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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정말 큰 특권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그 특권을 함께 누려보십시다. 누가복음 19장을 펴 주시기 바랍니다. 19장 마지막 부분인 45절부터 48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공생애 마지막 주를 시작하신 때입니다. 이제 금요일이 되면 예수님은 죽으실 겁니다. 이날은 화요일입니다. 주님의 겸손한 대관식이 있던 다음 날, 즉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바로 다음 날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죠? 주님은 월요일에 ‘호산나’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환호를 들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주님이 참된 왕으로서 이스라엘 앞에 나타나셨을 때, 백성들은 예수님을 향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다윗의 자손이여, 이스라엘의 왕이여, 메시아여, 기름부음을 받은 자여’라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이십만 명으로 추산되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여리고 성에서 감람산을 넘어 산 서쪽 비탈길을 내려오셔서 동문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월요일에 있었던 이런 일련의 일들은 예루살렘에서 매우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던 축제와도 같았습니다.

조금 변덕스럽긴 했지만 열렬하게 이어진 군중들의 환호 속에서 동문을 통과한 후에, 예수님은 곧바로 동문 바로 안쪽에 있는 성전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마가복음 11장 11절을 보면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의 집에 묵으러 가셨던 것이죠. 월요일은 정말이지 대단한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고, 사람들은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펴고 예수님을 오실 메시아로 환호하며 맞이했습니다.

그 월요일 해질녘에 주님은 곧바로 성전에 들어가사 이방인의 뜰이라 불리던 성전 바깥 넓은 뜰에서 모든 것을 자세히 살피셨습니다. 아마도 다음날 할 일을 결정하셨을 겁니다. 그렇게 살피신 후에 주님은 먼저 휴식을 취하려고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베다니는 주님이 편하게 느끼고 사랑하셨던 곳입니다. 주님께는 휴식이 필요했습니다. 수많은 군중을 대하셨고, 그 전에는 베다니에서 사람들을 만나셨고, 또 그 전에는 여리고부터 베다니까지 힘들고 먼 길을 걸어 오셨기 때문입니다. 피곤하셨던 만큼 더 달콤한 휴식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숙박이 문제였습니다. 유월절이었기 때문이죠. 예루살렘과 그 근처에 거의 이백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있었을 겁니다. 여관들이 있긴 했지만 아마도 주인의 가족이나 친척, 지인들로 금방 찼을 겁니다.

한편, 예루살렘 전역에는 에세네파, 열심당원, 바리새인, 사두개인을 비롯한 종교인들도 흩어져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 역시 지인들이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오면 숙박을 제공했습니다. 아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숙소를 제공했을 겁니다. 갈릴리에서 내려온 신자들이 묵을 수 있도록 말이죠.

외국인 회당도 예루살렘 전역에 흩어져 있었는데, 다른 나라에서 와서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만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을 위한 숙소로 사용되었습니다. 매우 중요한 절기였던 이 유월절을 위해 예루살렘에 온 외국인들을 맞이하는 숙박시설로 운영된 겁니다. 부유한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다른 지역에 살더라도 예루살렘에 집을 갖고 있었습니다. 자기 집에서 친구들이나 손님들이 함께 지낼 수 있도록 집을 더 넓히기도 했습니다. 아주 부유한 가문 사람들은 예루살렘과 그 주변에 큰 저택을 갖고 있기도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묵을 수 있도록 숙소로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숙소가 다 차버리면, 나머지 사람들은 더 이상 숙소를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장막, 텐트로 가득한 도시가 됩니다. 예루살렘은 물론이고, 베다니 방향으로 3km 가량, 베들레헴 방향으로 나있는 남쪽 길과 다른 모든 방향의 길가에 장막이 죽 늘어섭니다. 유대교 율법에 따르면 유월절을 지키는 사람은 누구나 유월절 전날 밤을 예루살렘에서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많으면 그 규정을 지킬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경우에는 예루살렘의 공식 경계를 확장해서 본래의 예루살렘 도시 자체와 성벽만이 아니라 장막들이 세워진 주변의 지역까지를 모두 포함하도록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말 그대로 성전 주변에 머물렀습니다. 성전 안에서는 묵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한 성전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문 것입니다. 성전 근처에는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건물들이 있어서 숙소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은 사람들로 가득 차서 넘칠 지경이었습니다. 성전은 숙박이 금지된 곳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이 함께 묵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집을 가진 친구가 베다니에 살고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다행이었습니다.

다시 월요일 저녁으로 돌아가 봅시다. 아까 말씀드린 마가복음 11장을 보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날이 저물자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떠나셨고, 그날 밤을 베다니에서 묵으시려고 제자들과 함께 다시 감람산 정상을 넘어 내리막길로 약 3킬로미터를 걸어서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어둠 속을 걸어가시면서, 그리고 잠자리에 드시면서도, 예수님은 틀림없이 성전에서 본 모습들을 생각하셨을 겁니다. 이미 여러 차례 보셔서 낯설지 않은 광경이었겠지만, 이번이 마지막 방문이기 때문에 무언가 행동을 취하기로 하셨고 또 그렇게 하셨습니다.

화요일 아침, 예수님은 다시 예루살렘에 오셨습니다. 본문 45절부터 보겠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이 일은 예수님이 왕이심을 다시 나타내 보인 정말 놀랍고도 분명한 증표입니다. 왕이신 예수님의 자격을 확증한 겁니다. 이 때 예수님이 행하신 일과 그로 인한 반응은 모두 주님이 하나님의 참된 왕, 하나님의 참된 메시아,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심을 증거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이길 바라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안토니아 요새를 공격할 것을 기대하거나, 아니면 로마가 이스라엘의 총독으로 임명한 실권 없는 통치자 빌라도의 관정을 공격하길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교도이자 우상숭배자이며 이스라엘을 정복한 로마인들을 공격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성전을 공격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유대교의 심장, 유대 민족의 영혼을 공격하셨습니다. 그 땅의 사람들이 가장 고귀하게 여기고, 가장 높은 권위를 인정하며, 가장 크게 신뢰하는,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을 대표하는 사람들을 공격하신 겁니다. 예루살렘의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부패한 것, 즉 종교를 공격하셨습니다.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것을 다시 입증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하나님의 왕이시라는 것을 보여주는 몇 가지 사실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셨습니다. 45절입니다.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에 들어가셨다는 것이 모든 것을 다 말해줍니다. 주님은 어디든지 가실 수 있었습니다. 정말 많은 곳들 말이죠. 그런데 다른 어떤 곳도 아닌 바로 성전에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빌라도에게로 가시거나 로마 군대를 찾아가시기를 바랐을 겁니다. 로마의 압제와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희망했을 겁니다. 로마인들의 물건과 도구에 달려있는 우상숭배의 상징들을 없애버리고, 로마가 부과하는 조세제도를 공격해 주시길 원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갈릴리에서 예수님이 처음 사역을 시작하며 위대한 능력을 나타내신 그 이후로부터 줄곧 지금까지 그렇게 행하시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이 질병을 고치는 기적의 능력, 귀신을 제압하는 기적의 능력, 먹을 양식을 만들어 내실 수 있는 기적의 능력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억지로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을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완전히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궁극의 해방자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런 식으로 백성들은 그렇게 줄곧 현세적인 문제들에만 집착했지만, 아무 무기나 군대도 없이 그 어떤 격식도 차리지 않고 왕위에 오르셨던 예수님은 세상의 다른 어떤 기관도 공격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공격하신 것은 성전입니다. 고위 관리들도, 평범한 사람들도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왕이시라는 것이 분명한 이유는 바로 사람들의 희망사항이 아닌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셨다고 말합니다. 마태는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셨다고 말합니다. 성전은 정말로 하나님의 성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성전 안에서 오히려 신성모독과 치욕과 조롱을 당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이스라엘의 문제는 로마의 지배가 아니라 유대인들의 종교적 부패였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백성들과 로마의 관계가 아니라 백성들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유대인들의 정치나 사회 문제에 있지 않았습니다. 사실 공격하실 것들은 많았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는 불법, 불의, 착취, 학대, 강포가 아주 만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어떤 것도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2장을 보면,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하셨던 일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가장 먼저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고 상을 엎으시며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요한복음 2장 13절부터 17절에 기록된 것과 같이 첫 번째 성전 정화가 있었고, 3년 뒤에도 여전히 부패한 성전에 두 번째 공격을 가하신 것입니다.

그 3년동안 거의 아무런 변화도 없었음을 보여드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처음으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사건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2장 13절부터입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시편 69편 9절이죠,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이렇게 성전 정화가 시작되고 끝난 겁니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늘 영적인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항상 사람들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참되신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지에 있었습니다. 정치나 세속적인 문제들에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예수님은 항상 예배에 초점을 맞추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록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3년이 지나 성전에 다시 오셨습니다. 주님은 여러 가지 문제들, 즉 사회적인 문제, 경제적인 문제, 정치적인 문제, 정의와 공평의 문제는 그냥 두셨습니다. 모든 합당하지 않은 일들을 보셨지만, 주님은 어떤 문제라도 그것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주님의 사역은 항상 하나님 나라와 참된 예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군인만이 바로잡을 수 있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의로운 지도자만이 바로잡을 수 있는 것들도 있었습니다. 자비로운 박애주의자만이 바로잡을 수 있는 것들도 있었습니다. 사회적인 개혁이 있어야만 바뀔 수 있는 것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주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저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의 갑판 의자를 재배치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각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주님이 바로 지금 이 세상에 오신다고 한다면, 워싱턴에 가셔서 정치인들을 공격하실까요? 절대로 아닙니다. 교회로 가셔서 이단자들과 위선자들과 착취자들과 사기꾼들과 거짓된 자들을 공격하실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참된 예배를 요구하실 겁니다. 성전 안에서 계속해서 문제가 생기면 다른 모든 것들도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회 문제의 척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언제나 예배입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됩니다.

저 역시도 주님과 같은 입장입니다. 정치적 문제, 군사적 문제, 사회적 문제에 얽매여 있지 않습니다. 물론 저도 세상에 만연한 불의를 보면 마음이 아프고 슬픕니다. 그러나 제 주된 관심은 교회를 깨끗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일한 해결책은 참된 교회에서 참된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가셨습니다. 성전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가실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습니다.

성전에 도착하셨을 때 주님이 거기서 무엇을 보셨습니까? 여기서 ‘성전’이란 단어는 일반적 의미의 성전을 뜻하는 ‘히에론’입니다. 히에론은 기드론 시내의 경사면 바로 위 예루살렘 동쪽 언덕에 자리한 성전과 성전 내 모든 시설들이 있는 넓은 뜰 전체를 가리킵니다. 예루살렘의 동쪽 성벽은 성전 뜰의 동쪽 벽을 말합니다. 히에론은 이처럼 성전과 그 뜰 전체에 대한 일반적 표현입니다. 주님이 매우 넓은 성전 뜰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을 통과하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성전으로 번역된 히에론은 성전을 가리키는 다른 단어인 ‘나오스’와는 다른 단어입니다.

누가복음 1장을 보겠습니다. 사가랴는 제사장입니다. 누가복음 1장 9절은 “그가 주의 성전에 분향하러 들어갔다”고 합니다. 여기서의 성전을 뜻하는 단어는 나오스입니다. 나오스는 많은 문과 뜰을 지나서 이르게 되는 성전 안쪽 구역인데, 제사장들이 홀로 향을 피우고 제물을 바치는 구역입니다.

우리말로는 이 두 단어가 모두 ‘성전’으로 번역되기 때문에 그 차이를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성전’은 성소가 자리한 곳과 성전 벽 안쪽의 넓은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단어입니다. 거룩한 성전은 바로 언덕 꼭대기 고지대에 있었습니다. 성전은 수만 명의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매우 넓은 장소입니다. 성전 주위로는 벽과 기둥, 여러 용도의 건물, 그리고 성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습니다.

그 넓은 뜰 안에 성전 외벽과 함께 점점 좁아지는 여러 개의 내부 뜰이 있었습니다. 그 여러 개의 뜰을 지나야 비로소 성소와 지성소로 이루어진 안쪽 성전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성전에 들어가면 먼저 이방인의 뜰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곳은 이방인들도 들어갈 수는 곳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그 뜰에는 누구나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방인이 그 뜰 안쪽으로 들어가면 죽임을 당했습니다.

넓은 이방인의 뜰 안쪽에는 여인의 뜰이라 불리는 또 다른 뜰이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이 뜰까지는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유대인이라면 누구라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여인의 뜰은 거지들이 즐겨 찾았던 미문이라 불리는 문을 통과해서 들어갔습니다. 유대인이라면 남자든 여자든 누구나 여인의 뜰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남자들은 더 안쪽 뜰인 이스라엘의 뜰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 뜰에는 니카노르의 문이 있었는데, 헤롯이 성전을 증축하면서 고린도 청동으로 만든 아주 거대한 문입니다. 이 문을 여닫는데 무려 20명의 장정이 필요할 만큼 아주 거대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뜰에는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 모이곤 했는데, 거기서 이 니카노르의 문을 통해 더 안쪽 뜰인 제사장의 뜰을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비록 제사장의 뜰에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제사장들이 그곳에서 분향하고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모습을 지켜볼 수는 있었던 겁니다.

제사장의 뜰 뒤쪽으로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 본 성전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문 너머로 제사장들이 정해진 시간에 아침 저녁으로 희생제사를 드리고 분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유월절에는 온종일 제사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복합적인 넓은 마당과 건물 전체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부른 겁니다.

이제 이방인의 뜰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예루살렘 구시가지 동쪽 지역에 있는 이방인의 뜰에 들어갔다고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은 아마 거기서 보이는 모습들 때문에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만일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하고, 순전하고 참된 예배를 사모한다면 분명히 화가 났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거기서 본 것들로 인해서 격노하셨습니다. 그날 밤부터 계속 분노하고 계셨습니다.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까? 이방인의 뜰은 아예 시장통이었습니다. 희생제물로 바치기 위한 짐승들을 거기서 거래했습니다. 몇 주전에 저는 유월절에 약 26만 마리의 양이 제물로 바쳐졌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거기 있었는지 이해가 되실 겁니다.

또 제사를 드리기 위한 물품들도 같이 사야만 했습니다. 그곳에는 돈을 바꿔 주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통틀어 아예 안나스의 시장이라고 불렀습니다. 안나스와 가야바는 둘 다 대제사장이었는데, 이런 거래를 통해서 부당하게 재산을 모았던 겁니다. 동물을 파는 사람들, 환전상, 기름을 비롯한 제사 용품을 파는 사람들에게 매매권을 판 거죠. 그것도 아주 비싼 가격에 팔았을 뿐 아니라, 가게 주인이 벌어들이는 이익의 상당 부분을 자신들의 몫으로 따로 떼어내서 가로챘습니다. 이방인의 뜰은 이런 가게들로 꽉 차 있었습니다.

요한 라이트풋은 성전 안 이방인의 뜰에 상설 시장이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매일 포도주, 소금, 기름, 그리고 희생제사에 필요한 것들을 그곳에서 거래했습니다. 물론, 짐승도 거래되었죠.

거래가 이뤄지는 방식은 이랬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왜 사람들이 직접 동물을 끌고 오지 않았을까?” 이렇게 물으시는 분도 있을 겁니다. 물론 원래는 그래야 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가축 중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가장 좋은 것을 골라서 가져오면 됩니다. 그러나 만일 직접 동물을 끌고 온다면, 매우 큰 모험을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제사장들이 동물 검사를 했는데 그 검사를 통과해야만 했기 때문이죠.

제사장들에게는 사람들이 끌고 온 동물을 퇴짜 놓는 것이 이익이 되었습니다. 부적합 판정을 내리면 동물을 다시 사야만 했기 때문이죠. 그렇게 되면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으로 사야만 했고, 지불한 돈의 상당한 부분이 앞서 말씀드린 대로 대제사장들의 손아귀로 들어갔습니다.

동물을 직접 끌고 왔다고 해 봅시다. 제사장들이 그 동물을 퇴짜놓으면, 어떤 기록들에 따르면 정상 가격의 10배를 지불해야만 했다고 합니다. 10배입니다, 10배. 이는 제사장들이 저지르는 도둑질이고 갈취입니다. 하나님의 성전 안에 있는 이방인의 뜰에서 나는 이 시끄러운 소리들, 쓰레기들, 동물들의 악취, 혼잡한 동물의 우리들은 모두가 예수님에게는 역겨운 것이었습니다. 거리낌도 없이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면서 이런 일을 벌이는 부류들은 예수님께는 부패한 자들, 강도들, 도둑들일 뿐이었습니다.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도 거기 있었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양 한 마리를 사기도 어려운 사람들은 레위기 16장 6절과 8절 말씀에 따라 비둘기 두 마리로 대신해서 제물을 바쳐야 했죠. 비둘기는 아마 오늘날 우리 돈으로 한 마리에 보통 100원 정도였을 겁니다. 그러나 이 시장에서는 한 마리에 만원을 줘야만 했습니다. 아주 비열하고 노골적인 사기죠. 권력 남용, 권력 악용, 부패 그 자체였습니다.

또 돈 바꾸는 사람들, 환전상도 있었습니다. ‘콜루보스’는 환전상’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작은 동전들’이란 뜻입니다. 유월절이 다가오면 모든 유대인들은 반 세겔을 성전세로 내야 했습니다. 유월절 한 달 전까지는 현지에서 낼 수 있었지만, 성전세를 내지 않고 예루살렘에 도착했다면 반드시 성전에서 그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성전에서 요구하는 동전으로만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만약 그 동전으로 정확한 금액만큼의 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 동전으로 바꿔야 했던 거죠. 그렇게 환전을 하면 환전 금액의 25퍼센트를 수수료로 징수했습니다.

마치 해외 여행을 하면서 공항에서 환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공항에 가기 전에 은행에 가서 환전하는 편이 훨씬 더 낫습니다. 환전료 징수는 착취였습니다. 안나스 시장의 모든 것이 사악했습니다. 온갖 도둑, 협잡꾼, 모든 부류의 사기꾼들이 몰려 북적대며 거래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셨던 곳이 바로 그곳입니다.

종교가 부패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에 주목하셨습니다. 성전에서 눈으로, 코로, 귀로 확인한 모든 것들에 대한 혐오감에 몸서리를 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처소에 계셨습니다. 46절에서 ‘내 집’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 이사야 56장에서 인용하신 것이죠.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예수님의 집은 세상의 정치적인 기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하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너희가 나의 세상, 나의 집, 나의 영광, 순전한 예배를 더럽혔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또한 마태복음 12장 6절에 따르면 성전의 주인이기도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신 겁니다. 그 사명은 다름 아닌 거짓 예배를 참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공격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명 수행이 바로 주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신성 모독자들로부터 하나님과 하나님의 집을 지키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를 갖고 계셨다는 것으로 입증됩니다. 주님은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기 시작하셨습니다. 제 머릿속에서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그려지는데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그 모든 일들을 중단시켜 버릴 수 있었을까요?

왕으로 인정되신 주님의 첫 공식적인 일정이 바로 성전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강력했습니다. 예수님은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수백명 혹은 수천명의 장사꾼들이 거기에 있었을 겁니다. 어떻게 싸움도, 말싸움도, 저항도 하지 않고 모두 다 순순히 줄지어 나갔을지 짐작이 되십니까?

주님은 장사하는 이들을 내쫓기 시작하셨습니다. 모두 내쫓기 시작했는데, 정말이지 말 그대로 그 자리에서 내치셨습니다.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명예를 위한 열심을 품고 있지 않았지만, 우리 주님께는 있었습니다. 아마 주님은 또 다른 채찍을 만드셨을 겁니다. 모르겠습니다. 주님이 어떤 행동을 하셨는지에 대해 아무런 말도 없지만, 마태복음 21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펴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21장 12절부터 설명이 있습니다. 또 마가복음 11장 15절에도 그 설명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셨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정중하게 다가가서 “여러분, 이제 그만 하던 일들을 멈추고 여기서 나가주십시오”라고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실로 과격한 행동이었습니다. 물리적인 힘을 사용해서 사람들을 내쫓고 상을 엎으셨습니다. 헬라어 말 그대로 작은 동전을 바꿔주던 콜로부스, 즉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있던 상을 엎으시고 그 자리에서 내쫓으셨습니다.

이 일이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는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장사하는 자들이 떠났다는 것을 보면, 주님의 물리적인 힘에 겁을 먹었던 게 분명합니다. 주님은 상을 엎으시고 동전을 사방에 내던지셨습니다.

마태는 또한 예수님이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고 전합니다. 아마 나무로 된 작은 상자 안에 비둘기를 가둬두고 작은 의자에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비둘기 상자와 의자를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그렇게 넘어진 의자들이 뜰 안 여기저기에 뒹굴었을 겁니다. 마가는 11장 16절에서 예수님이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나가지 못한 겁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그렇게 모두를 쫓아낼 수 있었을까요?

제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저는 하나님께서 그 일을 녹화하셨기를 바랍니다. 하늘나라에 그 DVD가 있기를 정말 바랍니다. 그 장면을 직접 보고 싶습니다. 아니면 거기 있었던 제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정확한 설명을 직접 듣고 싶습니다. 주님이 의자를 걷어차고, 상들을 뒤집어 엎고, 장사하던 사람들을 내쫓고, 어느 누구도 무엇 하나 가져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 힘과 능력과 권위가 정말 놀랍기만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공격하시고 성전을 공격하셨으면서, 이스라엘의 대적들과 이교도들은 공격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오늘날 이 세상에 다시 오신다면, 워싱턴이 아니라, 대학들이 아니라, 바로 교회를 공격하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권위로 교회를 공격하실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여, 주님의 교회를 깨끗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베드로의 말처럼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 시대의 마틴 루터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세우며 교활한 위선과 거짓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갈취하는 돈 바꾸는 사람들과 신성 모독자들을 공격할 성도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당시 성전을 더럽히던 장사꾼들처럼 지금도 거짓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더러운 이익을 위해 성전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돈을 위해 사역하지 말라고 일깨워 준 겁니다. 예배를 타락시키는 자들, 특히 주님의 이름, 곧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우며 돈을 위해 예배를 변질시키고 타락시키는 자들, 부정직하게 행하고 사람들을 착취하는 자들, 위선자들과 병 고침과 번성을 약속하는 가짜 선지자들을 주님은 얼마나 지독히 혐오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런 짓을 저지릅니다.

단언컨대 분명히 예수님이 성전을 다시 깨끗하게 하시면서 거짓 선지자들을 내쫓으실 텐데, 저는 결코 그 쫓겨나는 무리에 속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권위로 하나님의 사명을 행하시는 모습을 보게 될 겁니다.

셋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경에 대한 헌신을 보이십니다. 46절을 보겠습니다. 이 말씀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면서 반복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라고 하시며 구약성경의 두 구절을 인용하셨습니다. 이사야에서 한 구절, 예레미야에서 한 구절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오는 곳입니다. 기도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예배의 핵심은 기도입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고, 여러분이 예배드릴 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배드리며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높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하나님께 아룁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이 모두가 기도의 한 형태입니다. 여러분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합니다. 그리고 이 기도이야말로 성전이 만들어진 목적입니다.

주님은 먼저 이사야 56장 7절을 인용하셨습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이라.” 이처럼 이사야서에는 ‘만민’이 덧붙여져 있는데, 마가복음에는 만민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전은 항상 기도의 장소, 예배의 장소, 헌신의 장소, 묵상의 장소, 고요함, 회개, 통회, 고백, 찬양의 장소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목적하시고 만드신 곳입니다. 그런 성전이 신성 모독자와 강도들의 소굴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어머니 중 하나인 한나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무엘상 1장을 보면 한나는 성전에 가서 기도했습니다. 성전에서 조용히 묵상하고 간구할 수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겁니다.

열왕기상 8장을 보면 더 도움이 될 겁니다. 솔로몬이 첫 번째 성전을 건축한 후 성전 봉헌식에서 기도했습니다. 솔로몬의 기도는 성전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잘 알려줍니다. 열왕기상 8장 27절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사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성전에 거하실 수 없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은 성전에 거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이 종이 오늘 주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하나님이 성전에 거하실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성전의 목적이 달성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전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29절입니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주의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성전은 기도하기 위한 곳입니다. 솔로몬의 기도에 잘 나옵니다. 30절입니다.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그러므로 우리는 성전 안에서, 성전 주변에서, 또 성전을 향하여 기도할 수 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30절입니다.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그러면 어떤 기도를 해야 할까요? 무엇을 기도해야 할까요? 바로 고백, 회개, 통회 입니다. 31절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이웃에게 범죄함으로 맹세시킴을 받고 그가 와서 이 성전에 있는 주의 제단 앞에서 맹세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행하시되 주의 종들을 심판하사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돌리시고 공의로운 자를 의롭다 하사 그의 의로운 바대로 갚으시옵소서 만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께 범죄하여 적국 앞에 패하게 되므로 주께로 돌아와서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이 성전에서 주께 기도하며 간구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이 기도는 8장 전체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35절입니다. “만일 그들이 주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이 닫히고 비가 없어서 주께 벌을 받을 때에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그들의 죄에서 떠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사 주의 종들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38절입니다.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 이스라엘이 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을 깨닫고 이 성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성전의 가장 주된 목적은 기도입니다. 아침 저녁으로 드려지던 희생 제사는 단지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신다는 사실을 상징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속죄하셨고 화목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기도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42절입니다. “그들이 주의 크신 이름과 주의 능한 손과 주의 펴신 팔의 소문을 듣고 와서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61절입니다. “그런즉 너희의 마음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온전히 바쳐 완전하게 하여 오늘과 같이 그의 법도를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킬지어다 이에 왕과 및 왕과 함께 한 이스라엘이 다 여호와 앞에 희생제물을 드리니라.”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 위한 희생제물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희생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렇게 그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었습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성전은 바로 그런 곳입니다. 기도하러 가는 곳입니다. 찬양도 했을까요? 물론 그랬을 겁니다. 여러분은 이곳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셨나요? 물론 그러셨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전에 여러분은 먼저 죄를 고백했을 겁니다. 누가복음 18장의 세리처럼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을 겁니다.

시편 27편 4절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이 여호와의 집은 성전입니다.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성전은 묵상의 장소이고, 고백의 장소입니다. 기도의 장소입니다.

시편 65편 4절입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성전은 아름다운 장소입니다. 고백의 장소이자 찬양의 장소, 하나님과의 교제의 장소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전혀 다른 일들이 주후 30년 유월절에 헤롯 성전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예레미야를 인용해서 말씀하십니다. 본문 46절 하반절입니다.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예레미야 7장 11절입니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도둑들은 굴 안에 숨기를 좋아합니다. 특히 노상강도들이 굴 안에 숨어 있는 경우가 많았죠. 그런데 성전이 그런 도둑들의 은신처가 되었습니다. 도둑의 소굴이 되었고, 예배자들보다 강도들을 위한 피난처가 되었으며, 신성모독자들을 지켜주는 곳이 되었습니다. 굴에 숨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냥 성전에 가서 장사할 수 있는 영업권을 사기만 하면 됐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일시적으로 깨끗하게 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40년 후인 주후 70년에 로마 군대를 보내셔서 완전히 파괴해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은 2천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재건되지 못했습니다. 그 정도로 상황이 나빴던 겁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가신 것은 성전이 예수님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만약 예수님이 지금 다시 오신다면 세상의 기관들을 공격하시는 것이 아니라 부패하고, 부정하며, 진실하지 못한 교회를 공격하실 겁니다. 그렇게 분명히 우리는 왕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권위로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는 모습을 보게 될 겁니다.

네번째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긍휼을 보이셨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명백한 표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보이셨음에 있습니다. 47절입니다.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정말 놀라우면서도 간결한 표현입니다. 주님은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무엇을 가르치셨을까요? 무엇을 말씀하셨을까요?

20장 1절을 보겠습니다.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긍휼이 맞습니까? 주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무엇에 관한 좋은 소식입니까? 구원, 용서, 천국, 영생입니다. 추악함 가운데 피어난 아름다움입니다.

성전 뜰은 어수선했고 정돈되지도 않은 상태였습니다. 주인을 잃은 동물들은 이리저리 떼로 어슬렁대고, 흩어진 돈, 날개를 푸드덕거리는 새들, 뒤집힌 상,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의자, 버려진 쓰레기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을 겁니다. 반면 성전 모독은 며칠동안 중단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을 긍휼로 다스리시며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까지 매일 가르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또 한 번 구원의 복음을 이 완악한 백성들에게 선포하셨던 겁니다. ‘매일’이란 공생애 마지막 한 주간의 남은 날들에 행하신 활동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내용, 즉 복음은 20장 21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주님은 복음을 가르치십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참된 길을 가르치십니다.

21장의 끝에 예수님의 가르침의 결론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내용은 20장과 21장에 담겨 있는데, 마지막 부분인 21장 37절부터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

그러니까 예수님은 날마다 가르치셨고 사람들은 들으러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긍휼로 가르치시는 복음과 하나님의 길, 하나님의 삶의 방식, 천국을 향하는 하나님의 길에 대해 들으려고 성전을 가득 메웠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의 분노와 긍휼, 사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몹시 분노하셔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죄인들은 떠나갔지만 일부는 남아 있었습니다. 잠시 후에 살펴보겠지만 성전 당국자들은 격분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사람들이 있었고,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그들과 대화하셨습니다.

20장과 21장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복음, 곧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셨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긍정적인 내용이죠. 그리고 나서 주님은 매우 부정적인 것들도 가르치셨습니다. 지도자들, 이단들, 위선자들을 반박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이 확실히 임할 것임을 말씀하셨고, 심판을 위한 재림을 약속하셨습니다. 이것 역시 긍휼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길을 전하는 것이 긍휼입니다. 거짓 지도자들, 이단들, 위선자들을 향해 경고하는 것이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것이 긍휼입니다. 이 모든 것이 심판의 빛 안에서 구원으로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긍휼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는 좀 다른 내용이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단지 가르치시기만 했던 것은 아니라고 증거합니다.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예수님은 맹인과 다리 저는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주님의 긍휼, 주님의 능력, 시편 103편 찬송의 내용을 그대로 행하시면서 말이죠. 주님은 모든 질병을 고치고 몰아내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뒤집어 엎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치유해 주십니다. 긍휼로 복음을 전하십니다. 죄인들은 도망치지만 남은 자들은 남습니다. 분노와 사랑이 완벽하고 신성하게 균형을 이루는 겁니다. 주님은 죄인들이 두려워 떨게 하시지만 고난 가운데 있는 이들은 나아오게 하십니다. 온유한 치료자, 복음의 전파자에게 두려움 없이 나아오게 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심판의 경고를 통해 두렵고 떨리게 하십니다.

마태가 언급하는 맹인과 다리 저는 자들은 성전 주위를 맴돌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종교적 감정으로 찾게 되는 곳이 성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구걸하기 좋은 곳이었죠. 이번에는 동전 몇 푼 그 이상을 받았습니다. 시력을 되찾았습니다. 제대로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병든 자들을 치유해 주신 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경이롭고 놀라운 일이자 하나님 되심에 대한 신비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화요일에 행하신 일은 참된 메시아이심을 깨닫게 하는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기적의 증표로 충분히 받아들여질 법도 했지만, 지도자들은 오히려 큰 분노로 반응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21절을 보면 결국 지도자들은 그 주 금요일에 군중들을 선동해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외치게 했습니다. 긍휼의 현장에서 오히려 격분한 겁니다.

마태는 성전 마당에서 어린이들이 예수님을 찬양하면서 시편 8편의 말씀이 성취되자 지도자들이 더욱 분개했다고 증언합니다. 지도자들은 더 이상 참지 못했고,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이 가지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마지막 증거를 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위와 하나님의 사명을 갖고 계셨고, 하나님의 계시에 충실하셨으며, 하나님의 긍휼을 보이셨고,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셨습니다.

상황이 바뀐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47절 하반절부터 읽겠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월요일의 호산나 행렬 이후 군중들에게는 호의적인 심리가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솔직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유익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착취의 대상이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나서 기적이 이어졌습니다. 놀라운 가르침이 주어졌습니다. 그토록 강력한 존재감으로 성전에서 행하셨던 예수님에게서 말입니다. 물론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인 관심은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지도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나요? 대제사장들은 성전을 운영하던 자들입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사, 즉 종교 율법사,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이었습니다. 지도자들은 책임을 맡은 공직자였는데, 아마도 산헤드린 공회 의원이거나 지배계층의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뜻을 모았습니다. 모두 다 예수님의 죽음을 원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원했습니다. 마가복음 11장 18절에 따르면 이들은 주님을 “어떻게” 죽일 것인지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을 추진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왜냐하면 때마침 예수님의 인기가 너무 높았기 때문이죠. 백성이 다 예수님께 귀를 기울여 듣고 있었습니다.

48절입니다.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매우 생생한 표현입니다.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를 문자 그대로 번역해 보면 “그의 입술에 매달려” 이런 뜻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큰 관심을 쏟고 있었다는 겁니다. 물론 이전에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처럼 가르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며칠 못 가서 군중들은 예수님의 피를 요구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는 유대에서 오직 120명, 갈릴리에서는 500명의 신자들만이 모였습니다. 예수님은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민족과 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사야 53장입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계획을 실행할 방법을 모색하면서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금요일에 예수님이 희생양이 되도록 택하셨기에 지도자들의 계획이 맞아 떨어졌습니다. 필요한 것은 예수님 가까이 갈 방법뿐이었습니다. 결국 유다를 통해서, 그리고 군중들을 선동해서 그렇게 하고야 말았죠. 군중들을 선동할 수 있었던 것은 금요일까지도 예수님께 걸었던 군중들의 기대가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 신학자들, 학자들, 관료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대다수의 사람들도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생각하는 위대한 메시아, 구원자, 왕의 모습과 예수님의 모습이 맞아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중에서도 여전히 신실한 신자들이 존재하긴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여전히 버림받고 계신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귀하신 예수님은 계속해서 자신의 사명과 권위, 성경에 대한 헌신, 긍휼을 확실하게 보여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방식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깨끗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랑에 있어서, 거룩함에 있어서 완전하십니다. 온유함에 있어서도 완전하시지만, 심판에 있어서도 완전하십니다. 긍휼에 있어서 완전하시고, 보응에 있어서도 완전하십니다. 불의와 거짓을 참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구원을 거절하면 모든 생명의 심판자가 되십니다. 여러분을 위한 제 기도는, 여러분이 예수님을 심판자가 아닌 구주로 알게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 예배를 마칩니다. 우리는 엄중하면서도 영원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영원히 살게 될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모시고 천국의 기쁨과 영광 속에서 살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을 심판자로 저주하면서 지옥의 고통과 공포 속에 살 것인지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됩니다. 이곳은 교회입니다. 여기에 주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곳은 주님의 처소입니다. 예수님은 여기 우리에게 오셔서 “너희의 예배는 참된 예배이냐? 너희는 여기에 숨어 있는 강도이냐? 거짓되고 위선적이며 속이는 자는 아니냐?”라고 물으십니다.

주님, 은혜로운 구원의 일을 행하여 주옵소서. 이곳에 오셔서 주님의 교회와 주님의 이름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치유하시고,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길을 보여 주옵소서. 죄인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복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심판의 날에 신성모독자로 쫓겨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가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의 유익과 이익을 위해서 주님의 이름을 불러가며 사람들을 착취하는 위선자들과 거짓된 자들과 거짓말쟁이들과 사기꾼들과 신성 모독자들 때문에 통탄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주님의 교회를 깨끗하게 하사 주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옵소서.

이 회중에게 임하셔서 아직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은 모든 영혼을 깨우쳐 주사 회개하는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주님을 심판자가 아니라 구원자요 영원토록 충만한 기쁨을 주시는 분으로 알게 하옵소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주님의 일을 행하여 주옵소서. 지금 이 곳, 이 교회에서 주님을 알아야 하는 절실한 필요가 있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주님의 은혜로운 구원을 베풀어 주사 깨끗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지금 이 순간 주님의 기쁨을 위해 주님의 구원을 행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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