 1절 하반절부터 4절까지 읽겠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심으시고 좋은 열매를 거두고자 필요한 모든 일을 다 하셨는데, 정작 거두신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포도원을 갈아 엎으시고 비도 내리지도 않게 하실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포도원은 폐허가 되고 메말라 버릴 겁니다. 이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는 배교하고, 배반하고, 불순종하고, 반역하고, 신성을 모독한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의해 주전 586년 포로로 끌려갈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는 지금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서 5장을 연상시키는 내용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포도원입니다. 마태가 언급한 모든 것들, 즙 짜는 틀, 망대, 울타리 등이 모두 갖춰진 포도원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심으셨습니다. 이는 시편 80편 8절부터 16절에도 나타납니다. 거기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포도원에 비유하십니다. 예레미야 2장 21절 역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우 익숙한 말씀이었을 겁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 사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사야서 5장의 말씀은 6장에 있는 하나님이 보이신 환상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 또한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포도원 농부들은 누구일까요?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포도원 농부는 누구일까요? 포도원 농부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포도원, 자신의 백성을 돌보도록 책임을 맡기신 자들입니다. 그게 누구겠습니까? 바로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백성들을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고 순종과 참된 예배로 인도할 책임이 있는 자들입니다. 백성들을 통치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결코 주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소유를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하나님만이 자기 백성의 주인이십니다. 지도자들은 영적으로 백성들을 인도할 책임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왕들, 제사장들,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일부 거짓 선지자들,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평안을 책임지는 자들, 그리고 주요한 종교적 직책과 임무를 맡은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자신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를 제사장들과 경건한 자들, 장로들, 지혜자들과 같은 통치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여행을 떠나십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2천년 동안의 구약 역사, 구약 시대 2천년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종을 보내기로 결정하신 때까지의 기간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로서 다시 돌아오실 때까지 멀리 계시면서 돌아오지 않으십니다. 주인의 긴 여행은 구약 역사에 대한 묘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부터 시작되는 족장시대 이래로 종교적, 영적 지도자들에게 백성들을 맡기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대제사장과 제사장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장로들과 지도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이들에게 백성들을 위한 영적인 청지기 역할을 맡기셨습니다.
10절입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때가 이르매, 정한 때가 되매, 적절한 때가 되매,” NASB 성경에는 “추수할 때가 되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10절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적절한 때가 이르매 하나님이 종들을 보내셨으니” 이런 말입니다. 여기서 종들은 누구입니까? 선지자들입니다. 참된 선지자들, 구약의 선지자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전해주고, 율법과 순종과 의로 돌이키기 위해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선지자들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영적 결실을 맺으라고 촉구하기 위해 보냄을 받았습니다.
모세부터 세례 요한에 이르기까지 선지자들은 모두 똑같은 책임을 감당했습니다.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용서와 구원을 간구하고,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라고 외쳤습니다. 모든 참 선지자들이 이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역했습니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에서 돌이키고 참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보냄을 받았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 거룩, 참된 회개, 의를 추구하도록 그렇게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모세로부터 세례 요한에 이르기까지 2천년에 걸쳐서 수많은 선지자가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선지자들은 어떤 대우를 받았습니까? 이 비유에 따르면 부당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매맞고 능욕을 당하고 상처를 입고 쫓겨났습니다. 살해당하고 돌에 맞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배교, 배반, 영적 반역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스라엘에게 보냄을 받은 선지자들의 역사이자, 그 선지자들을 거부하고, 조롱하고, 비방하고, 모욕하고, 살해한 역사입니다.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트리포와의 대화’라는 글에서 유대인들이 이사야 선지자를 나무 톱으로 켜서 죽였다고 비난합니다. 히브리서 11장 37절에서 톱으로 켜서 죽은 자라고 언급된 이가 바로 이사야 선지자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계속해서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았고, 구덩이에 던져졌으며, 전승에 의하면 돌로 쳐 죽임을 당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 역시 똑같은 증오와 박해에 직면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살기 위해 도망을 쳐야만 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거부당하며 돌에 맞았고, 미가 선지자는 주먹으로 얼굴을 맞았습니다.
어떤 이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선지자들에 대한 왕과 제사장과 백성들의 한결같은 적대감은 유대인들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들 중 하나이다. 비록 적대감의 정도에 차이가 있었고 전체적으로 그 적대감이 표출된 방식들이 다르긴 했어도, 이 적대감은 갈수록 더해졌고, 항상 존재했다. 말라기 선지자의 죽음 이후로부터 더 이상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자 유대인들이 깊이 탄식하긴 했지만, 선지자들이 보냄을 받는 동안에는 거의 항상 대적했다. 은혜가 거두어질 때까지, 유대인들은 자신들에게 베풀어진 그 특별한 은혜를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았고, 고마워하거나 감사하지도 않았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한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그리스도가 오신 때는 마지막 선지자 이후로 400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자기들은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행한 일들을 결코 저지르지 않았을 거라고 합니다. 만일 지금 선지자가 있다면 결코 조상들처럼 행하지 않을 거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희망사항이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그냥 선지자도 아닌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기 때문이죠.
좀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서 예레미야 7장을 보겠습니다. 모든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다 보려는 것이 아니라 이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예레미야 7장 23절입니다. 몇몇 구절로 요점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예레미야 7장 23절부터입니다.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신들의 악한 마음의 꾀와 완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 얼굴을 향하지 아니하였으며.”
25절입니다. “너희 조상들이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되 끊임없이 보내었으나." 여기서 내 종들이 언급됩니다. 바로 선지자들입니다.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너희 조상들보다 악을 더 행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인 선지자들을 보내셨는데도 상황은 오히려 더 악화됐습니다.
예레미야 25장 4절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종 선지자를 너희에게 끊임없이 보내셨으나 너희가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듣지도 아니하였도다. 그가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자의 악한 길과 악행을 버리고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준 그 땅에 살리라 너희는 다른 신을 따라다니며 섬기거나 경배하지 말며 너희 손으로 만든 것으로써 나의 노여움을 일으키지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해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이 내용은 선지자들이 전하고 또 전한 메시지입니다. 7절입니다. “너희가 내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너희 손으로 만든 것으로써 나의 노여움을 일으켜 스스로 해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1절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에 의한 유다의 심판과 멸망을 선포합니다. 11절입니다. “이 모든 땅이 폐허가 되어 놀랄 일이 될 것이며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 바벨론 포로생활은 반역하고, 배교하고, 불순종하고,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이제 신약성경에서 이러한 이스라엘의 태도가 가장 잘 나타나 있는 마태복음 23장을 보겠습니다. 선지자들을 죽인 이스라엘의 역사가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얼마나 잘 알려져 있었는지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29절입니다. 예수님이 유대 지도자들을 꾸짖고 계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이들의 행동은 그저 위선의 한 부분일 뿐이었습니다. 모든 면에서 외식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위선적 행동 가운데 하나가 조상들이 미워하고, 박해하고, 학대하고, 죽였던 선지자들을 자신들은 존경하겠노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꾸미는 행동을 했습니다. 자신들을 조상과 똑같은 사람으로 여기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조상들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했습니다. 자신들이라면 참된 선지자들에게 조상들이 저지른 짓 따위는 결코 하지 않았을 거란 점을 과시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을 기리기 위해 큰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장식한 것입니다.
30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자신들의 조상들보다 더 나은 자로 보이고 싶었습니다. 조상들은 선지자를 죽인 자들로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봐주지 않으셨습니다. 33절입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너희도 너희 조상들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왜냐하면 너희도 나의 제자들,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너희 조상들이 옛 선지자들에게 한 그대로 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도 그들을 박해하고 죽일 것이다.” 훗날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을 제외한 모든 사도들이 순교했습니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학살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35절입니다.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얼마나 패역한 자들입니까? 그들이 죽인 마지막 선지자는 성전의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었습니다.
37절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라고 하십니다. “선지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보낸 자들을 돌로 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배교, 불순종, 불신, 패역, 우상을 숭배하고, 신성을 모독하고, 선지자들을 죽이는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누가복음 6장 22절부터 23절에서 주님은 참된 복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중 하나가 6장 22절입니다.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이런 말씀을 하신 것도 유대 지도자들이 초대교회 유대인 신자들에게 행할 일들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두 아셨습니다. 그래서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다시 누가복음 11장 49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이 세대란 이스라엘, 곧 전체 구약 시대, 그 긴 세월의 역사에 걸쳐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포도원의 소출을 바치게 하려고 보내셨던 선지자들과 종들을 학대하고, 박해하고, 살해한 바로 그 백성들을 말합니다.
누가복음 13장에서도 예수님이 같은 뜻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살펴본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잘 기억하실 겁니다. 13장 34절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마태복음 23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유대인들은 항상 이렇게 행동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의 설교를 보겠습니다. 7장 51절입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스데반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설교하면서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놀랍지 않습니까?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의인이 오리라고 선포한 선지자들을 죽였고, 오리라고 한 그 의인마저도 죽였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결국 그들은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사울 자신도 죽이는 것에 동조했고, 자기가 유대교를 옹호한다는 생각으로 초대교인들을 위협하고 교회를 파괴하고, 결국에는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항상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인내하십니다. 선지자를 보내시고, 다른 선지자를 보내시고, 다른 선지자를 또 보내십니다. 하지만 하나같이 똑같은 취급을 당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비유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누가복음 20장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내가 이 사람들을 어찌 하겠느냐?”라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13절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이번에는 확실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번에는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누가복음 3장 22절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7장 5절에서도 변화산에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 기록된 같은 비유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예수님은 다른 모든 선지자들과는 다른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종이 아니라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구약성경의 마지막 선지자이자, 모든 선지자들 중의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소유의 상속자이십니다. 심판하는 모든 신성한 권리는 물론이고, 순종과 영광에 대한 모든 신성한 권리와 권위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존대했어야 합니다. 경배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실 거라고 선포한 선지자들에게 저지른 짓을 부끄럽게 여기며 아들을 존대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던 것도 아닙니다.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라는 표현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라는 수많은 증거들로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아가 분명했습니다. 포도원 농부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상속자니”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혐의가 기록된 기소장과도 같습니다. “이는 상속자니.”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질병을 이기는 권세, 죽음을 이기는 권세, 귀신을 이기는 권세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하셨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베푸시는 기적의 능력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신성을 지닌 분이시란 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는 사실도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까요? 요한복음 12장 42절입니다.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은 증거가 없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심지어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하시는 줄을 압니다.” 이렇게 말했을 정도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에 대해서도 시비를 건 적이 없었습니다. 단 하나의 기적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수 없었던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종교와 그 종교가 안겨 주는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이십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듣고 있던 군중들이 의미를 깨닫기 시작하자, 자신을 살해할 자들이 이틀 뒤에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지 정확히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결국 예수님을 죽일 것입니다.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유대 지도자들은 종교 제도와 조직을 차지하고 자기들만의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려고 예수님을 죽일 것입니다.
이들은 전통이나 권위에 반항하는 자들을 없애버리려고 했습니다. 이런 일은 기독교 역사 전반에 걸쳐서 스스로 하나님 나라의 청지기라고 자임했던 자들이 행했던 일이기도 합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지배하길 원했습니다. 자신들만의 세상인 회당과 성전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심각한 문제거리였습니다. 예수님을 죽여서 자신들의 종교를 지켜야 했습니다.
예수를 죽이자. 어떻게 죽이자는 것입니까? 이틀 뒤에 있었던 십자가 처형입니다. 지도자들은 오랫동안 계획했습니다. 그리고 신속하게 실행할 예정이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이게 무슨 뜻입니까? 완전한 반역, 예수님을 자신들의 나라에서 내쫓아 버리고 철저히 거부할 거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표현이 예루살렘 밖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이렇게 한 것은 실제로 예수님을 철저히 거부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을 예루살렘 밖으로 내쫓아서 죽인 겁니다.
유대인들의 역사입니다. 대략적인 역사입니다. 군중들이 비유의 말씀을 파악하자 곧 자기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습니다.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라.” 그들은 깨달았습니다. 지금 대체 우리가 뭐라고 말한 거지? 우리 입으로 우리 종교와 우리 자신을 스스로 정죄하고 말았구나. 이것이 바로 본문 16절 하반절에서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절대 안됩니다”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진멸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16절입니다.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이미 예언된 하나님의 심판을 뜻합니다. 누가복음 13장 35절입니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19장 42절입니다.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보살핌 받는 날’이란 하나님의 아들이 찾아오시는 때입니다.
‘진멸하고’는 주후 70년 로마가 예루살렘을 멸망시킬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수십만 명까지는 아닐지라도 수만 명의 유대인들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예루살렘과 성전이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 그 때 이후로 계속해서, 이스라엘에는 더 이상 제사장도 없고, 성전도 없고, 희생 제사도 없고, 종교 의식도 없고,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도 없고, 제사장이나 대제사장도 없습니다. 모든 제도가 무너진 후 다시는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비유의 말씀을 이해하자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진멸이란 곧 자신들의 지도자들의 파멸이자 자신들이 축복의 자리에서 쫓겨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안 됩니다,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당신이 우리 왕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심판을 원치 않습니다. 우리라면 결코 주인의 아들을 죽이려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이 우리의 메시아가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겁에 질려 말하는 이 청중들이, 바로 이틀 뒤에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지도자들을 따라서 곧장 심판 속으로, 진멸의 현장으로, 지옥으로 들어갔습니다.
아직 또 하나의 심판이 남아있습니다.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다른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이것은 다음 주에 보겠습니다. 이 비유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입니다. 정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란 교회를 말하는 겁니다”라고 말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간단했으면 제가 교회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 이상의 내용이 있습니다. 정말 강력한 진리의 내용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살펴보겠습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내용을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요? 아주 쉽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이든, 오늘날의 유대인과 이방인이든, 그때와 지금 사이의 어떤 때 혹은 오늘 이후의 어떤 날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치를 대가는 영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거나 저주를 받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유일한 구세주로 인정하고 믿고 신뢰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뿐입니다.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모든 이에게는 심판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진리를 듣고, 진리를 알고,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듣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세상 모든 이들이 이런 특권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받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은 진리의 지식 아래 책임 있게 행동해야 합니다. 이 진리를 가지고 여러분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소유, 죄에 대한 사랑, 자신만의 습관, 자신만의 철학, 또는 자신만의 인간관계가 더 중요해서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정죄받고 저주받는 것들을 붙잡고 매달리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유대 지도자들과 다를 바 없게 될 겁니다. 지금은 모든 것에서 자유하고, 그리스도를 신뢰함으로써 멸망에서 벗어나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받는 축복을 박탈당한 자들 중 하나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할 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 아직 본문 내용을 다 보지는 못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과 구세주로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긴박한 것인지를 충분히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계시를 받은 특권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구주로 받아들일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장 두려운 영원한 대가를 치러야 할 뿐입니다. 그리스도를 모르고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이 득세하는 오늘날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게 임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멸망으로 가는 길에 있는 다수의 사람들을 따르지 않게 하옵소서.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모시며 좁은 길을 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기쁨을 누리며 복을 받게 하옵소서. 현세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하나님 나라의 진리와 축복을 맡은 청지기가 되게 하옵소서. 오늘날 이 악한 시대에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와 구원의 역사로 사람들의 심령 속에 임하셔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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