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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마태복음을 보겠습니다. 오늘부터 이 위대한 책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앞으로 몇 달, 아니 몇 년에 걸쳐서 마태복음과 함께 모험을 떠날 겁니다. 마태복음은 정말 놀랍고도 놀라운 책입니다. 먼저 간단하게 배경을 조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태복음 개관에 많은 시간을 쓰지는 않겠습니다. 모든 주제를 다 설명하려고 하지도 않겠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직 제가 마태복음을 깊이 있게 연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살펴보기 전에 제가 먼저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을 모두 살펴본 다음에 전체를 정리를 하려고 합니다. 각 부분을 모아서, 모든 주제와 내용을 하나로 다시 묶어낼 겁니다. 처음부터 결론을 정해 놓고 끼워 맞추는 방식이 아니라, 본문을 따라가면서 결론에 이르는 방식을 취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마태복음의 시작부터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28장으로 이루어진 이 놀라운 마태복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가면서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부터 마태복음과 그 주제를 간략하게 소개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당시 이스라엘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로마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로마는 이스라엘을 여러 가지로 억압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세금 제도입니다. 매우 가혹한 제도였습니다. 아주 집요하고 체계적이었습니다. 로마는 매우 엄격하게 세금을 거뒀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두 가지를 엄격하게 거뒀는데, 하나는 인두세이고, 오늘날로 말하면 소득세와 비슷한 개념입니다, 또 하나는 토지세입니다. 일종의 재산세입니다. 이 제도가 운영되는 방식도 매우 독특했습니다. 로마의 원로원 의원들, 그러니까 로마 사회에서 매우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나 고위 관리들이 공개 경매를 통해서 어떤 지역의 세금 징수권을 사들입니다. 이들은 낙찰 받은 권리를 보통 5년 동안 행사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로마의 부유한 원로원 의원들이 연합을 해서 로마 정부로부터 이스라엘에서 세금을 거둘 권리를 일반적으로 5년 동안 사들였습니다. 이들의 관심사는 단 한 가지입니다. 가능한 한 많이 거두는 것이죠. 이 사람들을 ‘푸블리카니(publicani)’ 이렇게 불렀습니다. 보통은 실제 세금 거두는 일은 노예나 현지인을 고용했습니다.

그러니까 구조가 이렇습니다. 실제로 세금을 걷는 사람이 따로 있는데, 그렇게 이 사람들이 거둔 돈은 로마로부터 권리를 사들인 부유한 사람들에게로 돌아갑니다. 바로 이 부유한 사람들을 ‘푸블리카니’라고 부른다고 했죠. 현장에서 직접 세금을 거두는 사람들이 따로 있는데, 이들이 바로 신약성경에 나오는 ‘세리’입니다. 영어로는 퍼블리컨(publican)입니다. 세금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이 세리들을 어떻게 보았을까요? 배신자로 여겼습니다. 자기 동족에게서 세금을 거두어서 외국 사람들에게 바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죠. 부유한 로마 사람들을 위해 자기 민족을 착취하는 자들로 여겼습니다. 게다가 자기 이익을 위해 세금을 더 거두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이중으로 착취하는 구조입니다. 먼저는 그 권리를 가진 로마 사람들이 최대한 쥐어짜고, 그 다음에는 세리를 통해서 한 번 더 쥐어짜는 것이죠. 대표적인 예가 삭개오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부를 쌓았던 겁니다.

그러니 세리가 어떤 취급을 받았겠습니까? 창녀와 똑같은 부류로 여겼습니다. 이방인들과 동급 취급을 받았습니다. 길에서 강도 짓을 하는 사람들, 도둑놈들, 살인자들, 이들과 한 부류로 묶였습니다. 그러니까 결코 평판이 좋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더 악화됩니다. 주후 33년경, 로마에 큰 재정 위기가 찾아옵니다. 이 위기 때문에 로마는 속국들로부터 세금을 더 가혹하게 거두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의 상황은 훨씬 더 심각해졌습니다.

이러한 세리 중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금 징수권을 사들인 로마의 부유한 원로원 의원들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죠. 레위라고도 불리는 마태입니다. 마태복음 9장 9절을 잠시 보겠습니다. 예수님과 마태가 어떻게 만났는지 직접 확인해 봅시다.

마태복음 9장 9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세리 마태를 처음 만나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이런 사람과 관계를 맺으셨다니요? 당시 사회에서 세리는 어떤 사람이었다고 했습니까? 직업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을 착취하는 범죄자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그러자 마태가 어떻게 합니까? 즉시 일어나서 따릅니다. 세금을 걷던 자리를 그대로 내팽개치고 일어나서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리를 사도로 바꾸는 그런 변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루실 수 있는 일이라고요. 마태에게 바로 이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태가 첫 번째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사실 복음은 하나입니다. 한 가지뿐입니다. 네 사람이 기록했을 뿐이지 복음은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은 하나의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4복음서라고 부르는 이유는 네 사람이 복음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조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직업이 좋지 않다고 해서 사람 자체를 함부로 정죄하면 안 됩니다. 때로는 선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가 바로 그런 경우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예수님께서는 마태에게서 가치를 발견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마태는 즉시 따랐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 마태가 이미 예수님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전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거나, 예수님을 본 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신앙심이 큰 사람이었을 수도 있죠. 정직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삭개오같은 착취의 흔적도 그에게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어쩌면 세리였지만 정직하게 일했을지도 모릅니다. 부당하게 빼앗았다고 자책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를 열두 명의 놀라운 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마태를 비롯한 열두 사도만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누렸습니다. 오직 열두 명뿐입니다. 정말 놀랍고 특별한 멋진 관계이죠.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과 3년 동안 동행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렇다면 마태는 분명 부르심을 받을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했다는 사실은 마태의 마음이 어디로 향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분명 재산이 많았을 것이고, 상당한 권력도 누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기꺼이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마태의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10절을 보겠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장면입니다. 일종의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보십시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모여 있습니다. 원래 이 두 부류는 늘 같이 어울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장면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그러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일종의 반어법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뜻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필요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책망하십니다. “나는 너희 같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 속에는 반어적 의미가 아주 강하게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나는 스스로 의롭다고 착각하는 너희가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기 위해 왔다.”

이 장면의 배경이 무엇입니까? 마태가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단한 후에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왜 잔치를 열었겠습니까? 새로운 주인이신 예수님께 자기 친구들을 소개하고 싶었는데, 정말 그렇게 했습니다. 저는 마태가 선한 사람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깊이 헌신했고, 부유한 삶을 기꺼이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혼자서 조용히 떠나지 않고, 잔치를 열어서 친구들을 예수님께로 이끌었습니다.

저는 마태가 겸손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에 매우 중요한 사건들을 수없이 기록하면서도, 1인칭으로 자신을 언급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언제나 3인칭으로 낯선 사람 취급을 하면서 언급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어떤 공로도 돌리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어디에서도 자신을 저자라고 밝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태복음의 저자가 마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까요? 초기 사본들에 모두 마태의 이름이 제목으로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부들도 한결같이 마태가 기록했다고 증언합니다. 신약성경 중에서도 저자가 가장 분명하게 확인되는 책입니다. 모두가 이 책을 마태가 썼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언제 기록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대략 주후 한 50년에서 70년 사이,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볼 뿐이지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마태는 왜 마태복음을 기록했을까요? 아주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서 한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다. 예언된 메시아이시다. 유대인의 왕이신데 자기 백성이 거절했다. 대신 이방인들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장차 다시 오셔서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다스리실 것이다. 복음입니다. 왕으로 오신 이야기입니다. 거절당한 왕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왕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의 메시지입니다. 매우 간결하고 분명합니다.

이제 마태복음의 큰 흐름을 세 가지로 나누어 보겠습니다. 먼저 마태는 ‘계시된 왕’을 보여줍니다. 마태복음을 읽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왕으로 제시됩니다. 아주 분명하죠. 예수님의 인격이 왕의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왕의 계보를 따른 족보가 나옵니다. 오늘 우리가 그것을 볼 겁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세상의 왕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왕에게 드리는 예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렇게 선포합니다. 시험을 받으시는 장면에서도 예수님의 왕 되심이 드러납니다. 시험의 절정에서 사탄은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는데, 예수님께서 다스릴 권리를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을 사탄도 인정하는 겁니다. 산상수훈은 왕께서 선포하신 나라의 헌장과도 같습니다. 기적들은 왕으로서의 권위를 증명하는 표지입니다. 비유들은 ‘천국의 비밀’이라고 불립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불리셨습니다. 스스로 땅의 왕들에게 세금을 바칠 자유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왕의 아들이시기 때문이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도 왕의 의식을 취하시면서 주권을 주장하셨습니다.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 비유를 통해서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서도 장차 이루어질 왕의 통치를 예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천사들까지도 다스릴 권세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많은 천사들을 불러 자신을 보호하게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마지막 말씀 역시 왕의 선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왕의 명령입니다. 그러니까 마태는 예수님을 왕으로 묘사합니다. 계시된 왕으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또 다른 측면도 말합니다. 거절당한 왕입니다. 마태복음을 계속해서 살펴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 순종을 요구하셨던 바로 그 백성이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거절당한 왕이 되셨습니다. 마태복음은 거절당한 복음입니다. 어떤 복음서도 이렇게 예수님의 왕 되심을 강하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동시에 어떤 복음서도 거절당한 왕의 모습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전체에 거절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태어나시기 전부터 거절을 당하셨죠. 마리아는 요셉에게 버림받을 위기에 놓였습니다. 탄생하실 때에는 온 예루살렘이 소동했고, 헤롯은 아기 예수님의 생명을 노렸습니다. 베들레헴 들판에는 천사의 찬송 소리 대신에, 자기 아이를 잃은 어머니들의 통곡이 울려 퍼졌습니다.

예수님은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급히 떠나셔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나사렛이라는 이름 없는 작은 마을에서 30년을 조용히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길을 예비했던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혔죠. 결국 목이 베어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습니다. 비유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회개하는 강도의 기도도 없습니다. 인간적인 위로의 말 한마디도 들리지 않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조롱하고 모욕합니다. 심지어 부활 이후에는 군인들을 매수해서 거짓말까지 퍼뜨립니다.

마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서보다도 예수님을 향한 공격이 더 날카롭고, 더 집요하게 나타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나옵니다. 마태복음은 거절당한 왕이신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묘사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마태복음은 왕이 다시 오신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도 재림을 아주 강조합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승리의 복음입니다. 24장과 25장에 이르면, 예수님이 큰 영광 가운데 구름을 타고 오실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은 계시된 왕, 거절당한 왕, 그리고 다시 오실 왕을 보여줍니다.

이제 1장을 보겠습니다. 마태는 시작부터 왕이신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왕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하죠. 왜 족보로 시작할까요? 왕이라면, 정말 왕이라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려면, 예수님의 정통성을 믿으려면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왕의 계보에서 나셨다는 증거입니다. 왕의 혈통에서 나셨다는 사실이 먼저 분명하게 드러나야 합니다.

이스라엘에는 다윗을 통해 이어지는 왕의 계보가 있었습니다. 사무엘하 7장에서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다윗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장차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영원한 나라를 세울 왕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나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솔로몬에게서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다렸죠.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서 그 예언을 이루실 분을 계속해서 기다렸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왕이시라면 반드시 이 부분이 증명되어야 합니다. 왕으로서 다스릴 권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왕의 계보, 그러니까 왕의 혈통으로 확인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 사실을 마태복음 1장 1절부터 17절까지가 보여줍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아직 실제로 도움이 되는 내용을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이대로 그냥 여러분을 돌려보내드릴 수는 없지요. 아마 이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아니 왜 이런 족보가 필요한가?” 그 이유를 이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유대인들에게 족보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왕이 되려는 사람은 족보를 통해서 합당하다고 반드시 증명되어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가나안 정복 이후를 떠올려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땅을 정복한 이후에는 반드시 자신이 어느 지파에 속해 있는지, 어떤 가문에 속해 있는지를 알아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땅이 지파별로 나누어졌기 때문입니다. 지파에 따라서 거주 지역이 결정된 것입니다.

민수기 26장과 35장을 보면, 자신의 지파와 가족과 아버지의 집을 정확히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야 자신이 어느 지역에 속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족보는 매우 중요합니다. 지파 정체성이 필수였습니다. 또한 룻기 3장과 4장을 보면, 어떤 경우에는 재산을 이전할 때도 정확한 족보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토지의 소유권이 다른 지파로 넘어가지 않도록 하셨기 때문에, 토지와 관련된 거래를 하려면 반드시 가계도를 분명히 알아야 했습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에스라 2장에 나옵니다. 아마 끝부분쯤일 겁니다. 직접 찾아보셔도 좋습니다. 에스라 2장 62절입니다. “이 사람들은 계보 중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도 얻지 못하므로 그들을 부정하게 여겨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하고.” 자, 이런 뜻입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이 끝나고 사람들이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기 시작했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제사장이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레위 지파에 속했다고 주장한 거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하나님은 제사장 직분에 매우 엄격하셨습니다. 아무나 제사장 역할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돌아와서 제사장 직분을 주장할 때에는 반드시 족보로 자신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에스라 2장 62절이 말하듯이 만일 족보로 확인되지 않으면 제사장 직분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에게는 족보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땅의 분배를 위해서도 필요했고, 지파를 확인하기 위해서도 필요했고,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에 제사장으로서의 자격을 확인하기 위해서도 족보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기억하셔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이 시작되는 부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요셉과 마리아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호적하러 가고 있었습니다. 각자 자신의 출신과 계보를 따라서 호적하기 위해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사람들을 그렇게 구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장 1절부터 4절입니다.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보십시오. 이런 계보에 대한 확인은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당시에도 여전히 존재했습니다. 참고로 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기록을 보아도, 예수님 시대의 유대 사회에서 조상의 기록을 보관하는 일이 일반적인 문화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주 흔한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족보를 가지고 있었고,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정확히 아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신약의 다른 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죠. 로마서 11장 1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자, 보십시오. 여전히 자신의 족보를 밝히고 있습니다. 유대인에게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적어도 50개 이상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의 계보를 위해서도 필요했고, 제사장의 계보를 위해서도 필요했고, 재산의 이전과 같은 문제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지금의 유대인들은 더 이상 족보를 알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사실입니다. 유대인 지파 계보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추적할 수조차 없습니다.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겁니다. 지금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유대인도 자신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만일 누군가가 내가 메시아다, 이렇게 주장한다면, 그 사실을 증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도 정통 유대인 가운데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계보적으로 증명할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결론은 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왕위 계승을 증명할 수 있는 마지막 분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할 수 없는 겁니다.

이제 마태복음에 나오는 족보를 보겠습니다. 전체적인 흐름을 중심으로 먼저 보겠습니다. 모든 이름 하나하나를 다 설명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안심하셔도 됩니다. 이 족보는 ‘하향식 족보’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으로부터 시작해서 요셉을 거쳐서 예수님께까지 이어지는 하향식 계보입니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그런 흐름이죠.

신약성경에 또 하나의 족보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3장에 나오는 족보이죠. 지금 찾아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간단히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의 족보는 마태복음과 반대입니다. ‘상향식 족보’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통해서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하나는 요셉을 따라서 내려오고, 다른 하나는 마리아를 따라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나는 예수님으로 끝이 나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에서 시작합니다. 방향은 다르지만 결국 결론은 같습니다. 방식이 어떻든 간에 동일한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성령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방향에서 보든지 예수님이다.”

그리고 이 두 족보 사이에는 또 하나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잘 들으셔야 합니다. 마태복음은 법적인 계보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예수님의 법적 계승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반면에 누가복음은 혈통적인 계보를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마태는 왕의 계보를, 누가는 실제 혈통을 보여줍니다. 차이가 뭘까요? 왕의 계보는 언제나 아버지를 따라 이어졌습니다. 항상 아버지 쪽을 따라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적인 아버지가 없으시죠. 그렇다면 왕으로서의 자격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머니를 통해서 확인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혈통적으로도 다윗의 후손이 되기 때문이죠.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래서 마리아의 계보 역시 다윗의 계보입니다. 마리아를 통해서도 다윗의 계보가 이어지고, 요셉을 통해서도 다윗의 계보가 이어집니다. 마리아를 통해서는 다윗의 혈통을 가지게 되고, 요셉을 통해서는 다윗에게 속한 왕위 계승의 권리를 가지신 겁니다. 요셉이 육신적 친부는 아니었지만, 법적 아버지였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잘 따라오십시오. 마태복음은 다윗과 아들 솔로몬을 통해서 이어지는 왕의 계보를 따라갑니다. 다윗까지 내려온 다음에, 왕의 계보는 솔로몬을 통해 계속 이어지죠. 그런데 다윗에게는 다른 아들도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나단입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계보는 바로 이 나단을 통해서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다윗에게서 두 갈래로 나뉜 겁니다. 한 갈래는 솔로몬을 통해 내려가고, 다른 한 갈래는 나단을 통해서 이어진 겁니다. 나단의 계보를 따라 내려오면 마리아에게 이르고, 솔로몬의 계보를 따라 내려오면 요셉에게 이릅니다. 두 사람 모두 다윗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결론이 분명해집니다. 혈통으로 보아도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입니다. 마리아를 통해서 실제로 다윗의 씨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법적으로도 다윗의 왕위를 이을 권리를 가지셨습니다. 요셉을 통해 그 법적 권리를 이어받으셨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은 혈통으로도, 법적으로도 다윗의 자손이십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이 표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겠습니까? 무엇이 빠져 있습니까? “예수님의 아버지”라는 말이 없습니다. 요셉은 인간적인 의미에서 예수님의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마리아의 남편일 뿐이죠. 성경은 단 한 번도 요셉을 예수님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다시 16절을 보십시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여기서 “에게서”라는 표현은 헬라어로 여성형입니다. 예수님은 요셉에게서 태어나신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렇다면 요셉과 예수님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법적인 관계입니다. 당시에는 어떤 가정에 입양되면 모든 권리와 특권을 가진 법적인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법적으로는 요셉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혈통으로는 마리아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면에서 예수님은 왕이 될 권리를 가진 분이십니다. 아버지를 통해서는 왕의 계보를 이어받으시고, 어머니를 통해서는 왕의 혈통을 이어받으셨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족보도 흥미롭습니다. 누가복음 3장 23절이죠.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여기서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이죠. 잘 보십시오. 예수님은 실제로 요셉의 아들이 아니셨습니다. 육신적인 아들이 아니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 여겼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당시에 부정한 관계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이 법적인 아버지였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별다른 논쟁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사시는 동안에 사람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 알고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그 사실을 받아들였습니다. 법적인 입양과 똑같은 개념으로, 예수님의 모든 권리와 특권이 인정되었습니다. 누가복음 4장 22절에서도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사람들은 분명하게 이렇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중요한 부분을 보겠습니다. 완전한 성취, 정말로 완전한 성취입니다. 11절입니다.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여기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사실을 보셔야 합니다. ‘여고냐’라는 이름입니다. 요시야가 여고냐를 낳고, 여고냐가 또 후손을 낳습니다.

이제 중요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계보는 누구의 계보입니까? 요셉의 계보입니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예레미야 22장 3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이 사람이 자식이 없겠고 그의 평생 동안 형통하지 못할 자라...” 여기서 말하는 이 사람이 바로 여고냐입니다. 이 족보에 나오는 여고냐와 같은 인물입니다.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기록하라 이는 그의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왕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아시겠습니까? 여고냐의 후손 가운데서는 누구도 다윗의 왕위에 앉지 못한다는 저주입니다. 예레미야 22장 30절의 선언입니다.

잘 들으셔야 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실제로 요셉의 아들이었다면, 다윗의 왕위에 앉을 수 없었을 겁니다. 이해하셨습니까? 여고냐에게 내려진 저주 아래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죠. 그런데 동시에 예수님은 왕위 계승의 권리를 가지기 위해서는 법적으로 요셉의 아들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방법으로 두 가지 모두를 만족케 하셨습니다. 법적으로는 왕위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면서도, 여고냐로 이어지는 혈통에는 속하지 않도록 하신 것이죠. 바로 동정녀 탄생을 통해서 말입니다. 여고냐의 실제 혈통은 피하고, 마리아를 통해 다윗의 혈통을 이어받게 하시면서도, 동시에 왕으로서의 권리는 그대로 가지게 하신 것입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단 한 가지의 세부 사항도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동정녀 탄생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러니까 족보가 기록된 이유가 분명해지죠. 예수님이 왕이 될 권리를 가진 분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겁니다. 어쩌면 이 내용을 하나하나 풀어서 설명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은 이 족보를 읽는 순간 바로 이해했습니다. 구약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여고냐에 대한 저주도 알고 있었고, 계보도 알고 있었고, 족보의 의미도 알고 있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왕이 될 권리를 가지셨다, 이렇게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1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직 서론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영어 성경에 “책”으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비블로스(biblos)’입니다. 책을 의미할 수도 있고, 이름의 목록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목록, 기록, 이런 의미입니다. 그리고 “계보”는 ‘게네세오스(geneseōs)’입니다. 시작, 기원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시작에 대한 기록, 이런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오셨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 예수님의 기원,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이예수스 크리스토스(Iēsous Christos)라고 나옵니다. 이 이예수스는 구약의 여호수아, 그러니까 예슈아(Yeshua) 혹은 예호슈아(Jeheshua)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름입니다. 뜻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입니다. 그래서 이 이름이 선택된 겁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슈아입니다.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짧은 표현은 구원을 더욱 강조합니다.

그 다음으로 ‘크리스토스’입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 이런 뜻이죠. 예수님은 선지자로 기름 부음을 받으셨습니다. 제사장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무엇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셨습니까?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구원하시는 분의 이야기,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분의 이야기, 이 사실을 아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님은 어떠한 대우를 받으셨습니까? 흠도 없고 죄도 없으신 분이셨지만,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비방을 받으셨습니다. 모함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 출신에 대한 비아냥과 의심이 따라다녔습니다.

마태복음 13장 54절이죠.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어디서 이런 능력이 왔냐고 하는 겁니다.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저 사람한테 그런 권리가 어딨어?” 이런 반응을 보인 거죠. “저 사람 누구야? 나사렛 같은 변두리에서 올라온 사람 아니야?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이잖아.” 요한복음 7장에서도 예수님의 출신을 조롱하는 내용이 계속 나옵니다. 27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이 예수가 어디서 온 사람인지 다 알아. 그러니까 이 사람이 그리스도일 리가 없어.” 나사렛에서 올라온 시골 사람 아니냐? 메시아가 그런 곳에서 나올 리가 없다,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메시아라면 당연히 예루살렘에서 나와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나사렛 출신이라는 것 자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 이름도 없는 동네 출신으로 취급을 한 거죠.

40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모세가 율법에서 예언했던 그 선지자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이런 반응을 보인 겁니다. “갈릴리에서 메시아가 나온다고?”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8장 41절에서는 더 심한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이 말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출생을 두고 노골적으로 비방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런 출신 아니다” 이런 말 속에, 예수님을 향한 악의적인 모함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48절입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얼마나 심합니까? “너 사마리아 사람이잖아. 귀신 들린 사람이잖아.” 이런 식으로 모욕한 겁니다. 이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너는 음란한 관계에서 태어난 사람이고, 이름 없는 동네 출신이고, 아무것도 없는 집안 출신이야. 그런데 네가 무슨 메시아라고 주장을 하는 거야?”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철저하게 부인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바로 이런 배경 속에서 마태는 이 모든 일을 기록합니다. 성령님의 감동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시작에 대한 기록을 써 내려갑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더 이상 예수님의 출신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어디에서 오신 분이신지 분명하게 보여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 족보 안에 담겨 있는 한 가지 강조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여기까지만 나누겠습니다.

이 족보에 정말 놀라운 강조점이 하나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이름들 속에, 이 계보 속에,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짜 놓으신 메시지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본문을 통해서 무엇을 전하기 원하십니까? 이 많은 이름들을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이 전체를 어떻게 하나로 묶어야 합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신데 어떤 왕이십니까? 이 세상의 왕과 같은 왕이 아닙니다. 율법으로 다스리는 왕이 아닙니다. 무엇으로 다스리는 왕이십니까? 은혜로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그래서 이 족보 안에서 은혜를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이 계보 속에 은혜가 있는지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은혜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저곳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제 책상 위에 가득해서 흘러넘칠 정도로 어디를 보아도 은혜였습니다.

예수님은 은혜의 왕이십니다. 한 번 들어 보십시오. 하나님은 예수님의 왕권을 증명하는 이 족보를 기록하시면서도, 읽는 모든 사람 위에 은혜를 쏟아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대부분의 왕들은 강압적으로 다스리죠. 율법으로 다스리죠. 은혜를 모릅니다. 그런데 이 왕은 다릅니다. 은혜로 다스리는 왕입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왕인지 모릅니다. 저는 이 족보 속에서 마치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는 듯이 네 가지 모습을 보았습니다.

첫번째입니다. 저는 한 여인을 선택하신 모습 속에서 은혜의 왕을 보았습니다. 한 여인을 택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6절을 읽다가 이 부분이 마음에 깊이 와닿았습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이 말씀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거 은혜다.” 한 여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한 여인, 마리아입니다. 이 작은 한 여인이 메시아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낳는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마리아입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헬리의 딸입니다.

그전까지는 아무도 마리아에 대해서 몰랐습니다. 제가 조금 직설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리아는 죄인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죄인입니다. “저는 가톨릭 신자라서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성경은 마리아가 죄인이었다고 말합니다. 마리아는 그냥 보통 사람들처럼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보통의 남자나 보통의 여자와 같이 그저 평범한 사람입니다. 물론 마리아가 특별히 더 악한 사람이었다, 이런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경건하고 신실한 사람이었을 겁니다. 아주 깊이 헌신된 신앙인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죄인이었습니다. 구주가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는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구주이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죄인 마리아를 택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를 택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 교회는 마리아를 아주 높은 자리로 올려놓았습니다. 만일 마리아가 알았다면 결코 기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지금 하늘에서는 그런 일에 마음을 두지 않겠지만 말이죠. 로마 가톨릭의 주장은 분명합니다. 마리아는 죄가 없다, 평생 동정녀로 살았다. 그러나 성경은 마리아에게 다른 자녀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또 가톨릭은 어떻게 주장합니까? 마리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구원을 이루는 분이다, 이렇게 설명합니다. 공동 구속자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하나가 아니라 둘, 예수님과 마리아라고 합니다. 또 마리아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육체로 하늘에 올라갔다고 주장합니다. 죄가 없기 때문에 죽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에게 해당하는 모든 사항을 마리아에게 그대로 적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마리아에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마리아는 다른 모든 여성들과 똑같은 죄인이었습니다. 구주가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마가복음 3장 3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안에서 예수님이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니라.”

예수님은 마리아의 위치를 낮추셨습니다. 마리아는 그저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는 단순히 육신적인 관계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마리아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예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했습니다. 아들이라는 사실이 새로운 관계를 보장해 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일한 길입니다.

누가복음 11장 27절부터 28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말하자면 “마리아가 복이 있다” 이렇게 말한 거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다시 말해서 참된 복은 마리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핵심을 정확하게 짚으셨습니다. 마리아에게 어떤 특별한 신성함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도 다른 사람들하고 똑같이 순종해야 했습니다. 마리아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장 28절을 보십시오. “천사 가브리엘이…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이 표현을 헬라어로 보면 “은혜를 입은 자” 이런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리아는 은혜가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에게 주어지는 호의입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기도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복음 1장 46절입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잘 보십시오. “하나님 내 구주”라고 고백합니다. 마리아는 자신에게 구주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분명히 훌륭한 여인입니다. 그 점을 부인할 필요는 없습니다. 매우 경건했고, 정결한 삶을 살았을 겁니다. 그래도 여전히 죄인이었습니다. 구주가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죄인을 택하셔서 메시아의 어머니로 삼으신 겁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두번째를 보겠습니다. 우리는 평범한 한 여인을 택하신 하나님에게서 은혜를 보았죠. 이제 두 사람의 씨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보겠습니다. 1절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여기 두 사람이 나옵니다. 다윗과 아브라함. 제가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다윗은 죄인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은 죄인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다윗을 생각해 보십시오. 밧세바와 끔찍한 죄를 범하고, 그녀의 남편을 죽게 만든 사람입니다. 아내가 여럿이었습니다. 성적인 문제가 아주 심각했던 사람입니다. 좋은 아버지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을 죽이고,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하나님의 성전을 짓지 못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또 어떻습니까? 애굽에서 자기 아내를 아내가 아니라고 하고, 그 일로 인해서 수치를 당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하갈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랄에서도 다시 사라를 누이라고 속여서 왕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 두 사람 모두 분명히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후손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이 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두 사람을 사용하셨습니다. 한 사람을 통해서는 메시아의 민족을 이루셨고, 다른 한 사람을 통해서는 왕의 계보를 이어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면서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히브리 민족과의 연결은 혈통적인 연결이면서 동시에 왕권적인 연결입니다. 그리고 마태는 그 왕권을 먼저 강조하기 때문에 다윗을 먼저 언급합니다. 마태가 말하려는 핵심이죠.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들 개인에게만 은혜를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그 후손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래도 다윗과 아브라함은 나중에 바로잡히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말하실 분도 계실 겁니다. 그렇다면 그 후손들은 어떻습니까? 솔로몬과 이삭은 어떻습니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다윗의 아들, 다윗이 그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했던 바로 그 사람이 어떤 결과를 낳았습니까? 아주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실패의 역사입니다. 솔로몬은 평안한 사람이었고, 지혜에 있어서는 비교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고 죄로 가득한 삶을 살았습니다. 수많은 이방 여인들과 결혼하면서 나라에 혼란의 씨를 뿌렸습니다. 아버지 다윗보다 더 많은 아내와 후궁을 두었고, 그 결과로 인해서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나고 말았습니다. 성경이 분명하게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다윗의 육신의 아들은 실망스러웠습니다. 이스라엘이 분열되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서 약속을 거두셔도 아무 문제가 없을 상황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더 위대한 다윗의 아들이 오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실패를 넘어서셨고, 솔로몬의 실패도 넘어서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한 지혜로 결코 무너지지 않을 성전을 세우실 것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면서 바라보았던 그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이 백 세에 얻은 아들입니다. 모든 소망을 걸었던 아들입니다. 이삭이죠. 그 이름 자체가 ‘웃음’입니다. 그만큼 기쁨 가운데 태어난 아들입니다. 이삭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 계보도 실패했습니다. 이스라엘도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새로운 길을 여시죠. 교회입니다. 이삭과 그의 후손의 역사는 어떻습니까? 연약함의 역사입니다. 실패의 역사입니다. 배도의 역사입니다. 우상의 역사입니다. 죄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아브라함의 참된 아들은 이삭이 이루지 못한 모든 것을 이루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바다의 모래와 같고 하늘의 별과 같이 셀 수 없는 백성이 일어나게 될 겁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뜻을 영원히 이룰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님은 두 사람의 실패를 모두 넘어서는 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들이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죄인의 계보를 통해 오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한 여인, 그리고 두 사람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이제 세번째를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세 시대의 역사 속에서 드러납니다. 세 시대입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세 시대입니다. 한 여인, 두 사람, 그리고 세 시대입니다.

첫 번째 시대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입니다. 족장 시대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시대입니다. 동시에 사사 시대이기도 합니다. 드보라와 바락, 삼손과 입다 같은 사사들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이 영광을 누리던 시기입니다. 위대한 인물들이 일어나고,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시던 그 시대입니다. 룻도 있고, 다윗의 아버지 이새도 있습니다. 정말 위대한 시대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름을 떨치던 시대였습니다.

두 번째 시대는 다윗부터 바벨론 포로까지입니다. 어떤 시대입니까? 쇠퇴의 시대입니다. 첫 번째 시대가 상승 시대였다면, 두 번째 시대는 하강 시대입니다. 아브라함 때에는 존재조차 미미했던 이스라엘이 사사들을 통해서 승리를 거듭하면서 점점 강해졌습니다. 그러나 왕정이 시작되면서 상황이 달라집니다. 사울 때부터 이미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영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이후에는 비극이 이어집니다. 비극 위에 비극이 계속됩니다. 물론 가끔씩 여호사밧이나 히스기야나 요시야 같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들이 잠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흐름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르호보암, 아하스, 므낫세 같은 악한 왕들이 더 많이 등장합니다. 결국 이 시기는 배도의 시대, 타락의 시대입니다. 그리고 그 끝은 이스라엘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입니다.

그렇다면 세 번째 시대는 무엇일까요? 바벨론 포로 이후부터 그리스도까지입니다. 이 시대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알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어둠에 가려진 시대입니다. 약 600년 동안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이름조차 낯선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아비웃, 엘리아김, 아소르, 사독, 아킴, 엘리웃, 엘르아살, 맛단, 야곱, 이 사람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잊혀진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역사는 세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영광과 슬픔이 함께 섞여 있는 이야기입니다. 영웅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수치의 이야기입니다. 이름이 높아진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잊혀진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흐름 속에서 한 가지 사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민족이 계속 무너지고, 결국 자기들의 메시아를 저주하고 거부하는 자리까지 내려가지만, 바로 그 민족을 통해서 메시아가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은혜의 왕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한 여인과 두 사람, 그리고 쇠퇴해 가는 한 민족의 세 시대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은혜는 네 명의 ‘버림받은 자들’에서 드러납니다. 아마 여러분의 개요에는 ‘여인들’ 이렇게 되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버림받은 자들’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정말 놀라운 사실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족보에 네 명의 여인이 등장합니다. 오직 네 명 뿐입니다. 어떤 사람들인가요?

첫 번째 여인은 3절에 나오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첫 번째 여인 다말입니다. 아들이 베레스와 세라입니다. 그렇다면 이 다말은 어떤 사람입니까? 창세기 38장을 보겠습니다. 간단히 소개해 드리죠.

유다가 자기 장자를 위해 아내를 맞이해 줍니다. 그 여인이 바로 다말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죽습니다. 이후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갑니까? “어떤 사람이 다말에게 말하되 네 시아버지가 자기의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 한지라.” 여기서 시아버지는 유다입니다. 그러자 다말이 과부의 옷을 벗어버리고,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고는 길가에 앉아 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셀라가 장성했지만 다말을 그의 아내로 삼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복잡한 이야기니까 여기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그가 얼굴을 가리었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길 곁에서 그에게 나아가 이르되 청하건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의 며느리인 줄을 알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

대가를 요구하는 겁니다. “아무 대가 없이 이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유다가 이르되 내가 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그것을 줄 때까지 담보물을 주겠느냐 유다가 이르되 무슨 담보물을 네게 주랴 그가 이르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더라.” 다말, 어떤 여인입니까? 창녀일 뿐 아니라 근친상간의 죄가 얽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메시아의 계보 안에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사람이 메시아의 계보에 들어간 겁니까?”라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죠.

잘 들어보십시오.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 관계를 통해서 쌍둥이가 태어납니다. 베레스와 세라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들이 메시아 계보에서 다음으로 이어지는 인물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다음 여인을 보겠습니다. 더 내려갑니다.

5절을 보십시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라합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라합, 그 창녀.” 맞습니다. 라합은 가나안 여인이요, 부정한 자였습니다. 버림받은 자였습니다. 이방인이었습니다. 우상을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창녀였습니다. 여호수아 2장을 보면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리고에 들어온 정탐꾼들이 라합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 집이 창녀의 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라합에게서 보아스가 태어납니다. 그리고 보아스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 이제 세 번째 여인이 나옵니다. 다시 5절입니다. 보아스는 오벳을 낳습니다. 그런데 보아스의 아내는 누구입니까? 룻입니다. “룻은 창녀가 아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룻은 다릅니다. 근친 관계의 죄도 없습니다. 그러나 룻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이방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버림받은 자입니다.

창세기 19장 30절을 보면 매우 충격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롯이 소알에 거주하기를 두려워하여 두 딸과 함께 소알에서 나와 산에 올라가 거주하되 그 두 딸과 함께 굴에 거주하였더니.” 롯과 두 딸이 함께 굴에 있습니다.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온 세상의 도리를 따라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이 땅에는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가자 하고.”

아버지를 술 취하게 해서 후손을 얻으려는 겁니다. 근친상간 죄입니다. “그 밤에 그들이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큰 딸이 들어가서 그 아버지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그 아버지는 그 딸이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완전히 취해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몰랐던 겁니다.

“이튿날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어제 밤에는 내가 우리 아버지와 동침하였으니 오늘 밤에도 우리가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네가 들어가 동침하고 우리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가자 하고 그 밤에도 그들이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정말 비극적인 장면입니다. 아버지는 스스로를 지킬 힘조차 없이 누워 있습니다.

“작은 딸이 일어나 아버지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아버지는 그 딸이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롯의 두 딸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임신하고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의 조상이요.”

그렇다면 룻이 누구인지 아시겠습니까? 룻은 모압 여인입니다. 근친 관계에서 태어난 민족의 후손입니다. 물론 룻 자신은 정결한 여인이었습니다. 보아스의 아내가 되어서, 놀라운 사실은 다윗의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룻의 출신은 어떻습니까? 근친 관계로 시작된 민족 출신입니다. 신명기 23장 3절을 보면, 모압 족속 전체가 저주 아래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민족을 저주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저주받은 민족 가운데서 한 여인을 하나님께서 택하십니다. 자, 지금까지 세 여인을 보았죠.

세 명을 보았으니까 이제 한 명 남았습니다. 마지막 여인입니다. 6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이 여인이 누구일까요? 밧세바입니다. 사무엘하 11장과 12장을 보면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밧세바가 지붕 위에서 목욕을 하고 있을 때, 다윗이 보고 마음에 두었습니다. 불러들여서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생겼습니다. 밧세바는 간음의 죄와 연결된 여인입니다.

창녀가 두 명, 근친 관계에서 태어난 여인 한 명, 또 한 사람은 간음과 연결된 여인입니다. 그런데 이 네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등장하는 여인들입니다. 무엇을 말해 줍니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기쁘지 않으십니까? 저는 너무나 기쁩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족보가 유대인들에게 강력한 선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율법주의에 빠져 있던 사람들, 혈통과 정결함을 그토록 강조하던 사람들에게 던지는 분명한 메시지입니다. 유대인들은 족보와 순수한 혈통을 너무나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메시아를 소개하면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창녀의 계보를 통해, 간음한 여인의 계보를 통해, 근친 관계에서 비롯된 민족을 통해 오신 분이다.

타락의 역사를 가진 민족을 통해 오셨습니다. 죄인인 두 사람을 통해 이어진 계보를 따라 오셨습니다. 그리고 죄인인 한 여인을 통해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바로 그분이 만왕의 왕이십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의 친구이십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죄인의 친구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시간 마태복음 연구를 시작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위대한 여정을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이 족보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이 얼마나 강력한지 다시 깨닫습니다. 율법주의를 향한 선언입니다. 자기 의를 향한 책망입니다. 행위로 의를 이루려는 모든 시도를 향한 하나님의 분명한 메시지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은혜가 가득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바울처럼 우리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렇게 고백합니다. 은혜로 구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은혜의 왕 그리스도께 감사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높여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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