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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도 에베소서 6장을 살펴볼 수 있는 이 귀한 특권을 누릴 수 있어서 정말 기쁩니다. 성경 에베소서 6장을 보겠습니다. 14절부터 17절까지 나오는 신자의 전신갑주에 관한 이 놀라운 진리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습니다. 이번 주뿐만 아니라 앞으로 몇 주 동안 이 말씀을 계속 살펴볼 예정입니다. 깊고도 깊은 진리입니다. 너무도 많은 진리를 깊이 있게 담고 있어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 전부가 아닙니다. 앞으로도 배워야 할 것이 정말 풍성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확인한 부분이 있습니다. 에베소서의 마지막 부분을 몇 주 동안 살펴보면서, 모든 신자는 전쟁, 전투 중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 싸움은 막강한 대적, 사탄과 그 모든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헌신된 신자와 사탄은 충돌할 수밖에 없다고 계속해서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여러분의 삶은 반드시 지옥의 세력과 맞딱드리게 됩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다만 그 공격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드러나는지가 다를 뿐입니다. 충돌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또 계속해서 일어나는 일이죠. 대적은 하나님의 자녀를 향해 끊임없이 강력한 공격을 퍼붓습니다.

에베소서를 통해서 우리는 신자가 엄청난 자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무엇보다 에베소서 1장 3절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에베소서 1장에 따르면 우리는 사랑하시는 자 안으로 옮겨졌습니다. 죄 사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지식과 총명과 지혜를 받았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계획하신 놀라운 신비에 참여하게 되었고, 우리를 인치시는 성령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을 넘어서는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 능력을 성령의 내주하심과 충만하심을 통해 나타낼 수 있는 힘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나님 오른편에 앉히시며, 모든 통치와 권세를 그 발 아래 두신 바로 그 능력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이처럼 놀라운 자원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친히 계획하신 목표와 뜻과 목적을 이루도록 세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루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명을 감당하려 할 때 우리는 반드시 대적, 그러니까 사탄의 저항을 받습니다. 하늘에서 하나님께 맞섰던 바로 그 대적, 에덴동산에서 죄 없는 인간에게 맞섰던 바로 그 대적, 이스라엘 민족을 없애려고 했던 그 대적,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생애와 죽음과 부활과 재림과 그 모든 미래를 막으려 했던 그 대적, 교회를 파괴하려 하고 신자들의 섬김을 가로막으려 하는 그 대적, 그리고 언젠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 권능을 막아서려고 할 바로 그 대적입니다.

이렇게 막강한 대적이 지금 이 시대의 신자와 맞서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전투를 준비하지 않은 신자는 결국 공격을 당합니다. 자신의 삶에서 패배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기를 원하셨던 일들을 감당할 능력도 잃습니다. 결국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쟁을 준비해야 합니다.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이 문제의 심각성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도님들 중에서도 여전히 많은 분들이 이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으시는 것 같아서 제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래서 전신갑주의 첫 부분을 살펴보면서 이 싸움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오늘 아침 다시 한번 강조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신자와 사탄은 절대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길 위에 서 있습니다. 이 충돌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사탄이 어떻게 공격하는지를 반드시 이해해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 이 부분을 잠깐 짚고 넘어갔으니까 오늘 조금 더 설명을 하겠습니다. 사탄이 신자에게 접근하는 방식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성경에 나올 뿐만 아니라 저의 삶과 교회,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실제 모습이기도 해서, 사탄의 공격 방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메모를 해 두신다면 여러분 자신을 지키는 데 유익할 겁니다.

첫번째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성품과 신뢰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신자를 공격합니다. 사탄의 가장 핵심적인 전략입니다. 사탄의 목적은 하나님을 깎아내리는 겁니다.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드는 겁니다. 사탄을 움직이게 만드는 핵심입니다. 에덴동산에서도 바로 이 방식으로 접근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고 하면서 의심을 심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동기를 왜곡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기적인 목적을 숨기고 계신다고 몰아간 겁니다. “하나님을 정말 믿으면 안 돼”,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돼”, “겉으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만 속뜻은 달라”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겁니다.

신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다.” 사탄이 하고 싶은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라고 여기고 오히려 사탄이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진리이시고 사탄이 거짓말쟁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사탄은 자신이 진리이고 하나님이 거짓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다. 하나님을 의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능력을 의심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실제로 그런 유혹을 받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놓이면 걱정하고 초조해하고 분노하고 통제력을 잃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상황에서 우리를 건지실 수 있다는 약속을 온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겁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용서를 의심합니다. 그러면 결국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을 뿐입니다. 우리는 또 자주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정말 사랑하신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두셨을 리가 없어. 남편이 떠나고, 자녀가 이렇게 되어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신다는 말이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도록 몰아갑니다. 사탄은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들고 싶어합니다. 베드로에게도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의심하게 만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조심하라. 사탄이 너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한다.” 그러니까 사탄은 하나님의 성품과 신뢰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우리를 공격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이나 신뢰성에 조금이라도 의문이 든다면, 그 생각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를 반드시 점검하셔야 합니다.

둘째, 사탄은 신자가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하도록 공격합니다. 사탄은 우리가 쉽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어렵게 만들고 싶어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려고 할 때 그 길을 힘들게 만들고 싶어합니다. 저는 사탄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방식이 세 가지 정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번째는 박해입니다. 아주 극단적인, 가장 극단적인 방식이죠.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극도로 적대적이기 때문에 신앙생활 자체가 어렵습니다. 이번주에 성도님 한 분이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새로 얻은 믿음을 형에게 전하려고 성경을 꺼내서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형이 그 순간에 성경을 방 한쪽 구석으로 집어 던지면서 “다시는 그 책 나에게 들이밀지 마”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박해죠. 교회 역사는 그리스도인답게 살려고 했던 사람들이 겪은 박해로 가득합니다. 직장에서 박해를 받을 수도 있고, 친구들에게서 받을 수도 있습니다.

둘째로, 사탄은 겉으로 드러나는 박해뿐만이 아니라, ‘또래 압력’이라고 할 수 있는, 아주 더 미묘한 형태의 박해를 통해서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어렵게 만듭니다. 어떤 사람들은 친구를 잃고 싶지 않고, 지금 속한 관계의 울타리 밖으로 나오고 싶지 않아서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을 망설입니다. 다르게 보이기를 원하지 않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변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지금 받고 있는 사회적 수용과 인정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죠. 사람들의 호감을 잃고 싶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불편한 상황이나 갈등을 감수하면서까지 다른 길을 선택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겁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유대 공동체 안에서 다뤘던 문제와 아주 비슷합니다. 복음이 진리라는 것을 알지만, 친구들과 가족이 어떻게 말할지, 자신들이 소외될지 두려워서 그리스도께 헌신하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탄은 이런 영역에서도 우리를 어렵게 만듭니다. 그리고 바울이 말한 노골적인 박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라고 말한 바로 그 박해입니다.

자, 사탄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세번째 방식은,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박해와는 반대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가장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때로는 가장 신앙생활하기 어려운 환경이 되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미국에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존중받고, 거의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누구나 그리스도인이라고 하고, 누구나 거듭났다고 합니다. 종교적 분위기가 시대의 흐름이 되어서 기독교가 마치 멋있는 문화처럼 여겨지는 그런 상황입니다.

이처럼 너무 쉬워져 버렸기 때문에, 대가를 치를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오히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주변 압력에는 반응할 수 있고, 박해에도 맞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호의적인 분위기 속에서는 경각심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탄은 이런 환경을 틈타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을 어렵게 만듭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성품과 신뢰성을 무너뜨리려는 일을 계속합니다.

세번째입니다. 사탄이 신자를 공격할 때 사용하는 세 번째 방식은 거짓 교리로 신자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겁니다. 사탄은 거짓 교리로 신자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저는 신자들을 참 많이 만나는데, 성경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어제도 어떤 분이 저에게 “성화가 무엇인가요? 너무 혼란스러워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신앙생활을 꽤 오래 하신 분인데도 그랬습니다. 여러 책과 또 여러 교사가 서로 다른 말을 하니까 혼란이 커지는 것이죠. 그래서 이렇게 묻습니다. “왜 이렇게 서로 다르게 말합니까?”라고 말입니다. 저는 사탄이 신자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좌절시키기 위해서 사용하는 전략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대해 너무 독단적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일반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너무 독단적으로 말씀하시네요. 성경에 대해 그렇게 독단적으로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을 연구하면 명확하게 알 수 있다고 믿습니다. 사실 저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똑똑한 사람이 아닙니다. 지능도 아주 평범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실을 인정하기는 싫지만,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지금까지 제가 똑똑한 줄 아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저 성경이 어디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알고, 조금만 파고들면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사탄은 수많은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거짓 교사를 침투시켜서 온갖 잘못된 교리를 퍼뜨림으로써 신자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합니다. 양의 옷을 입고 나오지만 속은 노략질하는 이리 같은 거짓 교사들에게 속는 신자들도 많습니다.

오늘날 문제가 되는 것은 귀신의 가르침이 너무도 만연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탄이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많은 신자들이 잘못된 사역에 수백만 달러를 헌금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거짓 가르침이 뒤섞여서 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탄은 하나님의 성품을 깎아내리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어렵게 만듭니다. 거짓 교사와 거짓 교리로 신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이제 네번째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을 방해하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합니다. 사탄은 섬김을 막고 싶어합니다. 그레이스 교회를 멈추게 하고 싶어합니다. 저의 사역과 여러분의 사역,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모든 이들의 사역을 막고 싶어합니다.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사역을 막고 중단시키려고 합니다. 구약 전체에서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방해했고,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도 방해하려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다시 말해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한 겁니다. “너희에게 하나님의 말씀만이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주고 싶었다. 그래서 온 힘을 다해 섬긴 것이다.” 그런데 그 사역이 어땠습니까? 수고와 고난으로 가득했습니다. “우리가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다”라고 했습니다. 에베소 장로들에게는 “눈물로 밤낮 쉬지 않고 진리를 전했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사역이 그만큼 어렵고 온갖 저항에 시달리기 때문입니다. 결코 쉽지 않습니다.

젊은 사역자들이 가끔 저에게 묻습니다. “사역을 오래 하면 좀 더 쉬워집니까?” 아닙니다. 결코 쉬워지지 않습니다. 그냥 양상이 조금 달라질 뿐이죠.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의 순간들이 더 귀하게 느껴지고, 과거에 쌓인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근거로 미래를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면은 있지만, 사역 자체는 결코 쉬워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탄이 우리의 사역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길을 막는 방해물이 계속 길을 막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탄은 하나님의 신뢰성을 공격하고, 신자가 삶을 살아가기 어렵게 만들고, 거짓 교리로 혼란을 주고, 우리의 사역을 방해합니다.

다섯째로, 사탄은 교회 공동체 안에 분열을 일으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합니다. 사탄은 공동체를 갈라놓고 틈을 만들고 깨뜨리기 위해 끊임없이 일합니다. 그래서 지난주 주일 저녁에 마태복음에서 우리가 읽었던 것처럼, 주님께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그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신 겁니다. 사탄은 이렇게 분열을 일으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장, 3장은 교회 안의 분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바울이 이렇게 권면하는 이유는 사탄이 우리를 갈라놓고, 그리스도의 몸 안에 다툼과 파벌을 가져오려 하기 때문입니다.

여섯째로, 사탄이 우리를 강력하게 공격하는 또 다른 영역은 우리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도록 부추기는 것입니다. 아주 교묘한 방식입니다. 역대상 21장은 다윗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다윗은 자신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어서 병력을 계수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윗아, 그것은 무서운 죄악이다. 너의 힘은 군사의 숫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백성의 수에 달린 것이 아니다. 너의 힘은 나 하나님에게 달려 있어.”

이뿐 아니라 신자는 영적인 영역에서도 자신의 능력에 의존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핵심 구절을 모두 외웠어. 저 교리를 완전히 이해했어. 이런 저런 원리들을 알고 있어. 신학교도 다녔고, 머릿속에 이런 많은 내용들이 들어 있어. 이제 나는 준비되었어.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이런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 기도 생활은 사라집니다. 헌신의 깊이는 없어집니다. 아주 얕은 신학만 남습니다. 매우 위험한 상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만 열심히 다니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쉽게 스스로의 능력을 의지합니다. 우리의 이해력, 지식, 지혜, 학문, 교육에 의존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능력 앞에 엎드리는 태도를 잃고 맙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외쳤을 때의 그 심정을 갖지 못하는 겁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일곱번째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공격하는 일곱번째 방식은 위선적인 태도를 갖게 하는 겁니다. 아주 흔한 공격입니다. 사탄은 실제로 이 교회를 포함해서 모든 교회 안에 가짜 신자들, 진실하지 않은 사람들을 심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참된 신자들도 위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아주 태연하게, 아무 문제 없는 듯이 웃으면서 영적인 사람인 것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공동체를 더럽히고, 스스로를 너무 잘 가려서 정작 자신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 누구에게도 자신의 실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진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도 우리를 품고 도와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체면이라는 가면 뒤에 숨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위선적인, 소위 영성이라는 가면 뒤에 숨습니다. 사탄이 마음 깊이 들어오면 성령께 거짓말을 하고 싶은 마음까지 들게 됩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진짜 존경받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그렇게 보이는 편이 더 낫다, 죄를 직면하고 다루는 것보다 가리고 덮고 게임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이죠. 사탄은 지극히 교묘해서 교회를 위선으로 가득 채웁니다. 사탄은 계속해서 찾아옵니다. 먼저 하나님의 성품을 깎아내리려 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어렵게 만들고, 거짓 교리로 혼란을 주고, 우리의 사역을 방해하고, 분열을 만들고, 자신의 자원에 의지하게 하고, 우리를 위선의 가면 뒤에 숨게 만듭니다.

이제 두 가지가 더 남았습니다. 여덟째로, 사탄은 우리가 세속화되도록 공격합니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틀 속으로 우리를 밀어 넣습니다. 그리고 이 영역에서 사탄은 놀라울 정도로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너무 세상적이고, 부유하고, 물질적이고, 자기 만족에 젖어 있고, 자기 방종적이고, 세상의 체계와 너무 닮아 있어서 둘을 구분하기도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한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보라, 너희는 세상과 어울릴 이유가 없다. 세상은 지나가고 너희는 영원하다. 이 두 차원은 서로 맞지 않고 함께 갈 수 없다. 그런데 왜 세상과 얽히고 있느냐?” 그러나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를 세상 속으로 밀어 넣어서 세상이 교회를 삼키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순종하도록 만들고 싶어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사탄의 공격 가운데 가장 정점에 있는 부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타락한 행동을 하도록 유도합니다. 하나님이 도덕의 근원이시고 하나님께서 도덕법을 세우셨다면, 그 법을 거스르는 어떤 행위든, 성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모두가 음행입니다. 음행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도덕법을 거스르는 겁니다.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하도록 만들고 싶어합니다. 음행하게 되면 사탄에게 기회를 주고, 사탄에게 유리한 발판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하는 일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깎아내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어렵게 만들고, 거짓 교리로 혼란을 주고, 섬김을 방해하고, 분열을 일으키고, 자신의 자원을 신뢰하게 만들고, 위선을 부추기고, 세속화시키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만듭니다. 전쟁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언제나 이런 방식입니다. 전쟁터에서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말 만만치 않은 공격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아홉 가지 모든 공격을 단 하나의 방법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에베소서 6장 13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이렇게 복잡하고, 교묘하고 간교하고 속임수가 가득한 사탄의 공격을 어떻게 대적할 수 있습니까? 방법은 간단합니다. 사탄이 하는 짓에 집중하지 말고, 우리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는 겁니다. 이 공격들을 분류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각각을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느냐 없느냐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탄의 모든 교묘한 공격을 완벽하게 분석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할 수도 없습니다. 그 누구도 다룰 수 없을 만큼 너무 정교하고, 너무 수준이 높고, 초자연적인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전신갑주를 입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쟁이 시작될 때 어떤 공격이 오더라도 방어할 수 있습니다. 적이 어디서 공격을 해오든, 공격이 얼마나 교묘하든, 배를 깔고 기어오든, 공중에서 날아오든, 은밀하든 노골적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준비되어 있기만 하면 됩니다. 전신갑주를 입은 신자는 그 어떤 공격 앞에서도 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사탄이 어디에서 어떻게 공격해 오는지 설명해 드린 이유는 그 영역을 인식하라는 뜻이지, 그 자체에 초점을 두라는 뜻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사탄이 오느냐, 어떤 공격이 오느냐가 아니라 여러분이 준비되어 있느냐입니다. 여러분은 준비되어 계십니까? 전신갑주를 입고 있다면 그 어떤 공격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 아침에는 전신갑주의 첫번째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아주 짧지만 정말 중요한 요소입니다. 14절입니다. "그런즉 서서"라는 말인데, 앞절 말씀과 연결됩니다. 13절 하반절을 보면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라고 했고, 11절 중간에서도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라고 말합니다. 강조점은 사탄의 공격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사탄의 거센 공격 앞에 굴복하지 않고 승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공격 앞에 서기 위해서는 허리에 알레데이아(alētheia), 진리를 허리띠처럼 동여매야 합니다.

이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알레데이아(alētheia)라는 단어는 진리의 내용, 그러니까 거짓과 대비되는 진리,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라는 의미의 진리를 가리킬 수도 있고, 또는 위선이 없음, 성실함, 정직함, 헌신과 같은 태도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먼저 이 단어의 뜻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탄이 공격할 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이 진리의 허리띠입니다. 왜냐하면 11절에서 말하듯이 사탄은 간계로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이 단어는 에베소서 4장 14절에서 ’간사한’이라고 번역된 단어와 같은데요, 온갖 교훈의 풍조를 의미합니다. 교훈은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사탄은 교묘하게 속이는 가르침, 귀신의 가르침을 불어넣는다. 거짓 교리이며 마귀의 간계이다. 마귀의 거짓과 속임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진리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또 가르치는 일이 중요한 겁니다. 바울은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에 대해서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0절과 21절에서 바울은 고린도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거대한 종교 체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방 신전으로 가서 신들을 숭배하고 각종 의식과 제사를 지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다시 말해서 이방 종교 체계의 배후에 귀신이 있다는 뜻입니다. 우상 숭배 전체가 귀신의 일이고, 이방 종교 체계 전체가 귀신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귀신의 가르침입니다. 미혹하는 영입니다. 모든 거짓 가르침의 배후를 이해하게 해주는 말씀이죠. 거짓 가르침은 사탄에게서 옵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그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일은 거짓말입니다. 전쟁에 임하는 신자는 반드시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본문의 배경을 살펴봤습니다. 이제 이 허리띠의 의미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바울 시대에는 모든 로마인들이 튜닉(tunic)이라는 옷을 입었습니다. 군인들도 이 옷을 입었습니다. 튜닉은 아주 큰 사각형 모양의 천으로 만든 옷인데요, 머리를 넣는 구멍 하나와 팔을 넣는 구멍 둘, 이렇게만 있습니다. 그냥 몸에 걸치는 단순한 옷입니다. 그런데 전쟁에 나가려면 이렇게 헐렁하게 펄럭이는 옷을 그대로 입고 나갈 수가 없죠. 사실 여행을 떠날 때도 이 옷을 그냥 입지는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12장 11절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의 땅으로 떠날 준비를 하라고 하실 때에,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라고 명령하십니다. 즉 ‘떠날 채비를 한다’ 이런 의미로 쓰였습니다.

누가복음 12장 35절에서 주님은 재림에 관해서 말씀하시면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허리에 띠를 두른다는 것은 헐렁하게 늘어진 옷자락을 모두 끌어올려 묶어서 언제든지 움직일 채비를 하는 그런 행동입니다.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뜻입니다. 허리띠가 바로 준비의 상징입니다. 로마 군인은 옷이 바람에 펄럭이는 상태로 전쟁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옷을 잡아당겨서 머리까지 뒤집어 씌우면 그대로 끝이니까요.

옷자락이 이리저리 펄럭거리는 상태로는 전투를 할 수가 없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미식축구 경기를 보면 선수들의 유니폼이 몸에 딱 달라붙어 있지 않습니까? 상대편이 붙잡을 수 없게 하기 위해서죠. 전에는 전력으로 달리고 있을 때 옷자락이 밖으로 나와 있는 모습을 보고 상대편이 뒤에서 잡아서 끌면 그대로 넘어지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결국 브레이크어웨이 셔츠(breakaway shirts), 그러니까 잡으면 찢겨져 나가는 옷이 생겼습니다. 요즘 미식축구 대학부 경기를 보면 그런 셔츠를 입고 있는데요, 상대가 붙잡으면 그냥 찢겨 나가 버립니다. 그래서 그냥 셔츠 없이 그대로 앞으로 계속 뛰어갑니다. 상대 선수는 셔츠 조각만 들고 있을 뿐이죠. 전투 중에 몸에 걸리적거리는 것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실제 전쟁에서는 훨씬 더 중요합니다. 당시 전쟁은 200미터쯤 떨어진 참호에서 하는 게 아니라, 백병전입니다. 그러니까 직접 몸을 맞대고 싸우는 방식이죠. 그런 상황에서 옷자락이 서로 엉키고 몸을 휘감게 놓아 두면 안 되죠.

디모데후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바울의 말은 이런 뜻입니다. ‘옷이 몸에 엉키면 싸울 수 없듯이, 세상 일에 마음이 얽매이면 전투에 임할 수 없다. 세상과의 끈을 끊어야 한다, 세상과 결별해야 한다.”

군대에서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입대를 환영합니다. 가능하면 우리와 함께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우리 복장을 입어주시면 좋겠고, 우리 음식을 먹고 우리 공간에서 생활해 준다면 참 좋겠습니다.” 이렇게 청하지 않습니다. 징집되면 여자친구, 아내, 집, 가족, 자동차, 직장과의 연결이 끊어집니다. 민간인의 삶은 끝나고 군대에서 시키는 대로 해야 합니다. 전쟁에 나간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아주 엄격한 일입니다.

그래서 로마 병사가 전쟁에 나갈 때는, 여행자가 허리띠를 차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게 허리를 동였습니다. 허리에 띠를 둘렀습니다. 천으로 만들기도 했지만 대부분 가죽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가죽 띠를 단단하게 졸라매고, 튜닉의 네 모서리를 잡아 올려서 띠 속으로 끼워 넣어서 짧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기동성과 유연성을 확보했습니다. 옷자락이 걸리적거리지 않게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염두에 두었던 모습입니다.

또 이 허리띠에는 로마 군인들이 흔히 사용하던 끈이 하나 더 달려 있었습니다. 어깨에 매는 끈인데요 허리띠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죠. 그 끈에 칼을 매달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보겠지만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의 허리띠에 매달려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는 말씀 안에서 드러납니다. 우리는 그 말씀이라는 진리를 손에 들고 싸우러 나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의 허리띠와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게다가 이 어깨끈 위에는 전투에서의 승리를 나타내는 휘장과 표식들이 붙어 있었습니다. 군인이 전투에서 어떤 공적을 세웠는지를 나타내는 훈장을 가슴에 다는 것처럼, 로마 병사들도 그 훈장을 어깨끈에 달았습니다. 그 모든 훈장이 진리의 허리띠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게 바로 핵심입니다. 진리의 허리띠를 두르고 성령의 검을 뽑는 자가 전쟁에서 이기고 메달을 얻습니다. 허리띠를 띠는 것이 시작입니다. 허리띠는 전투에서의 준비 태세를 상징했고요, 허리띠에 말씀의 검이 달려 있고, 전투의 승리를 상징하는 훈장이 드러납니다. 준비된 자들, 허리띠를 두른 자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검을 허리에 찬 자들이 전투에 나가 승리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이 단어의 핵심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이 말은 분명하게 진리를 가리키지만, 알레데이아(alētheia)를 내용으로서의 진리로 이해할 수 있다 해도 여기서는 아닙니다. 내용으로서의 진리는 성령의 검, 그러니까 마지막 전신갑주 부분에서 설명됩니다.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이 단어가 가지는 또 다른 의미, 그러니까 태도로서의 진리성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허리에 띠를 띠라”입니다. 준비된 태도, 헌신의 태도, “전투할 준비가 되었다. 옷을 갖추었다. 긴장하고 서 있다”라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핵심도 바로 이겁니다. 위선 없이 싸운다는 뜻으로, 진지하게 전투에 임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허리띠도 매지 않습니다. 그냥 인생을 이리저리 바람에 흩날리듯이 살아갑니다. 헌신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진리의 허리띠를 한 번도 제대로 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제대로 헌신하지 않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만일 병사가 허리띠를 매고, 어깨끈을 걸고, 검을 찬다면 “나는 싸울 준비가 되었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전쟁에서 패배하는 이유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2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육상 경기에서 누군가 외투를 입고 전투화를 신고 달린다면 어떻겠습니까? 어리석은 일 아닙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되죠. 달리기 선수들은 기동성을 위해서 민망할 정도로 아주 얇은 옷을 입고 달립니다. 움직임에 방해되지 않도록 최대한 자유로움을 확보하려는 거죠. 그런데 신자들 가운데는 전투화와 외투를 걸친 채 그리스도인의 경주를 뛰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왜 이렇게 힘드냐, 왜 이렇게 조금밖에 전진하지 못하냐고 합니다. 5년이 지나도 출발선에서 몇 걸음밖에 가지 못합니다. 헌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진리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 헌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도 바로 이겁니다. “전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진지해져야 한다. 위선 없이, 성실하게,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전투에 임해야 한다. 나는 군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견딜 것이다.” 디모데후서 2장 4절에서 말하듯이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라는 고백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참된 신자는 전쟁을 사랑합니다. 참된 신자는 주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지지 않습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을 보십시오. 저는 늘 실패하는 신자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유혹에 넘어지고, 육신과 마음에 오는 죄들에 계속 쓰러지면서도 대충 흘러가는 대로 살려고 하는 모습을 정말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 9장 24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경주를 시작했으면 이기라는 것입니다. 누가 지고 싶어하겠습니까?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열망입니다. 운동 경기에서도 흔히 말하듯이, 열망이 문제의 90퍼센트를 결정합니다. 정말 간절히 원하면 그 힘이 나옵니다.

제 미식축구 선수 시절에 감독님이 늘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정말 간절히 원하면 얻을 수 있다. 승리를 정말 간절히 원하면 이길 수 있다.” 그 말이 나름 의미는 있었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가끔은 훨씬 강한 상대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저는 정말 간절히 원했습니다. 누구보다도 더 간절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전혀 통하지 않을 때가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흙만 먹는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그런 상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 싸울 때는 다릅니다. 간절히 원하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있는 자보다 우리 안에 계신 분이 더 크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언제나 승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열망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육상선수가 달릴 때 많은 선수들이 함께 달리지만 상을 받는 선수는 한 명뿐입니다. 그러니 경주를 시작했다면 이기라는 것입니다. 이기랍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헌신하는 사람들을 일으켜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승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 자신이 면류관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기 위해 달리는 사람들 말입니다. “이것이 저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것이 저의 예배입니다. 이것이 저의 찬양입니다. 저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립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원하는 것은 바로 이런 헌신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여기서 쓰인 헬라어는 ‘아고니조마이’인데, 노력하다, 싸우다, 열심히 애쓰다, 이런 뜻입니다. 절제한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삶을 훈련하고 절제하고, 무엇을 먹는지, 어떻게 훈련하는지 철저히 관리합니다. 썩어 없어질 승리자의 관을 얻기 위해서도 그렇게 애를 씁니다. 그러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위해 달립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으려고 그렇게까지 노력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더욱 더 승리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달리다가 이리 저리 방향을 바꾸거나, 속도를 절반으로 줄여서 뛰거나, 4분의 3 정도로 뛰었다가, 조금 쉬었다가 하는 식으로 달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전속력으로 결승선을 향해서 달립니다.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라고 말합니다. 링 안에서 그냥 허공만 치는 게 아니라, 상대를 정확하게 때리는 싸움을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보십시오. 절제로 승리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영적인 영역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승리할 수 있도록 모든 능력을 주셨습니다. 로마서 12장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무엇인지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 설명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악한 세상에서 구별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가족으로 부르시고 자녀로 입양해 주셨습니다. 사랑과 기쁨과 평강을 주셨습니다. 또한 성령의 능력, 그러니까 부활의 생명으로 역사하는 놀라운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계획 속에 우리를 두셨고, 그 계획을 따라 살도록 필요한 모든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여러분은, 이제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드릴 영적 예배이며,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특별한 일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바울은 그 다음 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먼저 마음이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마음에 자리 잡고 진리를 가질 때 비로소 헌신된 삶을 살고,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 대부분은 산 제물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삶을 희생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거의 감을 잡지 못합니다. 아마 예수님을 위해 화형장에 서서 죽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평생을 주님께 희생하며 살아가는 일은 훨씬 더 어렵습니다. 대부분은 삶 전체를 드리는 것보다, 차라리 한순간 죽음을 맞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고 느낍니다. 얼마나 모순적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헌신하라고 말합니다.

빌립보서 1장 9절과 10절을 보십시오. 9절입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빌립보 교인들이 사랑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사랑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사랑이 지식과 분별력 안에서 더욱 풍성해지기를 기도합니다. 더 많은 지식을 갖기를 원하고, 더 큰 분별력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 이유는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게 하려 함이라”라는 말처럼, 좋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오직 탁월한 것을 선택하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저 괜찮은 수준에 머무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탁월한 것을 선택하는 데까지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에게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 더 많은 사랑을 갖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 더 많은 지식을 갖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에게 분별력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 더 큰 분별력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고, 또 진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진실하다는 것은 헌신되어 있고, 거짓이 없고, 위선이 없고, 진정성으로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야만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처럼 헌신되고 진실하고 성실한 삶의 결과가 11절에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제가 요즘 헌신에 대해 자주 설교하는 것은 성경에 계속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여러분의 헌신을 원하는지 아십니까? 저의 개인적인 야망 때문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 이유가 11절에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열매로 가득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열매로 가득하게 되는 것은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때이며, 여러분이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게 되는 것은 삶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전신갑주를 입을 수 있는 첫번째 단계는 바로 헌신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사탄을 이기지 못합니다. 사탄은 제가 앞에서 말한 아홉 가지 방식뿐 아니라, 제가 아직 다 파악하지 못한 여러 방식들로 여러분에게 달려들 겁니다. 아주 여러 방식의 공격이 섞여서 밀려올 때 여러분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무엇을 해야 할지조차 모를 겁니다. 그래서 헌신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과 이 삶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단 한가지, 영적인 차원입니다. 그 외의 모든 것들은 사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저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고는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별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관심을 두고 싶지도 않습니다. 영적인 것만 중요하고,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초점을 바른 곳에 두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간절히 승리를 원하십니까? 얼마나 간절히 원하십니까? 정말로 승리하고 싶으십니까?

저는 평생 운동을 해왔기 때문에 승리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프로 선수들과 함께 경기할 때도 자주 나왔던 이야기인데요, 승리를 향한 열망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을 겁니다. 더 이상 뜨겁지 않고, 그냥 형식적으로 움직일 뿐이죠. 세상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탄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그런 마음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저 그런 평범한 상태에서 만족할 수 있습니다. 무기력함에도 만족할 수 있습니다. 지금 살아가는 방식 그대로 유지되는 것에 만족하면서 지낼 수도 있습니다. 매주 교회에 왔다가 집으로 가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태도도 같고, 반응도 같고, 가정도 그대로입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냥 오고 가고, 오고 가고, 오고 갈 뿐이죠. 전혀 헌신하지 않습니다. 그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우리는 전쟁에 헌신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첫번째로 진리로 허리띠를 띠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용으로서의 진리에 기초하지만, 바울이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태도입니다.

마지막으로 존 몬셀(John Monsell)이 지은 찬송가 가사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전력을 다해 선한 싸움을 싸우라. 그리스도는 너의 힘이시며 너의 의로움이시니. 생명을 붙잡으라. 그리하면 기쁨과 영원한 면류관이 되리라. 하나님의 은혜로 길을 달려라. 눈을 들어 주님의 얼굴을 구하라. 인생의 길이 네 앞에 놓여 있나니. 그리스도가 길이시며 상급이시라. 염려를 버리라. 인도자를 의지하라. 그리하면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리라. 하나님을 의지하라. 그러면 그리스도가 생명이시며 사랑이심을 알게 되리니. 낙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주의 팔이 우리 곁에 있나니. 주님은 변하지 않으시며 너는 주님의 소중한 자라. 믿기만 하라. 그러면 그리스도가 네게 모든 것이심을 보게 되리라.”

승리를 향한 사랑은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사탄이 아무리 교묘하게 공격해도 우리가 헌신의 띠를 두르고 있다면 그 승리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의 것이 됩니다. 이 승리가 여러분의 삶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 우리가 함께 모여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주님의 말씀 속에 담긴 위대한 진리를 나누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지금 주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온 것을 느낍니다. 이 설교가 제 생각에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임을 믿습니다. 단지 종이에 적혀 있고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설교가 아니라 주님의 숨결임을 믿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헌신은 우리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의 결과도 우리가 아닌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모든 인간적인 요소와 육적인 장애물을 내려놓게 하옵소서.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헌신으로 부르고 계심을 분명히 알게 하옵소서. 우리를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악하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생명의 말씀을 붙들고 서 있는 등불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 세상이 뭐라 해도, 우리의 삶이 그 비난을 잠재우는 증거가 되게 하시고, 예수님의 이름을 남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전심으로 주께 영광을 돌리는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싸움에서 이기기 원합니다. 오직 주님의 능력만 의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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