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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도 에베소서 6장을 보겠습니다. 오늘이 마지막 시간입니다. 이제 이 놀라운 에베소서 강해를 마치려고 합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이 에베소서를 다루는 62번째 혹은 63번째 설교인 것 같습니다. 성경의 한 책을 마칠 때마다 비슷한 감정을 느낍니다. 1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에베소서를 살펴봤지만, 그 안에 담긴 풍성하고 깊은 내용을 아직 다 헤아리지 못했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가 에베소서를 살펴보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에베소서에 담긴 주제들을 되돌아보면, 지난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교회 역사상 가장 흥미롭고도 의미 있는 시기를 지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진리들을 여러 방식으로 직면하게 하셨고, 우리 가운데서 극적인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모두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배운 모든 것,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심어주신 모든 진리를 이제부터 우리 삶 속에서 실제로 적용하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에베소서를 떠나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에서 배운 것들이 우리를 통해 흘러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 이제 에베소서의 마지막 단락입니다. 이 단락 전체를 살펴보겠습니다. 18절부터 24절까지 읽겠습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리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우리 사정을 알리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그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1671년 독일에서 태어난 요한 부르하르트 프라이스타인(Johann Burchard Freystein)은 다음과 같은 찬송가를 썼습니다.

“일어나라, 내 영혼아, 깨어 기도하라, 잠에서 깨어나라, 악한 날이 너를 덮칠 때 아무 준비 없이 붙잡히지 말라 원수는 우리가 알듯이 우리가 잠들어 있는 동안 추수하기 때문이라.마귀의 올무를 경계하라, 잠든 사이에 너를 붙잡지 못하게 하라. 사탄은 우리를 속이고 눈멀게 하기 위해 어떤 수고도 아끼지 않는다네. 사탄의 먹잇감은 스스로 안전하다고 여기며 잠들어 있는 자들이요 아무 경계도 하지 않는 자들이라네. 그러나 깨어 있는 동안 또한 쉬지 말고 주께 기도하라, 주께서 너를 자유케 하시고 붙드시는 분이 되시며 너의 힘과 믿음을 더하시리. 오 주여, 환난 가운데서 복 주시고 주를 섬기려는 뜻이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또, 100년 전에 샬럿 엘리엇은 이런 찬송가를 썼습니다.

“그리스도인이여, 안식을 구하지 말라. 너는 원수들 한 가운데에 있다. 깨어 기도하라. 보이지 않는 군대를 정렬한 권세와 세력들이 우리가 경계하지 않는 순간을 노리고 있다. 깨어 기도하라. 오직 그것 하나에 오늘의 승패가 달린 것처럼 깨어라. 위로부터 오는 도움이 너에게 임하도록 기도하라. 깨어 기도하라.”

이 두 찬송가는 모두 한 가지 현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사탄을 이기려면, 사탄의 세력을 이기려면,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엄청난 기도의 헌신이 요구된다는 사실입니다. 두 찬송가뿐 아니라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6장 18절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이미 6장 10절부터 13절까지에서 이 전쟁에 대해 말했죠. 14절부터 17절에서는 전신갑주를 매우 분명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기도라는 주제를 전면에 내세웁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보면 18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항상 기도하라.”

따라서 기도는 에베소서를 맺는 마지막 주제입니다. 기도가 그리스도인의 전신갑주의 한 부분으로서 언급되지 않는 이유는 그 이상이기 때문입니다. 전신갑주에 대한 설명은 17절에서 끝납니다. 기도는 전신갑주에 더해져서 함께 작동합니다. 사도 바울은 전신갑주에 기도를 더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전신갑주 속에 기도가 엮여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진리로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검을 들고, 믿음의 방패를 취하는 그 모든 순간에,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항상 기도하라.” 무장하는 전 과정에서, 전쟁이 요구하는 모든 상황 속에서, 전쟁의 열기가 가장 치열할 때나 잠시 소강상태에 있을 때나,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가 숨쉬는 공기와도 같습니다. 저는 전에 아주 깊은 바다 어두운 곳에 사는 생물에 대해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물고기도 아니고 새도 아닌데, 어두운 환경 속에서 한동안 머물 수는 있지만, 반드시 수면 위로 올라와서 공기를 들이마셔야만 한답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는 삶의 모든 과정에서, 삶의 모든 굴곡과 변화 속에서, 마치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올라가듯이 기도의 공기를 들이마셔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의 숨을 쉬어야만, 오직 그렇게 해야만, 자신을 둘러싼 이 세상의 어둠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하는 말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호흡과도 같습니다. 제가 이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기도는 숨 쉬는 것과 같습니다. 호흡을 의도적으로 생각해서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공기가 폐에 압력을 가해서 자연스럽게 호흡하게 만들기 때문이죠. 따라서 신자가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영적으로 숨을 멈추는 것과 똑같습니다. 숨을 멈추면 결과는 언제나 좋지 않죠.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모든 순간, 전신갑주를 입는 모든 순간, 싸움을 벌이는 모든 순간에, 우리는 마치 숨을 쉬듯이 계속해서 기도하고 또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모든 과정을 관통하며 스며들어 있습니다.

저는 <천로역정>을 읽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아름다운 우화 속에서 '크리스천'에게 “모든 기도”라는 무기를 주시고, 다른 모든 것이 실패할 때에도 이 무기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몰려오는 모든 악한 존재들을 물리치게 한다고 하신 장면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기도는 번연이 천로역정에서 묘사한 것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닙니다. 기도는 단순히 무기 하나가 더해진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모든 삶의 순간에 함께하는 ‘공기’와도 같은 겁니다. 우리가 싸우고, 우리가 무장할 때, 그 모든 과정이 이루어지는 환경 그 자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는 우리의 삶 전체를 두루 감싸고, 우리 존재 깊숙이 스며드는 겁니다.

기도가 에베소서의 마지막에 등장한다는 사실은 성령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일입니다. 우연이 아닙니다. 주님은 누가복음 18장 1절에서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권면하셨습니다. 전쟁이 치열해질 때 우리가 낙심할 수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죠. 지칠 수 있습니다.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전쟁에서 도망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선택지는 두 가지뿐입니다. 기도하거나 낙심하거나, 그 중간은 없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앞서 말한 영적 전쟁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그러나 기도가 가장 끝에 나오는 이유는 단지 전쟁과 연관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에베소서 전체의 결말에도 정확히 들어맞기 때문이죠. 에베소서 전체 구조를 보면, 이 마지막 부분에서 모든 내용이 정점에 이르고 절정을 맞이합니다. 마치 에베소서라는 위대한 찬양곡이 끝을 향해 나아가면서 점점 고조되어서 ‘기도’라는 절정에 이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제 제가 왜 이렇게 말씀드리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에베소서로 다시 돌아가 보면, 우리가 그동안 살펴보면서 확인했듯이, 성경 전체 가운데서도 신자가 가진 자원을 가장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소유한 자원들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제 생각에 에베소서와 견줄 만한 책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베소서는 비교할 수 없는 책입니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열거해 놓은 목록과도 같습니다.

베드로가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라는 한 문장으로 말한 것, 골로새서 2장이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라고 한 그 간결한 한 문장이, 이 에베소서에서 최대한으로 확대되어서 풍성하게 펼쳐집니다. 우리의 온전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자원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 핵심이 바로 1장 3절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바울은 그 다음 여섯 장에 걸쳐서 이 복이 무엇인지를 하나하나 풀어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을 보여주는 목록이죠. 우리를 하늘에 속한 높은 자리까지 끌어올려 줍니다.

에베소서는 우리를 처음부터 하늘에 속한 영역으로 데려갑니다. 영광 가운데서 시작하고, 에베소서 전체를 통해 그 자리에 머뭅니다. 그런데 6장 18절에 이르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기도가 핵심입니다. 잘 보셔야 합니다. 기도는 이 자원들을 실제로 취하는 열쇠입니다. 모든 것은 이미 주어졌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우리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광 속을 그저 떠다니듯 살 수는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삶 속에서 실제로 작동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만 합니다.

자, 그러니까 에베소서는 하늘에 속한 영역에서 시작하지만, 마지막에는 바울이 기도로 초대하면서 무릎 꿇는 자리에서 끝이 납니다. 이렇게 엄청난 자원을 말하는 책이라면, 기도가 그렇게까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1장 3절은 우리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1장 4절부터 6절은 우리는 넘치도록 사랑받고 있다고 합니다. 1장 7절에 따르면 우리는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1장 8절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셨다고 합니다. 1장 11절은 우리가 부요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1장 13절은 우리가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아 안전하다고 말합니다. 2장 4절부터 6절에 따르면 우리는 새 생명으로 살아났습니다. 2장 7절에 따르면 우리는 영원한 은혜의 대상입니다. 2장 10절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2장 10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한 일을 행하도록 부르셨다고 합니다. 2장 13절부터 18절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고 모든 신자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2장 19절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 그것도 매우 친밀한 가족의 일원입니다. 2장 22절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입니다. 3장 20절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3장 21절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존재라고 합니다.

인간을 얼마나 놀랍게 정의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더 큰 일을 우리를 위해 행하셨다는 사실이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그런데 4장으로 넘어가면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4장 3절에서는 하나님의 살아 계신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합니다. 4장 4절부터 6절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고 합니다. 4장 11절부터 13절에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셨고, 사역을 온전히 이루도록 은사를 받은 사람들을 주셨다고 합니다. 4장 20절부터 24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를 가르치셔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신다고 합니다.

5장 1절과 2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사랑 가운데서 행할 수 있다고 합니다. 5장 8절에서는 하나님의 빛을 받았으니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합니다. 5장 15절부터 17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와 진리를 받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지혜롭게 행할 수 있다고 합니다. 5장 18절에서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합니다. 5장 21절부터 6장 9절까지에서는 모든 인간관계가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모습이 되도록 만드는 자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6장 10절부터 17절에서는 우리가 사용하기만 하면 사탄이 속수무책이 될 수밖에 없는, 침투할 수 없고, 무너뜨릴 수 없는 놀랍고도 강력한 전신갑주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 절정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무기죠. 이 무기는 모든 신자의 손에 쥐어져 있습니다.

참으로 엄청난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머릿속에 담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신의 높은 지위를 인식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자원들을 보고,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즉시 하나의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제가 ‘교리적 율법주의’라고 부르는 문제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이 이렇게 정의합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신자는 실제로 ‘영적 무신론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완전히 믿고는 있지만 하나님이 필요하지는 않은 상태입니다. 아마 이것이 바로 우리 같은 교회가 직면할 수 있는 가장 심각한 위험일 겁니다. 우리는 너무 충분합니다. 지식이 많습니다. 정보가 많습니다. 자원이 아주 풍부합니다.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은사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보아 왔습니다. 많은 성공을 거두는 동안 거의 실패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을 실제로 인정하지 않은 채 그냥 흘러가듯이 살아가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충분하다고 느끼면서 하나님께 대한 의존감을 잃어버리는, 매우 심각한 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어떤 형제님의 기도가 떠오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 만큼의 성공과, 하나님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낄 만큼의 실패를 함께 주시기를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 속에서, 우리 교회 안에서,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는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너무도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방법론으로, 요령으로, 프로그램으로, 기법으로 축소시켜 버리기 쉽습니다. 우리는 이미 다 가지고 있고, 다 해 보았고, 모든 것이 잘 돌아갑니다. 결혼도 잘 되고, 자녀들도 잘 자라고, 교회도 문제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훌륭해 보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영적 무신론자가 됩니다. 더 이상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요구하시는 그 열정적이고 깊은 갈망, 간절함과 절박함이 담긴 기도가 점점 사라집니다.

제 친구인 마레부스 부부가 있습니다. 페드로 마레부스와 릴리안 마레부스죠. 미국에 있을 때 여러 번 만났습니다. 또 니카라과에서 사역할 때에는 아주 깊고 풍성한 교제를 같이 나눴습니다. 그런데 지난 한 주 남짓한 기간 동안에 니카라과에서 벌어진 아주 끔찍한 전투와 학살 속에서 결국 나라를 떠나서 도망쳐야만 했습니다. 챙길 수 있는 것만 겨우 챙겨서 빠져나왔습니다. 페드로는 화장품을 만드는 아주 작은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사업가였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그 공장을 군수품 생산에 사용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반군은 만약에 정부 말을 들으면 가족을 모두 죽이겠다고 위협했습니다. 페드로는 완전히 궁지에 몰려서 결국 목숨을 건 탈출 외에는 길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기도 제목을 찾는 데 어려움이 전혀 없었을 겁니다. 이 부부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모든 것입니다. 집도, 재산도 전부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자녀들은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더 이상 보내줄 돈이 없어서 모두 데려와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잘 지내다 보면 영적인 관점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 관점을 잃어버리면, 하나님께서 되찾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삶 속에 특별한 사건을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겁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지만, 이 모든 것이 여전히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미식축구 감독과 선수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프로 미식축구 선수가 되면 기술은 이미 완전히 숙달되어 있습니다. 그 수준에 이르면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 역할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고, 경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완전히 잘 이해하고 있죠. 훈련도 충분히 받았고, 실력도 있고, 장비도 있고, 재능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갖춘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 분야의 기술을 완전히 숙달해서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그 거대한 체구의 선수도, 사이드라인에서 클립보드를 들고 서 있는 작은 체구의 감독이 지시하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반드시 들어야 합니다. 저는 달라스 카우보이스(Dallas Cowboys)에서 뛰었던 몇몇 선수들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달라스가 경기에서 질 때마다, 톰 랜드리(Tom Landry) 감독이 라커룸에 들어와서 늘 하던 말이 있다고 합니다. “이기는 전략을 다 알려줬잖아. 그런데 왜 내 말대로 하지 않는거야, 그러니까 지잖아.” 그리고는 그대로 돌아서 나가 버렸다는 겁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아무리 자원이 풍부해도, 아무리 잘 훈련되어 있고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식대로 하지 않으면 패배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핵심입니다. 너희에게 이 모든 자원이 있고, 성공의 역사도 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함을 가졌다고 해서, 하나님이 필요 없는 사람처럼, 마치 영적 무신론자처럼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 삶은 불가능합니다.

전신갑주는 기계가 아닙니다. 줄줄 외는 주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꼭 필요합니다. 그 전신갑주 안에,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자원들 안에 능력과 에너지를 불어넣으시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교리를 알고 있고, 어느 정도 성공도 해왔고, 실제적인 영적 원리들을 꽤 잘 붙들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만족이라는 위험에 직면합니다. 마음을 찢는 열정적이고 끊임없는 기도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느끼는 겁니다.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에베소서가 하늘에 속한 영역에서 시작되어서 무릎 꿇는 자리에서 끝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기도에 달려 있기 때문이죠.

어쩌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은 “나는 아는 게 참 많다” 이렇게 자부하시는 분이 계실 겁니다. 특히 젊거나, 신학을 공부하는 중이거나, 혹은 신학교를 이미 졸업한 분들 가운데 그런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아는 게 이렇게 많은데,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별로 없네.” 그렇다면 전신갑주나 자원들을 기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도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움직이는 영혼에 달려 있습니다.

바울이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는지 이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모두 다룰 겁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1부예배를 마친 후에 한 성도님이 저에게 다가오시더니 입을 떡 벌리면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많은 절을 다 다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렇게 할 겁니다. 다만 마지막 네 절은 건너뛰겠습니다.

먼저 18절에 나오는 일반적인 권면을 보겠습니다. 18절의 일반적인 권면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으로 보면 “모든(all)”이라는 표현이 네 번 반복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개역개정 성경으로 보면 “모든, 항상, 항상, 여러” 이렇게 번역이 되었지만, 영어로는 모두가 “all” 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여기에는 기도의 네 가지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모든”이 네 번이나 강조되었습니다.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전신갑주의 각 요소는 기도로 입을 수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것과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관통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삶 전체를 감싸는 요소입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가 우리가 숨 쉬는 공기와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은 단 한 순간도 없습니다.

먼저 기도의 빈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네 가지 ‘모든 것’을 하나씩 살펴볼 겁니다. 먼저 기도의 빈도입니다. 18절입니다. “항상 기도하라.” 언제 기도해야 합니까? 항상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기도문을 읽으면서 기도하는 전통 속에서 자라온 분들도 있을 것이고, 정해진 시간에만 기도했던 분들도 있을 겁니다. 유대인들은 정해진 시간에 기도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도 “기도 시간”에 모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교 전통에서 내려온 것이죠. 하루 중의 정해진 시간에 드리던 기도 습관이 남아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신약에 이르러서 새로운 언약과 교회가 탄생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가져왔습니다. 기도에 ‘항상’이라는 성격이 부여되었습니다. 더 이상 정해진 시간에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때에, 모든 상황에서, 언제나 기도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21장 36절에서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미리 보여주셨죠. 사도들도 사도행전 6장 4절에서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라고 말했습니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기도하겠다고 합니다. 정해진 기도 시간만이 아니라 항상 기도하겠다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고넬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경건하여...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로마서 12장 12절은 “기도에 항상 힘쓰라” 이렇게 말합니다. 골로새서 4장 2절도 “기도를 계속하라” 이렇게 말합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하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는 말씀이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디모데후서 1장 3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렇게 살았다고 말합니다. 디모데에게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라고 합니다. 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도 교회가 끊임없이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다소 믿음이 연약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모든 때에, 항상 기도하는 삶의 분명한 본보기입니다.

저도 한때는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참 궁금했습니다. 일이 너무 많아서 어떻게 항상 기도할 수 있는지, 도무지 방법이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루 종일 책을 들고 다니면서 기도문을 읽으면서 다닐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이스라엘에 가 보면 유대인들이 통곡의 벽 앞에서 몸을 흔들면서 몇 시간씩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 가톨릭 배경에서 자란 분들은 묵주를 들고 같은 기도를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서 하루를 보내기도 했을 겁니다.

그러나 “항상 기도하라”는 말의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특정한 문구를 중얼거리면서 다니는 것, 의미 없는 말을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삶 전체에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과 교제하고 소통하는 겁니다. 제 삶을 돌아보면, 예전에는 어떻게 항상 기도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시간이 거의 없습니다. 제가 보고 경험하는 모든 것을 기도합니다. 다시 말해서, 가장 친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때처럼 즉시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겁니다.

유혹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죠. 유혹을 받을 때면 곧바로 기도합니다. “주님, 제가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아시죠. 저를 도와주세요” 이렇게 말입니다. 좋은 것을 보면 가장 먼저 이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하나님, 모든 선하고 온전한 선물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또 악한 것을 보면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왜 이렇게 악이 득세할까요?” 또 “하나님, 바로잡아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과 만날 기회가 있을 때면, 제 마음속에서 가장 먼저 이런 반응이 나옵니다. “하나님, 이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주님께로 이끌어 주옵소서.” 또 고난을 당할 때면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저를 고난에서 건져내 주십시오.”

다시 말해서 삶 자체가 기도가 되는 겁니다. 모든 생각과 모든 행동과 모든 상황이 하나님과 소통하는 계기이자 하나님께 나아가는 접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항상 기도하는 방식입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의식적으로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면서 항상 기도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내내, 생각하는 모든 순간에 기도하는 것이죠.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를 아십니까? 바로 교제하기 위해서입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요한일서에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복음을 전한 이유가 뭐라고 합니까?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하나님은 여러분과 교제하시기 위해서 구원하셨습니다. 교제를 가장 분명하게 표현하는 방식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시간입니다. 만약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과 교통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구원하신 목적을 부인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속량하신 목적을 거스르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구원받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4장 2절에 나오는 “기도를 계속하라”는 표현의 어근은 헬라어 ‘칼레테오(kartereō)’입니다. “굳게 서다, 지속하다, 변함없이 붙들다” 이런 뜻입니다. 히브리서 11장 27절에서 모세가 “참았으며”라고 할 때 사용된 바로 그 단어입니다. 골로새서에서는 이 단어 앞에 전치사가 더해져서 의미가 더욱 강해집니다. 끈질기게 매달리는 기도, 버티면서 하는 기도를 뜻합니다.

그냥 편하게 가끔 떠오를 때마다 한두 마디 하는 기도가 아니라, 삶 전체의 깊은 문제들을 붙들고 힘을 다해 씨름하며 끈질기게 드리는 기도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열려 있는 성도의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입니다. 진지하고, 강인하고, 담대하고, 포기하지 않는 기도입니다. 복을 받을 때까지 붙들고 놓지 않는 기도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1장과 18장에서 드신 두 비유를 기억하십니까? 하나는 불의한 재판관 비유이죠. 한 과부가 계속 찾아와서 간청하고, 또 간청하고, 또 간청합니다. 그 불의한 재판관조차도 마침내 여인의 요구를 들어주죠. 주님이 말씀하시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끈질기게 매달리는 여인의 요청을 들어주는데, 하물며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자녀가 끈질기게 구할 때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또 다른 비유는 이겁니다. 어떤 사람이 밤중에 문을 두드리고, 또 두드리고, 계속 두드립니다. 안에서 “문 닫았어. 가서 자. 나는 이미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자고 있잖아. 일어나지 않을 거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도 계속 두드립니다. 결국 안에 있던 사람이 내려와서 떡을 주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잠자리에 들어 깊이 잠든 사람조차도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떡을 내어주는데, 하물며 사랑하는 아버지께서 필요를 가지고 나아오는 자기 아들에게 주시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이 두 비유의 핵심은 동일합니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간청해서 결국 원하는 것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끈질기고 신실하게 간절히 매달려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겁니다. 따라서 사는 동안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성경에 대해 많이 알면서도 하나님을 전혀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머릿속에 지식은 가득하지만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배우는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이 부분은 잠시 후에 좀 더 보겠습니다. 먼저 기도의 빈도입니다. 항상이라고 했습니다. 언제나입니다. 여러분이 살면서 겪는 모든 것이 기도로 하나님께 올라가야 합니다. 교제의 창이 활짝 열려 있기 때문이죠. 참고로 말씀드리면, 이 “교제”라는 단어는 “교통”이라는 뜻입니다.

둘째, 우리는 기도의 빈도뿐 아니라, 두번째 “모든(all)”을 통해서 다양한 기도를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모든 기도와 간구입니다. 여기서 “기도”라는 말은 아주 일반적인 단어입니다. 기본적으로는 “요청”을 의미합니다. “프로슈케(proseuchē)”, 일반적인 의미의 기도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반면에 “간구”라고 하는 “데에시스(deēsis)”는 “구체적인 요청”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기도에는 일반적인 기도가 있고, 또 구체적인 기도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포괄적으로 기도하고, 어떤 때는 아주 분명한 내용을 놓고 기도하죠.

그런데 바울은 “모든 기도와 모든 간구로” 항상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모든 기도와 모든 간구”란 무슨 뜻입니까? 아주 단순합니다. 모든 종류의 기도라는 뜻입니다. 기도의 방식이 다양하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릎을 꿇어야만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손을 들어야만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손을 이렇게 모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반드시 어떤 특정한 방식을 통해야만 한다고 여깁니다. 어떤 사람들은 반드시 기도책을 펴 놓고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거나, 누군가가 불러 주는 기도를 따라서 기도해야만 한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바울은 항상, 모든 종류의 기도로 기도하라고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항상 기도하려면, 당연히 모든 종류의 기도가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삶의 순간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은 결코 똑같지 않기 때문이죠. 공적인 기도도 있고, 개인적인 기도도 있습니다. 소리 내서 드리는 기도도 있고, 침묵하며 드리는 기도도 있습니다. 크게 부르짖는 기도도 있고, 조용하게 속삭이며 하는 기도도 있죠. 잘 준비되고 숙고된 기도도 있고, 즉각적으로 터져 나오는 기도도 있습니다. 간구도 있고, 감사도 있습니다. 고백도 있고, 자신을 낮추는 기도도 있습니다. 찬양할 수도 있습니다. 무릎을 꿇고 드릴 수도 있고, 서서 드릴 수도 있고, 손을 들고 드릴 수도 있고, 엎드려서 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요지는 단순합니다. 모든 방식으로, 모든 순간에 기도하라는 겁니다.

자, 그러니까 삶의 매 순간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저는 가끔, 아니 거의 매일 밤에 아이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무릎을 꿇고, 멜린다는 누워서 하지만, 나머지는 무릎을 꿇습니다. 그런 자세로 기도합니다. 이미 잠자리에 들었을 때는, 침대에 누운 채로 고개를 들고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아멘”이라고 말하지도 않은 채 아침에 눈을 뜰 때도 있습니다.

저는 걸으면서도 기도합니다. 대학 시절 설교를 배우던 때의 일이 생각이 납니다. 그때는 다섯 명씩 차에 태워서 버스터미널로 데려가서 설교를 시켰습니다. 저를 그레이하운드 터미널에 내려놓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가 터미널이다. 설교해. 두 시간 후에 올 거야.” 그러면 저는 설교 한 편을 하고, 15분 쉬었다가 전도하러 나가고, 다시 또 돌아와서 또 설교하고 그랬습니다.

젊은 청년에게는 꽤 두려운 시간이죠.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도 저는 그렇게 하라고 하면 두려울 겁니다. 지금은 못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그곳으로 가는 내내 기도했습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도 계속 기도했습니다. 처음에 저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운전하던 사람이 기도하는데 눈을 안 감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그게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운전하면서 기도할 때는 그렇게 하는 게 맞죠. 덕분에 제가 살아있을 수 있었으니까요.

어쨌든 차를 운전하면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빌 클러터햄(Bill Clutterham)이 저에게 이런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빌의 아내는 빌이 운전하면서 기도하고 있다는 걸 바로 안답니다. 왜냐하면 속도가 점점 점점 느려지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제한 속도에 더 민감해진다는 거죠. 과속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어쨌든 우리는 언제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어떤 형편에 있든지 기도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하는 말의 정확한 의미가 이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무한한 자원들을 붙들고 있으면서도, 단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매 순간 하나님께 의존해야 합니다. 따라서 삶의 모든 상황에서 기도하십시오.

바울은 디모데전서 2장 8절에서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성경에 나오는 기도들을 살펴보면, 기도의 형태도 다양하고, 자세도 다양하고, 시간도 다양합니다. 삶의 방식에 따라 다 다릅니다. 병사는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기도하며 살아갑니다. 기습 공격이 와도 준비되어 있기 위해서죠. 하나님께 완전히 열려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제가 예전에 사역자 몇 명과 함께 목회자 컨퍼런스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나와서 “우리는 아침에 기도해야 한다” 이런 주제로 설교를 했습니다. 정말 아주 강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아침에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 63편의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와 같은 본문을 비롯해서, 아침에 기도한 사람들의 본문을 쭉 인용하면서 아침에 기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아주 설교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듣는 내내 저는 저녁에 기도한 본문, 또 정오에 기도한 본문, 이런 말씀들을 계속 찾아보고 있었습니다. 설교하신 그분의 말은 옳습니다. 우리는 아침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시간에 기도하는 것도 배제하면 안 됩니다. 시편 55편 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6장 12절에서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디모데전서 5장 5절은 과부들이 “밤낮으로 기도했다”고 말합니다. 기도는 특정 시간대가 아니라 삶 전체를 관통해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의미에서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이죠. 어떤 의미에서는 지식보다 더 중요한 요소가 바로 기도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궁극적인 상태는 우리의 기도 생활로 알 수 있다.” 여러분은 지식이 많을 수 있습니다. 신학생일 수도 있고, 신학교를 졸업했을 수도 있고, 사역자이거나 목회자이거나, 선교사이거나, 성경 교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기도 생활이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의 지식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주는 척도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신학이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신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학을 더 많이 알수록, 하나님을 더 많이 아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더 많이 알수록, 시편 기자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는 갈망이 더 커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지식이 많으면서도, 깨어 있는 모든 시간 동안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고자 갈망하지 않는다면, 그 지식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제가 성경을 연구하는 이유입니다. 말씀을 배우는 이유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더 알수록, 하나님의 임재 안에 더 머물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안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지 않고, 깨어 있는 모든 순간마다 하나님과 소통하지 않는다면, 신학이 올바른 열매를 맺고 있는지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때에, 모든 기도의 방식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열려 있어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목적은 교제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교제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끊임없이 기도하고 계십니까? 기도는 우리를 정말로 정결하게 합니다. 세번째, 기도의 빈도와 기도의 종류, 곧 기도의 다양성뿐만 아니라, 기도의 태도도 나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킹제임스 성경은 “모든 인내와 간구로 그 일에 깨어 있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인내가 나옵니다. 끝까지 붙드는 것, 계속하는 것, 포기하지 않는 것, 버티는 것입니다. 깨어 있으면서 계속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기도란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민감하고, 상황을 분별하고, 문제들을 똑바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 번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7절도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지 못하면 제대로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로 마음이 가득 차는 것, 어떻게 마음에 기도가 가득합니까? 많은 일들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어젯밤에 저는 아내와 함께 기도하면서, 요즘 기도하기가 어려운 이유가 기도할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아서 어떤 기도를 먼저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야말로 엄청난 소통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저는 라디오 청취자로부터, 설교 테이프를 듣는 분들로부터, 선교지에 있는 분들에게서, 정말 온갖 곳에서 편지를 받습니다. 우리 교회는 정말 큰 교회입니다. 수많은 성도님들의 기도제목이 쏟아집니다. 수요일 밤에 나오는 기도 제목 종이를 보면 숨이 턱하고 막힙니다.

때로는 너무 일이 많아서 이런 말이 나오기도 합니다. “하나님, 기도 제목을 그냥 읽어 드리는 것 말고는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예전에 기도 제목을 적어서 관리하려고 했습니다. 계속 적어 두려고 했죠. 그런데 점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져 버렸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하고는 있지만, 정말 벅찹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쉬지 않고 기도한다고 해서 제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기도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계속 깨어 있어야 하고, 민감해야 합니다. 그래야 정말 필요한 것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죠. 저는 구체적으로 기도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응답하시고,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영광을 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3절과 1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시는 목적은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체적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실 기회도 사라집니다.

제가 전에 저희 딸 마시(Marcy)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죠. 마시는 어렸을 때 이렇게 기도하곤 했습니다. “하나님, 온 세상을 다 축복해 주세요.” 그러면 저는 항상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시야, 그렇게 기도하면 안 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는 없어. 하나님께서 ‘자, 세상아, 이제 다 괜찮니?’ 하고 한번에 해결하시는 건 아니야. 그렇게 기도하면 안 돼.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해.” 그렇게 가르치다 보니까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배워서, 이제는 구체적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구체적으로 응답하시고, 우리는 그 응답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자, 깨어 있으십시오. 주위를 살피십시오. 여러분 주변 사람들의 형편이 어떤지 알고 계십니까? 그런데 여기서 “깨어 있으라”는 표현은 또 다른 한 가지를 말해 줍니다.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밖을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자기 자신의 문제는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가장 오래 기도해야 할 대상은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밖을 바라보고, 살피고, 사람들의 필요를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강력하게 방해합니까? 바로 이기심입니다.

아주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는 삶에 어떤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는 잘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문제가 하나 생기면 열심히 기도하죠. 그런데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그렇게 기도합니까? 자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훨씬 더 열심히 기도할 겁니다. 우리 안의 자기 중심성 때문이죠.

사도 바울처럼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신 적 있으십니까? “나는 너희를 위하여 밤낮 눈물로 기도하였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누군가를 위해서 밤낮 눈물로 기도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자신의 문제 때문에 몇 번 눈물을 흘린 적은 있을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그렇게 해 보신 적은 많지 않을 겁니다. 거듭난 신자에게도 여전히 남아 있는 자기 중심성 때문입니다. 우리는 프로스칼테레시스(proskarterēsis), 곧 끈질기고 강력하게 지속적으로 깨어 기도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이제는 육체적인 문제를 넘어서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의 류머티즘의 치료를 위해서 기도하고, 심장 질환을 위해서 기도하고, 다리 골절이나 수술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런 기도가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제 기도 목록에서 이런 종류들은 아래쪽에 있습니다. 제가 진짜로 마음에 두는 것은 영적 전쟁입니다. 영적 전투입니다. 신자들이 이 싸움에서 이기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육체적인 문제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조금 덜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제 마음을 정말로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삶 속에서 승리를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능력 있게 역사하시는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능력이 발휘되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이런 부분에 저의 관심을 둡니다.

저는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을 위해 기도합니다. 영혼들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도록 기도합니다. 육체적인 문제를 제 기도의 최우선 순위에 두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기도도 필요합니다. 육체적인 문제가 우리의 영적인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두 번째 문제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요지입니다. ‘보아라, 우리는 영적 전쟁 중에 있다. 그 전쟁을 두고 기도해야 한다.’ 영적 전쟁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저도 여러분의 육체적인 문제를 위해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이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영적 승리를 주시는 것입니다. 원수와의 싸움에서 이기도록 기도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승리하기만 한다면, 저의 육체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여러분의 육체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저는 크게 개의치 않을 겁니다. 아멘이십니까? 이것이 전쟁입니다. 전쟁이 핵심입니다. 가장 본질적인 문제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기도를 요청하면서 “내가 감옥에 있으니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 “이 쇠사슬 때문에 피부가 다 헐었다, 내 오른쪽 다리를 위해 기도해 달라”라고 하지 않는 겁니다. 그런 말은 없습니다.

바울의 기도제목은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입니다. 다시 말해, 사탄이 바울의 입을 닫게 하려고 유혹할 때, 그 유혹을 이기고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영적 전쟁에서 이기도록 기도해 달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서로를 위해 끈질기게 간구해야 합니다. 깨어서 상황을 살피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찾아서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정말로 주변 사람들의 필요를 알고 계십니까? 배우자의 영적 필요를 알고 계십니까? 자녀들의 영적 필요를 알고 계십니까? 친구, 이웃,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하는 분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사람들의 영적 필요를 알고 계십니까? 이들의 영적 전쟁을 두고 정말로 기도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종종 재난이 닥쳤을 때만 기도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조금 더 앞선, 예방적인 기도가 큰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자, 지금까지 우리는 기도의 빈도, 곧 항상 기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기도의 다양성, 그러니까 모든 기도와 간구로 기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기도의 방식, 모든 인내로 깨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도의 대상, 그러니까 간접 목적을 이제 보겠습니다. 18절 끝부분입니다. “모든(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과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선순위가 그게 아닙니다. 저는 이렇게 작정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이 너무 많아서 다 감당할 수도 없고, 솔직히 말해 저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할 필요를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제 죄에 대해서는 주님께 아뢰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저 자신에게 집중해서 기도하기보다 말씀에 순종하려고 합니다. 저는 저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분들이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때문에 그 기도로 덮이기 때문이죠.

우리 자신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예전에 한 성도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저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사님의 사역이 제게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6개월 동안 목사님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저는 속으로 ‘1년은 안 되나?’ 이렇게 생각을 했죠. 그런데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 그 성도님이 하나님 앞에서 헌신하기로 작정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 헌신의 마음이 참 귀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도님이 저를 위해 기도하셨고, 저는 그 성도님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죠. 왜냐하면 그 6개월 동안에 성도님이 저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제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도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저를 위해 기도해 줄 사람이 하나 줄어들 것 같아서, 책임감을 가지고 그 성도님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 안에서 몸이 자라가는 방식입니다. 자신의 문제를 만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느라 자신의 기도제목을 잊어버릴 때 모두 하나가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기도를 배웁니다. 이것이 몸된 교회의 기도 생활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주 잘 보여 주었습니다. 바울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사무엘상 12장 23절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것은 여호와 앞에 죄를 범하는 것이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다른 사람이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면, 결국 모두가 기도로 덮이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몸의 한 지체가 병들면, 나머지 부분들이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보완해 줍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아픈 손가락은 스스로를 도울 수 없습니다. 몸 전체가 그 상처 입은 지체에 새로운 생명을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다치거나 약해진 그 부분은 다른 모든 부분들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지탱할 수 없기 때문이죠. 마찬가지로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서로 기도하는 일에 마음을 써야 합니다.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기 전에 어땠는지 아십니까?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스페인 전역에 심리 클리닉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신경증 환자들이 아주 많았다고 합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각종 신경증 치료를 받았습니다. 정신과 의사들의 정기적인 진료를 받는 외래 환자들이 많았습니다. 한 역사가는 아주 흥미로운 말을 합니다. 스페인 내전이 사람들에게 끼친 심리적, 사회적 영향을 연구해 보니까, 개인적인 문제, 걱정, 불안, 유혹들로 가득 차 있어서 정신의학과 정신분석 치료에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스페인 내전이 시작되자, 가장 처음으로 생겨난 두드러진 경향은 스페인 전역에 있는 심리 정신과 병원이 거의 텅 비어 버렸다는 겁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일입니다. 한 저자는 이 신경증 환자들이 더 큰 불안에 의해서 갑자기 치유되었다고 말을 했습니다. 집이 그대로 남아 있을지, 남편이 살아 있을지, 자녀들이 죽임을 당하지는 않을지 하는, 삶 전체를 뒤흔드는 더 큰 불안이 덮쳤기 때문이랍니다. 더 큰 문제가 더 작은 문제들을 몰아낸 겁니다. 더 큰 문제에 마음을 쏟아야 했기 때문에, 사소한 문제들은 잊어버리게 된 겁니다.

건강한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정말 중요한 것,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들의 영적 전쟁을 위해 기도하는 데 전념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데 전념하십시오. 그러면 사소하고 자질구레한 불안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게 될 겁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영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고 들었습니다. 더 큰 두려움이 더 작은 두려움을 몰아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할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사회가 이렇게 병들어 있고, 사람들이 온갖 심리적 원인에서 비롯된 통증과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너무도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저는 제 자신을 어느 정도 인내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라고 말하는 이유는, 여러분들이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정말로 견디기 힘든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자기 문제에만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기중심성을 확고하게 표현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모습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필요 속으로 그만큼 깊이 들어가서, 자기 자신이 사라질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작은 불안들은 더 큰 불안,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의 영적 전쟁이라는 더 큰 관심사 앞에서 자리를 내어주어야 합니다.

이제 18절에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기도의 빈도, 곧 항상 기도하라는 것, 기도의 다양성, 모든 기도로 기도하라는 것, 기도의 방식, 곧 모든 인내로 깨어 필요를 알고 기도하라는 것, 그리고 기도의 대상, 곧 모든 성도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절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핵심이 하나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는 겁니다. 성령 안에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는 방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솔직히 말해서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방언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구절에 방언을 끼워 넣을 수는 없습니다. 유다서 20절에서도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말하는데, 어떤 황홀경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황홀경에 차서 내뱉는 언어, 그런 말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곧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따라, 예수님의 뜻과 일치하게 기도하는 겁니다.

성령님과 보조를 맞춰서 기도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여러분의 기도를 언제나 여러분을 위해 중보하시는 분과의 이중주로 만드십시오. 로마서 8장 26절입니다. “...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을 아시며”,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여러분 안에 계신 하나님의 성령께서 여러분을 대신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언제나 올바르게 기도하시고, 언제나 응답을 받으십니다. 28절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연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의 기도를 성령님의 생각과 뜻에 일치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성령으로 충만하면 됩니다. 삶이 성령으로 충만해지고, 성령 안에서 행하고, 성령님께 순종하고, 주님을 가까이 따르고, 끊임없이 주님의 임재 안에서 교제할 때,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을 다스리셔서 우리의 기도가 성령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게 하십니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입니다. 아버지의 성령께서 내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아바 아버지” 이렇게 부르짖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에 적용되는 가장 총체적인 기준은 이겁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스가랴 12장 10절은 성령님을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이라고 부릅니다. 간구의 영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실제로 성령님은 “그의 아들의 영”, 곧 하나님의 아들의 영으로 불립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과 기도로 교제하는 것이야말로 치유입니다. 정말 놀라운 치유입니다. 기도의 빈도, 기도의 다양성, 기도의 방식, 기도의 대상이 모두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기쁨을 위해 작용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제 바울은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면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구체적인 기도 제목을 원하십니까? 19절에 나옵니다.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바울,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까?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를 들어 나를 위해 기도하려거든 내 육체적인 필요가 아니라, 나의 싸움을 위해, 나의 전쟁을 위해 기도하라. 하나님께서 내가 담대하고 용기 있게 숨김없이 말할 수 있도록, 입을 열어 주시도록 기도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이 보여주는 본을 보십시오.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죄수로 있으면서 원수와 얼굴을 맞대고, 눈과 눈을 맞추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대사는 외교적 면책특권이 있지만, 이 대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쇠사슬에 매여 있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전쟁이 참으로 치열하다. 어떤 때는 포기하고 싶고, 어떤 때는 용기를 잃어버리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을 주시도록, 입을 열어 말할 수 있도록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

저는 바울의 말을 그대로 빌려 오고 싶습니다. 설교자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왜 목회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까? 바울을 위해 기도하라고요? 바울이 기도가 필요합니까? 바울은 다 갖추고 있는 사람 아닙니까?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죠.”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앞에 서 있는 이 사람이 넘어지면, 많은 사람들이 함께 넘어집니다.

바울은 공동체의 힘이 지도자의 힘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 내가 담대히 말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 그러면 그 담대함으로 다른 사람들도 나와 함께 담대해질 것이다.” 실제로 바울은 이후에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보십시오. 사람들이 바울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더 강한 본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다른 사람들도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핵심은 이겁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할 때,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용기와 담대함을 잃지 않도록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렇게 물으실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싶어도, 무슨 상황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바울이 21절과 22절을 덧붙인 겁니다.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리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아무 정보도 주지 않으면서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동역자 두기고를 보내겠다고 합니다. 참고로 두기고는 신약성경에 다섯 번이나 등장하는 바울의 동역자입니다. 에베소서를 전달함과 동시에 바울의 상황을 직접 전해준 사람입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형편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상황이 어떤지 몰랐기 때문이죠. 소식을 듣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리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22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다시 말합니다. “우리 사정을 알리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그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두기고가 가서 내가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도 전할 것이고, 지금 전쟁이 어디에서 벌어지고 있는지도 알려줄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그 정보를 가지고, 분별하고, 제대로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적인 것을 두고 기도합시다. 그리고 서로의 삶을 열어서 보여줍시다. 그래야 기도할 내용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소통해야 합니다. 무슨 싸움을 싸우고 있는지 나누어야 합니다. 어떤 전쟁을 치르고 있는지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고 승리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의 짐을 함께 질 수 있습니다. 기도의 큰 교훈이죠. 우리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어야 하고, 이기적이지 않아야 하고, 깨어 있어야 하고,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고, 끈질기고 담대하게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가 그런 삶을 살고 그런 기도를 드릴 때, 점점 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를 위해 기도할 때에, 몸된 교회가 세워지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에베소서의 절정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축도로 에베소서를 마칩니다. 제가 그대로 읽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기도하겠습니다.

한 성도님이 오래전에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늘 아침 이 기도를 우리의 기도로 삼고자 합니다.

“오 주님, 기도할 때마다 저는 영원의 세계 깊숙한 곳으로 나아갑니다. 그 넓은 바다 위에서 제 영혼은 이 사라질 세상의 해안에 있는 모든 악을 이깁니다. 그때에는 시간과 그 시간 속의 오락과 잔인한 실망감이 더 이상 그렇게 무겁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기도 가운데서 저는 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습니다. 제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강렬하게 달려가고, 하나님과 함께 살고자 하는 격렬한 갈망으로 목마르게 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저를 새 예루살렘으로 향해 나아가도록 성령님의 바람이 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기도 가운데서 이 땅의 모든 것은 사라지고, 마음의 거룩함과 다른 이들의 구원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해 보이지 않습니다. 기도 가운데서 세상의 염려와 두려움과 불안은 모두 사라져 한 줄기 바람처럼 하찮게 됩니다.”

“기도 가운데서 제 영혼은 주께서 주의 교회를 위해 행하고 계신 일들을 생각하며 기뻐하고, 죄인들이 주께로 돌아와 주께서 크신 이름을 얻으시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기도 가운데서 저는 삶의 찡그림과 아첨을 넘어 하늘의 기쁨을 맛봅니다. 영원의 세계로 들어가, 제 마음 전체를 영원히 주께 드릴 수 있습니다. 기도 가운데서 저는 제 모든 관심사를 주의 손에 맡기며, 제 뜻이나 제 이해관계가 아닌, 전적으로 주의 뜻에 맡깁니다. 기도 가운데서 저는 친구, 사역자, 죄인, 교회와 주의 나라를 위해 가장 큰 자유와 가장 밝은 소망으로 중보합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나아가듯, 사랑하는 이가 사랑하는 분께 나아가듯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제가 항상 기도하며 결코 쉬지 않게 도와 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이 기도에 저의 기도를 덧붙입니다. 우리가 기도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결코 자만하지 않게 하시고, 결코 만족하거나 스스로 충분하다고 여기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가 가진 모든 지식과 과거에 베푸신 모든 복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향하여 열려 교제하기 위한 것임을 알게 하옵소서. 우리가 주님을 가까이 따르며, 우리의 삶 자체가 기도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살고자 하는 소망을 주심에 감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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