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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도 에베소서 6장을 함께 볼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6장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의 전신갑주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아주 천천히 그리고 자세하게 살펴보고 있죠. 너무나도 귀하고 놀라운 진리들이 가득 담겨 있기 때문이죠. 주님께서 주신 이 귀한 진리를 여러분과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고 특권인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에베소서 6장을 이렇게 깊이 있게 다루는 시간을 다시 허락해 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가능한 한 꼼꼼하게, 충분히 이 말씀을 다루려고 합니다.

우리는 에베소서 6장 13절부터 17절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에베소서를 마무리하면서, 신자의 영적 전쟁과 승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자원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시작하기에 앞서, 지난 몇 주 동안 다루어 왔던 주제와 관련해서 항상 제기되는 질문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헌신’이라는 주제를 상당히 오래 다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내어드리는 순종의 헌신, 그 헌신의 결단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자신을 훈련하고, 욕망을 통제하고, 그리스도의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병사로서, 전사로서, 주님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의 삶의 자세로 흔히 제시되는 또 다른 관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모든 훈련, 이 모든 절제, 이 모든 싸움, 이 모든 노력을 하나님께서 전혀 원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잠시 이 관점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구약에 여호사밧 왕에 관한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이 말씀은 소위 ‘정적주의자(quietists)’라고 불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의 표어처럼 사용되어 왔습니다. 기독교인의 삶의 방식이 자기 훈련이나 노력이나 헌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어드림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언젠가, 혹은 책을 통해서 “내려놓고 하나님께 맡기라” 이런 말 한번 들어보셨을 겁니다. 실제로 기독교 방송국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는 “내려놓고 하나님께 맡기라” 이런 제목의 프로그램도 있고, “내려놓고 하나님의 놀라운 방식대로 일하시게 하라”라는 찬양도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 쉬는 것, 맡기는 것이 마치 유행인 것 같습니다. 요즘 찬양 중에는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라” 이런 가사가 있죠.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애쓰는 것을 멈추고, 발버둥치는 것을 멈추고, 주님께 맡기십시오. 완전히 맡기십시오. 전적으로 맡기십시오.” 저도 어렸을 때 이런 말을 참 많이 들었습니다. 캠프, 또 집회에 여러 번 참석을 했는데요, 대학 시절에 참석했던 집회에서는 매번 계속해서 강대상 앞으로 나오라고 초청했습니다. 학생들이 마치 요요처럼 위아래로 오르내리며 어떻게든 주님께 맡겨 보려고 애쓰던 모습들이 생각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맡기고 싶어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맡겨야 하는지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마치 강대상 앞에 몰려가서 눈물이 나기 시작할 때까지 무릎을 꿇고 계속 내려놓아야 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런데 그리고 나서 사흘쯤 후에 또다시 죄를 지으면 이런 질문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주님, 주님께 모두 맡겼는데요, 그럼 이 죄는 누구 책임입니까?” 그렇게 되다 보니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이 관점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런 비유를 사용합니다. ‘어두운 방이 하나 있는데, 그 안에는 빛이 전혀 없다. 완전히 깜깜한 상태이다. 그 안에 사람이 있는데 이리저리 더듬으면서 의자를 차기도 하고, 램프에 걸려 넘어지면서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애쓴다. 방이 어두운 이유는 완전히 빛을 차단하는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기 때문이다. 밖에는 햇빛이 가득하고 태양은 환하게 빛나고 있는데, 그 사람은 어두운 방 안에서 계속 비틀거리며 넘어지고 있다. 사실 그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이다. 블라인드를 올리는 것이다. 그러면 햇빛이 자동으로 방 안에 쏟아져 들어와서 어디로 가야 할지 분명히 보인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둠 속에서 비틀거리며 허둥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답니다. 그냥 블라인드만 올리고 앉아서 쉬랍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분명해진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요한복음 15장의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개념을, 구원이 아니라 ‘맡긴다, 내어드린다’의 개념으로 이해합니다. 아마 여러분도 어릴 때 수련회에 가서 예수님께 맡기라고,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라고, 전적으로 맡기라고 권면하는 설교를 들은 적이 있을 겁니다. 그런 내용의 찬양을 부르면서 감정을 고조시킵니다. 가사를 계속 반복해서 부릅니다. 저는 2천 명이 모인 집회에서 25절이나 되는 찬양을 부르면서 내려놓음을 촉구하던 집회를 기억합니다. 여러분도 저처럼 그런 경험이 있을 겁니다. 어떤 수련회에 갔는데 한 주가 끝날 무렵 한 친구가 완전히 좌절했습니다. 한 주 내내 맡기라는 설교를 너무 많이 들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맡겨야 하는지를 몰라서 완전히 지쳐버린 겁니다. 그 친구는 결국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내 시간을 주님께 드리는 거야.’ 맡겨드리는 삶의 상징으로 나무 막대를 불에 던지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앞으로 나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제 시간을 주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는 손목시계를 풀어서 불 속에 던져 버렸습니다. 좌절감이 그대로 표현된 겁니다. 사실 지혜로운 행동은 아닙니다. 시계를 불에 던지는 것은 청지기 정신에도 어긋나는 일입니다. 맡겨드린 게 아니라 그만큼 막다른 지점에 다다랐던 겁니다. 삶을 드리라는 말을 끊임없이 들었으니 어떻게든 그렇게 해보려고 정말 죽도록 애쓰고 있었던 거죠.

이 ‘드린다, 맡긴다’는 말에 대한 오해가 얼마나 많은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우리 교회가 지금의 본당이 아니라 가족 센터에서 예배드릴 때 있었던 일입니다. 성가대가 찬양을 하고 있었고, 저는 새로운 음향 장비가 어떤지 한번 들어봐 달라고 해서 뒤쪽에서 듣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여성 성도분이 개를 끌고 들어오셨습니다. 이런 일은 흔치 않기 때문에 교회 규정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안내를 담당하시는 분이 잠시 멈칫하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개는 스웨터를 입고 있었고요, 반짝이는 목걸이를 하고, 멋진 줄에 묶여 있었습니다. 저는 안내 담당자분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려고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그 여성은 보기에 정말 여러 가지로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필수적인 부분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어쨌든 개를 데리고 들어오자 안내를 담당하시는 분이 깜짝 놀라서 다가가서는 “개를 데리고 들어오시면 안됩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그 아주머니가 아주 점잖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괜찮아요. 우리는 기도실로 가는 중이에요. 이 아이가 방금 주님께 다시 삶을 드렸거든요.” 저는 그 순간 정말 경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침례교회에서 자라서, 제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거였습니다. “저 개가 구원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지?” 어쨌든 이 말에 드러나는 것은, 삶을 드린다는 말이 그 아주머니에게는 그저 개를 기도실에 데려가는 것과 동일한 의미밖에 안 된다는 겁니다. 이 개념이 얼마나 잘못 사용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좋은 예시입니다.

어쩌면 여러분 중에는 제가 아는 사람들처럼,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 내내 주님께 맡기려고 애쓰던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전혀 낯선 일이 아닙니다.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사실 예전에 이런 찬송가가 있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얻는 거룩함, 나의 노력이 아닌.” 그런데 “내려놓고 하나님께 맡기라”라는 말을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그냥 멈추고, 힘을 빼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하곤 합니다. 이 관점을 옹호하던 C.H.A. 트럼불(Trumbull)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완전히 내려놓게 되면,” 들어보십시오, “유혹조차 경험하지 않게 될 것이다. 유혹과 맞서 싸우기도 전에 그리스도께서 이미 물리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짓는 죄는 도대체 누구 책임이 되는 겁니까? 결국 그 책임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는데,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죠. 내려놓음이라는 개념은 한나 스미스(Hannah Smith)가 쓴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비밀(The Christian’s Secret of a Happy Life)>이라는 책에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위대한 사역에서 인간의 몫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자신을 계속해서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맡으신 일을 얼마나 다양하고 놀라운 방식으로 이루시겠는가? 바로 여기에서 성장이 일어난다.” 다시 말해서, 한나 스미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영적으로 성장하고 싶다면, 아무것도 하지 말고 내려놓기만 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랍니다. 또 이런 비유를 듭니다. “진흙 덩어리가 수천 년 동안 진흙 구덩이에 그대로 놓여 있다면, 결코 아름다운 그릇으로 빚어질 수 없다. 그러나 숙련된 토기장이의 손에 들어가면, 토기장이가 의도한 그릇으로 빠르게 빚어진다. 이와 같이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자신을 맡긴 영혼은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고 거룩하게 된 그릇으로 빚어진다.” 말은 참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저 토기장이의 손에 들린 진흙에 불과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빚고 계신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그 손에서 빠져나와 죄를 지을까요? 진흙이 갑자기 “아, 이제 이 거래는 끝이야”라고 말하면서 토기장이의 손에서 뛰쳐나와서 스스로 원하는 모양을 만들고 제멋대로 행동한다는 말입니까? 솔직히 말해 이 비유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한나 스미스가 그리스도인을 부드러운 진흙으로 만들어 놓고, 다음 순간에는 그 진흙이 토기장의 손에서 뛰쳐나와서 자기 마음대로 행동합니다. 참 이상한 진흙입니다.

요점은 이겁니다. 기독교인의 삶에는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식 이상의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결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식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인생의 어느 한 시점에서 단지 내려놓기만 하면 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잘못된 가르침을 따라 해보고 또 해보고 계속 해봤습니다. 제가 결코 잊지 못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제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자기가 다니던 교회에서는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라, 계속 강대상 앞으로 나오라고 하고, 통로를 따라 앞으로 나와서 맨 앞에 무릎을 꿇고 내려놓기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는 겁니다. 그 모든 몸짓과 애쓰는 모습을 목회자가 지켜보다가 마침내 이렇게 말했답니다. “형제님, 끝까지 기도하십시오. 끝까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끝까지요.” 그리고는 회중한테도 “여러분, 이분이 끝까지 기도할 수 있도록 붙들어 줍시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국 그 사람은 벌떡 일어나 뒤돌아서서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답니다. “젠장, 도저히 못 하겠다 더는.” 그리고는 그대로 나가버렸답니다. 아주 크게 좌절한 거죠. 도대체 무엇을 내려놓으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맡기려고 애쓰면서 그 외에 다른 요소들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에 바로 이런 좌절이 생깁니다.

물론 저는 하나님의 자원에 의존해야 한다는 데 동의합니다. 하나님의 힘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한다는 데 동의합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비성경적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제가 헌신을 강조하고, 자기 훈련하는 기독교인의 삶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면서도 육신을 복종시키는 문제를 강조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불편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10절을 보십시오.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여기에서 “내려놓음”이라는 단어를 찾을 수 있는지 한번 보세요. 우리는 원수와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여기 어디에 내려놓음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훈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헌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지는 기독교인의 삶이 전쟁이라는 점입니다. 히브리서 12장은 기독교인의 삶을 경주에 비유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싸움이라고 합니다. 디도서 3장 8절은 선한 일에 힘쓰라고 합니다. 야고보서 4장과 베드로전서 5장은 마귀를 대적하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은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하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5장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라고 합니다. 빌립보서 3장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라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7장 1절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고 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그저 쓰러지듯이 넘어지면서 “하나님이 알아서 해 주세요” 이렇게 말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은 너무 순진한 접근입니다. 이런 식으로 주장했던 정적주의자들이 한편에 있는가 하면, 또 다른 한쪽에는 반대로 모든 것을 육체의 힘으로 해내야 한다고 주장하던 경건주의자들, 율법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중간에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합니다. 하나님의 권능 안에서 쉼을 얻습니다. 포도나무이신 주님 안에 거합니다. 하나님의 자원을 의지합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라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신앙생활에는 엄청난 헌신, 강한 자기 절제, 그리고 자기 훈련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마귀와 싸우기 위해서 우리가 가진 모든 힘을 다해 살아가려고 헌신해야 합니다. 단순히 “맡긴다”는 이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이야기입니다.

이제 그 균형점을 베드로후서 1장을 통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3절입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광과 덕으로써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이미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에게는 부족한 자원이 전혀 없습니다.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어디에서 받았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서입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원이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3절에서는 ‘신기한 능력’, 곧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4절을 보십시오. 그 신기한 능력을 통해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엄청난 약속입니다. 엄청난 능력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약속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능력과 약속을 받아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리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내 능력이다. 이것이 내 약속이다. 내 성품에 참여하라.” 기독교인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자원은 실로 크고 풍성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멘, 이제 저는 그냥 하나님께 맡기겠습니다. 다 내려놓고 하나님께 맡기겠습니다. 예수님께 다 넘기고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말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어지는 5절을 보십시오.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하라고 말합니다. 애쓰랍니다. 훈련하랍니다,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할 일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직접 행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인의 삶은 단지 복도를 걸어 나와서 한 번 내려놓고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분명 여러분의 삶 속에 있어야 할 헌신이 맞습니다.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 반드시 헌신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자원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거기서부터 시작입니다.

로마서 6장을 보면 너희 지체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로마서 6장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육신의 행실을 죽이는 일, 곧 육신의 일을 죽이는 싸움도 함께 나옵니다. 따라서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에베소서 6장의 진리를 선포하는 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분명히 양쪽 모두 말합니다. 이제 잠시 빌립보서 2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여기에도 양쪽이 모두 나옵니다. 빌립보서 2장 12절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 구절의 핵심 단어는 ‘복종’입니다. 복종하는 삶을 통해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13절을 보십시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뜻을 세우시고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복종함으로써, 순종함으로써 그 뜻을 이룹니다. 바로 이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시고, 여러분은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룹니다. 이것이 균형입니다. 하나님도 일하시고, 여러분도 일합니다. 골로새서 1장 29절을 보십시오. 아마도 이 균형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일 겁니다. 골로새서 1장 29절입니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수고한다. 힘써 일한다. 그러나 내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따라 수고한다. 나도 일하고 하나님도 일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내려놓음’만 강조하는 것이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겁니다. 기독교인의 삶에는 자기 훈련에 대한 헌신, 부지런한 순종에 대한 결단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만일 “내려놓고 하나님께 맡기라”가 전부라면, 신약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권면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만일 모든 것이 주님의 몫이라면, 그 권면들은 우리에게가 아니라 주님께 주어졌어야 할 겁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 자신을 내어맡기는 태도와, 순종을 끝까지 실행해 나가기 위한 자기 삶의 철저한 훈련과 헌신 사이에는 분명한 균형이 있습니다. 이제 한 구절만 더 보면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 4절입니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오직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사실을 삶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놀라운 점이 보이십니까? 이 안에는 놀라운 결합이 있습니다. 많이 견디는 것, 이 부분은 우리의 태도입니다, 환난, 궁핍, 고난, 매 맞음, 갇힘, 난동, 수고로움, 자지 못함, 먹지 못함, 깨끗함, 지식, 오래 참음, 자비함, 우리가 실제로 살아내야 하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책임져야 할 영역입니다. 그런데 그 근원이 무엇입니까? 성령의 감화, 거짓이 없는 사랑, 진리의 말씀, 성경이죠, 하나님의 능력, 의의 무기입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원입니다. 두 요소가 완벽하게 어우러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의지하면서 동시에 온 힘을 다해 헌신해야 합니다. 바로 이겁니다.

이제 이런 관점을 가지고 다시 에베소서 6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은 성경의 다른 어떤 부분과도 모순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신앙 성장 과정 중에 “그저 맡기기만 하면 된다”고만 가르쳤던 사람들이 있었다면, 핵심을 놓친 겁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훨씬 더 많은 것을 포함합니다. 과거에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기독교인이 성장하는 유일한 방법은 완전히 맡기고 뒤로 벌러덩 넘어져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이죠.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순종의 행동을 통해, 자기 절제와 헌신으로, 매일의 삶 속에서 부지런히 노력함으로써 성장한다고 말합니다. 노력 없이는 성장도 없습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할 때 성장합니다.

이제 다시 전신갑주를 살펴봅시다. 전신갑주를 입기를 주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상황을 충분히 파악하셨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전쟁 한복판에 있습니다.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최대의 헌신과 최대의 노력을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진리로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17절에 이르면 “구원의 투구를 가지라”라고 말합니다. 지난주에 바로 여기서 멈췄죠.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구원의 투구란 무엇입니까?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구원받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이 구원받지 않았다면 진리의 허리띠도, 의의 호심경도,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신도, 믿음의 방패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번주에 텔레비전에서 제가 이 본문에 대한 설교를 들었는데, 그 목사님은 “구원의 투구란 구원받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은 다섯번째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처음에 받는 것이죠. 제가 지난주에도 말했듯이, 우리는 에베소서 2장에서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6장입니다. 우리는 이미 네 장 동안 구원받은 상태로 살아왔습니다. 구원의 투구는 단순한 구원의 행위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군대 안에 있습니다. 그 자체가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투구란 무엇입니까?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구원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성경이 말하는 유일한 구원의 정의입니다. 성경에는 과거에만 유효한 구원, 현재에만 유효한 구원, 미래에 가서야 알 수 있는 구원, 이런 구원은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오직 하나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포함하는 삼차원적 구원입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고, 지금도 구원받아 가고 있고, 장차 구원받을 것입니다. 과거에는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받았고, 현재에는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받고 있고, 미래에는 죄의 존재로부터 완전히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반드시 이 세 가지 차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특별히 ‘미래의 구원’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구원의 투구는 과거를 다루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현재만을 다루는 것도 아닙니다. 미래를 다룹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핵심입니다. 미래의 구원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확신이 사탄이 휘두르는 대검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줍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 사탄은 아주 큰 칼, 대검을 가지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롬파이아(rhomphaia)라고 부르는 칼인데, 양쪽으로 날이 서 있습니다. 한쪽 날은 낙심이고, 다른 한쪽 날은 의심입니다. 사탄은 이 낙심과 의심으로 여러분을 내리치려 합니다. 그때 여러분을 보호해 주는 것이 바로 구원의 투구입니다. 낙심이 될 때에는 장차 올 큰 영광의 날을 기억하십시오. 승리의 축제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할 때에는, 낙심하지 않으면 거두리라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언젠가는 반드시 상이 주어질 날이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언젠가는 면류관을 받는 날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언젠가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마주하시며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렇게 말씀하실 날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날이 반드시 옵니다. 전투가 길어짐에 따라서 지쳐갈 때에, 끝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 사탄이 낙심으로 여러분을 내려치려 할 때, 승리의 그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결승선이 있습니다. 종료 총성이 울릴 날이 있습니다. 시간이 끝나는 순간이 옵니다. 우리는 그 영광스러운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투구란 미래에 대한 확신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는 “구원의 소망의 투구”라고 합니다. 그런데 구원의 투구는 동시에 현재를 살아갈 힘도 줍니다. 상황이 아무리 힘들어도 버티고 나아갈 힘을 줍니다. 결승선이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상이 있습니다. 끝이 보입니다. 면류관을 쓸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눈물의 골짜기를 떠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 안으로 들어갈 때, 육신이 벗겨지고, 더 이상 죄도 없고, 더 이상 싸움도 없고, 더 이상 전쟁도 없는 그때가 올 것입니다. 우리는 영광스러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날은 반드시 옵니다. 그날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려면 지금 온전히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사탄이 전쟁 한가운데서 낙심으로 여러분을 공격할 때, 승리의 그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기억하고 포기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 있으라고 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듯이, 만일 구원에 미래의 차원이 없다면 나머지 두 차원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이미 구원받았고 지금도 구원받아 가고 있다고 해도, 미래가 없다면 왜 계속 이 길을 가야 합니까? 미래가 없다면 왜 이렇게 힘들게 싸워야 합니까? 구원의 충만함과 최종적인 완성이 없다면, 이 모든 노력은 무엇을 위한 겁니까? 고린도전서 15장 32절에 아주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바울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말이죠.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잘 들으십시오. 만일 우리의 신앙에 미래가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에베소의 박해가 너무 심해서 맹수와 싸워야 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부활이 없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아무 데도 이르지 못하는 구원이 무슨 구원입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미래가 없다면, 왜 생명을 걸고 들짐승 앞에 서야 합니까? 부활도 없고 구원의 미래도 없다면, 왜 적대적인 이방인들 앞에 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까? 그런 구원이라면 저는 당장 포기할 것입니다. 백기를 들고, 싸움도 접고, 돌아서서 이게 끝이라고 말할 겁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요지입니다. 미래가 없는 구원은 오늘의 싸움을 감당하게 하는 능력도 줄 수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6절을 보십시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삼으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에 두셔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비추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 보배가 무엇입니까? 우리 삶 속에 있는 하나님의 빛, 곧 그리스도의 빛입니다. 우리는 그 보배를 이 질그릇 같은 몸 안에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의 지극히 큰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졌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는 그리스도를 세상으로 가지고 나아갑니다. 능력이 주어졌습니다. 빛이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11절을 보십시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잘 보십시오. 바울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역이란 이런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매력적인 길처럼 들리십니까? 어디를 가든지 환난과 박해가 있고, 넘어뜨림을 당하고, 몸에는 주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며, 늘 죽음의 경계에 서 있고, 누군가는 항상 우리의 생명을 노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날마다, 매일매일, 하나님을 모르는 적대적인 세상과 맞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바울, 왜 그렇게까지 합니까? 왜 그렇게까지 애쓰며 다닙니까?” 그 이유를 14절이 말해줍니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잘 들으십시오. 바울이 그렇게 수준 높은 헌신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언젠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가운데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 때문입니다. 구원의 미래적 차원이 현재 삶을 살아가게 하는 강력한 힘이 됩니다. 언젠가 저는 예수 그리스도와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설 것입니다.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 제가 한 일의 기록 앞에 설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또한 영원한 생명의 충만함과 그 모든 영광을 알고자 하는 갈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짧은 눈물의 골짜기 같은 인생,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 한 줌의 생명을 허락하시는 동안에, 제가 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짧은 몇 해를 최대한으로 사용해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영원 속에서 영화의 충만함을 누리고 싶습니다. 그렇기에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낙심하지 않으면 영광스러운 상을 거둘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투구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다가와 낙심의 말로 저를 흔들 때, “이제 설교를 좀 그만 쉬어. 잠시 쉬어도 괜찮아. 그렇게까지 공부하지 않아도 돼. 몇 가지 생각만 정리해서 재미있는 이야기나 해. 사람들은 차이를 못 느낄 거야. 좀 편하게 하라고” 이렇게 말할 때에, 사역 가운데 열심히 애써 왔던 일들조차 버겁게 느껴질 때에, 사탄이 “사역이란 참으로 낙심되는 일이야. 사람들은 너를 알아주지도 않잖아. 교회도 네가 바라는 모습이 아니고, 네가 기대한 대로 움직이지도 않잖아. 이제 그만두는 게 낫지 않겠어?” 이렇게 속삭일 때, 그럴 때에도 우리는 버텨야 합니다. 왜냐하면 면류관의 날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책임의 날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아질 날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확실히 누리기 위해 지금을 최선으로 살아가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을 움직이게 했던 힘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움직여야 할 힘입니다. 바울은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알기 때문에 그렇게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낙심의 칼, 그 낙심의 날로 우리의 삶을 치려 할 때, 우리는 굳게 서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으로 보호를 받습니다.

두번째가 있습니다. 사탄의 칼에 또 하나의 날이 있습니다. 낙심이 아닙니다. 의심입니다. 어쩌면 의심이야말로 궁극적인 낙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탄은 여러분이 구원을 의심하도록 만들고 싶어합니다. 아주 능숙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앙생활의 어느 시점에 가면, 특히 초기에 이 문제로 고통을 겪습니다. 말씀 안에서 자라면 그런 의심이 덜할 수는 있겠지만, 사탄의 이 시험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탄은 여러분이 죄를 지은 직후에 다가와서 이렇게 말하고 싶어합니다.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야. 그리스도인일 리가 없어. 하나님이 너 같은 사람을 구원하시겠어? 너는 충분히 선하지도 않잖아. 구원받을 자격도 없어. 그때 네가 정말 진심이었는지 어떻게 알아? 다시 한 번 해 봐. 이번에는 좀 더 잘될지도 모르잖아?” 사탄은 바로 이렇게 의심으로 사람들을 집요하게 공격합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런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늘 불안 속에서 살아가죠. “목사님은 영원히 안전하십니까?”라고 물으십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성경이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믿지 않는 단 하나는 ‘영원한 불안’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늘 그런 상태로 살아갑니다. 끊임없는 불안 속에서 말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주님 앞에 설 때가 되어서야 네가 구원받았는지 알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들으십니다. 여러분, 그런 삶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평생을 살면서 “내가 과연 구원을 받았을까? 이제 가까워지는데, 내가 정말 구원받았을까?” 이렇게 의심하며 사는 삶 말입니다. 얼마나 끔찍합니까?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라는 말씀과는 아주 정반대이죠. 차라리 신약성경은 “우리가 이것을 씀은 너희로 비참하게 살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말해야 할 겁니다. 모든 것이 추측이라면 결코 기쁠 수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죄를 지을 때마다 구원을 잃는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텔레비전에서 한 남자를 본 적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전화를 걸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떤 죄를 지었는데, 휴거가 오기 전에 그 죄를 고백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자 그 상담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옥에 갑니다.” 여러분, 그런 두려움 속에서 사는 삶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사탄은 우리가 구원받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두려워하게 만들고 싶어합니다. 사탄은 우리가 구원을 의심하게 만들고 싶어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게 만들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지키지 않으신다고 믿게 만들고 싶은 겁니다. 구원이 영원하지 않다고 믿게 만들고 싶은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드실 수 없다고, 하나님의 능력과 자원을 부정하게 만들고 싶은 겁니다. 하나님이 진실을 말씀하지 않으신다고 믿게 만들고 싶은 겁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죠. 그래서 사탄은 우리를 의심으로 공격합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구원의 투구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만약 여러분에게 과거의 구원이 있다면, 여러분에게는 미래의 구원도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 바로 그겁니다. 다른 구원은 없습니다. 칭의와 성화와 영화가 하나로 묶인 구원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잃어버리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제 성경을 거슬러 올라가서 요한복음 6장을 보면서 이 점을 분명히 하겠습니다. 이 한 가지만 짚고 마치겠습니다. 다음주에는 검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요한복음 6장 37절은 매우,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게 오는 자를 결코 내쫓지 않는다. 여기서 ‘결코’라는 말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 어떤 조건에서도, 그 어떤 경우에라도’라는 뜻입니다. 이 우주 안에 존재하는 그 어떤 상황도, 그리스도께로 온 사람을 그리스도께서 내쫓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로 오면, 그 어떤 경우에도, 그 어떤 조건에서도, 결코 내쫓지 않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는 자들은 모두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리스도께 주셨다는 것은 영원한 구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작정에 그리스도께서 응답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잃어버릴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기뻐하시며 상을 주시는 분과 같고, 아들은 십자가에 가서 구속을 이루심으로써 그 일을 잘 감당하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선물을 주시는데, 그 선물은 참으로 귀한 것이다. 바로 사람들의 영혼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우리 모두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선물이다. 아버지의 사랑의 표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이런 선물을 주신다.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를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아버지께서 주신 이처럼 귀한 선물들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으신다.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은 반드시 오고, 일단 오면 어떤 경우에도 내쫓지 않는다.’ 왜입니까? 여러분 때문이 아닙니다. 여러분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 그림의 중심에 여러분은 없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사랑의 선물로 주신 사람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 모든 것은 삼위 하나님 안에서 완전히 묶여 있는 진리입니다.

이제 다음 절인 38절을 보십시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주님은 처음부터 아버지의 계획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을 구속하여 아들에게 주시고, 아들이 끝까지 지키게 하는 계획이었습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이 무엇입니까?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예수님께서 몇 명이라도 잃어버리시겠습니까? 아무도 잃어버리지 않으십니다.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으십니다. 단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으십니다. 아버지의 작정과 아들에게 주심과 마지막 날의 완성 사이에 버려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칭의와 성화와 영화, 곧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구원이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변경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부르심은 취소될 수도 없으며, 우리의 기업은 더럽혀질 수 없고, 하나님의 기초는 흔들릴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인침은 깨뜨려질 수 없고, 하나님이 주신 생명은 멸망하지 않는다. 성경은 일관되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이제 잠시 요한복음 10장 27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영원히 붙들려 있는 이유가 일곱 가닥의 줄처럼 제시되어 있습니다. 구원을 유지하는 일곱 가지 위대한 진리입니다. 첫째, 27절입니다. “내 양은.” 여기서 멈춥시다. 여러분은 누구의 양입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양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양이라면, 목자로서 여러분을 돌보고 보호하는 것은 예수님의 책임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여러분을 잃어버리신다면, 사실상 목자로서의 능력과 성품에 대한 모독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양이 목자의 책임 아래에 있다면, 한 마리라도 잃어버린다는 것은 목자의 자질 문제로 귀결됩니다. 이것이 첫 번째 가닥입니다. 둘째 가닥은 이것입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그리스도의 양들은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외란 없습니다. 낯선 자의 음성은 듣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음성만 듣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위대한 목자의 능력으로 보호를 받는다는 것이 첫째 가닥이고, 둘째는 양들이 반드시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죄로 넘어질 수는 있어도, 결국 따릅니다. 셋째는 28절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생은 얼마나 지속될까요? 영원히입니다. 영생은 끝이 없는 생명입니다. 끝난다고 말하는 순간에, 영생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 됩니다. 영생은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자의 성품에 의해서, 양의 본성에 의해서, 그리고 영생이라는 선물의 정의 자체에 의해서 주님께 굳건히 붙들려 있습니다. 넷째로, 선물입니다. “내가… 주노니.” 여러분이 얻어낸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켜내야 할 것도 아닙니다. 선물입니다. 다섯째 가닥은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라는 약속입니다. 만약 단 한 명의 그리스도인이라도 멸망한다면, 그리스도는 진실을 말씀하지 않으신 겁니다. 그렇다면 성경 버려야죠. 기독교는 거짓이 됩니다. 여섯째 가닥은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입니다. 우주 안에 하나님보다 강한 존재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붙드시면, 그대로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29절입니다.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예수님이 28절에서는 “내 손”이라고 하시고, 29절에서는 “내 아버지의 손”이라고 하십니다. 이중 보호죠. 제가 요한복음에 나오는 이 두 본문을 통해 보여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의 말씀으로, 과거의 구원이 반드시 미래의 구원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증하십니다. 영생은 말 그대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결코 멸망하지 않습니다.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잃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구원을 말씀하시는 방식입니다. 로마서 8장 38절에 이르러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이죠.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지금이든 미래이든, 이 우주 안의 그 어떤 것도 신자를 그리스도에게서 떼어 놓을 수 없다.’

빌립보서 1장 6절도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구원의 과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셨습니다. “…그 일을 이루실 줄을 확신하노라,” 현재이죠. 하나님께서 지금도 계속 이루고 계십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미래입니다. 이 한 절 안에 구원의 세 요소,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두 묶여 있습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신약성경의 끝에서 두 번째 책, 유다서를 함께 보겠습니다. 여기서 아주 강력한 두 구절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유다서 전체를 간단히 개관하자면, 이 책은 배교, 그러니까 믿음에서 떠나는 일들을 다루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주된 관심사는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교사들의 사악한 성품입니다. 4절을 보면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는데, 본질적으로 정죄받기로 작정된 자들입니다. 경건하지 않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으로 바꾸는 사람들입니다. 8절에서는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라고 하고, 11절에서는 탐욕으로 예언하는 자들을 언급합니다. 12절에서는 “그들은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라고 합니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정욕에 불타는 경건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배교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오늘날 우리와도 크게 다르지 않은 배교의 시대 속에서 살아가는 신자들의 작은 공동체가 있습니다. 사실 저는 지금 유다서를 바탕으로 <배교의 시대에 살아남는 법(How to Survive in the Days of Apostasy>이라는 책을 집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핵심은 이겁니다. 사악하고 거짓된 가르침이 난무하고, 교회가 부패하고 기초가 썩어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가운데에서도, 신자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흐름에 휩쓸려 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사회 전반이 무너져 내리고,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온갖 쓰레기들이 우리를 밀어내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묻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우리도 결국 쓰러지는가?”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유다는 서론인 1절과 결론인 24절과 25절에서,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시대가 아무리 악해져도, 주변이 아무리 타락해도, 우리는 안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더 정확한 번역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지키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헬라어 동사는 테레오(tēreō)인데, ‘지키다, 보호하다, 보존하다’ 이런 뜻입니다. 성경 밖에서는 ‘보증하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보증을 주셨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성령의 보증, 약혼 반지이자 계약금이며 보장인 성령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았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장차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영화롭게 될 것에 대한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 11절, 15절에서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들을 악한 자에게서 지켜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기도는 반드시 응답됩니다. 아버지께서 신자를 지키십니다. 유다가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겁니다. 여러분은 거룩하게 구별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보호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투구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네가 정말 그리스도인인지 증명해 봐” 이렇게 의심을 던질 때에, 그 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이 확신의 기초가 흔들리면, 담대할 수 없습니다. 확신이 없다면, 첫째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도 있고, 둘째로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사탄에게 심하게 흔들리고 있는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다시 구원의 투구를 쓰셔야 합니다.

유다서 24절을 보십시오. 여기에서도 같은 진리가 다시 나오는데, 더 길고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여기서 ‘능히’라는 말은 능력, 권능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거침이 없게, 넘어지지 않게 하실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단지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넘어지지 않기를 원하신다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넘어지지 않게 막아 내실 수 있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넘어지지 않게 지키실 수 있고, 또 여러분을 흠 없게, 아모모스(amōmos), 그러니까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자로 하나님 아버지 앞에 세우실 수 있습니다. 참고로 이 단어 ‘아모모스(amōmos)’는 베드로전서 1장 18절부터 19절에서 예수님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실족하지 않게 지키시고, 장차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순결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세우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리스도의 지키시는 능력이죠. 얼마나 놀라운 확신입니까. 그리고 여기서 헬라어 동사는 앞에서 사용된 테레오(tēreō), 그러니까 ‘지켜보다, 보호하다’라는 단어가 아니라, 풀랏소(phulassō)라는 단어입니다. 공격이 벌어지는 가운데서 안전하게 지켜낸다 이런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옥의 모든 세력이 여러분을 향해서 화살을 쏘아댄다고 해도,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넘어지지 않게 지키시고, 예수 그리스도만큼이나 흠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세우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니 시편 기자가 확신에 차서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라고 말한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시편 기자는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이 과거, 현재, 미래를 포함하는 구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반드시”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 평생에 따를 것이고, “결국”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서 바울도 영광스러운 축도를 합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저는 이 말이 참 좋습니다.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바울은 말합니다. 이 위대한 축도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흠 없게 보전하시고,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신실하시기에 반드시 이루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이 던지는 의심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전신갑주는 구원이 과거와 현재뿐 아니라 미래까지 확실하다는 확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능력의 손으로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히브리서 6장 16절부터 19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두 가지 변하지 않는 것, 절대로 바뀌지 않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약속과 그리스도의 맹세입니다. 이 두 가지가 믿는 자의 영혼을 영원히 붙들어 주는 닻이 됩니다. 히브리서 6장 16절부터 19절 전체가 그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확신이 우리가 사탄의 공격을 막아내는 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탄이 낙심을 들고 올 때, 의심을 들고 올 때, 영광의 날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십시오. 승리의 날이 오고 있다는 그 진리를 붙드십시오. 선한 싸움을 싸우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구원에 대해 확신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그 면류관의 날에 반드시 설 것을 아십시오. 위대한 찬송가 <교회의 기초>의 가사입니다. “노동과 환난 가운데, 전쟁의 소란 속에서도, 교회는 영원한 평화의 완성을 기다리네. 영광스러운 환상을 보게 될 그날까지, 승리한 교회는 결국 안식하는 교회가 되리라.” 안식의 날이 옵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전쟁 중입니다. 지금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안식은 승리 이후에 옵니다. 또 하나 잘 알려진 찬송가도 이렇게 말합니다. “일어나라, 예수 위하여. 싸움은 오래가지 않으리. 오늘은 전쟁의 소리, 내일은 승리의 노래. 이기는 자에게는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왕과 함께 영원히 다스리리라.” 마지막으로 존 번연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어떤 흉악한 귀신도 그의 영을 꺾지 못하리. 끝에 가서 생명을 얻을 줄 아노니, 헛된 상상은 모두 날아가 버리고, 사람들의 말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밤낮으로 수고하여 참된 군사가 되리라.” 존 번연은 베드포드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곳에서 번연은 싸우되 결코 지치지 않겠다고 결단했습니다. 낙심과 의심의 공격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언젠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그 영광의 날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번연은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인 천로역정을 써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사탄이 낙심과 의심으로 여러분을 짓누르지 못하게 하십시오. 왜냐하면 결국 여러분은 승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금, 구원의 투구를 계속 쓰고 계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오늘 아침 우리에게 주신 이 귀한 시간에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친히 말씀하여 주옵소서. 여러분, 잠시 고개를 숙이고 계시는 동안에 제가 잠깐 안내 말씀을 드립니다. 제 오른편 앞쪽에 기도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조용히 묵상하시는 이 시간에, 혹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어떤 결단을 주신다면,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신 분이 계시다면, 혹은 그리스도를 알고 있지만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있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또는 교회를 찾고 계시거나 마음 속에 깊은 질문이 있는 분이 계시다면, 오늘 이 시간을 그냥 지나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마치고 예배가 끝나더라도 바로 나가지 마시고, 앞으로 나오셔서 제 오른편에 있는 나무문을 지나서 기도실로 들어오십시오. 여러분과 함께 기도하고, 또 대화도 하고, 필요한 자료도 나눠드리겠습니다. 오늘이 여러분의 인생이 바뀌는 날이 될 수 있습니다. 앞쪽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용기를 내셔서 나오시길 바랍니다.

주님, 오늘 이 아침에 주님께서 부르시고자 하는 분들을 친히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오늘 저녁에도 이혼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꼭 들어야 하는 분들을 이끌어 주옵소서. 이 귀한 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가 이 싸움을 신실하게 끝까지 싸우도록 도와주시고, 그 승리가 주님의 것이 되며, 영광과 존귀가 주님께만 돌아가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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