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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을 보겠습니다. 8절 말씀을 살펴보기 전에 팔복 말씀 전체를 읽고, 기도한 후에 자세히 보겠습니다. 1절부터 읽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밤 은혜를 갈망하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 스스로는 산상수훈의 기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정결하지 못합니다. 바로 서 있지 못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릅니다. 우리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정결하기 원하지만, 싸움이 너무 치열해서 바라는 수준에 이르지 못합니다. 정결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또 다시 부족함을 느낍니다. 하나님, 성령께서 조명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밝은 빛 아래에서 오늘 저의 삶을 살피게 하옵소서. 그리고 여기 모인 사랑하는 모든 이들도 자기 삶을 돌아보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이 말씀의 진리 앞에 우리를 세워주시니 너무도 감사합니다.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검증하기 위해, 실제 삶과는 무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나 귀를 즐겁게 하는 주제가 아니라 마음의 정결함을 다루는 말씀 앞에 서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 아래 두기 위해 말씀을 듣는 이 자리에 나오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다루시며, 그 삶을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온전하게 성숙하게 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제가 말하는 것이 사람의 말이 되지 않게 하시고, 제 생각과 저의 영으로 말하지 않게 하시고, 저의 입술이 성령님의 말씀만 전하는 도구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사람의 지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옵소서. 이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려 하지 않게 하시고 오직 우리 자신에게만 적용하게 하옵소서. 정직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우리 자신만 보게 하옵소서. 이 시간이 끝날 때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전보다 더 헌신된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그렇게 하실 것을 기대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멘.

성경 안에는 제가 전할 수 있는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붙들 수 있고, 또 다른 이들에게 전달할 진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우물처럼 느껴지는 말씀들도 있습니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깊이를 잴 수 없는 우물과 같습니다. 그 너비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진리들입니다. 지금 우리가 다루는 말씀이 바로 그런 말씀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이 엄청난 선언을 짧은 시간 안에 다루려고 한다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과 깊이와 통찰을 모욕하는 일일 겁니다. 저는 이 구절이 성경 전체에서 정말 위대한 말씀 가운데 하나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완전히 다루기는커녕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조차 감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성경에 계시된 모든 내용을 아우르는 말씀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청결이라는 주제는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집니다. 한 소년의 말대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집니다. 하나님을 보기 위해 마음이 청결해야 한다는 이 주제는 너무도 크고 무한한 진리입니다. 성경의 거의 모든 주제를 끌어안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담긴 모든 것을 다 발견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 시간 우리에게 풍성하고 의미 있게 다가올 중심 진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구할 뿐입니다.

자, 팔복을 살펴볼 때 질문을 먼저 던지고 그 질문에 답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이런 한 문장으로 되어 있는 짧은 말씀은 따로 구조를 잡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냥 그대로 풀어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말씀을 다룰 때 질문하는 방식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늘 그렇게 하죠. 사실 제가 여러분에게 몇 주 동안 말씀드리고 있는 내용은 제가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직접 던졌던 질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 말씀에 처음 던졌던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말씀은 어떤 문맥에서 주어졌는가?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서 이 말씀을 하셨는가? 먼저 역사적 배경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어떤 문제에 대해 말씀하시는가?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팔복의 순서를 볼 때 왜 이 말씀이 이곳에 위치해 있는가? 저에게는 8절 말씀이 너무도 중요하고 결정적이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말씀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마치 아무렇게나 끼워넣은 것처럼 보이는 이 위치가 쉽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왜 이 말씀이 가장 앞이나, 혹은 한가운데나, 혹은 마지막에 더 전략적으로 배치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어떤 상황에서 주어진 말씀이고, 어떤 문맥 속에 있는 말씀일까요? 역사적 배경과 문학적 배경을 차례로 살펴봐야 합니다. 먼저 역사적 배경을 보겠습니다. 사실 이 부분에 너무 많은 시간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 본문에서 예수님이 어떤 상황 속에서 말씀하셨는지를 계속 살펴보았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제 거의 훌륭한 역사학자 못지 않습니다. 그래도 잠시 기억을 한번 되살려 보겠습니다.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고 갈릴리와 예루살렘에서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이스라엘의 상황은 매우 절박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적으로 절망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정치적 상황은 이미 자세히 살펴보았죠? 메시아가 와서 정치적 전복을 일으키고 로마의 압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를 기대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밤에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당시 이스라엘이 처한 영적 상태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왜냐하면 산상수훈 전체가 영적인 문제를 다루지만, 특히 오늘 본문에서 특별히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8절 말씀에서 영적인 문제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정치적인 것도 아니고, 경제적인 것도 아닙니다. 영적입니다. 특히 8절은 이 팔복의 중심에서 영적 현실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셨을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은 대체로 바리새인들의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영향력 아래 짓눌려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사역하실 시기에도 바리새인의 영향력이 가장 강력했습니다. 거의 지배적이었습니다. 사실 율법주의는 어느 사회에서든 늘 장악력을 갖는 경향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무엇이 옳은가에 대해 절대적인 기준을 만들어놓고, 그 절대적 성격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형태를 띱니다. 그러니까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바리새인이 백성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잘못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지킬 수 있는 새로운 규례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자기들이 만든 전통을 지킴으로써 양심을 달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모세 율법을 잘못 해석한 것과 모세 율법에 대한 반쪽짜리 헌신, 그리고 여기에 얹은 추가 규례들이 결합되어, 사람들을 가혹하고 무겁게 짓누르는 율법주의적 의무 체계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지키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체계 안에서 답을 찾으려고 했던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찾아와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한 가지를 알려주십시오. 그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렇게 하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행한 것이다.”

물론 실제로는 쉽지 않았습니다. 율법교사가 그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율법 전체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역사 기록을 보면 당시 지도자들조차 몇 가지라도 지킬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이해하실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 몇 가지조차 지키지 못하자, 차라리 한 가지라도 지키면 하나님께서 이해하실 것이라고 말하면서 기준을 낮췄습니다. 그러니까 그 율법교사가 찾고 있었던 것은 결국 그 한 가지였습니다.“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을 살펴보면, 자신들조차 지킬 수 없는 율법 체계로 인해서 상당한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 체계는 큰 죄책감과 더불어 좌절감과 불안을 만들어냈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려는 마음이 아무리 피상적인 것이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셨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 좌절감이 더욱 크게 다가왔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종교적 공동체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도 그것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엄청난 좌절감과 불안, 죄책감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율법 체계든지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 누구나 그 아래에서 동일한 고통을 겪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지워버리는 방식을 선택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새로운 기준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러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율법 체계가 주는 억압은 결국 엄청난 죄책감을 만들어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세례 요한의 사역이 그렇게 강력한 힘을 갖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이 율법주의가 주는 죄책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죄의 무거운 짐을 어떻게든 덜어낼 곳을 찾아 헤매고 있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겁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칠 때 수많은 무리가 몰려왔습니다. 정말 말 그대로 큰 무리가 모였습니다. 심지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서기관들까지 찾아왔습니다. 저는 성경이 “온 이스라엘과 온 예루살렘이 요한에게 나아왔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죄책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율법 체계가 주는 억압과 그로 인한 깊은 죄책감이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영혼은 용서와 구원과 평안을 간절히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구원자를 기다렸습니다. 속량을 베풀어줄 이를 기다렸습니다. 자신들에게 더 많은 규례를 지우는 자가 아니라, 늘 어겨온 율법들 때문에 고통받는 자신들을 용서해줄 분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래전부터 구속자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말씀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죄를 사하실 분이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불의를 제거하실 분이 오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실 분이 오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진실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정직한 남은 자들을 찾으실 분이 오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오셔서 자신들을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또한 에스겔 말씀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오셔서 물로 깨끗하게 하시고, 굳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죄악을 씻어주시고, 죄를 제거하시겠다는 약속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고백도 알고 있었습니다. 용서가 무엇인지, 죄 사함의 기쁨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던 다윗이 “하나님, 허물이 사함받은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라고 외쳤던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모든 말씀을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경험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이 주는 억압 아래에서 더욱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나타나 메시아가 오셨다고, 구속자가 오셨다고, 구원자가 오셨다고 선포하자, 사람들이 몰려든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외칠 때, 사람들은 죄의 짐을 내려놓고 메시아만이 주실 수 있는 용서를 얻기 위해 나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믿는 또 하나의 이유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때 그 마음 깊은 곳에 죄를 용서받고자 하는 갈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장을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3장 1절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비교적 정직했습니다. 저는 니고데모가 어느 정도 정직하고 진실했다고 확신합니다. 바로 그 정직함이 예수님께로 이끌었기 때문이죠. 니고데모의 진실함이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 사용된 표현을 보면 이 사람이 이스라엘의 ‘선생’, 곧 율법을 가르치는 지도자였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고 가르치는 위치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좌절을 경험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마음에는 불안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이 말은 니고데모의 속마음을 잘 보여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을 찾아왔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죠.

다시 말씀드립니다.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의 마음 속에는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제가 어떻게 해야 의롭게 됩니까? 어떻게 해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저를 구속하십니까?” 바로 이 질문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그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습니다. 왜입니까? 예수님이 이미 마음을 읽으셨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하지도 않은 질문에 대답을 하십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어떤 때는 예수님께 묻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속 질문을 알고 계시고, 먼저 답을 주시니까요. 예수님은 3절에서 그의 마음속 질문에 이렇게 답을 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의 질문은 무엇이었습니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거듭나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의 마음을 괴롭히던 가장 깊은 질문입니다. 니고데모는 자기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바리새인입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이고,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입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충분한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솔직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만큼 정직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자 했지만 철저하게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물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28절로 가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예수님은 방금 2만 5천 명이 넘는 무리를 먹이시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28절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니고데모가 묻고 싶었던 질문하고 똑같습니다. “우리는 율법 체계를 다 알고 있고, 모든 의식과 절차도 다 알고 있습니다. 전통도 다 정리돼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나님이 진짜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형식과 의식을 넘어서는 실체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니고데모가 했던 바로 그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 상태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사람들은 진짜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지를 정말 알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지켜야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면,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0장 25절을 보겠습니다. 매우 충격적인 장면입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이 그에게 하신 대답을 잠시 제쳐두고 보면, 이 질문은 지금까지 우리가 봤던 질문들과 정확히 똑같습니다. 무리가 알고 싶어 했던 것도 바로 이것이고, 니고데모가 알고 싶어 했던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기준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율법 앞에 서면 죄책감과 불안과 좌절이 밀려오는데, 그 무거운 짐에서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습니까?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늘 붙잡고 있던 질문입니다.

누가복음 18장 18절을 보면 또 한 사람을 만납니다. 이번에는 율법교사가 아니라 한 젊은 관리입니다. 그런데 질문이 똑같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보십시오. 언제나 동일합니다. 어떻게 해야 참된 실체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형식과 절차 뒤에 있는 본질에 이를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당시 사람들은 확신이 없었습니다. 율법이라는, 도저히 온전히 지킬 수도 없고 유지할 수 없는 체계 앞에 서면 누구나 깊은 불안함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확신을 원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있다는 분명한 확신을 갖고 싶어했습니다. 저는 바로 이때가 예수님이 오시기에 완벽한 때였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정확한 답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의로우신 분입니다. 하나님 안에는 죄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거룩하신 분이면서도 죄인에게 구원을 베푸십니다. 그렇다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을까요? 경건하고 정직한 유대인들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저는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은 도대체 뭡니까?”

예수님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해 산상수훈에서 답하십니다. 질문은 아주 단순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갑니까? 어떻게 영생을 얻습니까? 어떻게 의롭게 됩니까? 죄가 없으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받아주실 수 있는 조건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이 질문이 바로 마태복음 5장에서 갈릴리 언덕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을 사로잡고 있던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온 지역을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고, 모든 병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명성이 퍼지자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의 단 한가지 질문은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메시아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떤 의가 필요한가? 우리는 어떻게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였습니다. 저는 어떤 다른 복보다도 8절 말씀의 복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믿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여기서 ‘그들’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아우토이(autoi)’인데, 강조의 의미입니다. 오직 그들만이 하나님을 본다는 뜻입니다. 제가 표현을 바꿔서 말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누가 들어가는지 알고 싶은가? 마음이 청결한 자이다. 그리고 오직 그들만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을 볼 것이다.” 이것이 답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들어갑니다.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외적인 정결 예식만 지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절차만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인간의 성취로 쌓아 올린 종교’라고 부르는 그 외적인 종교 체계를 열심히 살아내는 사람도 아닙니다. 형식적인 의식을 행하고, 외적인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봅니다. 오직 마음이 청결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봅니다. 이 말씀이 왜 놀라운 말씀인가 하면, 예수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던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이기 때문입니다. 매우 강력한 말씀입니다. 오직 마음이 청결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봅니다. 잘 들으십시오. 사람은 늘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 거짓 사도들이 자기들끼리 서로를 기준 삼아서 자신을 평가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미 여러 번 이야기했죠. 바리새인들이 그런 데 능했습니다. 자기의 인격을 시험하고 싶을 때, 자기의 도덕성을 시험하고 싶을 때, 자기의 윤리를 시험하고 싶을 때, 내가 얼마나 선한 사람인지 점검하고 싶을 때, 항상 자기보다 더 나쁜 사람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나 그런 기준을 찾습니다. 언제나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찾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렇게 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성전에 들어와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이런 식입니다. 기준을 자기보다 낮은 곳에 둡니다. 그러면 어떤 결과가 생깁니까? 결국 가장 타락한 사람을 기준으로 삼게 됩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자기보다 더 못한 사람을 찾아서 그 사람을 기준으로 삼기 시작하면 그 기준이 전체적으로 끝없이 아래로 내려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 기준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준을 그렇게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세리보다만 낫게 살아라”, “도덕 없는 사람보다만 낫게 살아라”, “거짓말하고 도둑질하고 속이는 사람보다만 낫게 살아라”, “주위 사람들에게 불공평하게 대하는 사람보다만 낫게 살아라”, “자녀를 학대하는 사람보다만 낫게 살아라”, “살인자보다만 낫게 살아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보고자 한다면 100%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음이 ‘청결’해야 합니다. 하나님 자신을 기준으로 삼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산상수훈으로 말하면 마태복음 5장 48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것이 기준입니다.

사람은 기준을 세울 때 세상에서 가장 타락한 사람을 기준으로 삼으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자신을 기준으로 세우십니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까? 누가 천국에 갑니까? 누가 구원을 받습니까? 누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설 자격이 있습니까? 누가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까? 누가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습니까? 누가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까? 누가 참된 행복을 아는 사람이 됩니까? 마음이 청결한 사람뿐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곰곰이 생각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말씀은 당시 유대인들의 중심을 정확하게 찌르는 말씀이구나.” 겉모습에 너무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바리새인들이 손이나 그릇이나 냄비를 정해진 방식대로 씻지 않으면 얼마나 민감해졌습니까. 이런 모든 절차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철저하게 드렸다고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작은 허브 잎 하나에서도 정확하게 십일조를 떼어낼 만큼 꼼꼼했다는 거죠. 그런데 사랑과 진리와 긍휼과 정의는 전혀 없었습니다. 잎사귀의 십일조는 아주 정확하게 떼어냈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것에만 전념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모든 것이 겉모습뿐이었고, 주님은 이들이 두르고 있던 위선의 겉옷을 한마디로 완전히 찢어버리셨습니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을 봅니까? 겉모습만 갖춘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청결한 사람입니다. 바로 마음이 깨끗해야만 하나님을 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렇게 중요한 핵심이고, 이렇게 절정에 있는 말씀이라면 왜 팔복 중에서도 여섯번째나 되어서야 나옵니까? 팔복은 어느 하나도 빠질 수 없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어느 것 하나도 뺄 수 없습니다. 모두가 중요합니다. 이 말씀들은 하나님의 마음속 질서에 따라 아름답고 장엄한 흐름으로 완벽하게 이어집니다. 처음이 더 중요하다거나, 마지막이 더 중요하다거나, 중간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모두 동일하게 중요합니다. 모두 같은 진리의 일부입니다. 모두 한 덩어리의 진리입니다. 하나를 떼어낼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람은 이 모든 것을 이루어 가는 사람입니다. 이 모든 겁니다. 선택적으로 골라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여러 가지가 있으니까 나는 이것만…”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일련의 생명의 흐름입니다.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라는 출발점에 이르면, 그 다음부터는 성령님의 역사 속에서 나머지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이 말씀은 자신의 영이 가난하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내세울 수 없는, 구석진 곳에 숨어 있는 거지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저 손을 내밀 때 누군가로부터 무엇이라도 받을 수 있는 그러한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스스로 아무것도 얻을 능력이 없다는 사실 앞에서, 얼굴조차 들지 못한 채 깊은 부족함을 느끼며 하나님께 손을 내밀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거지처럼 손을 내미는 사람의 다음 반응은 자신을 그 자리에 놓아버린 죄 때문에 애통합니다. 그 깊은 죄의식 속에서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하나님 앞에서 온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낮아진 마음으로 자신이 얻을 수 없는, 그러나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 의를 갈망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의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다음 복입니다. 그렇게 긍휼히 여김을 받은 사람은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베푸신 긍휼로 마음이 깨끗하게 된 사람, 곧 하나님의 의를 갈망한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청결한 마음을 주십니다. 바로 그때에야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마음이 청결한 사람만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흐름은 절대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면, 세상은 여러분을 박해하고, 거짓을 말하고, 미워하고, 멸시합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12절에서 말하듯이 기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상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팔복의 자연스러운 흐름 때문입니다. 마음의 청결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뒤에 옵니다.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신 뒤에 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긍휼이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내기 때문이죠. 긍휼이 우리의 악한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우리가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긍휼로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로 깨끗해진 그 마음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청결함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여기 있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이유가 있습니다. 앞의 일곱 가지 복이 모두 아름답게 맞물리기 때문입니다. 처음 세 가지는 네 번째로 이어지고, 그 다음 세 가지는 네 번째에서 흘러갑니다. 가운데에 있는 네 번째 말씀, 가장 중요하게 보이는 말씀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입니다.

영의 가난함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이 거지와 같은 상태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죄를 애통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자신이 철저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자연스럽게 겸손하고 온유해집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의를 갈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하고, 마음의 청결함을 얻게 되고, 화평하게 하는 은혜의 선물을 얻습니다. 다시 말해 처음 세 가지는 네 번째로 이어지고, 마지막 세 가지는 네 번째에서 흘러나옵니다. 그런데 팔복이 이보다 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아십니까? 첫 번째와 다섯 번째, 두 번째와 여섯 번째, 세 번째와 일곱 번째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자신이 거지 같은 존재라고 인정하는 영이 가난한 사람은 다른 이들에게 긍휼을 베풉니다. 거지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긍휼로 주어진 선물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긍휼을 베풉니다. 둘째로, 죄를 애통하는 사람은 마음의 청결함을 알게 됩니다. 죄를 애통하지 않으면 그 죄가 깨끗해질 수 없기 때문에, 참된 회개에는 반드시 애통함이 따릅니다. 그렇게 애통하는 마음은 청결한 마음과 연결됩니다. 마지막으로, 온유한 사람이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됩니다. 제가 빌립보서 2장을 오래전에 묵상하면서 배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그 누구도, 정말 그 누구라도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다른 이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됩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됩니다. 온유한 사람은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팔복이 서로 얽혀 있는 아름다운 구조를 보면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역사적으로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정확한 자리에 놓여 있다는 말입니다. 그날 무리 가운데에는 바리새인 율법주의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어떤 종교 집단에나 늘 있습니다. 세상 어디에나 있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죠. “나는 괜찮아.” “하나님이 나를 지옥으로 보낼 리가 없어. 나는 고양이도 걷어차지 않았고, 옆집에서 물어보면 삽도 빌려줬어.” “나는 사람을 죽인 적도 없고, 아내를 버린 적도 없고, 좋은 아버지고, 아이들 먹이고 입히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어.” 바로 인간 업적이라는 종교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절에 가서 향을 피우고, 제물을 바치고, 그렇게 해서 어딘지도 모르는 소위 열반에 올라가려고 하고, 스스로를 비워서 무아지경의 상태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세상 곳곳에 있습니다.

세상에는 종교가 딱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세상에 종교가 얼마나 많은데요”라고 물으시겠지만, 아닙니다. 단 두 종류입니다. 전 세계에 존재하는 종교는 딱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인간의 성취를 기반으로 하는 종교입니다. 수없이 많은 이름으로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지만 결국 똑같습니다. 스스로 길을 만들어 스스로 구원을 얻는 방식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성취를 기반으로 하는 종교입니다. 이 종교는 너는 할 수 없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는 종교는 단 하나, 기독교뿐입니다. 세상에는 이 두 종교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성취와 하나님의 성취, 둘 중 하나뿐입니다. 인간의 성취는 여러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결국 똑같습니다. 사탄의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무리 속에나 스스로 해내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힘으로 천국에 가려고 하는 사람들이죠. 자신의 노력, 자신의 능력, 자신의 자원으로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그날 그 무리 속에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 예수님은 처음부터 그들의 가식을 완전히 벗겨내셨습니다. 그들은 외적인 의식주의로 만족했습니다. 피상적인 율법적 행위와 외적인 종교체계로 충분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미안하지만 너희는 하나님을 볼 자격이 없다. 내 나라에 들어오지 못한다. 나는 마음이 청결한 사람을 찾고 있다. 나는 내면을 말하고 있다.” 그 사람들은 변명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시편 51편 6절 말씀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시편 24편에서도 동일한 진리를 말합니다. 시편 24편 1절부터 5절입니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장 넓게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습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갑니까? 누가 하나님을 봅니까? 그 답이 4절에 나옵니다.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공의를 얻으리니.”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까? 누가 구원을 받습니까? 누가 의롭다 여김을 받습니까? 누가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시편 24편의 내용을 이 팔복 한 구절에 응축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만일 그들이 그토록 높이 찬양하고 사랑했던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기억했다면 이미 알고 있었을 겁니다. 이사야 59장 1절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구원받지 못한 이유가 하나님이 닿지 못해서가 아니라는 뜻이죠. 하나님의 팔이 짧아서 미치지 못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 다른 이유가 이어집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실하게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행을 잉태하여 죄악을 낳으며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12절에서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우리의 허물이 주의 앞에 심히 많으며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언하오니 이는 우리의 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니라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 16절입니다.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공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공의를 갑옷으로 삼으시며 구원을 자기의 머리에 써서 투구로 삼으시며 보복을 속옷으로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으로 삼으시고.”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장면이죠. 그리스도께서 둘러보실 때 죄 가운데 길을 잃은 사람들을 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사람들이 이렇게 외칩니다. “중재자 없습니까? 우리를 위해 설 사람이 없습니까?” 그때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옷을 입고 움직이셨습니다. 그리고 20절입니다.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이해가 되십니까?

만일 그들이 이사야 59장을 알고 있었다면 스스로 던진 질문의 답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겁니다. 에스겔 36장을 알고 있었다면 메시아가 오셔서 자기 백성의 마음을 씻으신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은 언제나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입니다. 불변의 진리입니다.

종교를 대하는 세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교리와 체계를 의지하는 머리의 종교가 있고, 선한 행위를 의지하는 손의 종교가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마음의 종교다.” 하나님이 주시는 정결함을 바탕으로 하는 종교입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어디를 보신다고요? “중심을 보느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놓쳤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알지 못합니다. 시온에서 오시는 구속자를 알지 못합니다. 구원의 우물에서 마시는 것이 무엇인지 평생 모르고 죄 가운데 좌절하며 죽게 될 겁니다. 마음이 청결하지 않다면 말입니다. 마음이 청결하지 않으면 정말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놀라운 사실은 바로 이겁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바로 여러분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여러분의 죄를 가져가셨고, 그 죄에 대한 모든 형벌을 치르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예수님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신다고 말합니다. 엄청난 교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가져가시고,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정결한 자로 여기십니다. 이 조건 외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정결하게 여기실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영국의 시인이자 찬송가 작곡가 캐이츠비 패이젯(Catesby Paget)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내가 얼마나 사랑받는지, 더 이상의 사랑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나는 아들과 같이 사랑받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내가 얼마나 가까운지, 그 이상 가까워질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나는 아들처럼 가깝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자리를 대신하시고, 나무에 달리신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 주어지고,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8절 말씀은 이러한 문맥에서 주어졌습니다.

자, 이제 두번째 질문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그런데 아마 오늘 밤에는 이 모든 질문을 다 다루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 두 개는 추가적인 질문이니까 생략하겠습니다. 두번째 질문입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실제로 무엇을 뜻합니까? 이것이 핵심 질문입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마음’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칼디아(kardia)’입니다. 영어의 심장(cardiac)이라는 단어가 여기서 왔습니다. 헬라어로 ‘마음’이라는 뜻이죠. 성경에서 마음은 언제나 인간의 속, 인격이 자리하는 내면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내면, 그러니까 속사람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마음은 주로 사고의 과정을 가리킵니다. 감정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이 감정을 말할 때 어떤 표현을 사용하는지 이미 여러 차례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성경은 감정을 말할 때에 ‘창자에서 우러나오는 긍휼’ 이런 식의 표현을 씁니다. 뱃속, 몸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가리키는 것이죠. 때로는 자신의 느낌을 따라서는 간이 이렇다고 느낀다는 식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이 이런 식의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감정을 뱃속에서 느끼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할 때 뱃속에서 느끼고, 누군가를 미워할 때도 뱃속에서 느끼고, 어떤 감정이 강하게 일어날 때면 창자가 뒤틀린다는 식으로 표현했습니다. 사실 오늘날도 그렇죠. 우리의 감정은 내부 장기에 영향을 줍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마음과 생각은 보통 함께 묶여 있습니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그러니까 마음으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마음은 주로 사고의 과정과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마음이라는 단어가 때로는 의지 혹은 감정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지만, 그 경우에도 지성에서 파생된 의지와 감정입니다. 지성에서 흘러나온 의지와 감정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데 집중하면 의지에 영향을 주고, 의지는 다시 감정에 영향을 줍니다. 생각이 의지를 만들어 내고, 의지가 감정을 움직이는 겁니다. 의지를 하나의 큰 바퀴처럼 생각하면 됩니다. 생각이 그 바퀴를 돌리기 시작하면, 바퀴가 돌아가면서 감정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여기서 “마음이 청결한 자”라고 말씀하실 때 의미하는 것은 사람의 속, 곧 마음과 생각과 의지를 움직이고 감정을 이끄는 내면 전부를 가리킵니다.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과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아주 강한 도전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겉만 관리하면 된다고, 외적인 것만 지키고, 종교적인 활동만 바르게 하면 괜찮다고 가르쳐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7장이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마음은 사람의 속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유대인의 사고에서 마음은 모든 일이 일어나는 곳, 인간의 내면 전체를 의미합니다.

이 주제를 이해하는 데 아주 좋은 말씀이 있습니다. 잠언 4장 23절입니다. 이 말씀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줍니다. 아주 짧은 구절이니까 그대로 인용합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다시 말해서 마음이 무엇이든, 마음은 인생의 모든 문제들이 흘러나오는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이 모두 이 마음에서 흘러나옵니다. 에베소서 6장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마음으로 행하라고 합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 마음은 모든 것이 생성되는 자리입니다. 예레미야 17장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창세기 6장 5절에서 하나님이 대홍수 이전의 세상을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마음은 생각하는 곳이자 행동이 흘러나오는 곳입니다.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나옵니다.

마태복음 15장 19절입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아무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정면으로 책망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정결예식을 그렇게 크게 여기지만,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마음이다.” 18절입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야고보서 4장 8절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겉을 말합니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속을 말합니다. 이런 말씀이 성경에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은 변화된 마음을 원하십니다. 문제의 핵심입니다. 다윗을 기억하십니까? 시편 51편에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이여 내 속에,” 무엇을요?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한 마음을 창조하소서.” 다윗의 인격과 존재의 근원은 바로 마음이었습니다. 시편 73편 1절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의 내면을 보십니다.

여러분, 한 가지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일주일 내내 교회에 나온다 해도, 성경을 들고 다니고 성경 구절을 외운다 해도, 마음이 깨끗하지 않다면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지 못한 겁니다. 얼마나 종교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윗과 사울을 예로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부르셨을 때 사울은 사실 여러모로 엉망이었습니다. 키가 크고 잘생겼지만 그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10장 9절은 하나님이 사울에게 새 마음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사울의 내면을 바꾸셔야 했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사무엘상 10장 9절은 “하나님이 사울에게 새 마음을 주셨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울이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께 불순종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제사장처럼 행동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이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왜입니까? 왜 하나님은 마음을 중요하게 보십니까? 그 대답이 사무엘상 16장 7절에 나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다윗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선택하셨습니다. 다윗이 바른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시편 9편 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시편 19편 14절에서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시편 26편 2절에서 다윗은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라고 부르짖습니다. 시편 27편 8절에서는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보이십니까? 다윗은 마음에서부터, 그러니까 내면에서부터 움직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시편 28편 7절에서도, 시편의 앞부분만 보더라도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입니다. 다윗은 자기 가장 깊은 속에서 하나님을 찾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시편 57편 7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외칩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 제 마음은 이미 주님께 고정되어 있습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의 모습입니다. 다윗은 행위로는 실패한 적이 있었지만 마음은 늘 하나님을 향해 있었습니다. 반대로 유대 지도자들은 행위로는 실패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모든 의식을 빠짐없이 지켰는지는 모르지만, 마음은 하나님께 향해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제 “마음이 청결한”이라는 말씀 중에서 “청결”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카타로스(katharos). 카타로스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청결’이라는 주제는 인기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청결이라는 것이 밋밋하고, 재미도 없고, 일상과 동떨어진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수도원에서 긴 옷을 입고 사는 특이한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그렇게 여깁니다. 그렇다면 청결하다, 정결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카타로스(katharos)라는 단어는 카타리지오(katharizō)에서 나온 명사입니다. 더러움과 죄악을 씻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장 단순한 뜻입니다. 도덕적인 의미에서는 죄로부터 자유하다, 이런 의미입니다. 라틴어 카스투스(castus)와 연결되어 있는데, 카스투스는 영어 단어 체이스트(chaste), 그러니까 ‘순결한’이라는 단어의 어근입니다. 의미가 서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는 의료계에서 일하시는 분이 계실 겁니다. 카타르틱(cathartic)이 무엇인지 아시죠? 상처를 씻어내거나 어떤 부위를 깨끗하게 하려고 사용하는 약제이죠. 또 어떤 사람이 심리상담가나 전문 상담가를 찾아갔을 때 카타르시스(catharsis)를 경험했다고 말할 때도 있는데, 마음과 감정이 씻겨 나가는 그런 경험입니다. 이 단어의 기본 의미는 ‘깨끗하게 하다’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에는 두 가지 흥미로운 의미가 있습니다. 아주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단어가 ‘섞이지 않은’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청결한, 정결한’이라는 단어는 금속이 다른 금속과 섞이지 않은 상태, 곡식에서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상태, 체에 쳐서 쭉정이를 걸러낸 상태,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정결하다는 것은 그 어떤 이물질도 섞이지 않은 상태, 변질되지 않은 상태, 혼합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주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도 이런 뜻입니다. “나는 섞이지 않은 마음을 원한다. 섞이지 않은 헌신, 섞이지 않은 동기를 원한다. 정결한 마음에서 나오는 정결한 동기를 원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영적인 온전함’이라는 개념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태도와 관련이 있고, 두 마음을 품는 분열이나 거짓과는 반대되는, 하나로 모아진 마음과 온전함을 의미합니다. 예레미야 32장 39절 기억하십니까?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겠다. 이제 더 이상 나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신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의 헌신, 하나의 목적입니다. 다시 말해 동기입니다. 정결한 동기입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도 계속해서 강조하십니다. 산상수훈에서 조금 뒤쪽에 있는 6장 19절부터 23절에 가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우리가 사물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어떤 관점으로 보는지가 인생 전체를 좌우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동기가 정결하면 삶도 정결합니다. 동기가 부패하면 삶도 부패합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하나여야 합니다. 헌신이 하나여야 하고, 동기가 하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24절에서 이렇게 요약하십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 단일함입니다. 야고보도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야고보서 4장에서 두 번이나 말합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둘 다 가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겉을 말하는 것이고,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속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정결한 동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 이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정상적인 마음가짐입니다. 저는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을 볼 때마다 그렇게 느낍니다. 바울은 무엇을 원했습니까? 옳은 것을 행하고 싶어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내 의지는 옳다. 나는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갈망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기뻐한다. 그러나 내 안에 있는 죄가 나를 무너뜨린다.” 다시 말해, 바울은 “내 동기는 정결한데, 내 육신의 죄가 정결하지 못하게 한다”라고 고백하는 겁니다.

자,, 그러니까 하나님은 정결한 동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정결한 동기가 마음속에 반드시 있습니다. 만약 그 마음이 전혀 없다면, 저는 그 사람이 정말로 하나님을 아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진짜로 보는 사람, 하나님을 진짜로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동기가 정결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죄를 지을 때는 동기가 흐려졌을 때였습니다. 동기가 꼬이고 뒤틀렸을 때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항상 같은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라고 외쳤을 때 어디 있었는지 아십니까? 아둘람 굴에 숨어 있었습니다. 왜 거기 숨어 있었을까요? 가드에서 어리석게 행동했기 때문이죠. 다윗은 가드 땅, 그러니까 블레셋 지역에 있을 때에 “이 가드 사람들, 이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죽일 거야. 너무 두렵다”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미친 체하고 대문에 끄적거리고 침을 질질 흘리면서 정말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러자 가드 왕 아기스가 “이 미치광이 당장 내보내” 이렇게 말했죠.

그렇게 다윗은 아둘람 굴 속에 숨어 있으면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다윗아, 너 스스로 지켜보겠다고, 스스로 네 목숨을 구해보겠다고 하다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어리석은 짓을 하고 말았구나. 이제 온 세상 사람들이 성경을 통해 네가 얼마나 어리석게 행동했는지 알게 될거야. 너는 하나님을 욕되게 했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실패했어.” 그리고 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이제는 제 마음이 확정되었습니다. 여호와여, 제 마음이 확정되었습니다.” 더 이상 두 마음을 품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 마음에도 이런 갈망이 있습니까? 여러분 마음에도 정결한 동기가 있습니까?

위대한 존 번연은 <천로역정>과 <거룩한 전쟁>을 비롯한 많은 걸작을 썼습니다. 어느 날 누군가가 번연에게 와서 “오늘 설교는 정말 걸작이었습니다. 당신은 위대한 설교자입니다”라고 칭찬했을 때, 번연은 슬프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제가 강단에서 내려오는 바로 그 순간에 이미 마귀가 제게 그렇게 말해주었어요.” 정결한 동기라는 것이 바로 이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해야 합니다. 정결한 동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카타로스(katharos)라는 단어는 동기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정결한 동기를 가졌지만 하나님께 나아오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못 위를 걷기도 합니다. 제가 멕시코시티에 갔을 때 과달루페 신전에서 사람들이 무릎으로 150미터, 200미터, 300미터를 기어가는 모습을 제가 봤습니다. 무릎이 피로 물들었습니다. 여성들은 옷을 무릎 위로 내려서 덮으면서 기어가고 있었습니다. 옷이 온통 피로 뒤덮였습니다. 심지어 아기를 등에 업고 기어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정말 진지하게 최선을 다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옳은 행동은 아닙니다. 엘리야 시대의 바알 숭배자들을 보십시오. 칼로 자신을 베고 찢고 할 때, 그 사람들도 진지했을 겁니다. 몸을 난도질할 정도라면 진심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방향이 잘못되었습니다.

카타로스(katharos)라는 단어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단순히 정결한 동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동기에서 흘러나오는 거룩한 행동까지를 포함합니다.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정결한 동기에서 흘러나오는 정결한 행위가 뒤따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토머스 왓슨(Thomas Watso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덕성도 악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빠르게 익사시킬수 있다.”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배는 금을 싣고도 가라앉을 수 있고, 거름을 싣고도 가라앉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이 자신의 동기가 정결하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매우 종교적인 사람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행동이 하나님의 말씀에 합하지 않으면, 그리고 그 행동이 진짜 정결함을 드러내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자, 그러니까 정결한 동기만이 아니라 동기와 그 이상의 것, 동기에서 흘러나오는 정결한 행위까지를 포함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몇 가지 생각을 덧붙이면서 정리하겠습니다. 정결함에는 다섯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잘 들으셔야 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전체가 완전히 정리됩니다. 정결함의 다섯 가지 종류입니다. 준비되셨습니까? 첫째는 ‘본원적 정결함’입니다. “본원적 정결함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하나님께만 존재하는 정결함입니다. 태양의 본질이 빛이고, 물의 본질이 젖는 것이듯이, 정결함은 하나님께 본원적으로 속한 것입니다. 이것이 본원적 정결함입니다.

둘째는 성경에 직접 이 용어가 나오지는 않지만, 성경이 제시하는 개념으로써 ‘창조된 정결함’입니다. 타락 이전에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부여하신 정결함입니다. 하나님은 천사들을 정결하게 창조하셨고, 사람도 정결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둘 다 타락했습니다. 정리하면, 하나님께만 속한 본원적 정결함이 있고, 이 본원적 정결함에서 피조물에게 주신 창조된 정결함이 있습니다.

세번째는 최종적 정결함입니다. 최종적 정결함은 영화(glorification)의 범주에 속합니다. 다시 말해서, 결국 하나님의 모든 성도들은 완전히 정결하게 될 겁니다. 우리는 모든 죄가 씻겨 나가고, 완전히 깨끗해지고, 하나님의 영원한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될 겁니다. 그때 우리는 최종적 정결함을 경험할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2절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네번째는 지위적 정결함입니다. 지위적 정결함은 엄청난 진리입니다. 지위적 정결함은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주어진 정결함인데,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지위적 정결함을 전가하십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의 지위가 정결함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존 맥아더를 보실 때, 믿기 어렵겠지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존 맥아더야, 그렇다. 너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정결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의가 너에게 적용되었다.” 로마서 3장은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5장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역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도 같은 말을 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도 같은 진리를 말합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는 남편들이 아내를 사랑하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깨끗하게 하신 것처럼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가 정결한 처녀와 같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위적 정결함입니다.

다섯번째입니다. 지금까지 본원적 정결함, 창조된 정결함, 최종적 정결함, 지위적 정결함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실제적 정결함입니다. 이것이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본원적 정결함은 하나님만 알고 계시고, 창조된 정결함은 하나님만 주실 수 있습니다. 언젠가 하나님은 모든 성도에게 최종적 정결함을 주실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모든 믿는 사람은 지위적 정결함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어려움을 겪는 부분이 바로 이 실제적 정결함 아닙니까? 우리의 지위가 말해주는 그대로를 삶으로 살아내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7장 1절에서 모든 신자에게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여기서 바울은 본원적 정결함이나 창조된 정결함이나 최종적 정결함이나 지위적 정결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네 가지는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바울이 지금 외치는 것은 실제 삶에서 드러나는 정결함입니다. 물론 아무리 노력해도 금속에 철이 조금 섞이는 것처럼, 아무리 노력해도 흰 옷에 검은 실이 조금은 섞이는 것처럼 완전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최대한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잘 들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위적으로 정결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삶 속에서 그 정결함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정결한 동기와 정결한 삶으로 나타납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정결한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니거나, 그리스도인이지만 불순종의 상태에서 살고 있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실패할 수 있습니다. 네, 실패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실패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우리는 정결하지 못하도록 유혹받을 것입니다. 정결하지 못한 생각을 품고, 정결하지 못한 말을 하고, 정결하지 못한 일을 하도록 유혹받을 것입니다. 옳지 않은 동기를 품어서 옳지 않은 말과 행동으로 이어지도록 유혹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유혹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십시오. “제가 실패하면 어떻게 됩니까? 실패하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성경은 그것도 알려줍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성경은 유혹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실패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죄를 직면하고 회개라는 방식으로 처리할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를 씻어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른 차원의 정결함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정결하게 하신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진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반드시 알아야 할 또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 마음은 어떻게 정결하게 될 수 있을까? 내 마음은 어떻게 정결하게 되는가?”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정말 정결하게 되려면 산꼭대기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세상에서 떨어져 살아야 해. 악을 보지도 말고, 악을 듣지도 말고, 악을 말하지도 말아야 해.” 수도원주의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야, 진짜 정결하게 되는 길은 ‘두번째 은혜의 체험’을 하는 거야. 구원받고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면 두번째 은혜를 받아.” 실제로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이 두번째 은혜가 임하면 하나님이 신비한 방식으로 우리의 죄성을 뿌리째 제거해 주셔. 그 이후로는 평생 죄를 짓지 않게 된단다.” 제가 예전에 그런 체험을 했다고 주장하는 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두번째 은혜의 체험을 받아서 죄성을 완전히 제거받았기 때문에 절대 죄를 짓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럼 실수는 하시나요?”라고 물었더니, “예, 하긴 하지만 그건 좀 다릅니다”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저는 수도원 생활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완전주의도 정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은 어떻게 정결하게, 청결하게 될 수 있습니까? 제가 세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첫째, 스스로는 절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청결한 마음을 원하신다면, 스스로는 그 일을 절대로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잠언 20장 9절은 이렇게 묻습니다.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냐.” 누가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표범이 자기의 반점을 바꿀 수 있습니까? 구스인이 자기 피부색을 바꿀 수 있습니까? 누가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둘째입니다. 사도행전 15장 9절은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이렇게 말합니다. 행위로는 할 수 없습니다. 행위로는 안 되지만 믿음으로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5장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렇다면 믿음은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무엇을 신뢰하는 겁니까? 그 대답이 요한일서 1장 7절에 있습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해가 되십니까? 행위로는 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믿는 믿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곧 죄를 깨끗하게 하시는 그 피를 믿는 믿음입니다. 청결한 마음을 원하십니까?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받아들이십시오. 이미 이루신 그 사역을 받아들이십시오.

스가랴 13장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여러분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존 목사님, 저는 이미 그렇게 했습니다. 이미 제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 드렸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지위적으로는 정결하다는 것도 알고, 언젠가 최종적으로도 정결하게 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실제적 정결함에서는 너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어떻게 실제적으로 정결해질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냐고요? 바로 성경에 머무는 것입니다. 성경 안에 머무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요한복음 15장 3절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무엇으로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으로 깨끗해지는 겁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말씀 안에 머무르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욥기 말씀을 읽으십시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느냐?” 이 질문에 대한 단 하나의 대답은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 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제가 깨끗해질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의 답은 행위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아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정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믿는 믿음입니까? 여러분을 위해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삶에서 죄 가운데 싸우고 있다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십시오.

질문 하나를 더 하겠습니다. 정결함에는 어떤 약속이 붙어 있습니까? 우리가 정결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8절 하반절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봅니까?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헬라어로 미래 직설법입니다. 미래에 지속되는 일을 나타내는 시제입니다. 제가 그 의미를 풀어서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 헬라어 중간태로서, “그들은 계속해서 스스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받아서 마음이 청결하게 되는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살게 됩니다. 육안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으로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이 계심을 깨닫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주여, 주의 영광을 보여주소서”라고 외쳤던 모세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마음이 정결하게 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복해서 보게 됩니다. 구약 성도에게 가장 큰 소망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고백입니까. 빌립도 그날 예수님께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여러분의 마음이 청결하게 되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살아 계신 분이 되고, 여러분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숙해지고, 더욱 정결해질수록, 하나님을 보는 그 영광스러운 눈은 더욱 깊어지고 더욱 밝아집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더 청결할수록 더욱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진리입니까. 욥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욥기 42장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런데 욥은 어디에서 하나님을 보았습니까? 고난 가운데에서 보았습니다. 시편 기자는 창조 속에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삶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보고,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가운데 살아 계십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이 정결하게 되지 않으면 그 살아계신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마음의 정결함이 영혼의 눈을 깨끗하게 하여서 하나님을 보게 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진리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보고 싶으십니까? 여러분의 세상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분으로 경험되기를 원하십니까? 지금도, 영원토록 그렇게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마음을 정결하게, 청결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궁극적인 의미에서도 그렇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실제 눈으로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가운데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날이 되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뵙는 그날이 올 것입니다. F. F. 불라드(F. F. Bullard)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마지막에 영화되어 주의 영광스러운 얼굴을 보게 될 때, 모든 고단한 밤이 지나고 주와 함께 깨어 그 영광을 바라볼 때, 그때에야 비로소 내가 만족하리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저녁에도 말씀을 함께 나누며 마음이 풍성해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 마음 깊은 곳에 확증되어 우리의 뜻과 행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우리를 정결하게 하옵소서.

만일 오늘 저녁 이 자리에 그리스도 없이 앉아계신 분이 있다면, 스스로도 마음이 청결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여러분의 죄가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마음 한편에서는 이렇게 외칠지도 모릅니다. “저는 하나님을 알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그 청결한 마음을 갖고 싶습니다. 죄책감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는 회개와 용서를 받고 싶습니다. 정결함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용서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죄와 죄책감이 가져온 고통과 괴로움과 좌절의 무게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만일 지금 여러분 마음 속에 그런 갈망이 있다면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주 예수님, 저는 주님이 저를 위해 피를 흘리셨고 그 피가 저의 죄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주님이 저를 위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지금 제 삶을 주님께 드립니다. 저의 주님이시자 구주가 되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삶을 드려서 오직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정결함을 알게 되기를 참으로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인데도 삶 속에서 정결하지 못한 것들이 있다면, 여러분도 잘 아실 겁니다. 우리가 정결하지 못하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어느 순간 하나님이 더 이상 선명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흐릿하게, 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기쁨은 사라지고, 하나님을 보는 시야도 사라집니다. 충만함을 느끼던 자리에 공허함이 들어오고, 기쁨의 자리에 슬픔이 찾아옵니다. 목적의 자리에 무의미함이 자리를 잡고, 결국 마음이 괴로워집니다. 지금 이 시간 고백하고 회개함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십시오.

주 예수님,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우리를 만나 주시고, 우리 안에서 우리를 정결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 영광이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을 계속 보면서 살아가는 삶의 은혜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처럼 참으로 놀랍고 아름답게 보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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