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장을 펴 주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장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둘러싼 이 놀라운 이야기들을 연구하고 생각을 정리하면서 참으로 큰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오늘 저녁은 설교라기보다는 성경 공부가 되겠지만,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크게 역사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제시합니다. 그냥 왕이 아니라, 만왕의 왕으로, 만왕의 왕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분으로 제시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왕이시고, 모든 인류의 통치자이시고, 모든 시대의 주권자이시고, 온 우주의 통치자이십니다. 마태는 마태복음 첫 부분부터 바로 이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1장부터 28장 전체에 걸쳐 그리스도의 왕 되심, 그리스도의 왕권,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계속해서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둘러싼 이야기 속에서도, 마태는 우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보도록 특별히 강조합니다. 그래서 1장에서, 기억하시겠지만, 왕의 계보에 근거해서 예수님을 왕으로 소개합니다. 마태복음 1장 1절부터 17절까지 매우 세심하게 왕의 계보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왕의 후손으로 나셨습니다. 왕의 계보를 따라 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릴 권리, 통치권을 가진 분으로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또한 우리는 마태복음 1장 18절에서 25절에 나오는 동정녀 탄생이 예수님의 왕권을 확증하는 사건이라는 것도 살펴봤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통해 저주를 피하셨고, 그로 인해서 예수님은 왕의 자격을 박탈당하지 않고 왕좌에 오를 권리를 가지게 되셨습니다. 따라서 계보, 그리고 동정녀 탄생이라는 특별한 사건을 통해서, 마태가 예수님을 왕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제 2장으로 넘어와서, 마태는 다시 한 번 예수님이 왕이심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합니다. 첫번째는 우리가 이미 1절부터 12절까지 살펴본 내용입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 그러니까 당시의 동방 세계에서 왕을 공식적으로 세우는 자들이 등장하여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장면을 통해 그리스도의 왕권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마태는 세상이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왕이다,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 세상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바로 동방에서 온 지혜자들, 그러니까 동방 박사들입니다. 바사에서 왕을 세우는 공식적인 역할을 맡았던 사람들이죠. 동방 지역에서는 동방 박사들이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도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박사들의 법과 전통으로 교육받지 않으면 왕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들이 왕이라고 선언하는 그 사람이 바로 왕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태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바사의 왕을 세우는 사람들이었던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보았고, 예수님께 나아와 경배하며 예물을 드렸다. 11절을 보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중의 첫 번째인 황금은 왕께 드리기에 합당한 예물입니다.
예수님이 왕이심을 보여주는 두 번째 방법은 바로 헤롯의 적대감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왕이 아니셨고, 통치할 권리가 없는 분이었다면, 헤롯이 왜 그렇게까지 두려워하고 분노했겠습니까? 마태가 간접적인 방법을 사용하지만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경배를 받으심으로 왕이실 뿐만 아니라, 증오의 대상으로도 왕이십니다.
왕을 세우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모습을 통해 예수님의 왕 되심을 볼 수 있고, 동시에 세상의 왕위를 차지하고 있던 거짓 왕이며 찬탈자인 헤롯이 예수님의 존재 때문에 심각한 위협을 느끼는 모습을 통해서도 예수님이 참된 왕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헤롯은 이스라엘을 다스릴 정당한 권리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도 아닌 에돔 사람이죠. 그런데도 왕위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진짜로 이스라엘의 왕이 될 권리를 가지신 분이 나타났다는 사실 앞에서 그는 극심한 두려움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태는 경배와 증오, 이 두 가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이들에게는 경배의 이유가 되시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두려움의 이유가 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드러내는 세 번째 흐름이 이 장 전체를 통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성취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오실 왕에 대해서 여러 가지 예언을 주셨습니다. 마태는 그 가운데 네 가지 예언을 선택해서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보게 될 것인데요, 예수님이 참으로 왕이심을 증거하는 또 다른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왕의 가문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왕이십니다.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셨기 때문에 왕이십니다. 왕의 계보를 가지셨기 때문에 왕이십니다. 바사의 왕을 세우는 자들이 왕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왕이십니다. 헤롯이 자신의 왕좌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왕이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실 왕에 대한 예언을 성취하신 분이기 때문에 왕이십니다.
그러니까 마태는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확증해 나가고 있습니다. 오늘 살펴볼 본문에서는 자신이 왕좌를 빼앗길까 두려워했던 헤롯이 그 아이를 죽이기 위해 얼마나 극단적으로 행동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동시에 그 위협 속에서도 펼쳐지는 네 가지 예언의 성취를 통해, 오실 왕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보여줍니다.
이제 한 가지를 더 덧붙이겠습니다. 구약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 332개의 예언이 있는데, 예수님은 약 330개에서 332개의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그중에서 단 네 가지만을 선택해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네 가지는 너무 특별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우연히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들입니다. 이 네 가지가 누군가에게 단순한 우연으로 일어날 확률은 극히 미미합니다. 수치로 계산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332개 전체를 생각해 보면, 우리의 이성을 압도할 만큼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네 가지 예언의 문체와 구조를 보면, 적어도 저에게는 문학적 단위라는 확신이 듭니다. 마태는 아무렇게나 여기저기서 내용을 끌어온 것이 아닙니다. 이 네 가지를 의도적으로 선택해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예언들은 마태복음 2장 전체를 매우 아름답게 관통하면서, 왕에 대해서 네 가지 구체적인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예언은 각각 특정한 지리적 장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 역시 마태가 하나의 분명한 구조와 흐름을 가지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각각의 예언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동시에 특정한 장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네 가지 장소, 베들레헴, 애굽, 라마, 그리고 나사렛입니다.
사실 이 네 장소는 모두 그리스도의 탄생과 깊은 관련이 있죠. 이것 자체가 놀라운 일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출생지가 하나뿐이죠. 그러나 구약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메시아, 그리스도, 왕, 오실 분, 위대한 선지자가 베들레헴, 애굽, 라마, 나사렛과 연관될 것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네 장소 모두가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고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이 순서대로, 이 흐름 속에서 한 사람의 삶에 이런 일 모두가 일어날 확률은 극히 미미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전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보여주는 매우 강력한 증거입니다.
이제 예언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너무도 구체적이어서 그 어떤 거짓 주장도 통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참된 왕이신 주님만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첫 번째 장소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베들레헴에서의 탄생입니다. 베들레헴에서의 탄생입니다. 먼저 오늘 우리가 집중해서 살펴볼 말씀보다 앞부분인 4절부터 6절을 잠시 보겠습니다. 첫 번째 장소입니다.
4절입니다. 지난 시간에 함께 살펴봤던 내용입니다. 동방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고 묻자 헤롯은 크게 소동합니다. 동방 박사들은 동방에서 예수님의 별을 보고 예수님이 오셨다는 사실을 알았죠. 그래서 예수님이 어디에 계신지를 알고자 했습니다. 이들은 페르시아, 그러니까 바사 군대와 말을 동반한 아주 큰 행렬을 이루고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이 모습 자체가 헤롯에게는 큰 위협이 되었죠.
이 위협적인 왕이 어디에서 태어날 것인지를 알아내는 것이 헤롯에게는 중요해졌습니다. 반드시 그 아이를 찾아내서 죽이려고 합니다. 인생의 끝자락에 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권력과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 극도로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기를 없애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자, 여기서 아주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나옵니다. 헤롯은 동방 박사들이 말한 “유대인의 왕”을 곧바로 “그리스도”, 메시아, 기름 부음을 받은 자와 동일시했습니다. 이 두 표현이 같은 대상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헤롯도 알고 있었고, 종교 지도자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워했습니다. 유대인의 예언에 대해 어느 정도 들은 바가 있고, 오랜 시간 권력을 잡고 있으면서 유대교를 접할 기회도 있었기 때문에,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헤롯은 잘 알고 있었던 겁니다.
헤롯은 메시아가 오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거나, 적어도 그렇게 두려워하게 되었을 그때에, 그 아이를 죽이기 위해 어디에서 태어날지를 반드시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불러 모은 것입니다. 대제사장들은 정치적인 지도자들이었죠. 서기관들은 신학자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태어날 것인지를 물어보았습니다.
5절입니다.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이 예언을 기록한 선지자는 미가입니다. 이 말씀은 미가서 5장 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이 예언을 살펴보기 전에 미가에 대해서 조금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가는 심판을 선포했던 선지자입니다. 당시의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통치자들, 거짓 교사들을 향해서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예를 들어 미가서 2장 1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재앙을 계획하나니 너희의 목이 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 또한 교만하게 다니지 못할 것이라 이는 재앙의 때임이라 하셨느니라.”
다시 말해서 미가는 당시의 지도자들, 곧 군주들, 고관들, 통치자들을 바라보면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들은 땅을 빼앗고, 밭을 빼앗고, 집을 빼앗고 독재자처럼 군림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심판하겠다”라고 이렇게 선언하시는 겁니다. 미가서 3장 1절입니다.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으라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냄비와 솥 가운데에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아주 너무나 생생한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너희가 내 백성을 갈기갈기 찢고 있다. 가죽을 벗기고, 살을 뜯어내서 먹고, 마치 솥에 삶는 것처럼 하고 있구나.” 하나님의 심판의 선언이 시작됩니다. 3장 9절입니다. “야곱 족속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 곧 정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아 원하노니 이 말을 들을지어다.”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 하시더라.” 황폐해질 것이라는 예언이죠.
미가가 거짓 교사들과 거짓 지도자들을 향해서 선포한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그렇게 심판을 선포한 후에, 미가는 시선을 미래로 돌립니다. 장차 한 참된 교사가, 참된 통치자가, 선과 정의로 다스릴 참된 왕의 시대를 바라봅니다. 미가는 그분에 대해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4장으로 들어가면서 마지막 날들을 내다보면서, 장차 오실 그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분을 바라보면서 말이죠.
그리고 그 오실 분에 대해 말하다가, 미가서 5장 2절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분이 어디에서 태어나실지를 알려줍니다. 미가서 5장 2절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영원하신 왕, 하나님의 아들,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신 분이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이라는 아주 작은 마을에 태어나십니다. 유다의 수많은 성읍과 여러 마을 가운데서도 거의 주목받지 못하는 아주 작은 마을입니다. 미가는 수세기를 내다보면서 왕의 탄생을 바라보았고, 그 왕이 한 이름 없는 작은 장소에서 태어나실 것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태가 다루고 있는 첫 번째 예언이죠. 이 예언이 정확하게 강조되는 것으로 보아서 저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언을 직접 인용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아마 5절까지만 말했을 겁니다. 마태복음 2장 5절입니다.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기록된 바.”
그리고 6절은 마태가 덧붙여서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마태가 미가를 직접 인용하고 있습니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성령님의 영감으로 기록한 마태는, 미가와 동일하게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저자입니다. 미가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그 시대에 맞게 약간의 표현을 덧붙일 수 있는 권한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분명히 미가를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는 미가서 5장 2절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나신 분임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베들레헴, 아무도 위대한 왕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그곳, 아무도 왕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던 그곳에서 바로 왕이 나오신 것이죠. 왕은 베들레헴에 오십니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 자신을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의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베들레헴입니다. 왕은 베들레헴에 오십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십니다.
이제 두 번째 예언으로 넘어갑시다. 첫 번째는 이미 충분히 살펴보았습니다. 베들레헴에서의 탄생입니다. 그 탄생 속에서 우리는 동방 박사들의 경배를 보았습니다. 헤롯의 증오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예언이 성취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마태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왕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셔야 합니다.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제 두 번째입니다. 첫 번째가 베들레헴에서의 탄생이라면, 두 번째는 애굽으로의 피신입니다. 애굽으로의 피신입니다. 13절입니다. 아직 우리가 살펴보지 않은 부분이죠. 13절입니다. “애굽으로의 도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장면을 생각할 때마다, 주일학교에서 한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이 떠오릅니다.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에 나온 대로 애굽으로의 도피 장면을 그려 보세요.” 한 아이가 그림을 그려서 제출했습니다. 선생님이 깜짝 놀랐습니다. 보잉 727 제트기가 그려져 있는데, 조종석에 네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그 아이를 보고 물었습니다. “이게 뭐야?” 아이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애굽으로 도피하는 장면이에요.” “그럼 이 사람들은 누구니?” “요셉과 마리아와 아기 예수님이에요.” “아니 그런데 이 또 한명은 누구니?” “아, 저 사람이요? 본디오 빌라도예요. 조종사예요.” 영어로는 조종사를 뜻하는 이 ‘파일럿’과 빌라도가 발음이 똑같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겁니다. 물론 성경에 나오는 애굽으로의 도피와는 아주 다른 얘기죠.
그렇다면 애굽으로의 피신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매우 흥미롭고 놀라운 방식으로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기 예수님은 이미 생후 몇 개월이 지난 상태로 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저는 그때가 요셉과 마리아가 아주 큰 기쁨을 느끼면서 위로받는 시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고요? 천사를 통해 들은 놀라운 메시지에 대한 확증을 받은 적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주신 말씀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임마누엘,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시고, 구원자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방 박사들이 와서 확인해 주고 확증해 주었을 때에, 확신과 기쁨을 느꼈을 겁니다. 그리고 소망의 기대로 가득했을 겁니다. 천사가 요셉에게 전한 말씀,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전한 말씀,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했던 말, 목자들이 요셉과 마리아에게 전한 이야기, 시므온이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이 모든 것이 정말이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 동방 박사들을 통해서 그 사실이 확증되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시겠지만 시므온은 마리아에게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라고도 했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찾아온 직후에는 확증을 받았으니 기쁘고 행복했을 겁니다. 기대감과 놀라움으로 가득했을 겁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자신들이 옳은 선택을 했다는 사실을 확신하면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다시 확인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칼이 뽑히고 마음을 찌르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장면이 13절에 나옵니다. “그들이 떠난 후에…” 동방 박사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꿈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꿈이 아닙니다. 인간의 상상으로 만드는 환상이 아니라, 반의식적인 상태에서 실제로 천사와 마주하는 계시의 특별한 방식입니다.
성경에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베드로가 욥바에서 지붕 위에서 쉬고 있었을 때도 이런 일이 있었고, 다니엘에게도 이런 일이 있었고, 아비멜렉에게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야곱과 요셉, 라반, 술 맡은 관원과 떡 굽는 관원에게도 이런 일이 있었고, 심지어 바로에게도 이런 방식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말씀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이 사건도 그렇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탄생을 전후한 시기에는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서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매우 특별한 형태의 꿈입니다.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두 사람이 함께 언급될 때마다, 항상 아기가 먼저 언급된다는 사실입니다. 이야기의 중심이 아기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앞부분을 보면 동방 박사들은 이미 떠난 뒤입니다. 12절입니다.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사람의 계획은 결코 하나님의 뜻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멸하려던 바로의 계획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처럼, 여기서도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요셉에게 피하라고 경고하십니다. 동방 박사들에게 하신 것과 똑같은 동일한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호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지키고 계십니다. 한때는 속박과 억압의 땅이었던 애굽이 이제는 피난처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머무는 집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숨을 곳이 되었습니다. 눈앞에 닥친 위험을 피해 도망치는 가족에게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 주었습니다.
여기서 “떠났다”라는 단어, 정말 흥미롭습니다. 헬라어로는 ‘아나코레오(anachōreō)’입니다. 아주 중요한 단어는 아니지만 마태복음에서 두 번 더 사용됩니다. 모두가 위험을 피해서 물러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단순히 떠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위험을 인식하고 피하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4장 12절입니다.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여기서도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자신에게도 위험이 닥칠 수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 자리를 떠나신 것입니다. 이 단어는 위험을 인식하고 피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동방 박사들도 위험을 인식하고 다른 길로 고국으로 돌아갔던 겁니다. 동방 박사들이 떠난 후에, 천사가 다시 요셉에게 나타나서 피하라고 명령합니다. 잘 들으십시오.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여기서 이 “피하라”라는 단어도 흥미롭습니다. 헬라어로 ‘퓌게(pheuge)’입니다. 현재 명령형으로 쓰여서 계속적인 행동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도망쳐라, 계속해서 피하라” 이런 의미입니다. 결코 짧은 여정이 아닙니다. 애굽 국경까지가 한 120킬로미터 정도고, 그 안쪽 깊은 지역까지 들어가면 적어도 160킬로미터 이상을 더 이동해야 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한 280킬로미터 정도 되었을 겁니다. 아기가 있었기 때문에 빠르게 이동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며칠이 아니라 여러 날, 어쩌면 몇 주에 걸친 아주 긴 여정이었을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애굽에 대해서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야 지금 이 사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애굽은 유대인들에게 피난처 같은 곳이었습니다. 특히 마카비 혁명 이후에는 더욱 그랬습니다. 배경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약과 신약 사이에는 공백기가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바벨론과 메대-바사가 지배했죠. 신약에서는 로마가 지배합니다. 그런데 그 사이 공백기에는 헬라, 그러니까 그리스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헬라 시대에 마카비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마카비라는 유대인 가문이 주도했습니다. 마카비 혁명 이후, 그러니까 이른바 중간기 동안 많은 유대인들이 애굽으로 피신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이전부터 이미 중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애굽을 정복하면서 유대인들이 애굽에 거주할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세운 도시 중의 하나가 바로 알렉산드리아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따서 지은 도시이죠. 알렉산더는 애굽을 정복한 후에 이 도시를 세우고, 유대인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애굽으로 가서 머물 수도 있었고 공동체를 형성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유대인들이 애굽으로 피신하게 되었던 겁니다.
애굽 하면 떠오르는 쿰란 공동체를 아실 겁니다.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쿰란 공동체는 사해 근처에 살던 유대인 공동체로서, 금욕적이고 수도사적인 삶을 살았다, 구약 성경을 필사하던 서기관들로서, 훗날 “사해 사본”이라고 불리는 문서들을 기록했다, 라고 말입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이 쿰란 공동체가 한동안 사해 지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봅니다. 이미 오래 전에 애굽으로 피신해 있다가 헤롯이 죽은 이후에야 다시 돌아왔다고 봅니다. 이처럼 헤롯이 통치하는 동안에는 점점 더 많은 유대인들이 애굽으로 피신했습니다. 마카비 시대에는 작은 규모로 시작되었지만, 헤롯 시대에 이르러서는 그 규모가 훨씬 더 커졌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주전 31년경쯤에 쿰란 공동체가 그 지역을 떠났는데, 헤롯이 죽은 이후에야 다시 돌아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피난을 떠나는 사람들은 남쪽으로 내려가서 애굽으로 향했습니다. 그 결과 마카비 시대 이후로 수많은 유대인들이 애굽에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애굽 사람들과 동등한 권리를 누렸습니다. 실제로 알렉산더 대왕은 유대인에게 마케도니아인과 동등한 권리를 주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마케도니아인에게는 매우 큰 의미를 갖는 일이죠.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주전 150년경,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약 150년 전에는 유대인을 번성하게 하려고 애굽에 별도의 성전까지 세웠습니다. 그리고 주후 40년경,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음 직후의 시기에 역사학자 필로(Philo of Alexandria)는 애굽에 최소 100만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니까 애굽에 유대인들의 공동체가 생겨났습니다. 피난처로써 안전하고 보호받을 수 있었던 것이죠. 두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동방 박사들이 드렸던 황금, 유향, 몰약이 바로 이 가난한 가족을 위한 하나님의 공급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매우 값진 물건이었죠. 그렇기 때문에 팔거나 혹은 교환하거나 해서 생필품을 마련할 수 있었을 겁니다. 적어도 요셉이 일을 찾기 전까지는 충분히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애굽으로 가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살기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헤롯의 압제를 피할 수 있는 장소였기 때문만도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구약이 메시아가 반드시 가야 할 장소로 애굽을 지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셉과 마리아가 그 사실을 당시에는 몰랐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약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자신의 계획을 정확하게 이루어 가고 계셨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저도 어릴 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왜 하필 애굽까지 가야 했을까?”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무리 가운데를 지나가셔도 아무도 손댈 수 없었던 장면도 있고, 또 성령님이 가사에 있던 빌립을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옮기시는 장면도 나옵니다. 북쪽에 있던 사람을 갑자기 광야로 옮기시는 장면도 있죠.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들어 올리셔서 공중에 머물게 하시다가, 마치 하나님의 헬리콥터처럼 위험이 지나가면 다시 내려놓으실 수는 없었을까? 왜 굳이 이렇게 긴 거리를 이동하게 했을까?”
그러나 애굽으로 피신하게 하신 것은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의 모습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에 들어오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모든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부모님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아기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해야 할 일을 그대로 해야 했습니다. 직접 움직여야 했고, 길을 걸어가야 했고, 아기를 안고 이동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삶을 실제로 경험하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요셉 가족은 다른 모든 가정과 똑같이 행동했습니다.
헤롯이 아기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배후에는 헤롯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이 있었습니다. 사탄은 처음부터 살인자였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을 보면, 사탄이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합니다. 큰 용이 아이를 쫓아가며 죽이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요셉과 마리아는 애굽으로 갔습니다. 13절입니다.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하나님께서는 헤롯의 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의 계획을 알고 계셨습니다. 헤롯은 하나님을 속일 수 없었습니다. 천사가 말합니다.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천사는 다시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애굽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만들어낸 이야기들을 보면 정말 기가 막힐 정도입니다. 제가 이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애굽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아는 것은 오직 13절에 기록된 내용뿐입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말할 때까지 거기 있으라.” 이게 전부입니다. 그런데도 애굽에서 이런 저런 일이 일어났다면서 수없이 많은 책을 썼습니다.
실제로 <우리 주님의 유년기 복음서(The Gospel of the Infancy of Our Lord)>라는 책이 있는데요, 거기에는 예수님의 애굽 생활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초기 시대에 퍼져 나온 많은 거짓 문서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책에는 어린 예수님이 걸어가시는 곳마다 우상들이 저절로 무너져 내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예수님이 아주 어린 시절에 애굽에서 귀신 들린 세 살짜리 아이를 만난 이야기도 나옵니다. 예수님이 아직 기어다니던 시절이었다고 하면서, 포대기 천 조각을 떼어서 그 귀신 들린 아이의 머리에 얹었답니다. 그랬더니 즉시 귀신이 떠나갔다고 합니다.
또 마리아가 가는 곳마다 누구든지 마리아를 보기만 하면 병이 나았다고 합니다. 아이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강도들이 광야로 달아났고, 또 지나가시는 곳마다 온갖 질병이 치유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부 터무니없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초대 교부였던 오리겐(Origen)은 켈수스(Celsus)의 말을 이렇게 인용합니다. “예수는 사생아로 태어났고, 애굽에서 품팔이를 하면서 지내다가 거기서 기적적인 능력을 배우게 되었다. 그 후에 자기 나라로 돌아와 그 능력을 사용하여 자신을 신이라고 선포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애굽에 가서 마술을 배워 왔다는 겁니다.
여러분, 탈무드(Talmud)가 뭐라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유대 탈무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에 열 가지 마술이 내려왔는데, 그 가운데 아홉은 애굽이 받았고 나머지 하나를 온 세상이 나누어 가졌다.” 유대 랍비들은 탈무드에서 애굽을 마술의 중심지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어린 시절에 애굽에 가서 마술을 배우고 돌아와, 그 마술로 세상을 속이며 자신이 메시아라고 믿게 했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유대인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를 13절의 빈 여백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예수님이 애굽으로 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오직 이게 전부입니다. 예수님은 애굽으로 가셨고, 거기에 머무르셨습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거기서 마술을 배우고 그곳에서 나와서 마술로 세상을 속이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애굽으로 가신 이유는 예언의 일부였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천사의 말에 순종했습니다. 14절입니다.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요셉은 바로 떠났습니다. 어둠 속에서, 밤중에 떠났습니다. 무사히 피신했습니다. 아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겁니다. 왜냐하면 이동할 수 있는 속도가 매우 느렸죠. 만일 소문이 퍼졌다면 헤롯의 군사들이 곧바로 뒤쫓아왔을 것이니까요. 그렇게 되면 엄청난 재앙이 되었을 겁니다. 따라서 밤에 조용히 떠나면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마태는 그 자세한 이야기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태의 관심은 사건의 세부 내용이 아니라 예언에 있기 때문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기간이 아주 길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헤롯은 주전 4년 3월이나 4월 유월절 직전에 죽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짧은 기간이었을 겁니다. 아마 한 두어 달 정도였을 겁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충분히 가능한 추측입니다.
19절입니다.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그러니까 헤롯이 죽었을 때 천사가 다시 나타나서 “이제는 안전하다. 이제 돌아가도 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떠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헤롯이 죽었고, 그 후에 천사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왜 애굽으로 갔을까요? 예언이 어디에 나올까요?
15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이 모든 일은 단순히 요셉 가족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얼마든지 다른 방법으로도 지킬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메시아의 자격과 신분을 확증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사건을 예언과 연결시키신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여러분, 이 말씀은 정말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이라.” 그리고 그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다시 말해서 구약의 선지자는 아들, 왕, 기름부음 받은 자, 메시아,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애굽에서 나올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그 아이가 베들레헴에서도 나오고 애굽에서도 나올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이 모든 것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알렉산더 대왕 시대부터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린 예수님이 잠시 머무르실 수 있도록 애굽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다스리시며, 모든 것을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하나로 이루어 가십니다.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어디에 나온 말씀입니까? 호세아 11장 1절, 호세아 11장 1절입니다.
예언의 문맥을 보겠습니다. 호세아 11장 1절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흥미로운 점을 보십시오. 호세아 11장 1절에서 하나님은 누구를 가리켜 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누구를 아들이라고 합니까? 그리스도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예언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예언도 아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이야기이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호세아서를 연구하는 성경학자들은 누구나 하나님께서 애굽의 속박에서 이스라엘을 불러내셨던 과거를 회상하신 것이라고 말할 겁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왜 예언일까요? 미래에 대한 말씀도 아닌데,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요? 이제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잠시 호세아서를 보겠습니다.
저는 호세아 선지자를 참 좋아합니다. 여러분도 호세아서를 자세히 읽어보시면 분명히 좋아하시게 될 겁니다. 호세아의 메시지는 실패의 메시지입니다. 타락의 메시지입니다. 이스라엘의 비극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불순종했다. 너희는 신실하지 못했다. 너희는 죄를 지었다. 너희는 타락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영적인 창녀다. 너희는 영적인 매춘부다. 너희는 영적인 간음한 여인이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그렇게 말합니다. 사실 호세아서가 기록될 당시의 이스라엘은 역사상 가장 비참한 영적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서 심판을 쏟아내고 계십니다. “이 창녀야, 이 간음한 여인아, 이 매춘부야.” 이런 표현들이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너희의 모습이다. 너희를 약혼한 신부처럼 맞아주신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했고, 거짓 신들을 향해서 달려가서 너희의 연인으로 삼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자신의 삶을 통해서 이 사실을 아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의 삶 속에 상상하기 어려운 가장 비극적인 경험을 허락하십니다. 호세아는 고멜이라는 이름의 여인과 결혼했죠. 시작부터가 좋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고멜과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고멜은 신실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음란한 아내”가 된 것이죠. 고멜은 연인들을 따라 이리저리 떠돌아 다녔습니다. 너무나 많은 남자들을 따라다녀서 아마 호세아도 다 셀 수 없었을 겁니다. 고멜은 연인들에게서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런데도 호세아의 마음은 여전히 고멜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호세아는 모든 모욕과 상처를 견디면서 기다렸습니다. 고멜은 호세아의 마음을 산산이 무너뜨렸습니다.
고멜은 성적인 죄의 노예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고멜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고멜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떠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수치의 자리까지 찾아갔습니다. 고멜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들어가서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을 내놓으면서 말합니다. “여기 있다. 내가 다시 데려가겠다.” 호세아는 그 창녀를 다시 사 왔습니다. 매춘부를 다시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다시 아내의 자리로 회복시켰습니다. 다시 존귀한 자리로 세웠습니다. 고멜이 거절하고 짓밟아버렸던 그 사랑을 다시 부어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호세아의 실제 경험입니다.
그리고 호세아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말합니다. “내가 영적 우상숭배로 인해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무너지는지를 선포할 때에, 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 나 역시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호세아가 고멜과 결혼했던 것처럼 하나님도 이스라엘의 남편이 되셨습니다. 호세아가 고멜을 사랑했던 것처럼 하나님도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다. 고멜이 호세아에게 신실하지 못했던 것처럼 이스라엘도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고멜이 연인들에게 사로잡혀 종이 되었던 것처럼 이스라엘도 우상들에게 사로잡혀 종이 되었습니다. 고멜은 연인들을 의지했고 결국 연인들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우상들을 의지했고 결국 우상들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호세아의 넓은 사랑이 손을 내밀어 자기 아내를 다시 사 왔던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도 사랑으로 손을 내밀어 돌아오기를 원하는 남은 자들을 다시 받아주셨습니다. 이것이 호세아서의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의 마음이 무너졌을 때, 자신의 꿈과 이상이 눈앞에서 산산이 깨지는 것을 보았을 때에,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깊은 고통을 통과했을 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호세아야, 이제 너는 내 마음을 안다. 이제 내 설교자가 되어라. 이제 그들에게 내 마음을 전해라. 이제 그들이 깨닫게 해라.”
바로 이 비극적인 훈련이 호세아서의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얼마나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지를 알려주기 원하셨고, 동시에 호세아에게도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를 깨닫게 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호세아서 11장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이 간음한 아내를 향한 사랑은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뒤늦게 사랑이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수많은 연인들 가운데 마지막에 붙잡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어린 시절부터 사랑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셨는지, 그리고 얼마나 오래전부터 사랑하셨는지를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아직 작은 민족이었을 때에,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에, 바로의 권력 밑에 억눌려 있었을 때에, 하나님은 이미 사랑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속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신명기 32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하나님은 광야 같은 땅에서 이스라엘을 만나셨고, 눈동자처럼 지키셨습니다. 출애굽기 4장 22절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자, 이제 다시 마태복음으로 돌아가서 연관성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태가 호세아의 말씀을 인용해서 그리스도께 적용시키면서 뭐라고 합니까?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라는 말씀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여기에서 여러분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놀라운 개념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예표(types)”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누구의 예표입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여러분, 예표(type)가 뭔지 아세요? 예표란 말이 없는 예언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표는 비언어적인 예언입니다. 예언(prophecy)은 미래의 사건을 말로 선포하는 언어적인 표현이죠. 그러나 예표는 말이 없는 예언입니다. 구약에는 하나님께서 죽으실 구원자를 보내실 것이라고 직접 말하는 본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본문들은 그렇게 직접 말하지 않고 단지 어린 양의 희생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죽어간 모든 어린 양은 누구를 보여주는 예표였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비언어적인 예표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성경에서 예표라고 불리는 비언어적인 예언은 언어적인 예언보다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아주 강력합니다. 직접적입니다. 저는 성경의 예표 연구를 참 좋아합니다. 신학교 공부를 하던 시절에 이 주제로 논문을 쓴 적이 있는데요, 저에게 아주 큰 유익이 되었습니다. 이 분야에 큰 흥미를 가지고 많은 책들을 제가 읽었습니다. 특히 패트릭 페어베언(Patrick Fairbairn)이 쓴 예표론에 관한 훌륭한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많은 학자들이 예표를 열심히 연구해 왔습니다.
제가 예표에 대해서 믿는 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다소 보수적인 입장입니다. 오직 신약성경이 분명하게 예표라고 말해주는 경우에만 참된 예표로 인정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약성경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런 기준이 없으면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무언가를 상징한다고 말하게 될 겁니다. 통제하지 않으면 완전히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저는 예표가 궁극적으로는, 잘 들으십시오, 오직 신약성경 기자들이 정의해주는 방식 안에서만 성취된다고 믿습니다. 자,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예표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마태가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이스라엘을 그리스도의 예표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말없이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예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셨던 것은, 장차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애굽에서 불러내실 일을 보여주는 예표였다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성경적인 예표입니다. 비언어적 예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이스라엘은 예언의 말씀 속에서 자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서 이사야서를 보면 종이 이스라엘을 가리키는지 메시아를 가리키는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둘 다를 “여호와의 종”이라고 부르시기 때문이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장자입니다.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불려 나왔고, 그리스도도 애굽에서 불려 나오셨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예표입니까?
여러분, 요셉도 그리스도의 예표라는 것을 기억하십니까? 왜냐하면 신약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요나조차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약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있었던 것처럼 “인자도” 어떻게 된다고 하셨습니까?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는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예표입니다. 게벨라인(Arno Gaebelein)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애굽에서 시작된 이스라엘의 역사는 죄와 불순종과 배교와 수치의 역사였다. 그러므로 참된 한 분이 오셔야 했다. 여호와의 참된 종이신 그분은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자기 백성의 역사를 직접 통과하셔야 했다.” 저는 이 말이 참 좋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자기 백성의 역사를 다시 통과하셨습니다. 예표를 이루시기 위해서죠. 예표를을 완성하시기 위해서죠. 잔인한 왕 바로가 이스라엘을 멸하려 했던 것처럼, 헤롯이라는 또 다른 잔인한 왕도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자기 아들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구원해 내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애굽에서 자기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보호하시고 건져내셨습니다. 메시아는 이스라엘 안에 나타난 예표를 보이신 분이십니다. 예표의 성취입니다. 성경의 예표가 가진 견고함과 절대성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신약성경 기자가 “이것이 예표다”라고 말하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그렇게 의도하셨던 겁니다.
그런데 저는 이 예표가 단순한 예표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둘 사이의 연관성이 그보다 훨씬 깊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단지 그리스도의 예표일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떼어놓을 수 없는 연관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안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지 못했다면 그리스도도 태어나실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이미 거기 계셨던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멸망당했더다면 메시아에 대한 예언은 결코 성취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도도 함께 나오신 것 아니겠습니까?
호세아의 예언은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타락은 예수님 시대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영적 음행과 영적 매춘의 시대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호세아의 예언이 하늘에서 번개처럼 다시 나타났습니다. “...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하나님께서 어린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애굽에서 불러내셨던 것처럼, 이제 하나님의 사랑은 메시아에게 집중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메시아를 애굽에서 불러내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구원의 가장 위대한 원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사건입니다. 이것이 바로 원형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로 세상을 다스리시기 위해 다시 오실 때에,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로 오실 그때에, 선지자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사야 19장, 그리고 스바냐 3장을 기억해 두십시오. 이사야 19장과 스바냐 3장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십니까? 잘 들어보십시오. 직접 찾아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들으십시오.
주 예수님께서 의로 세상을 통치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때에, 선지자들은 천년왕국에서 특별한 복의 자리를 얻게 될 나라 가운데 하나가 애굽이라고 합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애굽이라고요? 아니, 정말 그 애굽 말입니까? 이스라엘을 노예로 붙잡아 두었던 나라 아닙니까? 억압했던 나라 아닙니까? 짚도 주지 않으면서 벽돌을 만들게 했던 나라 아닙니까? 우상숭배로 가득하고 거짓된 그 애굽 말씀이세요?” 게다가 요즘은 투탕카멘 왕 이야기며 사후 세계 이야기며 태양선 손금 이야기 같은 온갖 허황된 것들이 계속 들립니다.
왜 애굽이 천년왕국에서 자리를 얻게 될까요? 애굽은 늘 이스라엘을 대적해 온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혹시, 어쩌면 천년왕국에서 애굽이 받게 될 그 복은, 아기 예수님께 피난처를 제공했던 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감사의 표현일 수 있지 않을까요? 어쩌면 그럴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베들레헴에서의 탄생, 애굽에서의 탈출까지 살펴봤습니다. 이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역사를 얼마나 아름답고 놀랍고 세밀하게 계획하시는지를 보면서 다시 한번 놀랍니다. 역사는 참으로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나라들의 경계를 정하시고, 왕과 종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길을 정하십니다. 사람의 진노조차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드시고, 모든 것을 돌이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선지자가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이라고 말한 대로 그곳에 태어나셨고, 또 선지자가 애굽에서 나오실 것이라고 말한 대로 애굽으로 피신한 왕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모든 사건들을 통해 거짓된 자들이 드러나고 참된 왕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은 최소 332개의 예언을 성취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믿음으로 나아오는 모든 사람의 마음 깊은 갈망과 필요까지도 예수님께서 채우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왕이시라면, 참으로 왕이시라면, 왕에게는 경배와 존귀와 순종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의 왕이시기 때문에, 그 순종과 경배는 기쁨입니다. 우리는 마태의 외침을 듣습니다. 왕의 깃발을 높이 들고 세상이 무엇을 하든지 그 왕께 면류관을 씌우라고 외치는 마태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나 헤롯 같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도 있습니다. 잘못된 길에 들어서 있는 사람들이죠. 어떤 사람은 증오하고, 어떤 사람은 무관심합니다. 반면에 동방박사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사실을 보고 나아와 경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예표하는 그림을 너무도 분명하게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구약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님께 왕의 면류관을 씌우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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