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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도 마태복음 9장을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상당히 짧습니다. 제가 먼저 읽어드린 후에 성령님께서 알려주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33절에서 멈췄는데,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이 치유받은 이야기였습니다. 마태는 이 기적 직후에 사람들의 반응을 기록했습니다. 33절 하반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이렇게 마태는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에 대한 반응을 보여줍니다. 무리는 놀라워했고 종교인들은 거부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본문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주님께서 아주 어렸을 때, 생후 40일 정도 되는 아기였을 때에,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과 함께 성전으로 가셨습니다. 율법에 따라 아이를 낳은 후 정결예식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죠. 성전에 있는 동안 시므온이라는 매우 흥미로운 사람을 만났습니다. 시므온은 평생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려온 노인이었는데, 드디어 메시아를 직접 볼 특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 30절입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그토록 기다려온 분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나서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그러니까 시므온의 말은 이런 뜻입니다. "이 아이가 운명을 결정짓는 경계선이 될 것이다. 많은 사람을 패하게도 하고 흥하게도 하기 위해 세움을 받았다"라고 말이죠. 본질적으로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한 겁니다. "이 아이는 모든 사람의 최종 운명을 결정짓는 경계선이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거부하고 넘어질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받아들이고 다시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은 늘 이런 방식이었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열매를 맺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겨 같은 자들도 있습니다. 경건한 자들이 있는가 하면 경건하지 않은 자들도 있습니다. 의로운 자가 있는 반면 불의한 자도 있습니다. 이렇게 딱 이 두 부류 뿐입니다. 저희 할아버지는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세상에는 오직 두 부류만 존재한단다. 성도와 성도가 아닌 자." 이게 다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라는 말은 마리아에게 새로운 소식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이런 방식으로 들어본 적은 없었지만 말이죠. 누가복음 1장을 보면 마리아가 자신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받아들이시고 어떤 사람은 거절하시며, 어떤 사람은 축복하시고 어떤 사람은 저주하시며, 어떤 사람들은 모으심으로 능력을 보여주시고 다른 사람들은 흩어버리시며, 높은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시며, 굶주린 자를 채우시고 배부른 자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신다는 것을 말이죠. 즉,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사람들과 저주하시는 사람들 사이에는 항상 이런 경계선이 있습니다. 한쪽에는 교만한 자들, 부유한 자들, 권세 있는 자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가난한 자들, 굶주린 자들, 겸손한 자들이 있습니다. 마리아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도 구약성경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므온을 통해 자신의 아이가 바로 이 모든 것의 핵심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확증해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이처럼 복이 있는 자들과 저주받은 자들이 있습니다. '화'라는 말은 '저주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다시 한번 경계선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복이 있는 자와 화가 있는 자로 나뉘는 경계선 말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좁은 문으로 들어가 복을 받는 자들이 있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 멸망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들은 심판 때에도 견뎌냅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자들은 무너져 내립니다. 자기 목숨을 붙잡으려다가 잃어버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잃는 자들은 도리어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기록한 복음서 전체를 통해서 예수님이 자신을 경계선으로 제시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2절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우리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로 인정하고 고백한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예수님께 속해 하나된 자로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면 예수님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그 사람을 부인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예수님이 그 경계선이심을 다시 보여주신 것입니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태복음과 다른 복음서에도 이러한 말씀이 계속 반복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이런 비유를 하셨습니다. 흠정역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첫째에게 가서 이르되 아들아 오늘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그가 응답하여 이르되 가지 아니하겠나이다 하고는 그 뒤에 뜻을 돌이켜서 갔고 그가 둘째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매 그가 응답하여 이르되 아버지여 가겠나이다 하고는 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 둘 중에 누가 자기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느냐 하시매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첫째 아들이라 하거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느니라." 다시 말해서, 첫째 아들은 "안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즉, 비종교적이었습니다. 아버지께 순종하지 않는 삶을 살았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갔습니다. 둘째 아들은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즉, 종교적이었습니다. 종교의 겉모습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순종하는 척하고 복종하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가지 않았습니다. 거절했다가 뉘우친 첫째 아들은 세리와 죄인을 가리킵니다. "가겠다"라고 했지만 가지 않은 둘째 아들은 바리새인과 위선자와 종교주의자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세리들과 창녀들이 종교주의자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도 경계선이 있습니다. 종교적인 사람들과 비종교적인 사람들 사이의 구분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구분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은 이렇게 표현됩니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그리스도가 바로 그 경계선입니다.

사도 바울은 전 인류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천국으로 향하는 영혼과 지옥으로 향하는 영혼으로, 축복받은 자와 저주받은 자로, 상을 받을 자와 정죄받을 자로 나뉜다는 동일한 개념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경계선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고린도후서 2장 14절에서 바울은 축도를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에게는 특별한 향기가 있고, 특별한 맛이 있고, 특별한 풍미가 있고, 특별한 냄새가 있고, 하나님을 나타내는 특별한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향기로 세상을 만집니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구원받는 자와 잃어버린 자 모두, 이 두 부류밖에 없다고 말씀드렸죠, 구원 받는 자와 망하는 자 모두가 우리 삶에서 나오는 향기를 맡습니다. 이 향기란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는 증거와 말로 하는 증거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16절입니다,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복음을 살아내고 전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그 현실을 구원 받는 자와 망하는 자에게 냄새로 발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망하는 자에게는 사망에서 사망에 이르는 냄새입니다. 망하는 자들은 거부하는 가운데 이미 죽어 있습니다. 복음을 더 많이 들을수록 더 방황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복음을 계속 거부하면 영적 죽음의 상태가 더욱 깊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불신자들에게는 사망에서 사망으로 이르게 하는 냄새가 되어 멸망을 더욱 심화시킵니다. 진리를 거부하면 할수록 더욱 끔찍한 지옥에 가게 됩니다. 반면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르게 하는 냄새가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함에 대한 깨달음을 확장시키고, 폭발시키고, 증가시키고, 풍요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영적으로 죽었거나 살아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냄새로 받아들입니다. 사망에서 사망으로 이르게 하는 냄새로서 죄악으로 인한 죽음을 더욱 깊게 만들고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을 가중시켜 더욱 무서운 영원한 지옥에 가게 하는 냄새로 받아들이거나, 혹은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르게 하는 냄새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경계선이십니다. 마태는 8장과 9장에서 이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9장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마태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이해하도록 돕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영국의 작가 헤이우드(Haywood)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류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인류는 교차로에 서 있는데 모든 이정표가 쓰러져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정표를 아주 명확하게 세워 놓았습니다. 우리에게 올바른 선택을 하라고 촉구합니다. 생명을 택하고, 의로움과 경건함을 택하고, 믿기를 택하라고 촉구합니다. 바로 이것이 마태가 의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선택하도록 돕기 위해, 8장과 9장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시며 구주이시라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제시합니다. 그러니까 마태는 이정표를 높이 세우고 있습니다. "이것이 좁은 길이다. 이 길로 들어가라.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길이다"라고 말입니다.

마태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기 위해 8장과 9장에 아홉 가지의 놀라운 기적들을 기록했습니다. 이 기적들은 어떤 인간도 행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해조차 할 수 없는,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기적을 다 기록한 것이 아니라 단지 몇 가지만 기록했습니다.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점입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20장 3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21장 25절입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마태가 기록한 기적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셀 수 없이 많은 기적 중에서 몇 가지 예시일 뿐입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실 텐데, 빠르게 설명해 드릴 테니까 잘 따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행하신 아홉 개의 기적을 기록했습니다. 세 가지씩 세 부분으로 나누었고 각 부분에 반응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먼저 질병에 대한 주님의 권능을 보여주는 기적을 봅시다. 나병환자를 치유하셨고, 백부장의 하인의 중풍을 고치셨고,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낫게 하셨습니다. 그 다음 무질서의 영역에서는 폭풍을 잠잠하게 하시고 파도와 바다를 진정시키셨습니다. 물리적 무질서입니다. 그 다음 영적 무질서에 대해서는 군대 귀신을 쫓아내심으로써 해결하셨습니다. 그 다음 도덕적 무질서에 대해서는 중풍병자를 치유하시고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써 다루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다루시면서 죽은 입을, 죽은 눈을 되살려 주셨고,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살려내셨습니다. 이 각각의 기적들은 또 다른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권능을 보여주었고, 주님께서 같은 범주에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을 대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가지 기적 이후에 반응이 나옵니다. 바로 우리가 33절부터 35절을 통해 살펴볼 내용입니다.

실제로 35절은 4장 23절과 맞추기 위해 삽입된 괄호 같은 부분입니다. 전체 갈릴리 사역을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감싸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을 보겠습니다. 메모해 두시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이제 다시 9장 35절로 가보면 똑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산상수훈과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기적들 사이에 맥락을 제공하는 일종의 괄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의 핵심입니다.

이제부터 35절부터 시작해서 이 세 개의 짧은 구절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주님의 사역을 살펴보고, 그 다음에 33절과 34절에 나오는 반응을 살펴보겠습니다. 35절을 주목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여기서 '두루 다니사'라는 동사는 지속적이면서 끊임없는 연속적인 노력이라는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다니셨습니다.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4장 23절은 이 도시와 마을이 갈릴리 지역이었음을 알려줍니다. 갈릴리는 이스라엘의 북쪽에 위치한 비옥한 땅으로써 많은 작물이 재배되는 곳이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수님 시대에 약 204개의 도시와 마을이 있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도시와 마을의 차이는 성벽의 유무입니다. 성벽이 있으면 도시고, 성벽이 없으면 마을입니다. 요새는 도시에만 만들었습니다. 도시든 마을이든 예수님은 그 모든 곳에 계셨습니다. 112킬로미터 곱하기 64킬로미터, 면적으로 계산하면 약 7,260제곱킬로미터 정도가 되는 지역입니다. 대략 200개에서 205개 정도의 마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곳을 빠르게 다니셨습니다. 요세푸스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갈릴리 지역에는 수많은 도시가 있었는데, 토양이 비옥했기 때문에 모든 마을이 사람들로 붐볐다. 가장 작은 마을에도 만 오천 명 이상의 주민이 있었다." 계산해보면 예수님이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하시면서 삼백만 명 이상을 만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이 모든 마을과 동네를 빠르게 다니시면서 치유하시고 전파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35절에서 집중하고자 하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신 것, 천국 복음을 전파하신 것, 그리고 백성들 가운데 모든 질병과 모든 병을 치유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점에서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이든, 또는 그 중 하나만 가지고도 우리가 휴거될 때까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교훈이나, 전파하신 설교나, 행하신 치유 세 가지 중에서 하나만 다룬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모든 것을 다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이 세 가지 요소를 통해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본질적인 통찰을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첫째,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회당은 어떤 장소였을까요? 유대인들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회당이 있었습니다. 함께 모이는 장소였습니다. 유대 공동체 생활의 중심지였습니다. 교회이기도 했고, 시청이기도 했고, 지방법원이기도 했습니다. 그야말로 모든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유대인 공동체에서 함께 모이는 장소였습니다. 유대교에 회당이 처음부터 존재하지는 않았습니다. 바벨론 포로기 이전에는 없었죠. 모든 예배의 중심은 성전이었습니다. 하지만 고국에서 포로로 끌려가고 성전이 파괴되면서, 또 70년 동안 바벨론에 살게 되면서, 유대인들이 있는 곳이면 숫자에 상관없이 함께 모여서 이런 작은 회당이나 집회소를 만들었습니다. 아직 성전이 재건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회당이 존재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반 블럭 정도 떨어진 거리에도 유대교의 이른바 성전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성전이 아닙니다. 성전이 있을 수 있는 곳은 오직 예루살렘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회당입니다. 회당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LA를 비롯한 세계 모든 도시에서 유대인 남성 열 명만 있으면 회당을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회당은 그야말로 어디에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셨던 갈릴리에도 모든 마을마다 회당이 있었습니다. 회당은 대개 언덕 위에 세워졌고, 언덕이 없으면 최소한 가장 높은 곳에, 그것도 없으면 강둑에 지었습니다. 성전처럼 지붕을 열어두는 경우가 많았는데, 밖을 내다보면서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을 바라보거나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예배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회당에는 보통 하늘 높이 솟은 크고 긴 기둥이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뉴잉글랜드 교회 첨탑이 각 마을을 표시하는 것과 매우 비슷했죠. 그래서 회당이 어디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었고, 그 마을에 처음 온 유대인이라면 누구든지 그 기둥만 찾으면 회당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함께 모였습니다. 또한 매주 둘째 날과 다섯째 날에도 특별 예배를 드렸고, 모든 절기와 축제, 모든 거룩한 날에도 모였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유대인들의 예배는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교회 예배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먼저 감사와 찬양으로 예배를 시작했는데, 우리가 찬양을 부르며 예배를 시작하는 것과 매우 비슷합니다.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이 행하신 일에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기도가 이어졌고, 회중이 ‘아멘’ 하고 응답했습니다. 그러면 지정된 낭독자가 일어서서 모세 율법, 즉 모세오경 중에서 하나를 읽었습니다. 원래 기록된 언어인 히브리어로 읽은 다음에,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아람어로 통역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선지서 중 한 구절을 읽었는데, 이것 역시 히브리어로 읽고 아람어로 통역했습니다. 모세오경과 선지서 낭독이 끝나면 설교 또는 강론을 했고, 축도한 후에 아멘으로 예배를 마쳤습니다.

유대인들은 항상 회당을 가르치는 곳, 교육하는 장소로 여겼습니다. 가르치고 배우기 위해 함께 모였습니다. 오늘날에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일계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언어인 이디시어에서 회당을 뜻하는 단어는 ‘슐(schul)’, S-C-H-U-L인데, 영어의 ‘school’, 즉 학교와 매우 비슷하죠.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회당을 가르치는 장소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법정으로도 여겼습니다. 역사를 보면 때때로 점령국에서 살았기 때문에 당연히 점령 정부로부터 관할권을 받아야 했지만, 그 권한이 주어졌을 때는 회당에서 자신들이 가진 모든 권위를 행사했습니다. 예를 들어, 주님께서는 "그들이 너희를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할" 날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판결을 내리고 심지어 회당에서 바로 형벌을 집행하기도 했습니다. 또 회당은 소년들에게 탈무드를 가르치는 공립학교가 되었습니다. 신학교 역할도 했습니다. 회당의 업무는 열 명의 장로들이 관리했습니다. 그 중 세 명은 회당의 통치자로 불렸고, 재판관 역할도 했습니다. 네번째 장로는 회중의 천사라고 불렸는데, 지도자입니다. 한 명은 히브리어를 아람어로 번역해주는 통역사였습니다. 또 다른 한 명은 신학교를 운영하는 등 여러 역할이 있었습니다. 즉, 열 명의 장로들이 각각 다른 책임을 맡아서 일을 분담했습니다.

역사학자 필로(Philo)는 매우 흥미로운 기록을 남겼습니다. 회당은 주로 성경을 자세히 읽고 해석하는 곳이라는 내용입니다. 매우 중요한 기록입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읽고 해석하기 위해 함께 모였습니다. 이런 성경 중심적 특성이 사도행전 17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베뢰아라는 작은 마을에 이르러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전했는데,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회당의 목적이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었죠. 설교의 경우에도 성경에 해박하거나 지식 수준이 높은 지도층이라면 누구든지 설교할 수 있었습니다. 그냥 일어서서 설교하면 됐습니다. 하지만 만약 높은 지위의 방문객이나 순회 랍비가 있다면, 그 랍비가 설교하고 말씀을 전하도록 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회당의 자유’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직접 이런 제도를 만드셨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유대 사회를 돌아다니면서 사역할 순회 전도를 염두에 두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또 적절한 설교 기회를 원하셨습니다. 떠오르는 사람이 둘 있죠? 바로 예수님과 바울입니다. 회당의 자유라는 관습 덕분에 언제나 회당에서 설교하고 가르칠 기회가 있었습니다.

회당에서 가르치는 방식은 성경 해석이었습니다. 성경을 읽고 설명하고 적용하는 것이죠. 느헤미야를 보면 성경을 읽고 그 의미를 설명했다고 하는데, 회당에서 바로 그런 방식으로 가르쳤습니다. 제게 이렇게 묻는 분이 있습니다. "왜 성경만 가르치시나요? 다른 교회랑은 너무 다른데요." 사실 전혀 새로운 방식이 아닙니다. 원래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그래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성경을 설명하는 것, 이것이 회당에서 하던 일이었습니다. 느헤미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고 그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이야말로 이런 가르침의 거장(the Master)이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을 보겠습니다. 시간관계상 서두르겠습니다. 중간에 끊기지 않게 하려면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4장 15절을 예로 들겠습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9장 35절에서 이미 살펴보았죠. 오늘 본문이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4장 15절에도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셨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제 여기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렇게 하셨는지에 대한 아주 좋은 예를 볼 수 있습니다. 16절입니다. “예수께서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회당을 방문한 선생으로서 일어서신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모세오경이 아닌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으셨습니다. 계속 읽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 회당에 있던 모든 유대인들은 그 구절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메시아죠.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주 짧은 설교를 하셨습니다.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늘 앉아서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말하자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나는 이 구절을 이루러 왔다. 이 말씀의 올바른 해석이 바로 나다.” 꽤나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다른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을 다 마치실 무렵, 2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그러니까 예수님은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방식, 즉 강해 설교를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이 친히 그 적용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해석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사건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목숨을 걸고 피하셔야 했던 다른 경우가 얼마나 있었는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9장 35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모든 마을과 도시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제가 강해 설교를 사랑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일 때 추구해야 할 방식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역에는 또 다른 요소가 있었습니다. 35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또한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전파하셨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는 다른 단어가 쓰였습니다. ‘케루소(kerusso)’ 인데, ‘전령으로서 선포하다, 공적인 발표를 하다, 선언을 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회당에서 강해 설교를 하신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길모퉁이에서, 언덕 위에서, 바닷가에서, 집에서, 길가에서, 들판에서, 그야말로 모든 곳에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계셨습니다.

또한 여기에는 예수님의 전도를 향한 열망, 즉 종교적 환경 밖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항상 같았습니다. 좋은 소식입니다. 바로 복음의 의미입니다. 오늘 저녁 로마서를 연구하면서 보게 되실 겁니다. 좋은 소식입니다. 그런데 무엇에 대한 좋은 소식일까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왔습니다. 정말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이제 좋은 소식이 왔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이 회당에서 하셨던 구약의 해석이 아니었습니다. 신약의 선포였습니다. 과거에는 감춰져 있었던 신비가 펼쳐지는 것이었습니다. 새 언약, 새로운 계시가 선포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항상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나라가 임하시오며…” 단지 미래에 임할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나라를 전파하시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도록 부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그 나라에 들어갑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의 나라에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는 왕이십니다. 그리스도가 제 삶을 다스리십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백성입니다.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으로 저를 먹이십니다.

그러니까 그 나라에 이제 우리가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좁은 문에 대해 말씀하신 겁니다. 지금 여기서, 그리고 미래에 임할 하나님 나라에서의 그리스도의 통치와 다스리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 믿고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는 수많은 복이 준비되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님께는 두 가지 사역이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시고, 구약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알려주시고, 어떻게 성취되는지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새로운 것들, 새 언약, 신비, 이전에 결코 알려지지 않았던 계시를 밝히 드러내 선포하시고 전파하셨습니다. 또한 이 두 가지 사역을 병행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기 위해 함께 모이는 동시에 세상으로 나가서 천국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제 세번째로, 이 두 가지 사역은 모두 기적으로 입증되었습니다. 이것이 세번째입니다. 백성 중의 모든 질병과 모든 병을 고치신 것인데, 세번째로 두는 것이 적절합니다. 왜냐하면 핵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앞의 두 가지 사역이 유효하다는 것을 확증하는 방법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B. B. 워필드(Warfield)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늘을 함께 끌고 오셨다. 주님의 사역에 따라온 표적들은 주님의 본향인 하늘에서 가져오신 영광의 구름 자락들에 불과했다." 예수님은 영광을 끌고 오셨고, 기적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확증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증명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기적들은 그 나라가 올 때 메시아가 행하실 일들의 표본이었고, 그것들을 반박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단지 그 기적들의 출처만을 부정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도저히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의 일하심을 보고 있습니다. 이제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반응을 살펴보는 데는 잠깐이면 됩니다. 우리는 이미 몇 가지 반응을 살펴봤습니다. 마태가 8장에서 보여준 첫번째 세 가지 기적에도 반응이 나옵니다. 기억하시겠지만, 기적을 행하신 후에 작은 사건이 있었는데, "주님을 따르고 싶습니다"라고 말한 세 사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안락함, 재물, 인간관계를 사랑했기 때문에 등을 돌리고 떠나갔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이들은 한 가지 공통적인 반응을 보여줍니다. 진정한 열매로 이어지지 못하는 피상적인 관심, 일시적인 반응, 참된 뿌리가 없는 호기심 같은 것 말이죠. 두번째 세 가지 기적에도 반응이 있었습니다. 첫번째 반응은 마태의 회심이었습니다. 두번째 반응은 바리새인들의 불쾌감이었고, 세번째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느낀 혼란이었습니다. 이렇게 마태는 우리에게 여러가지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싶다며 따라오지만 안락함, 재물, 물질, 또는 인간관계를 더 소중하게 여기면서 뒤로 물러납니다. 그런가 하면 마태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진정으로 믿고 나가서 자신의 모든 세리 친구들과 창녀 친구들도 믿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바리새인들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한다고 생각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의 제자들 같은 이들이 있습니다. 평생 한 종교 체계 안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듣고 있는 이 새로운 가르침에 대해 매우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제부터 세번째 세 가지 기적에 뒤따르는 세번째 반응을 살펴보겠습니다. 크게 두 가지 반응입니다. 33절입니다. "무리가 놀랍게 여겨." 34절에서는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거부하면서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일을 하셨다는 것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 능력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두 가지 반응입니다.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마태가 기적들을 선택할 때 9장에서 사람들이 치유받을 뿐만 아니라 구원도 받는 놀라운 기적들을 골라냈다는 겁니다. 2절의 중풍병자에게는 구원받기에 충분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9절의 세리 마태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18절의 회당장도 구원받았습니다. 21절의 혈루병 여인도 구원받았습니다. 28절의 두 맹인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올바른 반응을 보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이들은 정말로 믿었고, 호기심으로 변덕스럽게 반응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고,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마태는 우리 모두가 올바른 결정을 내리라고 설득하고 있습니다.

33절에서 무리가 놀라는 모습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의심할 여지 없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일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모세 시대의 기적들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의 기적들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억했습니다. 모세 때로 거슬러 올라가서 이집트 군대가 홍해에서 몰살당한 일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돌판에 직접 율법을 새기신 믿기 어려운 일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진 일 같은 수많은 사건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과거에 경이로운 일들을 목격했지만, 모든 역사를 통틀어서 이런 일은 처음이었습니다. 이것은 유대 역사상 비할 데 없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놀랐습니다. '놀라다'는 뜻의 '타우마조(thaumazo)'라는 단어는 매우 풍부하고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깜짝 놀랐다는 뜻일 수도 있고, 경악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극도로 놀랐다는 뜻입니다. 마가복음 12장 17절에서는 '엑타우마조(ekthaumazo)'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정말로 크게 깜짝 놀랐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27장 14절에서는 놀라다라는 단어에 '리안(lion)'이라는 표현을 덧붙여서 '극도로' 놀랐다는 뜻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에 극도로 놀랐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보는 것은 숨이 막힐 정도였습니다.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충격에 빠졌습니다. 경외심에 사로잡혔습니다. 이 단어에는 공포와 두려움, 경외감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치 배에 있던 제자들이 폭풍이 목숨을 위협했을 때보다 예수님이 폭풍을 잠재우신 후에 더 두려워했던 것과 같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과 같은 배에 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배에 타고 있으면서 하나님이 여러분 마음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신다면 두려울 수밖에 없겠죠. 그러니까 무리는 말 그대로 경악했습니다.

누가복음 9장 43절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니라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놀랍게 여길새..." 말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뛰어넘는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야말로 놀라워했습니다. 매료됐습니다. 결국 마태복음 21장을 보면 단 한 가지 결론밖에 내릴 수 없었습니다. "무리의 대다수는," 놀라워하던 바로 그 무리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사람들은 예수님의 발 앞에 종려나무 가지를 던졌습니다. 놀라워하는 모습입니다. "얼마나 놀라우신 분인가! 이분이 바로 메시아이시다!" 그런데 곧이어 예수님이 기득권에 맞서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자신들이 듣고 싶어하지 않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것을, 자신들의 안전한 삶을 위협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7장을 보면 바로 그 무리가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바라바는 석방하고 예수는 처형하라고 외쳤습니다. 변덕스러운 군중이란 이런 겁니다. 놀라워하던 무리들이 결국 예수님을 죽이라고 외쳤습니다. 피상적인 매혹이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과 같습니다. 공짜 음식 때문에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전하시는 말씀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멀리서 좋아했습니다.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매료됐습니다. 경외감이 있었습니다. 비록 두려움이 따르긴 했지만, 적당한 거리만 유지할 수 있다면 괜찮았습니다. 그저 매혹되었을 뿐이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을 보면 정말 신기합니다. 까무러칠 만큼 무서운 공포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갑니다. 혼이 빠질 정도로 무서워하면서도 그저 앉아서 공포에 질리고 식은땀을 흘리면서 광란 상태로 빠져듭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서운 장면이 나오면 곧바로 뛰쳐나가야 할 정도입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몇 시간씩 줄을 서서 엑소시스트를 보려는 걸까요? 뭔가 묘한 매력이 있는 겁니다.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팝콘을 먹으면서, 끝나면 나갈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말입니다. 그렇죠? 누구도 실제로 그런 상황에 처하고 싶지는 않을 겁니다. 단지 다른 사람이 그런 상황에 있는 걸 보는 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 면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 때문에 두려워했지만 동시에 초자연적인 일에 놀라고 경탄했던 그 사람들도 이런 매력을 느꼈을 겁니다. 하지만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싶어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즉시 돌변했습니다. 예수님이 죽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채로 경외감만 느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아무 잘못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빌라도는 지금 지옥에 있을 겁니다. 지옥에서 영원히 살게 될 다른 이들도 예수님에 대해 좋은 말을 했습니다. 디드로(Diderot)는 넘어설 수 없는 분이라고 했고, 나폴레옹은 사랑의 황제라고 했습니다. 슈트라우스(Strauss)는 종교의 최고 모범이라고 했고, 존 스튜어트 밀(John Stewart Mill)은 인류의 안내자라고 했습니다. 레키(Lecky)는 덕의 최고 본보기라고 했고, 페칸트(Pekant)는 하나님 앞의 거룩한 분이라고 했습니다. 마르티노(Martineau)는 인류의 신성한 꽃이라고 했고, 르낭(Renan)은 인간 중 가장 위대한 분이라고 했습니다. 시어도어 파커(Theodore Parker)는 마음에 하나님을 품은 청년이라고 했고, 프랜시스 콥(Francis Cobb)은 인류의 구원자라고 했습니다. 로버트 오웬스(Robert Owens)는 완전무결한 분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슈퍼스타라고까지 했습니다. 사람들은 늘 이런 찬사를 예수님께 바쳤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도 사람들은 "도대체 이분이 누구신가?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다. 이런 분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 운동을 펼치면서 예수님께 열광하며 놀라워하는 호기심 많은 군중들이 다시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좋아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단지 따뜻하고 부드러운 모습일 뿐입니다. 대립을 일으키지 않고 사랑과 달콤함만 전하는 예수님 말이죠.

어젯밤에 음악 시상식을 봤는데, 예수 팝이라는 새로운 부문이 있었습니다. 꽤 큰 시상식이었습니다. 예수 팝 부문 수상자에게는 기립박수까지 나왔습니다. 예수님을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면 매력적으로 느껴집니다. 흥미로운 인물이죠. 사람들은 경탄하며 예수님을 지켜보고 싶어합니다. 경외심은 있지만, 너무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제 말은, 예수님에 대해서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부도덕하게 사는 사람들, 그러니까 속이고, 거짓말하고, 동성애를 하거나 간음하거나 음행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심판하신다는 사실에 직면하지만 않으면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영원히 지옥으로 보내십니다.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면 더 이상 그렇게 열광하지 않을 겁니다.

최근에 한 목사님이 제게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롱비치 주립대학교에서 학생들이 모임을 가졌답니다. 요즘 학생들의 가장 큰 문제가 도덕성이라는 생각에 이 그리스도인 학생들이 성경적 도덕 기준을 지지하는 모임을 열었답니다. 처음에는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동성애를 주제로 한 특별한 발표 시간이 있었습니다. 작은 계단식 강의실에서 한 학생이 하나님께서 그런 죄악을 규탄하신다는 내용으로 발표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대학의 교수진 중 한 명이 나타났는데, 동성애자였답니다. 이 교수가 강의실 중앙 통로로 성큼성큼 걸어 내려오면서 발표자가 말하는 내내 온갖 더러운 욕설을 퍼부으면서 소리를 질렀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 학교 동성애 단체 학생들이 그리스도인 학생들에게 침까지 뱉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그저 좋은 분일 수 있습니다. 죄를 직면하게 하지 않는 한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이 정말 누구신지 알 만큼 가까이 다가가자 상황이 정말 빠르게 바뀝니다. 그렇게 가까이 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사람들은 거룩한 사람과는 항상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내려고 합니다. 제가 놀랍게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이 늘 선지자를 존경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선지자가 실제로 살던 그 시대에는 죽였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살아있던 유일한 선지자는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죽였습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신 그 시대에도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수백 년 전의 거룩함은 언제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누구든 영웅으로 만들어주니까요. 사람들은 언제나 거룩한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군중들은 예수님께 묘한 매력을 느끼면서도 거리를 두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너무 가까이 다가가게 되자, 두번째 부류, 거부하는 종교인들에게 합류하고 말았습니다.

34절을 보시면, 이 부분은 12장에서 다룰 예정이니까 지금은 넘어가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여기에, 성경에 별표해 두시기 바랍니다. 바로 여기가 예수님에 대한 증오가 절정에 달한 지점입니다.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것을 목격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단어는 두 가지 의미를 다 포함합니다. 킹 제임스 버전에서는 벙어리, 그러니까 말 못하는 사람으로 번역했지만, 벙어리와 귀머거리 둘 다로 번역이 가능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분명히 귀신을 쫓아냈다. 이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인정했습니다. 한 번도 그 사실 자체를 부인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부인하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라고 했는데, 생각해보면 참 어리석은 말입니다. 나중에 12장에서 예수님은 "귀신이 귀신을 쫓아낸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너희가 어떤 상태인지를 보여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본적으로 논리에 어긋나서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어두워져서 진리를 믿으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고, 그래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어리석은 반응을 보인 겁니다. 일부러 모른척한 겁니다. 예수님을 없애버리는 일에만 온 마음이 쏠려 있었기 때문에, 기적을 직접 보면서도 "저런 일들은 사탄을 힘입어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면서 한걸음 더 비극적인 단계로 접어들었습니다.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라고 단정했습니다. 결국 완전히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한 겁니다.

여러분, 잘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이 두 가지 반응 모두 잘못된 겁니다. 둘 다 결국 영원한 지옥으로 향하게 됩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예수님을 증오하고 거부하며 신성모독하고 사탄의 편이라고 했던 사람들과, 놀라워하고 경탄하고 '호산나'를 외쳤던 무리 둘 다 말입니까?" 맞습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반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반응은 믿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지, 단순히 매혹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다양한 반응들을 잘 보여줍니다. 먼저 "주님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안락함, 재물, 인간관계가 더 중요해서 지금 당장은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 마태처럼 즉시 따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죄의 무게에 짓눌려 세리들과 죄인들처럼 그리스도께 달려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화내고 불쾌해하는 종교인들도 있는데, 처음엔 그냥 짜증을 내다가 신성모독을 하고, 결국엔 살인까지 합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처럼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왜 자신들이 이걸 몰랐는지, 왜 기존에 알고 있던 것과 다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마 다른 종교 배경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범주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감탄하는 무리'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아, 예수님, 참 좋은 분이죠. 크리스마스, 부활절 아, 멋지죠. 예수님을 찬양하는 음악도 좋고요, 뭐든 좋아요"라고 말합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서 예수님이 행하시는 초자연적인 일들을 구경하는 걸 좋아합니다. 그런데 결국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사람들과 함께 서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신중히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패하게도 흥하게도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한 영국 작가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깃발을 걸 수 있는 올바른 깃대가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그 진리께 나아갈 수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오늘 아침 이 말씀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망에서 사망으로 이끄는 냄새가 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를 거부함으로써 더 깊은 멸망 속으로 빠져들고, 하나님 앞에서 더 큰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끄는 향기가 될 것입니다. 이미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아버지, 주님의 성령께서 우리 모든 마음 가운데 역사해 주옵소서. 생명을 가진 우리들에게는 더욱 풍성한 생명을 주시고, 더 큰 순종으로 헌신하게 하옵소서. 죽음만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오늘이 생명으로 들어가는 날이 되게 하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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