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성경을 펴시고 마태복음 5장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입니다. 저는 가끔 구절이 짧을수록 할 말이 더 많아진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통 한 구절만 다루게 되는 이유는, 그 한 구절 안에 담긴 의미가 너무나 깊기 때문입니다.
5장이 진리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이제부터 팔복을 살펴볼 때 한번에 하나씩 다루겠습니다. 왜냐하면 짧은 문장이지만 그 안에 담긴 진리가 너무나 깊고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밤에는 팔복의 시작, 곧 산상수훈의 서론에 해당하는 3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1절부터 읽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행복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팔복에서 말하는 참된 행복, 참된 복의 열쇠는 새로운 삶의 기준을 따르는 데 있습니다. 새로운 삶의 방식,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제시하신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 예수님은 세상이 알고 있는 모든 가치와는 정반대의 새로운 삶의 표준을 세우셨습니다. 세상의 방식과는 다른 삶의 방향, 참된 복으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난 시간에 ‘복이 있다’라는 단어, 마카리오스(makarios)의 의미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이 마카리오스(makarios)는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깊고도 내적인 행복, 진실한 복의 상태, 세상이 줄 수도 없고 빼앗을 수도 없는 내면의 기쁨을 말합니다. 세상이나 상황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외부의 조건에 따라 변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기에 세상으로 인해 영향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약속은 산상수훈의 시작 부분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기준에 따라 살아가면 참된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3절에서 “복이 있나니”라고 하셨습니다. 4절, 5절, 6절, 7절, 8절, 9절, 10절, 11절까지 모두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2절에서는 모든 복의 결과로써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산상수훈 전체가 시작부터 복과 행복, 그리고 깊은 내적 만족을 약속합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이런 복, 그러니까 행복과 평안과 기쁨은 믿는 자가 살아가며 누리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마카리오스’, 곧 ‘복이 있다’는 말 자체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이 ‘복이 있다’는 말의 가장 깊은 의미는 하나님이 복되신 분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때에야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는… 복이 있도다”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가장 복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하리로다”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되시다면, 하나님 안에 깊은 내적 기쁨과 만족이 있고, 하나님의 본성에서 나오는 완전한 복이 있다면, 그 복을 진정으로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 본성에 참여하는 사람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할 때에만 우리는 참된 복을 알고,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이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삶의 기준을 제시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강조하신 것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새로운 생활 방식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먼저 새로운 생각의 방식을 가르치심으로써 그로부터 새로운 삶이 흘러나오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행동이 아닙니다. 태도입니다. 사람의 내면이 바로 행복의 열쇠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나누었듯이, 아무리 외적인 것들을 쌓아 올리더라도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삶의 기준, 곧 의로운 기준, 그리고 핵심적으로 ‘이타적인 기준’을 제시하셨습니다. 이 설교는 의심할 여지 없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입니다. 바로 그런 행복, 그런 복된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이런 복된 삶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이런 삶을 스스로는 살 수 없음을 아는 그런 사람뿐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의지합니다.
기억하십니까?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무리가 그 자리에서 같이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메시지는 사실 열두 제자에게 직접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서는 결코 이런 복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 안에서 역사하지 않는 사람은 이런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겸손함에 이르지 않은 사람은 이 위대한 복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자들만이 이 복을 참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 말씀이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역사적으로 일부 복음주의자들은 산상수훈이 “너무 어렵다”라면서 배척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 48절에서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하신 말씀이 너무 어렵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건 우리를 위한 말씀이 아니야, 아마 천년왕국 때에 해당하는 말씀이겠지”라고 생각해 버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산상수훈을 ‘천년왕국 삶의 원리’라고 말하지만, 그 주장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불가능한 해석입니다.
첫째, 본문 어디에도 “이것은 천년왕국을 위한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두번쨰로, 예수님은 실제로 천년왕국에 살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저는 이것이 가장 결정적인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세번째, 만약 이 말씀을 천년왕국을 위한 것으로 미뤄버린다면, 그 내용은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예를 들어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복이 있나니”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천년왕국에서는 아무도 성도를 욕하고 박해하지 못할 겁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주님께서 철장으로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천년왕국에서는 또 마태복음 5장 44절을 비롯한 많은 말씀들이 의미를 잃게 됩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에게 선을 행하며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같은 말씀들입니다. 천년왕국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게다가 제가 이 말씀이 모든 시대의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믿는 또 하나의 이유는, 산상수훈에 담긴 모든 원리가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천년왕국에 사는 매우 특별한 성도들만을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한 말씀입니다. 모든 시대의 모든 신자에게 요구하시는 구별된 삶의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너희가 살아야 할 삶의 방식이다. 너희가 행복을 알고, 복을 누리려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은 우울하게 만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쁨을 빼앗는 데서 즐거움을 찾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복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 말씀 안에서 그 복의 원리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구별된 삶’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산다면 분명히 다를 겁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요즘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구별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오전에도 잠시 말씀드렸죠. 우리는 세상의 방식에 너무 크게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세상의 음악, 성적인 도덕관, 결혼, 이혼, 도덕성, 해방운동, 물질주의, 음식에 대한 태도, 술에 대한 태도, 춤, 오락, 스포츠, 이런 모든 것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속절없이 밀려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무 쉽게 거룩함을 잃어버립니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 시대가 시작된 이래로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마음 아파하셨을 일, 그러니까 기독교가 타락해 가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너희가 세상 사람들처럼 살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이 말씀대로 살면 복을 받을 것이다. 이 말씀대로 살면 행복할 것이다.”
저는 늘 이런 생각을 합니다. 물건을 만든 사람이 그 물건에 대해 가장 잘 안다고요. 자동차를 사면 제일 먼저 그 안에 들어 있는 설명서를 읽습니다. 시동을 걸고 기어를 넣는 법은 알지만, 그 밖에도 알아야 할 게 많이 있기 때문이죠. 가전제품을 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제품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제조사가 알려주는 것을 읽고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세상 모든 사람을 만드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신데도, 정작 그 하나님께 행복의 비밀을 배우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저를 만드신 분이시니 저에게 가장 좋은 길을 알려주세요. 어떻게 해야 참된 행복과 복됨과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까?” 바로 그 대답을 예수님이 여기에서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다루시는 것은 내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내면, 태도, 감정, 생각을 다루신다고 해서 외적인 헌신이 필요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면이 바로 서면, 외면도 바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반드시 외적인 열매가 나타납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참된 외적인 변화, 참된 선한 행위는 오직 참된 내면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가 이 점을 아주 정확하게 설명했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음악을 예로 들어보겠다. 어떤 사람이 위대한 음악 작품을 아주 정확하게 연주할 수 있다고 하자. 실수 하나 없이 연주할 수도 있다. 그런데 진정으로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연주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악보대로 정확히 연주했을지는 몰라도, 그것은 진짜 소나타가 아니다. 단지 기계적으로 올바른 음을 눌렀을 뿐, 그 음악에 담긴 혼과 진정한 해석을 놓친 것이다. 베토벤이 의도하고 표현하고자 한 것을 실제로 표현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체와 부분의 관계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예술가는 언제나 정확한 연주를 한다. 아무리 위대한 예술가라 해도 규칙과 법칙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위대한 예술가가 되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 아니다. 무언가가 더 있다. 표현이다. 영이다. 생명이다. 예술가는 바로 이것을 전달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제 생각에 이것이 바로 산상수훈에서 부분과 전체의 관계입니다. 둘은 분리할 수 없습니다. 신자는 영을 강조하지만 율법에도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나 율법만을 강조해서는 안 됩니다. 영을 율법과 분리해서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한편으로 영만을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지 않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영 없이 율법을 지키려 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둘은 함께 가야 합니다. 영은 올바른 태도이고, 율법은 그 결과로 나타나는 순종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영성은 안에서 시작되어서 밖으로 드러납니다.
팔복을 보면 일종의 거룩한 역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이 아는 모든 가치와는 정반대에 서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잠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복’이라는 단어 말입니다. 성경에서 ‘복’(makarios)과 반대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화’(ouai)입니다. 우리는 ‘화 있을진저’ 이렇게 번역합니다. 복의 반대는 저주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고, 나중에 바리새인들에게는 “화 있을진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표현은 서로 반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복이 있나니’라는 말이나 ‘화 있을진저’라는 말은 단순한 소망이나 바람이 아닙니다. 판결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단순히 복에 대한 선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결의 선언입니다.
이제 이 복된 말씀, 곧 하나님의 판결 선언을 살펴보면 “이렇게 하고 이렇게 생각하는 자는 행복하리니”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순서가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먼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나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죄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4절의 “애통하는 자”로 이어집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애통하게 될 때, 그 다음에는 온유함, 그러니까 겸손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으로 이어집니다. 그냥 나열된 것이 아니라 순서입니다.
그리고 7절의 “긍휼히 여기는 자”, 8절의 “마음이 청결한 자”, 9절의 “화평하게 하는 자”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긍휼하고,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을 이루는 삶을 살게 되면 그 결과로 조롱과 박해와 거짓 비난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심령이 가난해지고, 죄를 애통해하고, 겸손해지고, 의를 구하고, 긍휼하고, 청결하고, 화평을 이루는 삶을 살게 될 때에, 세상을 완전히 거슬러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세상은 반드시 반응을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나고 나면,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심령이 가난하고, 죄로 인해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를 구하고, 그 결과로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하게 하는 삶을 살 때, 세상이 여러분을 비난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말하더라도, 그때 여러분은 13절의 말씀이 진리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팔복이 바로 소금이 되는 조건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여러분, 13절에서 시작하면 안 됩니다. 3절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제 3절을 보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매우 기본적이고, 반드시 필요한 말씀입니다. 오늘 저녁 저는 다섯 가지 질문을 드리면서 이 한 구절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왜 예수님은 여기에서 시작하셨을까? 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에서 시작하셨을까?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기준, 새로운 생활 원리를 말씀하시면서 왜 가난한 심령이 첫머리일까? 이것이 왜 행복의 근원일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근본적인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첫번째 일입니다. 교만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가난한 심령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은 아주 낮습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오직 엎드린 채로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올라야 할 산이 있다. 네가 반드시 올라야 할 높은 곳이 있다. 네가 도달해야 할 기준이 있다. 그러나 스스로 이룰 수 없다. 그리고 그 사실을 빨리 깨달을수록, 참된 길을 더 빨리 찾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비워지기 전에는 채워질 수 없고,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진정한 가치를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요즘 현대 기독교를 보면, 이 ‘자기 비움’의 개념이 너무도 부족하다는 사실이 참 놀랍습니다.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법,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법, 행복으로 가득해지는 법에 관한 책들은 참 많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비우는 법’, ‘자기를 비워내는 법’에 관한 책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는 법’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아마 오늘날 세상에서는 전혀 팔리지 않을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법’이라니, 아무도 사고 싶어하지 않겠죠.
현대 기독교는 바리새인이 되기 쉬운 교만이라는 토양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것, 마음이 가난한 것이야말로 모든 은혜의 기초입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나무 없이 열매를 기대하는 것처럼 겸손 없이 그리스도인 삶의 은혜가 자라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가난하지 않다면,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처음에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부터 그렇습니다. 마음이 가난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여정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심령이 가난하지 않다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질 은혜를 결코 경험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행복은 겸손한 자에게 있다.” 행복은 겸손한 자에게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해지기 전에는 예수님이 결코 귀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바라보느라 예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필요와 절박함을 깨닫기 전에는 그리스도의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지 알기 전에는 예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절망적인지를 알기 전에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가난함을 보기 전에는 예수님의 풍성함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시체에서 꿀이 나옵니다. 우리가 죽을 때 살아납니다. 자신의 죄악을 깊이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않고는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잠언 16장 5절입니다.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첫번째인 겁니다. 순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불의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정말 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울도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아까 성가대가 정말 아름답게 찬양한 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은 자신을 두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무력함을 느끼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절박함을 느끼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 안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고 싶다면, 그 동일한 무력하고 절박한 마음을 계속 간직해야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부요하다고 하지만 실상은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구나.” 스스로 부유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진리를 전혀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철학자 세네카의 집에 있었던 한 어린 시녀는 태어날 때부터 시각장애가 있었는데, 사람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눈이 멀지 않았어요. 세상이 어두운 거예요.” 어리석은 말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눈이 멀지 않았어. 세상이 원래 그런 거야.” 그러나 현실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나는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 그러나 실제로는 절망 가운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부분에서 말씀을 시작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가난한 심령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복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도 가난한 심령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교만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는 오히려 교만을 먹고 자라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높이는 데서 만족을 찾고 있습니다.
두번째 질문입니다. 왜 가난한 심령에서 시작하셨을까요? 왜냐하면 반드시 가난한 심령에서부터 시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영적으로 완전히 파산했다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방식입니다. 여러분의 육체 안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 다시 두번째 질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제 이 말씀이 왜 처음에 나오는지는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가난을 말하는 걸까요? 어떤 종류의 가난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물질적인 가난이라고 말합니다. 누가복음 6장 20절에 보면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가난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도 같은 내용이 있으니까 비교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어떤 가난입니까? 가난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 않습니까? 돈이 없어서 가난할 수도 있고, 배움이 부족해서 가난할 수도 있고, 친구가 없어서 가난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면에서 가난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복음에서 그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말한 것을 보면, 누가가 말한 가난이 어떤 가난인지 마태가 분명하게 설명해준 것입니다. 간단합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단지 성경을 성경으로 비교해보면 되는 일입니다.
무슨 가난입니까? 돈이 없는 가난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단지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주신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주장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여기서 말하는 가난이 단순히 돈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은 기부하는 일이 될 겁니다.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잘못된 일이 되는 겁니다.
배고픈 사람을 먹이는 일도 어리석은 일이 됩니다. 그런 모든 구제 활동을 당장 중단해야 할 겁니다. 오히려 가능한 한 모든 사람의 돈을 다 빼앗아서 모두 가난하게 만들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사기꾼처럼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하면 결국 복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고아원 문도 닫아야 하고, 병원 문도 닫아야 하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모든 선교단체와 사역도 다 멈춰야 합니다. 만약 영적인 복이 물질적인 가난에서 온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반대로, 부유함이 사람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사실 가난한 사람들은 인생에 대한 태도를 바르게 갖는 데에 있어서 오히려 한 걸음 앞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절박한 상황으로 인해서 자신을 도와줄 존재를 찾기 때문이죠.
부유한 사람은 자존심 때문에 하나님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말했죠. 부자는 자기 재물을 의지하지만, 가난한 사람은 의지할 것이 없습니다. 물론 부유하면서도 의로운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많지는 않았지만, 니고데모, 아리마대 사람 요셉, 그리고 구약의 몇몇 사람들이 있었죠. 또 빌레몬도 아마 부유했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물질적 가난이 아닙니다. 다윗은 자신이 살아온 세월 동안 의인이 버림받거나 그 자손이 걸식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바울 역시 배고프고 목마른 때가 있었지만 비굴한 거지가 된 적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먹을 것을 구걸하며 다니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미쳤다고, 무식하다고 비난했죠. 세상을 어지럽게 한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거지라고 비난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난’은 어떤 의미일까요? 심령이 가난한 자, 바로 영적으로 가난한 자를 뜻합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가난한’이라는 헬라어 단어 ‘프토코스(ptōchos)’는 흥미로운 단어입니다. 이 어근의 의미는 ‘누군가 앞에서 몸을 움츠리고 구걸하듯이 웅크리는 것’입니다. 마치 거지가 두려움과 부끄러움으로 인해서 몸을 낮추는 것처럼 말이죠.
고대 헬라어에서는 이 단어를 어두운 벽 모퉁이에 웅크리고 앉아서 구걸하는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했습니다.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 부끄러워서 숨어서 웅크린 모습입니다. 신원조차 알려지기를 부끄러워할 만큼 절망적인 상태입니다. 거지들은 온갖 천 조각을 덮어쓰고 얼굴을 가리고 나서 손만 내밉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드러내지 않으려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가난한 자’라는 단어는 누가복음 16장에서 ‘거지 나사로’라고 번역된 바로 그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가난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구걸해야 하는 수준의 가난’, 절대적인 빈곤을 뜻합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가난’을 뜻하는 단어가 또 있는데, 바로 ‘페네스(penēs)’입니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대체로 일을 해야 겨우 하루를 살 수 있을 정도의 가난, 즉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헬라어 ‘프토코스(ptōchos)’는 너무 가난해서 구걸해야만 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완전히 무력하고, 움츠리고, 두려움 속에 몸을 웅크린 채 구걸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페네스(penēs)’는 스스로 일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프토코스’는 전적으로 다른 개념입니다. 누군가의 자선에 전적으로 의존해야만 합니다. 아무런 기술도, 아무런 능력도 없습니다. 많은 경우에, 불구이거나, 눈이 멀었거나, 혹은 귀가 들리지 않거나, 말을 할 수 없어서 아무런 노동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길모퉁이에 앉아 수치심에 고개를 숙인 채 한쪽 팔을 들어서 누군가의 은혜와 자비를 구걸하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살아갈 자원이 전혀 없는 사람, 오직 타인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야만 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의 가난은 그저 돈이 조금 부족한 정도가 아닙니다. 구걸해야 할 정도의 가난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이 행복하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죠. “설마요.” 하지만 예수님은 물질적으로 구걸하거나 육체적으로 가난한 상태를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마음의 가난, 곧 영적인 가난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인간에 대한 가장 정확한 진단입니다. 인간은 가난하고 무력합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요? 페네스(penēs)처럼 약간의 일을 할 수 있어서, 아주 열심히 노력하면 간신히 턱걸이로 구원받을 수 있는 그런 존재일까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페네스(penēs)가 아니라 프토코스(ptōchos)입니다. 완전히 무능해서 오직 다른 이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행복한 사람은 궁핍하고, 두려워하고, 움츠러든 거지 같은 사람이다.” 세상은 이렇게 말하죠. “행복한 사람은 부자이고, 유명하고, 자급자족하고, 자신만만한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심령이 가난하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사람의 내면, 그러니까 영적인 부분입니다. 겉사람, 육체가 아닙니다. 돈이 없어 구걸하는 거지가 아니라, 마음이 궁핍하여 거지처럼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사야 66장 2절입니다. “...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자신의 빈곤함 때문에 마음 깊이 떨며 두려워하는 사람을 돌보신다는 뜻입니다. 시편 34편 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편 51편 17절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이사야 57장 15절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은 내면에서 간절히 구하는 사람, 즉 스스로를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자원을 믿지 않고 영적으로 가난해서 구걸하듯 하나님께 의지하는 사람과 함께하십니다.
이 말은 의욕이 없거나 무기력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게으르거나, 조용하거나, 무관심하거나, 소극적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파산한 사람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8장을 보십시오. 누가복음 18장 9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의 반대입니다.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 스스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할 수 있다. 우리에겐 필요한 모든 자원이 있다.’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하나는 바리새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하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지 않음을 감사드립니다. 이 세리와도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내 소득의 십일조를 드립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합니다. 마치 거지 같죠. 움츠리고 있습니다.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가슴을 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이 내리신 진단을 들어보셨습니까?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잘 들으십시오. 이보다 더 분명한 말씀은 없습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상하고 통회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거지이다.” 영적으로 완전히 비어 있는 사람,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 영적으로 파산한 사람, 한쪽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며 부르짖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정한 행복의 근원을 발견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천국은 그들의 것입니다.
야고보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산상수훈 뿐만 아니라, 야고보서도 똑같이 말합니다. 야고보서 4장 10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여기서 말하는 가난, 낮춤은 깊은 의존과 복종 속에서 하나님께 엎드리는 가난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에서는 별로 인기 없는 교리죠. 우리는 유명인, 전문가, 슈퍼스타, 부유하고 이름난 그리스도인들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겸손한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제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야곱은 하나님께 쓰임받기 전에 먼저 마음이 가난해지는 과정을 겪어야 했습니다. 창세기 32장에서 밤새도록 하나님과 씨름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셔서 어긋나게 하셨습니다. 기억하시죠? 하나님이 허벅지를 치셨습니다. 야곱은 완전히 쓰러져서 결국 이렇게 고백합니다. “제가 졌습니다. 혼자서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32장 29절, 제가 정말 사랑하는 구절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시니라.” 하나님이 그곳에서 그를 복되게 하셨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았던 이사야를 떠올립니다. 이사야도 마음이 가난해지기 전에는 전혀 쓰임받을 수 없었습니다. 웃시야 왕의 죽음 앞에서 깊이 통곡했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자 그는 너무나 낙심했습니다. 자신의 상실감과 이제는 웃시야가 없다는 현실에만 마음을 두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의 삶에 개입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누가 진정으로 중요한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웃시야가 아닌 하나님을 말입니다. 높이 들린 보좌 위에 계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결과 이사야는 이사야 6장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복 주셨습니다.
또 기드온이 있습니다. 사사기 6장 15절에서 기드온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내 집은 므낫세 중에서 가장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마치 “주님, 주소를 잘못 찾으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여러분, 진정으로 큰 용사가 누구입니까? 자기 안에 아무 능력도 없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태도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내 백성을 인도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자신이 그 일을 감당할 자격이 전혀 없다고 느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무능함과 부족함을 절실히 깨달았기에 하나님은 모세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의 마음도 그랬습니다. “주여, 제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저에게 오시나이까”라고 말했던 그 마음입니다. 베드로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본래 적극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었지만, “주여, 저에게서 떠나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베드로의 시작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육신에는 선한 것이 없다고 인정했습니다.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이고 신성모독자이고 박해자이고 핍박자였다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배설물, 쓰레기로 여겼습니다. 자신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바로 그때, 그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해졌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할 때, 자신의 무가치함을 고백할 때, 거기가 끝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작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자신의 가난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여러분이 평생 동안 해야 할 일 중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첫번째로 너희가 해야 할 고백은 이것이다.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할 수 없다는 고백이 바로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마음이 가난한 자”의 의미를 실감나게 보여주시는 대표적인 예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의 비유를 보면 종은 갚을 수 없는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원문 표현을 보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입니다. 그런데 주인 앞에 엎드려 말합니다. “주여, 참아 주십시오. 내가 다 갚겠습니다.” 여전히 자신에게 무언가 해낼 능력이 있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주인은 그가 결코 갚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얼마나 어리석은가. 주인에게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제가 다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다니.”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전혀 갚을 능력이 없는 자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제가 해보겠습니다”라는 이런 태도는 교만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합니다”라는 고백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의 태도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교만하지 않은 상태, 자기 확신이 없는 상태, 자기 의지에 기대지 않는 상태입니다. 채워지기 전에 반드시 비워져야 합니다. 반드시 그렇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을 때뿐 아니라 평생 살아야 할 삶의 방식입니다. 제가 강단에 서서 말씀을 전할 때마다 늘 마음속에 이런 고백이 떠오릅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셔야 합니다. 설교의 기술은 제가 알고 있지만, 저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셔야 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회심하기 전에는 자신의 지성과 지식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자신의 지식이 하나님을 믿는 데 방해가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교만을 비우고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틴 루터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젊은 시절에 수도원에 들어가 경건한 삶으로 구원을 얻으려 했지만, 그 길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사제로서 자신이 얼마나 실패했는지를 스스로 깊이 깨달았습니다. 오랜 세월을 보냈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이죠. 그때 루터는 자신을 비웠습니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에 모든 것을 두었고, 그것이 바로 종교개혁의 시작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아름답게 썼습니다. “제가 여기 아래에 있는 동안 주님의 사랑의 충만함을 노래하거나 말하거나 알 수는 없지만, 사랑의 생수이신 주님, 저의 빈 그릇을 주님 앞에 내어 놓을 수 있습니다. 주님, 제 그릇을 채워 주옵소서. 저는 빈 그릇입니다. 주님께 사랑의 생각 하나, 사랑의 눈길 하나조차 드린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또다시 주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죄인인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간구입니다. 주님이 저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위대한 진리의 요약은 아주 간단합니다. 산상수훈의 첫번째 원리입니다. 스스로는 할 수 없다. 새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삶은 영원한 행복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스스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삶의 기준은 자신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집니다.
이 개념은 시내산에서 율법이 처음 주어질 때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와 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는 바로 그 순간, 산 아래에서는 백성들이 이미 그 율법을 어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고 계시는데 아론은 백성들을 이끌면서 음란한 우상 숭배의 축제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하나님의 기준은 인간이 스스로 지킬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의 일부는 그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기준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제사를 드리고 죄를 고백하면서 겸손히 하나님께 나아왔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겸손을 보시고 은혜로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의를 자랑하고 율법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도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기준을 조금씩 조금씩 낮추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랍비들이 전통을 덧붙이기 시작한 겁니다. 하나님의 율법보다 전통을 지키기가 훨씬 쉬웠기 때문이죠.
잘 들으십시오. 율법, 그러니까 토라를 중심으로 형성된 율법 체계, 탈무드 율법, 유대 율법이라고 불리는 것은 결국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만족감을 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참된 율법의 기준을 깎아내린 것일 뿐입니다. 랍비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율법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요구 수준을 낮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주변적인 일에는 충실했지만, 하나님의 참된 율법은 날마다 어기며 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알았던 사람들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회개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드리면서 죄를 자백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용서하셨습니다. 산상수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입니다.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그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써 그런 삶을 갈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실패할 때마다 겸손한 마음으로 회개하고 자백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으로 대체했습니다. 마태복음 15장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사람의 전통으로는 안 됩니다.
율법의 목적은 바로 이것입니다. 잘 보십시오. 산상수훈의 목적은 시내산의 목적과 똑같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그 기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결코 해낼 수 없음을 깨닫게 하고, 마음이 가난해져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말씀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 이런 기준을 제시하고 그대로 살라고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일은 마치 이런 것과 똑같습니다. 언젠가 제임스 보이스(James Boyce) 목사가 이런 비유를 했습니다. 천년왕국에서는 사자가 어린양과 함께 눕게 될 것입니다. 사자가 어린양과 함께 눕는다는 것, 놀라운 일 아닙니까?
시도해보고 싶으시다면, 동물원에 가서 사자 우리에 가보십시오. 그리고 그 사자에게 ‘천년왕국의 진리’를 열심히 가르쳐 보십시오. 사자가 어린양과 함께 누울 거라는 걸 확실히 이해시키십시오. 그리고 그 사자를 어린양과 함께 넣어보세요.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어린양은 금방 없어질 겁니다. 왜입니까? 사자는 설교만으로는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자가 새로운 본성을 가져야만 가능합니다. 이해되시죠? 마찬가지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 산상수훈을 가르치고 그 말씀대로 살기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새로운 본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심령이 가난한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면 두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왜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부터 시작하셨을까요? 이것이 바로 시작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겸손입니다. 곧 심령의 가난함입니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간단히 답할 것이니까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결과는 무엇입니까? 보십시오.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소망이 아니라 선언입니다. 사실입니다. “그들의 것임이요.” 이 말의 핵심은 “그들만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오직 그들만의 것입니다.
천국은 누구의 것입니까? 오직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들의 것”입니다. 곧 “나의 것”입니다. 저는 완전한 파산 상태로 그리스도께 나아갔습니다. 매일의 삶에서도 똑같이 겸손하게 의존하는 마음으로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 끊임없이 도움을 구합니다. 매일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분명히 저는 그 상태로 주님께 나아가기에 제 구원은 영원합니다. 저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저의 것입니다. 바로 저의 것입니다. 저는 심령이 가난해서 천국을 소유한 자입니다. 정말 흥분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쓰인 시제는 현재 시제입니다. 그 나라가 ‘그들의 것’이요, ‘나의 것’입니다. ‘우리의 것’입니다. 단지 미래의 천년왕국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언젠가 그 나라가 완전히 실현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지금도 우리의 것입니다. 앞으로 다가올 천년왕국에서 그 약속이 완전히 드러나고 완성될 것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도 존재합니다. 지금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십니다. 지금 행복합니다. 지금 복됩니다. 천국은 그리스도의 통치입니다. 미래적 메시아 왕국의 측면도 있지만, 동시에 지금 이 순간도 유효합니다. 우리는 이미 제사장 나라가 되었고,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미 이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말합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영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받는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미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받고 있고, 장차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제가 이해하는 하나님 나라는 ‘지금의 은혜, 그리고 이후의 영광’입니다. 지금은 은혜요, 나중에는 영광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여러분, ‘나라를 소유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이 단어는 ‘소유한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 그리스도의 통치가 여러분의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백성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돌보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고, 마음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신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풍성히 채워주십니다. 은혜와 긍휼과 힘으로 가득 채워주십니다. 앞으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어떤 일이 펼쳐지든,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부요함을 공급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우리의 영혼은 부요합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받았습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서 누리는 것이며, 앞으로 더 풍성하게 누리게 될 것입니다.”
자, 이제 두 가지 질문이 우리 앞에 남아 있습니다. 가난이 겸손, 그러니까 영적인 가난함과 완전한 무능함의 인식이라는 뜻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핵심이라면, 한 가지를 덧붙여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 가장 역겨운 것, 하나님을 가장 구역질나게 하는 것은 영적인 교만입니다. 이 진리를 완전히 거스르는 태도입니다. 자신이 영적으로 성장했다거나 무언가를 해냈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심령이 가난해질 수 있을까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존 목사님, 말씀의 뜻은 알겠어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라, 그런데 어떻게 가난하게 됩니까?” 우선, 스스로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스스로 하려는 그것이 바로 수도사들의 어리석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심령이 가난해지기 위해 어디론가 가서, 가진 것을 다 팔고, 낡은 옷을 걸치고, 수도원에 틀어박혀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닙니다. 금욕주의와 수도주의, 자기부인의 어리석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자신의 신체 일부를 훼손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을 부인하면 심령이 가난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또 하나, 자신을 바라보면서 심령이 가난하게 될 수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바라봐도 안 됩니다. 누군가를 기준으로 삼으려 하지 마십시오. 심령이 가난해지기를 원한다면 바라봐야 할 곳은 오직 한 곳뿐입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첫걸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인격과 마주하십시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끊임없이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을 바라볼수록 자신을 잊게 됩니다. 자신이 사라집니다.
두번째,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뿐만 아니라, 세 가지 원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려면 첫째,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자신을 보지 말고, 다른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십시오. 둘째, 육체를 굶기십시오. 육체를 배부르게 하지 마십시오. 오늘날 많은 사역조차도 자만심을 먹고 자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체를 벌거벗기는 일, 육신의 교만을 벗겨내는 일을 추구해야 합니다.
저 역시 지난 1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에 어떤 일을 겪으면서 이 말씀의 의미를 조금은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 저에게도 이런 마음을 아는 일은 싸움이지만, 그 일을 통해서 정말로 제 육체를 벗겨내는 일, 제 자아를 무너뜨리는 일을 진심으로 구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보내주는 찬사, 인정, 이런 것을 받아들이는 건 참 쉽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존 목사님, 목사님 설교를 듣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목사님 설교를 듣고 구원받았습니다”, “목사님 교회는 참 놀랍습니다,” “오늘 설교는 정말 훌륭합니다,” 이렇게 말을 하면, 그것을 인정하는 건 참 쉽습니다. 그런 칭찬을 받아들이는 건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마음 속에서 싸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동안 제 마음 깊은 곳에는 다른 갈망이 있었습니다. 육체를 벌거벗기듯 벗겨내는 것을 구하고 싶다는 갈망입니다. 물론 그게 자칫하면 ‘나는 참 불쌍해’ 하는 식의 연민으로 빠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에는 정말 육체를 벗겨내고 싶은 갈망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육체가 벗겨질 때, 제가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저는 완전히 가난했습니다.
얼마 전에 저는 어떤 일로 인해서 몇몇 분들의 마음을 깊이 상하게 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결코 의도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말씀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지금 이 상황이 저에게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과, 하나님을 위해 꿈꾸고 바라고 헌신했던 모든 것이 단 한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는 제가 하지 않아도 스스로 이루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제 무너짐, 상실, 실패, 어리석음과 잘못 속에서, 저는 이전의 어떤 칭찬이나 인정으로도 얻을 수 없었던 아주 깊은 위로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육체를 굶기는 방법입니다. 세번째 원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삶으로 경험한 실제 이야기입니다. 첫째,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둘째, 육체를 굶겨야 합니다. 자기를 칭찬해 주는 것, 자기의 자아를 만족시키는 것으로 달려가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셋째는 아주 단순합니다. 구하십시오. 심령이 가난해지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구하십시오. 거지한테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늘 구한다는 겁니다. 항상 구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기도한 세리의 고백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심령이 거지와 같은 사람, 그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가 바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왜 이 말씀으로 산상수훈을 시작하셨을까요?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영적으로 완전히 빈곤하다는 것,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결과는 무엇입니까? 지금 이 땅에서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심령이 가난해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육체를 굶기십시오. 그리고 구하십시오, 간구하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그 간구를 귀찮아하지 않으십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내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인지 알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일곱 가지 원칙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빠르게 하겠습니다. 자신이 심령이 가난한 자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첫째, 자신에게서 벗어나게 됩니다. 자신에게서 벗어나게 됩니다. 시편 131편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에 대한 의식이 사라진 사람입니다. 자신이 사라집니다.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만을 생각합니다. 자아는 없습니다. 자아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놀라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에 압도됩니다. 고린도후서 3장 18절 말씀처럼 “주의 영광을 보며” 살아갑니다. “주님을 보게 하소서, 그것으로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내가 주의 형상으로 깨어날 때에 만족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놀라움에 완전히 사로잡힙니다.
셋째,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불평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불평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아무 자격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받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드릴 수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더 깊이 낮아질수록 은혜는 더 달콤해집니다. 필요가 많을수록 하나님은 더욱 풍성히 채워주십니다. 아무것도 갖지 않았을 때, 우리는 모든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방해거리가 사라지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고난을 당해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여러분이 심령이 가난한 자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자신에게서 벗어나 있고, 그리스도의 놀라움에 사로잡혀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불평하지 않는다면,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왜냐하면 더 깊이 낮아질수록 은혜는 더욱 달콤해지기 때문입니다.
넷째, 다른 사람에게서는 장점만 보고 자기에게서는 약점만 봅니다. 다른 사람에게서는 장점만 보고 자신에게서는 약점만 보게 될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참으로 겸손한 자는 모든 사람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다섯째, 기도를 많이 합니다. 왜냐하면 거지는 항상 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문을 자주 두드리고, 복을 받을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인지 알고 싶으십니까? 여러분은 자신에게서 벗어나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놀라운 영광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불평하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게서는 장점만 보고 자신에게서는 약점만 보십니까? 여러분은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께 자주 나아가고 계십니까?
여섯번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예수님을 자기 방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방식으로 받아들입니다. 자기 조건이 아니라 예수님의 조건으로 받아들입니다. 교만한 죄인은 자기 즐거움을 위해 예수님을 가지려 합니다. 예수님과 탐욕을 함께 가지려 하고, 예수님과 음행을 함께 가지려 합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너무도 절박해서 예수님을 얻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포기할 수 있습니다.
토머스 왓슨(Thomas Watso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랫동안 포위되어 이제 함락 직전인 성은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어떤 조건으로든 항복할 것이다.” 마귀의 요새로 오랫동안 예수님께 대적하며 버텨온 마음이라도, 하나님께서 심령을 가난하게 하시고 예수님 없이는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보게 하실 때, 곧바로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주여,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맞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예수님을 예수님의 조건대로 받아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특징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 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의 은혜가…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감사로 가득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왜 예수님은 팔복을 이 말씀으로 시작하셨을까요?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깊은 영적 무력감의 자각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천국을 지금 소유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육체를 굶기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내가 지금 그런 상태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렸습니다. 자아로부터 벗어나고, 그리스도의 놀라움에 사로잡히고, 어떤 상황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서는 뛰어남을, 자신에게서는 연약함을 봅니다. 기도에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예수님을 예수님의 조건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한 작사가의 고백입니다. “내 손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으나… 오직 주의 십자가만 붙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에 인위적인 가식이 없게 하시고, 스스로 만들어낸 가난이 아니라 참된 심령의 가난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 삶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하나님을 모독하던 자들이었고, 경건하지 못한 자들이었고, 받을 자격이 없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 나라 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이 자리에 아직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지 못한 분들이 있다면, 아마 그 이유는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아직 하지 못했기 때문일 겁니다.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습니다.” 이 고백을 지금 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음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이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감당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저희는 이미 십자가 발치에서 무너져 겸손히 기어 들어가듯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자들입니다. 아무 쓸모도, 아무 자격도 없는 존재로 나아갔던 그때를 기억합니다. 그러나 주님, 우리가 그 안에서 주께서 이루신 일들을 보고 난 후에는, 교만해지고 자랑하게 되고, 그 복됨을 유지하는 비결이 바로 그 심령의 가난함을 유지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 안에서 우리 자신을 버리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참으로 마음이 가난한 자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게 하시고, 그 복됨과 참된 행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세상과는 분명히 다른 존재로 살아감으로써 우리가 주님께 속한 자임이 분명히 드러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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