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전에는 에베소서 6장 말씀, 특별히 10절부터 13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신자의 전신갑주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모든 신자 앞에 놓인 영적 전쟁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은 이 세상이 전쟁터라는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온 우주가 전쟁 중입니다.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전쟁입니다. 성경 여러 곳에 기록된 사실이지만, 특별히 욥기에서 사탄이 하나님께 맞서는 장면을 통해 그 영적 전쟁을 매우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 갈등은 인간의 역사 전체와 하나님의 계시가 펼쳐지는 모든 곳에서 계속해서 드러납니다.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갈등은 거룩한 천사들과 악한 천사들 사이의 전쟁으로 번졌습니다. 이 갈등이 또 한 단계 내려와서 선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 사이의 전쟁으로 번졌습니다. 온 우주 전체가 전쟁터입니다. 인류의 타락 이후로, 땅에 저주가 들어온 이후로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투쟁이자 전투입니다. 바울이 12절에서 말한 것처럼 씨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자로서 문자 그대로 생사가 걸린 싸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여러분이 이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서 제 마음에 느껴지는 것을 그대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도록 돕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신앙생활에 지나치게 만족하는 순간, 이 전체적인 관점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한쪽 구석에 가만히 앉아서 신학만 곱씹고 있으면 모든 것이 너무 좋아 보입니다. 그레이스 교회에서는 모든 것이 참 좋아 보입니다. 중등부, 고등부에서 아이들이 즐겁게 신앙생활을 하고, 모두가 수련회에 가고, 어린아이들은 체육관에서 뛰어놀고, 또 어린이 제자훈련도 받고, 신앙 서적을 사고, 설교 테이프를 듣고 합니다. 세상이 온통 아름답고 영광스럽게만 보이죠.
그렇게 여러분의 작은 세계에 너무나 몰두한 나머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잊어버립니다. 전 세계 수백만의 영혼들이 실제로 사탄의 손아귀에 붙잡혀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립니다. 사탄이 얼마나 교묘하게 공격하는지도 잊어버립니다. 어쩌면 사탄의 가장 강력한 공격일지도 모르는 나태함, 게으름, 무관심, 정체를 통해서 말이죠. 저는 이것이 두렵습니다. 우리 그레이스 교회가 사탄의 공격에 당할까 두렵습니다.
제가 이렇게 강대상에서 영적 전쟁에 대해 설교를 하면, 다들 앉아서 이런 반응을 보이십니다. “오늘은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신대. 무슨 전쟁? 무슨 싸움을 말하는 거야? 요즘 목사님이 뭔가 힘든 일을 겪고 계시나 보네… 안타깝다. 우리가 기도해 드려야겠어.”
정말로 이 전쟁이 지금도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서로를 바라보면서 “아, 참 심각한 전투인가 보다. 도대체 어떤 전투일까?” 이렇게 말은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전쟁중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면 그 사람은 병사가 아닙니다. 아니면 제대로 된 병사가 아닙니다. 싸우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 겁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정말 견딜 수 없었던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후보 선수가 되는 겁니다. 다른 일들은 참을 수 있었지만, 제가 후보 선수가 되는 것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대학 시절에 미식축구를 하던 때가 생각이 납니다. 1학년 때 부상이 좀 있었습니다. 사실 제가 처음 출전했던 경기에서 꽤 심한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감독님은 제가 더 다칠까봐 저를 후보 선수로 벤치에 그냥 앉혀 두기로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장비를 나르는 일이나, 발목에 감을 테이프를 나눠 주는 일 같은, 정말 중요한 일들을 맡기시더군요.
그래서 어느 날 감독님께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감독님, 제가 정말 싫어하는 게 딱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벤치에 앉아 있는 겁니다. 제가 뛰어야 할 위치에서 지금 다른 선수가 뛰고 있는데, 솔직히 말해서 제가 그 선수보다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감독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걸 직접 증명해 보고 싶다는 말이냐?” 제가 “그렇습니다”고 했습니다. “기회를 한 번만 주십시오. 정면 대결을 해서 누가 이기는지 한 번 보십시오.” 그래서 감독님이 실제로 그렇게 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어느 날 밤에, 연습이 끝나고 감독님이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켜시더니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 너희 둘.” 그리고는 땅바닥에 흰 선 하나를 그어 놓고 계속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부터 45분 동안 정면 대결해야 한다. 내가 휘슬을 불면 서로 부딪혀서 누가 더 많이 이 흰 선 너머로 밀어내는지를 내가 보겠어.”
미식축구가 원래 그렇습니다. 뭔가를 증명하려면,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두 사람은 45분 동안 정면으로 맞붙었습니다. 아주 거칠게 붙었습니다. 둘 다 그 자리를 너무나 원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결과적으로 제가 이겼습니다. 항상 이기지는 못했지만 그날은 분명히 제가 이겼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 장면이 아직도 제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은 제가 벤치에 앉아 있는 것을 정말로 싫어했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저는 벤치에 앉아 있는 것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항상 사건이 벌어지는 현장 바로 그 자리에 있고 싶었습니다. 마치 사도 바울과 같습니다. 지난번에 우리가 고린도전서 16장 8절과 9절에서 보았던 말씀을 기억하실 겁니다.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려 함은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
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전쟁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영적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자리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기 때문이죠. 거룩하다고 여기는 안전한 환경 속에만 틀어박혀 있고, 실제 싸움이 벌어지는 현장에는 발도 들이지 않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영적 전쟁 자체가 없는 것처럼 착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사이에도 사탄은 우리의 무관심과 나태함을 틈타 계속해서 승리하고 있습니다. 무관심이야말로 사람을 죽이는 치명적인 태도입니다.
그레이스 교회에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큰 비극은,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와서 여기서 벌어지는 일들을 즐기면서도 전쟁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채로 있는 겁니다. 여러분은 전쟁 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조금만 생각해봐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한번 들여다보십시오. 여러분은 시간을 어디에 투자하고 계십니까? 돈은 어디에 쓰고 있습니까? 재능은 어디에 쏟고 있습니까? 에너지는 어디에 집중하고 계십니까? 만일 다 사라질 것들, 세속적인 것들에만 집중되어 있다면, 여러분은 이 영적 전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며칠 전에 어떤 분이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에서 참으로 멋진 점은요,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잖아요. 이걸 하고 싶으면 하고, 저걸 하고 싶으면 하고요.” 그래서 제가 그분에게 이렇게 답을 드렸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 개인적인 간증이기도 한데,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걸 해본 지가 언제였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지 않습니다.
저는 해야 할 일을 계속해서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제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할 틈조차 없습니다. 어쩌면 제가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것은 곧 제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시급하게 해야 할 일들이 늘 앞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아, 시간이 좀 남네. 내가 뭘 하고 싶지?” 이렇게 말했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정말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여기는 전쟁터입니다. 지금 싸움 중입니다. 싸움의 한복판입니다.
비행기에 타서 자리에 앉을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요즘은 비행기를 너무 자주 타서, 조종사 면허라도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이런 기분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비행기 좌석에 앉으면, 제 마음속에서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 알겠다. 그냥 여기 앉아서 가만히 있고 싶다. 그냥 여기 앉아서 책도 읽고 묵상도 하고 그러고 싶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내 옆자리에 누군가 앉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전해야 한다.”
저는 자리에 앉으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옆자리에 그리스도인을 보내주세요. 너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어서 제가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람으로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제 옆에 앉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무슨 일 하세요?” 아, 이제 또 시작이구나. 시카고까지 가는 세 시간 반 내내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목사라고 제 소개를 했습니다. “아, 흥미롭군요” 이렇게 하시더니, 자기 사업 이야기를 이것저것 하다가, 자기가 가톨릭 신자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시카고에 도착할 때까지 의식 중심의 종교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의 차이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는 “마침 제 가방에 테이프 설교 시리즈가 좀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서 그분에게 하나님 나라의 삶과 팔복에 관한 시리즈를 건네주었습니다. 그날도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죠. 사도 바울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라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전쟁입니다. 전쟁이 눈앞에 치러지고 있는데도, 한 번도 싸우지 않고 그냥 지나가게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원수가 누군가를 제 무릎 위에 떼어다 놓았는데도, 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영적 전쟁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내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라는 문제입니다. 내 돈을 어디에 투자할 것인가? 세상의 지나가고 사소한 것들에 쓸 것인가? 아니면 영원한 차이를 만들어낼 것들에 투자할 것인가? 나는 무엇에 투자를 해야 하는가? 이것도 전쟁입니다. 그리고 때때로 저는 우리가 이걸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교회를 드나들며 제공되는 모든 오락과 활동들을 즐기고, 이 일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 성도들의 헌신의 깊이가 더해져서, 무관심하지 않게 하시고, 안일하게 머물지 않게 하옵소서.” 그러나 제 마음 깊은 곳에서는, 우리 교회에 그런 분들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흑사병보다 더 무섭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에베소서 6장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전쟁입니다.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부터 3장까지 나오는 내용이죠. 우리는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을 받았습니다. 또 4장부터 6장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고,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수 있는 능력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쉽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쟁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는 병사입니다. 우리는 모두 징집되었습니다. 징집을 피할 수 없습니다. 병역 연기 같은 것없습니다. 전쟁입니다. 만일 전쟁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전투에서 패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너무도 많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도 우리를 인도해 줄 모든 것이 풍성하게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성령 하나님께서 거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자기 자신을 신뢰하면 설 수 없습니다. “나는 이만큼 받았으니 괜찮아” 이렇게 자만하면 안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우리는 우리가 전쟁 한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인식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전쟁에서 우리의 능력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한 찬송가 작가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육신의 팔은 우리를 반드시 실패하게 만드니,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말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작 와츠(Isaac Watts)는 이렇게 썼습니다. “넘쳐 흐르는 생수의 근원 되시는 주님께로부터 우리의 영혼이 날마다 새 힘을 공급받게 하소서.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자들은 결국 시들어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만일 그리스도인의 삶이 전쟁이라면, 이기기 위해서 병사가 되어야 한다면, 주 안에서 주님의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지라는 말입니다. 승리는 하나님의 몫입니다. 사실상 하나님이 전부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역할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능력이십니다. “넘쳐 흐르는 생수의 근원 되시는 주님께로부터 우리의 영혼이 새 힘을 공급받는다”는 고백처럼,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자원이십니다. “육신의 팔은 우리를 실패하게 만든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힘, 하나님의 자원,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11절은 또한 우리의 몫이 있다고 말합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잘 들으십시오. 여기에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신비한 역설이 있습니다. 능력은 하나님의 것이지만, 헌신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다시 말해서, 분명히 나의 삶이지만, 동시에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의 삶이기도 합니다. 이 신비한 역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말씀의 계시에서 언제나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성경 자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베소서는 바울이 기록했지만, 동시에 성령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동시에 여러분 자신이 그리스도께 헌신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부지런하고 헌신적으로 살아야 하지만, 동시에 그렇게 살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양쪽 측면을 함께 봅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강해집니다. 주님의 능력의 권능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 자원을 실제로 취해야 합니다. 크롬웰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훌륭한 신학자처럼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되 화약은 마르게 보관하라.”
제가 어릴 때 일이 기억납니다. 아버지와 함께 텔레비전을 보는데 권투 경기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한 선수가 자기 코너에 서서 발을 차고 몸을 풀면서 신발에 송진을 바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릎을 꿇고 십자가를 긋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아버지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버지, 저렇게 하는 게 도움이 되나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먹을 잘 쓴다면 도움이 되겠지.” 사실 주먹을 제대로 쓰지 못하면, 그런 행동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삶도 그렇습니다. 능력은 하나님의 것이고, 권능도 하나님의 것이고, 힘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것이 도움이 됩니까? 주먹을 쓸 수 있다면 도움이 됩니다. 전신갑주를 입는다면 도움이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능력을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느냐, 실제로 취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첫째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로 그 능력이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셋째로, 그 능력을 반드시 취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제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으신 그 사고를 당했을 때를 지금도 저는 기억합니다. 차에서 튕겨 나갈 정도로 아주 큰 사고를 당했을 때, 저는 제 사역을 붙들고 진지하게 씨름을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 간구했던 한 가지가 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자주 떠올리지는 않지만, 분명히 기억합니다. 저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만약 정말로 저를 주님의 사역에 사용하시려 한다면, 평범하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저의 삶 가운데 주님의 능력을 알고 싶습니다. 그저 적당히 하고 싶지 않습니다. 만일 제 평생을 주님의 사역에 바쳐야 한다면, 저는 제 삶 속에서 주님의 능력을 분명히 알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이 기도에 수년 동안 계속해서 동일하게 응답하셨습니다. “존, 모든 능력이 이미 너에게 있단다. 문제는 네가 전신갑주를 입느냐 안 입느냐, 그것뿐이야. 모든 것이 이미 다 준비되어 있어.”
그런데도 그리스도인이 맥 빠진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의 모든 능력이 이미 주어져 있는데도, 세상의 것들로 자신을 가득 채우고는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걸어가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 이것은 전쟁이다. 분명한 영적 전쟁이다. 너희의 원수 사탄 마귀가 얼마나 강력한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너희는 원수를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지혜로 이겨낼 수도 없다. 초자연적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문자 그대로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체계 속에 수많은 귀신들이 결집되어 있다. 인간의 지성으로는 상대할 수 없다. 인간의 힘으로도 상대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히 알라.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능력을 주셨다. 전신갑주를 입기만 하면 그 모든 원수가 너희 앞에서 완전히 무력해진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능력이시지만, 그 능력은 오직 순종을 통해서만 우리의 것이 됩니다. 저는 우리가 영원히 안전하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안전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를 붙드시기에 충분합니다.
요한복음 10장 29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양들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그 안전함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여기에서 “아무도”라는 말은 단순하게 “어떤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헬라어로는 우데이스(oudeis)입니다. “단 하나의 존재도” 이런 뜻입니다. 그리고 “빼앗을 수 없다”, 두나타이(dunatai)는 능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어떤 존재도, 어떤 세력도 하나님의 손에서 하나님의 자녀를 빼앗을 능력이 없다는 선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믿는 자라면, 아버지의 손 안에 있다면, 그 어떤 존재도 우리를 그 손에서 빼앗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참고로, 여기에서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하르파세이(harpasei)’인데, ‘빼앗다’, ‘확 낚아채다’ 이런 뜻입니다. 아무도 우리를 아버지의 손에서 낚아챌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13장 19절도 동일한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사탄은 ‘낚아채는 자’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여러분을 하나님의 손에서 낚아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만유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결국 승리합니다. 우리를 이길 수 있는 권세는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시편 91편에는 정말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있으니 얼마나 안전하겠습니까. 우리는 너무도 은밀한 곳에 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우리를 그곳에서 끄집어낼 수 없습니다. 그곳으로 들어오는 길조차 모릅니다. 본질적인 의미가 그렇습니다.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보십시오.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시편 34편 7절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잘 들으십시오. 최종적인 차원에서, 전쟁 전체의 결과에 있어서 우리는 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만유보다 크신 분이시고, 하나님의 능력은 모든 것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이 전쟁에서 수많은 작은 국지전, 작은 전투에서는 실제로 패배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후서 2장 11절입니다.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사탄은 틈을 노립니다. 반드시 큰 죄일 필요도 없습니다. 작은 여우들이 포도원을 망치는 법이죠. 아주 작은 죄 하나가 사탄에게 발판을 내어 주고, 그 발판 위에서 사탄은 자신의 계략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거대한 문을 열어 버리는 겁니다.
우리는 이 전쟁에서 결코 패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존재도 ‘두나타이(dunatai)’ 입니다.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우리를 낚아챌 힘을 가진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사탄은 낚아채려는 자입니다. 그렇게 하려고 시도할 겁니다. 그러나 결코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사탄이 강한 자라면, 하나님은 그보다 더 강한 분이십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사실은, 우리가 결국 전쟁에서 이기게 될 것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그 과정에서 겪는 수없이 많은 전투에서 계속 패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지난번에 멈췄던 12절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전신갑주를 입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꼭 이해하셔야 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원수 때문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우리의 원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이 원수가 아닙니다. 사람을 미워하면 안 되는 이유이죠. 예수님이 죄는 미워하시되 죄인은 사랑하신 이유입니다. 진짜 원수는 죄인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죄인 뒤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들을 보시며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속고 있는 죄인들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보십시오.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이 말씀에 담긴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인들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사랑이 묻어나는 동정심, 은혜롭고 자비로운 긍휼입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은 사탄에게 속아 넘어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미워해야 할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그 뒤에서 역사하는 자와 그 세력입니다. 진짜 원수는 바로 사탄입니다.
따라서 사람을 상대로 이겼다고 해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착각입니다. 사람은 우리의 원수가 아닙니다. 사람은 우리가 상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원수는 인간을 넘어선 존재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이겁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결코 싸울 수 없다. 이 전쟁은 인간적인 싸움이 아니다.’ 여러분은 지금 한 인간으로서 초자연적인 세력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것도 하나의 존재와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혼자 움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한 규모의 귀신의 군대를 조직해서 움직입니다.
바울은 어떻게 설명합니까? 지난주에 멈췄던 12절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영어 성경으로 보면 각 항목마다 “대하여”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통치자들에 대하여,” “권세들에 대하여,”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에 대하여,”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이죠. 이 “대하여”라는 말이 각각의 범주를 분명하게 구분해 줍니다. 통치자들이 있고, 권세들이 있고, 주관자들이 있고, 마지막으로 문자 그대로 악의 영들이 있습니다.
귀신의 범주를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핵심은 이겁니다. “우리는 초인적인 적과 싸우고 있는데, 그 적은 고도로 복잡하게 조직되어 있다.” 하나님의 통치 질서를 살펴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거룩한 천사들을 연구해 보면, 하나님은 천사들을 질서 있게 조직해 두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천사들을 한번에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천사들은 번식하지 않죠. 과거 영원 속 어느 한 시점에 모두 한번에 창조되었고,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존재합니다. 그리고 모두 같은 모습이 아니라 서로 다르게 창조되었습니다. 사람이 서로 다르듯이, 천사들도 서로 다릅니다. 다양한 종류의 천사가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에는 천사장, 그룹, 스랍, 통치, 권세, 능력, 주권, 이렇게 불리는 천사들이 나옵니다. 직접 보고 싶으시다면 에베소서 1장 20절과 21절을 보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 모든 천사 군대를 수직 구조로 조직해 두셨습니다. 대천사들이 있고, 그 아래에 통치자들이 있고, 또 권세와 왕권과 주권과 능력들이 있고, 그룹들과 스랍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각기 다른 역할과 다른 역량을 가졌습니다.
예를 들어 다니엘서를 보십시오. 9장과 10장에 중요한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아마도 천사장에게 명령을 내리셨고, 천사장은 그 명령을 다시 천사들의 무리에게 전달했을 겁니다. 어떤 천사가 다니엘을 돕기 위해서 오고 있었는데, 하늘 어딘가에서 귀신과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귀신이 천사의 길을 가로막아서 지체시키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일이 실제로 어떻게 벌어질 수 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영적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언젠가 알게 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귀신은 거룩한 천사가 맡은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미가엘을 보내셨습니다. 미가엘은 ‘슈퍼 천사’, 그러니까 천사들의 대장입니다. 미가엘이 내려와서 그 귀신을 쫓아낸 후에 천사를 다시 보냅니다. 다른 천사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지고 있는 천사가 있다는 뜻입니다. 천사들 사이에 명확한 계급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귀신들 사이에도 이러한 계급이 존재합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은 아마도 더 높은 차원의 작전과 관련되어 있을 겁니다. 이어서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세상의 정치 구조 속으로 침투해서 영향을 미치는 귀신들입니다. 그래서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이라고 불리는 겁니다.
“어둠”이라는 용어는 지옥, 무저갱, 사탄의 권세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을 때를 두고 골로새서 1장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성경은 지옥을 “슬피 울며 이를 가는 바깥 어두운 데”라고 말합니다. “바깥 어두움”입니다. 그러니까 “어둠”은 귀신의 지배 영역, 사탄의 거처입니다.
요한계시록 9장을 보면, 그 어둠 속에서 더럽고 흉악한 메뚜기들이 뿜어져 나와 땅을 뒤덮습니다. 그러므로 어둠은 사탄의 지배와 연결되어 있고, 빛은 하나님의 지배와 연결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어둠 속에서 “세상 주관자들”이 나옵니다. 저는 세상 뒤편에서 귀신들의 세력이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고 믿습니다.
요즘에 제가 어디를 가든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전 세계적인 음모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별의별 음모론이 다 있더라구요. 어떤 사람들은 고대 문헌이 어떻다, 이집트 문서가 어떻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일루미나티”가 있다고 하면서 이런 음모, 저런 음모가 있다고 합니다. 달러 지폐에 있는 피라미드와 한쪽 눈 그림 같은 오컬트적인 상징에 대해서 말하면서 여러 가지 음모론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묻습니다. “목사님은 이런 것들이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세요? 높은 권세를 가진 귀신이 정말로 있을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자료들이 적절한지, 그 정보들이 정확한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변적인 것들을 모두 제쳐 두더라도, 제가 확신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높은 권세를 가진 귀신들이 세상을 자기 목적대로 움직이는 전 세계적 음모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만큼은 제가 분명히 압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각종 음모론이 정말 맞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소문들을 모두 믿지는 않기 때문이죠. 다만 제가 확신하는 것 한 가지는 이 세상의 체제 뒤에 귀신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대학살을 저지른 독재자들뿐 아니라, 세상의 지성인들조차 귀신의 영향 아래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만국의 모든 신들은 귀신”이라고 말합니다. 히틀러 배후에 귀신들이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귀신들은 나폴레옹, 알렉산더 대왕 같은 세계적인 통치자들 배후에서도 아주 활발하게 활동해 왔습니다. 이런 예들이 끝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의 말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통치와 권세, 즉 고위급 귀신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이 존재합니다. 저는 세상이 사탄의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믿으십니까? 사탄은 이 세상의 임금입니다. 그렇죠? 사탄은 이 세상의 임금입니다. 그리고 저는 사탄이 귀신에 씌인 세계 통치자들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세상 곳곳에 침투해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세상이 흘러가는 방식이 귀신들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매우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대학살을 저지른 우간다의 이디 아민(Idi Amin) 같은 경우입니다. 그러나 매우 은밀하게 진행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귀신의 세력이 하나님 없는 인본주의적, 무신론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음모론의 실체를 확신할 수는 없으나 사탄, 귀신의 존재는 분명합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실제로 요한계시록 18장은 그 체제의 마지막 모습을 ‘바벨론’이라는 이름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오실 때 문자 그대로 완전히 멸망하게 될 겁니다.
그런데 12절에 나오는 “이 세상 주관자들”이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로는 하나의 단어입니다. 단 한 단어로 표현된 개념입니다. 이 귀신들은 세상의 세력 배후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한번은 오컬트에서 빠져나온 청년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마크 에이지 소사이어티(Mark Age Society)’라는 단체에 아주 깊이 관여해서 상당히 높은 단계까지 올라갔던 청년입니다. 그래서 여러 비밀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귀신의 네트워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귀신들이 여러 영역에서 어떻게 관여하는지를 배웠다고 했습니다. 유엔(UN)에 관여하는 특정 귀신들의 이름, 또 여러 대륙과 여러 나라에서 활동하는 귀신들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 청년이 제게 들려준 이야기들은 정말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런 정보를 직접 접했던 사람들의 간증을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이것이 실제 사실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 말의 요지는 이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전쟁 중에 있습니다. 통치와 권세라 불리는 고위급 귀신들, 강력한 귀신들이 존재합니다.
또 어떤 귀신들은 실제로 세계 통치자들 속에 자리를 잡고 일하고, 세계 지도자들 속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적군은 아주 명확합니다. 우리가 싸우는 대상은 이런 엄청난 세력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넘어서는 적과 맞서고 있습니다.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우리의 지혜나 기지로 능가할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속이고, 거짓말하고, 강력하고, 초자연적이고, 초인적입니다. 이곳이 바로 전쟁터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얼마나 빨리 이해하느냐에 따라 여러분의 영적 상태가 달라집니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전쟁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면, 제가 앞서 말한 것처럼, 여러분은 이미 그 과정 속에서 한두 번 패배를 경험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레이스 교회에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슬픈 일은 우리가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착각입니다. 만족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죠. “이제 우리는 다 갖췄어. 모든 걸 알고 있고, 사역도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어. 참 멋지지 않아? 우리는 모두 잘 모이고 있고, 모든 게 잘 되고 있잖아.”
그러는 사이 우리는 세상에 여전히 길을 잃고 방황하는 영혼들이 많다는 걸 잊어버립니다.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교회로 데리고 오셨던 것이 언제입니까? 마지막으로 주일 저녁에 누군가를 데리고 오셔서 하나님 말씀을 함께 들었던 것이 언제입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 좀 피곤하네. 점심을 너무 많이 먹었나봐. TV도 너무 재밌고 말이야.”
이게 말이 됩니까? 운동선수가 이런 느낌이 들어서 경기장에 안 나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그 선수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군대에 있는 병사가 전투가 벌어졌는데도 막사에 누워 있기 편하다고 전쟁터에 나오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오늘 밥도 잘 먹었고 기분도 좋으니까 그냥 누워 있어야겠다. 전쟁은 다른 사람이 나가서 싸우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우리 교회는 여러 가지 자원을 제공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그 풍성한 자원 자체가 어느 순간 착각을 만들어 냅니다. 마치 이것이 시작이자 끝인 것처럼 말이죠. 그러다 보면 그레이스 교회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립니다. 제가 왜 주일 아침과 저녁에 여러분에게 말씀을 전하는지 아십니까? 왜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이 전쟁에서 승리하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전신갑주를 입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승리하는 데 필요한 원리들을 갖추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탄의 왕국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고,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내길 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높이고 찬양하기 원합니다. 이 비전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가 얻은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전쟁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잠시 이 구절만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를 주목하셔야 합니다. 잘 들으십시오. 10절에서 말하듯이 주 안에서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진다면, 11절에서 말하듯이 전신갑주가 이미 준비되어 있다면, 원수가 이토록 강력하고 체계적이고 위력적이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그러니까 여러분, 이 전쟁이 이렇게 심각하다면 반드시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토록 강력하시고, 전신갑주가 이토록 필수적이고, 원수가 이토록 두려운 존재라면, 반드시 전신갑주를 입으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요지는 바로 이겁니다. 무관심해서는 안 됩니다. 패배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악한 날에 능히 대적해야 합니다.
악한 날이 언제냐구요? 오늘입니다. 오늘이 악한 날입니다. 그렇습니다. 1979년 4월 29일, 오늘이 악한 날입니다. 내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이 세상의 왕좌를 빼앗은 그날부터 오늘까지 매일이 악한 날이었습니다. 찬탈자가 그 자리를 차지한 순간부터 무저갱에 던져질 때까지의 매 순간이 악한 날입니다. 악은 하나님의 나라를 끊임없이 공격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아, 저는 이 표현이 정말 좋습니다. “서기 위함이라.” 전투의 충격이 지나가고, 먼지가 가라앉고, 연기가 걷힐 때, 그때 누군가가 서 있는 모습입니다.
스코틀랜드에 갔을 때에, 프레이저버러(Fraserburgh)에서 한 사람이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그 지역 교회에서 흔히 입는 것처럼 뒤로 채우는 목회자 칼라를 하고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더군요. “저는 세실 밀스 목사입니다. 목사로서 사역을 꽤 오래 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혹시 아버님 성함이 잭 맥아더 맞습니까?” 그래서 제가 “네, 맞습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잭 맥아더 목사님은 30년쯤 전에 아일랜드에 오셨습니다. 두 분과 함께 오셔서 벨파스트를 비롯한 아일랜드 여러 지역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셨습니다. 저는 그 집회에서 아버님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저의 인생을 사역에 헌신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저는 지금 목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버님을 사용해 주신 덕분이죠. 정말 그분의 아드님이 맞는지 제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꼭 저의 말을 아버님께 전해 주시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전해드리겠다고 답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이 저에게 다시 물으셨습니다. “아버님은 혹시 지금 어디 계십니까?” 그래서 제가 대답했습니다. “여전히 목회를 하고 계시고, 사역도 하시고,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예전하고 똑같이요.” 그 목사님이 다시 물어보셨습니다. “여전히 말씀을 전하는 일에 충실하십니까?” 제가 말했습니다. “네, 여전히 말씀에 충실하십니다. 계속 사역하고 계시고, 여전히 굳게 서 계십니다” 이렇게 답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참 좋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목사님은 또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척은 어떻게 되었나요?” “배교자가 되었습니다. 믿음을 부인했고, 진리를 버렸고,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했습니다.” “아, 참 슬픈 일이네요. 잠재력이 많았던 사람이었는데.” “그럼 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이고, 참 안타깝네요.” “네, 그렇죠.”
이런 말씀을 여러분께 드리고 싶진 않지만,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30년 전에 아일랜드에 세 사람이 갔습니다. 열심히 사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전투가 끝나고, 먼지가 가라앉고, 연기가 걷히고 나면, 모두가 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 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지금도 모든 것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번주에 한 여성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저는 몇 년 동안 그레이스 교회에 다녔고, 여러 사역에 깊이 참여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이어서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떠나려고 합니다. 비신자와 결혼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에요.” 그동안 모든 것을 열심히 했지만, 더 이상 서 있지 못하는 겁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설교할 준비가 되어 있고, 싸울 준비도 되어 있고, 이 경주에서 승리하기 위해 달릴 준비도 되어 있다.” 고린도전서 9장이죠.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잘 들으십시오. 모든 것을 열심히 했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를 목회했고, 말씀을 가르쳤고, 성경공부를 인도했고,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격렬해지고, 연기가 걷히고, 먼지가 가라앉자 쓰러져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전신갑주를 입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신갑주를 입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 교회에서 이런 말을 듣습니다. “우리 아무개 목사님의 삶에 끔찍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전신갑주를 입지 않았고, 원수가 얼마나 강한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묻는 분이 계실 겁니다. “하나님의 능력은요? 하나님이 목사님을 지켜주실 수는 없었을까요?” 물론 지키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을 취하지 않은 겁니다. 그렇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우리는 마귀를 쫓아다니지 않습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마귀를 찾아가서 붙잡아라”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귀신들을 찾아내서 이름을 부르고, 쫓아다니고, 무저갱으로 보내라”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 말씀은 없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귀가 여러분에게 올 때, 여러분은 그저 서 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서다”라는 단어는 야고보서 4장 7절에서 사용된 단어와 같습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에서 “대적하다”입니다. 또 베드로전서 5장 8절부터 9절에서도 같은 단어가 쓰였습니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한 다음, 9절에서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고 하는데 “대적하라”와 같은 단어입니다.
서서 대적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부름받은 일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해 살고 있다면, 사탄의 공격을 끊임없이 받을 겁니다. 여러분이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전신갑주를 입고 사탄을 대적하면서 서 있기만 하면 됩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합니다. 저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많은 분들이 이미 성경 지식을 충분히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풍성하게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영적 공급이 넘쳐납니다. 그러나 전신갑주를 입지 않은 채 어리석게 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지 않고, 전쟁터 한복판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기 위해 준비되지 않은 채,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취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면, 언젠가 여러분은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넘어진다면 정말 슬픈 일입니다. 너무 끔찍하게 무너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밟고 지나가면서 쓰러진 여러분을 바라보면서 조롱할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받을 상을 잃어버릴 겁니다. 요한이서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 여러분은 하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앞에 올려 드릴 상을 삶 속에서 쌓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넘어져서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저는 제 삶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이 제게 주신 모든 것들을 봅니다. 경건한 가문, 대대로 이어져 온 많은 설교자들, 저는 5대 설교자입니다. 그런 경건한 유산을 제가 봅니다. 또 하나님께서 제가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하신 교육, 이곳에서의 사역, 제 삶에 복을 주시고 기도로 함께 서 있는 친구들과 성도들을 보내 주신 것, 우리가 상상도 못했던 열매들을 허락해 주신 것, 이 모든 것을 제가 봅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제가 넘어지고 쓰러진다면, 이 모든 것들을 잃게 될 것이고, 이 땅에서의 승리도 잃게 될 겁니다. 물론 저는 구원받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저를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기 때문이죠. 그러나 복과 열매와 상급은 잃어버리게 될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 있어야 하는 겁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이 서 있으려면 반드시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꼭 전달해 드리고 싶은 핵심입니다.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이제 잠시 이 전신갑주를 함께 보겠습니다. 마음속에 그림을 그리실 수 있도록 13절부터 17절까지를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앞으로 몇 주에 걸쳐서 이 각각의 무기들이 의미하는 바를 자세히 살펴볼 겁니다. 그런데 지금 꼭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 전쟁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더 분명하게 설 때, 더 치열하게 전투를 치르게 될 겁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전투를 더 기쁘게 받아들이게 될 겁니다. 왜냐하면 그럴수록 하나님이 더 크게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10절은 주님께서 능력의 근원이시라고 말합니다. 11절은 우리가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12절이 원수가 얼마나 강한지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죠. 13절부터 17절은 전신갑주가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그런데 잘 보십시오. 우리가 전신갑주를 다 갖추고, 완전히 준비가 되어 있다 하더라도, 1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왜 그렇습니까? 모든 것을 갖추고 준비되어 있을 때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를 위해 기도합시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위해 기도합니까? 모든 성도입니다. 여러분은 전쟁터에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까? 정말 기도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기도 모임을 하면, 누가 다리가 부러졌다거나, 누가 치료를 받고 있다거나, 그런 이야기들만 주로 합니다. 그런데 저는 정말 필요한 것들에 대해 우리가 기도하고 있는지 궁금할 때가 많습니다. 몸을 고쳐 달라고만 기도할 것이 아니라, 영과 혼을 강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먼저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자녀들이 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기도하고 계십니까? 남편 여러분, 아내가 전신갑주를 입고 승리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계십니까? 아내 여러분, 남편을 위해 기도하고 계시나요? 서로 잔소리하기보다 서로를 위해 기도해 보십시오. 기도가 가장 확실한 해결책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이 전쟁을 싸우기로 결단하고, 그 대가를 치를 각오가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도 못할 승리의 기쁨과 환희를 주실 것입니다. 가장 큰 기쁨은 가장 큰 승리 속에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제가 저의 마음을 여러분 앞에 털어놓았습니다. 솔직히 두렵기도 합니다. 주일 저녁에 강단에 서면 빈자리가 여럿 보입니다. 그런데 주일 아침에는 자리가 꽉 찹니다. 저는 속으로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헌신의 수준은 어디까지인가?” 물론 멀리 사시고, 또 오시기 힘든 사정이 있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제 마음 한편에는 영적 전쟁이 현실이라는 걸 깨닫지 못하는 분들이 너무 많다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단 한 번뿐인 전쟁입니다. 단 한번의 경기, 단 한번의 기회입니다. 마지막 휘슬이 울리면 끝입니다. 이 전쟁에서 무엇을 했는지가 영원히 기록에 남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의 능력을 우리에게 주셔서 승리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육신의 어리석음, 사탄의 간계와 속임수, 악한 영들의 교묘한 책략, 세상이 우리에게 속삭이는 거짓말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옵소서. 우리를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거룩한 자로 세워주시고, 항상 전신갑주를 입고, 담대하게 주님의 진리를 따라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를 위대한 군대로 일으켜 주옵소서. 하나님의 군사로 세워 주옵소서. “믿는 사람들은 주의 군사니”라는 찬송가가 단지 옛 찬송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주어진 행군 명령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 대적을 마주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 찬송가의 가사가 떠오릅니다. “두려워 말라, 그리스도인들이여. 포기할 것인가? 고난의 전장을 떠날 것인가? 위기의 순간에 도망칠 것인가? 대장이신 주님의 능력을 모르는가?” 하나님, 우리가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주를 위해 사는 삶에 헌신하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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