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마태복음 5장 5절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저는 성경을 볼 때마다 매번 지금 살펴보고 있는 부분이 가장 놀랍다고 느낍니다. 마태복음에서도 확실히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마태복음으로 한 25번쯤 설교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매번 너무나 흥미롭고 감격스럽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마태복음 5장은 예수님께서 하신 놀라운 설교로써 ‘산상수훈’ 이라고 불립니다. 저는 이 말씀 속에 담긴 진리의 깊이에 압도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제가 느끼는 것의 일부분, 아마도 빙산의 일각만 보고 계실 겁니다. 왜냐하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가 매일 이 위대한 말씀을 살펴볼 때 제 마음과 생각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 짧은 시간에 다 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성령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 말씀에 따라 살 수 있다면 저는 분명히 달라질 겁니다. 저에게도, 여러분에게도 신선한 변화가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라”는 이 말씀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충격이었습니다. 사실 앞선 세 가지 복, 그러니까 팔복 중 처음 세 가지 모두가 충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날 산 위에서 하신 말씀은 유대인들의 생각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던 것은 영적으로 교만해지는 법, 스스로 충분하다고 느끼는 법, 경건한 척하는 법이었습니다. 종교에 아주 익숙했습니다. 형식에 능숙했습니다. ‘특별한 무리’라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힘과 지혜와 능력과 자원으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이런 말을 들을 거라고 기대했습니다. “너희의 대단한 종교심을 칭찬하러 왔다. 너희의 훌륭한 영성을 인정하러 왔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보시고 매우 만족하셨다’라고 선포하러 왔다. 그러니 이제 바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자. 바꿀 건 거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그런 기대와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3절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사람이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자신에게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슬퍼하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교만한 사람이 아니라 겸손한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기대하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영성과 자부심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첫 말씀부터 그들의 기대를 모두 무너뜨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상한 심령을 원하셨습니다. 애통하는 마음을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겸손을 원하셨습니다.
자기 의로움도 없고 영적 교만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전의 말들에 여전히 충격을 받지 않았던 사람들도 이 말씀에는 분명히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이 말은 놀랍게 들릴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당시 사람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승리와 전리품이 강한 자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서 차지해라. 원하는 건 모두 움켜쥐어라. 남자답게 싸워라.” 이런 식이죠. 그러니 얼마나 충격이 크겠습니까.
상황을 잠깐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약 반세기 전, 기원전 63년에 폼페이우스가 팔레스타인을 로마의 영토로 병합했습니다. 그렇게 유대인의 독립은 막을 내렸습니다. 참고로 유대인은 피로 물든 마카비 혁명으로 독립을 얻었습니다. 그리스의 지배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권력 아래 새로운 속박이 다시 시작된 겁니다.
그때부터, 그러니까 기원전 63년 이후로 그 땅은 부분적으로 헤롯 왕가의 통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헤롯 왕가는 하나의 가문입니다. 말하자면 ‘헤롯’이라는 성(姓)을 가진 왕가입니다. 모두 로마 황제가 임명했습니다. 황제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왕’이라는 지위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왕을 세웠지만, 동시에 총독, 그러니까 로마가 직접 파견한 행정관을 두었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이 바로 빌라도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로마의 지배 아래서, 로마가 임명한 꼭두각시 왕들, 헤롯 가문, 총독, 행정관들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동시에 신약성경에 언급되는 거의 모든 지역도 로마의 지배 아래에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큰 억압을 받았습니다. 아주 슬픈 시대였습니다. 로마의 통치를 극도로 혐오했습니다. 현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이 유대 지도자들과 대화하실 때 그 모습이 아주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정말 어리석은 말이었습니다. 로마의 종이 되어 있으면서도 인정하지 않은 것이죠. 우리는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답니다. 교만했습니다. 로마라는 멍에를 경멸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든 이야기는 로마의 지배를 받는 배경을 가진 나라,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전개됩니다. 로마 황제, 가이사의 그림자가 신약 전반에 걸쳐 비치는 모든 빛을 흐리게 하고 있습니다. 신약의 거의 모든 장면마다 가이사의 흔적이 보입니다. 동시에, 유대인의 마음속에서는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시므온과 안나를 기억하십니까? 뭔가가 곧 일어날 것 같은, 메시아가 곧 오실 것이라는 기대로 가득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곧 세워질 것만 같았습니다. 구약이 분명하게 예언한 것이 이제 실현될 때가 되었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이 등장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입을 열어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장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마가복음 1장 14절입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유대인들은 흥분했습니다. 오랜 시간 로마의 지배와 압제 아래 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놀라운 능력을 행하는 분,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말씀을 전하는 분, 본 적이 없는 기적을 일으키는 분이 나타났습니다. ‘어쩌면 이분이 메시아일지도 몰라.’ 이렇게 생각을 했던 것이죠. 예수님께서 빈 들에서 큰 무리를 먹이시자 사람들은 진심으로 믿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붙잡아 왕으로 세우고 로마의 멍에를 벗겨줄 정치적, 군사적 혁명을 일으키고 싶어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주 흥분했습니다. 메시아가 로마를 무너뜨려 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군사력을 갖춘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나서 유대 민족의 독립을 이루는 혁명을 일으켜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이런 ‘군사적 해방자 메시아’의 개념은 주로 ‘열심당’이라고 불리는 유대인 집단에게서 나온 생각이었습니다. 당시 유대교에는 주요 분파가 네 개 있었습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열심당원, 그리고 에세네파입니다. 에세네파는 신비적 성향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쿰란 지역에 살면서 우리가 오늘날 ‘사해사본’이라고 부르는 문서를 필사했던 사람들입니다.
열심당원은 정치적 행동가들이었습니다. 종교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정치에 훨씬 더 큰 관심을 두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보수파였고, 사두개인들은 종교적 진보파였습니다. 열심당원들은 메시아가 오시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로마를 무너뜨릴 군사력을 세울 위대한 메시아가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열심당원들은 군사적 힘을 가진 나라를 꿈꿨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 역시 로마를 무너뜨리길 열망했지만, 이들이 바라던 나라는 ‘거룩한 신정 공동체’였습니다. 구약의 신정정치가 회복되기를 원했습니다. 메시아가 종교적인 방식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그런 나라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열심당은 ‘군사적 메시아’를, 바리새인들은 ‘기적을 일으키는 종교적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열심당원은 메시아가 군사적인 행동을 일으킬 것이라고 믿었고, 바리새인들은 메시아가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기적을 통해 로마를 무너뜨릴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두 집단 모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메시아를 보내실 것이라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니엘 7장 13절부터 14절 말씀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메시아가 구름을 타고 큰 영광 가운데 오시리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 일이 어떤 방식인지는 몰랐습니다. 각자가 자신들의 방식대로 상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사도들, 열두 제자들도 그렇게 기대했습니다. 사도행전 1장 6절에서 제자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언제 그 일을 행하시겠습니까? 언제 우리가 군사적으로든 기적적으로든 회복됩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목적은 달랐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이 빌라도와 대화하실 때, 빌라도는 왕이라면서 나라도 없고, 보좌도 없고, 왕관도 없는 예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인지 알아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너희는 내가 어떤 왕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군사적으로 움직이는 왕이 아니다. 그리고 기적을 일으켜 로마를 전복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것은 나의 목적이 아니다.” 예수님은 원하신다면 천사들의 군단을 부르실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수천, 수만의 천사들입니다. 그런데 한 천사가 단번에 앗수르 사람 18만 5천 명을 죽일 수 있다면, 천사 군단에 대항할 만한 세력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회복에 대한 희망은 그저 헛된 꿈일 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로마의 냉혹한 권력 아래에 있었습니다. 가이사는 그 어떤 독립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메시아가 오리라는 소망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타올랐습니다. 너무도 강하게 타올라서, 온 나라에 거짓 메시아들이 마치 온몸에 난 발진처럼 퍼졌습니다. 거짓 메시아들이 넘쳐났습니다.
열심당원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릴 수는 없다.” 그래서 같은 조직 안에 있던 암살단인 시카리파와 함께 로마를 향해 직접 행동에 나섰습니다. 로마의 고위 인사를 암살하거나 폭동을 일으키는 식으로 반란을 도모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결국 로마의 보복만 불러왔을 뿐입니다. 마침내 주후 70년에 로마는 열심당원들의 끊임없는 반란에 질려 버렸습니다. 그래서 로마 장군 티투스 베스파시아누스가 군대를 이끌고 내려와서 예루살렘을 완전히 파괴했습니다. 성이 무너지고 사람들은 짓밟혔습니다. 결국 110만 명이 학살당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약 60년이 지난 132년에서 135년 사이에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팔레스타인 전역으로 내려와서 이스라엘 땅의 모든 사람들을 도륙하고 모든 도시를 파괴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완전히 지워버렸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당시 유대인들이 무엇을 원했는지를 여러분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로마를 무너뜨릴 메시아를 원했습니다. 열심당원들은 군사적으로 가능하다고 믿었고, 바리새인들과 다른 종교 지도자들은 메시아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잘못된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목적으로 이 땅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의 독립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유대인의 구원이 있어야 했습니다. 구원이 먼저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유대인이 생각한 것과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듣기 시작했을 때, 유대인의 반응이 어땠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메시아가 흰 말을 타고 위풍당당하게 나타나리라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검을 휘둘러서 단번에 로마를 쓸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셔서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유대인들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아니 이게 무슨 메시아란 말인가? 이런 메시아가 어찌 사람들을 모을 수 있겠어? 애통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로 어떻게 로마를 감당할 수 있단 말이야?”
그래서 정치적 행동가들은 실망했습니다. 혁명을 일으키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또 종교인들도 실망했습니다. 예수님이 단지 병든 자를 고치셨을 뿐, 로마를 기적적으로 무너뜨리지는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이 로마인들에게 잡혀가고, 바라바와 함께 서 있는 모습, 채찍질을 당하고, 맞고, 상처를 입고, 머리에 가시관이 씌워진 채 빌라도 앞에 서 있는 비참한 모습을 보았을 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저 사람이 우리가 원하는 메시아라고? 아니야, 저 사람은 아니야.” 이사야 53장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보고서 이렇게 외친 겁니다. “이 사람은 우리가 원한 메시아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 바라바를 놓아주라! 바라바를 놓아주라! 저 사람보다는 바라바가 더 메시아에 가깝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기대가 무너졌기 때문이죠. 예수님이 자신들의 소원을 이뤄주지 않았기 때문이죠. 예수님이 죽자 완전히 등을 돌려 버렸습니다.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분이 바로 메시아였다”라고 말하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았나. 구약에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라고 기록되어 있어. 우리의 메시아가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말은 하지 마라. 로마를 무너뜨리지도 못하고, 세상의 형편을 바꾸지도 못했다면 그게 무슨 메시아냐.” 예수님의 부활도 믿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일어난 사실인데, 5백 명이나 되는 사람이 목격했는데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복음을 전할 때마다 늘 부활을 먼저 전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늘 이렇게 말해야 했습니다. “메시아는 반드시 고난을 받아야 했다. 반드시 죽어야 했다. 구약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을 알았다면, 이 모든 일이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 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크게 실망했습니다. 정말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실망했습니다.
이러한 유대인의 실망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들은 예수님의 첫 말씀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이게 무슨 말입니까? 세상에서 전리품은 강한 자의 몫이지, 온유한 자의 것이 아닙니다. 삶의 철학을 통채로 뒤흔들어 버리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종으로 오셨습니다. 이사야 40장부터 66장까지, 전체가 메시아를 ‘고난받는 종’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구약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아주 여러 차례 알려주셨는데도 말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실 때 이사야 61장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적으로 보기에 참으로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 18절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사람들은 모두 세상적으로 보면 참 비참한 이들입니다.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 된 자, 눈먼 자, 눌린 자. 유대인들의 눈에는 이렇게 보였을 겁니다. “아니, 도대체 이런 사람들이 무슨 메시아의 백성이란 말이야?”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미련한 자들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종이셨습니다. 로마를 뒤엎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 없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러 오셨습니다. 예수님 생애 전체가 겸손과 섬김의 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핵심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오셨는지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겸손, 자기부인의 목적을 알지 못했습니다.
산상수훈의 배경이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내 나라에 들어가는 자들은 자급자족하는 자가 아니다. 자의식이 강하고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아니다. 교만하고 강하고 오만하고 스스로 만족하는 자들이 아니다. 종교적인 사람들도 아니다. 내 나라의 백성은 마음이 상한 자들, 애통하는 자들, 온유한 자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 긍휼히 여기는 자들, 마음이 청결한 자들, 화평하게 하는 자들, 박해받는 자들, 욕을 먹어도 보복하지 않는 자들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유대인들의 생각을 완전히 뒤흔들어 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메시아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참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은 이런 사람들이다.” 정말 혁명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자주 잊어버립니다. 아주 정말 자주 잊어버립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단한 사람들, 세상의 유명한 사람들, 권력자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한 번도 그렇게 일하신 적이 없습니다. 단 한 번도 없으십니다. 부유하고 유명한 사람들을 통해 일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르셨습니다. “너희가 내 나라에 들어가고 싶으냐? 내 나라의 백성은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이다” 3절 말씀이죠. “슬퍼하는 자들이다” 4절이죠. “온유한 자들이다” 5절입니다.
이제 온유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온유함은 마음이 가난한 것과는 다르지만 그 뿌리는 같습니다. 다른 단어이지만 의미는 같습니다. 사실 성경은 이 두 단어를 서로 바꿔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주 아릅답게 구별됩니다. 잘 보십시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나의 죄에 초점을 둔 것입니다. 3절 말씀처럼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내가 죄인임을 아는 것입니다. 반면에 ‘온유함’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초점을 둡니다. 이 두 가지는 같은 진리의 양면입니다. 내가 죄인임을 알기에 심령이 가난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온유한 것입니다. 같은 진리의 두 측면입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렇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은 부정적인 상태이고, 그 결과 애통함이 생깁니다. 그러나 온유함은 긍정적인 상태로 의를 추구하게 만듭니다. 이해되시죠? 같은 흐름의 다른 측면입니다. 순서상으로 아름답습니다. 먼저 심령이 산산이 부서지고 자신의 죄악을 깊이 깨닫는 부정적인 단계가 있은 후에 그 결과 애통함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반대편을 보니 거룩하신 하나님이 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유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이 순서, 이 흐름이 보이십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행복은, 복은 이런 사람들에게 있다. 자신의 죄에 대해 깨닫고, 그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께 반응하는 사람들에게 있다.” 반대로 복이 없고 행복하지 못하며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사람들은 교만하고, 자족하며, 자기 의로 가득하고, 회개하지 않고, 목이 곧고, 스스로 높아진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은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적이었습니다. 정말 큰 충격이었습니다.
열심당원들은 “우리는 군사적인 메시아를 원한다. 군사적인 나라를 원한다”라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우리는 기적을 일으키는 메시아를 원한다. 기적의 나라를 원한다”라고 합니다. 사두개인들은 “우리는 물질적인 나라를 원한다”라고 합니다. 철저한 물질주의자였습니다. 아마 에세네파는 한쪽 구석에서 “우리는 수도원 같은 나라를 원한다” 이렇게 했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는 온유한 나라를 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본질은 물질주의가 아닙니다. 수도원적 은둔도 아닙니다. 군사주의도 아니고, 단순히 눈에 보이는 기적의 세계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온유한 사람들을 위한 나라입니다.
사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세상은 행복과 성공을 힘, 자신감, 자기 확신, 약육강식, 정복, 권력, 이런 개념과 연결시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온유한 사람들을 위한 나라입니다.
에베소서 4장 기억하십니까? 오늘 저녁에도 그 말씀의 병행 구절을 많이 다루게 될 겁니다. 에베소서 4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바울이 묻습니다. “그럼 어떻게 행해야 합니까?”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온유한 자들을 위한 나라입니다. 디도서 3장 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아주 단순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온유하십시오. 골로새서 3장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성경은 곳곳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기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언제나 같았습니다. 구약으로 거슬러 올라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준은 온유함이었습니다.
시편 22편 26절입니다. “온유한(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영생은 온유한 자에게 속한 것입니다. 교만한 자가 아니라 온유한 자에게 속합니다. 시편 25편 9절입니다.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하나님은 온유한 자와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시편의 마지막 부분, 시편 147편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온유한(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하나님은 온유한 자들을 붙드시고 세워주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온유한 자를 주목하십니다. 온유함이 하나님의 우선순위입니다. 하나님은 온유한 자들을 자신의 사람으로 여기십니다. 이사야 29장 19절 말씀입니다. “온유한(겸손한) 자에게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쁨이 더하겠고...” 보십시오. 구원과 가르침과 복과 기쁨은 온유한 자를 위한 것입니다.
제가 계속 강조해 온 것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나라가 온유함으로 특징지어지는 사람들로 채워질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녁에는 다섯 가지 질문을 통해서 온유함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첫번째 질문입니다. 온유함이란 무엇입니까? 온유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온유함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반드시 이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복된 사람이 온유한 사람뿐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복되기를 원한다면, 온유함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온유함이란 무엇입니까?
5절을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다음에 온유한 자가 나옵니다. 따라서 온유함이란 앞서 언급한 두 가지를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온유함은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제가 사전을 찾아보니까 아주 흥미로운 정의가 있었습니다. ‘온유함(meekness)’을 ‘용기가 부족한 상태’ 이렇게 설명을 하더군요. 그렇다면 ‘겁쟁이는 복이 있나니’? 이런 말입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닙니까? 성경이 말하는 온유함은 그렇지 않습니다. 온유함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온유한 자들(the meek)’이라는 단어는 헬라어에서 왔습니다. 그 뿌리는 ‘프라우스(praus)’인데, 기본적인 뜻은 ‘부드러운, 온순한, 그리고 유순한’ 이런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온유한 사람은 부드럽고, 온순하고, 마음이 여리고, 인내심이 있고, 순종적인 사람입니다. 온유함의 핵심 개념은 부드럽고, 온순하고, 마음이 따뜻하고, 참을성 있고, 친절하고, 조용하고, 기꺼이 순종하는 성품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이 단어는 종종 마음을 진정시키는 약을 묘사할 때 사용이 되었습니다. 또 어떤 때는 부드럽게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묘사할 때도 쓰였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경우에는 길들여져서 좋은 목적에 사용할 수 있게 된 어린 나귀를 묘사할 때에도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온유함은 진정시키는 것이고, 부드럽고,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로도 쓰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절, 마태복음 21장 5절도 그리스도의 온유함을 말합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성 안으로 들어오실 때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백마를 타고 정복자처럼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나귀 새끼, 즉 짐승의 새끼를 타고 오셨습니다. 정말로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나 탈 법한 겁니다. 예수님은 온유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온유함은 부드럽고, 온화하고, 절제된 성품이지만, 약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온유함은 통제된 힘입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에베소서를 공부할 때도 나눴던 내용입니다. 온유함은 통제된 힘입니다. 그렇습니다, 통제된 힘입니다.
이것은 자기 비움과 자기 비하의 결과로 생겨나는 성품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깨어짐입니다. 길들여진 사자하고 똑같습니다. 제가 전에 말씀드렸죠? 사자를 죽이는 게 아니라 길들이는 겁니다. 힘인데 통제된 힘입니다. 에베소서 4장 26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다시 말해서, 분노하되 의로운 분노,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통제된 분노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모욕을 당했기 때문에 분노하지 말고, 하나님이 모욕을 당하셨기 때문에 분노해야 합니다. 올바른 이유로, 올바른 때에 하는 분노입니다.
온유함은 무력하지 않습니다. 온유함은 통제된 힘입니다. 잠언 25장 28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통제되지 않은 힘이죠. 힘은 있지만 울타리가 없으니까 무너진 성과 같습니다. 반면에 잠언 16장 3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다시 말해, 자기 영혼을 다스리는 것이 온유함입니다. 통제되지 않은 것은 온유함의 결여입니다. 온유함은 통제된 힘입니다.
그리스 사람들, 헬라인들의 관점에서 생각해 봅시다. 제가 앞서 말씀드렸듯이, 먼저 헬라인들은 진정시키는 약을 가리킬 때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약은 통제 아래 있을 때는 유익하지만, 통제에서 벗어나면 사람을 죽입니다. 또 길들여져서 쓸모 있게 된 짐승을 표현할 때에도 이 단어를 사용했다고 했습니다. 길들여지지 않은 나귀나 말은 해를 끼치지만, 길들여진 말은 유용합니다. 또 부드러운 바람을 가리킬 때에도 사용했습니다. 부드러운 바람은 더위를 식히고 위로를 해 주지만, 통제되지 않은 폭풍은 죽입니다. 통제된 힘, 이것이 바로 온유함입니다.
한 작가가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온유는 성령의 열매이다.”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죠. “온유는 성령의 열매로, 영적 가난과 통회, 애통의 토양에서 자란다. 자기 사랑이라는 재 위에서, 교만의 무덤 위에서 피어나는 고귀한 꽃이다. 한편으로 자신의 완전한 파멸과 무가치함과 비참함을 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의 인자하심과 자비로우심을 바라본다. 내면의 특성은 마음의 성향으로서, 자신의 비참함에 대한 예리한 자각과 하나님의 넘치는 긍휼을 통해 부드럽고 온화하며 유순하고 유연한 상태가 된 것이다. 그래서 원래의 거칠고 야생적이며 길들여지지 않은 본성의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폭력의 반대이고 복수의 반대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히브리서 10장 34절의 말씀대로 행동합니다.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온유한 사람은 자아에 대해 죽은 사람입니다. 이제 곧 더 분명해질 겁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아에 대해 완전히 죽은 사람입니다. 자신의 상처를 염려하지 않습니다.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전에 말씀드렸듯이 존 번연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미 낮아진 사람은 더 이상 넘어질 수 없다.” 잃어버릴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신을 변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죠.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 화내지 않습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온유함, 예수님은 온유함을 자신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변호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압니다. 이미 죄로 인해서 마음이 가난하고, 그 결과로 슬퍼하며 애통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서서 자신을 내세울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압니다.
힘이지만 통제된 힘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합니다. 하나님은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온유함은 결코 비겁하지 않습니다. 나약하지도 않습니다. 확신 없이 우유부단하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착함도 아닙니다. 온유한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는 어떤 변명도 하지 않겠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서는 내 생명을 드리겠다.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죽기까지 하겠다.” 온유함은 죄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아닙니다. 통제된 분노입니다. 거룩한 분노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것이 진정한 온유함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짓지 않으셨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셨습니다. 여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잘못하신 일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제기된 모든 비난은 거짓입니다. 예수님께 가해진 모든 형벌은 부당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욕할 때마다 잘못을 저지른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를 짓지 않으셨기 때문이죠. 속이신 적도 없습니다. 잘못한 일이 단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비난받을 만한 일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2장 23절의 말씀처럼 모욕을 받아도 되갚지 않으셨습니다. 고난을 당해도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여기서 잠깐 멈추겠습니다. 예수님은 단 한번도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셨습니다.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혔을 때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채찍을 만들어서 내쫓으셨습니다. 온유한 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결코 나를 변호하지 않겠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죽기까지 싸우겠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나는 결코 나를 변호하지 않겠다.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죽기까지 싸우겠다.”
예수님은 성전을 두 번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위선자들을 책망하시고, 이스라엘의 거짓 지도자들을 정죄하시고, 하나님의 심판을 담대히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예수님이 온유하다고 말합니다. 온유는 무기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만 사용되는 힘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결코 사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자신을 위해 그 힘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천사들의 군단을 부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어떤 일도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죠. 열두 군단의 천사를 부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온유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온유함이란 통제된 힘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바라보며 죄를 보고 마음이 가난해진 사람입니다. 자신의 죄를 슬퍼하며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변호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함을 바라볼 때에, 그 거룩하신 이름을 위해서라면 생명을 다해 싸우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온유함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정말 충격적인 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의로움을 지키기 위해서 늘 싸우며 위선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온유함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통제되지 않은 힘을 그들은 가졌습니다. 자신을 조금이라도 건드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공격했습니다. 온유함, 아닙니다.
두번째 질문입니다. 온유함은 어떻게 드러납니까? 실제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잘 봐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몇 가지 예를 들어드리겠습니다. 에베소서 강해 때도 나눴던 내용입니다. 다시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온유함은 어떻게 작용할까요? 이제 여러분이 어디에 서 있는지 감을 잡게 되실 겁니다.
먼저 창세기 13장을 함께 보겠습니다. 정말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죠. 저는 이 이야기를 참 좋아합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라는 세속적인 도시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네가 바로 내 사람이다. 아브라함아, 일어나라. 이 도시를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놀라운 언약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네게 믿기 어려울 만큼 놀라운 언약을 주겠다. 네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하겠다. 아브라함아, 내가 네게 땅을 주겠다. 아브라함아, 네게 지금까지 어떤 언약보다도 위대한 언약을 주겠다. 너는 내 사람이다. 네 몸에서 한 나라가 나올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 아브라함에게 주신 놀라운 언약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롯이라는 조카가 있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우선 여기서 잠깐 먼저 보겠습니다. 목초지를 누가 차지하느냐를 두고 큰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을 했을 법 합니다. “누가 언약을 받았어? 너야, 나야?” “아니 그야 삼촌이 받으셨죠.” “그걸 꼭 잊지 마, 이놈아. 언약은 내가 받았어.” 이렇게 지위를 내세울 수도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었으니까 말이죠. 아브라함에게 선택권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언약을 받았고, 롯은 그저 따라온 조카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을 한 겁니다. “롯아, 우리 서로 싸우지 말자. 네가 원하는 땅 먼저 선택해. 나는 남은 곳을 택할게.” 말도 안 됩니다. 제일 좋은 땅을 양보한다고요? 그러나 이것이 바로 온유함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땅을 차지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원한다면 롯을 내쫓을 수도 있었습니다. 힘이 있었지만, 그 힘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아름다운 태도입니다.
아브라함은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롯이 왼쪽을 택하든 오른쪽을 택하든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말이죠. 이것이 온유함입니다. 권리도 있었고 힘도 있었지만,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이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온유함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은 사람은 로마서 12장 10절의 말씀을 이해하게 됩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요셉이 있죠. 여러분이 아는 바로 그 요셉, 맞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렸던 일을 기억하시죠? 요셉은 애굽으로 끌려갔습니다. 아마도 형들은 ‘이제 그 귀찮은 녀석을 드디어 치워버렸구나’ 이렇게 생각을 했을 겁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아이,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없애버린 겁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흉년이 들었죠. 형들은 곡식을 얻기 위해서 애굽으로 내려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애굽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누가 올라 있었습니까?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파라오 다음가는 총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요셉 앞에 형들이 곡식을 구하러 온 겁니다. 요셉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절대 줄 수 없다. 왜냐고? 옛날 이야기 하나 내가 들려주지.”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힘이 있었지만 그 힘을 억제했습니다. 복수심이 없었습니다. 원망이나 미움이 전혀 없었습니다. 형들을 바라보며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필요한 것을 주었습니다. 심지어 베냐민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베냐민을 그리워하면서 간절히 보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온유함입니다. 요셉은 비겁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온유함은 비겁하지 않습니다. 온유함은 절제된 힘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결코 힘을 쓰지 않지만, 하나님을 위해서는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다윗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24장에서 다윗은 사울을 발견합니다. 사울은 다윗을 쫓고 있었습니다. 죽이려고 했습니다. 몇 차례나 다윗에게 창을 던졌습니다. 다윗을 쫓아다녔습니다. 사울은 다윗이 다음 왕이 되어서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미워하고 경멸했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깊이 사랑했기 때문에 더 미워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사방으로 쫓자 요나단은 화살을 쏘아서 아버지가 다윗을 잡으러 오고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다윗은 깊이 잠든 사울을 발견합니다. 다윗에게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칼을 들어서 찌르면 끝입니다. 단 한번만 휘두르면 자신과 사울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를 끝장낼 수 있었고 왕위를 차지할 수도 있었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그런데 그때 다윗이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칼을 들고 가서 사울의 겉옷 자락만 살짝 베었습니다. 사울이 자고 있을 때 옷자락만 잘라서, 자신이 충분히 죽일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려고 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가진 힘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사용할 힘도 있었고 권리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칼도 있습니다. 사울은 잠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결코 자기 자신을 위해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만 행동했습니다.
사무엘하 16장을 보면 다윗과 그의 아들 압살롬이 갈등에 빠집니다. 압살롬은 반역을 일으키는 쿠데타를 계획했습니다. 결국 다윗은 성을 떠나서 광야로 도망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사울의 옛 신하 중의 한 명인 시므이가 찾아왔습니다. 다윗을 향해 저주하기 시작했습니다.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 하는지라.”
다윗의 조카 아비새가 다윗에게 말을 합니다.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사무엘상 16장 9절입니다. “내가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그러나 다윗은 아비새를 보면서 “아니다, 내버려 두어라. 내버려 두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윗은 결코 자신을 변호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고, 겸손히 하나님께 의탁하는 아름다운 태도를 가졌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는 사람을 통해서라면 세상 어떤 일이라도 이루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뜻대로 행하는 사람과는 함께 일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 복종하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다윗은 바로 그 진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모세를 생각해 보십시오.
민수기 12장 3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성경은 모세를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온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아마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모세가 온유했다고요? 아주 강한 사람이었잖아요.”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이 애굽 사람에게 학대받는 것을 보고 분노를 해서 애굽 사람을 죽이고 모래 속에 묻었습니다. 강인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바로 앞에 가서 “바로야, 내 백성을 가게 하라”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바로는 요술사들을 시켜서 여러 기적을 흉내냈지만, 모세는 그것보다 더 큰 일을 행했습니다. 담대하게 말합니다. “다시 말한다, 바로야. 내 백성을 가게 하라.” 전혀 온유하게 들리지 않죠.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는 어땠습니까? 자기 형 아론이 백성을 금송아지 앞에서 음란한 축제에 빠뜨린 것을 보고 분노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손으로 새겨진 돌판을 던져 깨뜨려 버리고 모든 백성을 진멸해야겠다고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정말 온유한 사람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모세의 이런 행동 때문에 온유하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하신다면 아직 ‘온유함’이 무엇인지 모르는 겁니다. 출애굽기 32장 19절과 20절을 보면, 모세가 얼마나 크게 분노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아주 격노했습니다. 19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에 가까이 이르러 그 송아지와 그 춤추는 것들을 보고 크게 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모세가 그들이 만든 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하니라.” 모세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났습니다.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요?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행동 때문에 화가 난 겁니다. 하나님께서 방금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을 이스라엘이 어겼기 때문입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그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라는 말씀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위해 분노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 분노했습니다.
하나님이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에게 “모세야, 내가 너를 선택했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모세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하나님, 저는 아닙니다. 저는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부족합니다. 말도 더듬습니다. 어떻게 저를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 사람으로 세우십니까? 저는 애굽 사람 하나 죽인 일 때문에 지금 40년째 광야에 숨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혼자 그 거대한 나라에서 이스라엘 백성 2백만 명을 데리고 나올 수 있다고요? 저는 할 수 없습니다. 부족합니다.” 모세는 스스로에게 아무런 확신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을 변호할 만한 것이 없었지만,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그 누구 앞에서도 하나님을 변호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온유했습니다.
바울의 마음도 같습니다. 빌립보서 3장 3절에서 바울은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이제 대조적인 한 인물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역대하 26장입니다. 정말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웃시야 왕 이야기입니다. 이사야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주를 보았다”라고 한 말을 기억하시죠?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었을 때 아주 깊이 슬퍼했습니다. 왜냐하면 웃시야 왕의 끝이 안타까웠기 때문입니다.
웃시야는 정말 놀라운 장군이었습니다. 역대하 26장 6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웃시야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고 가드 성벽과 야브네 성벽과 아스돗 성벽을 헐고 아스돗 땅과 블레셋 사람들 가운데에 성읍들을 건축하매.” 웃시야는 군대를 이끌고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서 성들을 무너뜨렸습니다. 가드 성벽과 야브네 성벽과 아스돗 성벽을 헐어 버렸습니다. 그 땅에 자기의 성읍을 세웠습니다. 말하자면 웃시야는 블레셋 전역을 초토화시켰습니다. 블레셋을 무너뜨리고 그 땅에 자신의 도시를 세운 것입니다.
사실 ‘블레셋’은 ‘팔레스타인’의 옛 이름입니다. 웃시야는 블레셋을 완전히 몰아냈습니다. 7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를 도우사 블레셋 사람들과 구르바알에 거주하는 아라비아 사람들과 마온 사람들을 치게 하신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암몬 사람들까지 치면서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아주 정말 대단했습니다. 막강한 군대를 거느렸습니다. 12절을 보면 “족장의 총수가 이천육백 명이니 모두 큰 용사요 그의 휘하의 군대가 삼십만 칠천오백 명이라 건장하고 싸움에 능하여 왕을 도와 적을 치는 자이며”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30만명이 넘는 병사들, 그러니까 백만 군사의 3분의 1이 웃시야의 군대에 있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규모입니다.
웃시야는 막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전쟁을 했죠. 14절입니다. “웃시야가 그의 온 군대를 위하여 방패와 창과 투구와 갑옷과 활과 물매 돌을 준비하고.” 15절입니다. “또 예루살렘에서 재주 있는 사람들에게 무기를 고안하게 하여 망대와 성곽 위에 두어 화살과 큰 돌을 쏘고 던지게 하였으니…” 전쟁 무기를 만드는 기술자들을 두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놀라운 군사 체계를 갖춘 겁니다. “... 그의 이름이 멀리 퍼짐은 기이한 도움을 받아 강성하여짐이었더라.” 하나님께서 웃시야에게 놀라운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16절입니다.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들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제단 위에서 향을 피우도록 허락하신 사람은 따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이죠. 그러나 웃시야는 자신이 너무 위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무 강하고, 너무 우월해서 제사장들 위에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 이런 하찮은 제사장들이 무슨 필요가 있나? 나는 세상을 정복했다.” 그리고는 성전에 뛰어가서 스스로 제사장 행세를 하면서 자신의 종교적 행위를 시작했습니다. 자신을 높이는데 바빠서 하나님을 더럽혔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21절입니다. “웃시야 왕이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었고 나병환자가 되매 여호와의 전에서 끊어져 별궁에 살았으므로...”
사람이 교만해지면 결국 하나님을 거스르고 자신만을 지키려 하다가 하나님을 모독하게 됩니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자신을 지킬 필요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서 싸웁니다. 그게 온유함입니다. 온유의 가장 위대한 본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마태복음 5장 5절로 돌아가 보십시오. 세번째 질문입니다. 이제 결론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온유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복이 있다, 즉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세상이 말하는 가벼운 감정적 행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말하는 참된 행복, 흔들리지 않는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온유한 자는 행복하다.” 정말 행복합니다.
두번째 결과입니다.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입니다. 이 표현이 무슨 뜻인지 이야기하려면 오래 걸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이스라엘에게 땅을 약속하셨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사람에게 온 세상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와 들의 짐승을 다스릴 권세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온 세상을 다스릴 주권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믿는 자가 되어 온유한 자가 되면, 너희는 그 원래의 유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회복된 낙원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여러분, 결국 우리는 이 땅을 얻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오는 그 위대한 나라에서 온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겁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뜻은 이겁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인데, 교만한 자가 아니라 온유한 자만이 받는다. 자신의 죄에 깨어지고 통회하는 자들이죠.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아니라, 자신이 잃어버린 존재임을 슬퍼하는 자들입니다. 웃으면서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는 자들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신을 애통해하는 자들입니다.
이사야 이전, 그리고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온전히 받지 못했습니다. 땅 전체를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부분적으로만 소유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온 땅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의 범위가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지금 이스라엘은 거기까지는커녕 요단강 동편조차 온전히 차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약속은 아직 성취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7장과 60장은 메시아가 오셔서 그 모든 땅을, 그리고 온 세상을 그들에게 주실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천년왕국은 강한 자들, 교만한 자들, 대적하는 자들, 압제에 굴하지 않는 자들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땅은 온유한 자들이 얻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질문은 이겁니다. “온유한 사람들이 어떻게 땅을 얻는다고?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요점은 바로 이겁니다. 온유한 사람들은 그저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갈 뿐입니다. 그리고 모든 일들은 예수님이 이루십니다.
여기서도 강조된 대명사가 다시 등장합니다. 다른 복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헬라어 원문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들은…” 자, 잘 보십시오. “... 그들만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 교만한 자들은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기억하십니까?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자신을 낮추어서 어린 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만약 교만이 여러분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아마도 그 나라 안에 있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기업으로 받다”라는 말은 참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헬라어로는 ‘클레로노메오(klēronomeō)’인데요, ‘정해진 몫을 받는다’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정하신 몫입니다. 참고로 이 말씀은 시편 37편 11절을 거의 그대로 인용한 말씀입니다. 시편 37편에서 의로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불평했습니다. “왜 악한 사람들이 번성합니까? 왜 그들이 잘되고 우리는 늘 손해만 봅니까?” 그러나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기억하시죠? 시편 37편의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시편 기자는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주님께 시선을 고정해라. 주님께 맡기고, 주님을 신뢰하고, 기뻐하고, 안식해라. 주변의 악인들이 잠시 번성하는 것처럼 보여도 걱정하지 마라.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너희에게 나라를 주실 것이다. 그러니 끝까지 견디고 기다리라.”
시편 37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심판하실 날이 올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려 하지 마십시오. 시편 37편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를 비웃으시리니 그의 날이 다가옴을 보심이로다.” 지금은 모든 것이 뒤집혀 보일지라도 결국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그러니 “여호와를 의뢰하고, 여호와를 기뻐하며,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고, 여호와를 의지하며 잠잠히 기다리라.” 그리고 제가 정말 좋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똑똑히 보리로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이 세상이 악하고 불의한 자들의 손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이 세상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것이 될 겁니다. “이게 단지 미래만의 일입니까?” 이렇게 물으신다면, 네, 어떤 면에서는 그렇습니다. 시편 37편에서 처음 이 말씀이 주어졌을 때에, 이스라엘에게는 미래의 땅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약속이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성취됩니다. 우리는 그 나라에 들어갈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21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저는 이 구절이 참 좋습니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모든 것이 다 우리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것입니다. 현재도, 미래도 우리의 것입니다. 6장에 가면 이렇게 말합니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는 실제로 세상을 판단할 겁니다. 천사들도 판단할 겁니다.
언젠가 그리스도인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미래의 일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현재 시제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모든 것이 이미 우리의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 나라가 이미 우리 것이지만, 아직 완전히 소유하지 못한 상태, 조건부 날인 증서와도 같습니다. 아직 완전히 제 손에 쥐지 않았지만, 분명히 제 것입니다. 저는 그날이 와서 완전히 저의 것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편 149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무슨 뜻입니까? 언젠가 하나님께서 열방에 심판을 행하시고 왕들을 사슬로 묶으시며 귀족들을 쇠사슬로 묶으실 겁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언젠가 하나님께서 악인을 모아 모든 것을 빼앗으시고 우리에게 주실 날이 올 겁니다. 새 하늘과 새 땅 말이죠. 그런데 제가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씀은 미래의 약속이지만, 동시에 현재적인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저는 언젠가 이 땅을 소유할 것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지금 소유한 듯한 확신을 느낍니다. 그렇지 않으시나요? 이런 찬송가가 있습니다. “하늘은 더욱 푸르고, 땅은 더욱 푸르네. 그리스도를 모르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생명이 모든 색깔 속에 살아 있네. 새들은 더 기쁘게 노래하고, 꽃들은 아름다움으로 피어나네. 이제 알게 되었으니, 나는 주님의 것이요, 주님은 나의 것이네.” 제가 지금 알고 있는 것처럼, 제가 주님의 것이고 주님이 저의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세상이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마치 나의 소유처럼 생명이 깃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 완전히 손에 쥔 것은 아니지만, 이미 제 이름으로 보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조지 맥도널드(George McDonald)는 이런 아름다운 글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영혼이 온유함으로 정결하게 되기 전에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세상을 볼 수 없다. 오직 온유함 속에서만 그 세상의 상속자가 된다. 온유함만이 영적 시력을 정결하게 하여 하나님의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며, 그 안에 어떤 불완전함이나 불순함도 섞이지 않게 한다.” 참 아름다운 말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세상을 다르게 보게 만듭니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결코 이렇게 볼 수 없습니다. 자, 땅은 우리의 것입니다.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우리의 것입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왜 온유함이 꼭 필요할까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온유함이 필요한 이유는 오직 온유한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첫번째 이유입니다. 시편 149편 4절입니다. “여호와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온유한(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시리로다.” 온유함이 없으면 구원도 없습니다.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깨어진 심령으로, 자신의 죄를 슬퍼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오지 않으면 결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온유함이 중요합니다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온유함을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왜 그리스도인이 온유해야 할까요? 온유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장 2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온유하지 않으면, 겸손한 마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온유해야 하는 이유는 온유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이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이고, 또 온유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온유함이 없으면 복음을 전할 수도 없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요? 교만한 태도로는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베드로전서 3장 15절이죠. 우리가 온유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고, 구원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서도 필요하고,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온유해야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4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무슨 뜻입니까? 힘이 있지만 절제하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변화와 시련 속에서 자신을 변호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변호하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복된 삶과 나라의 유업입니다. 왜 온유함이 필요합니까? 구원의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마지막 질문입니다. “존 목사님, 제가 정말 온유한 사람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저는 온유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제 마음을 점검할 방법이 있을까요?” 이제 마무리하면서 여러분께 몇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온유한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스스로 이런 질문을 하고 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자제력이 있는가? 하나님이 모욕당하실 때만 분노하는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지 못할 때만 반응하는가? 하나님이 욕되게 여김을 받을 때만 대응하는가?
둘째,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항상 겸손하고 순종하는 태도로 반응하는가? 온유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할 겁니다. 야고보서가 말하듯이 온유함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기 때문이죠. 그러니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나에게는 자제력이 있는가? 하나님이 모욕당하실 때만 분노하는가? 두번째,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겸손하고 순종하는가? 셋째, 언제나 평화를 이루는 사람인가? 평화를 만드는 사람인가?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온유함이기 때문입니다. 온유함은 용서하고 회복시키고 화해하게 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온유한 사람만이 하나됨을 이룹니다. 온유한 사람만이 화평하게 합니다. 나는 그런 사람입니까, 아니면 다툼을 일으키는 사람입니까?
네번째입니다. 비판을 잘 받아들이고, 나를 비판한 사람을 사랑하는가? 온유한 사람은 그렇게 합니다. 여러분, 비판을 잘 받아들이고, 여러분을 비판한 사람을 사랑하십니까? 디모데후서 2장 2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여기에 하나를 덧붙이겠습니다. 누군가를 가르칠 때나 충고할 때 온유함으로 하십니까, 아니면 교만으로 하십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비판을 받을 때 온유함으로 받고, 비판하는 사람을 사랑합니까? 그리고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하십니까? 이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한번 던져보십시오. 진짜 온유함의 의미를 알고 있는지 점검해 보십시오. 결론은 이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온유함이란 ‘나를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자신을 이렇게 보지 못한다면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제 삶을 돌아보면서 이 질문들을 통과하지 못하고 온유함을 보지 못했다면,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든 저는 애초에 그리스도인이 아닐 가능성이 있습니다.
두번째로, 그리스도인일 수는 있지만 지금은 불순종 가운데 행동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주님,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온유함 없이 지옥을 향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징계를 향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어느 것도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압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머리를 숙이고 계시는 동안 제가 한 가지 제안하겠습니다. “존 목사님, 저는 온유함을 배우고 싶어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렇게 물으신다면, 두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정말 온유해지고 싶으십니까? 정말 그 온유를 삶 속에서 경험하고 싶으십니까? 첫번째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배우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온유해지고 싶다면 먼저 권하는 것은 예수님께 배우라는 겁니다. 복음서를 읽으십시오. 날마다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 성품의 아름다움을 배우십시오. 예수님에게서 온유를 배우십시오.
둘째로, 갈라디아서 5장은 “성령의 열매는 온유”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여러분의 삶을 다스리도록 내어드리십시오. 예수님을 배우고 성령님께 순종한다면 온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대로 각자의 마음이 이 말씀 앞에서 반응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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