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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6장을 펴시기 바랍니다. 신자의 전신갑주라는 주제로 에베소서 6장 13절부터 17절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제가 읽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마르틴 루터에게는 사탄과의 갈등이 너무나도 현실적이고 생생해서 거의 물리적인 형태를 띠기까지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탄에게 분노한 나머지 잉크병을 마귀를 향해서 던졌다고 합니다. 잉크병이 깨지면서 벽에 얼룩이 졌는데, 이 자국이 여러 해 동안 남아서 루터의 삶에서 사탄과의 전쟁이 얼마나 생생했는지를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삶 속에서도 실제로 이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루터처럼 영적으로 민감하지 않기 때문에 인식하지 못할 뿐이죠. 신자와 사탄은 생사가 달린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은 “우리의 씨름”이라고 했는데, 이 씨름은 생사를 걸고 맨손으로 맞붙는 격투를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향해 높고 거룩하고 고상하고 위대하며 영광스러운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체계와는 구별된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죠. 그러나 사탄은 이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지 않도록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방해하려고 합니다. 그 결과 신자의 삶에는 전쟁이 일어납니다. 저는 이 전쟁이 구원의 순간, 아니 구원받기 전인 복음의 말씀이 전해질 때부터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말씀이 복음과 함께 선포될 때에,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사탄은 그 말씀을 빼앗아서 사람들이 반응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신자가 되어서 아직 어린아이와 같을 때에는, 거짓 교리의 홍수로 이리저리 흔들고 진리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사탄은 우리를 끊임없이 공격하고 포위하고 고발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를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사탄은 헤롯을 통해서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도 온갖 수를 다 썼습니다. 절벽에서 밀어 떨어뜨리려 하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공격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할 때마다 마귀가 대적합니다. 바울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선교 여행을 시작하자마자 마술사들, 점술가들, 귀신 들린 사람들이 방해하려고 맞섭니다. 오순절 날에 베드로 역시 적대적인 반응에 부딪힙니다. 교회를 향한 박해가 시작되었죠. 산헤드린 공회가 제자들을 불러 심문하고, 다시는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위협합니다. 신약성경 전체에 걸쳐서 사탄은 끊임없이 복음을 대적합니다.

마침내 교회가 탄생하고 기초를 갖추면서 이른바 ‘주후 시대’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첫 3세기는 교회에 대한 박해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죽음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순교가 이어집니다. 이후 중세 시대에는 암흑기로 불리는 공포의 시대로 들어서게 되는데요, 진리를 믿고 끝까지 신실하게 남아 있던 소수의 신자를 제외하면 복음의 증거가 거의 없어진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종교개혁의 시대에 이르러 다시 빛이 밝아지고, 개신교의 탄생과 함께 복음이 크게, 분명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전쟁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개신교가 어느 정도 확고히 자리잡은 이후에도 복음은 여전히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현대주의, 자유주의, 신정통주의, 심리학 등 다양한 사상들이 침투하고 있으며, 공산주의, 인본주의, 물질주의, 쾌락주의 등의 세속적 가치들이 복음을 공격합니다. 이처럼 처음부터 지금까지 사탄과 그리스도의 복음 사이에는 끊임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단순히 어떤 사상이나 운동 간의 그런 충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녀들의 삶 속에서 이루고자 하시는 일을 사탄이 공격하는, 신자 개인의 삶 속에서 벌어지는 전쟁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서를 이렇게 마무리하는 이유죠. 앞선 구절에서는 풍성한 영적 자원을 소개했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합당한 삶의 방식을 알려줬습니다. 그러나 그 길에는 반드시 저항이 따르기 때문에, 전신갑주로 무장하라고 말하는 겁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대적합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은 진리를 계시하십니다. 요한복음 1장 17절입니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그러나 사탄은 진리를 감춥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이죠. “그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진리를 드러내시고, 사탄은 그 진리를 감춥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은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생명을 예수님께 주셨고, 예수님은 원하시는 자에게 그 생명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반면에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사탄은 살인자라고 불립니다. 생명을 빼앗는 자입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은 사탄을 두고서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고, 사탄은 생명을 빼앗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계시하시고, 사탄은 진리를 감춥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우리 삶 속에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맺게 하십니다. 그러나 사탄은 육신의 열매를 만들어 냅니다. 역시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옵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방탕함 같은 것들입니다.

또 성경은 예수님이 우리를 시험을 통해 성숙하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야고보서 1장은 믿음의 시련이 우리를 온전하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해 유혹합니다. 베드로는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진리를 계시하시고 사탄은 감춥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고 사탄은 빼앗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열매를 맺게 하시고 사탄은 더럽고 악한 육체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성숙하게 하기 위해서 시험하시고 사탄은 우리를 삼켜서 멸망시키려고 미혹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아들을 알면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디모데후서 2장 26절은 사탄이 사람을 사로잡아 종이 되게 한다고 말합니다. 요한일서 2장 1절은 예수님이 신자를 변호하신다고 말합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요한계시록 12장 10절에서는 마귀가 우리를 참소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신자의 삶 속에는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엄청난 갈등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의심을 넘어서고, 죄를 이기면서, 무관심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 수준에 이를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 높은 하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어떻게 사탄을 물리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까요? 성경이 답을 제시합니다. 신약에 몇 가지 핵심적인 해결책이 나옵니다. 지금부터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신자가 사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일종의 신학적 개요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성경은 신자가 사탄을 이렇게 대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오늘날 사탄을 쫓아내는 축사, 의식, 공식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6가지 정도의 원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씩 빠르게 살펴보면서 하나의 흐름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사탄에 맞서 승리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사탄이 예수님께 패배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이미 사탄에게 승리를 거두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3장 8절은 예수님이 마귀의 일을 멸하려고 오셨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은 예수님이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를 멸하시기 위해 오셨고, 한평생 매여 있던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사실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사탄은 이미 주님께 패했습니다.

두번째입니다. 신약성경은 사탄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그 능력이 바로 우리 안에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라고 말합니다. 사탄을 이긴 그 능력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4절입니다.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시니라.” 신자가 구원을 받으면 하나님의 성령을 받습니다. 사탄을 이긴 바로 그 능력이 신자 안에 심깁니다. 필요한 모든 자원이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세번째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부터 9절입니다. “근신하라,” 다시 말해 우선순위를 분명히 알고 헌신하라는 뜻입니다. “깨어라,” 주의 깊게 살피라는 말이죠.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제 정리해 봅시다. 첫번째 원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사탄을 죽이는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셨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겁니다. 두번째 원리는 사탄을 이긴 능력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거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겁니다. 모두 우리의 자원입니다. 세번째는 사탄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왜냐하면 우리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이미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렇다면 존 목사님, 베드로의 말을 따라서 사탄을 대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에베소서 4장 27절을 보겠습니다. 사탄의 공격에 어떻게 대적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에베소서 4장 27절입니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그 어떤 자리도 내주지 말라고 합니다. 매우 명확합니다. 절대로 틈을 주지 말라는 겁니다. 이 말씀의 함의는 분명합니다. 만일 사탄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우리가 틈을 내줬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핵심은 우리의 의지입니다.

이제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먼저 사탄이 이미 패배했다는 사실을 인식하셔야 합니다. 다음으로 사탄에게 패배를 안긴 예수님의 능력이 여러분 안에 거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십시오. 그리고 깨어서 사탄을 대적하십시오. 무슨 뜻입니까? 사탄에게 틈을 주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틈을 주지 않으려면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고린도후서 2장 11절이 말하는 것처럼 어떻게 하면 사탄에게 속지 않을 수 있습니까?” 고린도후서 2장 11절 하반절에 답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사탄에게 틈을 주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디에서 공격해 오는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창문을 닫고, 자물쇠를 단단히 채워야 합니다. 계책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또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사탄의 계책은 무엇인가요?”

요한일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사탄이 어떻게 다가옵니까?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다가옵니다. 모두 사탄의 계책입니다. 그러므로 안목의 정욕 앞에서 문을 닫고, 육신의 정욕 앞에서 문을 닫고, 이생의 자랑 앞에서 문을 닫으십시오. 이렇게 하면 사탄에게 그 어떤 틈도 주지 않게 됩니다. 사탄에게 틈을 주지 않는 것이 사탄이 여러분의 삶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대적하는 방법입니다.

또 다른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먼저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으려면 마귀의 계책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무지하면 안 됩니다. 두번째, 사탄이 다가오는 것이 보이면 도망쳐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 2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유혹에서 도망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꽤 공식이 간단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잘 이해하실 수 있도록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사탄은 이미 패배했습니다. 그 능력이 여러분의 삶 속에 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 어떻게 하냐고요? 두 가지 방법이죠. 첫째, 마귀의 계책을 아는 것이고, 둘째, 유혹이 다가올 때 도망치는 겁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어떻게 삶 속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고린도후서 10장 3절이 그 답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바울의 말은 우리는 인간이지만 우리의 싸움은 인간적인 싸움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육체를 가진 존재이지만 우리의 전쟁은 육체적인 전쟁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10장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전쟁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진짜 원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싸움은 인간적인 차원이나 육신적인 차원에서 벌어지는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의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속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영적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이 전쟁에는 영적인 무기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무기를 어떻게 사용합니까? 어떻게 하면 마귀의 계책을 분별하고, 마귀의 유혹에서 도망치고, 마귀의 공격을 대적하고, 삶 속에서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 능력을 실제로 취할 수 있을까요? 고린도후서 10장 5절 하반절입니다.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잘 들으십시오. 이것이 바로 간략한 신학적 개요의 최종 결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사탄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그 동일한 능력이 우리 안에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사탄을 대적하며 틈을 주지 않고, 사탄의 계책을 알고, 사탄의 유혹에서 도망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원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마음을 내어 맡겨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과 감정이 그 진리에 의해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신학적 공식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이 모든 공식이 아름답고 완전하게 요약되어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 앞에 있는 에베소서 6장 13절부터 17절입니다. 제가 방금 말씀드린 이 모든 원리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이 본문 안에 담겨 있습니다. 모두 여기에 있습니다. 모두 사용 가능합니다. 모두 이 걸작 속에 아름답게 엮여 있습니다. 신자가 지옥의 세력과 치르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여기서 보여줍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실제로 날마다 일어나고 있는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자, 지금까지 전신갑주에 대해서 어떤 것들을 살펴보았나요? 14절을 보겠습니다. 먼저 바울은 신자와 사탄 사이의 전쟁을 떠올리면서, 전투를 준비하는 로마 병사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리고 있습니다. 로마 병사가 전투를 준비하는 모든 행동이, 사탄과 싸우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바울의 비유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로마 병사가 헐겁게 늘어진 겉옷을 단단하게 조이기 위해 허리띠를 매는 그 순간이 병사가 싸우겠다고 결단하는 순간입니다. 준비하는 겁니다. 준비된 자세입니다. 다가올 전투를 내다보면서 진지하게 전쟁에 헌신할 것을 다짐합니다. 바울은 그 모습에서 진리의 허리띠를 언급합니다. 14절은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라” 이렇게 말합니다. 신자도 진리에 대해 헌신해야 합니다. 싸움을 싸우고, 삶을 살아내고,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헌신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전신갑주 연구를 시작하면서, 승리를 위해 요구되는 헌신의 수준이 어떠한지를 먼저 살펴봤습니다.

둘째로, 지난 시간에 우리는 14절에 나오는 두번째 전신갑주를 살펴보았습니다.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로마 병사는 생명과 직결된 부위를 보호하기 위해서 호심경을 착용했습니다. 공격을 당할 경우에 치명적인 부위이죠. 두 곳을 보호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는 심장 부위였고, 다른 하나는 히브리식 표현으로 창자에 해당하는 부위입니다. 유대인들은 심장을 생각의 영역으로 보았고, 창자는 감정의 영역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신자는 생각과 감정을 보호해야 합니다. 사탄이 유혹하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생각을 유혹하고, 감정을 유혹합니다. 잘못된 생각과 잘못된 감정을 통해서 우리 안에서 죄를 끌어내서 죄를 짓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영역들을 반드시 보호해야 합니다. 성경은 그 보호 수단이 의의 호심경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고, 헌신되고 구별되고, 하나님께 속한 의로운 삶을 살아갈 때에, 사탄의 두렵고 끔찍한 공격에서 급소를 지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이렇게 정리했죠. 우리는 날마다 거룩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날마다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날마다 우리의 삶에 죄가 있다면 고백하고, 회개하고, 그 죄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신약성경의 명령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6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7장 1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골로새서 3장에서 바울은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말하면서 온갖 악한 것들을 열거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는 우리 삶에서 모든 형태의 악을 제거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마도 의의 호심경을 가장 분명하고 간결하게 설명한 구절은 로마서 13장 11절일 겁니다.

14절까지 이어서 보겠습니다. 먼저 11절입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재림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주의 크고 위대한 날이 밝아오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내용입니다. 어둠을 벗어버리고 빛의 전신갑주를 입으라는 거죠. 빛은 거룩함과 순결을 의미하고, 어둠은 악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어둠의 일을 벗어버리고 빛의 전신갑주를 입는 것, 이게 바로 호심경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헌신의 띠, 진리의 띠입니다. 위선 없이, 승리를 목표로 온전히 헌신하는 삶입니다. “낮에와 같이”라는 말은, 주님을 위해 싸우는 우리가 정직하고 바르기 때문에 기꺼이 드러나도 괜찮은 삶을 뜻합니다. 이어서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라고 말하는데,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또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결국에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호심경, 곧 의의 호심경에 대해 말한 것과 동일한 내용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쓰레기 같은 것들, 어둠, 악을 버리고, 주님과의 거룩하고 의로운 관계 안에서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완벽해질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힘써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범했을 때에는 반드시 그 죄를 자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세번째로, 오늘 아침에 우리가 살펴볼 내용은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신”입니다. 정말 대단한 내용입니다. 참으로 위대하고 놀라운 개념입니다. 15절입니다.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이제 바울은 군인의 신발, 군화로 시선을 옮깁니다. 신발은 오늘날 우리 문화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원래 신발은 발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졌지만, 지금은 하나의 패션 아이템이 되었죠. 솔직히 말해서 오늘날에는 발을 꼭 이렇게까지 보호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동차 안에도 카펫이 깔려 있고, 도로는 잘 포장되어 있고, 교회에도 카펫이 깔려 있고, 사무실에도 카펫이 깔려 있죠. 카펫이 없는 곳들도 바닥이 비교적 깨끗합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거친 돌밭을 헤매거나, 진흙을 건너거나, 먼지 속을 걷거나, 또 가시덤불 위를 지나가는 일, 이제는 거의 없습니다. 도로는 잘 포장되어 있습니다. 실내에는 거의 카펫이 깔려 있습니다. 그 결과로 신발은 주로 이제 패션 아이템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비유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의 지형이 얼마나 험악했는지, 또 가시가 얼마나 날카로웠는지, 땅에 널려 있는 것들이 얼마나 발을 상하게 했는지, 자갈, 바위, 조약돌 위를 걷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말입니다. 어쩌면 오늘날에도 등산을 하거나, 사막을 가로지르거나, 아주 뜨거운 포장도로 위를 걷거나 할 때에 신발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면서 조금은 감을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신발을 신어야 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날에는 각종 스포츠용 신발, 그러니까 축구화, 농구화, 배구화 등등이 전부 따로 있죠. 각 신발마다 용도에 맞게 만들었습니다. 만약에 콘크리트 바닥에서 운동을 한다면, 그에 맞는 신발이 있고, 흙길에서 운동한다면 또 다른 신발이 있죠. 테니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윔블던의 잔디 코트, 클레이 코트, 콘크리트 코트, 고무로 된 코트 등등 어떤 코트에서 경기를 하느냐에 따라서 전부 밑창이 다릅니다. 나무 바닥용 신발도 있고, 또 다른 바닥용 신발도 있습니다. 달리기용 신발도 아주 종류가 여러 가지입니다. 석탄 재를 깔아 놓은 트랙에서 달릴 때 신는 신발과 고무 트랙에서 달릴 때 신는 신발이 다릅니다.

지금은 쇼핑몰에 가면 ‘풋락커(Foot Lockers)’와 같은 신발 전문점들이 있죠. 제 아이들이 쇼핑몰에 가면 가장 먼저 거기로 달려갑니다. 정말 신발이 아주 다양합니다. 제가 얼마 전에 제리 테럴(Jerry Terrell)의 라커룸에 갔다고 말씀드렸죠. 사물함을 보니까 야구화가 여덟 켤레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발이 엄청 많으시네요?” 이렇게 물었더니 “각 팀마다 경기장이 달라서 신발도 다 달라야 합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그의 말에 참 깊이 공감합니다. 대학 시절에 미식축구를 했던 때가 기억납니다. 한번은 로즈 볼(Rose Bowl) 경기장에서 열리는 경기였습니다. 그러니까 미국에서 매년 새해에 열리는 대학 미식축구 경기를 하게 되었죠. 경기 전 몇 주 동안 계속 비가 내려서 상태가 정말 좋지 않았습니다. 시즌 막바지라서 운동장이 이미 닳고 닳아 있었습니다. 잔디가 거의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비까지 오니까 아주 상황이 정말 엉망이 된 겁니다. 겉보기에는 괜찮아 보이도록 작은 카트를 몰고 다니면서 그 필드를 초록색으로 칠해 놓았습니다. 실제로는 잔디가 거의 없었습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꽤 괜찮아 보여서 정말 실제로 상태가 어떤지 잘 몰랐습니다. 저한테 미식축구화가 두 켤레 있었는데요, 하나는 잔디 상태가 나쁠 때를 대비해서 스파이크가 긴게 달려 있고요, 또 하나는 짧은 스파이크가 달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긴 스파이크 신발이 좀 무거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괜찮겠지’ 하고 짧은 스파이크가 달린 신발을 신었는데, 이게 완전히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잘못된 신발을 신었다는 사실을 제가 경기가 시작되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저는 경기 시작과 함께 상대팀이 차 넣은 공을 받기 위해서 저희 진영 가장 안쪽에 서 있었습니다. 공이 높이 날아와서 제가 품에 안은 후에 두 발짝 정도 내딛었는데, 그때 그대로 미끄러져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아주 관중이 가득한 경기장에서, 아무도 저를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저 혼자서 엉덩방아를 찧은 겁니다. 제가 공을 안은 채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으니까 상대팀 선수들이 저를 둘러싸고 내려다봤습니다. 결국에 저희 팀은 경기 시작부터 저희 진영 아주 깊은 곳에서 공격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때 저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다른 신발을 신었어야 되는건데.’ 그래서 후보 선수들한테 신발 좀 바꿔 달라고 부탁했는데, 아무도 바꿔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날 경기 내내 계속 미끄러지기만 했습니다.

우리가 뭔가를 갖추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신발에는 분명한 기능이 있습니다. 특히 전쟁용 신발은 더욱 그렇습니다. 운동 경기에서도 중요하지만, 생사가 걸린 전쟁에서는 얼마나 더 중요하겠습니까? 로마 병사는 평소처럼 바닥이 미끄러운 그런 가죽 신발을 신고 전투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 신발을 신고 나갔다면 여기저기서 미끄러지고 넘어졌을 겁니다. 바위를 타고 올라가서 적하고 싸우려 해도 계속 미끄러졌을 겁니다. 그래서 로마 병사들에게는 반드시 특별한 신발이 필요했습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전투 중에 신발이 생명을 구해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오랫동안 행군을 견딜 수 있는 신발이 필요했습니다. 엄청난 거리에다 험난한 지형을 이동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로마 군대에 대한 책을 읽어보셨을 겁니다. 율리우스 가이사르 장군의 장거리 행군 이야기, 여러분 기억하실 겁니다. 신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서 패배한 전쟁도 많습니다. 미국 독립전쟁 당시에도 워싱턴 장군 병사들이 신발이 닳아 없어져서 헝겊을 감고 다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동상, 부상, 상처, 이런 것들로 인해서 전투에서 패한 사례들이 아주 여럿 있습니다. 또 로마 제국 시대에는 이런 관습도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적의 진군을 막으려고 지뢰를 심지만, 당시에는 적군이 접근해 올 길목에 날카롭게 깎은 나무 말뚝을 박아 두었습니다. 전진하는 병사의 발이 찔리게 하기 위해서죠. 그래서 로마 병사들은 쉽게 뚫리지 않는 아주 두꺼운 밑창의 군화를 신었습니다. 발이 찔리면 걸을 수가 없게 되고, 그 순간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병사가 아무리 뛰어나고, 아무리 힘이 세다 해도, 발을 다치면 끝입니다.

정말입니다. 팔이나 손, 팔꿈치나 어깨를 다쳐도 어느 정도는 계속 움직이면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발을 다치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발을 다치면 사실상 무력해집니다. 그래서 병사들의 발을 상하게 하려 했던 것입니다. 또 전투 중에는, 아무리 세상에서 가장 최고의 검을 가지고 있다 해도, 제대로 서 있을 수 없다면 그 순간부터 큰 위기에 처합니다.

따라서 신발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로마 병사의 군화는 밑창이 두껍고 금속 징이 박힌 반 부츠 형태였습니다. 발을 감싸 올라오는 형태로 끈을 여러 방향으로 묶어서 발에 아주 단단히 밀착되게 했습니다. 밑창에는 작은 금속 조각들이 박혀 있었는데, 오늘날의 미식축구화나 육상화, 야구화 밑창처럼 땅을 꽉 잡아 주는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이 금속 징 덕분에 병사들은 흙 위에서 든든히 버틸 수가 있었습니다. 전투 중에도 균형을 잃지 않았죠. 바울이 설명하는 모습입니다. 바울은 로마 병사가 굳게 서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발이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어서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재빠르게 움직이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습니다. 미끄러지거나 흔들리지 않고, 넘어지지도 않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에게도 신발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진리로 허리 띠를 띠고 헌신하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경건하고 의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두 발로 제대로 설 수 없다면 결국 넘어지고 말 겁니다. 그래서 반드시 견고한 기초가 필요합니다.

이제 15절로 돌아가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여기서 말하는 ‘준비’라는 단어 때문에 혼란스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단어의 뜻은 단순히 ‘준비된’, ‘장비를 갖춘’, 이런 의미입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발을 신음으로써 준비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발에도 장비를 갖추고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이런 의미입니다. 실제로 디도서 3장 1절에서도 같은 단어가 ‘준비하게 하며’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핵심은 이겁니다. 우리는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장비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발은 전투를 위해 신발을 제대로 신은 상태여야 합니다.

이 구절을 두고 대부분의 사람들과 주석가들은 평안의 복음을 ‘전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의 신을 신었으니 나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런 식이죠. 주로 로마서 10장 15절을 근거로 삼습니다. 로마서 10장 15절은 이사야 52장 7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킹제임스 성경으로 보면 여기에도 동일한 표현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평안의 복음’이 나오죠. 그래서 로마서 10장에서 바울이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라고 말한 뒤에,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흐름과 연결시키는 겁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조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복음, 그러니까 평안의 복음은 분명히 전해져야 합니다. 로마서 10장의 요지이죠. 하지만 에베소서 6장은 그렇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6장은 복음을 전하러 가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14절의 첫 단어가 뭡니까? “서라”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가는 것’이 아니라 ‘서는 것’입니다. 이 문맥의 요점은 잃어버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와 맞서 싸우는 겁니다. 불신자를 향한 복음 전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마귀와 벌이는 영적 전쟁입니다. 어딘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자리에서 굳건히 서서 마귀를 대적하라는 겁니다. 이 개념은 고린도전서 16장 13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믿음에 굳게 서라.” 에베소서 6장 11절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능히 서기 위함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13절에서도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이렇게 강조합니다. 전부 ‘서기 위한 것’이지 ‘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복음을 전하러 가야 한다는 해석은 본문에 맞는 해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평안의 복음은 반드시 전파되어야 합니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그러나 에베소서에서 중요한 것은 복음 전도가 아니라, 신자가 사탄과의 영적 전쟁에서 싸우는 상황입니다. 우리가 평안의 복음으로 신을 신었기 때문에, 공격을 받을 때에도 자리를 지키고, 미끄러지지 않고, 넘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제 “평안의 복음”이라는 표현을 살펴봅시다. 평안의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좋은 소식입니다. 평안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평안입니다. 곧 평안에 관한 좋은 소식입니다. 그렇다면 평안의 좋은 소식이란 무엇입니까? 로마서 5장을 보셔야 합니다. 매우 중요한 본문입니다. 로마서 5장은 평안의 복음에 관한 내용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로마서 5장 6절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기본적인 상태가 나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인간은 연약합니다. 무능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불의한 사람을 위해서는 아무도 죽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6절에서는 우리가 연약한 자였고, 7절에서는 우리가 의롭지 못한 자였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8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9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우리는 원래 의롭지 못했고, 구원받지 못한 상태였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정의입니다. 6절에서는 연약한 자입니다. 7절에서는 의롭지 못한 자입니다. 8절에서는 죄인입니다. 9절에서는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한 자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10절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결론입니다. 연약하고, 의롭지 못하고, 죄 가운데 있고,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했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결국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원수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대상입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완전히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시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모든 사람을 포용하시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가족이다, 이런 식의 말을 그대로 믿지 마십시오. 오늘 예배를 시작할 때 나훔 1장을 읽었습니다. “여호와는…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은 보복의 하나님이십니다.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라면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다시 6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절입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그러나 8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말하자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너희는 원수이지만 내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이 관계를 회복하겠다.” 9절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절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아시겠습니까?

잘 들으십시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복음은 사람이 하나님과 전쟁 상태에 있었지만, 그리스도께서 평화를 이루셨다는 소식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께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평안의 복음입니다. 로마서 5장 1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적대 관계에, 반대편에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주님은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좋은 소식입니다. 좋은 소식은 이제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는 소식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더 이상 서로 다른 편에 서 있지 않습니다. 이제 같은 편입니다. 그렇죠? 하나님께서 내 편이신 것입니다. 이것이 평안의 복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9절은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라고 합니다. 골로새서 1장 20절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보이십니까? 복음은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고 알려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서 계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굳게 서 있는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사탄아, 네가 아무리 나를 공격해도 소용없다. 하나님께서 내 편에 계시다는 사실이 나의 신발이 되어서 나를 단단히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설 수 있는 이유입니다.

만일 제 자신의 힘만으로 지옥의 군대를 상대하면서 서서 싸워야 한다면 저는 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8장, 동산에 있는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군사들이 몰려왔을 때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아마 안토니아 요새에서부터 내려온 군사들이 한 오백 명쯤 되었을 겁니다. 횃불을 들고 밤을 밝히면서 예수님을 찾으러 왔습니다. 동굴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 동산으로 행군을 해온 겁니다. 예수님을 제압하기 위해서 몽둥이, 막대기를 들고 있었습니다. 제자들과 싸울 준비도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앞으로 나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군사들이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하자,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그니라.” 그러자 마치 도미노처럼 전부 뒤로 넘어져서 땅에 쓰러졌습니다. 최소한 오백 명쯤 되는 군사들이 한꺼번에 쓰러진 겁니다. 먼지를 털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묻습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이미 땅바닥에 엎드러졌던 그들이 다시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말합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베드로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을 한 겁니다. “와, 엄청난 능력이다. 이름만 말씀하셨는데 로마 군사들이 전부 넘어졌어.” 그러자 베드로는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을 겁니다. ‘이렇게 강력하다면 예수님이 잡힐 이유가 없지 않나?’ 그래서 성경은 베드로가 칼을 빼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어버렸다고 합니다. 사실 베드로가 귀를 노렸던 건 아닐 겁니다. 저는 베드로가 머리를 노렸다고 확신합니다. 말고가 몸을 숙였을 겁니다. 반사신경이 좋았던 거죠. 귀 하나를 자른다고 해서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문제는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사실상 로마 군대 전체와 싸우려고 했던 겁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베드로는 도대체 어디서 그런 힘을 얻은 걸까요? 무엇이 그런 확신을 주었을까요?” 베드로가 행동하기 전에 예수님의 이름 하나에 군대 전체가 땅에 쓰러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뭐, 문제가 생기면 그냥 “예수님, 해치워 주세요” 이렇게 말하면 되겠지. 그러면 한순간에 다 쓰러질 거야.’ 적수가 없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이미 능력을 보았기 때문에, 무조건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거죠. 그래서 베드로는 칼을 들고 주님을 지키기로 한 겁니다. 보십시오. 누가 자기 편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누가 자기 편에 서 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사실에서 힘을 얻은 거죠.

또 저는 미디안 군대를 생각해 봅니다. 미디안의 군대가 이스라엘 자손을 공격하러 쳐들어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미디안과 싸우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군대를 모으기로 합니다. 그렇게 해서 삼만 이천 명의 병사들이 모입니다. 정예병들이죠. 미디안과 싸우러 가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일을 위해 삼만 이천 명이나 필요하지 않다. 진지하지 않은 자들은 다 돌려보내라.” 기드온에게 지시하셨습니다. 기드온이 그대로 행했죠. 그 결과로 남은 사람은 고작 삼백 명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좋다, 이 삼백 명으로 미디안의 군대를 쳐라. 모두 항아리 하나와 횃불 하나와 나팔 하나씩을 들어라.” 만약 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이건 좀 이상한데. 산 위에 올라가서 미디안 군대를 둘러싸고는, 신호를 주면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깨뜨리고 횃불을 치켜들면 우리가 이긴다고?”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자 미디안 군대가 서로 일어나서 자기들끼리 죽였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기드온은 누가 자기 편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누가 자기 편에 서 계신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공회 앞에 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겠다.”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왜냐고요? 누가 자기 편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능력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편에 계신 것을 알았습니다. 바로 그 사실 위에 우리가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탄을 향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껏 덤벼라. 네가 무엇을 가지고 공격을 하든 전혀 두렵지 않다. 하나님이 내 편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제가 이 사실을 다 알면서도, 만일 제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고 하나님이 제 편이 아니시라면, 저는 늘 두려움 속에 살았을 겁니다. 정말로 죽을 만큼 두려웠을 겁니다. 잘 들으십시오. 우리는 절대적인 확신 가운데 설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8년쯤 전에 제가 에베소서 강해를 처음으로 했을 때 한번 이 이야기를 들려드린 적이 있습니다. 오늘 제가 다시 말씀드립니다. 제가 7학년, 그러니까 중학교 1학년 때의 일입니다. 로저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체구가 아주 작았습니다. 우리 둘 다 중학교 1학년이었지만, 로저는 마치 초등학교 4학년처럼 보였습니다. 키가 아주 작았습니다. 약간 통통하기도 했죠. 푹신푹신하고, 귀엽고, 천사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로저는 제 친구였습니다. 저는 목사님 아들이었고, 로저도 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주일학교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어쨌거나 저희는 아주 거칠기로 유명한 중학교에 다녔습니다.

정말 거칠었습니다. 항상 칼부림이 있었습니다. 남자 화장실에 들어가 보면 두꺼비집이 있는데, 아이들이 그걸 열어놓고 마리화나 담배를 피워놓고는 누구든지 들어오면 한 모금씩 빨아들였습니다. 이게 1950년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1950년대 중반쯤의 일입니다. 우리는 흔히 마약을 아주 최근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당시에도 늘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항상 약에 취해 있었습니다. 심지어 나이 많은 학생들이 많아서 학생 전용 주차장도 있었습니다. 저희 반에는 허비라는 형이 있었는데요, 무려 18살이었습니다. 그래서 차를 가지고 다녔죠. 정말 거친 학교였습니다. 싸움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됐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이 로저를 놀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로저의 외모가 그런 놀림을 부추겼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같이 걸어가고 있으면 항상 누군가가 로저에게 큰 소리로 놀리곤 했습니다. 이런 일이 아주 흔했습니다. 당시 아이들은 바지를 내려 입는다고 늘 혼났습니다. 교감 선생님이 그런 애들을 보면, 바지를 억지로 끌어올리고 커다란 벨트를 매게 하고, 멜빵까지 채우게 해서 아주 창피를 줬습니다. 그럴수록 아이들은 더 화가 나서 불만이 쌓여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제가 걸어가고 있는데, 아이들이 다가와서 뒤에서 우리를 밀쳐서 넘어뜨렸습니다. 팔에 끼고 있던 책들이 모두 떨어져 버렸습니다. 책들을 발로 차고 인도 끝에 있는 덤불 속까지 날려버렸습니다. 우리는 그런 상황에 대항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조용히 책을 주우러 다니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날 기술 시간에 사포질을 하고 있었는데, 주도자격인 조니라는 아이가 나무 블록으로 제 머리를 맞혔습니다. 머리가 찢어져서 꿰맸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했길래 그런 일을 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계속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든 일의 중심에 항상 조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체육 수업이 끝난 뒤에 탈의실에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 패거리가 또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불량배들, 험악한 아이들입니다. 장난처럼 우리한테 오더니 우리를 팔꿈치로 밀쳐버렸습니다. 그 힘에 밀려서 사물함 쪽으로 날아갔습니다. 뒤통수가 동시에 부딪히는 장면이 마치 코미디 같았습니다. 둘이 동시에 바닥에 나뒹굴면서 “쿵” 하고 떨어졌죠. 바닥에 누워 있는데, 마침내 로저가 말했습니다. “이제 그만해.” 사람이란 게, 참다 참다 보면 한계에 다다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말했죠. “로저, 그럼 뭘 어떻게 할 건데?” 그러자 로저가 형에게 말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 그거 좋은 생각이다, 좋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로저의 형 이름은 스티브라고 합니다. 저는 윌리엄스 가족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스티브 형은 롱비치 주립대의 미식축구 수비수였습니다. 키가 190센티가 넘고, 몸무게가 110킬로그램쯤 되는데 허리는 30인치밖에 안 됩니다. 정말 말 그대로 엄청난 체격을 가졌습니다. 제가 스티브 형을 잊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간증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빵 배달 트럭을 몰고 시속 60킬로미터 정도로 달려가다가 콘크리트 벽을 들이받았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나왔답니다. 그 형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엄청난 체격과 힘을 가졌습니다.

로저는 형에게 말하겠다고 했습니다. 다음 날 로저가 와서 말했습니다. “내일 스티브 형이 우리 학교에 와서 본때를 보여주기로 했어.” 불량배 패거리들이 체육관 옆에 늘 모여 있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아침마다 일찍 와서 담배를 피우고, 몰래 대마초를 들여와서 피우고, 그런 식으로 늘 그곳에 서 있어서 잔디가 다 닳아서 없어질 정도였습니다. 대략 한 여섯 명 정도가 항상 거기에 서서 떠들면서 시간을 보냈죠. 그날 스티브 형도 학교에 왔지만, 그 아이들이 볼 수 없도록 건물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수업 시작을 약 한 15분 앞두었을 때쯤에, 로저와 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보려고 그냥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로저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야, 너.” 조니를 향해서 그러는 겁니다. “이리 와.” 그 아이들이 웃고 떠들면서 완전히 신이 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또 한 번 실컷 괴롭히는 분위기였죠. 조니가 으스대면서 걸어 나왔습니다. 이미 전과도 있는 아이였습니다. 사실 나중에 들으니까, 참 안타깝게도, 훗날 강도 사건에 연루되어서 죽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조니는 비웃고 조롱하면서 걸어 나왔습니다. 바로 그 순간, 스티브 형이 건물 모퉁이를 돌아서 나왔습니다. 로저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묻습니다. “어느 놈이야?” 로저가 말했죠. “쟤야.” 그 다음 장면, 제가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본때를 보여줬습니다. 스티브 형이 다가가서 셔츠를 붙잡고 번쩍 들어 올리더니, 주먹 한 방으로 이를 네 개나 날려버렸습니다. 코가 완전히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위쪽 이 두 개를 포함해서 뭐가 어떻게 됐는지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정신을 그대로 잃어버렸습니다. 스티브 형이 조니를 다시 들어올렸습니다. 체육관 벽 앞에 큰 나무 울타리가 있는데요, 그 울타리 너머로 집어던져서 벽에 부딪히게 한 다음에 덤불 뒤로 떨어뜨렸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아이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시는 로저 건드리지 마라.” 그리고는 그대로 돌아서 걸어갔습니다. 그 이후로 학교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십니까? 로저가 학교를 장악했습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죠. 로저는 노스 다우니 중학교(North Downey Junior High)에서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되었습니다. 왜입니까? 로저에게 든든한 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셨다는 사실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편에 서 계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됩니까? 사탄이 공격을 해올 때, 우리의 발은 평안의 복음이라는 견고한 토대 위에 단단히 서 있습니다. 그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 소식이 있다. 나는 더 이상 하나님과 원수가 아니다. 나는 하나님 반대편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내 편이 되셨다.” 따라서 사탄이 무엇을 가지고 오든지, 우리는 10절 말씀처럼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신을 신은 사람의 확신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삶 속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세 가지 질문에 답해 보십시오. 첫째, 나는 정말로 승리하기를 원하는가? 나는 헌신의 띠를 띠고 있는가? 둘째, 나는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있는가? 셋째, 나는 전투 현장에 담대하게 서 있는가? 하나님에 대한 확신 위에 굳게 서 있는가? 만약 여러분이 주님과 주님의 능력을 의심하면서 흔들리고 있다면,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질문에 모두 “그렇다”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승리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여러분의 삶을 통해 놀랍고도 혁명적인 일들을 이루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확신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가 더 이상 원수가 아니라 친구가 되게 하시고, 소외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지게 하시며, 멀리 떨어진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형벌을 대신 지시고 우리의 심판을 담당하시며 주님의 진노와 공의를 홀로 감당하셔서 우리가 이 놀라운 은혜를 알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능력에 감사합니다. 사탄을 무너뜨렸던 바로 그 능력, 죽음을 이기는 능력을 우리 안에 심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 안에서 마귀를 대적할 힘을 주시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게 하시며, 마귀의 간계를 알지 못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모든 유혹을 피하게 하시고, 우리의 생각을 예수 그리스도께 사로잡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만들어 주옵소서. 이 모든 은혜의 특권을 주신 것을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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