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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도 에베소서 6장을 보겠습니다.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인의 전신갑주에 대한 놀라운 말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6장 10절부터 17절까지 읽습니다.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우리는 에베소서에서 그리스도인의 영적 전쟁에 대해 가장 명확하게 설명해주는 위대한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동안 에베소서 4장 1절부터 시작해서 “그리스도인의 행함”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합당하게 행하라”는 말씀을 보고 나서, 그 ‘합당한 행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았죠. 먼저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는 것, 이방인들과 구별된 삶, 곧 독특함 속에서의 행함이었습니다. 5장에서는 사랑 안에서 행하는 것, 빛 가운데서 행하는 것, 지혜롭게 행하는 것, 성령 안에서의 행함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6장에서는 전쟁에서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지금 배우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전쟁입니다. 우리는 원수와 전쟁 중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본문을 통해 계속 보고 있듯이, 전쟁을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낙심하거나 체념할 이유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승리는 이미 우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잠시 로마서 8장 31절을 보겠습니다. 로마서 8장 31절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우리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신 하나님께서 이 싸움에서 승리하는 데 필요한 능력을 모두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우리를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가장 높은 재판장이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셨다면, 과연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34절을 보십시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정죄하시겠습니까? 요지는 이겁니다. 하나님이 가장 높은 재판장이시고, 그리스도께서 가장 위대한 심판자이신데,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셨다면, 누가 우리를 정죄하겠냐, 누가 감히 우리를 고발할 수 있겠느냐? 이겁니다. 답은 분명합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35절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어떤 모든 일입니까?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 종일 죽임을 당하는 것,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우리는 단순한 승리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넉넉히 이기는 자입니다. 초월적인 승리자입니다.

넬슨 제독(Admiral Nelson)은 트라팔가(Trafalgar) 해전의 승리를 영국으로 전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장면을 묘사하기에 ‘승리’라는 말조차 충분하지 않다.”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승리를 넘어서는 승리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57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 뜻입니다. 또 고린도후서 2장 14절에서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라고 말한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요한이 요한일서 5장 5절에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라고 말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기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승리하고 있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승리했습니다.

보십시오. 로마서 8장, 고린도전서 15장, 고린도후서 2장, 요한일서 5장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이미 승리자입니다. 적수가 없습니다. 넉넉히 승리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체 그림, 곧 우리의 지위와 궁극적인 전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매일 일어나는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에베소서 6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 두신 전신갑주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죠. 전신갑주를 취할 때, 우리는 날마다 매일 이어지는 삶 속에서 넉넉히 이기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단지 싸움에서 이기는 데 그치지 않고, 전리품을 취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승리를 선언하는 것을 넘어서, 패배한 원수가 소유하던 모든 것을 상속받는 자리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역대하 20장에서 여호사밧은 이스라엘을 이끌고 위대한 승리의 축제를 벌입니다. 이 장면은 오늘 살펴볼 내용에 아주 잘 어울리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역대하 20장 22절입니다. 이스라엘이 전장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데, 22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흥미롭지 않습니까?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 산 주민들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주민들을 멸한 후에는 그들이 서로 쳐죽였더라.”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원수들이 서로를 죽이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화살 한 발도 쏘지 않았습니다.

“유다 사람이 들 망대에 이르러 그 무리를 본즉 땅에 엎드러진 시체들뿐이요 한 사람도 피한 자가 없는지라 여호사밧과 그의 백성이 가서 적군의 물건을 탈취할새 본즉 그 가운데에 재물과 의복과 보물이 많이 있으므로 각기 탈취하는데 그 물건이 너무 많아 능히 가져갈 수 없을 만큼 많으므로 사흘 동안에 거두어들이고 넷째 날에 무리가 브라가 골짜기에 모여서 거기서 여호와를 송축한지라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곳을 브라가 골짜기라 일컫더라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사람이 다시 여호사밧을 선두로 하여 즐겁게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이 그 적군을 이김으로써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그들이 비파와 수금과 나팔을 합주하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전에 나아가니라 이방 모든 나라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적군을 치셨다 함을 듣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이것이 바로 넉넉히 승리하는 모습입니다. 싸움을 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둘째로, 전투가 끝났을 때 원수 진영에는 살아남은 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든 전리품이 전부 이스라엘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마침내 30절은 “하나님이 사방에서 그들에게 평강을 주셨음이더라”라고 말합니다. 더 이상 전쟁이 없었습니다. 완전한 승리입니다. 원수는 철저히 멸망당하고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전리품은 사흘 동안이나 거두어야 할 만큼 많았습니다. 단 한 발의 화살도 쏘지 않았고, 단 한번도 싸우지 않았지만, 기쁨으로 돌아왔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승리입니다. 완전한 승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싸움을 대신 싸우시고, 우리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우리는 모든 전리품을 거두고 기쁨으로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갑니다. 넉넉히 이기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날마다 살아가기를 기대하시는 바로 그 삶의 방식입니다. 이런 승리의 삶, 이런 삶의 태도입니다.

이러한 지위적인 승리를 실제 삶에서 경험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의 전신갑주를 날마다 입어야 합니다. 우리가 에베소서 6장 10절부터 17절을 살펴보는 이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이 모든 것을 매일의 삶 속에서 실제로 누릴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위대한 승리를 어떻게 경험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싸우시고 우리는 그 결과를 누리는, 동일한 기쁨, 동일한 감격, 동일한 복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풍성한 전리품을 누릴 수 있습니까? 해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다시 에베소서 6장으로 돌아가서 살펴봅시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여섯 가지 갑옷이 나옵니다. 이 전신갑주를 입고 있는 한, 우리는 넉넉히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승리와 전리품을 누립니다. 먼저 14절입니다.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진리의 허리띠입니다. 헌신, 준비, 대비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사탄과 싸우려면, 이 전쟁에 들어가려면, 우리는 강력한 대적, 실제적인 원수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허리 띠를 띤다, 또는 허리를 동인다는 것은 준비되어 있다는 상징입니다. 유대인 문화에서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허리를 동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병사는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허리 띠를 띠고 전투를 대비해야 합니다.

둘째로, 14절에는 “의의 호심경”도 나옵니다. 의의 호심경은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가리킵니다. 죄가 들어올 때 우리는 자백하고, 회개하고, 돌이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의의 호심경으로 몸의 중요한 부위를 보호하죠.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 호심경은 생각의 자리인 마음과 감정의 자리인 창자를 보호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생각과 감정이 거룩함과 의로움으로 보호받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또 모든 장비를 갖추고 전적으로, 완전히, 백 퍼센트 헌신된 상태로 서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둘째로 우리는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제 세번째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내용인데, 우리는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어야 합니다. 우리의 발은 평안의 복음으로 덮여 있어야 합니다. 제가 말씀드렸듯이 로마 군인들은 부츠 형태의 신발을 신었는데, 밑창에 징처럼 튀어나온 못들이 박혀 있었습니다. 축구화에 달린 스파이크와 똑같은 구조입니다. 땅을 단단하게 딛고 서기 위한 것이죠. 사탄을 대적하여 서기 위한 이 신발은 평안의 복음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우리가 화평하게 되었다는 복된 소식,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시고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자원으로 굳게 설 수 있다는 확신을 말합니다. 동산에서 칼을 들고 로마 군대 전체를 상대하려고 했던 베드로의 확신과 같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만일 상황이 어려워지면, 곁에 계신 예수님께서 한마디 말씀으로 로마 병사들을 모두 쓰러뜨리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시라는 확신 가운데 굳게 서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탄의 군대와 어떻게 싸워 이길 수 있을까요? 수많은 귀신들을 어떻게 물리칩니까? 어둠의 나라에서 우리를 공격해 오는 적들을 어떻게 막아낼까요? 헌신으로, 거룩함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자원이 충분하다는 확신으로 가능합니다. 이제 오늘 아침에는 그 다음 전신갑주로 넘어가겠습니다. 하나만 살펴볼 텐데, 바로 믿음의 방패입니다. 16절입니다. 믿음의 방패입니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여러분, 믿음의 방패가 무엇이든 간에 이 방패는 공격을 막아내기에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기 때문입니다. 매우 포괄적인 선언입니다.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로마 시대에는 군사의 임무에 따라서 여러 종류의 방패가 사용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두 가지가 아주 두드러집니다. 첫째는 비교적 작고 동그랗게 생긴 방패입니다. 커다란 프리스비처럼 가장자리가 약간 말려 있는 형태입니다. 보통 두 개의 끈으로 왼팔에 묶었습니다. 매우 가벼워서 보병이 휴대하기에 적합했죠. 근접전에서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사용했습니다. 병사의 오른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는데, 17절에 따르면 마카이라(machaira)입니다. 헬라어로 단검을 뜻하죠. 짧은 칼입니다.

병사들은 이렇게 근접전을 치렀습니다. 한 손에는 짧은 칼을 들고 또 다른 한 손에는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는 동그랗게 생긴 방패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사용된 단어는 그 작은 방패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단어는 두레온(thureon)입니다. 전혀 다른 종류의 방패입니다. 두레온(thureon)은 길이가 한 1미터 35센티미터, 너비가 한 75센티미터에 이르는 큰 방패입니다. 두껍고 거대한 나무 판자로 만들었습니다. 겉면을 금속이나 두꺼운 가죽으로 덮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불화살이 날아와도 금속에 맞아서 튕겨 나가거나, 가죽인 경우에는 기름으로 특수 처리가 되어 있어서 불이 금방 꺼졌습니다.

이 방패는 길이가 약 1미터 35센티미터, 너비가 약 75센티미터나 되는 아주 거대한 나무 판자입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셔야 할 것은 당시 사람들의 체구가 지금보다 정말 작았다는 겁니다. 영국과 스코틀랜드 역사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가서 갑옷을 직접 보았는데요, 혹시 런던 타워(The Tower of London)에 가보신 적이 있다면 저하고 같은 생각을 하셨을 겁니다. 당시 병사들이 입었던 갑옷을 보면, 도대체 저 안에 누가 들어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주 작습니다. 마치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정도나 맞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만큼 당시 사람들의 키는 매우 작았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을 겁니다. 그렇다면 길이 1미터 35센티미터, 너비 75센티미터의 방패는 몸 전체를 완전히 가릴 수 있었을 겁니다. 방패를 그냥 땅에 세워 두고 그 뒤에 서 있기만 하면 되는 거죠. 이 방패의 목적이 바로 그겁니다. 전신을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죠.

로마 군대가 전투를 벌일 때에, 특히 대규모 전투에서 보통 이런 전략을 사용했습니다. 맨 앞줄에 이런 방패를 든 병사들이 길게 늘어서고 그 뒤에는 활을 든 병사, 칼을 든 병사, 그 밖의 여러 병사들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진영을 짜고 전진하다가 적에게 가까워지면, 앞줄의 병사들이 방패를 나란히 땅에 박아서 아주 거대한 보호벽을 만들었습니다. 그 방패의 벽 뒤에서 궁수들이 활을 쏘아댑니다. 조금씩 조금씩 그 벽을 앞으로 전진시키다가, 마침내 근접전을 벌이는 거죠.

실제 전투에서는 맨 앞에 서 있는 병사들이 전선을 형성합니다. 그 전선, 곧 그 벽이 군대의 최전선이 되었습니다. 그 방패 벽이 날아오는 화살들을 막아 주었습니다. 특히 화살 세례가 쏟아질 때에는, 바로 그 앞줄에 서 있던 병사들이 가장 안전했습니다. 물론 뒤에 있는 병사들 가운데서도 이런 방패를 가진 사람들이 있어서 스스로를 보호하기도 했습니다. 만일 이런 방패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적 화살이 한꺼번에 쏟아지면, 화살을 막아내면서는 도저히 싸울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럴 때는 방패 뒤로 몸을 숨기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죠. 그러면 보호를 받을 수 있으니까요. 자 그러니까 이 방패는 이중적인 보호, 곧 완전한 보호를 제공했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킹제임스 성경을 보면 16절은 “무엇보다도(above all)”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강조점은 중요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전신갑주를 설명하는 이 부분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에 말씀드렸듯이, 이 전신갑주들은 모두 필수적입니다. 서로 겹치는 부분도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뜻은, 다른 모든 것 위에, 다른 모든 것에 더하여라는 의미입니다. 이미 허리띠를 띠고, 호심경을 붙이고, 신을 신었습니다. 이제 ‘그 모든 것 위에, 그 모든 것에 더하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무엇보다도”라는 표현은 방패 하나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라, 마지막 세 가지 전신갑주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라고 말한 다음에, 17절에서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도 취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주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above all)”라는 표현은 남아 있는 세 가지 전신갑주 모두에 해당합니다. 사용된 동사에도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14절에서는 “허리 띠를 띠고, 호심경을 붙이고, 신을 신고” 있으라고 합니다. 불변하고 영원한 지속적인 상태를 뜻합니다. 항상 입고 있는 상태, 계속 준비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 전투 중에 잠시 소강 상태가 오면, 병사는 가서 쉬기도 하고, 그렇지만 쉴 때도 호심경을 벗지는 않습니다. 허리띠를 풀지도 않고, 신발을 벗지도 않습니다. 항상 입고 있는 상태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전투가 격렬해지면, 16절에서는 방패를 가지라고 하고, 17절에서는 투구와 검을 가지라고 합니다. 따라서 앞의 세 가지는 계속 입고 있어야 할 것들, 착용하고 있어야 할 것들이고, 뒤의 세 가지는 즉각적으로 취해야 할 장비들입니다. 전투가 가장 치열해질 때 반드시 들고 있어야 하는 그런 것들입니다.

물론 여러분이 헌신이라는 허리띠를 띠고 있고, 거룩함이라는 호심경을 붙이고 있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라는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신을 신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보입니다. 실제로도 충분합니다. 다만 나머지 전신갑주는 일종의 이중 보호입니다. 전투가 극도로 격렬해질 때에 아주 유용합니다. 앞의 세 가지는 항상 착용하고 있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매번 다시 헌신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라나면서 저는 수많은 집회와 수련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늘 듣습니다. “이제 주님께 다시 헌신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여러분 삶을 다시 헌신합시다.” 제가 다니던 학교에서도 이런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매달 오시는 분들마다 믿는 학생들 앞에서 말씀을 전하면서 다시 헌신하라고 요구를 하셨습니다. 그러면 늘 똑같은 학생들이 나와서 같은 다짐을 늘 다시 반복합니다.

말하자면 세 가지 기본 원칙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었던 거죠. 헌신으로, 의로움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으로 말입니다. 사실 항상 유지하고 있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화살이 대규모로 쏟아지기 시작할 때에는 반드시 믿음의 방패를 들어야 합니다. 구원의 투구를 써야 합니다. 성령의 검을 들어야 합니다. 마치 야구선수하고 똑같습니다. 야구선수는 더그아웃에 앉아 있을 때 유니폼은 그대로 입고 있죠. 슬라이딩 패드도 차고 있고요, 무릎 보호대도 하고 있습니다. 스파이크가 달린 야구화도 신고 있습니다. 그러나 타석에 설 시간이 되면 헬멧을 집어서 쓰고 배트를 들고 타석으로 나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준비되어 있지만, 싸우기 위해 필요한 무기를 손에 쥐는 것이죠.

미식축구 경기도 똑같습니다. 선수가 벤치에 앉아 있을 때에는 헬멧을 벗어놓고 쉽니다. 그러나 경기에 들어갈 때가 되면 헬멧을 쓰고 곧바로 뛰어 나갑니다. 바로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보여 주고자 하는 차이점입니다. 항상 착용하고 있어야 할 것들이 있고, 전투가 실제로 시작될 때에 즉각적으로 취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 세 가지, 단단히 고정되고, 채워지고, 묶이고, 잠겨서 움직이지 않는 것들 그 위에, 손으로 붙잡아야 하는 세 가지가 더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을 이중으로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 올바른 신을 신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고, 의의 호심경만 있어도 충분하고, 헌신의 띠만 있어도 충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위에 또 하나의 보호 장비를 더해 주십니다. 참으로 위대한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요한복음 10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의 손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양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손, 하나님의 손 안에 있어서 아무도 우리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이 함께 신자를 붙드시고, 함께 신자를 안전하게 지키시고, 함께 우리를 숨기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중으로 보호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병사도 적의 공격에 맞설 수 있는 이중의 보호 장비를 받은 겁니다. 전투가 격렬해지고 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할 때는 믿음의 방패를 들면 됩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방패는 어떤 역할을 할까요? 16절입니다. “...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여기서 이 ‘소멸하다’는 말은 완전히 끈다는 뜻입니다. 일부도 아니고, 대부분도 아니고,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없앨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방패가 무엇이든 간에 제 역할을 충분히 해낸다, 충분하다 이런 뜻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믿음의 방패 하나로도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게다가 2차적인 보호입니다. 모든 불화살이 다 소멸됩니다. 그렇다면 그 불화살은 어디서 올까요? “악한 자”, 사탄을 가리킵니다. 헬라어로 ‘포네로스(ponēros)’는 ‘악한 자’, ‘타락한 자’, ‘사악한 자’를 뜻합니다. 사탄이 자기 귀신들을 동원해서 이 모든 불화살을 쏘아 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의 방패로 모두 소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분명히 아셔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악한 자”, “사악한 자”, “나쁜 자”라는 표현은 이 전쟁이 어떤 철학이 아니라, 인격적인 존재를 상대로 한 싸움이라는 사실입니다. 어제 LA 타임스(L.A. Times)에는 존 다트(John Dart)가 쓴 글이 실렸는데요, 주잇(Jewett)이라는 사람이 새로 쓴 책의 서평입니다. 그 책에서 주잇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왜곡하고 진리를 잘못 전하고 있다고 주장을 하면서 바로잡기 위해서 책을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귀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바로 여기 16절에 “악한 자”가 나오고, 11절에는 마귀가 분명히 언급됩니다. 마귀가 존재한다는 점에는 어떤 의심의 여지도 없습니다. 마귀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모든 공격의 근원입니다. 우리는 어떤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인 개념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젯밤에 우리 교회 청년들이 아주 극도로 음란한 장소인 플라톤스 리트리트(Plato’s Retreat) 앞에서 시위를 했을 때에도, 어떤 철학을 상대로 싸운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존재와 맞서 싸운 겁니다. 여러분과 제가 동성애 권리를 막기 위해서 편지를 쓰고, 낙태를 막기 위해 편지를 쓸 때에도, 우리는 철학적이거나 비인격적인 추상적인 개념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역사하고 있는 마귀와 그 수하에 있는 귀신들과 싸우고 있는 겁니다.

바울은 믿음의 방패가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불화살이란 무엇일까요? 무엇을 막아내야 하는 걸까요? 당시의 전투를 한번 생각해 보면 분명해집니다. 옛날에 궁수들은 화살 끝에 솜뭉치 같은 것을 달아서 타르에 적셨습니다. 이 타르에 불이 붙으면 타는 속도는 느리지만 온도가 아주 매우 높았습니다. 쏘기 직전에 불을 붙여서 날아간 화살이 목표물에 맞으면, 타르가 사방으로 튀면서 병사의 옷에 불이 붙습니다. 나무로 된 것은 모두 타 버렸습니다. 바울이 말한 불화살이 이겁니다. 금속 방패에 맞으면 튕겨 나가고, 기름이 처리된 가죽에 맞으면 불이 꺼졌습니다.

그렇다면 사탄의 불화살은 무엇일까요? 사실 매우 간단합니다. 유혹입니다. 바울은 유혹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더러움의 화살, 이기심의 화살, 의심과 두려움과 낙심의 화살, 정욕과 탐욕과 허영과 탐심의 화살을 쏘아댑니다. 결국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신자를 향해 매혹적인 유혹의 불화살을 퍼부음으로써 우리 안에서 사악하고, 그리스도인답지 않고 악독한 반응을 끌어내려고 합니다. 바울은 이에 대응하는 유일한 방어 수단이 바로 믿음의 방패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때때로 유혹이 비처럼 쏟아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입니다. 유혹이 사방에서 비처럼 쏟아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믿음의 방패를 들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믿음의 방패란 무엇일까요? 바울은 로마 군대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드는 장면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믿음이 유혹을 막는 방패일까요? 믿음은 어떻게 화살을 막아내고, 승리를 보장할까요? 먼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하나님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 신앙의 가장 밑에 놓인 핵심입니다. 우리가 믿는 모든 것, 우리가 붙드는 모든 것, 우리가 확신을 두는 모든 것의 기초가 바로 이 믿음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하나님이 계신 것과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셨다는 것을 믿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고, 죽으셨음을 믿고,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고, 다시 오실 것임을 믿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믿는 것, 이 모든 것을 모두 포함합니다. 하박국 2장 4절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장 17절도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11절도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0장도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여러 번 같은 말씀을 반복하신다면 분명하게 알아들어야 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믿음이야말로 우리의 삶의 전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사실 모든 사람은 무언가를 믿으며 살아갑니다. 여러분이 자동차를 타고 나갈 때도, 그 차가 폭발하지 않고 목적지까지 나를 데려다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타죠. 사람들은 아메리칸 항공사의 비행기를 타면서 로스앤젤레스에 무사히 도착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어떤 여성분이 “저 꼭 LA에 가야 해요, 정말로 꼭 가야 해요” 이렇게 말했답니다. 그래서 어떤 남성이 자기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LA에 갈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믿음은 그런 종류의 믿음이 아닙니다. 잡지 광고에 나오는 사람들이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광고를 보면 한 남자가 팔짱을 낀 채로 거대한 불도저 같은 토목 장비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불도저의 이름은 ‘믿음’이지. 산도 옮길 수 있거든.” 어떤 사람은 불도저를 믿고, 어떤 사람은 비행기를 믿습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에서 읽은 이야기가 기억납니다. 캔자스의 한 마을의 물 이야기입니다. 아주 거대한 저장 탱크에서 파이프를 통해서 주민들에게 물이 공급되고 있었는데, 다른 시스템으로 바꾸려고 물탱크를 비웠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바닥에 온갖 동물들이 죽어 있더랍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주민들이 그때부터 이질에 걸리기 시작했답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사는 것은 중요하지만, 무엇을 대상으로 한 믿음인지를 반드시 점검해야 합니다. 올리버 웬들 홈스(Oliver Wendell Holmes)는 어느 날 가슴을 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두 사람이 훌륭한 말이라고 칭찬하는 말이죠. “무언가에 대한 믿음이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든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아무거나 믿는 그런 믿음이 아닙니다.

한 꼬마 야구 선수가 집에 와서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오늘 우리 팀이 질 것 같아요.” 그래서 엄마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야 아들,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 그러니까 아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알겠어요. 그럼 오늘 우리가 질 거라고 믿을게요.” 여기서 아이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을 ‘믿으라’는 말로 받아들인 겁니다. 믿음은 반드시 믿을 만한 대상에 두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 점을 꼭 붙드십시오.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사탄이 지금까지 쏘아온 모든 불화살은 전부 거짓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였다면, 우리가 그 거짓을 믿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을 믿은 것입니다. 위대한 선교사 존 페이튼(John Payton)이 남태평양 섬 원주민들을 위해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그 원주민의 말에는 ‘믿다’라는 단어가 없었습니다. ‘신뢰하다’나 ‘믿음을 갖다’라는 말 자체가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 믿음이라는 개념을 전달할 수 있을지 아주 난감했습니다.

어느 날 페이튼 선교사님이 오두막 안에서 성경을 번역하고 있을 때, 한 원주민이 숨이 차도록 달려와 계단을 뛰어 올라와서는 방 안으로 들어와 의자에 털썩 몸을 던지며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 의자에 제 몸을 맡기고 쉬니 정말 좋군요.” 그 말을 듣는 순간에 페이튼 선교사님은 깨달았습니다. “아, 이게 바로 믿음이구나. 믿음이란 하나님께 내 몸을 맡기는 것이구나.” 이렇게 해서 원주민 신약성경 번역에 ‘믿음’이라는 표현이 번역되었고, 그 결과로 그 원주민 사회 전체가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 자신의 전부를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참되기에 저는 그대로 믿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방패는 유혹의 어떤 순간에 작동합니까? 이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완전한 환경을 만드시고, 완전한 남자와 완전한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여기서 완전하다는 말은 죄가 없다는 의미이지, 완성된 인격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아직 시험을 받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뱀으로 가장한 사탄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더냐?”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네가 선악을 알게 되어 자신과 같아지는 것을 원치 않으셔. 하나님은 경쟁을 좋아하지 않지. 하나님은 숨겨둔 의도가 있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부 믿을 수는 없어.” 사탄은 하나님을 의심하고 자기 말을 믿으라고 유혹했습니다. 하와는 그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어리석게도 마귀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지는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죠. 여러분에게 찾아오는 모든 유혹도 결국 같은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나를 믿으라.” 이것이 모든 유혹의 핵심입니다.

신약으로 넘어가면, 유혹에 관한 가장 위대한 본문은 마태복음 4장과 누가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입니다. 공생애 시작 전에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려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습니다.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셨죠. 사탄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시험합니다. 어떻게 시험합니까? 하나님을 믿지 말라고 합니다. 늘 수법이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말고 나를 믿으라.”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돌을 떡으로, 빵으로 만드는 일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돌을 떡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합니다. 도덕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먹는 것이 죄라고 말하지만, 떡을, 빵을 먹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이런 것이 죄라면 우리 모두가 죄인일 겁니다. 대부분 오늘 아침에도 빵을 드셨을 테니까요. 요점은 그것이 아닙니다. 떡을 먹는다고 죄를 짓는 게 아니고, 기적을 행한다고 해서 죄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접근 방식입니다. 사탄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던 겁니다. “도대체 이게 뭐냐? 사십 일 동안 광야에서 아무것도 먹지도 못하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은 이 황량한 곳에서 사십 일을 보내고 있지 않느냐? 하나님이 너를 돌보신다고 하지 않았느냐? 너를 붙드신다고 하지 않았느냐? 네 필요를 채워 주신다고 하지 않았느냐? 너는 하나님의 아들인데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냐? 네 스스로 배를 채워봐. 하나님을 기다릴 수 없지 않아? 하나님은 너를 잊으셨어.”

하나님을 신뢰하지 말라는 유혹, 하나님을 믿지 말라는 유혹, 일을 자기 손에 쥐고 처리하라는 유혹입니다. 그런 다음 사탄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너를 메시아로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느냐? 모든 무릎이 네 앞에 꿇게 될 것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네가 왕이 될 것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사람들이 네게 경배하고 ‘아들에게 입맞추라’고 말하게 될 것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이게 지금 무슨 꼴이냐? 광야에 있는 네 모습을 봐라. 나와 함께 가자.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봐. 그러면 사람들이 ‘우와, 이분이 메시아다’라고 말할 거야. 네가 원하던 모든 것을 단번에 얻을 수 있어. 그리고 말이야, 하나님이 세상 나라들을 너에게 주시겠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지금 너에게 아무것도 없지? 나와 함께 가면 내가 모두 줄게.”

다시 말해서 이런 겁니다. “하나님을 믿지 말라. 하나님은 자기 말을 지키지 않는다. 하나님은 전부 말해 주지는 않는다. 너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어. 나를 믿어. 내 방식대로 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언제나 어디서나 사탄이 신자를 유혹하는 방식입니다. 사탄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성경에는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관계를 해서는 안 된다고 되어 있어. 하지만 짜릿하잖아.”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에 실린 한 기사에 기독교인을 인터뷰한 내용이 있었는데요, 결혼하지 않았지만 오십 명이 넘는 여성과 성관계를 가졌다는 한 남성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선하게 만드셨다. 성관계도 그 일부다.”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를 믿고 있는 겁니까? 하나님은 절대로 아닙니다. 사탄의 거짓말을 믿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죄를 지을 때마다 여러분은 사탄의 거짓말에 속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물론 성경에는 신자와만 결혼하라고 되어 있는 걸 알아요. 남자친구가 아직 신자는 아니지만, 우리 관계는 너무 좋아요. 주님께서 다 잘 되게 하실 거예요. 모두가 남자친구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거든요. 게다가 주님은 은혜로운 분이시잖아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지금? 하나님은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사탄은 “해, 해, 해”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를 믿은 겁니까? 사탄입니다. 사탄을 믿은 겁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거 읽지 마라. 네 앞에 있는 그 더러운 것 읽지 마라. 그 음란한 잡지 읽지 마라. 그 더러운 영화 보러 가지 마라. 소득세를 속이지 마라. 직장에서 옳지 않은 일을 하지 마라. 실제로 쓰지도 않은 돈을 경비로 청구하지 마라. 그렇게 하지 마라.” 그런데 사탄은 이렇게 말합니다. “해, 해. 돈을 조금 더 벌 수 있잖아. 재미를 조금 더 누릴 수 있잖아.” 여러분이 죄를 지을 때 누구를 믿는 겁니까? 마귀를 믿는 겁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정말 간단합니다. 여러분이 죄를 지을 때마다 사탄을 믿는 것이고, 순종할 때마다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방패는 이중의 보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겠다. 사탄아 물러가라.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나를 먹이실 것이고, 때가 되면 나를 메시아로 기름 부으실 것이고, 때가 되면 하나님의 방식대로 세상 나라들을 내게 주실 것이다. 나는 너를 믿지 않겠다.”

요한일서 5장 10절입니다. “...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하나님이 거짓말하시는 분이십니까? 디도서 1장 2절입니다. “...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하나님은 거짓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어리석게도 사탄을 믿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고 저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또 속아 넘어간 겁니다. “아, 이건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거라는 걸 알아요. 이 정도는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도 알아요. 그런데 이걸 사고 싶고, 이걸 하고 싶고, 이만큼은 남겨두고 싶어요.” 그래서 그렇게 하면 뭔가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행동을 합니다. 하나님은 한쪽으로 밀어놓고, ‘다 잘 되겠지’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결국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우리 자신을 속인 것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 손을 벌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떡을 달라고 하는데 내가 돌을 주겠느냐? 하늘 문을 열고 네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복을 붓고 싶지 않겠느냐?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다시 너에게 주고 싶지 않겠느냐?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너를 복 주고 싶지 않겠느냐? 네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행하고 싶지 않겠느냐? 빛들의 아버지인 나로부터 내려오는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주고 싶지 않겠느냐? 변함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나 하나님이, 네가 사는 날 동안 하늘의 풍성함을 네 위에 쏟아붓고 싶지 않겠느냐? 나는 그렇게 하고 싶다. 그러니 나를 믿고 순종해 주겠니?” 그런데 사탄이 다가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방식대로 해 봐. 그러면 좋을 거야. 재밌을 거야. 너를 만족시켜 줄 거야. 네가 얻고 싶은 걸 얻을 수 있을 거야.” 전부 거짓말입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이 말하듯이, 사탄은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입니다. 사탄이 속삭일 때마다 그 속에는 언제나 거짓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이렇게 말하는 셈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이 최선인지 잘 모르셔. 사탄이 더 잘 알지.” 여러분, 정말 그렇게 믿으십니까? 그러면 안 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를 바라며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라고 말하면 여러분이 이렇게 화답하시죠. “아멘, 감사합니다. 설교 잘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막상 직장을 잃고 나면 어떻습니까? “아이고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도대체 저에게 왜 이러십니까?” 하면서 곧바로 절망에 빠집니다. “주님이 우리를 버리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또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했다고 했잖아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하신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실제 삶에서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더해져야 할 것들을 붙잡으려고 인생을 달려가면서, 정작 하나님의 나라는 놓치고 살아갑니다. 보십시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손에 잡히는 것은 모조리 움켜쥐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잠언 8장 32절입니다.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행복해지고 싶으십니까?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예레미야 15장 16절을 보면, 예레미야는 아무도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 사회 한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정말 아무도 듣지 않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시편 119편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를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 3절도 이렇게 말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요한일서 1장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기쁨, 풍성한 복을 원하십니까?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제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던 것처럼, 여러분의 마음이 불타오르기를 원하신다면, 말씀이 여러분의 삶 속에 뿌리내리게 하십시오. 그런데 사탄은 와서 이런 말로 유효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마라. 재미있게 살아라. 하나님을 믿지 마라.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해라.” 여러분이 죄를 짓는 이유는 마귀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참 어리석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계속 그렇게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제가 죄를 짓고 싶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탄이 너무 싫어서 사탄을 조금이라도 만족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탄의 불화살을 소멸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여러분은 누구를 믿으십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믿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을 믿습니까? 고린도후서 1장 24절입니다.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그렇습니다. 우리를 서게 하는 방패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설 것입니다. 잠언 30장 5절은 정말 위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참됩니다.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방패로 작용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왜곡하면 고통을 겪게 됩니다. 사탄은 다가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거 알아. 하지만 여기에 요거 조금 더해 보자.”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또 시편 12편 6절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시편 18편 30절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고 있는 한, 방패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꼭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간단합니다. 사탄은 거짓말을 합니다. 그 거짓말을 믿는 순간 방패는 내려가고, 화살을 맞습니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요한일서 5장 4절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이깁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때 승리합니다. 삶 속에서 의심, 불안, 두려움, 걱정, 염려, 고난, 시련, 박해를 겪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말씀과 능력과 약속을 믿는다면, 패배의 지점이 아니라 오히려 강해지는 지점, 승리의 지점이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과 9절을 보십시오. 전신갑주 말씀을 살펴보면서 여러 차례 말씀드렸죠.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그리고 이어서 말합니다.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믿음을 굳게 하여 대적하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믿음으로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제 정리해 보겠습니다. 믿음의 방패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삶의 실제 문제들에 지속적으로 적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참으로 안다면 반드시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수록,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알아갈수록,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알아갈수록, 기도와 묵상 가운데 하나님의 인격을 더 깊이 묵상할수록, 하나님을 더 많이 알게 되고, 하나님을 더 많이 알수록 하나님을 더 크게 신뢰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더 크게 신뢰할수록,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될 가능성은 그만큼 더 줄어듭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로 귀결됩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되죠.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의 분임을 믿고, 하나님이 주신 모든 약속이 참되다는 것을 믿는다면, 여러분은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가장 큰 복이 있는 자리에 서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복 받기를 원합니다. 모두가 가장 좋은 것을 원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방식대로 하면, 내가 그 복을 주겠다.” 그러나 사탄의 방식을 택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더 알아갈수록, 우리는 주님을 더 신뢰하게 됩니다. 창세기 15장 1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나는 네 방패요.” 시편 46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잠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시편 84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하나님은 여러분의 편이십니다. 주님은 여러분께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사탄을 이기도록 승리를 주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주님을 믿고, 주님의 방식대로 행해야 합니다.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십시오.

이제 우리는 전투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헌신의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시라는 확신의 신을 신었습니다. 그리고 전투가 시작되면 방패를 들어올려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유혹의 불화살을 막아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싸움에서 질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승리는 이미 우리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이 말하듯이 우리는 넉넉히 이기는 자들입니다. 결과가 그렇다면, 중간 과정에서 질 이유 또한 없습니다. 전신갑주를 입으면 우리는 이깁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제 마음을 그대로 담아낸 한 청교도의 기도를 빌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전쟁의 결과가 결국 확실한 승리로 끝날 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갈보리에서 용의 머리를 꺾으심에 감사합니다. 저는 이미 패배한 원수와 싸웁니다. 온갖 간교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이미 정복당한 자입니다. 제가 뱀의 발꿈치를 느낄 때마다, 발꿈치가 상하였으나 그 상함으로 사탄의 머리를 박살내신 주님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제 영혼은 기쁨에 넘쳐 위대한 정복자이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 이 거대한 전쟁에서 제가 받은 상처가 있다면 치유하여 주옵소서. 만일 제가 더러움에 물들고, 믿음에 손상을 입고, 소망이 흐릿해지고, 사랑이 식어지고, 세상의 쾌락에 마음을 빼앗겼다면, 만일 제 영혼이 전쟁의 무게 아래 눌려 쓰러졌다면, 주의 모든 약속이 향유와 같고, 주의 모든 손길이 생명과 같으시니, 이 지친 전사에게 임하옵소서. 주님, 저를 새롭게 하소서. 다시 일어나 싸움을 싸우고, 원수가 무릎 꿇을 때까지 지치지 않게 하소서. 주님과의 깊은 교제를 주옵소서. 그리하여 사탄을, 불신앙을, 육신을, 세상을 대적하게 하옵소서. 이 기쁨은 피조물에게서 오지 않습니다. 그 어떤 피조물도 이 기쁨을 앗아갈 수 없습니다. 주님, 주님의 불변하고 영원한 사랑이라는 그 영원한 샘에서 한 모금 마시게 하소서. 그리하면 제 손은 결코 약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제 발은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제 칼은 녹슬지 않을 것입니다. 제 투구는 깨지지 않을 것입니다. 제 호심경은 결코 벗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제 힘은 오직 주의 능력 안에 있고, 저의 믿음은 모든 시험에서 저를 지켜주는 방패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기도에 덧붙여 구합니다. 오늘 아침 이 자리에 아직 하나님의 군대에 들어오지 못한 이들이 있다면, 아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면, 오늘 마음을 열어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깊은 필요를 안고 있고, 승리를 갈망하는 이들이 있다면, 주님, 오늘이 바로 전신갑주를 입는 날이 되게 하셔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주님께서 넉넉히 이기는 자들에게 허락하신 그 승리를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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