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 우리는 특별히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주 좋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이런 교제가 정말 필요합니다. 이야기하고, 함께 웃고,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보냈죠.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 오후 5시 기도 모임에서 어떤 자매님이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로 성도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 좋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믿는 자들과의 교제가 깊고 풍성해지면서, 이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성도의 교제를 기다리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과 교제하는 자리로 돌아가면 뭔가 부족한 것처럼 느낀다고 합니다. 그리고 솔직히 뭔가 모를 두려움을 느낀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신이 그런 두려움을 느끼게 될 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답니다. 사실 이 자매님의 이야기는 제가 오늘 밤 여러분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도의 교제에서 기쁨을 누립니다. 정말 놀랍고, 보람 있고, 풍성하고, 감격스럽습니다. 이런 교제가 정말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교제에는 또 다른 면이 있습니다. 이 커다란 돌벽 바로 바깥에 있는 현실이죠.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부모나 형제나 자매, 혹은 남편이나 아내, 아들이나 딸이 있는 가정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학교로도 가야 하고, 직장에도 가야 합니다. 다시 동네로 돌아가면 우리 주변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른 한 면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교회를 도피처 삼아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항상 우리가 세상 한복판으로 나아가서 담대하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것을 보도록 힘을 얻는 주유소와 같은 곳이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 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5장으로 다시 돌아가서 팔복을 살펴보겠습니다. 아마 오늘 말씀이 팔복에 대한 마지막 메시지가 될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본문을 읽고 나서 말씀을 이어가겠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저녁 우리는 정말로 필요한 말씀 앞으로 나아갑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도 매우 어렵고, 이렇게 풍요롭고 물질적이고 편안한 문화 속에서 이 말씀을 적용하기도 매우 어렵습니다. 하나님, 어떻게든 우리가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찌르고 꿰뚫으셔서 우리의 삶을 바꾸어 주옵소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몇 달 전에, 우리가 팔복을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에 여러분께 “복되다(blessed)”라는 단어가 사실 “행복하다(happy)”라는 뜻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하신 말씀의 핵심은 우리의 행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들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의 첫 복음서인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첫번째 설교, 성경에 기록된 첫 말씀이 “행복하다”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1978년 2월, 코스모폴리탄이라는 잡지에 사람들이 실제로 얼마나 행복한지를 알아보기 위한 설문조사 결과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각계각층을 대상으로 여러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진짜 행복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한 사람의 모습으로 정의했습니다. 설문에서 나온 몇 가지 행복의 원칙을 정리한 것이죠.
정말 행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을 즐기지만, 자신을 희생하지는 않는답니다. 행복한 사람은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느끼려 하지 않는답니다. 또 다른 특징은, 행복한 사람은 자기 스스로 충분하다고 느끼는 자기 만족에서 오는 성취감을 가진답니다. 아주 흥미롭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말합니다.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자신에 대해 긍정적이고,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갖고,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 않는 사람이다.”
제가 보기에는 딱 바리새인하고 똑같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한 사람의 정의와는 정반대이죠. 예수님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자급자족하는 사람이 아니라 거지처럼 몸을 움츠리고 자신 안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아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교만하지 않고 온유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죄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사실을 애통해하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확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무능을 분명히 알고, 온유함으로 손을 내미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자신을 희생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고, 화평하게 하고, 화평하게 하고 긍휼을 베푸는 일로 박해를 받는다 할지라도 그렇게 하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세상이 말하는 행복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이 아닙니다. 전혀 다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 테스트와 예수님께서 팔복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기준을 비교하는 것만큼 세상의 철학과 하나님의 진리의 차이를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습니다. 세상은 자기 방식대로 행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자기 방식으로 행복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다가 기독교와 부딪히면 반드시 충돌이 생깁니다. 반드시 책망과 죄책감과 반감이 생겨납니다. 그 결과, 기독교를 박해합니다.
이제 오늘 저녁 우리가 살펴볼 본문은 10절부터 12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처음 일곱 가지 팔복에 따라 살아간다면, 여덟번째 복은 자연스럽게 얻게 될 것이다. 너희가 그 처음 일곱 가지 원리에 따라 살아가면, 필연적으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을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박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피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주에 10절부터 12절까지를 보기 시작했죠. 다시 한번 제가 읽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 정말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의 방식으로 행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준으로 행복을 구하고, 예수님의 원리에 따라 살아가고, 예수님의 방식으로 그 나라에 들어가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좁은 길을 걸어가고, 반석 위에 집을 짓고, 심판대 앞에서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라는 말씀을 듣고 싶지 않다면, 그런 삶의 결과로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경건한 세상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될 때 반드시 부정적인 반응이 생길 겁니다. 언제나 그랬습니다.
15세기의 이탈리아에 사보나롤라(Savonarola)라는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위대한 개혁가이고 설교자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죄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타락을 책망했습니다. 말 그대로 종교개혁을 준비하는 길을 열었습니다. 한 전기 작가는 사보나롤라의 설교를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보나롤라는 우레 같은 음성으로 설교했다. 죄에 대해 너무나 매섭게 책망한 나머지 그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멍해지고 정신이 혼미해져서 말문을 잃은 채 거리로 나갔다. 또 매주 회중들이 우는 바람에 예배당 전체가 흐느끼는 소리로 가득했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런 설교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보나롤라를 화형시켜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박해했습니다. 달라질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믿는 진리에 대해 더 직접적으로 맞서고, 팔복에 담긴 풍성한 진리를 실제로 살아낸다면, 이미 경험하고 있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세상이 더 큰 적대감을 드러낼 겁니다. 박해는 언제 어디서나 일어납니다.
최근에 제가 읽고 있는 책이 하나 있습니다.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던 날에 인도네시아의 이리안 자야(Irian Jaya)에서 사역하고 있는 훌륭한 선교사님이신 돈 리처드슨(Don Richardson) 선교사님이 저에게 준 책입니다. 선교 이야기의 고전이라고 불리는 <평화의 아이(Peace Child)>라는 책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그 책의 후속편으로 <세상의 주들(Lords of the Earth)>이라는 책을 쓰셨습니다. 이 책은 <평화의 아이>처럼 자신의 선교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 아니라, 친구 스탠 데일(Stan Dale)이라는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스탠 데일 선교사님은 이리안자야에 있는 얄리(Yali) 부족 선교를 하셨습니다. 돈 리처드슨 선교사님이 저지대에서 사위(Sawi) 부족을 섬기고 계실 때에, 스탠 선교사님은 이른바 스노우 마운틴(Snow Mountains)이라 불리는 아주 높은 산악 지대에 들어가서 얄리 부족을 섬겼습니다. 스노우 마운틴은 매우 높은 지역으로서 위험했습니다. 산비탈에 마을이 있었습니다. 또 그 지역에는 헬룩(Heluk)이라는 강이 있는데, 끊임없이 내리는 비 때문에 항상 산을 뚫고 내려오는 급류가 흘렀습니다. 얄리족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이상한 종교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만일에 아이가 우연히 성스럽게 여기는 땅에 기어 들어가기라도 하면, 그 아이가 더럽혀지고 저주를 받았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 아이가 마을 전체를 저주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데려다가는 급류가 흐르는 강에 던져버리고, 익사한 아이의 시신을 그대로 떠내려 보냈습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 그 종교 체계에 대해 한마디라도 부정적으로 말하면, 모두가 그 체계에 깊이 세뇌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을 즉시 죽였습니다. 그러니 반란도, 변화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뀔 가능성이 전혀 없었죠. 책에는 부족 중에서 너무 어리석게 보이는 이런 상황을 바꾸고 싶어서 지적하려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사람에게 화살을 너무 많이 쏘아 대서 시신이 갈대숲처럼 보일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아주 모든 것이 절망적이었습니다.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키가 약 170cm 정도밖에 되지 않는 안짱다리 호주인이 담대하게 얄리 부족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이 작은 용사 스탠 데일 선교사는 자신과 아내, 그리고 다섯 자녀의 마음을 이 난폭한 사람들에게 열었습니다. 인간을 사냥할 뿐 아니라 먹기도 하는 야만인들에게 말이죠. 그 문화 속에 깊이 박힌 어둠과 죽음, 그리고 끔찍한 믿음과 관습에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갔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습니까? 돈 리처드슨의 글을 그대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원주민은 숨을 죽이며 바위 너머로 화살을 조심스레 내밀고 스탠의 옆구리를 겨냥했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 특별히 골라온 반짝이는 대나무 화살촉에 잠시 동안 불빛이 비쳤다. 그는 활을 끝까지 당겼고, 뒤에 있던 다른 전사들은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마치 그 전사를 도우려는 듯 스탠은 배낭에서 무언가를 꺼내려고 문간을 지나 움직였다. 다음 순간 스탠은 몸을 움츠리며 오른쪽 옆구리에 꽂힌 길이 150cm에 달하는 화살을 붙잡고 잡아당겼다. 첫 번째 전사는 성공에 기뻐 날뛰며 바위 뒤에서 뛰어올라 또 하나의 화살을 스탠의 오른쪽 허벅지에 곧장 쏘아 넣었다. ‘우리는 죽음의 덫에 걸렸어,’ 스탠이 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방에서 우리를 쏠 수 있어. 불, 불을 꺼야 해.’”
“스탠은 불 속으로 몸을 던져 타오르는 장작을 흩으려 했다. 그러는 동안 또 다른 화살이 왼쪽 허벅지에 날아와 깊숙이 꽂혔다. 몸을 던져 오두막 반대편으로 피하려 했지만, 피할 곳이 없었다. 화살 두 개가 더 날아왔다. 하나는 오른쪽 팔뚝을 관통했고, 또 하나는 횡격막과 장기를 뚫었다. 스탠은 화살을 하나씩 빼냈고, 자신을 공격하는 자들에게 얄리어로 이렇게 외쳤다. “다들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는 할 만큼 했다.” 다섯 곳의 상처에서 찢어지는 고통이 몰려왔다. 요그와의 바닥에는 수많은 화살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그중 다섯 개는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스탠은 다음 화살을 기다리며 요그와의 벽에 몸을 기댔다.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지금 다 읽어드리지는 않겠습니다. 나머지는 직접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놀랍게도 스탠은 살아남았습니다. 수술을 받은 후에 다시 그 마을, 똑같은 지역으로 돌아갔습니다. 말 그대로 오랜 세월, 수년을 그곳에 바쳤습니다. 이야기는 계속 이렇게 이어집니다.
“옌도알(Yendoal)을 지나자 얕아진 강이 넓은 자갈 강바닥을 따라 흘렀다. 300미터가량을 걸어 강을 건넌 후 자갈 해변에 도착했다. 해변 너머로 길은 강을 벗어나 고개 쪽으로 곧장 올라갔다. 단지 600미터 정도만 더 오르면 고개를 넘고 안전한 곳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그러나 전투의 함성이 다시 울려 퍼졌고, 이번에는 훨씬 가까웠다. 갑자기 활을 높이 치켜들고 강물을 헤치며 달려왔다. 다른 이들은 숲 속 아래쪽에서 쏟아져 내려왔고, 너풀거리는 등나무 장식이 달그락거리며 흔들렸다. 스탠과 예무(Yemu)는 자갈 해변 아래쪽 끝에서 그들을 마주하고 서 있었다. 필 매스터스(Phil Masters)는 50미터 떨어진 해변의 반대쪽 끝에 홀로 서 있었다.”
“다니 부족(Danis) 세 사람이 필보다 약 30미터 더 건너갔다. 모두가 두려움 속에서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들은 스탠이 지팡이를 들어 올린 채 위크분(Wickboon) 무리를 단호하게 마주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예무(Yemu), 물러서라!” 어깨너머로 외쳤다. 스탠은 지팡이를 들었지만 그것으로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전사들의 물결을 막아내는 장벽처럼 들고 있었다. “모두 돌아가라! 집으로 돌아가라!” 그가 명령했다. 켐부(Kembu)의 제사장 베르웨이(Bereway)라는 사람이 스탠의 뒤쪽으로 돌아가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오른팔 아래에 화살을 쏘았다. 또 다른 제사장 부누(Bunu)는 그의 오른쪽 어깨 아래 등 부분에 대나무 화살을 쏘았다. 예무는 울며 그들에게 그만두라고 외치고 있었다.”
“스탠은 몸에 박힌 화살을 하나씩 뽑더니 부러뜨려 버렸다. 수십 개의 화살이 사방에서 동시에 날아오고 있었다. 스탠은 계속 화살을 뽑아 부러뜨리고 발치에 떨어뜨렸지만 화살이 쏟아지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날리모(Nalimo)가 도착했을 때 스탠의 몸에는 이미 약 30개의 화살이 꽂혀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오랫동안 견딜 수 있을까?” 날리모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왜 쓰러지지 않는 거지? 우리라면 누구든 벌써 오래 전에 쓰러졌을 텐데!” 그 순간 날리모의 살을 꿰뚫은 것은 바로 두려움이라는 화살이었다. “어쩌면 그는 죽지 않는 존재일지도 몰라.” 평소에 표정이 거의 드러나지 않던 날리모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일그러졌다. 날리모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참고로 날리모는 훗날 그리스도인이 되어 세례를 받았다. ‘그 두려움 때문에 나는 스탠에게 화살을 쏘지 않았다.’ 스탠은 매번 새 화살이 몸에 꽂힐 때 잠시 흔들릴 뿐, 적들을 향해 흔들림 없이 굳건히 서 있었다.”
“예무(Yemu)는 필이 혼자 서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둘은 함께 스탠이 겪는 고통을 고통스럽게 바라보았다. 주력 부대에서 떨어져 나온 전사들 50명 정도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자, 필은 예무를 뒤로 밀어 숨기고 말없이 손짓으로 도망가라고 했다. 필은 자신을 둘러싸는 전사들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필의 시선은 스탠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50개… 60개… 수많은 상처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지만, 스탠은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날리모는 자신만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환호 속에서 시작된 공격이 이제 공포심에 질려 있었다. 스탠이 쓰러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쿠사호(Kusaho)가 맞았을지도 몰랐다. 자신들의 의도와는 달리 초자연적 세계를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세계를 대적하는 엄청난 죄를 짓고 있는지도 몰랐다. “쓰러져!” 그들은 스탠에게 외쳤다. “죽어라!” “제발 죽어라!” 그것은 애원이었다.
“예무(Yemu)는 전사들이 필을 향해 화살을 겨누고 있었지만, 필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필은 도망치거나 저항하려 하지 않았다. 여러 번 위험을 맞닥뜨린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죽음과 직접 대면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스탠은 어떻게 죽음을 맞서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스탠이 죽음을 어떻게 대면하는지 모범을 보여준 셈이다. 더 큰 용기를 가진 사람도 따를 수 없을 만큼 분명했다. 이번에도 가장 먼저 화살을 쏜 것은 베르웨이(Bereway)였다. 필을 쓰러뜨리는 데는 스탠 때만큼이나 많은 화살이 필요했다. 예무와 다니 부족 사람 셋은 필의 상처가 너무 심해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알 때까지 기다렸다.”
“두 선교사가 돌로 가득한 강변 위에 쓰러진 뒤, 그 처참한 죽음을 본 얄리 사람들은 스탠과 필의 만신창이가 된 시신을 돌에서 끌어내어 숲 속의 움막 같은 곳에 놓았다. 얄리 사람들은 평소에 머리를 베지 않는 부족이었지만, 부누(Bunu)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스탠과 필의 목을 베었다. 그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한 살해자들은 옷을 모두 벗기고 시신을 토막낸 후, 뼛조각들을 숲 속 곳곳에 흩어 놓아서 시신이 부활하는 것을 막고자 했다. 날리모와 그의 친구는 스탠과 필을 죽인 뒤 식인 잔치를 계획하고 있었다.”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이야기에 담긴 놀라운 결론은, 지금은 얄리 마을과 그 지역 전체 부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제 더 이상은 선교사를 잡아먹으려는 것이 아닌 성찬식에 참여하기 위해서 모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까지 치러야 할 대가는 너무 컸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에서 가장 놀랍게 생각하는 사실은 스탠의 다섯 번째 자녀가, 스탠이 죽을 당시 아직 아기였던 그 아이가, 아버지에 대한 이 책을 읽다가 구원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이것 또한 대가입니다. 세상과 맞서려 한다면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늘 그랬습니다. 사보나롤라 때도 그랬습니다. 1960년대 말 스탠 데일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6장에 무슨 내용이 나옵니까? 제단 아래에서 부르짖는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임당한 사람들, 순교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항상 이런 방식입니다.
마태복음 5장 10절부터 12절을 다시 한번 보면서 지난 시간에 살펴본 세 가지 요소를 빠르게 정리하겠습니다. 박해, 약속, 태도입니다. 박해는 10절과 11절에 나옵니다. 잠깐 빠르게 복습하겠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이어서 실제 삶에 적용되는 내용으로 전환됩니다. 저는 이것이 두 가지 복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은 두 배의 복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10절에는 일반적인 선언이 나옵니다. 지난 시간에 10절을 살펴보았죠. 잠시 복습했습니다. 이어서 11절에는 실제적인 적용이 나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누가 박해를 받습니까? 누구입니까? 팔복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반드시 이해하셔야 합니다. 경건은 적대감을 불러옵니다. 예상하고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나가서 거칠게 행동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일부러 원수를 만들라는 말이 아닙니다. 놀라지 마시라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빌립보서 1장 29절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무엇을 받습니까?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3장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헌신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하고 다시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박해 때문에 무너질 필요가 없습니다. 놀랄 일도 아닙니다. 우리는 박해받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도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우리는 박해받는 일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아주 기본적인 일입니다. 경건하지 않은 분노한 세상, 적대적이며 죄로 가득한 세상이 기독교와 마주하게 되면 반드시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팔복의 삶을 사는 모든 사람,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모든 사람, 하나님 나라의 아들로서 이렇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바로 그 대상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나아가서 세상에 긍휼을 전하려 한다면, 사람들의 죄를 깨닫게 하고 마음을 정결하게 하려고 한다면, 유일하게 화평하게 하는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화평을 이루려 한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담대하고 직접적으로 진리를 선포한다면, 반드시 반응이 일어납니다.
어떤 반응이 일어납니까? 지금까지 “누가 박해받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반응이 일어납니까? 박해입니다. 세상은 어떻게 분노를 표출할까요? 박해로 표출합니다. “박해”라는 단어는 헬라어 어근에서 왔는데, 그 의미는 “괴롭히다, 악하게 대하다”는 뜻입니다. 문자적으로는 “뒤쫓다, 추격하다” 이런 의미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뒤쫓습니다.
미국은 지금 과거와는 정말로 다른 문턱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일종의 ‘미국 대각성 이후의 시대’ 속에서 태평하게 보내온 것 같습니다. 과거 부흥운동 시대의 혜택과 유산을 누리면서 살아온 셈입니다. 그런데 그런 시대가 빠르게 끝나가고 있습니다. 정부가 종교를 대적할 뿐 아니라, 종교 자체도 각종 이단과 사상과 분열과 혼란을 끝없이 만들어내면서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정부가 종교 단체를 억압하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태도가 변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국세청(IRS)을 비롯한 정부 기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한 우리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법들을 만들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한때 신성하게 여겨졌던 교회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반응, 그러니까 교회와 믿음이라는 것이 더 이상 상징적이고 존중받는 가치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전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달려들 것이다.”
어떻게 달려듭니까? 11절입니다. 기억하십니까? “욕하고.” 면전에서 대놓고 하는 모욕입니다.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뒤에서 하는 중상모략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앞에서도 공격할 것이고, 뒤에서도 공격할 겁니다. 우리가 자리를 뜨면 우리에 대해 수군거릴 것이고, 우리가 자리에 있을 때는 앞에서 비방할 겁니다. 공개적으로 대립할 것입니다. 은밀하게 비방도 할 것입니다.
제가 이번주에 편지를 한 통 받았습니다. 여러분과 꼭 나누고 싶었습니다. “목사님은 최근에 마지막 여덟 번째 복에 대해 설교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복이 있나니.’ 그 설교에서 목사님은 만일 그리스도인이 전혀 박해를 받지 않는다면 신앙생활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어제 저는 몇 년 동안 보지 못했던 한 친구와 대화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때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지만 지금은 정당한 이유 없이 남편과 이혼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혼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우정이 위험에 빠질 수도 있었고, 제게 적대적으로 반응할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두려웠습니다. 솔직히 말해 그런 대면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제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사람으로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그 대화는 이렇게 진행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랑과 은혜,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친구가 가정에서 행복하게 살면서 온전한 기준에 따라 조화롭게 살아가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혼을 어떻게 보시는지, 결혼과 이혼에 대해 어떤 기준을 주셨는지 설명했습니다. 대화를 이어갈수록 친구는 점점 더 방어적으로 화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인간의 해석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성경의 의미를 각자 나름대로 해석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성경을 하나의 지침으로서 곁에 두는 것은 좋지만, 그 내용 중 무엇을 적용할지는 읽는 사람이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저는 친구에게 각자가 성경을 개인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하면 신학적 혼란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설명했습니다. 제가 구체적인 성경 구절을 읽어주기 위해 성경을 꺼내려 하자, 친구는 성경으로 논쟁하러 온 것이 아니라며 거부했습니다. 요약하자면, 친구와는 그 어떤 논리적 대화도 불가능했습니다. 벌떡 일어나더니 떠날 준비를 하면서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증오에 가득한 눈으로, 집으로 불러놓고는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뒤에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습니다.”
“저는 이제 그리스도의 편에 섰기 때문에 미움받고 거짓으로 비난받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친구가 남편을 떠나 제 가족 중에서 누군가와 관계를 시작하려는 의도로 이혼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친구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친구가 그리스도를 얼마나 깊이 거부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어 마음이 무겁습니다.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제 삶에서 처음으로 세상과 분리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얄리 부족의 화살에 맞는 것이 더 괴로울까요,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움받는 것이 더 괴로울까요? 화살은 금방 끝나지만, 미움은 오래 갑니다. 원래 그렇습니다. 헌신된 사람들에게 쉬운 길은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모든 것이 너무 쉽다면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거나, 혹은 그리스도인이지만 주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신 삶을 드러내고 있지 않다는 것이죠. 그리스도인에게 쉬운 길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을 함께 보겠습니다. 4장 9절을 보시면 아주 생생한 묘사가 나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여기서 잠깐 멈추겠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끄트머리에 두셨다. 죽이기로 작정된 자로 두셨다. 구경거리로 만드셨다.” 바울이 무엇을 염두에 두었습니까?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로마 장군에게는 군대를 이끌고 시내를 행진하는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군대는 전쟁의 노획물과 전리품을 들고 행진했습니다. 장군은 자신이 이룬 엄청난 승리를 드러내는 모두에게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긴 행렬 뒤에는 항상 포로들이 뒤따랐습니다. 정복된 민족의 포로입니다. 죽음이 정해진 사람들입니다. 사로잡힌 자들입니다. 경기장으로 끌려가서 짐승에게 찢겨 죽을 겁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여기서 바울은 “사도인 우리들”이라고 말했습니다. 누구입니까? 진정으로 헌신된 모든 제자를 상징합니다. 죽이기로 작정된 포로들의 무리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신학자인 성경 번역가 모팻(Moffatt)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도들이 경기장 안에서 죽도록 되어 있는 검투사들처럼 맨 마지막에 등장하도록 하셨다.” “죽이기로 작정된 자”라는 단어를 보십시오. “사형 선고를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처형장으로 끌려가서 조롱의 대상이 되는 죄인들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드문 표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사도로서 죽게 되어 있다. 행진의 마지막에 끌려가 모든 사람에게 조롱받고 죽임을 당하는 사형수들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울은 여기서 비꼬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여기 핵심 단어가 있습니다, “참고.”
우리는 어떤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백마를 타고 성 안으로 들어와서 영웅 대접을 받으라고 부름받은 것이 아닙니다. 스타가 되라고 부름받은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유명 인사가 되라고 부름받은 것이 아닙니다. 죽음에 내어준 자가 되라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견디며 나아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바울은 이러한 모든 상황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12절입니다.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잘 들으십시오. “더러운 것”이라는 단어는 “때, 먼지”라는 뜻입니다. 무언가를 깨끗하게 닦아낼 때 닦여 나오는 그 찌꺼기, 냄비나 팬에 남은 찌꺼기, 책상 위에 쌓인 먼지 같은 겁니다. 그러니까 제거해야 하는 불순물을 의미하죠.
그리고 바울은 “찌꺼기(offscouring)”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문지르거나 씻어내야 하는 폐기물이죠. 버려지는 잔해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보아라. 우리는 세상의 때와 찌꺼기이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바울, 당신은 사도잖아요. 사람들이 당신의 동상을 세우고 ‘성 바울 대성당’(St. Paul’s Cathedral) 같은 건물도 짓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때와 찌꺼기다.” 사도들은 이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세상이 사도들을 평가한 방식이 그랬습니다. 사도들은 대가를 계산했고, 기꺼이 그 값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바로는, 열두 사도 중 열 명에서 열한 명이 순교했습니다. 요한은 순교하지 않았지만 유배되어서 죽었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저는 오늘날 기독교가 어떻게 이렇게 변해 버렸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이런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우리가 정말로 “세상의 때와 찌꺼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스타입니다. 화려한 무대의 연예인처럼 대접받고 있습니다. 기독교 TV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활동하다가 옷을 갈아입고는 교회에 와서 또 다른 역할을 합니다. 두 세상을 오고 가면서 살아갑니다.
라스베이거스에서는 춤을 추고 그 다음날 교회에 와서 간증을 합니다. 스타입니다. 대통령이고, 국회의원이고, 유명한 운동선수이고, 배우이고, 가수입니다. 이분들이 참 신자라면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의심이 들 뿐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맞서는 대신 세상과 어울려 춤을 추려고 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엘리트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환영을 받습니다. 부유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을 그렇게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저에게는 “이런 유명인을 교회에 초청하지 않겠습니까?”라는 그런 내용의 광고 우편물이 참 많이 옵니다. 물론 ‘출연료’를 요구합니다. “이 스타를 초청하시겠습니까? 이런 경력을 갖고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 유명인과 악수하는 장면들까지 담긴 봉투가 아주 두툼합니다. “이 스타들을 초청하길 원하십니까?” 아닙니다. 저는 스타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가말리엘의 수석 제자였다. 세계적인 인물이다. 여러 언어를 구사할 수 있고, 친한 친구 중에는 왕도 있고 고위 관료도 있고 유명 인사도 많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적도 있다.” 고린도후서에 나오죠. “나는 셋째 하늘까지 올라갔다.” 이렇게 말하면서 오늘날처럼 순회 설교를 했다면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을 겁니다. “나는 그 누구보다 방언을 더 많이 한다.” 들어보십시오. 이처럼 바울은 수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놀라운 간증입니다. 사람들을 몇 시간이고 붙들어 둘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자격을 알고 싶은가? 내가 말해주겠다.” 고린도후서 11장을 보십시오. 여기에 바울의 자격이 나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을 소개해 드립니다. 23절에 나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바울은 더욱 그러합니다. 여기 그리스도의 가장 위대한 일꾼이 있습니다. 준비되셨습니까?
“...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은 이런 사람입니다.
12장 5절부터 읽습니다. “...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잘 들으십시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 자신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다. 자랑하고 싶지 않다. 어떤 사람이 나를 너무 높이 평가하게 두고 싶지 않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바울에게 뭔가 문제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눈에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눈에서 항상 분비물이 흘러나와서 보기에 흉했고 사람들이 가까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바울에게 좋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시를 제거해 주시는 대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어떻다고 합니까? “강함이라.”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이 스스로의 힘으로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요지는 이겁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미 인정받았고,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여러분은 완전히 잘못된 원리를 따르고 있는 겁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약함을 자랑한다. 나의 병을 자랑한다. 박해를 자랑한다. 능욕을 자랑한다. 궁핍을 자랑한다. 나를 부수고, 나를 짓누르고, 나를 낮추는 모든 것을 자랑한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게는 아무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나를 세상에 맞서게 하신다.”
우리는 지금 어느 때보다 기독교가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영광을 추구하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습을 분명히 싫어하실 겁니다. 우리는 세상보다 더 빠른 속도로 기독교적 '유명인'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은 이것이 아닙니다. 오늘 오전에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살펴본 것처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 증인이 되어야 한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 ‘말튀스(martyres)’가 되어야 한다.” 무엇입니까? 순교자입니다.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누가 박해를 받습니까? 팔복은 하나님 나라의 자녀를 향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박해를 받습니까? 세상은 우리의 면전에서 우리를 욕할 것입니다. 우리의 등 뒤에서는 비방할 겁니다. 그렇다면 왜 박해를 받습니까? 이유를 살펴봅시다. 마태복음 5장으로 돌아가서, 왜 세상은 우리에게 이런 일을 할까요? 우리는 참 좋은 사람들입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악을 가져가시고 하나님의 선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세상은 우리를 미워할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10절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로 말미암아.” 잘 들으십시오. 세상이 원하지 않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의와 그리스도입니다. 죄를 사랑하고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세상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면, 그 세상은 반응을 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말하기 시작하면, 세상은 반응을 합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거부할 것이고, 예수님이 제거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언제나 그랬고,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겁니다.
요한복음 15장을 잠시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8절에서 우리 주 예수님은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17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오늘 저녁에 우리는 그런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그런 사랑으로 풍성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이렇게 함께 모여서 그레이스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가족으로 서로 사랑합니다. 그런데 교회 문을 나서는 순간 상황은 달라집니다. 세상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어떻게 합니까? 미워합니다. 악한 세상은 우리를 미워합니다. 왜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하였다면 세상은 우리를 받아들였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정면으로 맞섭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맞서지 않는다면 세상은 결코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세상은 우리를 미워합니다. 20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다시 말해, “너희가 나와 동일시된다면, 세상은 너희를 나를 대하던 방식 그대로 대할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은 너희를 사랑할 것이고, 나를 미워하는 자들은 너희를 미워할 것이고, 의를 사랑하는 자들은 너희를 사랑할 것이고, 의를 미워하고 죄를 사랑하는 자들은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세상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21절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의 무엇을 드러내셨습니까? 죄를 드러내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보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죄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죄를 감출 수 있었습니다. 양심을 마비시키는 데 매우 능숙했습니다. 종교는 진리를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려버렸습니다. 그 눈먼 상태로 지옥을 향해 평온하게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 눈가리개를 찢어버리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자신을 보라.” 그들은 자신의 죄를 보았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성경이 미리 말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시편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묻습니다. “아니 왜 우리를 미워할까요?”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잘못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정말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저도 문제가 있어서 미움받는 게 아닙니다. 저는 제가 바라는 만큼 훌륭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악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저의 문제가 아닙니다. 의의 문제이고 그리스도의 문제입니다. 그냥 의롭게 산 것 뿐입니다. 소금이 된 것 뿐입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주에 계속 하겠습니다. 그냥 소금이 된 것 뿐입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상처에 소금을 대보신 적 있으세요? 아주 쓰리게 아픕니다. 그냥 소금이 되십시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소금이 되십시오. 타락한 사회 속에서 의롭게만 사십시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세상은 그렇게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냥 없어져버리자.” 수도원 운동이 등장합니다. 모두가 수도복을 입고는 수도사가 되어서 세상에서 나와서 수도원을 세우고 성경만 연구하자는 것이죠.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디 가지 마라. 도망치지 마라. 후퇴하지 마라. 장막을 걷고 세상에서 사라지지 마라. 휴거 때까지 어둠 속에 숨어 성경공부만 하지 마라. 나가서 말튀스(martyres), 순교자가 되어라.” 우리는 세상에 맞서야 합니다.
잘 들으십시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죄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증오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 등을 돌리라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세상을 직면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물론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6장 2절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보십시오. 문제는 여러분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의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의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에 죄를 선택하고, 죄를 사랑하기 때문에 의에 직면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겁니다.
이제 마태복음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주님은 “너희가 박해를 받을 것이다. 박해를 받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절, 11절, 12절에서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그렇다면 수도원으로 들어가자. 숨어버리자.” 아닙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14절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어디에도 가지 마십시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않습니다. 등불은 등경 위에 두는 것입니다. 너희 빛이 어디에서 비치게 하라고 하십니까? 사람 앞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 아무리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해도, 도망치면 안됩니다. 저는 스탠 데일 선교사님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그 책을 읽으면 정말 놀랍습니다. 선교사님이 처음 공격을 받기 직전에, 원주민들이 활과 화살을 들고 언덕 위에 모두 모여 있었습니다. 선교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오겠습니다.” 그리고 언덕을 똑바로 올라가서 원주민들을 향해 계속 걸어갔습니다. 원주민들은 선교사님을 향해 화살을 쐈지만 빗나갔습니다. 선교사님은 그렇게 계속 올라갔습니다.
정말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선교사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소금과 빛이 되고자 했습니다. 거의 60개가 넘는 화살을 맞고서야 쓰러졌습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그 상황을 소금으로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도망치지 말아야 합니다. 신실해야 합니다.
물론 세상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 기억하십니까? 다른 설명은 생략하고 이 구절만 보겠습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때리는 것은 그리스도를 미워하기 때문이다.” 스탠 데일 선교사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화살을 쏜 얄리족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화살을 쏜 것입니다. 얄리족이 미워한 것은 스탠 데일 선교사님이 아니라 선교사님이 대표하는 진리였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이 공격하는 대상은 그리스도입니다. 세상은 지금도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땅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대신 예수님의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을 겨냥하는 겁니다. 세상이 예수님의 말씀을 미워해서 예수님의 손에 못을 박았던 것처럼, 지금도 세상은 같은 말씀으로 세상에 정면으로 대면하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못을 박고 있는 것입니다.
아시겠지만 저는 싸움을 일으키고 싶지 않습니다. 여기저기 적을 만들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옳은 말을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말해야 할 때, 말해야 할 자리에서, 말해야 할 사람들에게, 옳은 말을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이 들립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나는 기꺼이 감당하겠다. 고난을 기꺼이 받겠다.”
마태복음 10장과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은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누가 미움을 받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무엇을 받습니까? 박해입니다. 왜입니까? 주님의 이름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박해를 받습니까? 5장 11절을 보십시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여기서 ‘때’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호탄(hotan)’인데요, “언제든지” 이런 뜻입니다. 즉 “그 일이 일어날 때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그 일이 발생하는 그 순간마다 복이 있다” 이런 뜻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멈추지 않고, 쉴새없이 박해를 받을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의 시대에도 그리스도의 시대에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의 집에서 휴식을 누리신 때도 있었고, 감람산으로 물러나시던 때도 있었고, 갈릴리에서 열두 제자와 함께 보내신 귀한 시간들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박해가 끝없이 지속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그 일이 일어날 때,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박해받고자 하는 영혼 위에 복을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견딜 수 있게 하십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무엇을 내십니까? “피할 길”을 내십니다. 언제나 피할 길이 있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원해서 박해받는 것이 아닙니다. 순교자가 되고 싶어서 안달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지만 도망치지도 않습니다. 박해 한가운데 들어가면 타협하지 않습니다. 박해 뒤에는 약속이 이어집니다. 기쁘지 않습니까? 무슨 약속입니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복이 있다, 복이 있다, 복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뭔가를 잃어버린다고 해도, 하나님 나라에서 그 이상으로 보상받을 겁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어떤 손해를 본다 해도 그 이상으로 보상을 받습니다. 사도 바울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바울은 자신의 뛰어난 지성과 능력만으로도 이 세상에서 크게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갖지 못했습니다. 결국에 어느 날 단두대에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그 바울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이 세상에서의 어떤 손해도 하나님 나라에서 얻게 될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복이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두 번이나 반복하면서 강조하십니다. “복이 있나니, 복이 있나니.”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편에 서고자 하는 사람들은 순종의 기쁨과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속한 복을 반드시 누리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된 예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요셉도 그 진리를 경험했습니다. 요셉은 의를 위하여 형제들에게 박해를 받았습니다. 멸시받고 미움을 받고 광야 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셨습니다. 오직 인내가 필요했을 뿐입니다.
예레미야는 의로운 삶 때문에 지하 감옥에 던져졌습니다. 늪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건져 올리셔서 하나님의 선지자 중 어느 누구와 견주어도 손색없는 존귀한 이름을 주셨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그 대가를 기꺼이 치를 준비가 되어 있다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박해받는 자는 두 배의 복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천국과 천국의 모든 것을 받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무엇입니까? 저는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모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살아계신 왕이 영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십니다.
또 저는 예수님께서 천년왕국도 말씀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새롭게 회복된 땅에서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보상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아들과 얼굴을 마주하며 영원한 영광을 누리는 나라에 대해서도 말씀하신다고 믿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말씀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줄 수 있는 모든 것,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선물, 우리가 겪는 모든 고난을 보상하고도 남을 그 모든 것이 다 우리 것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에서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우리는 정말 그렇게 했습니다, 주님. 우리는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거지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보이십니까? 지금 여기에서, 나중에 거기에서, 모든 것이 우리의 것입니다. 얼마나 충만합니까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우리는 너무 근시안적입니다. 지금 이 순간만 지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순간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면 영원한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팔복의 선물입니다. 첫번째 팔복이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는 약속으로 시작했고, 마지막 팔복도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라는 약속으로 끝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팔복의 가장 큰 약속이 우리가 천국 시민이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영원히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있는 다른 팔복은 천국의 삶의 요소입니다.
세상이 무슨 짓을 하든, 그 어떤 악한 행위를 하든, 결코 그리스도의 나라를 잃게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의 것이고 영원히 우리의 것입니다. 물론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박해를 기꺼이 견뎌낼 때에, 약속은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일부입니다. 그 나라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은 반드시 우리의 것입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저는 지금 이 땅에서는 큰 집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갖게 될 겁니다. 저는 아버지 집에 들어갈 것입니다. 저는 지금 이 땅에서 많은 집, 땅, 성경이 말하는 모든 것들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천년왕국과 영원한 천국에서 모두 얻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금도 이미 그 일부를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저의 형제이고, 자매이고, 어머니이고 아버지 같은 분들입니다. 저보다 훨씬 좋은 집에 사시는 분도 계시는데, 가끔씩 초대를 받으면 그 모든 것을 함께 누릴 수 있지 않습니까?
바로 이것이 지금 여기에서 가진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서로 나눕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 오기 위해 가족을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또는 가족에게 버림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이분들이 여러분의 가족입니다. 집에서 쫓겨나 머물 곳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다시 한번 둘러보십시오.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의 집은 여러분의 집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관리할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은 모두 우리의 것입니다.
그러니까 박해에는 약속이 따릅니다. 박해받는 중에 마땅히 취해야 할 태도가 있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요점입니다.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입니까?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12절입니다. “기뻐하라.”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기뻐하라고요?” 화살이 날아와 꽂히는데 기뻐하라니요? 친구가 저를 욕하는데 기뻐하라니요?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거리는데 기뻐하라고요? 저를 무너뜨리려고 할 때 기뻐하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카이로(chairō)!” 그러니까 “기뻐하라, 크게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기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지,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여기서 즐거워하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아갈리아스테(agalliasthe)인데, 문자적으로 “뛰고 소리치며 기뻐하라” 이런 뜻입니다.
“뛰고 소리치면서 기뻐하라고요? 지금 박해를 받고 있는데 말이에요?” 이렇게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러한 일로 기뻐해야 합니다. “아니 왜 제가 기뻐해야 할까요?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 것처럼 들리지는 않는데요.” 이렇게 되물으실 겁니다. 기뻐해야 할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12절에 있습니다.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니라.”
잘 들으십시오.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니라.” 제가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천국은 얼마나 오래 지속될까요? 영원히 지속됩니다. 이곳은 얼마나 오래 지속됩니까? 야고보서 4장에서는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라고 했습니다. 천국은 얼마나 오래 지속됩니까? 영원히 지속됩니다. 이곳은 얼마나 오래 지속됩니까? 갈수록 더 짧아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투자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전혀 놀랍지 않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이 땅에, 여기에 쌓아두지 마십시오. 이곳은 곧 사라집니다. 하늘은 영원합니다.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그러면 우리가 하늘에서 면류관을 받게 됩니까?” 이렇게 물으실 분이 계실 텐데요, 물론입니다. 저는 우리가 하늘에서 면류관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니까요. 하지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능력의 크기와 관련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더 신실할수록, 하나님을 더 크게 영화롭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신실하다면, 하나님을 향한 더 큰 마음, 영원히 섬길 더 큰 능력, 더 큰 충만함을 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히 아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영원히 있을 곳이 하늘이라면, 그리고 이 땅에서는 앞으로 20년 정도만 더 살 것이라면, 저는 영원에 투자하겠습니다. 여기에 투자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는 아주 잠깐 머무르는 것이고, 저는 그 짧은 시간을 가능한 한 모두 하나님의 은행 계좌에 모아두고 싶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배당금으로 돌아오게 하고 싶습니다. 그 배당을 제가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결국 그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찬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니라.” 이 “크다”는 말씀이 참 좋습니다. 왜냐하면 “크다”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말 그대로 “크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크다”고 말씀하실 때는 정말로 “크다”는 의미입니다.
폴루스(polus), 풍성하다는 뜻입니다. 에베소서 2장 4절에서도 풍성함을 말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충만한 상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아니, 왜 그렇게 속물처럼 말씀을 하십니까? 주님을 섬기는 건 사랑 때문이지, 상 때문에 섬기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이것은 제가 만든 방식이 아닙니다. 저는 사랑으로 주님을 섬깁니다. 주님이 원하셔서 제게 상을 주신다면 주님의 기쁘신 뜻대로 주시는 것이죠. 저는 그것을 두고 따질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늘에 가게 되면, 저는 교만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 모든 상을 받고 다시 겸손하게 돌려드릴 겁니다. 하늘에는 교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때 완전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상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모든 상을 지금 이곳에서 주지 않으시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받으면 정말 크게 망가지고 말 테니까요. 그럼에도 주님이 상을 주시겠다고 하신다면, 그것은 주님의 주권입니다. 놀라운 동기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평생 주님을 위해 살아왔다.” 그런 마음으로 디모데후서 마지막 부분에서 일종의 고별 인사를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바울은 이렇게 말한 겁니다. “그날을 사모하는 것이 뭐가 잘못이냐, 그 면류관을 바라보는 것이 뭐가 잘못이냐. 그것이 주님의 사랑의 선물이라면, 내가 구원의 선물을 받았듯이 그 선물도 받을 것이다.”
두번째 이유입니다.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기뻐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여러분보다 앞서 살았던 선지자들도 박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래서 뭐가 어떤데요? 저보다 앞선 선지자들이 박해를 받았다니, 그게 저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제가 그 사람들과 같은 문제를 겪었다는 이유로 기뻐하라는 건가요? 고생을 함께 하면 좀 낫다고요? ‘아, 나만 그런 게 아니니까 다행이다’ 뭐 이런 건가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입니다. 여러분이 아주 특별한 무리에 속해 있다는 뜻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박해한다면, 제 생각에 이것이 팔복의 절정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만약 네가 구원받았는지 확신이 잘 서지 않느냐? 네가 정말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지 의문이 생기느냐? 그렇다면 불신자들이 주는 박해를 보아라. 그 박해는 네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선지자들에게 하던 일을 똑같이 너에게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 놀라운 진리입니다.
그래서 저는 박해가 올 때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의 자녀라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저는 예언자들의 반열에 서 있다는 것을 압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닌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는 사람들을 굳이 박해하지 않습니다. 악한 세상은 하나님의 진리와 부딪힐 때만 반응합니다. 그래서 박해는, 아프기는 하지만, 동시에 “내가 정말 하나님의 편에 서 있구나”라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뒤쪽에서, 나중에 다루게 되겠지만, 마태복음 21장 33절을 보면 한 가지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비유가 하나 나오는데, 한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서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포도즙을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은 다음에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다는 내용입니다. 주인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농부들에게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 종들은 선지자들이고, 이스라엘은 그 포도원을 맡은 농부들입니다. 그런데 그 농부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또 하나는 돌로 쳤습니다. 하나님이 다른 종들을 보내셨지만 그들에게도 똑같이 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을 죽이고 박해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사자였습니다.
22장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오는데, 아니, 23장에서 더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23장 31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생각한대로 하라. 나를 죽여라. 너희는 너희 조상들이 했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계속해서 죽이고 또 죽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대단한 기록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2절 이후를 읽어보면 고난당한 성도들이 나옵니다. 이런 고난을 당하고 저런 고난을 당하고 계속해서 고난을 당한 성도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을 두고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리고 예수님은, 참으로 놀랍게도, 그날 그 자리에 모인 무리들에게, 그리고 역사 속에서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너희가 나를 따르고, 나의 진리를 전하고, 나의 진리를 살아내다가, 세상이 너희를 박해한다면, 기뻐하라. 너희가 선지자들을 잇는 의로운 계보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해는 여러분이 의로운 계보에 속해 있다는 확인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안전입니다. 팔복의 절정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구원을 제시하시고, 그 다음에 구원받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를 알려주십니다.
잘 들으십시오. 이 확신은 신학적 공식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에 한 번 결단을 했다” 그런 사실에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확신은 이 불경건한 세상 한가운데서 여러분이 진리를 가지고 정면으로 부딪치며 살아가고 있고, 그 때문에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 데서 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날 때에, 여러분은 하늘에서 상을 받게 될 뿐 아니라, 역사 속에서 동일한 반응을 받아 왔던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계보에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누가복음 21장에서, 12절과 13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 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 여러분에게 이렇게 대할 겁니다. 그러나 그 다음 절을 들으십시오.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다시 말해, 그 모든 고난과 박해가 “너희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증거”가 된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여러분에게 큰 확신이 될 것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세상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우리가 사는 삶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견디지 못합니다.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태도는 믿지 않는 마음의 교만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죄를 슬퍼하며 통회하고 회개하는 마음은, 차갑고 무감각하고 무정한 세상에서 결코 환영받지 못합니다. 잘못을 당해도 보복하려 하지 않고 온유하고 조용한 마음은 비겁하다고 여겨집니다. 세상에 가득한 교만하고 공격적이고 분노한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그저 거슬리기만 할 뿐입니다.
주님께 더 깊은 영적 은혜를 갈망하는 마음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꾸짖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세상의 냉혹함과 잔인함을 꾸짖습니다. 마음의 청결함은 세상의 위선과 부패와 날카로운 대조를 이룹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다툼과 적대감으로 가득한 이 세대에게는 결코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그런 방식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한때 위대한 존 녹스,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설교자에게 이런 찬사가 주어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너무 경외했기 때문에 그 어떤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고대의 위대한 그리스도인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Arcadius) 앞에 불려가 예수님을 선포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면 추방하겠다는 위협을 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고 전해집니다. “황제 폐하, 당신은 저를 추방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제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널 죽이겠다!” 화가 난 황제가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아닙니다. 그러실 수도 없습니다. 제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졌기 때문입니다.”
“너의 재물을 압수하겠다!” “아닙니다, 황제여, 그것도 하실 수 없습니다. 저의 재물은 천국에 있고 거기는 그 누구도 침입해 훔쳐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너를 사람들에게서 떼어놓겠다. 그럼 너에게는 친구가 하나도 남지 않을 거야!”
“그렇게 하실 수도 없습니다. 제 친구는 천국에 계십니다. 저를 결코 떠나지 않으시며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침내 크리소스톰은 아르메니아의 변두리로 추방되었지만 편지를 통해 친구들에게 계속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자 로마는 더 멀리 추방하기로 했습니다. 결국 크리소스톰은 추방지로 가는 중에 죽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어디에 우선 순위를 두고 계십니까? 여러분 자신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여러분 마음에는 어떤 진리가 울려 퍼지고 있습니까? 팔복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부자, 교만한 자, 경박한 자, 흉포한 자, 배부른 자, 교활한 자, 호전적인 자, 세상 왕들의 마음에 드는 자가 아닙니다. 가난한 자요, 온유한 자요, 슬퍼하는 자요, 주린 자요, 청결한 자요, 화평하게 하는 자요, 박해를 받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그 증거는 이들이 세상의 미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 나라에 속하시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저녁, 성경에 기록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첫 설교에서 이 위대한 진리를 이렇게 풍성하게 배우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대로 좁은 길에 들어서게 하시고, 비록 어렵고 힘들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좁은 길을 걷게 하옵소서. 대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 예수님을 위해 그 대가를 기꺼이 감당하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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