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은 전신갑주를 살펴보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전신갑주 중에서 마지막 장비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7절에서 바울은 성도가 사탄과 귀신들을 이기기 위해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거스리(Guthrie)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은 하늘의 무기고이며, 부작용 없는 약이 가득한 약국이며, 고갈되지 않는 부요함이 묻혀 있는 광산이다. 성경은 모든 길의 안내서이며, 모든 바다 항해 지도이며, 모든 질병을 위한 약이며, 모든 상처의 치유 연고이다. 만일 우리가 성경을 빼앗긴다면 태양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
또 어떤 작가가 성경 기록의 위대함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성경에는 왕의 글이 있고, 황제의 글이 있고, 왕자과 시인, 현자, 철학자, 어부, 정치가, 이집트의 지혜를 배운 사람, 바벨론의 학문 속에서 교육받은 사람, 예루살렘의 랍비 발치에서 훈련받은 사람의 글이 있다. 성경은 유배지, 광야, 목자의 장막, 푸른 초장, 고요한 물가에서 기록되었다. 성경의 저자들 가운데는 세리도 있고, 목자도 있고, 뽕나무 열매를 모으는 자도 있다. 가난한 자도 있고, 부유한 자도 있고, 정치가도 있고, 설교자도 있고, 장군도 있고, 입법자도 있고, 재판관도 있고, 유배된 사람도 있다. 성경은 역사, 족보, 민족학, 법, 윤리, 예언, 시, 수사학, 의학, 위생학, 정치경제, 그리고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위한 완전한 규범이 담겨 있는 거대한 도서관이다. 그리고 성경의 그 모든 단어 뒤에는 저자이신 하나님이 계신다.”
성경의 기록에 대해 존 웨슬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 저자는 이들 중 하나일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이시거나, 선한 사람들이거나, 악한 사람들이거나, 선한 천사들이거나, 악한 천사들이다. 그러나 악한 사람들과 악한 천사들은 성경을 기록할 수 없다. 성경은 악한 사람들과 악한 천사들을 정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한 사람들과 선한 천사들도 성경을 기록할 수 없다. 선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기록하셨다고 거짓말을 해서 사람들을 속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웨슬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따라서 성경은 스스로 주장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책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진리를 전하기 위해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인간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자신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것이다.”
저는 우리가 성령의 검을 가진다는 말의 의미를 온전히 알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놀랍고, 비할 데 없고, 비교할 수 없는 이 책은 사탄과의 싸움에서 신자에게 주어진 전신갑주의 마지막 장비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은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검을 실제로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 검에 능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탄의 희생양이 됩니다. 여러분은 성경이 어떤 책인지 알고 계십니까? 성경을 읽을 때, 여러분의 손에 무엇이 들려 있는지 정말로 알고 계십니까?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이 자신에 대해 무엇을 주장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성경은 무류합니다. 성경 전체에 오류가 없다는 뜻입니다. 어떤 실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흠도 없고, 결점도 없고, 티가 없다는 뜻입니다. 시편 19편 7절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성경 전체가 무류합니다.
둘째, 성경은 각 부분도 무오합니다. 성경 안에는 그 어떤 오류도 없다는 뜻입니다. 잠언 30장 5절부터 6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전체로서도 오류가 없고, 부분으로도 오류가 없습니다. 셋째, 성경은 완전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8절부터 1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다시 말해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완전합니다.
넷째, 성경은 권위가 있습니다. 이사야 1장 2절입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모두가 들어야 합니다. 성경에 권위가 있다는 말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다섯째, 성경은 그 자체로 충분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성경은 여러분을 구원에 이르게 하고, 온전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성경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전체로서 무류하고, 또 각 부분도 무오하고, 완전하고, 권위가 있고, 그 자체로 충분합니다.
여섯째, 성경은 효과가 있습니다. 성경은 일을 이룹니다. 말씀이 선포되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성경은 상황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화를 일으킵니다. 이사야 55장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말씀에는 효과가 있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만일 제가 이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설교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설교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 그대로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일곱째,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21절입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성경은 하나님의 책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무류하고, 무오하고, 완전하고, 권위가 있고, 그 자체로 충분하고, 그대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마땅히 귀히 여김을 받아야 할 책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은 결정력이 있습니다. 성경을 대하는 자세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여러분이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이신다면 하나님께 속했음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성경은 사람의 영원한 운명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결정하는 기준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책입니다. 온 우주에서 이런 주장을 할 수 있고, 또 그 주장을 스스로 입증할 수 있는 책은 오직 성경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 성경은 여러분에게 무엇을 제공합니까? 어떤 자원을 줍니까?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성경은 진리의 근원입니다. 요한복음 17장 17절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성경은 삶과 죽음에 대한 진리, 시간과 영원에 대한 진리, 천국과 지옥에 대한 진리를 말합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진리, 남자와 여자에 대한 진리, 노인과 젊은이에 대한 진리, 아이들에 대한 진리, 사회에 대한 진리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모든 관계에 대한 진리,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에 대한 진리, 인간과 창조 세계 사이의 모든 관계에 대한 진리를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에 대한 진리를 말해줍니다.
둘째, 성경은 행복의 근원입니다. 세상은 미친 듯이, 정말 광적으로 행복을 쫓아다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잠언 8장 34절입니다.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또 누가복음 11장 28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이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진리의 근원일 뿐 아니라 행복의 근원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진리를 발견한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며칠 전에 텔레비전에서 강간 피해를 당한 한 여성이 인터뷰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이 일을 통해 무엇을 배우셨습니까?” “저는 이 일을 통해 성장했어요.” “정말 훌륭하시군요. 인생이란 결국 성장의 과정이죠.” 저는 인생이 성장에 관한 것이라는 말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의 성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그렇다면 어떻게 자라갑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장의 근원은 성경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절입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잘 들으십시오. 성경은 진리의 근원이며, 행복의 근원이고, 성장의 근원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능력의 근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삶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 능력의 근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또한 성경은 인도의 근원입니다. 시편 119편 105절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성경은 위로의 근원입니다. 로마서 15장 4절은 성경의 위로를 말합니다. 성경은 온전함의 근원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7절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성경은 이처럼 수많은 것들의 근원입니다. 오류가 없고, 실수가 없고, 그 자체로 충분하고, 완전하고, 권위가 있고, 효과가 있고, 결정력이 있는 이 놀라운 책은 여러분의 삶에 진리, 행복, 성장, 능력, 인도, 위로, 온전함을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성경은 원수를 이기는 승리의 근원입니다. 에베소서 6장 17절을 보겠습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원수를 대적할 무기를 제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겁니다. 성경에 대해 제가 앞서 말한 모든 것들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만일 여러분이 그 말씀을 배우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용하지 않는 자원을 손에 쥐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매주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이유가 뭐라구요? 왜 그렇게 한다구요? 말씀이 진리의 근원이기 때문이고, 행복의 근원이기 때문이고, 성장의 근원이기 때문이고, 능력의 근원이기 때문이고, 인도의 근원이기 때문이고, 위로의 근원이기 때문이고, 온전함의 근원이기 때문이고, 승리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6장을 보면 우리는 전쟁 중에 있습니다. 10절부터 12절까지의 말씀에 분명히 나와 있죠. 10절부터 12절이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전쟁을 확인해 줍니다. 우리는 사탄과 귀신들을 상대로 싸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원을 받았습니다.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을 받았습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에베소서 4장, 5장, 6장에 분명히 제시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자원을 가지고 있는지도 나와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2장, 3장에 있습니다. 자원의 보고는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이 자원을 사용할 수 있는지도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한 가지 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사탄은 우리가 그 자원을 적용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사탄은 우리의 열매 맺는 삶을 방해하려 합니다. 우리가 받은 지위를 삶으로 살아내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 방해를 이기는 방법은 전신갑주를 입는 것입니다. 우리는 14절에서 진리의 허리띠, 헌신에 대해 살펴보았죠. 의의 호심경, 거룩함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신, 주님의 능력과 임재에 대한 확신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또 믿음의 방패,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구원의 투구, 장차 올 영원한 구원에 대한 확신이라고 했죠. 그리고 이제 마침내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에 이르게 됐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앞서 살펴본 전신갑주는 주로 방어하는 장비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방어하면서 동시에 공격도 할 수 있는 장비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장비로 공격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방어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이 ‘검’이라는 단어를 살펴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헬라어로 마카이라(machaira)라는 단어인데요, 헬라어에서 매우 흔하게 쓰이는 말입니다. 신약성경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검을 가리키는 또 다른 단어로 롬파이아(rhomphaia)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본 아주 크고 넓은 대검을 가리킵니다. 길이가 1미터가 넘는다고 했죠. 크고 넓은 양날을 가진 검이라고 했습니다. 두 손으로 휘둘러 사용하는 무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 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병사들이 차고 다니던 일반적인 검, 그러니까 마카이라(machaira)입니다. 길이가 한 15센티미터 정도의 단검에서부터 시작해서 길어야 최대로 45센티미터 남짓한 검까지 다양합니다. 병사들이 허리 옆의 칼집에 넣어 차고 다니면서 백병전, 그러니까 근접전에서 사용하던 무기였습니다. 성령의 ‘검’에서 이 ‘마카이라’가 사용되었습니다. 덧붙이자면, 마카이라는 마태복음 26장 47절에서 예수님을 잡으러 동산에 왔던 로마 군인들이 손에 들고 있던 칼을 가리킬 때 사용된 단어이기도 합니다. 또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었던 베드로의 칼을 가리킬 때도 이 단어가 쓰였습니다. 사도행전 12장 2절에서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이는 데 사용된 칼을 말할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영웅들이 죽임을 당한 칼 역시 이 마카이라입니다. 군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칼입니다. 그런데 이 마카이라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려면 매우 정교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이 검으로 단지 귀 하나를 잘라냈을 뿐입니다. 만약 베드로가 롬파이아(rhomphaia)를 들고 있었다면, 아마 귀부터 발까지 한 번에 내려쳤을지도 모릅니다. 자, 그러니까 마카이라(machaira)는 정교하게 사용해야 하는 무기입니다.
바울이 지금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이 마카이라입니다. 로마 병사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일반적인 검이라고 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성령의 검’이라고 합니다. 헬라어로는 ‘투 프뉴마토스(tou pneumatos)’, ‘성령의’ 입니다. ‘성령에 의한’으로도 번역할 수 있고, 혹은 형용사적으로 ‘영적인’이라는 의미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적절한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번째, 형용사로 받아서 ‘영적인 검’으로 이해하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적인 검은 성령님 자체를 직접적으로 강조하기보다는, 바울이 고린도후서 10장 4절에서 말한 것처럼 싸움의 무기는 육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라는 사실과 연결됩니다. 바울은 분명히 영적인 싸움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검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죠. 12절에서 우리가 싸우는 대상이 ‘악의 영들’이라는 사실을 말한 것을 보아도, 바울은 여기서 영적인 검을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전신갑주 모두가 영적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적인 허리띠가 있고, 영적인 호심경이 있고, 영적인 신발이 있고, 영적인 방패가 있고, 영적인 투구가 있습니다. 그렇게 영적인 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참고로 에베소서 1장 3절과 5장 19절에도 ‘투 프뉴마토스(tou pneumatos)’가 형용사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에베소서의 문맥 안에서 그렇게 번역하는 것도 충분히 타당합니다. 그러나 아마도 더 나은 번역은, 전신갑주의 다른 장비들과의 일관성을 고려할 때, ‘기원적 속격(genitive of origin)’으로 번역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말하는 표현입니다. ‘성령님이 주신 검’이라는 의미에서 성령의 검이라는 겁니다. 이 두 가지를 함께 묶어 보면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검은 영적인 것인데, 그 이유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무슨 검을 받았습니까? 바로 성경입니다. 이렇게 물으실지도 모릅니다. “불신자도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불신자도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신자에게는 성경을 깨닫게 해주시는, 그리스도인 안에 내주하시는 진리의 교사, 성령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알 수 없다고 말한 겁니다. 또 요한일서 2장에서 말하듯이,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압니다. 우리는 진리를 가르쳐 주시는 분,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받았습니다. 믿는 자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 가능하도록, 살아 있는 진리로,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는 검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 이 두 가지를 함께 받았고, 바로 그 순간 이 검을 소유하게 된 겁니다. 이제 문제는 우리가 이 검을 사용하는 법을 어떻게 배울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은 검을 모두 갖고 있습니다. 말씀이 우리 손에 있고,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시기에 이 검은 영적인 검입니다. 그리고 이 검은 영적 전쟁에서 사용되는 무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여러분 삶의 무기입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무기입니다. 문제는 단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그 무기를 사용할 줄 아느냐죠. 그리고 그 사용법을 배우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부지런히 배우고 연구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이나 머무른 뒤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왜 그랬습니까? 검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은 전부를 전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야 성도들이 검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영적인 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루에서 벼려진 것도 아니고, 이 땅의 불로 단련된 것도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이 주신 검입니다. 강력하고 효과적이면서 놀라운 무기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비교할 수 없고, 필적할 것이 없습니다. 신자의 손에 들려질 때 그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는 무기입니다. 너무나 강력해서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 무엇도 능가할 수 없습니다. 예전에 아서 왕 이야기에서 무적의 검을 읽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러나 의로운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할 줄 알고 그 손에 쥐고 있을 때 드러나는 그 무적성과 비교하면, 그런 이야기는 빛을 잃고 맙니다. 따라서 성경 말씀은 우리의 무기입니다. 강력한 무기죠. 로마서 1장 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성령의 검을 휘두르면 사람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말 그대로 어둠의 나라에서 영혼들을 베어내듯이 건져냅니다. 사탄의 지배 영역을 가르고 구원의 길을 냅니다. 강력합니다.
성령의 검은 심판의 도구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여기서 ‘판단한다’라는 말은 헬라어 크리노(krinō)에서 나온 단어인데, 증거를 걸러내 판결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전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그 사람의 삶 위에 실제로 적용됩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권위라는 저울 위에 삶을 올려놓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악된 실상과 현실을 분명히 보게 합니다.
이어지는 다음 절, 히브리어 4장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검처럼 임하여서 사람의 영혼을 어둠의 나라에서 끌어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 깊은 곳을 찔러 쪼개고, 그 속을 가르고, 증거를 걸러 내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와 죄책을 보게 합니다. 실로 강력한 무기입니다. 오류 속에 진리를 가져옵니다. 슬픔으로 가득한 곳에 기쁨을 가져옵니다. 어둠으로 가득한 곳에 빛을 비추어 길을 보여 줍니다. 근심을 기쁨으로 바꿉니다. 정체를 성장으로 바꿉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을 성숙한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참으로 강력한 무기입니다. 우리 손에 주어진 것이 바로 이 놀라운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이겠습니다. 검으로 공격도 하지만 방어도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방어하는 기능을 생각해 봅시다. 영화에서 검투 장면을 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상대를 베는 데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공격을 막아내는 데도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겁니다. 검을 휘두르는 사람은 손잡이 부분의 보호대로 적의 칼날을 방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사탄은 유혹으로 여러분을 공격합니다. 사탄은 다양한 방식으로 여러분을 덮치며 공격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사용함으로써 그 공격들을 실제로 막아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4장과 누가복음 4장에서 주님이 어떻게 하셨는지를 한번 보겠습니다. 사탄은 세 번에 걸쳐 예수님께 나아와 세 가지 직접적인 유혹으로 공격합니다. 첫번째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말라고 했죠. 돌을 떡이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공급을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차지하라고 유혹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 유혹과 정확히 맞닿아 있는 말씀을 신명기에서 인용해서 물리치셨습니다. 두번째, 사탄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번에는 무작정 하나님을 신뢰해 보아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하나님이 붙들어 주실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유혹을 정확히 겨냥한 또 다른 신명기의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세번째로 사탄은 “나에게 절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때도 예수님은 바로 그 유혹을 다루는 말씀을 다시 신명기에서 인용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의 마카이라를 정확하게 사용하신 것입니다. 무작정 휘두르신 것이 아닙니다. 사탄이 던진 바로 그 유혹에 대응하여 정확하게 말씀을 사용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유혹이 어떤 각도로 들어오든지 방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가지고 있고, 교회에서 설교도 듣고, 성경공부도 하고, 심지어 성경을 읽기까지 했지만, 정작 원리들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제가 늘 발견하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사탄이 여러분에게 그 부분에 대한 지식이 없다는 것을 알아내면, 바로 그 지점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한다는 거죠. 저는 이런 말을 너무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 수를 헤아리는 것조차 싫을 정도입니다. “아,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는 줄 알았다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요.” 진리를 알았다면 결코 빠지지 않았을 상황 속으로 스스로 들어간 겁니다. 따라서 성경을 방어 무기로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구체적인 내용을, 유혹의 구체적인 상황에 정확하게 적용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17절 끝부분을 보면, 성령의 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이라는 단어는 ‘로고스(logos)’가 아닙니다. 로고스는 넓고 포괄적인 의미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일반적인 개념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단어는 ‘레마(rhēma)’입니다. 레마는 특정한 진술, 구체적인 말씀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성령의 검은 막연하고 포괄적인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 그 상황에 대해 하신 구체적인 말씀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특정한 유혹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는지를 모르신다면, 그 유혹을 상대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안에 담긴 구체적인 말씀들을 알고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성경을 가르칠 때는 단순히 본문을 읽고 몇 가지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저는 본문 속에 담긴 원리를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그 원리야말로 여러분이 꼭 이해하기를 원하셔서 하나님께서 주신 구체적인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내면의 저장고에 담아 두었다가 사탄을 대적할 때 사용하도록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일꾼으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힘써 공부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서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사탄을 이긴 형제들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사탄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대해 증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방어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유혹에 넘어지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검을 갖고 있지 않은 상태나 마찬가지죠. 물론 이미 우리 손에 있습니다. 그러니 검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훈련해야죠.
둘째로, 이 검은 공격 무기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점을 생각하는 게 참 좋습니다. 저는 제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해서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저를 방어합니다. 사탄이 낙심으로 저를 공격할 때마다, 저는 낙심과 정확히 연결되는 말씀들을 떠올립니다. 오늘 아침 첫 예배 후에 한 분이 저에게 와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목사님은 슬플 때 어떤 성경 구절을 떠올리세요?” 그래서 제가 여러 구절을 알려 드렸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럼 새롭게 헌신하고 싶을 때는 어떤 말씀을 떠올리세요?” 정말 좋은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슬픔을 대적할 때 어떤 말씀을 떠올려야 하는지 아십니까? 낙심을 대적할 때, 헌신에 대한 열정이 식을 때,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유혹이 올 때, 어떻게 맞서 싸워야 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이것이 바로 말씀으로 방어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공격은 어떻게 합니까? 정말 흥미롭습니다. 저는 성령의 검으로 방어를 하면서도 공격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참 감사합니다. 평생 방어만 하며 살아야 한다면 얼마나 지치겠습니까? 때로는 공격에 나서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를 정말로 사랑합니다. 설교할 때는 유혹을 상대할 틈이 없습니다. 강단에 서 있는 동안에는 그런 것들과 씨름하지 않습니다. 제 공격용 검이 이미 휘둘러지고 있기 때문이죠. 제가 하고 있는 일은 단 하나입니다. 사탄의 나라에 우거진 밀림을 말씀의 검으로 베어내고 또 베어내는 겁니다. 바로 그 점이 이 싸움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복음을 가지고 아직 구원받지 못한 영혼에게 나아갈 때마다, 저는 그 영혼을 붙잡고 있는 사탄의 지배 영역을 향해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한 영혼이 구속을 받을 때마다, 어둠의 왕국 한가운데를 깊숙이 베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일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자녀들에게 말씀을 가르칠 때, 친구에게 이야기할 때도, 직장에서 동료들과 대화할 때도, 학교에서 다른 학생들에게 나눌 때도, 혹은 이렇게 강단에 서서 설교할 때, 여러분은 손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공격 무기를 들고 사탄의 나라를 가르면서 전진하고 있는 겁니다. 저는 사회적 문제로 혼란스러워하는 사람과 인터뷰를 할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라고 말하면서 성령의 검으로 그 체계를 공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참 좋습니다. 저는 반대 진영 앞에 서서 “이것이 하나님의 진리가 말하는 바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좋습니다.
사탄도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그 말씀이 전해지는 것을 막으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13장을 보십시오. 사탄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을 침묵시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합니다. 말씀을 무효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시도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기억하십니까? 지금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마태복음 강해를 계속해 가면서 나중에 다루게 될 겁니다. 그러나 오늘 아침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부분만 살펴보겠습니다. “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9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의미를 설명해 주십니다. 제가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는 설교자이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입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나가서 씨를 뿌릴 때, 어떤 의미에서는 검을 사용하는 겁니다. 말씀을 뿌리는 거죠.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검을 휘두르기 시작하면 반드시 변화가 일어납니다. 8절을 보면, 말씀이 좋은 땅에 떨어질 때 열매가 맺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사탄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아주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예를 들어 4절을 보면, 씨가 길가에 떨어질 때 즉시 새들이 와서 먹어버립니다. 제 생각에는 사탄 수하의 귀신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귀신들이 개입해서 말씀을 빼앗아 가서 들은 말씀을 잊어버리게 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듣습니다. 여러분이 알려줬을 수도 있고, 제가 설교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말씀을 듣고 돌아가지만 곧 잊어버립니다. 사탄이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아간 겁니다.
또 다른 경우로, 5절을 보면 어떤 씨는 돌밭에 떨어집니다.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흙이 깊지 않기 때문에 곧 싹이 납니다. 그러나 해가 돋자 곧 타 버리고,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립니다. 나중에 예수님은 이것이 박해와 관련되어 있다고 설명하십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봅시다. “기독교는 참 흥미롭네요. 당신이 말하는 성경의 진리가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러면 사탄이 그 사람에게 어려움과 환난을 줍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나중에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좋은 분이 아닌 것 같아요.” 박해나 환난 같은 압박 앞에 결국 뒤돌아서서 떠나갑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씨는 가시떨기 사이에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아 버렸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잠시 동안은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재물의 유혹 때문에 결국 떠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악한 세상 체계를 거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세상을 원하기 때문에 결국 말씀에서 돌아서 버립니다. 그런데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핵심은 이겁니다. 사탄이 매우 분주하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게 하거나, 삶에 압박과 고난을 가하거나, 아예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도록 낚아채 버리는 방식으로, 사탄은 어떻게든 뿌려진 씨가 자라는 것을 막으려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좋은 땅에 떨어지기만 하면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말이죠. 바로 이것이 이 싸움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입니다. 만약 제가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고 믿지 않는다면, 저는 설교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으로 강력한 말씀입니다. 성경은 이 말씀이 영혼을 변화시킨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말로는 악한 영적 세력들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우리가 자신을 지키는 방어 무기이면서, 동시에 사탄의 어두운 나라를 향해 나아가 정복하는 공격 무기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격 무기’로 사용할 때에도, 반드시 구체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혹시 대화를 하다가, 어떤 문제에 대해서 성경이 뭐라고 가르치는지 몰라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던 경험이 있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전도는 하고 싶은데, 질문에 대답을 못할까봐 두려워요. ‘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해야 될까봐요.” 물론 모르실 때는 그렇게 말해도 괜찮습니다. 그런 다음에 찾아보면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효과적으로 진리를 전하려면, 언제든지 필요할 때 말씀을 꺼내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여러분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해 묻는 모든 사람에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월터 마틴(Walter Marti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의 비극은, ‘여호와의 증인’에게 훈련받은 지 90일밖에 안 된 사람이, 30분 만에 그리스도인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비슷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알아야 할 만큼 알지 못합니다. 말씀을 충분히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을 방어하지도 못하고, 공격 무기로 사용하지도 못합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더 많이 알수록, 여러분은 사탄의 나라를 가로질러서 더욱 전진하게 될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탄의 거짓의 핵심을 정면으로 베어 들어가는 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사람들은 로마서 10장 17절을 흔히 이렇게 인용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이렇게 인용하는 이유는 흠정역, 그러니까 킹제임스 성경에 그렇게 번역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은 조금 더 구체적인 사실을 알려줍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라는 표현은 너무 일반적이어서, 마치 성경 어디든 아무 구절이나 읽기만 하면 구원받는 믿음이 생긴다는 의미처럼 들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헬라어 원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데, 그 들음은 레마(rhēma), 그러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구체적인 말씀을 듣는 데서 난다’고 합니다.
믿음은 일반론에서 생기지 않습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체적인 말씀에서 생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듣지 않고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공격할 때도 구체적으로 해야 하고, 방어할 때에도 구체적으로 해야 합니다. 피해자, 희생자로 살아갈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비극 중의 비극은, 오랜 시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왔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이 비할 데 없는 자원을 사용할 줄 모르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성경을 이리저리 더듬어 봤는데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잘 들으십시오. 더 이상 이런 말은 하지 마십시오. 성경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책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내주하시는 진리의 교사를 심어 두셨습니다. 여러분이 성령님의 가르침에 순종하기만 한다면 성령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십니다.
아무도 몰랐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성경 단어들은 너무 어려워서 이해가 잘 안 돼요”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승리를 얻는 데 필요한 만큼 반드시 이해하게 해 주십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저도 이해합니다. 다만 저는 열심히 수고할 뿐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무엇이든지 좋은 결과가 있다면, 많은 노력이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책을 손에 들고 있다고 해서 검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성경 창고를 하나 통째로 가지고 있어도, 방어하는 데에도 공격하는 데에도 사용할 줄 모른다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느냐?” 이렇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삶을 사는 방식이고, 유혹에 맞서는 방식이고, 사역을 대하는 방식입니다.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고상해서(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고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고상함입니다.
마르틴 루터의 전기를 쓴 한 작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루터는 수도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사탄에 의해 어둠 속에 붙잡혀 있었다. 행위로 자신을 구원하려 했다. 금식하고 땀 흘리며 기도했지만, 늘 비참했고 불행했으며 끊임없는 속박 가운데 있었다. 미신적인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터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성경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해방되었다. 그 순간부터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말씀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할수록 로마 가톨릭이 가르치던 오류들을 더 분명히 보게 되었다. 실천 속에 있는 오류를 보았고, 그래서 교회의 개혁에 더욱 마음을 쏟게 되었다. 루터는 모든 일을 성경 해석을 중심으로 진행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위대한 박사들이 루터를 대적했다. 루터는 때때로 홀로 서서 치열한 접전을 벌여야 했지만, 언제나 성경 위에 자신의 입장을 세웠다. 루터는 교회가 성경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교회를 판단하는 기준은 성경이라고 말했다. 홀로 서서 교황 체제와 12세기에 걸친 전통과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잘 들으십시오. 루터가 교황 체제의 박식한 오류 옹호자들 앞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맞서지 않았다면, 종교개혁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미국의 개신교 교부들 역시 정확히 같은 일을 했습니다. 교부들이 반복해서 사용한 무기는 단 하나, 바로 성경 말씀입니다. 청교도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초기 개신교 시대에 청교도들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성경을 가져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왜입니까? 성경이 없으면 검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윌리엄 틴들(Tyndale)은 밭을 가는 모든 농부와 쟁기를 끄는 모든 소년이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게 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또 다른 암흑시대가 생겨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죠. 틴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을 강건하게 만드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주는 것이다.” 바로 이처럼 성경을 정확하게 알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 때문에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성경이 번역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알려지는 것은 필수적인 일입니다. 우리가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성경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H. P. 바커(Barker)는 비유의 달인입니다. 어느 날 창밖을 내다보면서 식물과 꽃들로 가득 찬 정원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나는 그 정원에서 세 가지를 보았다. 첫째로, 나비를 보았다. 그 나비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나비는 한 꽃에 내려앉았다가, 또 다른 꽃으로 날아가고, 또 다른 꽃으로 날아갔다. 한 번에 잠시, 단 몇 초만 머물다가 곧바로 떠났다. 아름다운 꽃에 최대한 많이 앉으려고 했지만,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조금 더 지켜보니 식물학자가 나타났다. 커다란 공책과 함께 아주 큰 돋보기를 들고 있었다. 특정한 꽃 앞에 몸을 숙이고 오랫동안 들여다본 뒤에 공책에 무엇인가를 적었다. 몇 시간 동안 그렇게 관찰하고 기록했다. 그리고 공책을 덮어 다시 팔 밑에 끼고, 돋보기를 주머니에 넣은 채 떠났다. 마지막으로 내가 본 것은 벌이었다. 아주 작은 벌이다. 그런데 그 벌은 꽃 위에 내려앉아 꽃 속 깊이 파고들어, 최대한으로 모든 꽃가루를 모아 갔다. 벌은 매번 빈 채로 들어가서, 가득 찬 채로 나왔다.”
계속해서 H. P. 바커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을 대하는 사람들도 이와 같다. 어떤 사람들은 아름다운 설교에서 설교로, 강의에서 강의로, 여기서 저기로 훨훨 날아다니기만 한다.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기분은 좋을지 모르지만 그것뿐이다. 또 다른 부류는 영적인 식물학자들이다. 이들은 엄청난 양의 공책에 기록하고, 모든 모음 부호가 정확한지 확인하려고 애쓰지만, 꽃 속에서 아무것도 끌어내지 못한다. 순수한 학문을 할 뿐이다. 그러나 또 다른 부류가 있다. 영적인 벌이다. 이들은 모든 귀한 꽃 속에서 거기에 담긴 모든 것을 끌어내어, 주변 사람들을 복되게 하는 꿀을 만들어낸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여러분은 그레이스 교회에 와서 나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강의에서 강의로, 성경 공부에서 성경 공부로, 세미나에서 세미나로, 이 책에서 저 책으로 옮겨 다니면서 예쁜 날개만 퍼덕거릴 수 있습니다. 아무 변화도 없이 말이죠. 혹은 식물학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작은 전함 하나쯤 가라앉힐 만큼의 공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면 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빈 채로 들어가서 가득찬 채로 나와, 삶을 달콤하게 만드는 꿀로 바꾸는 사람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성령의 검은 여러분 앞에 있습니다.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성령의 검을 사용하고 계십니까?
여기 앉아 있는 제 친구 로드니 이야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로드니 이야기를 할 줄 모르고 있을 겁니다. 로드니는 매주 똑같은 자리에 앉습니다. 장애인 특별반에 속해 있는데 얼마 전에 침례도 받았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로드니를 만났을 때 아주 오래 되고 낡은 성경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오늘은 새 성경을 가져왔습니다. 그때는 정말 너덜너덜한 성경을 들고 다녔습니다. 읽을 수 있는 단어가 별로 없어서 아주 조금씩만 읽습니다. 어쨌든 로드니는 성경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자전거를 타고 다니다 보니 종이로 된 성경 겉표지가 계속 상하고 망가졌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제가 로드니에게 “로드니, 새 성경 사 줄까? 필요해?”라고 했더니 “네, 필요해요. 저 성경 필요해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럼 서점으로 같이 가자, 내가 하나 사줄게.” 그래서 데리고 갔습니다. 저는 “로드니, 네가 글을 많이 읽지 못하는 건 알지만, 어떤 성경을 갖고 싶니?”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로드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음… 숫자가 아주 크게 적혀 있는 성경이요. 그래야 목사님이 몇 절을 말씀하시는지 제가 보고 따라갈 수 있으니까요.” 그 말이 제 마음을 찌르듯이 와 닿았습니다. 그래서 로드니는 숫자가 크게 적힌 성경을 지금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제 마음에 몇 분이 떠올랐습니다. 여러분은 성경 속의 모든 개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원리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단지 ‘숫자’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과연 벌처럼 말씀 속에 있는 모든 영양분을 빨아들이고, 그 말씀을 무기로 삼아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승리를 누리고 계십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 말씀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전신갑주 전체가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며 진리의 허리띠와 같으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이시며 우리의 호심경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이 우리의 믿음을 실제가 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이시며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곧바로 이 전신갑주를 받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라고 말한 뒤에 곧이어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라고 했습니다. 제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 모든 전신갑주를 하나로 요약하면, 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입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진실하심으로, 의로우심으로, 평화로, 아버지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확고한 믿음으로, 궁극적인 구원으로, 그리고 살아 있는 말씀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덮여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모든 자원을 실제로 취할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주님, 오늘 이 자리에 원수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서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전신갑주가 없기 때문이죠. 하나님, 바로 오늘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예수님을 입고 전투를 준비하는 그날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또 이 모든 자원을 이미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활용하지 않고, 말씀을 향한 갈망과 목마름과 사모함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진리를 배우는 일에 그저 헌신의 모양만 갖춘 이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책 앞에서 안일해지는 우리를 이끌어 주옵소서. 말씀에 담긴 유용성과 기쁨을 앗아가는 무관심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말씀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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