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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9장을 펴 주십시오. 마태복음 9장입니다. 다시 마태복음으로 돌아왔습니다. 사실 이 순간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제가 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정말 좋아하기 때문이죠. 한 달 전에 17절에서 멈췄으니까 오늘은 18절부터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18절부터 26절까지가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이 이야기를 잘 이해하고 마음에 새기실 수 있도록 18절부터 26절까지 읽어드리겠습니다. 이 귀중한 기록을 함께 살펴보면서 앞으로 몇 주를 보내게 될 겁니다. 18절부터 읽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오늘 본문의 제목을 “죽음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권능”이라고 붙였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이야기입니다. 그 사이에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고치신 일도 있었습니다. 다른 복음서들을 보면 이 치유 사건이 중간에 들어간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소녀가 죽고 장례식을 시작할 때까지 시간을 지체하실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께서 처음 오셨을 때 그 사람이 "제 딸이 죽어가고 있습니다"라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도착하셨을 때는 이미 아이가 죽어서 장례가 진행 중이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부활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일부러 혈루증 여인의 치유라는 아름다운 사건을 중간에 행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죽음까지도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권능을 봅니다. 매우 중요한 주제를 다루는 핵심적인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마주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어가는 세상 속에서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비극으로 가득합니다. 슬픔으로 가득합니다. 비통함으로 가득합니다. 죽음으로, 임종으로 가득합니다. 창세기 3장에 기록된 인간의 타락 이후, 이 땅에는 저주가 내려졌습니다. 그 저주로 인해 이 땅과 모든 거주민들은 눈물과 재난과 고통과 질병과 죽음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이런 일들을 끊임없이 마주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달 만에, 그러니까 지난 4-5주 동안에만 해도 이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암으로 소중한 친구를 떠나보냈고, 또 다른 많은 친구들이 고통스럽고 치명적인 암투병 속에서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한 젊은이가 운전하다 8살 꼬마를 치어 목숨을 잃게 했습니다. 고속도로에서 그리스도인 기사가 몰던 트레일러 앞으로 누군가가 뛰어들어 차 앞부분에 끼는 사고도 있었습니다. 지난달에는 장례식장 여러 곳을 다녔습니다. 차갑게 굳은 아버지,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슬픔에 잠긴 사람들의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린 두 아이를 둔 젊은 엄마가 폐암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수술을 마친 젊은이가 마취에서 깨어나며 겪는 고통을 지켜보았고, 여러 병원 복도를 걸었습니다. 병마와 싸우는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들었습니다. 백혈병에 걸린 아이들도 보았습니다. 목사님 한 분이 전화로 이런 부탁을 하셨습니다. "존 목사님, 우리 16살 된 딸을 위해 기도해주세요. 개심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는데, 다시 심장이 안 좋아져서 딸아이를 거의 잃을 뻔했어요." 이번달에는 1년 전 우리 교회의 한 성도님이 화상을 입어 돌아가신 일도 떠올랐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는 분과 청력을 잃어가는 분을 만났습니다. 한 달 사이에 암으로 어머니를 여읜 9살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지난 주일에는 뇌종양으로 끊임없는 고통에 시달리시는 분과 함께 기도했습니다. 제가 겪은 일들 중에 일부일 뿐입니다만,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죄가 세상에 가져온 결과입니다. 저주가 현실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에 오셨을 때 보이신 반응이 어찌 놀라운 일이겠습니까? 요한복음 11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나사로의 누이인 마리아입니다,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이 나사로의 장례식때 오셨기 때문입니다.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예수님이 깊은 슬픔을 느끼셨습니다. 비통히 여기셨습니다. 단순히 나사로에게 일어난 일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전지하신 예수님은 모든 시대를 아우르는 죄의 결과들을 알고 계셨고 인간에게 가져올 모든 고통을 느끼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우리의 아픔을 공감하시는 예수님은 말 그대로 비통해 하셨습니다. 계속 읽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예수님께서 이토록 비통해하신 것은 죄가 가진 힘과 이로 인한 고통을 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상황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원래의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인간에게 유익과 복을 주기 위해 창조되었지만, 인간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선지자들이 세상에 죄가 있을지라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저주를 돌이키실 것이라고 말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은 저주가 끝나는 날에 대한 이 놀라운 환상을 보았습니다. 누가 이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저주를 돌이킬 수 있고 누가 질병과 고통과 슬픔, 죽음의 눈물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 선지자들은 메시아, 군주, 왕이 오실 것이고 바로 그 메시아가 이 모든 일을 이루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온전한 생명을 회복시키실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비록 이러한 예언들은 미래에야 완전히 성취될 것이지만, 그것을 이루실 분은 이미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질병을 몰아내셨고, 죽은 자를 살리셨으며, 죄를 사하셨습니다. 앞으로 올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그 모든 일들을 예수님은 이미 초림의 때에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은 저주를 돌이키는 능력에 대한 입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능력을 입증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이 무덤에 있는 모든 자들을 언젠가 죽음에서 일으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그렇게 하실 것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시기 위해 기적에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마태복음의 논리 흐름을 따른다면, 이것이 마태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되실 겁니다. 예를 들어 4장으로 돌아가보면,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을 들으시면서 흐름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4장으로 돌아가보면, 마태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이렇게 마태의 논리를 조금 더 따라가서 8장으로 가봅시다. 8장 16절입니다. 기억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잘 들으십시오. 예수님은 단지 당시의 병든 자들을 위해서만 치유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해 치유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이들 모두에게 믿음이 있어서 치유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이들에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어서 치유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모든 질병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모두를 치유하셨던 겁니다. 9장 35절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11장 5절입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를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하나님, 그 메시아, 그 왕이심을 스스로 나타내 보이고자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마태복음 연구에 함께하셨다면, 이것이 마태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이라는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마태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했습니다. 왕의 혈통을 지니신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탄생을 다뤘습니다. 처녀에게서 나신 왕의 탄생입니다. 예수님께 드려진 경배도 전했습니다. 왕들이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기대도 말했습니다. 구약의 예언들이 예수님의 탄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왕의 전령이자 선포자인 세례 요한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세례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확증해주신 것도 전했습니다. 시험 중에 사탄을 이기신 승리도 전했습니다. 치유와 설교 사역도 전했습니다. 5장부터 7장까지의 산상수훈을 통해 나타난 예수님의 권위도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8장과 9장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기적들을 보게 되는데, 마태는 이를 세 유형으로 나누어 각각 세 가지 기적을 보여줍니다. 8장에서는 질병과 관련된 첫번째 세 가지 기적을 볼 수 있습니다. 8장 23절부터 9장 17절까지는 물리적, 영적, 도덕적 영역의 혼란을 다룬 두번째 세 가지 기적입니다. 그리고 이제 앞으로 살펴볼 세 번째 유형은 죽음을 다룹니다. 질병, 혼란, 죽음. 이 죽음이 절정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 부분에는 세 가지의 기적이 있습니다. 첫번째 기적 안에 다른 기적이 들어 있긴 하지만, 어쨌든 각기 다른 세 기적이 나옵니다. 첫번째는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입니다. 두번째는 맹인이 다시 볼 수 있게 된 기적, 그리고 세번째는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할 수 있게 된 기적입니다. 뒤의 두 기적들은 첫번째인 부활의 기적보다 덜 경이로운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왜 마태가 죽음을 다스리는 예수님의 권세를 증거하면서 보게 하고 말하게 한 기적을 더했는지 의아하실 수도 있습니다. 제가 확실하게 단정해서 교리적으로 대답을 드릴 수는 없지만, 그 기적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부활의 기적을 위한 훌륭한 예시가 될 수 있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한 사람을 죽음에서 완전히 다시 살리십니다. 그런 다음에 어떻게 죽은 몸의 지체에 생명을 다시 주실 수 있는지를 보여주십니다. 그걸 통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사람을 다시 완전하게 살릴 수 있는지를 알려주십니다. 죽은 눈이 다시 보게 하시고, 죽은 혀가 다시 말할 수 있게 하시는 분이라면, 죽은 사람도 다시 살리실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은 각각의 신체 기관을 총체적으로 온전하게 다시 살리는 것이기 때문이죠. 죽은 신체 기관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권능을 갖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실 수 있을까요? 정말 놀라운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캐나다의 과학자 G. B. 하디(G. B. Hardy)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종교를 연구하면서 나는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첫번째 질문은 '과연 누군가 죽음을 정복한 적이 있는가?'였고, 두번째는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나를 그렇게 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두었는가?'였다. 부처의 무덤을 찾아가 보니 시신이 있었고, 공자의 무덤도 그랬고, 무함마드의 무덤에도 그랬다. 하지만 예수님의 무덤에 갔을 때는 비어 있었다. '드디어 죽음을 정복하신 분을 찾았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두번째 질문을 던졌다. '그분이 나를 위한 길도 마련해 두셨을까?' 성경을 펼쳐보니 예수님께서 '내가 살아있으므로 너희도 살 것이다'라고 하셨다." 바로 이것이 핵심 질문입니다. "예수님, 정말 죽음을 이기실 수 있으십니까? 저주를 물리치실 수 있으십니까? 요한계시록 1장에 기록된 대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진 분이신가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증명해 주십시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탄식하시며 마리아와 함께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다스리는 권능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죽은 소녀를 살리신 사건만큼 이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경우도 없을 겁니다.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몇 가지 기본적인 내용을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기적 안에 기적이 있는데, 부활 기적 안에 있는 혈루증 기적은 사실 부활 기적의 한 부분입니다. 죽음이 일어나고 부활을 최대한 극적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시간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기적 안에 기적이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저는 설교 안의 설교를 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기적과 능력을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이 두 가지 놀라운 사건을 살펴보면서, 단순히 일어난 일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설교 안의 설교를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람들을 대하셨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이 부분만큼 잘 드러나는 곳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온유함, 민감함, 부드러움, 개방성, 사랑의 친절이 여기에 있고, 예수님의 모든 능력과 역동성, 위엄의 경이로움이 모두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사람들을 대하셨는지에 대한 놀라운 통찰도 얻을 수 있는데, 우리가 사람들을 대하는 본보기가 되기도 합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람들을 대하셨는지를 바탕으로 한 개요를 통해 이 놀라운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처음 보면서 드는 생각은, 예수님이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분이셨다는 겁니다. 1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잠시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라고 했는데, 어떤 말씀일까요? 15절을 보면 "그들에게"라고 했는데, 누구일까요?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해봐야 됩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누구에게 말씀하고 계셨을까요? 당시 상황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은 가다라의 광인에게서 귀신들을 쫓아내어 돼지 떼에게 보내셨습니다. 바다와 바람을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이 소문은 당연히 빠르게 퍼졌을 겁니다. 갈릴리 바다의 최북단에 있는 작은 마을 가버나움, 베드로가 살던 그곳으로 돌아오셨을 때의 일입니다. 가다라에서의 놀라운 사건들 이후 베드로의 집에 머무르고 계실 때,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이것을 염두에 두고 18절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그러니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하시던 중에, “한 관리가 와서.” 이 구절을 통해서 예수님께 다가가기가 얼마나 쉬운지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언제나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상아탑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백합꽃으로 둘러싸인 채 5미터 높이에 앉아 계신 종교 지도자도 아니었습니다. 사람들과 거리를 두지 않으셨습니다. 수도원에 계시지도 않으셨습니다. 계급 제도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부회장을 거치고 또 다른 상급자를 거쳐서 보고해야 하는 그런 복잡한 절차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 사셨습니다. 인간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의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1장이 말하듯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거리에 계셨고, 마을을 다니셨고, 먼지 나는 길을 걸으셨습니다. 회당에도 가셨고 여러 사람들의 집에도 계셨는데, 이곳이 예수님이 머무신 전부였습니다. 자신의 집이 따로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성전 뜰에서 사람들과 마주치기도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누구나 쉽게 만날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마태복음 19장을 보면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수하시고 기도해 주시기를 바라며 어린 아이들을 앞으로 떠밀었던 겁니다. 제자들은 "저 아이들을 보내십시오"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어른이든 아이든 누구나 환영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늘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한번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상상이 되십니까? 예수님 곁에 있을 때 사람들이 질문을 했을까요? 여러분이라면 어떠했을까요? 모든 답을 알고 계신 분이 계시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예수님은 상담도 하시고, 병도 고치시고, 가르치기도 하시면서 사람들 가운데 계셨습니다. 삼 일 동안이나 쉬지 않고 함께 계셨다는 게 놀랍지 않으신가요? 그리고 그런 중에도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끝없는 대화들, 끝없는 요구들, 끝없는 질문들을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때로는 하나님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감람산으로 물러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이 기적에 대해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라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는데도, 그로 인해 받게 될 부담 때문이었죠, 그곳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세상의 주인이시며,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왕이시며, 주님이신 그분이 갈릴리의 굽이진 언덕을 걸으시는데, 아이들이 주변을 뛰어다니고, 사람들이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마을과 모래사장, 해변가에 계셨고, 바다 위에도 계셨고, 예루살렘의 복잡한 거리에도 계셨고, 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계셨습니다.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이 제게 무슨 뜻으로 다가오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분이시다’라는 겁니다. 정말 좋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군중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 특별한 때에, 군중 속에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관리였고, 다른 한 사람은 병든 여인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사람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분명 사회적 약자였습니다. 한 사람은 부자였고 한 사람은 가난했습니다. 그런 군중 속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을지 상상이 되십니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고 속여서 비난하려 했습니다. 또 예수님을 분석하기만 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병든 사람들,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들, 구걸하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노예들, 포로들, 모든 고통받는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모든 필요를 채우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분이셨다는 것이 저를 감동시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다가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쉽게 다가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표현을 조금 바꾸자면, 언제나 함께하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제가 군중보다는 개개인에 대해 더 주목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가 다가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는 점에서 항상 함께하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정말 놀라운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그 군중 속에 누가 있는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진심으로 그 사람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제가 말씀드렸듯이, 저는 군중이 아닌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18절을 다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헬라어 성경에는 '보라'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것 좀 보세요,' 이런 뜻입니다. 정말 놀랍고 충격적이고 굉장히 주목할 만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특별했을까요? 이 사람은 관리였습니다. 마가복음은 "회당장 중의 하나"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로쉬 하 케네세스(rosh ha keneseth)"라고 부르는데, 회당의 수석 장로라는 뜻입니다. 이름은 야이로입니다. 야이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십니까? 가버나움 지역 종교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가버나움 회당의 수석 장로였습니다.

회당은 장로들이 다스렸습니다. 영적 지도자로서 회당의 행정을 담당했습니다. 모든 공공 예배가 올바르게 진행되도록 조정하고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매우 영향력 있는 사람입니다. 많은 장로들 중에서 한 명을 뽑아서 대표자로 세웠습니다. 이 대표자는 회당을 주재하고 감독하고, 설교자와 기도자, 율법을 읽을 사람을 지명하는 등 회당 전체를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종교 제도의 최고 정점에 있는 사람입니다. 복음서를 조금이라도 아시는 분이라면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얼마나 그리스도를 반대했는지 아실 겁니다. 예수님의 생애 내내 격렬하게 대립했습니다. 이 사람은 그런 종교 제도의 대표적 인물입니다. 어쩌면 바리새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 주변에서 전통적인 유대교 신자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강한 압박을 받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야이로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야이로가 "선생님, 저는 회당의 수석 장로입니다. 잠시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이렇게 말했을 것이라고 예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지위나 체면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18절을 보면,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절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누군가의 앞에 엎드려 발이나 옷자락에 입 맞추거나, 땅에 입 맞추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당시 예수님은 이단으로 여겨졌고, 바리새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의 표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야이로는 당시 문화에서는 신적 존재나 거룩한 초자연적 존재, 혹은 스스로를 신격화한 왕에게나 할 법한 행동을 했습니다. 보통 사람에게는 결코 하지 않을 행동입니다.

마태가 '절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참 의미심장합니다. 왕이신 예수님께 걸맞게 이 단어를 열세 번이나 사용했습니다. 야이로가 절을 했다고 합니다. 무엇이 야이로를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어떻게 누군가가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요?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18절을 보겠습니다. 야이로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마태복음의 기록은 매우 간략합니다.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좀 더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다른 복음서 기자들의 기록을 보면 그 사람이 처음에는 예수님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 그 사실을 전했습니다. 마태는 앞의 내용들은 생략하고 이 부분만 간단히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제 딸이 죽었습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그 소녀가 열두 살이었다고 전합니다. 유대 문화에서는 여자아이가 열두 살하고 하루가 지나면 성인입니다. 남자아이는 열세 살하고 하루가 지나야 했습니다. 그래서 성인식을 하는 겁니다. 여자들이 늘 한 발 앞서 있다는 걸 우리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열두 살하고 하루니까요. 그 소녀는 이제 막 여성이 되었습니다. 꽃을 피우려는 찰나입니다. 열두 해의 밝은 햇살이 죽음의 그림자로 변해버렸습니다. 왜 야이로가 예수님을 찾아왔을까요? 사회적 시선도, 자신의 명예도, 종교 지도자라는 체면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딸이 죽었습니다. 자신의 종교 체계, 그러니까 유대교 안에서는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전혀 없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미 야이로의 마음속에 역사하고 계셨다고 생각합니다. 야이로의 믿음이 놀랍지 않습니까?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말에는 의심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야이로는 자존심을 내려놓았습니다. 사회적 기대에 등을 돌렸고, 종교 체계와도 결별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땅에 엎드려 아마도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제 딸이 죽었습니다."

이 회당장 야이로에 대해 두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번째는 절실한 필요가 있었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이유가 바로 겁입니다. 필요가 없다면 누구도 나아오지 않을 겁니다. 얼마 전에 한 남성이 저에게 "저는 그리스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리스도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나아오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게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간절한 필요를 느끼고, 고통을 경험하고, 절망을 맛보고, 모든 것을 잃어서 그리스도께로 이끌리게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 야이로는 이미 마음속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에 압도되어 있었지만, 이때까지는 아마도 망설이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자신의 딸이 죽어가고 결국 죽었을 때 절박한 심정으로 찾아왔습니다. 야이로의 동기가 완전히 순수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감탄해서 온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를 향한 큰 사랑 때문에 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고통 중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깊은 고통을, 평생 겪어보지 못한 아픔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누그러질 수 있는 고통도 아니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야이로의 마음은 말 그대로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이처럼 필요를 가진 사람들이 예수님께 찾아오는 법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과 연약한 자들과 비천한 자들과 갇힌 자들에게 전해지고 또 받아들여지는 겁니다. 그래서 야이로가 찾아온 겁니다. 비록 야이로의 믿음이 완전하지 않았고 동기도 다소 이기적이었지만, 예수님은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야이로의 필요에 대해 말씀드렸으니, 이제 믿음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이 야이로가 찾아온 두번째 이유입니다. 야이로는 진심으로 예수님이 이 일을 하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믿음입니다. 8장에서 한 백부장이 자기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있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백부장이 "주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나을 것입니다"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로 자기 하인이 나을 수 있다고 믿을 만큼 큰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믿음이라고 하신 백부장의 믿음과 비교해 보십시오.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는 일, 즉 예수님이 죽은 사람에게 손을 얹어 살리실 수 있다고 믿는 이 믿음은 얼마나 큰 것이겠습니까? 백부장의 믿음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믿음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마르다의 믿음보다도 더 컸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부활의 능력조차 믿지 못했습니다. 저는 야이로가 구원받기에 충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날이 저물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갔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참으로 놀라운 또 다른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큰 무리 속에 계실 때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났는데,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직접 관여하지 않으신 기적이었습니다. 전혀 의도하지 않으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라고 하시면서 주위를 둘러보시고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는가?"라고 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녀가 확실히 죽었다는 것을 보이시려고 일부러 회당장의 집으로 가는 예수님의 걸음을 늦추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간절한 필요와 믿음에 어떻게 응답하셨을까요? 19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이 참 좋습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예수님께서 '일어나 따라가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저 일어나 따라가신 것입니다. "지금 이 많은 무리와 중요한 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우기 곤란하구나. 병든 사람들도 이렇게 많단다,"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바로 일어나서 야이로를 따라가셨습니다.

때로 주님은 우리가 단 한 사람의 필요를 채우기를 원하십니다. 빌립은 당시 대규모 집회를 열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부흥회마다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고 빌립은 곳곳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주님께서 빌립의 의지와 관계없이 데려가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도행전을 보면 주님이 빌립에게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고 하셨습니다. 네게 보여줄 사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침 수레를 타고 가는 내시가 나타났습니다. 빌립이 그 내시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나자 주님께서 빌립을 다시 성령으로 들어 올리셔서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보내셨습니다. 이처럼 한 사람에게 정말 큰 필요가 있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그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37절에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군중에게도, 또 한 사람에게도 다가가기 쉬운 분이셨습니다. 오늘 아침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예수님은 우리가 만질 수 있는 분이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고 언제나 사람들과 함께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직접 만질 수도 있었습니다.

20절을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와 함께 가시는데, 19절에서처럼 제자들도 함께했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따르면 수많은 군중들이 함께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야이로의 집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는데, 엄청난 인파가 예수님 주위를 빽빽하게 에워싸고 있었고 질문이 쏟아지는 등 늘 그렇듯이 혼잡한 상황이었습니다. “보라,” 또다시 놀랍고 충격적이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그게 뭐가 잘못된 겁니까?"라고 궁금해하실 수 있는데, 당시에는 여자들이 남자들을 함부로 만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여기서 '만지다'라는 말은 그저 스치듯이 만진 게 아니라 '꽉 붙잡다,' 이런 뜻입니다. 이는 요한복음 20장에서 마리아가 예수님께 돌이켜 손을 뻗었을 때 사용된 단어와 같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졌을 때 예수님께서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셨는데, 실제로 마리아는 예수님을 붙잡으려 했던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붙잡지 마라. 나는 하늘로 올라가 성령을 보내야 하니 네가 나를 이곳에 붙잡아 두어서는 안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혈루증 여인도 똑같이 예수님을 꽉 붙잡았습니다.

"아, 그게 뭐가 잘못된 건가요?" 또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여인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열두 살 소녀와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이 있었습니다. 야이로에게는 어린 딸이 있었고, 그 딸은 12년의 햇살 같은 시간을 선물했습니다. 반면 이 여인은 12년의 그림자 속에서 살았습니다. 12년의 웃음이 있었다면, 12년의 눈물도 있었습니다. 방해처럼 보였던 일이 기회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혈루증이 뭔지 아십니까? 이 여인은 12년 동안 출혈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자궁 근종 때문이었을 겁니다. 오늘날이었다면 아주 간단한 수술로 치료할 수 있었겠지만, 당시 그 여인은 계속해서 부정한 상태로 지내야 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누가는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라고 기록했습니다. 불치병이었던 거죠. 마가는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라고 전합니다. 누가는 의사였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기록하지 않았을 겁니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여인이 혈루증을 앓는다는 것은 나병을 제외하고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일이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치입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이런 혈루증이 꽤 흔했습니다. 유대교의 율법서인 탈무드는 이 병을 치료하기 위한 11가지 방법을 제시하는데, 일부는 강장제나 약초, 수렴제, 그러니까 지혈제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이것들이 효과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부분은 미신에 가까웠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여름에는 마 주머니에 겨울에는 면 주머니에 타조 알의 재를 넣어 가지고 다니는 겁니다. 더 황당한 건 흰 암당나귀의 배설물에서 발견된 보리알을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한다는 겁니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처방이었죠. 이런 미신적인 방법들로 병을 고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 병이 정말 끔찍했던 이유는 레위기 15장 25절에 나오는 말씀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율법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만일 여인의 피의 유출이 그의 불결기가 아닌데도 여러 날이 간다든지 그 유출이 그의 불결기를 지나도 계속되면 그 부정을 유출하는 모든 날 동안은 그 불결한 때와 같이 부정한즉 그의 유출이 있는 모든 날 동안에 그가 눕는 침상은 그에게 불결한 때의 침상과 같고 그가 앉는 모든 자리도 부정함이 불결한 때의 부정과 같으니 그것들을 만지는 자는 다 부정한즉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요.”

그러니까 레위기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유출병, 혈루증이 있는 여인은 부정한 여인이다. 이 여인이 만지는 모든 침상이 부정하고, 앉는 모든 것이 부정하고, 입는 모든 것이 부정하다. 이 여인을 만지는 모든 사람 또한 부정하다." 이 율법으로 인해 여인은 회당에서 쫓겨났고, 남편에게 이혼당했으며, 모든 인간관계에서 외면당했습니다. 이 불쌍한 여인은 12년 동안 철저히 고립되어 살았습니다. 혈루증으로 인한 의학적 문제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성전에도 가지 못했고 회당에도 가지 못했습니다. 남편이나 가족을 만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슬픈 처지의 여인이 예수님을 만졌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절실한 필요가 있었고,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인에게는 절실한 필요가 있었습니다. 모든 예의범절을 무시할 만큼 절박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요, 나도 그리스도께 나아가고 싶지만, 저 아래 내려가서 그 방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괜찮습니다. 아직 충분히 절박하지 않은 것뿐입니다. 정말 절박해지면 문이 잠겨있어도 부수고 들어갈 겁니다. 그 정도의 절박함입니다. 이 여인이 바로 그런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겁니다.

구약의 민수기 15장 37절부터 41절과 신명기 22장 12절을 보면, 유대인들은 옷에 치치트(zizith)를 달아야 했습니다. 이 치치트(zizith)는 히브리어입니다. 한국어로는 '옷술'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헬라어로는 크라스페돈(kraspedon)이라고 하는데 '술'을 의미합니다. (먹는 술, 마시는 술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했습니다. 옷에 파란 실을 섞어 짜 넣고, 밝은 파란색 술 네 개를 달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술을 짤 때 특별한 방식이 있었습니다. 실을 일곱 번에서 여덟 번을 감았습니다. 감는 횟수에도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어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제쳐두고 전체적인 의미를 보자면, 이 술에는 하나님의 말씀, 신실함, 말씀에 대한 충성, 그리고 주님께 대한 거룩함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어디를 가든 세상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옷을 입고 벗을 때마다 이것을 보면서 자신을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이와 비슷한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작은 십자가나 물고기 장식을 달고 다닙니다. 이것을 달거나 볼 때마다 자신이 누구에게 속했는지를 떠올리게 되는데, 당시 유대인들에게 치치트가 바로 그런 의미였습니다.

물론 그것은 당시에 거룩함을 나타내는 표시였습니다. 마태복음 23장 5절은 바리새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옷술이 길수록 더 거룩하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흥미로운 점은 유럽에서 유대인들이 박해를 받던 시기에도 이것을 계속 착용했는데, 다만 속옷에 달아서 착용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정통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 두르는 천을 보면 작은 파란색 옷술이 달려 있습니다.

주님께서 군중 사이를 지나가실 때 그 옷술이 뒤에서 살짝 흔들렸을 겁니다. 그리고 21절을 보면 정말 흥미로운 부분이 나옵니다. "이는 제 마음에," 헬라어 원문에는 '계속해서'가 있습니다,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여인은 군중을 비집고 나아가 마침내 예수님의 옷술을 잡을 때까지 이 말을 계속 반복했습니다. 여인이 옷술을 잡는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즉시 치유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자발적으로 하신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은 아버지의 뜻과 능력에 따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 직접 관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라고 물으셨던 겁니다. 예수님이 누가 만졌는지 아시기도 전에 여인은 이미 치유되어 있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종합해 보면, 여인이 예수님의 옷 가, 그러니까 옷술을 잡는 순간 즉시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야이로의 집으로 향하던 군중의 움직임 속에서, 그 여인이 옷술을 잡는 순간 마치 영화처럼 모든 것이 멈추고 초점이 흐려지면서 단 두 사람만 보입니다. 바로 그 여인과 예수님입니다. 다른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이 "누가 나를 만졌느냐?"하고 물으시니 제자들이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지만 주님은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인에게는 분명히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겉옷만 만져도"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완벽하게 성숙한 믿음은 아니었죠"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맞습니다. 오히려 미신에 가까웠습니다. 마법처럼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이 그런 식의 믿음에는 응답하지 않으실 텐데..."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겨자씨만한 믿음으로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주님은 회당장의 다소 이기적인 불완전한 믿음도, 이 여인의 다소 미신적인 불완전한 믿음도 받아들이시고 진정한 구원의 믿음으로 이끄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여인을 그대로 보내지 않으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했다면 단순히 미신적인 경험만 기억했을 테니까요. 예수님은 여인을 더 깊은 관계로 이끄시고자 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여인이 자신의 믿음으로 치유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으로 치유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단지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느끼셨다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믿음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도 치유하셨습니다. 이렇게 묻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영어 성경에는 예수님이 네 믿음이 너를 치유하였다고 나와 있는데요?" 여기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사용된 헬라어 단어를 보면, 일반적인 치유를 의미하는 '이아오마이(iaomai)'가 아닌 '소조(sodzo)'입니다. 이 단어는 '구원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여인의 믿음이 여인을 구원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모든 곳에서 기적을 행하시고, 모든 사람의 모든 질병을 치유하셨지만, 오직 믿음이 있는 자들만을 구원하셨습니다. 물론 믿음이 없는 자들도 치유하셨는데, 우리가 앞서 본 백부장의 하인처럼 분명 아무런 믿음이 없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제가 주목하는 것은 특별한 단어의 사용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 모두에서 '구원받다'라는 의미의 '소조(sodzo)'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저는 여인의 믿음에 구원의 요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붙잡고 싶어했고, 어떤 면에서는 미신적인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거기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여인을 드러내셨고, 구원하셨습니다. 회당장은 이기적인 동기를 가지고 있었고, 여인은 미신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둘 다 구원하셨습니다. 이는 "주여 제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저를 도와주소서"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작은 믿음을 가진 저를 이대로 받아주시고 구원에 이르는 믿음으로 이끌어주소서. 예수님은 항상 변덕스러운 군중이 밀치는 것과 진실된 영혼이 붙잡는 것의 차이를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차이를 아셨고, 여인이 자신을 만졌을 때 느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분이십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언제나 가까이 계시고, 우리가 만질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오늘 아침에 말씀드린 것처럼 말입니다.

모든 근심과 걱정을 자비의 보좌 앞으로 가져가라.

그곳에 두고 오라.

주님께서 감당하시지 못할 짐은 없으니.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의 보좌로 가져가십시오. 이 이야기에는 더 많은 것이 있습니다. 사실 이제 겨우 시작일 뿐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예수님이 우리 가까이에 계시고, 만날 수 있고, 손길을 내미실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드리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상황에 대한 깊은 절망과 절박함이고, 다른 하나는 크나큰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믿으십니까? 자신의 삶을 돌아보니 부족한 것이 보이고,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싶으신가요? 누가 그것을 변화시키는지 보십시오. 제가 시를 한편 읽겠습니다.

혈루증 여인처럼, 주님, 저도 나아가고 싶습니다.

병들고 죄 지은 모습으로, 홀로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다른 이들에게 말할 수 없는 마음을,

주님만이 아시는 이 간절함을 갖고 나아갑니다

도우소서, 은혜로운 주님,

주님의 눈만이 지나간 세월의 흔적을 보실 수 있나이다

사람의 도움으로는 안 되오나,

주님은 제 상처를 고치시고 눈물을 닦아주실 수 있나이다

하나님, 제가 주님의 구원의 능력을

영혼 깊이 느낄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시련이 닥쳐와도, 모든 이가 알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를 온전하게 하셨다는 것을

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곁에 계십니다. 예수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움직이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의 삶에 손길을 내미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얼마나 감사한지요. 친히 이 세상에 오셔서 함께 거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세상을 만들어 놓고 떠나버린 이신론자들의 신이 아니심에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이때에, 언젠가는 이 저주가 끝날 것이라는 소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젠가는 더 이상 고통도, 슬픔도, 질병도, 눈물도, 죽음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 이것을 몸소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를 일으키실 수 있는 주님의 능력을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사람들과 함께하시는지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다가갈 수 있는 하나님이시며,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돌보시고, 섬세하게 살피시고, 사랑과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갈급한 필요를 느낀 저희는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왔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자리에 함께한 이들 중에서 아직 채워지지 않은 필요가 있는 분들, 고통과 아픔을 느끼면서도 아직 주님께 나아오지 못한 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님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작은 믿음이 구원의 믿음으로 자라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우리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채워 주옵소서. 방금 불렀던 찬송가처럼,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저희는 알고 있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들어야 할 이들에게, 주님께서 찾아가실 것이며 영원하고 풍성한 생명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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