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8장을 펴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주부터 8장 연구를 시작했죠. 마태복음 연구는 여러 가지 면에서 흥미롭습니다만, 특히 계속 생각나는 한 가지가 있다면, 예수님께서 세상을 다니시면서 사람들의 필요와 삶을 어루만지시는 모습을 보면 볼수록 정말 신선하고 가슴이 벅차오른다는 겁니다. 다니엘의 광대하고 광범위한 예언을 공부하는 것과는 다른 느낌입니다. 사도 바울의 논리정연한 신학적 글이나 히브리서 저자의 역사적이고 언약적인 접근과도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가운데서 행하시는 모습을 보면 아주 신선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실제적인 무언가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태복음 연구를 통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죠. 8장부터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특별히 8장에서 주님이 자신의 권세를 나타내 보이신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5장부터 7장에 걸쳐서 기념비적 설교를 전하신 후에 주님은 피할 수 없는 질문에 직면하셨습니다. “무슨 권위로 그렇게 말하는가?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어디에서 왔는가?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어지는 장들에 나옵니다. 실제로 8장과 9장은 예수님이 "나는 하나님이다. 하늘에서 왔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권세를 다 가지고 있다"라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람 가운데 오셨다는 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수 없는 일련의 놀라운 기적들을 통해서 하나님으로서의 초자연적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그래서 마태는 왕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계속해서 구체적으로 증거하면서, 8장과 9장에서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확증을 제시합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이 자신이 말씀하셨던 그 가르침들을 선포할 만한 권한을 갖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신분이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의 권위를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 사실 말고는 이러한 일련의 기적들에 부합하는 다른 어떤 설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배경을 간단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질병이 세상 곳곳에 퍼져 있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온 세상은 질병으로 가득했습니다. 사실상 의학이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질병을 제대로 치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저절로 낫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기에, 언제나 주변에는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환자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질병을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질병으로 인한 고통과 괴로움만 있을 뿐 이를 덜어줄 특효약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도시, 아니 나라 전체를 완전히 초토화시키는 전염병을 매우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지금보다 불치병이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세상은 말 그대로 질병으로 가득했습니다. 사람들의 수명도 매우 짧았죠. 아주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20대에 병에 걸려 죽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 시대와 구약시대에 존재했던 많은 질병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마주하셨을 질병의 전체적인 모습을 이제 보여드리겠습니다. 여러 가지 질병을 포함할 수 있는 큰 범주입니다. 먼저 성경에는 위축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근육이 혈액을 통해 전달되는 영양분을 흡수하지 못해서 근육이 점점 얇아지고 약해지는 근위축증 같은 질병이 있습니다. 위축증 중에는 또 장에서 시작해서 중추신경계를 공격하고 마비와 위축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성 질병인 소아마비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실명에 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매우 흔한 일이었습니다. 임질에 걸린 산모가 출산할 때 아이의 눈에 균이 들어가서 실명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트라코마로 인해 실명하기도 했는데, 비위생적인 환경 때문에 발생합니다. 또 강한 햇빛, 뜨거운 열기, 모래바람으로 인해 실명하기도 하고, 전쟁이나 사고로 다쳐서 실명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종기로 고생했습니다. 큰 종기와 농양, 림프선 감염 등이 포함됩니다. 청각장애도 있었습니다. 선천적인 결함인 경우도 있지만, 상처나 부상, 중이나 내이가 감염되어 생기는 청각장애도 있었습니다. 또 부종도 나오는데, 여러 원인으로 인해서 체액이 제대로 순환하지 못해 생기는 질병입니다. 성경에는 말 못하는 자인 벙어리에 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이질도 나오는데, 아메바나 박테리아, 기생충으로 인해 결장과 소화기관에 생기는 병이죠. 간질도 있었는데, 발작, 소발작, 대발작 등이 포함됩니다. 출혈 문제도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섬유종이나 암으로 인한 출혈이 나옵니다. 실어증의 일종인 조음장애와 말더듬 장애도 나옵니다. 소화불량도 나오는데, 아마도 더 심각한 위장 질환이었을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염증은 아마도 연쇄구균과 포도상구균 감염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쥐들이 옮기는 전염병도 나옵니다. 피부병도 나옵니다. 지난주에 몇 가지를 말씀드렸죠. 종양, 그러니까 암도 나오는데, 종류가 매우 다양했을 겁니다. 궤양도 나옵니다. 신약성경에는 특히 세 가지 질병이 나오는데, 마태복음 8장의 세 가지 기적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나병, 중풍병, 열병입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예수님 시대에는 수많은 질병이 있었지만 마땅한 치료법이 전혀 없었습니다. 질병을 다룰 방법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질병을 피할 수 없는 불행한 운명으로 여길 뿐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오셔서 인간의 가장 큰 고통인 질병의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지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예수님께서 팔레스타인에서 질병을 완전히 몰아내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이 기념비적인 행위의 의미는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질병 치료가 가능한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아직도 치료가 불가능한 질병들이 있습니다. 암이나 심장병이 언젠가는 우리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지만, 대부분의 다른 질병들은 이미 정복했습니다. 심지어 죽음에 이르는 질병들도 약물로 어느 정도 통증을 완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런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치유의 능력으로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난주에 보았듯이 예수님이 계속해서 "내가 행한 일을 보고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어떻게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행하신 이 모든 엄청난 치유를 말입니다.
마태복음 12장 15절입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많은…" 찾아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몇 구절만 읽어드릴 겁니다. “…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마태복음 14장 14절에도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예수님은 병자들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온 모든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고치셨다고 말이죠. 예수님은 팔레스타인에서 질병을 몰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소위 치유자라고 하는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르십니다. 제가 쓴 책에 은사주의자들의 치유에 대해 다룬 장이 있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의 치유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주요 내용을 다시 한번 짚어보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한마디 말씀, 한 번의 손길로 치유하셨습니다. 별다른 기교나 과장된 행동이나 화려한 연출 같은 것 없이 오직 말씀과 손길로만 치유하셨습니다. 그저 말씀하시거나 손을 대실 뿐이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치유는 즉각적이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일어났죠. 마가복음에 나오는 혈루병 여인도 즉시 나았고, 열 명의 나병환자들도 그 자리에서 치유되었습니다. 누가복음 5장을 보면 나병환자의 병이 즉시 떠났다고 하고, 베데스다 못가의 중풍병자도 즉시 일어났고, 눈먼 사람도 눈을 씻자마자 곧바로 보게 되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치유는 완벽했습니다. 회복 기간이라는 게 전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35년 동안 한 발자국도 못 걸었던 사람의 다리를 고치시고는 "일어나 걸으라"고 하셨을 때, 보통은 다리가 나았다 해도 걸을 수가 없었을 겁니다. 재활 치료가 필요했겠죠. 하지만 예수님의 모든 기적에는 재활 기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한 번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즉각적이고 완벽했습니다.
넷째로, 예수님은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치유하셨습니다. 어려운 환자는 제외하고 쉬운 환자만 고르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정말 모든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요즘 소위 치유자들처럼 실망한 사람들을 주욱 줄만 세워놓고는 그냥 돌려보내는 일이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4장 40절입니다.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다섯번째로, 예수님은 정말 심각한 병을 고치셨습니다. 불구가 된 다리, 마른 손, 눈먼 사람, 중풍병 같은 누가 봐도 기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그런 치유였습니다. 허리 통증이나 간단한 기능 장애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섯째로, 예수님이 결정적으로 사람들과 달랐던 점은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 모든 일을 통해서 우리가 꼭 알아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일은 역사상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 놀라운 기적을 보면서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임을 알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불신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죄의 깊이를 보여줍니다.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는 명백한 증거 앞에서도 믿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럼에도 마태는 예수님의 신성을 다시 한번 보여주면서 바리새인들을 비판합니다. 마태복음 8장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수천 개의 기적 중에서 세 가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1절에서 4절까지 나오는 첫 번째 기적, 불쌍한 나병환자 이야기를 살펴봤습니다.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나병환자는 사회에서 가장 천대받는 자들이었습니다. 가장 무서운 병이자, 가장 보기 흉하고,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질병이었습니다. 게다가 종교적으로도 부정한 존재로 여겨져서, 죄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병 때문만이 아니라, 죄를 상징하는 존재로써 사회에서 배척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귀에는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이야기였습니다. 마태가 복음서에 기록한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감히 나병환자에게 관심을 가질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치료가 필요했던 다른 바리새인도 많았을 텐데, 왜 하필 이렇게 비참한 처지에 있는 버림받은 사람을 치료하셨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이 사회의 가장 낮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셨는지 그 놀라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오만과 교만 앞에서 바리새인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들을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나라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넘어 낮은 자들에게까지 미친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으려 했던 사람들을 품으시려 손을 내미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리새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아주 경건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절망에 빠지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만지셨고, 나병환자는 치유를 받았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나병환자의 네 가지 놀라운 특징을 기억하십니까? 첫째로, 나병환자는 확신을 가지고 왔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나병환자라는 것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사회적 낙인과 부끄러움을 떨쳐버리고 절박한 마음으로 찾아왔습니다. 둘째로 경외심을 가지고 왔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경배했습니다. 셋째로 겸손한 마음으로 왔습니다. "주여 원하시면"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믿음으로 왔습니다.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이처럼 절박한 마음으로 경배하며, 겸손하게,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사람은 진정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병환자의 치유는 구원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에게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로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리라”라고 하셨고, 둘째로 "그들에게 입증하라"라고 하셨습니다. 구원받은 후에 우리 삶에서도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순종해야 하고 증거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인간 사회의 가장 낮은 자들을 품에 안으셨습니다. 남을 경멸하며 정죄하기 좋아하던 바리새인들의 교만에 대한 강력한 책망이었습니다.
비참한 나병환자 이야기에서 오늘의 이야기로 이제 넘어가 보겠습니다. 5절에 나오는 존경받는 사람입니다. 유대인에게는 역시나 버림받은 자로 여겨졌을 겁니다. 이방인이었기 때문이죠. 더욱이 자신들의 소중한 땅을 침략하고 점령한 로마군의 일원인 백부장이었습니다. 보통이라면 나병환자만큼이나 미움을 받았겠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백부장의 부탁을 듣고 하인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다시 한 번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하나님 나라는 밑바닥에 있는 자들과 버림받은 자들, 또한 이방인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이죠. 바리새인들이 그어놓은 경계를 훌쩍 뛰어넘는 겁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많은 주석가들은 이 세 가지 기적이 모두 같은 날에 일어났다고 봅니다. 설교를 마치고 산에서 내려와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 모든 일이 같은 날에 일어났을 것으로 보는 데는 그럴 만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바다 북쪽에 있던 아름다운 도시였는데, 예수님의 저주로 인해 지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가 가본 곳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지금은 폐허만 남아있습니다. 예수님이 저주하셨기 때문입니다. 결코 다시 재건되지 못했습니다. 주변부에만 도시가 남아있죠. 예수님은 이 아름다운 작은 마을에 거처를 정하고 머무르셨는데, 아마도 베드로의 집이었을 겁니다. 베드로의 집이 가버나움에 있었으니까요. 오늘날까지도 폐허로 그 흔적이 남아있는 집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곳이 베드로의 집이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마태는 곧바로 사실관계를 전달하고, 자신의 목적에 따라 백부장과 예수님 사이의 상호작용을 설명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누가복음 7장에서 좀 더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굳이 찾아보실 필요는 없지만, 누가복음의 몇 가지 세부사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가는 백부장이 직접 예수님을 찾아가지 않고, 유대인들을 보내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합니다. 즉,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통해서 백부장과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백부장은 자신이 그리스도 앞에 설 자격도 없고, 그리스도를 자신의 집에 모실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직접 가지 않고 유대인들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백부장을 대신해서 예수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먼저 백부장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신약성경에 백부장이 등장할 때마다 항상 선한 인물로 그려진다는 것 여러분 알고 계셨나요? 정말 흥미롭습니다. 물론 악한 백부장도 많았겠지만, 주님께서는 마치 의도적으로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미움받던 사람들을 선택하셔서 선함, 믿음, 구원의 은혜를 보여주는 예시로 삼으신 것 같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스라엘을 넘어 확장될 것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십자가 처형 때 있었던 백부장이든, 고넬료든, 아니면 이 사람이든, 성경에 나오는 백부장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 이들 대부분이 결국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방인, 특히 로마 군인을 절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당시의 배타적인 분위기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말씀드리자면, 이방인이라는 신분도 쉽지 않았지만 로마 군인이라는 신분은 더욱 험난했습니다. 거기에 더해 한 가지가 더 있었는데, 바로 이것입니다. 로마 점령군의 군인들은 로마에서 파견되지 않았습니다. 점령지나 그 주변 지역 출신 중에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팔레스타인에서 그 지역의 비유대인들을 찾아내서 로마군에 입대시켜 훈련시켰다고 합니다. 가버나움의 이 백부장은 분명히 안티파스의 군대에 속한 군인이었을 겁니다. 이 지역에 살던 비유대인이었다면 사마리아인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방인 중에서도 사마리아인은 훨씬 더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이방인과 결혼한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유대인 혈통을 떠난, 당시 사회에서 가장 큰 편견과 차별을 받던 이방인 혼혈이었습니다.
자, 여기 이방인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방인 중에서도 최악의 부류인 사마리아인입니다. 사마리아인 중에서도 가장 최악의 부류인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로마 점령군의 일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도대체 왜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런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까?"라고 말했을 겁니다. 바로 그게 핵심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디까지 미치는지에 대한 이해가 없었습니다. 자기들에게만 국한되어 있었죠. "우리끼리만, 더 이상은 없어, 문 닫아." 이게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문을 활짝 여셨습니다.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일 때까지 미워했습니다. 하지만 이 백부장은, 누가가 전하는 것처럼, 유대인 대리자를 통해 예수님께 나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6절에서 "주여,"라고 했는데, 여기서 '주여'는 단순히 '선생님' 이런 뜻이 아닙니다. 이 '주여'라는 말에는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백부장의 깊은 이해가 담겨 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미로 이 말을 사용했다고 봅니다. “주여 내 하인이,” 여기서 백부장은 헬라어로 '파이스(pais)'라는 단어를 썼는데, ‘아이'라는 뜻입니다, "아이가 집에서 '파랄뤼티코스(paralutikos)'로 앓고 있습니다." 중풍으로 몹시 고통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파이스(pais)'는 아이를 뜻하는데, 누가는 '둘로스(doulos)', 그러니까 ‘종’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러면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이 아이는 백부장의 아이였을까요, 아니면 종이었을까요? 그 답은, 당시에는 어린 종, 그러니까 소년 하인을 집에 두는 것이 아주 흔했습니다. 이 경우도 소년 하인, 소년 종이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백부장이 "제 소년 종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라고 말했던 겁니다. 소아마비였는지, 신경 계통이나 뇌의 질환이었는지, 아니면 종양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만, 마비와 함께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감동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저는 이 백부장이 참 좋습니다. 우선 하인, 그러니까 노예를 진심으로 걱정했다는 점이 좋습니다. 당시의 로마 세계의 다른 모든 사람들과 구별되는 모습이죠. 로마 제국에서 노예의 목숨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고통을 받든 말든, 살든 죽든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노예는 그저 하찮은 존재였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생물에 대해서는 우정도 정의도 있을 수 없다. 말이나 소나 노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주인과 노예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도 없다. 노예는 살아있는 도구일 뿐이다. 도구가 살아있지 않은 노예인 것처럼 말이다."
노예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없었습니다. 로마의 법률 전문가 가이우스(Gaiu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인이 노예의 생사를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로마의 법이 이랬습니다. 노예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죽여버리면 그만이었습니다. 농업에 관해 여러 권의 책을 쓴 로마의 저술가 바로(Varro)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노예와 짐승과 수레의 유일한 차이는 노예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뿐이다" 말을 하느냐 마느냐가 유일한 차이점이랍니다.
또 다른 로마 저술가 카토(Cato)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이런 조언을 했습니다. "가축 중에 팔 만한 것이 있는지 살펴보라. 늙은 황소, 흠 있는 소, 흠 있는 양, 양모, 가죽, 낡은 수레, 오래된 도구, 늙은 노예, 병든 노예를 비롯한 쓸모없는 것은 모두 팔아버리라." 이처럼 로마인들은 노예를 물건으로 취급했습니다. 하지만 이 백부장은 달랐습니다. 백부장은 자신을 위해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제 어린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정말 훌륭한 이방인이지 않습니까? 정말 멋진 이방인입니다.
그거 아십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이런 부탁을 전했다는 것만 봐도 백부장이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보통 사마리아 출신 이방인 백부장이 유대인들에게 "부탁 좀 할게요"라고 했다면, "뭐라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저리 비키세요" 이렇게 했을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왜 유대인들이 이 사람을 위해 예수님께 찾아왔을까요? 누가복음 7장을 보면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 나옵니다. 들어보십시오.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유대인들, 그것도 유대인 장로들이 이 일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백부장의 하인이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아니 어떻게 이방인에게 합당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가 바로 나옵니다.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결국 경제적인 문제로 귀결됩니다. 백부장이 큰 투자를 한 겁니다. 유대 민족을 사랑했기에 유대인을 위해서 회당을 지었습니다. 이제 이 백부장에 대해 더 잘 아시겠죠? 백부장은 유대교의 진실성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고넬료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이었던 겁니다. 유대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투자를 했던 겁니다. 유대 민족을 사랑해서 가버나움에 회당을 지어주었습니다. 저는 가버나움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남아있는 회당 터를 방문했죠. 사람들 말로는 남아있는 기초가 그 당시의 것이라고 하더군요. 어쩌면 백부장이 지은 것일 수도 있겠죠. 백부장이 바로 이 회당을 지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호의를 베풀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나서서 "주님, 그를 위해 꼭 이 일을 해주셔야 합니다"라고 부탁을 드린 겁니다.
흥미로운 점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모두가 예수님이 병을 고치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완고했기 때문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을 메시아와 구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이스라엘을 사랑했던 훌륭한 이방인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스라엘을 사랑해야 합니다. 진심으로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입니다. 아마 저만큼 유대인들을 사랑하는 사람도 없을 겁니다. 모두 제가 가장 아끼는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 바울, 디모데에 이르기까지요. 저는 말씀을 연구하면서 이방인들보다 유대인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이 백부장도 유대인을 사랑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했기 때문에 회당도 지어줬습니다. 분명 선한 이방인이었고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노예도 사랑했습니다. 또 매우 겸손했습니다. 자신이 감히 예수님을 뵐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직접 나아가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유대인의 관습을 잘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오시는 것도 원치 않았습니다. 유대인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관습을 어기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특이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의 주방용품을 부정하다고 여겨서 이방인의 집에서는 먹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이방인들이 낙태한 아기를 집 하수구에 버린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이 시체로 인해 부정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랍비들이 유대인들을 이방인들과 분리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이상한 규칙들이 이렇게 많았는데도, 백부장은 이런 의례적인 관습까지도 존중하려 했습니다.
이처럼 백부장은 겸손하고, 사랑이 많고, 감수성이 풍부했습니다. 진정으로 팔복에 나오는 복 있는 자의 태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볼 때 6절에서 백부장은 온 마음을 담아 "주여"라고 말했음이 틀림없습니다. 의심스러우시다면 10절을 보시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 중에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신 사람들 중에 가장 위대한 믿음을 가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라고요? 어떤 의미일까요?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에 대한 실체를 믿는 믿음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본질입니다.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믿음이 바로 그러한 믿음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백부장이 "주님"이라고 말했을 때,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큰 책망이 되었을까요? 사마리아 출신의 혼혈인이자 로마의 이방인 군인에게 예수님께서 "내가 본 사람들 중에 가장 위대한 믿음을 가졌도다"라고 하셨으니 말이죠. 정말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백부장은 자신의 필요를 위해 구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라고 말했을 뿐이죠. 6절 말씀이 아름다운 이유는 백부장이 그 어떤 요청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저 단지 상황을 알려드렸을 뿐입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백부장은 스스로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백부장의 기도는 단순히 상황을 전하는 기도였습니다. "주님, 이러한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주님 앞에 이 필요를 내어놓습니다. 주님의 주권과 뜻을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인은 무슨 병에 걸렸던 걸까요? 중풍이었습니다. 척수, 뇌, 신경의 손상이나 질병으로 인해 감각이나 근육 기능이 손상되는 병입니다. 정확히 원인은 알 수 없지만, 그로 인해 하인은 곧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7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예수님은 백부장이 보낸 유대인들에게 이 이방인의 집에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백부장의 집으로 가서 그 아이를 고치시겠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모두 함께 백부장의 집을 향해 가고 있을 때에, 백부장이 예수님과 유대인 무리가 오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존재 앞에 있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느꼈고, 집에 들어옴으로써 율법을 어기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아이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서 집 밖으로 데리고 나올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8절에서 백부장은 급히 전령을 보냅니다.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주여, 저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제 집으로 모실 수 없습니다. 주님을 제 앞에 모실 수 없습니다. 저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이 참 좋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하나님께 일종의 호의를 베푸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기조차 합당하지 않은 존재입니다. "저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백부장은 진정한 사나이였습니다. 백부장이란 자리는 갑자기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군대에서 계급을 하나하나 올라가야 오를 수 있는 자리입니다. 백 명의 병사들을 이끌어야 합니다. 그럴 정도로 강인한 사람입니다. 백부장은 훈련 교관이었고, 강인했고, 전투에 능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온화하고, 겸손하며, 온유하고, 섬세하며, 사랑이 넘치는 부드러운 마음을 가졌다는 것이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그것도 모두 병든 하인을 위해서 말입니다.
백부장은 고넬료처럼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입니다. 8절 하반절에 그 믿음이 잘 드러납니다. 읽습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아마도 궁금하실 겁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았을까요?" 보십시오, 백부장은 주변 상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을 지켜보았던 거죠.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냥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굳이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권위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면 됩니다." 저는 백부장이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알았다고 믿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믿습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리고 9절에서는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백부장의 말에 담긴 뜻은 이렇습니다. "저는 주님의 권위를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 주변에는 '당신이 대체 무슨 권위로 이러는 거요? 당신이 누구이기에? 무슨 자격으로 이렇게 말하는 거요?'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진정한 권위를 가진 분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하신 일들을 보았고, 주님 말씀의 능력을 목격했습니다. 저는 권위가 무엇인지 잘 압니다."
이제 9절의 논리 전개 방식을 보십시오. 작은 것에서 더 큰 것으로 전개하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무슨 뜻으로 이렇게 말한 걸까요? "저는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이고, 권위를 이해하고, 권위를 행사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권위 아래에도 있지 않는 우주의 최고 권위자이신 주님께는 얼마나 더 큰 권위가 있겠습니까?"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저는 남의 수하에 있는데도 제 아래 있는 군사에게 명령해서 일이 이루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권위 위에 계시니 말씀만 하시면 얼마나 더 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정말 대단한 믿음이지 않습니까? "오실 필요 없습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다음 구절은 정말 흥미롭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놀라게 하려면 정말 특별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모든 것을 보셨는데도 말입니다. "예수께서 놀라셨다"라는 말은 정말 대단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으로서, 그러니까 예수님의 인성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이 이방인의 믿음에 진정으로 놀라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놀라셨습니다.
사실, 이 일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의 예고편입니다. 왜냐하면 이 백부장처럼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 바로 이 자리에도 이런 믿음을 가진 분들이 계시죠. 유대인들에게는 큰 질책의 말씀입니다. 10절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그 의미는 이렇습니다. "너희가 내게 이런 믿음을 보였어야 했다. 너희는 언약의 백성이고, 약속의 백성이며, 유업을 받을 백성이다. 너희가 이런 믿음을 가졌어야 했는데,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종류의 믿음을 찾지 못했다." 위대한 믿음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방인을 칭찬하십니다.
물론 예수님은 유대인 사이에서도 믿음을 발견하셨습니다. 분명합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살펴봤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믿음을 발견하셨지만, 이런 균형잡힌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이만큼의 덕이 있는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사랑, 애정, 사려 깊음, 겸손, 감수성을 모두 갖추고,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과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라는 확신을 가진 그런 믿음 말입니다. 이런 믿음은 제자들에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도 "나는 믿지 아니하겠노라"라고 말했습니다. 빌립은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라고 요청했고, 예수님은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라고 대답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이스라엘보다 더 큰 믿음을 갖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의미 깊은 예표입니다. 들어보십시오.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실 아닙니까? 교회는 주로 이방인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메시아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11절에는 가장 충격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잘 들으십시오, “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잠깐 멈추겠습니다.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나라가 올 것입니다. 미래에는 천년왕국과 영원한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그 나라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놀라운 약속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들은 언약의 백성이었고, 하나님께서 이들을 통해 언약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미래를 향한 계획에는 본질적인 유대성이 있으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위대한 믿음의 언약을 상징합니다. 복음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해 왔고, 구원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해 왔습니다. 우리는 셈의 장막에서 복을 받았고,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복이 아브라함을 통해 왔기에, 우리도 어떤 의미에서는 같은 언약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는 유대적인 특성이 있지만, 11절에서 말씀하시는 핵심은 이겁니다.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여기서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바로 동쪽과 서쪽에서 오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을 중심선으로 해서 동쪽과 서쪽으로 뻗어나가면 이방 세계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방인들로 가득 차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믿기 힘들겠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정말 충격적인 이야기였죠. 자신들이 받아온 모든 가르침과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가 오기 전에 모든 이방인들이 멸망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맞습니다. 제2바룩 29장 같은 외경을 보시면, 메시아와 함께하는 유대인들의 큰 잔치가 어떤 모습일지 그려져 있습니다. 이 외경의 내용은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을 잘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이 큰 잔치에서 베헤못과 리워야단을 먹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베헤못은 코끼리를, 리워야단은 거대한 고래 같은 바다 괴물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코끼리와 고래를 먹는, 상상도 못할 엄청난 잔치를 벌인다는 겁니다. 무한정의 어마어마한 음식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모든 잔치 중 최고의 잔치가 될 것입니다. 오직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메시아의 성대한 잔치에서 이방인들이 자기들과 같은 식탁에 앉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죠. 게다가 음식이 코셔 규정, 그러니까 음식법에 맞아야 하는데, 이방인들이 오면 그것부터가 문제가 될 테니까요. 하지만 지금 하나님 나라는 이방인들도 포함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2천 년이 흐른 지금, 우리가 교회에 있습니다. 교회는 이방인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올 천년왕국에서 우리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함께 앉게 될 것입니다.
12절의 말씀을 보면 더욱 충격적입니다.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여기서 말하는 이들은 누구일까요?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는 예루살렘 백성들을 향해서 "너희는 하나님 나라의 자손이다"라고 선포했습니다. 계속 읽습니다.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정말 강력하고 충격적이며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의 자손이라 불린 이유는 본래 이스라엘이 약속의 상속자였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과 특권이 주어졌죠. 하지만 정작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유대인들은 쫓겨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단순히 혈통만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라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8장을 보면 유대인들이 이 문제로 예수님과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라며 자부심에 차서 주장합니다. 마치 모든 것이 완벽하게 해결된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정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행한 것처럼 행동했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너희는 오히려 나를 죽이려 하고 있다"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때문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얼마나 증오했는지 모릅니다. 천국의 자녀들, 하나님 나라의 본 자손들이 쫓겨날 것이라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불신으로 인해 상속권을 잃었고, 약속도 무효가 되었으며, 하나님 나라의 권리도 상실했습니다. 그러고서도 교만하게 들어가겠다고 요구한다면 오히려 쫓겨나게 될 겁니다. 어디로 쫓겨날까요? 12절에 있습니다. 바로 '바깥 어둠'입니다. 유대인들의 사상을 반영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말씀하신 거죠. 랍비들도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탈무드에는 "게헨나의 죄인들은 어둠으로 덮일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죄인들이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곳이 바로 너희가 가게 될 곳이다. 죄인들이 가는 곳, 하나님의 임재의 빛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의문을 가집니다. 지옥이 어둠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불의 장소라고 하니, 빛도 없이 어떻게 불이 있을 수 있냐는 거죠. 이것이 바로 지옥의 초자연적인 특성입니다. 고통의 불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완전한 어둠이 존재합니다. 영원한 형벌을 위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특별한 현상입니다. 바깥 어둠은 천국이 실제 장소인 것처럼 하나의 실제 장소입니다. 그리고 그곳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는 12절 마지막 부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어둠이 가져오는 결과입니다. 모든 행복과 기쁨을 잃어버리고, 절망 속에서 분노하며, 영원한 어둠 속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울며 이를 갈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42절입니다.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13장 50절입니다.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22장 13절입니다.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24장 51절입니다.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예수님께서 이 모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은 사랑과 따뜻한 마음, 꽃 같은 것들만 말씀하셨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제게 "목사님 말씀이 너무 세요"라고 하지만, 사실 제가 한 어떤 설교도 예수님만큼 세지 않았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그렇게 센 말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얼마 전에 남침례교단 총회장인 베일리 스미스(Bailey Smith)가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고 말해서 언론의 뭇매를 맞았습니다만, 그 말이 맞습니다. 하나님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기도는 듣지 않으십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에 AP통신(Associated Press)에서 저를 인터뷰하러 왔습니다. 대량 살인에 관한 전국적인 기사를 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왜 대량 살인이 일어나나요?"라고 묻더라구요. 신학적 관점을 듣고 싶어했습니다. 저는 간단히 "사악하고 비참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라고 묻길래,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자기 뜻대로 내버려두면, 바로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라고 설명했습니다. 저는 이어서 "성경은 악한 사람들이 점점 더 악해질 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한 명을 죽이더니, 그 다음에는 수십 명을 죽였고, 이제는 기회만 된다면 수백 명도 죽이려 할 것입니다. 악한 사람들이 점점 더 악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제약을 풀어버리고 인간의 타락을 방치하면,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 당연한 결과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10분이면 충분했을 인터뷰가 1시간 15분이나 걸렸는데, 마지막에는 좋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매우 친절하게 좋은 질문들을 해줬던 그 여기자는 "이런 답변들 때문에 사람들이 선생님을 이상하게 볼 수도 있을 텐데, 왜 이런 이유들이 맞다고 그렇게 확신하시나요?"라고 묻더라고요. 저는 "아주 간단합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고, 그게 제게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니까요"라고 답을 했습니다. 기자는 "이제 이해가 되네요"라고 하더군요.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면 우리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비록 하나님 나라의 자녀일지라도 바깥 어둠 속으로 던져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물며 언약의 약속조차 모르는 이방인이 메시아를 거부한다면 그 결과는 얼마나 더 끔찍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 기적의 순간에 잊을 수 없는 설교를 하신 겁니다. 이제 13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예수님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도 된다. 하인이 다 나았다"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 어린 아이가 갑자기 치유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요. 작은 침대에서, 누워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뭘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다 나았어요"라고 말하는 모습을 말입니다. 백부장이 이 사건 이전에 그 정도의 믿음이 있었다면, 이후에는 얼마나 더 깊이 믿었을지 상상이 되십니까?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는 이 짧은 말씀을 우리도 주장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치유하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죠, 그렇죠? 하나님의 주권적인 택하심입니다. 예수님은 때로 믿음이 전혀 없는 사람도 치유하셨습니다. 사실, 성경은 그 어린 소년이 믿음을 가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과 이 이야기를 읽을 역사 속의 모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소년을 치유하셨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천국에 이 백부장, 어린 하인과 같은 이들이 더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아시겠습니까? "나는 나병환자들에게 손을 내밀고, 버림받은 이방인들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왜냐하면 내 나라는 특정 인종이 아니라, 믿는 자들, 모든 믿는 자들을 아우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완전히 절망하지 않도록 다음 두 구절에서 한 가지 치유를 더 보여주십니다. 아주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다른 복음서들을 보면 이날이 안식일이어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회당에 갔다고 합니다. 사실,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이 모든 일이 같은 날 일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베드로의 집으로 갔습니다. 우리도 그렇듯이, 제자들도 회당이나 교회에 갔다가 집에 와서 식사를 하곤 했는데, 이날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안드레와 야고보, 요한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합니다. 즉 베드로, 베드로의 아내, 야고보, 요한, 안드레, 그리고 예수님까지 여섯 명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장모님이 아프신데 어떻게 안식일 저녁 식사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죠? 장모님이 이럴 때 필요한 분 아니겠습니까?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을 겁니다. 전체적인 분위기도 무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부탁했다고 합니다. "저희와 함께 가셔서 장모님을 고쳐주시면 저희가 식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한 것이죠. 가장 중요한 일부터 하자. 왜 안되겠습니까? 섬기는 것에는 잘못된 것이 없으니, 장모님께도 섬길 기회를 드리는 것이 좋겠죠.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베드로는 결혼한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에서 바울이 말하기를, 베드로가 사역을 하면서 아내와 동행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한 말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아내가 베드로의 사역 여정 중 일부를 함께 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장모가 누워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매일 아침 일어나면 똑같은 기도를 했습니다. 일상적인 기도였죠. "제가 노예가 아니고, 이방인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것을 감사드립니다." 나병환자와 이방인과 여자를 같은 부류로 취급했습니다. 여성을 매우 낮게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여성을 치유하신 것 자체가 유대인의 전통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더구나 장모를 치유하셨다는 것은 유대인의 관념을 완전히 뒤엎은 일이었습니다. 15절입니다.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의학적으로 보면, 뇌 중앙의 시상하부가 체온을 37도로 유지한다고 합니다. 이 부위가 병들었거나 신체의 다른 부분에서 감염되어 열이 올랐을 수 있는데, 베드로의 장모의 경우는 그 지역에서 흔했던 말라리아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몸이 병과 싸울 때 체온이 올라가는데, 심하면 42도까지도 올라갈 수 있습니다. 정확한 체온은 알 수 없지만, 다른 성경 기록을 보면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심각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장모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예수님을 섬기기 시작한 겁니다. 치유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까요? 아마도 제자들이 한 번도 맛보지 못한 맛있는 베이글과 생선요리 등등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은 성 베드로의 물고기라고 부르는, 그 바다에서 잡은 생선요리였을 수도 있습니다.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겁니다.
이 이야기에는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베드로의 장모와 관련된 이 작은 기적이 특별한 이유는 이 여인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이 나병환자를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더군다나 이방인을 받아들이고,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제외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곧바로 유대인을 치유하시는 이 일을 행하셨는데,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 나는 이방인들에게로 향했다. 그렇다, 하나님 나라는 이방인들도 포함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결코 내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유대인도 치유할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로마서에서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원래의 뿌리와 줄기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접붙여졌지만, 이스라엘이 다시 한 번 복의 줄기에 접붙여질 날이 올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위한 날이 다시 올 것입니다.
저는 이 기적 속에서 그러한 의미를 발견합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즉시 치유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드러났습니다. 만약 이러한 일들 앞에서도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부인한다면,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믿음이 없기 때문이며, 믿음이 없는 이유는 여러분의 마음이 죄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마치 예수님과 함께 걸으면서 함께 하루를 보낸 것 같아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느껴집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의 먼지 나는 길을 걸으실 때 발에 묻은 먼지, 얼굴에 와 닿는 바람, 태양의 따뜻함이 우리에게도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 백부장의 가슴 가득한 기쁨과 어린 하인을 위한 간구를 우리도 느끼고 또 듣는 것 같습니다. 한 구석에서 바리새인들과 유대인 지도자들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고 애쓰고 있고, 자신들이 옹호하는 모든 것을 뒤엎으신 예수님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전전긍긍하는 모습도 보이는 듯 합니다. 가버나움에 있는 베드로의 작은 집에서 장모가 치유를 받았을 때의 기쁨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그 일을 행하셨는가 물으며 놀라고 감탄하는 제자들의 말도 들리는 듯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을 진정으로 예배하기 원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믿지 않은 채 떠나가는 사람이 한 명도 없게 하옵소서. 믿음이 주님이 주시는 선물임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 오늘 이 믿음을 주셔서 아무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겨 슬피 울며 이를 갈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 백부장이 주님의 능력을 믿었던 것처럼 그렇게 믿게 하옵소서. 우리도 베드로의 장모처럼 신실하게 하시며, 회복되어 일어나 섬기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도 주님의 손길로 나음을 받았고, 죄에서 고침을 받는 가장 큰 치유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섬길 수 있을 만큼 신실하게 하옵소서. 지속적으로 감사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감사가 줄어들지 않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를 만지시고 우리를 온전하게 해 주신 분을 섬기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또한 우리 모두의 마음을 주님께로 이끌어 주셔서, 필요가 있는 이들을 기도실과 상담실로 인도하사 주님 안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받게 하옵소서.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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