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장을 펴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장입니다. 마태복음을 살펴보면서 얼마나 귀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앉아 계신 여러분의 모습만 보아도 제 마음이 참 기쁩니다. 정말입니다. 앞으로 마태복음을 점점 더 깊이 있게 이해하시게 될 겁니다. 왜냐하면 한 구절 한 구절을 더 잘 이해하면 이해하실수록 다음에 나올 내용이 더욱 깊이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은 그야말로 놀라운 책입니다. 신약 성경을 여는 책입니다. 성령님이 신약의 첫머리에 두신 책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신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신약 전체의 중심입니다. 특별히 신약을 여는 네 개의 복음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주제로 합니다. 각 복음서는 모두 예수님의 생애를 다루고 있지만,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또 매우 독특한 관점에서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마태복음의 예수님은 다스리고 통치하러 오신 주권자로 나옵니다. 마가복음의 예수님은 섬기고 고난받으러 오신 종으로 나옵니다. 누가복음의 예수님은 함께하고 공감하기 위해 오신 인자, 그러니까 사람으로 나옵니다. 요한복음의 예수님은 계시하고 구속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 나옵니다. 각 복음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각자의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방금 말씀드린 내용의 조화가 놀랍습니다. 마태복음의 예수님은 주권자이시고, 마가복음의 예수님은 종이십니다.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예수님은 주권자이시며 동시에 종이십니다. 양극단이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두 복음서에도 동일한 대조가 나타납니다. 누가복음의 예수님은 사람이시고, 요한복음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사람 대 하나님, 주권자 대 종, 이런 두 쌍의 극단적 대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대조를 이루는 양극단의 간극을 모두 채우십니다. 주권자 하나님이시며, 종인 사람, 그 사이를 예수님은 충만하게 채우십니다. 사복음서가 모두 다르게 기록된 이유입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주권자로 제시합니다. 마태복음의 모든 내용은 예수님의 위엄과 주권, 그리고 다스리시는 통치자로서의 위대한 인격에 초점을 맞춥니다. 예수님은 통치권을 가진 분이십니다. 메시아이십니다. 기름 부음 받은 분이십니다. 약속된 왕이십니다. 마태복음의 첫 문장이 그 열쇠를 보여줍니다. 1장 1절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다윗은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왕의 계보를 세운 인물입니다. 마태복음의 시작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계보라고 강조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유대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서 나오셨고, 다윗의 계보를 따라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통치권, 왕권의 근거입니다. 마태복음의 독특한 특징이죠. 다른 어떤 복음서도 이렇게 시작하지 않습니다. 마태가 이렇게 시작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왕으로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마태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의 왕가를 거쳐 내려오는 주님의 계보를 기록했습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을 종으로 제시합니다. 종으로 제시하기 때문에 마가복음에는 계보가 전혀 없습니다. 종은 계보가 중요하지 않죠. 그래서 마가복음에는 계보가 없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을 사람으로 제시합니다. 예수님을 사람으로 제시하기 때문에 계보를 끝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서 아담에게까지 이르게 합니다. 예수님이 첫 사람 아담의 후손으로 오신 참 사람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네 번째 복음서인 요한복음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제시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계보를 모두 건너뛰고 이렇게 말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은 곧바로 영원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본질을 다룹니다.
그리고 각 복음서는 저마다 강조하는 주제에 따라서 그 계보의 방향도 정확히 맞추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메시아 왕이십니다. 기름 부음 받은 주권자이시기에 다윗의 계보를 통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마태복음 1장에서 왕의 계보가 다윗에게서 시작되어서 요셉과 마리아에게까지 이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셨고, 왕으로서 다스릴 권리를 가지고 태어나셨다는 것도 보았습니다. 만일 당시의 이스라엘이 왕정 시대였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태어나시자마자 이스라엘의 왕이 되셨을 겁니다. 예수님은 왕의 혈통이십니다. 마태복음 1장의 핵심이죠. 마태는 예수님이 왕이심을 확증합니다. 지난 시간에 동정녀 탄생에 관해서 모든 세부 사항을 살펴보았습니다. 모든 내용 하나하나가 예수님께 다윗의 왕좌를 차지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힘있게 증언하죠.
마태는 예수님께서 왕의 혈통이심을 확증한 이후에, 2장에서 다시 한번 예수님이 왕이심을 강조합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 왕의 경배를 드렸다는 사실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왕이시라면 계보에 그 사실이 드러나야 한다. 왕의 자손이어야 한다. 사람들의 반응에도 그 사실이 드러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마태복음 2장에서 마태는 동방 박사들이 와서 예수님이 참으로 왕이심을 선포하고,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마태가 중요하게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계보로 보아서 왕이십니다. 또 동방 박사들이 와서 예물을 드린 일을 통해서 왕의 위엄이 나타났습니다. 그 위엄이 받아들여졌고, 존귀히 여김을 받음으로써 드러났습니다.
그러면 동방 박사들에 대해서 무엇을 배웠습니까? 매우 흥미로운 내용입니다. 이미 다뤘기 때문에 다시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그냥 몇 가지만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2장 1절입니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여기서 박사라는 말은 번역하기 쉽지 않은 단어라고 했죠. 메대인 중의 세습 제사장 지파를 가리키는 명칭인 ‘마기(magi)’라고 했습니다. 메대인은 큰 민족이었습니다. 그 안에 여러 지파가 있었습니다. 그 지파 중의 하나가 마기 지파입니다. 세습 제사장 계열입니다. 매우 높은 지위를 가진 제사장 계층이었습니다. 유대인 중에서 레위인이 제사장 역할을 했던 것과 비슷합니다. 이들은 지혜로 인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갔습니다. 신비주의적 능력과 점성술, 천문학적인 지식을 통해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과 바사와 메대의 왕들과 궁정에서 조언하는 자리에까지 올라갔습니다. 아주 매우 높은 지위에 있었습니다.
실제적인 지위도 매우 높았습니다. 그래서 바사 제국이나 파르티아 제국의 어떤 왕도 이들이 가르치는 법, 그러니까 메대와 바사의 법을 배우지 않고는 왕위에 오를 수가 없었습니다. 또 이들의 인정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이들은 이스라엘 동쪽의 거대한 제국에서 공식적으로 왕을 세우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왕을 알아보고 왕관을 씌우는 일이 이들의 일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왕의 궁정에 있었습니다. 수년이 아니라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왕의 곁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방 세계에서 공식적으로 왕을 세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처럼 왕을 세우는 동방 박사들이 베들레헴까지 찾아와서, 나신 분, 그러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고 왕으로 높였다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러니까 마태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요점을 분명히 합니다. 예수님은 혈통으로 왕이시다. 또 인정을 받으셨으니 왕이시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한 이들이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다는 점입니다. 동방에서 공식적으로 왕을 세우는 이들이 예수님을 알아본 겁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에 대한 정보를 어디서 얻었을까요? 제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주전 586년경, 그러니까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500여 년 전에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기억하시죠?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습니다. 바로 그 지역이 동방지역입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사람들과 메대 사람들, 그리고 그 지역에 함께 섞여 살던 바사 사람들에게 장차 태어나실 한 왕에 대해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대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매우 높은 지위에까지 올랐습니다. 누구입니까? 다니엘입니다.
다니엘 5장 11절을 보면 다니엘은 박사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틀림없이 하나님의 위대한 선지자 다니엘은 장차 오실 왕에 대해서 동방 박사들에게 말해 주었을 겁니다. 그래서 이들은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위대한 분이 역사 가운데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세대를 거쳐 전해진 것입니다. 마침내 때가 이르렀을 때에, 이들은 그분을 왕으로 알아보고 영접할 준비가 이미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펴보았던 한 가지를 더 보겠습니다. 당시 세계에는 두 개의 큰 세력이 있었습니다. 동쪽의 떠오르는 바사, 그러니까 페르시아 세력입니다. 혹은 당시 이름으로 파르티아 제국입니다. 새롭게 부상하는 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한때는 세계를 지배했던 강대국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다시 그 힘을 회복하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쪽의 어느 나라입니까? 로마 제국입니다. 로마는 사실상 거의 모든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땅의 서쪽, 거대한 유럽 대륙과 그 밖의 지역은 물론이고, 이스라엘과 그 동쪽 일부 지역에까지 로마의 영향력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방은 늘 들끓고 있었습니다.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키고, 여기저기에서 작은 전쟁들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동방과 서방 사이에는 적대감이 컸습니다.
당시의 동방 제국은 왕을 찾고 있었습니다. 프라아테스 4세라는 왕이 있었지만, 무능하다는 이유로 폐위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왕을 찾고 있었습니다. 왕을 찾고 찾고 또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박사들, 이 마기들은 예수님께 왔을 때에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찾던 군주가 이분인지 몰라. 어쩌면 이분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무적의 왕이 되어서 로마의 세력을 무너뜨리고, 우리가 한때 정복했던 세계를 다시 되찾게 할지도 몰라.” 바벨론과 메대-바사가 세계를 다스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왕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저는 이 마기들이 단지 왕만 찾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했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정치적인 의미만 본 것이 아니라, 신앙적 의미도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특별한 일,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왕, 곧 구약에서 예언된 그 왕을 세우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들에게 정치적인 목적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영적인 목적도 함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왕이 태어나실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 이들은 길을 나섰습니다. 하나님께서 동방 하늘에 비추신 놀라운 쉐키나 영광을 통해서 그 사실을 이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들은 분명히 다니엘을 비롯한 유대인들에게서 배운 성경 말씀과 연결했을 겁니다. 그래서 곧바로 짐을 꾸려서 예루살렘으로 향해 떠납니다. 어쩌면 오래 기다려 온 정치적 왕이 여기 계실지도 모른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그리고 틀림없이 다니엘과 다른 유대인들이 여러 세기에 걸쳐서 말해 온 영적인 통치자이심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동방의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바사의 공식적인 왕을 세우는 자들이 새로운 왕을 찾으러 온 겁니다. 이것이 바로 마태가 우리에게 보여 주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십니다. 왕을 알아보는 일을 맡았던 이 동방의 왕 세우는 자들이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았던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들은 이방인 가운데 처음 익은 열매처럼 그리스도께 나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경의 기록과도 아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집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이런 배경 위에서 1절부터 12절까지 다섯 장면의 드라마가 펼쳐진다고 했습니다.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로 도착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제가 잠시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1절과 2절입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기억하시겠지만, 여기서 별은 하늘에 떠 있는 별이 아니라 찬란히 비추는 광채, 쉐키나 영광을 뜻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왕이심을 알았고, 왕으로 경배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마태의 강력한 증언입니다. 유대인이 아니라 동방의 가장 높은 관리들이 왔습니다. 세상의 왕을 세우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이 왕이심을 알아본 것입니다.
상상이 되십니까? 마태복음이 주후 50년경에 기록되어서 유대 사회에 퍼지기 시작했을 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겠습니까?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님이 사실은 동방의 공식적인 왕 세우는 자들에게 왕으로 인정받으셨다는 사실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왕으로 인정받으셨습니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거해 버렸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매우 강력한 메시지를 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왕이셨다. 왕이셨다.”
역사학자들은 동방 박사들이 도착했을 때의 모습이 크리스마스 카드에 나오는 것처럼 낡은 낙타를 타고 들어온 세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몇 명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열두 명쯤 되었을 것이라 하고, 더 많았다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지 않기 때문에 굳이 추측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공식적인 왕 세우는 자들의 무리가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입니다. 높이 솟은 원뿔 모양의 모자를 쓰고, 턱 아래까지 내려오는 큰 덮개를 두르고, 길게 흘러내리는 화려한 옷을 입고, 페르시아의 준마를 타고 왔습니다. 역사가들은 또 동방 박사들이 페르시아 군대의 정예 병력의 호위를 받았다고 전합니다. 그러니 이 무리가 작은 도시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분명히 소동이 일어났을 겁니다. 분명히 온 성이 주목했을 겁니다. 거대한 규모의 사절단이 왔으니 말입니다.
이들은 인자의 표징을 보고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이 경배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프로스퀴네오(proskuneō)’인데, 몸을 굽혀 입을 맞춘다, 이런 뜻입니다. 왕에게 경의를 표할 때 사용하던 말입니다. 몸을 낮추어 왕의 발에 입을 맞추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프로스퀴네오라는 말은 자신보다 크신 분께 드리는 마음의 경배와 예배를 뜻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프로스퀴네오(proskuneō)’라는 말은 발에 입 맞추다, 몸을 굽혀 입 맞추다, 혹은 경외함으로 입 맞추다, 이런 뜻이라고 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오직 하나님께만 합당한 단어로 사용됩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이 천사에게 경배하려고 하자 천사가 말합니다. “일어나라. 나에게 프로스퀴네오 하지 말라. 하나님께 프로스퀴네오 하라. 경배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헬라어 단어 연구로 탁월한 업적을 남긴 게르하르트 키텔은 이렇게 말합니다. “박사들의 프로스퀴네시스(proskunesis), 그러니까 프로스퀴네오는 우주의 통치자께 드리는 예물이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 경배할 때에만 쓰이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동방 박사들이 왔을 때, 2절을 보면 예수님을 단지 정치적인 의미의 유대인의 왕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세상의 통치자로 보았습니다. 인간 이상의 존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신성을 보았습니다. 마태가 사용한 이 단어는 성경에서 오직 하나님을 경배할 때에만 사용됩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 대상이 하나님으로 여겨질 때에 쓰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만을 위한 표현입니다.
실제로 마태는 뒤에서 이 단어의 의미를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사탄은 예수님께 자신에게 절하고 ‘프로스퀴네오’ 하라, 이렇게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저는 동방 박사들이 왕을 알아봤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의미를 넘어 하나님이심도 알아보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왕에게 경배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기름 부음 받은 분,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시는 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하러 온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동방박사들이 도착한 장면을 보았고, 다음으로 3절에서 소동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헤롯은 왕이었죠. 그런데 동방 박사들이 성 안으로 들어와서는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이렇게 묻습니다. 헤롯의 첫 반응은 이랬을 겁니다. “뭐라고? 새 왕이라니?” 그리고 이들이 온갖 위엄 있는 복장을 갖추고 왔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바사의 왕을 세우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헤롯은 눈앞에 한 장면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박사들이 어떤 인물을 찾아서 왕관을 씌우고, 그 인물이 파르티아 제국의 왕좌에 오르고, 다시 서쪽으로 진군을 해서 이스라엘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장면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왕에 의해 희생되는 상상을 했을 겁니다. 헤롯은 에돔 사람, 이두매 사람입니다. 정치적 권력을 얻기 위해 기어오르고, 움켜쥐고, 음모를 꾸미고, 사람들을 죽이고 학살한 끝에 결국 로마 제국 정부로부터 왕위를 받았습니다. 그런 헤롯은 자기 자리를 잃게 될까봐 두려워서 공포에 빠졌습니다. 이미 일흔이 되어서 병들어 죽음을 앞두고 있었는데도 말이죠.
헤롯을 흔든 것은 질투였습니다. 의심이었습니다.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소동했습니다. 단순히 걱정했다는 말이 아니라 심하게 동요하고 흔들렸다는 뜻입니다. 헤롯은 소동했습니다. 그리고 온 예루살렘도 함께 소동했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루살렘이 두려워한 이유는 헤롯이 분노하면 자신들이 고통을 당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헤롯이 자기 죽음을 앞두고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 기억하십니까? 헤롯은 “내가 죽어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것이니 이스라엘 땅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 예루살렘 성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을 모두 잡아들여라. 그리고 내가 죽는 순간 모두 죽여라. 그러면 내가 죽는 날 이 도성은 반드시 통곡할 거야” 이렇게 말했습니다. 헤롯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공포에 빠졌습니다. 헤롯이 분노하면 자신들이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가 되었습니다. 이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헤롯은 베들레헴과 그 주변 지역의 두 살 이하 사내아이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두려워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헤롯은 크게 동요했습니다.
이제 지난주에 멈췄던 4절로 가 보겠습니다. 2주 동안에 이제 겨우 세 절밖에 못했습니다. 마태복음은 28장으로 되어 있으니까 이제는 좀 진도를 빼야겠습니다. 4절입니다. 이제 헤롯은 무엇인가 조치를 취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참 흥미로운 말씀입니다. 매우 흥미롭습니다. 헤롯이 누구의 출생지를 물었습니까?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 헤롯은 단순히 인간 왕을 세우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메시아,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헤롯은 마음속으로 그 둘을 연결하고 있었습니다. 약속된 메시아가 오셔서 구원을 이루실 것이라는 소망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과 입술에 오르내리던 시대였기에, 헤롯은 유대인의 왕과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동일한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헤롯은 이 사건이 인간적인 차원을 넘어서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신성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박사들이 알았던 것처럼 헤롯도 알고 있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런데 반응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한쪽은 경배하기로 결정했고, 다른 한쪽은 죽이기로 결정합니다. 헤롯은 두려움에 빠져서 분노했습니다. 늘 음모를 꾸미던 사람답게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박사들을 죽일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습니다. 아마 그럴 힘도 없었을 겁니다. 당시 천 명 가량의 페르시아 병력이 박사들과 함께 있었을 가능성이 크고, 헤롯의 군대는 원정을 나가 있었기 때문이죠.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습니다. 더구나 박사들을 죽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박사들을 죽이면 아이에 대한 정보를 얻을 길도 끊기니까 말이에요. 그렇게 되면 장차 왕이 될 가능성이 있는 그 아이는 숨어 버릴 겁니다. 아무 상처도 입지 않을 겁니다. 사실 헤롯은 박사들에게 아무 관심도 없었습니다. 헤롯이 없애고 싶었던 대상은 오직 그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4절에서 음모를 꾸밉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두 불러 모읍니다.
우리는 이미 박사들에 대해서 많이 살펴보았고, 헤롯에 대해서 다뤘습니다. 이제는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야 할 차례입니다. 바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입니다. 앞으로 마태복음 전체에 걸쳐서 계속 등장할 인물들이니까 지금 잘 알아 두시면 좋겠습니다.
먼저 대제사장을 보겠습니다. 복음서에서 이 제사장이라는 말은 성전에서 섬기던 유대인 계층에게만 제한적으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레위인이라는 특정 계층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특별한 지위를 가진 지파가 있었는데, 바로 레위 지파입니다. 제사장 직분을 맡았죠. 사실 이 세습 계보에 속하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이 족보 안에 있지 않으면 성전에서 섬길 권리가 없었습니다. 사실상 이들은 나라를 움직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신정 국가에서는 정치와 신학이 하나이기 때문이죠. 신정 정치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뜻입니다. 민주주의가 백성이 다스린다는 뜻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에게는 이러한 제사장들이 있었는데 사실상 이들이 나라를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 안에도 여러 부류가 있습니다. 잘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첫번째는 대제사장입니다. 참고로 원래 대제사장은 한 명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러 명인 경우가 자주 있었습니다. 대제사장 오직 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지성소에 들어가는 일입니다. 일 년에 한 번, 욤 키푸르(Yom Kippur), 유대인들이 지금도 기념하는 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성소를 지나서 성전 가장 안쪽, 지성소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속죄소 위에 피를 뿌려 그 해 온 민족의 죄를 속죄했습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일 년에 한 번만 할 수 있습니다. 이 대제사장의 옷자락에 방울을 달았습니다. 안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야 했기 때문이죠. 만일 죄를 품은 채 들어갔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 자리에서 죽습니다. 방울 소리가 멈추면 무슨 일이 생긴 겁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다시 나올 때까지 안에서 움직이는지 소리를 들어보려고 작은 방울을 옷에 달아 두었습니다. 오래 머물지도 않았습니다. 단 한 번 들어갔습니다. 대제사장이 하는 일입니다.
이 권한 때문에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했습니다. 최고 권력자입니다. 산헤드린의 의장입니다. 산헤드린이란 숫자 70을 뜻합니다. 마치 의회나 원로원 같은 칠십 명의 통치 장로들이 있었는데 그 모임의 의장입니다. 산헤드린은 유대인의 의회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동시에 유대인의 최고 법원이기도 합니다.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집행했습니다. 모든 재판의 판결도 내렸고, 입법도 담당했습니다. 사법부와 입법부가 하나로 합쳐진 그런 조직이 바로 산헤드린입니다. 그 지도자가 대제사장입니다.
이 대제사장(high priest)은 막강한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의 재판을 주재했습니다. 또 초기 사도들, 그러니까 스데반, 바울의 재판도 주재했습니다. 엄청난 권세를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때때로 대제사장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그 자리에서 쫓겨나기도 했다는 점입니다. 제도 자체가 이미 많이 타락해 있었습니다. 로마가 다른 대제사장을 원할 수도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여러 이유 때문에, 예수님이 사시던 당시에도 대제사장이 자리에서 밀려나고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앉는 일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 시대 신약성경에는 두 사람이 대제사장으로 언급됩니다. 한 사람은 안나스죠. 그리고 또 한 사람은 가야바입니다. 두 사람 모두 대제사장으로 불립니다. 안나스가 먼저 있었고, 가야바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안나스가 폐위되어서 가야바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지만, 안나스도 계속 대제사장, 이렇게 불렸습니다.
이런 사람이 여럿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역사 속에는 대제사장 여러 명이 동시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이 대제사장 직분에는 엄청난 귀족적 특권과 정치적 명예가 뒤따랐습니다. 그래서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입니다. 앞으로 대제사장이 계속 등장할 겁니다. 때로는 가야바가 앞에 서 있지만 안나스도 등장할 겁니다. 안나스는 뒤에서 움직이면서 가야바 뒤에서 실권을 행사한 겁니다.
둘째로 또 다른 종류의 제사장(priest)이 있는데, 성전 경비대장, 이렇게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성전 경비대장입니다. 대제사장 다음으로 중요한 사람입니다. 성전 경찰 책임자입니다. 당시의 이스라엘에는 자체적인 경찰 조직이 있었습니다. 이들 역시 제사장들입니다. 이 제사장들은 나라의 행정을 실제로 집행합니다. 그러니까 성전 경비대장은 성전 경찰의 우두머리입니다. 체포 권한도 가지고 있고, 대제사장이 임명했습니다. 대제사장 가문에서 뽑거나, 대제사장과 가까운 유력 가문 출신들을 뽑습니다. 다시 말해서 대제사장의 꼭두각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체포 권한은 있었지만, 대제사장이 어떤 사람을 잡아들이고 싶으면 “그 사람을 체포해라. 그렇지 않으면 네 자리는 없어” 이렇게 말만 하면 되는 구조였습니다. 실제 운영권은 대제사장이 틀어쥐고 있는 것이죠.
세번째입니다. ‘대제사장들(chief priests)’이라고 부르는 부류가 또 있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이 ‘대제사장들’이라는 표현은 공식 직함이 아닙니다. 이 무리는 이렇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현직 대제사장과 살아 있는 전직 대제사장들, 또 거기에 성전 경비대장이 포함됩니다. 제사장 중에 귀족 계층에 속한 다른 인물들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선별된 성전 감독관, 성전의 모든 재정을 맡은 사람들, 재무 담당자죠, 여러 행정 책임자들입니다. 또 칠십 명으로 이루어진 산헤드린 구성원들도 여기에 포함되었습니다. 이들이 바로 chief priests, 대제사장들입니다. 산헤드린 의원들, 재무 책임자들, 여인의 뜰에 있던 열세 개의 나팔 모양 헌금함의 돈을 관리하던 사람들, 각종 행정 책임자들,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까지 모두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결국에 이 ‘대제사장들’안에는 이스라엘의 귀족층과 핵심 두뇌 집단과 정치 권력층과 최고 실세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이들을 모두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들 외에 그냥 평범한 일반 제사장도 있습니다. 그냥 제사장입니다. 귀족 계층과는 구분이 되어서 정치적인 음모나 권력 구조 안에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이 제사장들은 24반열, 곧 24개 조로 나뉘어 있습니다. 일 년 내내 성전에서 섬긴 것이 아니라 정해진 순번에 따라 섬깁니다. 일 년에 두 번, 한 번에 일주일씩 봉사하러 성전으로 올라갑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 평범한 제사장이라면,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면서 자기 직업을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목수였을 수도 있고, 석공이었을 수도 있고, 벽돌공이었을 수도 있고, 목자였을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일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든지간에 자기 생업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다가 일 년에 두 번, 일주일 동안 성전에 올라와서 제사장 직무를 수행합니다. 일반적인 제사장을 말합니다. 역사학자들은 예수님 당시에 이런 제사장들이 약 만 팔천 명쯤 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귀족 아래 계층입니다.
사도행전 6장 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저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바로 이 만 팔천 명의 평범한 일반 제사장들 가운데서 나왔다고 확신합니다. ‘대제사장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냥 제사장의 무리, 이렇게 부릅니다. 여러 면에서 보면 제사장 계층 가운데 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서열의 맨 아래, 그러니까 일반 제사장들 아래에는 나머지 레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레위 혈통입니다. 가장 아래 계층의 24반열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다만 성전에서 공식적으로 제사 직무를 수행하지는 않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이들의 사역은 찬송하고 봉사하는 일입니다. 어떤 봉사였을까요? 좋은 예가 있습니다. 유대 전승 문헌인 미슈나(Mishnah)에 의하면 성전 경비였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직접적인 영적 제사의 사역을 맡지는 않았습니다. 경비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찬송의 영역에서는 아름다운 영적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다만 제단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는 본래 제사장 직무에 덧붙여진 보조 사역입니다.
지금까지 제사장 제도를 전체적으로 살펴봤습니다. 가장 위에 대제사장과 성전 경비대장이 있고, 그 아래에 귀족 계층인 ‘대제사장들’이 있고, 그 다음에 일반 제사장들이 있고, 그리고 맨 아래에는 성전을 돕고 성전 경비를 맡던 레위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듯이 신약성경 여러 곳, 특히 사도행전과 복음서에서 이들이 계속 언급됩니다.
이들이 귀족 계층과 일반 계층을 모두 포함해서 이스라엘의 관리 조직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 모든 구조 위에 로마 제국이 있었습니다. 로마가 이스라엘을 속국으로 만들어서 다스렸기 때문이죠. 꼭 기억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르러 대제사장들은 더 이상 거룩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아주 부패한 정치 세력이었습니다. 성전 안에서 벌어지는 음모는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너무도 부패해 있었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신약성경에서 이들이 처음 등장하는 마태복음 2장부터 시작해서,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와 충돌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까지 계속 예수님을 대적합니다. 결국에는 예수님은 이들의 거짓말과 음모와 속임수, 그리고 정치 술수의 희생자가 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맨 처음으로 성전을 정결케 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에 들어가셨고, 채찍을 만들어 짐승을 내어 쫓고 상들을 뒤엎어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바로 그때,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이스라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던 문제의 핵심을 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한 체제이죠. 예수님은 성전을 더럽힌 것들을 쓸어내셨습니다.
그러나 이 대제사장들은 나라의 결정권자들이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러면 여기 또 서기관들이 있는데, 서기관들은 누구입니까? 특정 지파 출신이라기보다는, 여러 지파 가운데서 나온 율법 학자들입니다. 이들에게는 율법에 대한 권위가 있었습니다. 평생 율법을 연구하면서 살았습니다. 말하자면 성경 학자들입니다. 물론 여기서 성경은 구약성경을 뜻합니다. 당시에는 아직 신약성경이 없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서기관들은 구약성경 학자들이었습니다. 구약의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집요하게 연구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듯이 에스라는 서기관이었습니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에스라는 구약 전체를 암송했다고 합니다. 창세기부터 마지막 책까지 기억만으로도 두루마리를 다시 기록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정말 구약성경에 몰두했던 사람입니다. 글자 하나하나를 아주 중요하게 여기면서 구약을 연구했습니다. 서기관들과 학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주목할 것은, 서기관들 중에 바리새파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문자주의자들입니다. 근본주의자들입니다. 율법주의자입니다. 기록된 그대로, 적힌 그대로 믿으려고 했습니다. 반면에 또 어떤 서기관들은 사두개파입니다. 자유주의자입니다. 성경의 많은 부분을 그냥 버려 버렸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들 중에서 부활이나 천사의 존재 같은 것들은 부인했습니다.
당시의 신학 진영은 이처럼 크게 두 파로 나뉘었습니다. 근본주의자인 바리새파와 자유주의자인 사두개파입니다. 양쪽 진영 모두에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파에 속한 서기관이든, 사두개파에 속한 서기관이든, 끊임없이 예수님께 도전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와서 말씀으로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 2장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정치 권력과 지적 엘리트들이 모두 그리스도와 대립하는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서기관들은 후에 랍비라고 불렸는데 오늘날 우리가 아는 랍비 제도의 뿌리입니다. 율법학자입니다. 오늘날의 랍비는 레위 제사장 계통이 아닙니다. 사실 지금은 누가 레위 계통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랍비는 현대판 서기관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헤롯은 정치가들과 신학자들을 함께 불러 모았습니다. 매우 당황스러웠을 겁니다. 이스라엘의 최고 정치가들은 이 새로운 왕에 대해서 전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최고 신학자들도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전혀 깨어 있지 않았습니다. 수천 킬로미터를 달려온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완전히 뒤처져 버렸습니다. 멀리에서 와서, 이 무지한 지도자들의 코앞에 왕이 태어났다고 선포했습니다. 그 왕이 다름 아닌 유대인들이 기다린 메시아라고 알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어야 할 사람들에게 내가 알려 주겠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이방인들에게 뒤처져 버렸습니다. 시대를 뒤흔드는 사건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정작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서 헤롯은 이 귀족 권력층과 신학자 집단, 이스라엘의 두뇌 집단에게 묻습니다.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어디서 태어나겠느냐?” 여기에는 흥미로운 한 가지 여담이 있습니다. 본문에 직접 기록된 내용은 아니지만, 저는 이 부분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헤롯이 이 질문을 한 이유는 그리스도가 어디서 태어나실지를 알고, 그 진리를 바르게 받아들여서 순종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목적을 위해서 이용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성경에서 정보를 찾으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려 하지 않고, 자기 목적을 위해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볼 때, 참 놀랍습니다.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헤롯은 하나님의 말씀을 묻되, 죄된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성경을 그런 태도로 대하면 안 됩니다. 거룩함에 대한 경외심으로, 두려움으로, 순종으로 대해야 합니다. 헤롯은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실지 알고 싶어했습니다. 다만 그 이유가 올바르지 않았습니다.
사실 헤롯은 굳이 묻지 않아도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메시아가 어디서 태어나실지는 당시에 상식에 가까운 내용이었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의문조차 없는 문제입니다. 요한복음 7장 40절 이하를 보면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서 말씀하시자 무리가 외칩니다. “어쩌면 이분이 그리스도인지도 몰라.” 다른 사람들이 말합니다. “그럴 리가 없어. 우리 모두 알잖아. 그리스도는 갈릴리가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다고 했잖아.” 그만큼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습니다. 헤롯도 알고 있었어야 했습니다. 어쩌면 정말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알고는 있었지만 확실히 하려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 겁니다. 확신이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이 두뇌 집단에게 공식적인 선언을 듣고자 했을 겁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이들이 헤롯에게 답을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헤롯에게 말합니다.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헤롯에게 성경을 인용해 알려줍니다. 미가서 5장 2절을 인용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이다, 이렇게 말을 해줍니다. 선지자 미가의 공식적인 선언이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미 몇 달 전에 베들레헴에서 일어난 사건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틀림없이 목자들이 그 일어난 일을 널리 알렸을 텐데도 말입니다. 미가가 누구입니까? 선지자입니다. 여러분, 미가서를 꼭 읽어보십시오. 참 놀라운 책입니다.
미가에 대해서 제가 말씀을 좀 드리겠습니다. 미가는 책망을 쏟아냈던 선지자입니다. 거센 물결처럼 책망의 말씀이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다 괜찮다고 달래주는 그런 선지자가 아니었습니다.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고발했습니다. 거짓 통치자들을 향해서 우레처럼 외쳤습니다. 거짓 통치자들을 통렬히 꾸짖은 뒤에 미래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언젠가 참된 통치자가 오실 것이다. 위대한 통치자가 오실 것이다. 왕이신 메시아가 오실 것이다. 너희가 알아보게 될 것이다. 작은 마을 베들레헴, 옛 이름으로 에브라다, 다윗의 고향에서 태어나실 것이다.” 미가의 음성은 선지자의 음성입니다. 왕을 기다리며 울부짖던 민족의 탄식이 담긴 음성이었습니다. 왕을 갈망하면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리고 미가는 “메시아가 오실 것이다. 오셔서 모든 거짓 통치자들을 물리치시고 참된 통치자가 되실 것이다. 베들레헴에서 오실 것이다.” 이렇게 외쳤습니다.
마태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라고 하면서 그 말씀을 인용했다고 기록합니다. 저는 마태가 여기서 한 일을 참 좋아합니다. 마태는 6절 끝에 작은 한 가지 표현을 덧붙입니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확실하게 단정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5절까지만 말했고, 6절은 마태가 덧붙였을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실제로 미가서 5장의 말씀은 마태가 여기에 추가한 것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6절 끝부분에 미가서 5장에는 없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말했다기 보다는 마태가 말했을 가능성이 훨씬 큽니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마태는 여기에 아름다운 표현을 넣습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여기서 다스린다는 말은 헬라어로 목양하다, 목자처럼 돌본다는 뜻입니다. 미가서에 없는 내용입니다.
여기 참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신약성경 저자들이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 언제나 글자 그대로 인용하지는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약성경 저자들 역시 동일하게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그 시대에 새롭게 드러내시고자 하시는 뜻에 따라서, 구약의 진리를 가져오되 그 의미를 더 밝히 드러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의 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거기에 성령님이 신약 시대를 위해 주시려는 특별한 강조점을 더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가 덧붙인 이 말씀에는 놀라운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마태는 이런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 “한 통치자가 오실 것이다. 한 지도자가 오실 것이다. 백성을 목자처럼 돌보실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런 뜻입니다. “헤롯 대신 목자를 맞이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선동가 대신 목자를 맞이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살인자 대신 목자를 맞이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음모를 꾸미는 자 대신 사랑하고 돌보는 목자, 좋지 않겠느냐?” 미워하고 죽이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양 떼를 사랑하고 돌보는 목자가 오신다는 겁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입니까?
유대인들은 이 차이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태가 미가서를 해석적으로 인용했다고 생각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여기까지만 말했고, 그 다음 내용을 마태가 덧붙였다고 저는 봅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요? 잘 들으십시오. 세상의 모든 히브리인, 모든 유대인은 이 문제 앞에 서야 합니다. 먼저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이스라엘을 사랑합니다. 정말입니다. 저는 이스라엘에 두 번 가 본 적이 있는데, 그 땅에는 마음을 끄는 어떤 특별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유대인들을 사랑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듯 제가 정말로 사랑하는 친구들 가운데 유대인들이 많습니다. 정말입니다. 예수님, 바울, 베드로, 다윗, 모세, 모두가 다 유대인들입니다. 저는 다른 누구보다 유대인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매일 제 방에 들어가서 몇 시간씩 이 유대인들이 기록한 말씀을 읽습니다. 마태도 유대인입니다. 마태복음을 읽을수록 마태를 점점 더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유대인들에게 편견이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전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역사 속 모든 유대인은 미가서 5장 2절 앞에 서야 합니다. 선지자는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또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러니까 최고의 정치 지도자들과 최고의 신학자들조차도 미가의 예언대로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오늘날의 유대인들이 와서 “메시아 사상은 실제 인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적 태도를 말하는 겁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저는 이렇게 반박하겠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고대 랍비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메시아가 사람이라고 믿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려면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죠. 또 어떤 사람들은 메시아 사상을 유대 왕국의 완성이라는 개념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유대 왕국의 완성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수는 없습니다. 메시아는 인격체입니다. 사람입니다. 민족도 아니고 태도도 아닙니다. 그리고 메시아는 반드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 합니다.
잘 들으십시오. 만일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미가서는 누구를 말하고 있는 겁니까?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누구를 말하고 있는 겁니까? 경건한 유대인이었던 마태는 도대체 누구를 말하고 있는 겁니까? 산헤드린은 베들레헴이라고 말했습니다. 선지자 미가도 베들레헴이라고 말했습니다. 마태도 베들레헴이라고 말했습니다. 베들레헴입니다. 모든 역사의 증언이 이 한 곳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태어나신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바로 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 로마 제국으로 하여금 칙령을 내리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요셉과 마리아를 그곳으로 내려가게 하셨고, 예수님이 그곳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용해서 자기 뜻을 이루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 정통주의자들, 문자주의자들은 머리로는 완벽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영혼은 전혀 감동이 없었습니다. 율법주의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제가 다 말씀드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무관심했습니다. 그러나 그 무관심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증오하고, 독을 품고, 살인을 꾸미는 자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마태복음 2장의 무관심에서부터 복음서 마지막의 음모와 살인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예언이 성취되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부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들에게, 그렇게 전문가라고 자부하던 성경만 살펴보아도 답을 알 수 있다고 직접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즉시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잘 보십시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반응에 따라 세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미움과 적대감을 표출합니다. 미움과 적대감의 부류이죠. 헤롯은 이 작은 아기가 자기 삶을 흔들어 놓을까봐 두려워했습니다. 질투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이 아기가 자기 인생에 끼어드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계획을 뒤엎고, 자기 삶의 질서를 흔들어 버리고,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없애려 했습니다. 그리고 33년 뒤에도 똑같이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고, 결국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아십니까? 오늘날에도 그렇게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삶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불편한 존재입니다. 자기 계획을 흔들고, 자기 뜻을 깨뜨린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예수님을 제거하고 싶어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미움과 적대감을 가진 부류입니다.
두번째 부류가 있습니다. 헤롯이 첫번째 부류인 미움과 적대감을 대표하는 사람이라면, 두 번째 부류는 무관심한 사람들입니다. 무관심의 부류입니다. 이 무관심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대표합니다. 끝이 없는 신학 논쟁에 빠져 있습니다. 권력을 얻기 위한 정치적 음모와 계산에 빠져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돈을 벌고, 백성들을 희생시키며 이익을 챙기는 일에 몰두해 있었습니다. 종교라는 이름을 가진 모든 것에 빠져 있었지만, 정작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는 사실에는 아무 의미도 두지 않았습니다. 그저 무관심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늘 예레미야애가 말씀을 생각합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울부짖으면서 말합니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이것이 아무것도 아니냐?” 정말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습니까? 어쩌면 이것이 가장 무서운 태도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또 스터더트 케네디(Studdert Kennedy)의 시를 떠올립니다. “예수님이 골고다에 오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무에 달았다. 손과 발에 큰 못을 박아 또 하나의 갈보리를 만들었다. 가시관을 씌웠고 상처는 붉고 깊었다. 그 시대는 거칠고 잔인했고 사람의 생명은 값쌌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늘날의 도시로 오셨을 때 사람들은 그저 지나쳐 버렸다. 머리카락 하나 건드리지 않았고, 다만 죽게 내버려 두었다. 사람들은 더 부드러워졌기에 고통은 주지 않았다. 그저 길을 지나가며 비 맞은 채 내버려 두었다. 예수님은 여전히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외치셨다. 겨울비는 계속 내렸고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거리를 돌아보는 이 하나 없이 예수님은 담벼락에 기대어 갈보리를 그리워하며 우셨다.” 스터더트 케네디가 하는 말은 분명합니다. 차라리 미움이 무관심보다 낫다는 겁니다.
세번째 부류가 있습니다. 경배와 사랑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가 이 부류를 대표합니까? 바로 동방 박사들입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언제나 이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적대합니다. 어떤 사람은 무관심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경배하고 예배합니다.
자, 지금까지 동방 박사들의 도착, 헤롯의 소동을 보았습니다. 이제 7절에 나오는 헤롯의 연기를 보겠습니다.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헤롯이 동방 박사들과 비밀리에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과 또다시 공개적으로 만나면 모두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치챌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은밀하게 만났습니다. 마태는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헤롯이 연기를 하는 장면입니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위선적인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헤롯은 너무나 거짓된 인물입니다. 그러나 박사들은 몰랐쬬. 동방에서 왔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속사정을 잘 몰랐습니다. 첫 번째 만남은 공개적이었지만, 이번은 비밀스럽습니다. 왜냐하면 헤롯의 마음속에 속임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활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거짓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눈치를 첐겠지만 박사들은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매우 교묘한 속임수였습니다.
헤롯은 “그 아이가 몇 살이냐?” 이렇게 직접적으로 묻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렇게 묻습니다.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저는 헤롯이 이렇게 말한 이유가 박사들의 점성술과 천문학적인 지식에 관심을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별에 대해서 말해 보십시오. 별 전문가들이시니 내게 말을 한번 해 보십시오. 그 별이 언제 나타났소?” 마치 별과 천문 현상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행동한 겁니다. 그러나 진짜 관심은 아기를 죽이는 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별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죠. 동방 박사들은 동방에서 별을 보았고, 그 후에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길을 떠나서 예루살렘까지 왔지만 그 이후로는 다시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헤롯이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물은 겁니다.
헤롯은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물었습니다. 헬라어 의미를 살리면 이런 겁니다. “정확히 말해 보시오. 날짜를 말해 보시오. 그 아기가 언제 태어났는지 알고 싶소.” 박사들이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헤롯이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을 모두 죽이면 틀림없이 그 아이도 죽일 수 있다고 계산했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박사들이 6개월 전쯤이라고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헤롯이 “혹시 별이 늦게 나타났을 수도 있으니 안전하게 두 살 이하를 모두 죽이자” 이렇게 판단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마태복음 2장 16절을 보면, 헤롯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다 죽였다, 이렇게 기록합니다. 어떤 아이들을 죽였습니까?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였습니다. 16절입니다.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헤롯은 정확한 때를 알고 싶었습니다. 얼마나 위선적입니까? 8절입니다.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필요한 정보를 얻은 뒤에 보낸 겁니다. 참으로 추악한 모습입니다. 복되시고 영광스러우시고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동시에 가장 어리석은 자가 여기에 서 있습니다. 그 발 앞에 엎드려야 할 사람이 오히려 그 생명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니까 박사들은 자신들이 돕고 있다고 생각을 했지만, 알지 못하는 사이에 메시아를 죽이려는 계획에 이용당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여기에 나오는 마태의 이 섬세한 면이 참 좋습니다. 방금 생각이 난 것입니다. 마태는 다시 한 번 예수님이 왕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혈통으로 왕이라고 강조했고, 경배를 받으심으로 왕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거절당하심으로써도 왕이십니다. 만일 예수님이 왕이 아니셨다면, 이 세상이 예수님의 탄생을 이렇게 두려워하고 분노했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그래서 마태는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그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박사들이 도착하는 장면, 예루살렘이 소동하는 장면, 그리고 헤롯이 연기하는 장면도 보았습니다. 이제 박사들이 경배하는 장면을 보겠습니다. 박사들의 여정은 9절에서 완성됩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보십시오. 다시 별이 나타났습니다. 얼마나 기쁜 날입니까. 얼마나 놀라운 날입니까. “보라, 그 별이 나타났다.” 10절입니다.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동방 박사들은 동방에서 별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별이 사라졌습니다. 그 후 먼 길을 지나 예루살렘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히 몰랐습니다. 그런데 다시 하나님의 쉐키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자신들이 올바르게 찾아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9절을 보면 “동방에서 보던 그 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은 “떠오르는 중에 본 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별이 떠오르는 순간, 별이 생기는 모습을 보았다, 이런 뜻입니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별이 새롭게 나타나는 모습을 본 겁니다. 단순히 어느 지역에 보였다, 이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별이 떠오르면서 나타났습니다. 쉐키나 영광이 다시 나타난 겁니다. 이제 모든 것이 맞춰집니다. 하나님의 표적 계시, 하나님의 말씀 미가서 5장 2절, 이 두 가지가 베들레헴에서 하나로 모여서 한 집 위에 머무릅니다. 그래서 저는 일반적인 별일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별이라면 집 위에까지 내려와 머무는 순간에 온 땅을 태워 버렸을 겁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쉐키나는 구약에서 여러 번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이번에도 집 위에 그대로 내려왔습니다. 그러니 박사들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11절입니다. “집에 들어가...” 마구간이 아닙니다. 집입니다. 아기도 조금 자랐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머물 곳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이들에게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함께 계셨기 때문이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예전 삶으로 그냥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집에 들어갔을 때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11절, 13절, 14절, 20절, 21절에서 마리아와 아기가 함께 언급될 때마다 언제나 아기가 먼저 나옵니다. 초점이 아기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찰스 웨슬리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육신에 가려진 하나님을 보라. 성육신하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라.” 정말 그렇습니다. 박사들은 집으로 들어가서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했습니다. 마리아에게 경배한 것이 아닙니다. 잘 보십시오. 둘 다에게 경배한 것도 아닙니다. 누구에게 했습니까? 아기께 경배했습니다. 예수님께 경배했습니다. 왕께 존귀를 올려 드렸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드린 것입니다. 무릎을 꿇고 예수님께 경배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경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습니다. 다른 그 누구도 경배를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사도들을 경배하려고 했던 일을 기억하시죠?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제사하려고 하자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베드로도 가이사랴에서 사람들이 경배하려고 하자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이 천사를 경배하려고 했을 때도 천사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이렇게 말했죠. 여기에서는 박사들이 경배하는데도 아무도 말리지 않습니다. 아무도 “일어나라, 일어나라, 그러지 말라”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기 계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옳은 일을 한 겁니다.
저는 어느 순간부터 교회가 예배의 본질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오늘 아침에 소개해 드린 남아프리카에서 온 목회자님들, 기억하시죠? 참 흥미로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미국 교회를 방문하셨답니다. 한번은 저와 점심을 먹으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존 목사님, 저희가 보기에는 미국 교회에 두 가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죠. “무슨 문제입니까?” 아직 예배에 참석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냥 그분들의 생각을 이야기하신 겁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그게 뭡니까?” 그러니까 이분들이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첫째, 신학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무엇을 믿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봉사도 많이 하고, 프로그램에도 많이 참여하면서 감정만 끌어올리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는 모르는 것 같습니다. 두번째는, 예배의 의미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분주합니다. 구원을 받으면 곧바로 사역에 투입하려고 합니다. “구원받았으니 섬겨라”, 이런 말을 쉽게 합니다. 저는 이 말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목회자 세미나에 가 보면 이런 말을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을 만나면 교회에 등록시키고, 등록하면 곧바로 일을 맡기라. 주님을 위해 일하게 하라.”
정말 잘못된 생각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유일한 이유는 예배에서 흘러넘치는 결과여야 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이 부분이 늘 마음에 걸립니다. 여러분이 그레이스 교회에 오래 다니셨더라도 이런 질문을 받아보신 적은 없으실 겁니다. “새가족 등록하셨습니까? 등록하셨으면 맡은 일은 있으십니까?” 이런 질문 말이에요. 우리는 주님을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구원받았으니 섬겨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저는 구원받았으니 예배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예배에서 흘러넘치는 것으로 유익을 주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놀라실 수도 있겠지만, 저는 설교를 여러분을 위해 준비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하나 해야지”, 이런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을 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관해 무엇을 더 알 수 있는지를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리고 한 주 동안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앞에 엎드려서 경배하고 찬양합니다. 그렇게 예배하고 나면, 그 넘쳐나는 것 속에서 설교가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우리는 먼저 예배하도록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그 본질을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떤 교회들은 성경을 잘 가르치지만, 가르침 자체를 예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라 가르침을 예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아, 제가 벌써 한 시간이나 했습니까? 정말 좋습니다. 어쨌든 이제 곧 마치겠습니다.
그러니까 동방 박사들은 경배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유명한 가수도, 유명한 일꾼도, 유명한 무엇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저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랑하는 예배자를 원하십니다. 저는 프레드 바쇼(Fred Barshaw)가 이런 말을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의 소책자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누가 처음 한 말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아마 바쇼가 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면서 섬기면 우리의 섬김은 결국 변질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배에서 흘러넘쳐서 섬길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 섬김을 주관하시고, 자기 영광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동방 박사들은 예수님께 경배했습니다. 예수님을 예배했습니다. 그리고 예물을 드리며 경배했습니다. 예배의 아주 중요한 방식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헌금을 하면 예배의 흐름이 깨지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헌금은 예배를 방해하지 않습니다. 저도 예전에 그렇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예배 흐름을 방해하지 않으려면 헌금을 따로 해야 하지 않나?” 그러나 어느 날 제가 깨달았습니다. 박사들은 예배하러 왔습니다. 어떻게 예배했습니까? 큰 오르간을 가져와서 연주하지 않았습니다. 스테인드 글라스를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산 위에 올라가서 뭔가를 한 것도 아닙니다. 어떻게 예배했습니까? 매우 실제적인 방법으로 예배했습니다. 바로 봉헌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예물을 드리며 예배했습니다. 찬양의 표현으로 드렸습니다. 무엇을 드렸습니까? 매우 귀한 것들을 드렸습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습니다. 황금, 그러니까 금은 설명할 필요도 없죠. 매우 귀한 것이니까요. 지금도 귀합니다. 금은 최고의 것에만 사용이 됩니다. 성전과 그 기구들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열왕기상 5장부터 7장, 역대하 2장부터 5장을 보면 금이 사용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장신구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아주 부유한 사람들은 생활 도구로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귀한 것입니다.
유향은 무엇입니까? 순수한 향입니다. 아라비아 지역에 자라는 어떤 나무의 껍질을 베어내면 즙이 흘러나옵니다. 흰색인데, 이것이 바로 유향입니다. 구약 히브리어에서도 이 흰 즙의 개념이 담겨 있습니다. 유향은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향기를 내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레위기 2장에서 소제에 사용되었는데, 그 향기가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을 상징했습니다. 또 아가서에서는 혼인과 관련된 장면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몸에 바르면 향기가 나는 향수 역할을 했습니다. 향수는 아주 오래된 것입니다. 바로 유향입니다.
그리고 몰약이 있습니다. 이것도 아라비아 지역의 작은 나무에서 나오는 향입니다. 역시 매우 향기로운 물질입니다. 몰약은 잠언에서 침상에 향기를 내는 데 사용되었고, 옷에 바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일종의 향취제와 같은 겁니다. 또 에스더 2장을 보면, 에스더가 왕 앞에 나가기 전에 몸을 단장할 때에 몰약을 사용했습니다. 또 유향과 함께 혼인 행렬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5장에서는 포도주에 섞어서 마취제처럼 사용되었고, 요한복음 19장에서는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황금, 매우 귀한 것입니다. 유향, 향기로운 향입니다. 몰약, 아름다운 향유입니다. 그러나 이 선물의 의미는 단순한 용도를 훨씬 넘어서는 것입니다. 참으로 귀하고 값진 선물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이 가난한 가정, 아무것도 없었던 요셉과 마리아에게 이 선물이 실제적인 생계 수단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요셉은 일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피신하게 하셨죠. 낯선 땅에서 살아야 합니다. 생계를 꾸리기가 매우 어려웠을 겁니다. 저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 생계를 유지하게 하는 공급원이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가서 요셉이 일할 수 있기 전까지, 이 선물이 생계비가 되어준 겁니다. 생계를 유지하는 공급원이었습니다. 참으로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말씀을 더 드립니다. 금은 왕에게 바치는 선물입니다. 금은 왕과 연결됩니다. 요셉이 애굽에서 왕 다음의 지위에 올랐을 때 금 목걸이를 받았습니다. 다니엘도 왕 앞에 섰을 때 금을 받았습니다. 성경에서 왕들은 금 면류관을 썼고, 금 홀을 들었습니다. 솔로몬의 삶에는 금이 가득했습니다. 열왕기상 10장을 보면 금이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금은 왕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마태는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왕이시다. 왕이시다. 왕이시다. 예수님의 왕 되심을 드러냅니다.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갈 때,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주권을 인정하는 구원, 곧 주되심을 인정하는 구원의 방식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표현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백성으로서 왕께, 종으로서 주님께 나아갑니다. 영국의 위대한 해군 제독 호레이쇼 넬슨은 패배한 적장들을 늘 친절하고 예의 있게 대했다고 합니다. 어느 해전에서 승리한 후에 패배한 제독이 넬슨의 배로 올라와서 갑판 위에서 넬슨을 만났습니다. 넬슨의 예의를 잘 알고 있었던 제독은 마치 동등한 사람처럼 손을 내밀어서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러나 넬슨의 손은 그대로 옆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먼저 검을 내놓으시오. 그 다음에 손을 내미시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방식입니다. 친구가 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의 주권 아래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박사들은 집에 찾아와서 예수님이 왕이시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고백을 선물로 표현했습니다.
자, 이제 몰약이 있죠. 몰약은 무엇입니까? 몰약은 죽을 자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시체의 냄새를 덜하게 하고, 장례를 덜 혐오스럽게 하기 위한 향유입니다. 몰약은 죽을 인간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실 분이셨습니다. 처음부터 이 죽음이 분명했습니다. 화가 홀먼 헌트(Holman Hunt)의 그림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수님을 주제로 아름다운 그림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 가운데 어린 예수님이 목수의 집에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서쪽으로 해가 지고 있는데, 집은 서쪽을 향해 있습니다. 어린 예수님이 문 앞에 서서 하루 종일 아버지를 도운 뒤에 아이가 하듯이 두 팔을 쭉 펴고 기지개를 켭니다. 그때 햇빛이 집 안으로 들어와서 뒤쪽 벽에 그림자를 드리우는데 그림자 모양이 십자가 모양입니다. 헌트가 전하려고 한 메시지였습니다. 예수님이 죽기 위해 태어나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죽을 인간이셨습니다. 처음부터 분명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선물은 왕께 드리는 선물이면서 동시에 죽을 인간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왕이면서 죽을 인간이셨습니다.
그리고 유향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위대한 신학자인 오리겐(Origi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향은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이다.” 이 유향은 신성을 상징합니다. 향은 언제나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이 향기는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에서는 성전 앞쪽의 특별한 방에 보관되어 있다가 제물에 뿌렸습니다. 향기로운 향이 하나님께 올라가게 했습니다. 출애굽기 30장을 보면 향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저는 이 말씀이 참 좋습니다. 에스겔서 16장 18절에서 하나님은 “나의 기름과 향”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향”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이 향은 지성소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박사들은 황금으로 예수님이 왕이심을 고백했고, 몰약으로 예수님이 사람이심을 나타냈고, 유향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냈습니다. 어쩌면 자신들이 그런 의미를 다 담아 표현했다고까지는 알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참으로 아름다운 상징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지금까지 동방 박사들의 도착, 헤롯의 소동, 헤롯의 연기, 동방 박사들의 경배 장면을 보았습니다. 이제 마지막입니다. 12절에 동방 박사들의 피신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 귀한 박사들을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왕의 소식을 가지고 다시 동방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새로운 왕, 메시아, 기름 부음 받은 분에 대한 소식을 동방에 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꿈에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지시를 하십니다. 그래서 다른 길로 고국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은 박사들을 돌보셨고, 구주를 보호하셨습니다.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그 어린 예수님과 가족을 어떻게 돌보셨는지, 그래서 애굽으로 피하게 하셨는지를 볼 것입니다.
이제 정말 마무리하겠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오늘 여러분이 어느 부류에 속해 있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스스로는 알고 계실 겁니다. 헤롯의 부류에 속해 계십니까? 적대하고, 마음에 분노를 품고,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부류 아닙니까? 아니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부류입니까? 결단하지 않고, 무관심한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계십니까? 아니면 박사들의 부류입니까? 예배하기 위해 나아오십니까? 여러분의 손에 왕께 드릴 황금이 있으십니까? 죽을 사람에게 드릴 몰약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드릴 유향이 있으십니까? 예수님을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시고 왕이신 분으로 믿으십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저녁 예배를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오랜 시간 말씀을 나누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을 묵상하면서 시간이 너무나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주일에 이렇게 몇 시간이라도 주님의 말씀의 깊은 부요함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시간 간절히 기도합니다. 혹시 헤롯과 같은 자리에 서 있는 이들이 있다면, 그 미움과 적대감 속에 있는 영혼들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또한 무관심 속에 머물러 있는 이들을 위해 더욱 간절히 기도합니다. 어쩌면 그 상태가 더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전혀 관심도 두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동방 박사들 같은 사람들, 지혜로운 남자들, 지혜로운 여자들, 지혜로운 젊은이들이 있어서, 이제는 아기 예수님의 발이 아니라 못 박힌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예배하는 자들이 있음에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손에는 예물을 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시고 왕이심을 인정하며 그 앞에 복종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무엇보다도 우리가 주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고, 그 예배에서 우리의 섬김이 흘러나오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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