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신자가 지옥의 세력과 치르는 전쟁’이라는 위대한 진리를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를 통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놀라운 능력과 자원을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동시에 바울은 우리가 자만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원 때문에 이 전쟁이 쉬울 것이라고 착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을 받았고,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시는 하나님께 구할 수 있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수 있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강건해질 수 있고, 이 모든 자원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고,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 손에 있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주권적 계획이 선을 이루는 것이라고 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쉽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이 본문에서 우리가 지난 몇 주 동안 살펴본 것처럼, 사도 바울은 신자의 영적 전쟁에 관한 전략과 계획, 원수의 정체, 전쟁의 전 영역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내용을 종합하는,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한 가지를 결론으로 말합니다. 11절 하반절입니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3절에서 다시 반복합니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그래야 우리가 승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신학이 아무리 탄탄하더라도, 교리의 기초가 아무리 견고하더라도, 성경을 아무리 많이 알고 있더라도, 하나님의 진리를 아무리 많이 알고 있더라도, 여전히 패배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전쟁은 이론만 안다고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아니라, 실제 삶 속에서 날마다 치러내야 하는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모든 지적인 자원들, 영적인 자원들,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과 임재까지도, 신자임에도 그저 아는 것에 그치면 전투에서 패배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이 전쟁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상기시켜 줍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빨리 깨달을수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승리를 더 빨리 경험하게 됩니다.
다른 문맥이긴 하지만 누가복음에 이와 관련해 함께 생각할 구절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4장 31절입니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이 말씀을 곱씹어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왕이라면 자기 병력을 신중하게 점검하고 전략을 세운 후에 전쟁에 나가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에베소서 6장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는 이유이죠. 우리가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 위에 반드시 더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전략을 면밀하게 점검하고, 계획을 세우고, 원수의 실체를 분별하고, 승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자, 먼저 지난주에 살펴본 14절을 복습하겠습니다. 첫번째 전신갑주입니다. 바울은 로마 병사의 전투 복장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서서 ‘알레데이아(alētheia)’,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여기서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는 진리는 태도적 진리, 다시 말해서 준비된 자세, 위선 없는 헌신입니다.
여기서 “허리 띠를 띠고”라는 표현은 유대인의 사고 체계에서 ‘준비됨’, 곧 ‘즉각적으로 대비하라’ 이런 의미를 가진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허리에 띠를 띠고”, 또는 “허리를 동이고”라는 말을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다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출애굽 당시 유월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을 떠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허리에 띠를 띠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유대 사상에서 매우 익숙하고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표현이죠. 사도 바울은 바로 이 동일한 개념을 영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예를 들면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 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마음을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핵심입니다. 유대인은 옷자락이 바람에 날리는 상태로, 그러니까 준비되지 않은 채로 길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긴 옷자락을 띠 안으로 끌어올려서 몸을 단단히 정리한 뒤에야 여행을 떠났습니다. 로마 병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에 나설 때는 싸우는 동안 옷이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단단히 묶은 띠 안으로 튜닉을 끌어올렸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전쟁을 위한 준비 태세를 갖춰야 한다는 겁니다. 준비되어 있어야 하고, 영적 전쟁에 몰두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강조되는 핵심 개념은 헌신입니다.
지난 며칠 동안 장로님들과 함께 이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교회가 점점 성장할수록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집니다. 교회 규모가 커질수록 중심에서 먼 지점에서는 전반적으로 헌신의 수준이 낮아집니다. 그 이유는 공동체의 핵심이라고 느끼지 못하고, 점점 구경꾼이 되기 때문이죠. 그렇게 되면 헌신도가 낮아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여러분에게 끊임없이 헌신하라고 말씀드려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은혜가 커질수록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지고, 그만큼 원수의 저항도 거세집니다. 원수의 저항이 거셀수록 더욱 절실하게 헌신해야 하기 때문이죠.
제리 미첼(Jerry Mitchell) 목사님이 아주 특별한 자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지난 주일에 홈빌더스(Homebuilders) 프로그램에서 말씀을 전했던, 조니크 샤함(Zonich Shaham) 장군과 함께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이스라엘 장군으로, 무수한 전투 경험을 가진 샤함 장군은 기독교 신자는 아니고요, 매우 강한 시온주의적 성향을 가진 분입니다. 이스라엘의 주권을 굳게 믿으시고, 이스라엘의 역사적 전통을 매우 존중하는 분입니다. 샤함 장군과 함께 점심식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저에게는 참 큰 특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정말 매력적인 분입니다.
저는 샤함 장군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했는데, 대화 도중에 저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난주 주일 설교 말씀 잘 들었습니다. 헌신에 대해 말씀하신 부분이 참 좋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장 중요한 핵심이 바로 헌신입니다.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뛰어난 민족이기 때문에, 뛰어난 지성과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쟁에서 이긴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헌신하기 때문에 승리합니다. 목사님께서 ‘허리에 띠를 띠라’는 표현을 ‘헌신’과 ‘준비된 태도’라고 설명하셨는데 아주 정확합니다. 저희는 지금도 그 표현을 씁니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저에게 해 주셨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샌퍼난도 밸리(San Fernando Valley)에 사는 유대인 친구에게 아들이 하나 있는데, 이스라엘에 가서 살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키부츠(kibbutz)로 갔습니다. 2년쯤 지나서 군에 입대해야 할 나이가 되었는데, 이스라엘 군대에 입대할 수도 있었고 미국으로 돌아올 수도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편한 길을 택해서 미국으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군에 입대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저에게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저와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당연히 이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죠. ‘장군님, 저 아시잖아요. 좀 편한 자리로 보내주시면 안될까요? 책상 위에 발 올리고 좀 편하게 일할 수 있는 그런 자리로 보내주세요.’ 그런 부탁을 하러 온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의외의 부탁을 했습니다.”
“장군님, 제가 받은 보직이 너무 쉽습니다. 이건 제가 원했던 게 아닙니다. 저는 이스라엘 군대에서 가장 뛰어나고, 가장 전략적이고, 가장 치열하고, 가장 힘든 부대에 가고 싶습니다. 그런 부대가 어디인가요?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까요?” 샤함 장군은 최전선에서 가장 위험한 임무를 맡은 정예 공수부대가 있는데, 전투가 시작되면 누구보다 먼저 투입되어 가장 앞에서 싸우는 부대라고 설명을 해 주었답니다.
“하지만 그 부대에 들어가기 위해 요구되는 과정은 상상을 초월한단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 단계는 사흘도 아니고 나흘 동안 하루 종일 쉬지 않고 행군을 해야 해. 사막 한가운데에서 마사다로 이어지는 산을 완전군장을 메고 올라야 해.” 그러자 그 청년이 이렇게 답했답니다. “바로 그게 제가 원하는 겁니다.” 그 청년은 실제로 공수부대에 지원해서 훈련을 마쳤답니다. 훈련을 끝냈을 때 바닥에 엎드린 채로 몸을 전혀 움직일 수가 없는, 단 하나의 근육도 말을 듣지 않는 그런 상태가 되었지만, 끝까지 해낸 거죠. 샤함 장군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기는 이유가 이겁니다. 이스라엘이 승리하는 이유는 이처럼 헌신된 청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진리의 허리띠’라는 개념을 통해서 말하는 핵심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전쟁입니다. 세상은 편안한 삶을 약속하면서 우리를 미혹하지만, 우리는 지금 영적 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의 승리는 우리가 이 싸움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 그레이스 교회는 이 도시와 이 나라, 더 나아가 온 세상이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영향력을 지금 끼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실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한계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헌신 부족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분명히 짚어 주듯이, 모든 것은 헌신에서 시작됩니다.
이제 다시 14절을 보시면, 바울은 또 다른 장비를 소개합니다. 바로 호심경입니다. 바울은 “의의 호심경”이라고 했습니다. 이 호심경이란 가슴 그리고 배, 그러니까 심장과 내장을 보호하기 위해 착용하는 갑옷입니다. 모든 로마 병사들은 이 호심경을 착용하고 전쟁에 나갔습니다. 맞붙어서 싸우는 적을 잘 막아낸다고 하더라도, 먼 곳에서 날아오는 화살에 가슴을 맞으면 치명적이기 때문에 언제나 이 호심경을 착용했습니다. 특히 근접전에서는 이 부분이 그대로 노출되어서 아주 취약해지죠. 그래서 호심경으로 충분히 막아낼 수 있는 공격도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전투에 나가는 로마 병사를 예로 들면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병사는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다. 허리에 띠를 띠고,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다. 이 싸움에 진지하게 임하고 있고, 반드시 이기기 위해 뛰어들 각오가 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자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보호해야 한다.’ 로마 병사들의 호심경에는 종류가 여러 개 있었습니다. 어떤 것은 아주 두꺼운 아마포로 만들어져서 몸 아래쪽까지 길게 내려왔습니다. 그 위에 동물의 발굽이나 뿔을 얇게 저며서 엮어 달고는 마치 뿔처럼 만든 것도 있었습니다. 발굽이나 뿔 같은 아주 단단한 재질을 연결한 겁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쇠사슬 갑옷 같은 형태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두꺼운 아마포 위에 작은 금속 조각을 매달아 놓기도 했죠.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는 단단한 금속으로 주조된 아주 커다란 호심경이죠. 목 아래에서부터 허벅지 위까지 생명과 직결된 모든 부위를 덮습니다. 독수리 문양이나 로마를 상징하는 “SPQR” 같은 표시가 새겨진 것을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우리가 로마 병사를 떠올릴 때 자연스럽게 연상하는 바로 그 갑옷입니다. 가장 중요한 부위를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죠.
솔직히 말해서, 저는 수년 동안 그리스도인의 전신갑주를 연구하면서 이 장비들 사이에 우선순위가 있는지를 고민해 보았습니다. 더 중요하다거나 덜 중요한 장비가 있을까 하고 말이죠. 하지만 순위를 매길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전신갑주 전체를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전신갑주 전체를 입어야 합니다. 각각의 장비에는 모두 분명한 목적이, 또 반드시 필요한 기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1순위, 2순위, 이렇게 순위를 나눌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전신갑주의 핵심이 바로 의의 호심경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여러분의 삶에 의가 없다면, 헌신도 없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삶 속에 참된 의가 없다면 믿음의 방패도 들 수 없고, 평안의 신발도 신지 못합니다. 구원의 투구도 쓰지 못하고,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도 휘두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의에 대한 헌신이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제대로 갖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란 결국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뜻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않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헌신의 시작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잡힐 때 헌신이 시작됩니다.
이제 잠시 ‘의의 호심경’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당시 전쟁에서 반드시 보호해야 할 부위는 이 몸통이었습니다. 물론 머리도 중요하죠.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투구를 썼지만, 당시의 전투 방식은 주로 백병전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머리를 단번에 베어낼 만큼 큰 대검보다는 단검을 사용했습니다. 이 단검에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는 부위가 어디일까요? 바로 가슴하고 배입니다. 따라서 로마 병사들이 보호하려고 했던 것은 위쪽에 있는 이 심장 부위, 그리고 유대인들이 ‘창자’라고 불렀던 아래쪽 부위입니다. 그러니까 몸의 중심부,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모든 기관들이 모여 있는 그곳이죠. 그러니까 호심경은 가장 중요한 두 부위를 보호했습니다. 심장과 내장입니다. 생명을 지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 점은 유대인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마음, 그러니까 심장은 생각을 의미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마음은 사고 작용을 가리킵니다. 유대인의 개념에서 마음, 심장은 정신과 생각을 가리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라는 말씀도 바로 이 생각의 영역을 가리킵니다. 생각은 언제나 마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창자는 감정과 정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에는 ‘긍휼의 창자’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에서 “마음”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감정은 실제로 복부에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감정이 몰려올 때 우리는 배가 아프고, 속이 뒤틀리고, 복부가 아린 느낌을 받죠. 감정은 그렇게 우리의 몸을 지배합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의 사고 속에서는 이 비유가 매우 자연스러운 겁니다. 정리하자면, 마음은 생각의 영역을 뜻하고, 창자는 감정의 영역을 가리킵니다.
이제 이것을 전신갑주 비유에 그대로 적용해 보면, 바울의 의도가 아주 분명해집니다. 사탄은 신자를 주로 두 영역에서 공격합니다. 하나는 생각의 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감정의 영역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떻게 느끼느냐의 문제입니다. 사탄은 신자의 사고 방식과 감정적 반응을 노립니다. 그래서 신자는 반드시 보호받아야 합니다. 바로 이 지점을 사탄이 집중적으로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사고 체계에 거짓된 정보를 주입합니다. 감정에도 거짓된 정보를 주입합니다. 거짓 교리와 거짓말, 왜곡된 종교적 진리로 우리의 마음을 흐리게 합니다. 동시에 감정의 영역을 자극합니다. 악한 감정적 반응을 끌어내려고 하고, 우리의 애정과 욕망을 비틀고 타락시키려고 합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생각과 감정을 지킨다면, 뚫리지 않습니다. 사탄은 거짓 교리로 여러분의 생각을 혼란스럽게 하려고 할 것이고, 잘못된 감정으로 여러분을 흔들어서 잘못된 것을 갈망하게 하고, 잘못된 것을 욕망하게 하고, 잘못된 것에 애정을 두게 하려 할 겁니다. 그러나 생각과 감정을 보호하면, 사탄의 공격은 거기서 막힙니다.
생각과 감정은 모두 행동하게 만드는 모든 요소입니다. 여기에는 지식의 개념이 포함됩니다. 반응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지식입니다. 이해, 의식, 의지, 욕망, 충동, 애정, 느낌, 감정, 이 모든 것이 우리가 행동하도록 이끄는 요소들이죠. 바로 이 모든 영역을 의의 호심경이 보호합니다.
사탄은 우리 삶 속으로 들어와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서 빼앗아 가고, 그 자리를 거짓으로 채우려 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왜곡으로 채우고, 더러움으로 채우고, 하나님의 것이 아닌 도덕으로 채우고, 하나님의 것이 아닌 신학으로 채우고, 온갖 거짓과 반쪽짜리 진리로 마음을 가득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탄은 먼저 생각을 공격합니다. 사물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고, 올바르게 해석하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죄에 대해서 “그거 나쁜 거 아니야. 나쁜 거 아니잖아” 이렇게 말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로 죄의 바다 속에 잠기게 합니다. 그래서 죄에서 점점 관대해지게 하고, 죄를 즐겁게 만들어서는 죄가 실제로 얼마나 악한지 느끼지조차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텔레비전이나 영화 속에서 죄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겁니다. 또 죄를 아름다운 음악, 또 선율에 실어서 들려줍니다. 우리의 분별력 있는 사고를 흐리게 하고 혼란스럽게 합니다. 그런 다음에는 양심을 무너뜨립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게 만들어서 한때는 경고하던 양심을 점점 무디게 하고, 결국에는 더 이상 경고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의지를 약화시키고, 의지를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감정을 혼란스럽게 만들어서 잘못된 방식으로 느끼게 하고, 욕망을 타락시키고, 애정을 잘못된 대상에게로 끌고 갑니다. 이 모두가 사탄이 생명과 직결된 바로 그 핵심 영역에 집중적으로 가하는 공격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 모든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는 것이 바로 의, 곧 의의 호심경입니다.
최근에 신문을 읽다가 뉴욕시 경찰국이 모든 경찰관에게 방탄 조끼를 지급하기 위해서 모금을 하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바로 생명과 직결된 핵심 부위를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로마 병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몸통이 가장 중요한 영역입니다. 신자에게도 동일합니다. 핵심 부위를 지켜야 합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감정을 지키십시오. 그러면 사탄은 여러분을 뚫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이 ‘의’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바울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걸까요? 여기에는 세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의, 둘째는 전가된 의, 셋째는 실제적인 의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말하는 의가 우리의 자기 의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 것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주신 의를 삶 속에서 실제로 살아내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입니다. 이제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자기 의라는 개념부터 살펴봅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탄이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뭔지 한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사탄의 최종 목적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게 아닙니다. 자신과 함께 지옥으로 가는 겁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나라를 채우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무릎 꿇는 사람들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늘의 시민이 늘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사탄이 원하는 것은 지옥을 채우는 겁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궁극적인 목표는 멸망시키는 것이고, 사람들을 지옥에 던져 넣는 겁니다. 사탄이 하려는 짓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의로 충분해.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야.” 사탄은 인생 전반에 걸쳐 삶을 망가뜨리려고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 시대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자신이 충분히 선하다고 생각했죠. 스스로 해낼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바리새인들은 틀렸습니다.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인간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는 자기 의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이 바리새인, 곧 율법주의자의 전형적인 태도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 기독교를 제외한 세상의 모든 종교 체계는 인간이 스스로 충분히 선해질 수 있고, 자기 힘으로 해낼 수 있다는 생각 위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8장 9절에서 주님은 이런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말하자면 이런 뜻입니다. ‘저는 참 괜찮은 사람입니다. 제 자신이 참 마음에 듭니다. 제 스스로 이만큼 해냈습니다. 저는 의롭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사실 율법이 요구한 금식은 일 년에 몇 차례 뿐이었지만, 그 이상을 하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쪽 구석에서는 세리가 가슴을 치며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요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말은 곧 “의롭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진짜 의로운 사람입니까?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입니까, 아니면 스스로 할 수 없다던 사람입니까?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할 수 없다던 사람입니다. 선하다고 믿은 사람은 지옥에 갔고, 죄인이라 고백한 사람은 천국에 갔습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는 호심경이 없습니다.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없습니다. 결국 사탄은 그런 사람을 영원한 멸망으로 끌고 갈 겁니다. 물론 궁극적인 심판의 권한은 하나님께 있지만, 사람을 유혹하고 끌고 가는 역할은 사탄이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부족합니다. 이사야 64장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이것이 인간이 내놓을 수 있는 최선입니다. 만일 자기 의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면, 그보다 더 큰 착각은 없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는 매우 도전적인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만일 “의인은 없다” 이렇게만 말했다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예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아니다. 너도 아니다. 단 한 사람도 없다.”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여기서 “무익하게 되었다”는 말은 우유가 상해 버린 것처럼 썩어 버렸다는 뜻입니다. 인류 전체가 그렇게 상해 버렸다는 말입니다. 의로운 사람도 없고, 선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결과 19절 하반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왜 그렇습니까? 23절이 답을 줍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자기 의는 의의 호심경이 아닙니다. 자신의 의로 자신을 지키려고 한다면, 반드시 지옥의 세력 앞에 희생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틀림없는 결과입니다. 이 점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예가 하나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4절로 가서 사도 바울이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지 한번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의라는 관점을 먼저 꺼내 놓습니다. 빌립보서 3장 4절입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다시 말해서, 만일 자기 의로 구원받는 것이 가능하다면, 충분히 선할 경우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면,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하다면, 바울 자신이야말로 가장 자격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다시 말해서, 인간적인 의의 기준으로 따져 보자면 바울이 대부분의 사람들을 능가한다는 말입니다. 잘난 사람들보다도 더 앞선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5절에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혈통부터가 정통 이스라엘 사람이고, 할례도 정확히 율법이 요구한 그 날, 여덟째 날에 받았다는 말입니다. 처음부터 흠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어서 말합니다. “베냐민 지파요.” 베냐민 지파는 유대인의 정체성이 가장 분명한 지파입니다. 구약을 살펴보면, 베냐민 지파가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지 분명히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서, 창세기 35장에 따르면 베냐민은 이스라엘의 아들이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가장 사랑하던 아내 라헬의 아들입니다. 사랑받던 두 아들 요셉과 베냐민 가운데서도, 열왕기상 12장에서 유다 지파와 함께 재건된 이스라엘을 이룬 것은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포로 이후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에도 베냐민 지파가 등장합니다. 에스라 4장 1절에 나오죠. 에스더 시대에 악한 하만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도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참된 혈통을 가진 사람이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다.” 다시 말해서 정통 유대인이라는 뜻입니다. “율법으로 말하면 나, 바리새인이다.” “나는 정통 히브리인이고, 베냐민 지파 출신이고, 그 체계 가운데서 가장 엄격하고 가장 종교적이고 가장 율법적인 분파에 속한 사람이야. 곧 바리새인이라는 말이야.”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참으로 놀라운 말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자기 의를 의지하려 한다면, 다른 누구보다도 많은 조건을 가진 나를 봐라. 만일 자기 의가 천국에 들어가는 길이라면, 나는 충분히 그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그런데 빌립보서 3장 7절은 한 단어로 시작합니다. 무엇입니까? “그러나.”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이어서 9절에서 핵심을 말합니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바울은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의 의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신자가 될 때, 그리스도인이 될 때, 믿음의 손을 내밀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손을 붙잡는 그 순간,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입히십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거룩함으로 덮어 주시는 겁니다.
그 순간부터 영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보십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신 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베일을 씌우듯이 우리를 덮으시고, 우리를 보실 때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자로 보십니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전가된 의”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의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바울은 그 모든 자신의 의를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아우구스투스 톱레이디(Augustus Toplady)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오직 긍휼의 빚진 자, 언약의 은혜를 노래하네, 내 몸에 주의 의만 입고 내놓을 제물 하나 없어도 두려움 없이 주 앞에 서네, 율법의 공포와 하나님의 심판이 이제는 내게 아무 상관 없으니, 내 구주의 순종과 흘리신 보혈이 내 모든 허물을 가려 주셨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을 때, 우리의 죄를 보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한 단계가 더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의로는 결코 덮임을 받을 수도 없고 보호를 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잘 들으십시오. 구원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의조차도 호심경의 기초일 뿐입니다. 거기서 반드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빌립보서 3장을 보고 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자신이 전가된 의를 가지고 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자기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절에서는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14절에서는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합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달려간다. 여전히 배운다. 여전히 앞으로 나아간다. 여전히 갈망한다.”
바울이 정말로 말하려는 것은, 전가된 의는 실제적인 의를 가능하게 하는 기초일 뿐이지, 자동으로 삶의 현실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여러분, 잘 따라오십시오.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이 구원을 받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여러분에게 주어졌습니다. 그 의는 영원토록 여러분을 덮습니다. 그러나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의 안에 있는 의로운 원리들을 날마다 실제로 삶에서 적용해야 합니다. 그 의를 삶 속에 구현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를 가지고 있으니, 이제 무엇을 해도 상관없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들려주셨던 이야기를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역자가 있었는데요, 어느 날 욕설을 했답니다. 아버지가 깜짝 놀라서 이렇게 물으셨답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습니까?” 그러자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괜찮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의로 덮여 있잖아요. 그냥 제 옛 본성일 뿐이에요. 옛 본성이라는 게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그 사역자가 또 한 번은 누드 바에 가보고 싶다고 했는데, 그래서 함께 있던 사람들이 이렇게 물었답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왜 그런 곳에 가고 싶다는 거예요?” 그러자 그 사람이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의로 덮여 있으니까요. 그냥 그건 제 옛 본성일 뿐이에요.”
하지만 여러분, 결코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분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덮여 있다고 해서 우리가 항상 마땅히 살아야 할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보장해 주는 것은 단 하나뿐입니다.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이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지위와 삶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지위는 영원히 안전하지만, 삶은 언제나 그 지위에 걸맞게 따라오지는 않습니다. 바로 이 점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 나는 하나님의 의를 받았다. 그러나 이미 얻었다는 뜻은 아니다. 이미 붙잡았다는 뜻도 아니고, 이미 도달했다는 뜻도 아니다. 나는 반드시,” 빌립보서 2장에 나와 있죠, “나의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하기 원하시는 일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 바로 이것이 의의 호심경을 붙이는 것입니다.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의의 호심경을 입는 것입니다. 물론 그 기초는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서 옵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진젠도르프 백작(Count Zinzendorf)이 쓴 위대한 찬송을 존 웨슬리가 번역했죠. 저는 이 찬송가가 참 좋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여러 번 불러 보셨을 겁니다. “예수의 피와 의는 나의 아름다움이요 나의 영화로운 옷이라. 불타는 세상 한가운데서도 이 옷을 입고 기쁨으로 머리를 들리라. 그 큰 날에 담대히 서리니 누가 나를 고발하리요. 주 안에서 온전히 사함받아 죄와 두려움, 죄책과 수치에서 벗어났도다. 죽은 자들아 이제 그의 음성을 들으라. 쫓겨난 자들아 이제 기뻐하라. 이것이 그들의 아름다움이요 영화로운 옷이니 예수의 피와 의라.”
그렇습니다. 기준은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우리를 덮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됩니다. 로마서 3장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하다가, 2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그리스도의 완전함이 우리에게 주어졌고,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지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는 의를 결코 스스로는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의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선물로 주어집니다. 얼마나 놀라운 진리입니까?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 전가된 의(imputed righteousness)만이 아닙니다. 핵심은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핵심은 옛 청교도들이 “주어진 의(imparted righteousness)”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 의를 실제로 사용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의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날마다, 순간순간의 선택의 문제입니다. 실제적인 의를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전신갑주를 입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나는 정말 간절히 원한다.” 빌립보서 3장 10절부터 나오죠. “...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리스도를 닮는 겁니다. 이런 말입니다. “내 실제적인 의가 나의 지위적인 의와 일치하기를 원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거룩한 삶이 바로 호심경입니다. 제 생각에는 어느 순간 이 거룩한 삶이 교회에서 잊혀져 버렸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거룩한 삶을 살지 않으면, 패합니다. 무엇을 잃어버리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첫번째로 잃어버리는 것은,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이것만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의로운 삶을 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복을 거두십니다. 요한일서는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합니다. 말씀에 순종함으로 기쁨이 충만해진다는 뜻입니다. 순종이 없으면, 기쁨도 없습니다.
한 가지 제가 말씀드리죠.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자주 슬퍼하고 삶에 근심을 안고 사는 이유는, 인간관계 문제 때문에 심리 상담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거룩하게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 문제를 거의 외면해 왔습니다. 대신에 각종 프로그램, 세미나, 상담으로 대체해 왔습니다. 그러나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의 삶에 문제가 있습니까? 가장 먼저 점검해야 할 것은 여러분 자신의 거룩함입니다. 결혼 생활에 문제가 있습니까? 가장 먼저 살펴봐야 하는 것은 바로 거룩함입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거룩한 삶을 살고 있지 않으시다면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거두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죄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구원을 잃은 것이 아니라 즐거움, 기쁨을 잃은 겁니다. 기쁨을 잃어버린 겁니다. 의로운 삶의 문제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를 보면, 종이로 된 갑옷을 두르고 다니는 것처럼 보입니다. 식당에 가면 아이 목에 둘러 주는 그 종이 앞치마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입고 있는 전형적인 호심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전혀 쓸모가 없습니다. 체계나 방법이나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진 것이죠. 삶에 문제가 있고 가정에 문제가 있으면, 열 번이든 열두 번이든 상담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종이 호심경이나 붙여줍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종이 호심경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열 번이나 열두 번의 상담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열 시간, 열두 시간을 머물면서 삶 속에 있는 거룩하지 않은 요소들을 바로잡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바로 이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레이스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잘 들으십시오. 우리 교회에는 더 이상의 프로그램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더 많은 방법론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삶 속의 거룩함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우리는 지금 음란과 물질주의와 인본주의의 바다에 잠겨 있는 사회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를 집어삼킬 정도로 강력하게 밀려 들어오고 있어서, 너무도 쉽게 거룩한 삶을 포기해 버립니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역이라는 깃발 아래에서조차 종이 전신갑주를 입습니다. 프로그램, 기법, 방법론 같은 것들이죠. 제가 “기독교적인 것들”이라고 부르는 그런 것들입니다. 실제 해결책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이제 여러분 자신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가정에 문제가 있으십니까? 먼저 거룩함을 점검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히 읽고 계십니까? 기도 생활은 어떠십니까? 가족을 정말 사랑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속한 사회와 문화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끄러움 없이 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예물을 드리고, 맡겨진 나머지 모든 것에 대해서 청지기로서 잘 관리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제시하신 기준에 따라 의로운 삶을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 이렇게 살지 않으면서 어떻게 잘 살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렇지 않은데도 잘된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스스로 무너뜨리시는 셈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지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늘 극단적인 해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실제 문제를 다루기보다는 종이 호심경을 붙이는 쪽을 더 선호합니다. 여러분이 순종하지 않고, 죄가 있는데도 고백하지도 회개하지도 않은 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다면, 그릇된 태도를 품고 원한을 마음에 쌓아 두고 문제를 바로잡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다면, 잘못된 생각을 의도적으로 키우고 있다면, 말이 마땅하지 않고 행위도 마땅하지 않은데 그런 삶을 계속 고집한다면, 제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보증해서 말씀드립니다.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여러분은 기쁨을 잃게 될 겁니다.
또 한 가지 일이 일어나는데요, 여러분은 열매 맺지 못하게 될 겁니다. 생산성을 잃게 됩니다.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가 떨어지면서 시드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상도 잃어버립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 여러분 가운데 어떤 이들은 천국에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능력이 크게 제한될 겁니다.
또 하나 덧붙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의롭게 살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합니다. 그런 삶을 살고 싶으세요?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은 채, 죄 가운데 의롭지 못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이 주고자 하시는 기쁨을 스스로 포기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심어주신 가능성에 감사하지도 않고, 의롭지 못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일을 거부하시겠습니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리게 될 복들을 포기하고 살아가시겠습니까?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원하시는 분을 향해서 의롭지 못한 삶으로 그 영광을 무너뜨리시겠습니까?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이 모두가 하나님께 대한 모욕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하늘 가장자리에 서서, 두 손에 복을 가득 들고 계십니다. 그 복에는 기쁨이 있고, 열매 맺음이 있고, 궁극적인 상이 있고,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돌아서서 죄를 따르시겠습니까? 잘 들으십시오. 제가 앞서 잠시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의로운 원리와 우리의 삶을 진정으로 조화시키기 시작한다면, 하나님께서 이 교회와 이 지역과 이 나라와 온 세상 가운데서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 아직 단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다른 누구보다도 제 자신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여러분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 삶의 영역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문제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 있고 의롭다면, 아마도 그렇게 많은 시련을 겪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듬어야 할 것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인들은 늘 이 분명하고 핵심적인 진리를 외면하고서는, 성경이 분명히 제시하는 해답 대신 피상적인 해결책을 붙잡으려고 합니다.
제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 전신갑주를 입으십시오. 전쟁입니다. 저는 결코 만족하지 않을 겁니다.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까지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주님, 이 마지막 싸움에서도 이기게 하옵소서.”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잠재력을 모두 사용하기를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그러려면 우리 모두가 이 원칙에 헌신해야 합니다.
이제 조금만 더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1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여기서 권한다는 것은 무릎을 꿇고 빈다는 뜻입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이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쟁이다. 의에 헌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죄의 빈도가 점점 줄어들고, 죄를 지었을 때 고백하고 회개하며 돌이킨다는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문제를 다룬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삶을 정직하게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이런 것들에 넘어가면 패배합니다. 그러면 기쁨이 사라지고, 열매도 맺지 못하고, 상도 사라지고, 결국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됩니다.
부정형 명령입니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이에 대한 긍정형 명령은 12절에 나옵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헌신하라는 말입니다. 의로운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책망할 것이 없는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히브리서 11장 13절입니다. “...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땅의 나그네와 외국인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땅에 너무 뿌리를 깊이 내려버렸습니다. 세상의 변덕과 세상의 것들에 얽매이고, 요한이 말한 것처럼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은 우리가 속한 곳이 아니다. 세상은 우리를 미워한다.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우리는 세상과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상에 깊이 파묻혀 올바른 관점을 잃어버립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자로서, 영적 전쟁을 치르며, 하나님의 공급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의로운 삶을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잘 들으십시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어리석은 극치는 이 세상 체계에 완전히 휩쓸려 들어가는 겁니다. 디모데후서 2장 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힘들 때도 견디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잘 들으십시오.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바울의 말은 이런 뜻입니다. ‘군인으로 있으면서 동시에 민간인으로 살 수는 없다. 둘 다 될 수는 없다. 만일 여러분이 지휘관을 위해 싸우기로, 주님을 섬기기로 부름을 받았다면, 이 세상 체계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우리 교회 안에는 영적으로도, 지적으로도, 영적 은사의 측면에서도, 교제와 사역의 측면에서도, 재정의 측면에서도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이루기에 충분한 자원이 이미 있습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입니다. 단지 필요한 것은 헌신 그리고 의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억지로 하는 것 바라지 않습니다. 거룩한 삶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길 바랍니다. 아시겠습니까? 신자들이 첫째로 진리의 허리 띠를 띠고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헌신하고, 둘째로 거룩한 삶을 살고 있다면,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거룩함 속에서 성령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독교 안에서 사용되는 각종 강압적인 방법들을 거부합니다. 진짜 문제를 다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진짜 문제는 참된 헌신과 참된 거룩함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거룩하게 말입니다. 바울이 골로새서 3장에서 말한 것처럼,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의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반드시 의의 호심경을 붙여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4절에서 바울이 말한 그대로 해야 합니다.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여러분, 아주 사소한 것 하나로도 무너질 수 있습니다. 지휘관이 다른 군대와 전투를 벌일 때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선발대를 보내서 교두보를 확보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교두보를 통해서 침투가 시작됩니다. 사탄이 여러분의 삶에서 찾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댐에 난 아주 작은 균열 하나면 충분합니다. 그 작은 틈 하나로 댐 전체가 무너집니다. 작은 여우가 포도원을 허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십시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결국에는 여러분이 이길 겁니다. 결국에는 승리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을 위해 준비해 두신 이 모든 놀라운 것들을 굳이 포기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가 기쁨으로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충만한 열매로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생산적인 사역으로 가득하고 영광 가운데서 상을 받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높임을 받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참된 의에 헌신한다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원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존 뉴턴(John Newton)의 글입니다. “많은 원수들이 사방에서 에워싸고 네 팔이 연약할지라도, 너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해를 입지 않으리. 네가 아무리 약할지라도 쇠하지 아니하고, 지쳐 쓰러지지 아니하리니, 모든 성도의 능력이신 예수께서 위로부터 너를 도우시리라.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믿음으로 주님이 항상 가까이 계심을 보라. 주님은 인도자요 영광이요 방패이시니, 네가 무엇을 두려워하랴. 주님이 너를 위하여 이기시고 승리하신 것처럼,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너 또한 그 안에서 반드시 승리하리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결국 승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거룩하지 않다면 아무리 승리의 확신이 있어도 우리를 지켜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진리로 허리 띠를 띠게 하시고, 순종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의의 호심경을 붙여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셔서, 이 뒤틀리고 패역한 세대 가운데서 거룩하고 의롭고 흠 없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그러한 특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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