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는 간략한 서론을 다루겠습니다. 에베소서 6장 10절부터 13절까지의 첫번째 부분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제가 말씀을 읽겠습니다.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오늘 오전에는 여기까지만 보겠습니다. 이 구절들 안에 담긴 모든 내용을 오늘 한 번에 다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앞으로 몇 주간 계속해서 살펴볼 겁니다. 오늘은 전체적인 윤곽을 살펴보면서 몇 가지 중요한 핵심만 짚으려고 합니다. 그 전에 먼저 제가 이 말씀의 문맥을 간단히 다시 말씀드리고 시작하겠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를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신자가 된다는 것,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되었다는 것의 의미를 보여줍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신자의 지위가 무엇인지,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누구인지,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 존재인지,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규정되는 우리의 성품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에베소서의 첫 세 장을 통해 "신자의 지위"에 대한 위대한 진리를 살펴보았습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가 하는 본질적인 진리를 배웠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자로 삼으시고, 사랑하시고, 예정하시고, 용서하시고, 깨우치시고, 지식과 지혜와 능력을 부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그리스도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선한 일을 행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서 전혀 새로운 영역으로 인도되었고, 하나님과의 연합, 그리스도와의 연합, 성령과의 연합, 그리고 신자들의 연합 가운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태도가 달라집니다. 생각이 달라지고, 감정이 달라지고, 말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이런 모든 변화가 에베소서 첫 세 장에서 신자의 표지로 분명하게 제시됩니다. 이 모든 것은 교회의 신비 속에 담긴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에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하나로 만드셨고,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를 충만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4장, 5장, 6장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지위, 우리의 정체성에 이어서 이제는 삶의 방식이 제시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도달해야 할 삶의 기준들을 분명하게 제시해 주었습니다. 제가 전에 이 내용을 자동차에 비유해서 설명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앞의 세 장은 자동차 자체를 설명합니다. 엔진이 무엇인지, 동력 장치가 무엇인지, 어떤 성능을 가진 차량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뒤의 세 장은 그 자동차가 달려가야 할 길, 그러니까 지도를 보여줍니다. 처음 세 장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고성능 엔진을 가진 존재로 정의됩니다. 그리고 뒤의 세 장은 그 능력을 가지고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시동 버튼은 속사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강건해지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다스리실 때, 우리는 엔진을 켜고, 하나님께서 주신 지도를 따라서 순종하며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4장과 5장과 6장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세상과 다르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합당하게 행해야 합니다. 하나됨의 길을 걷고, 연합의 길을 걷고, 세상과는 다른 길을 걷고, 사랑의 길을 걷고, 빛의 길을 걷고, 지혜의 길을 걷고, 성령 안에서의 길을 걷습니다. 우리의 관계가 달라지고, 찬송이 달라지고, 결혼생활이 달라지고, 가정이 달라지고, 직장 생활도 달라집니다. 이 모든 것은 세상 한가운데서 성도가 살아가야 할 특별한 기준이요 원리입니다.
이제 요약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모든 자원과 모든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모든 원리도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아무리 부활의 능력이 있고, 아무리 필요한 모든 진리들이 다 준비되어 있다고 해도, 그 길이 결코 쉽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점을 강조하면서 에베소서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무엇도 당연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직장에서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를 안다고 해서 그대로 다 해낼 수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가정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안다고 해서 반드시 그렇게 살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부활과 능력에 관한 진리를 안다고 해서 그것이 저절로 삶에 적용되는 것도 아닙니다. 결혼에 대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가르치시는지를 안다고 해서 그 열매가 자동으로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능력이 이미 주어져 있고 원리도 이미 주어져 있지만, 여기에 또 하나 분명한 존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려는 모든 선한 일을 가로막으려 하는 원수, 대적자입니다. 원수는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방해하기 위해 반드시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한 단어로 정의하자면 가장 정확한 표현은 바로 ‘전쟁’입니다. 전쟁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전쟁으로 설명합니다.
실제로 바울은 죽음을 앞에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다.” 또 자신의 사역을 두고는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에게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라고 권면했습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전쟁으로 묘사합니다. 예수님의 사역 또한 시작부터가 전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40일 동안 금식하신 후에 사탄과 정면으로 맞서 세 차례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끝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다시 사탄의 극심한 공격을 받으시면서 땀이 핏방울처럼 흐를 정도의 영적 전쟁을 치르셨습니다. 이 장면은 많은 것을 보여주지만, 제가 여러분께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한 가지는, 여러분의 신앙 여정이 시작에 있든, 끝자락에 있든, 싸움이 똑같이 지속된다는 사실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더 쉬워질 거라고 생각하신다면 커다란 착각입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할 때도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받으셨지만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사역의 마지막, 그러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일이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목적을 이루시는 순간에 가까워질수록 원수의 공격이 더욱 거세졌습니다. 누군가 제게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복음을 전하기 시작해 봐. 하면 할수록 점점 쉬워질 거야.”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역을 더 잘 할수록 사탄의 방해는 더 심해집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물을 때가 있습니다. “목사님, 그렇게 오래 설교를 해 오셨으니까 이제는 쉽지 않으세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전보다 하나도 쉬워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떤 때는 더 어렵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사탄이 어떻게 해서든 제가 말씀을 전하는 일을 방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도 설교를 준비하기 위한 시간을 싸워서 지켜내야 합니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치열하게 싸워서 그 시간을 확보해야 합니다. 이른 새벽이든, 늦은 밤이든, 가능한 모든 틈을 이용해서 말씀을 준비합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이 우선순위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끊임없이 수많은 방해거리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정말로 저를 거세게 공격합니다. 여러분, 어떤 때는 정말로 지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눈을 떴는데, 천장을 바라보면서 순간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이겁니다. “아, 이런. 오늘이 주일이네. 또 설교해야 하네.” 이게 솔직한 마음이었습니다. 정말 다시 잠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아, 내가 딱 설교를 못 할 정도로만 아프면 얼마나 좋을까. 여행을 가거나 드라이브를 하거나 골프를 칠 수 있을 만큼만 말이야.”
그래서 잠깐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지금 저의 이 모습은 새 사람이 된 제 모습이 아닙니다. 이것은 제 안에 있는 죄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아침을 먹고 나니까, 오히려 빨리 이곳으로 나오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이 싸움이 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언제나 전쟁입니다. 멈추지 않는 전쟁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큰 성취감과 함께 피로감이 몰려옵니다. 왜냐하면 오래 싸울수록 승리의 열매가 더 많이 쌓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승리의 열매가 쌓일수록 하나님을 더 신뢰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저를 끝까지 인도해 주신다는 확신이 더 깊어지고,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것을 볼 때마다 더욱 감격스럽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한계시록에서 성도들이 죽은 후에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습니다. 저는 가끔 천국을 그렇게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릴 것은, 제가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전쟁이 계속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기를 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6장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려 함은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 바울은 이렇게 말한 겁니다. “나는 여기 머물러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이곳이 전쟁이 가장 치열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좀 벗어나야겠다. 너무 어렵다. 좀 쉬운 사역을 찾아야겠다.” 많은 목회자들도 사역이 힘들어지면 곧바로 떠나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여기 있어야 한다. 이곳이 전쟁이 가장 치열한 곳이기에 가장 큰 승리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쟁입니다.
예전에 버드 로빈슨 삼촌이 저에게 이런 말을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전쟁이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내 평생 사탄을 물어뜯을 거란다. 이가 다 빠지면 죽을 때까지 잇몸으로라도 물어뜯을 거야.” 사탄은 정말 집요합니다.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는 것은 초원을 거닐면서 꽃을 따는 그런 삶이 아닙니다. 사방에 보이지 않는 저격수가 숨어 있는 지뢰밭을 지나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그 저격수들은 여러분이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초자연적인 영역에 속해 있습니다. 이것은 전쟁입니다. 원수는 하나님의 모든 뜻과 목적을 철저히 파괴하려고 이를 악물고 덤벼듭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을 영적 싸움을 하는 존재로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군사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0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우리가 싸우는 이 전쟁은 단순히 육적인 전투가 아닙니다. 단지 인간적인 차원의 싸움만도 아닙니다. 물론 원수의 공격은 때로 사람을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본질은 영적인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예수님께 임했던 것처럼 사람들의 박해를 통해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침을 뱉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조롱과 저주와 모욕적인 말로 나타날 수도 있고, 얼굴을 치는 폭력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옆구리를 찌르는 창과 손과 발에 박히는 못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사도들처럼 목이 베이거나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점점 더 하나님을 거부하는 인본주의 사회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전파해 나간다면,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증오와 박해, 그 물리적인 현상 뒤에는 성도와 싸우고 있는 영적인 존재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이 물리적인 세계를 사용할 뿐입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사탄이 그리스도를 미워해서 사람들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도구로 사용하는 겁니다. 전쟁의 배후에는 바로 이 사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너무도 강하고, 너무도 교활하고, 너무도 속임수에 능하고, 너무도 교묘한 원수를 상대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우리의 지위가 지닌 모든 가능성을 온전히 이루려 한다면,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정체성대로 실제로 살아내려 한다면,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충만한 삶이 무엇인지 알기 원한다면, 우리는 에베소서의 마지막 장에서 바울이 전하는 이 말씀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제까지 이 모든 진리를 다 배웠으니까, 나가서 그대로만 하면 된다고 쉽게 여기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아가려는 순간, 우리는 첫 걸음부터 곧바로 거센 저항에 부딪히게 될 것이고, 그 싸움은 끝까지 계속될 겁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도록 온 힘을 다해 막아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10절부터 13절을 살펴보면서, 오늘 아침에는 다섯 가지를 간단히 나누려고 합니다. 준비, 전신갑주, 원수, 전투, 그리고 승리입니다. 오늘은 아주 개괄적으로만 다룰 것이고, 자세한 내용은 그 다음 시간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먼저 첫째는 ‘준비’입니다. 아주 기본적인 사항입니다.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쟁이 시작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아무 생각 없이 어슬렁거리다가, 전쟁에 들어와 있는 줄도 모른 채 이미 절반은 패배한 상태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준비가 가장 먼저입니다. 10절에서 바울이 가장 먼저 말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끝으로”라고 말하는데, 에베소서에서 다루는 마지막 주제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리고 “내 형제들아” 이렇게 부르는데, 이 싸움 속에서 바울과 성도들이 같은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삶의 일반적인 원리로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라.” 바울이 말하는 핵심입니다. “형제들아, 삶의 방식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힘에 의지하라.” 바울은 여기서 ‘안에서’라는 표현을 두 번 사용합니다. “주 안에서”, 그리고 “그의 힘의 능력 안에서”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전체를 꿰뚫는 가장 핵심적인 진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의 능력이고, 그리스도의 진리가 우리의 진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강해지는 곳도 바로 그리스도 안이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의 능력이 되는 것도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또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원수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곧 우리가 잠시 후에 보게 되겠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그 원수의 힘보다 훨씬 더 큽니다. 저는 요한계시록 3장에 나오는 빌라델비아 교회를 생각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참으로 좋은 교회였습니다. 일곱 교회 가운데 책망을 받지 않은 두 교회 중의 하나죠. 의로운 믿음의 공동체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빌라델비아 교회는 전도하는 교회였고, 하나님께서 분명히 복 주시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8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이 표현이 참 아름답습니다. 왜냐하면 이 ‘작은 능력’으로도 교회를 능히 지켜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탄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강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아주 조금만 있어도 모든 원수의 세력을 이겨내기에 충분합니다.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히 더 크기 때문에, 가장 작은 하나님의 능력이라도 지옥의 가장 큰 세력과 원수의 모든 힘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힘은 주님 안에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다시 말해서, 이 모든 자원과 능력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우리가 실제로 이 자원을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을 부인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진리를 부인하는 겁니다. 에베소서 6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사상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사탄에게 치명상을 입히셨다고 믿습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에서 말하듯이,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를 멸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믿기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미 이루어진 그 승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뿐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사탄을 패배시키셨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바로 그 동일한 십자가에서 우리 역시 사탄을 패배시킨 것입니다. 사탄이 지금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 굴복해 있다면, 로마서가 말하듯이 사탄은 또한 우리 발 아래에 있습니다.
저는 사탄이 이미 패배한 적이라고 믿습니다. 사탄이 성도에게 더 이상 참소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로마서 8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만일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 하셨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전쟁을 이기셨고, 하나님께서 이미 완전한 승리를 거두셨다면, 그 승리는 곧 나의 승리입니다. 그리고 사탄은 성도의 생명 안에 거하시는 그 부활의 능력을 결코 저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전쟁 한복판에 있지만, 패배해야 할 이유도 없고 두려워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원이 우리에게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 디모데는 사역을 하면서 두려움에 사로잡혀 소심해졌고, 젊은 나이에 찾아오는 정욕의 유혹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거짓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의 공격도 거셌습니다. 자기 안에서 밀려오는 두려움에 짓눌려서, 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을 부끄러워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자신을 제자로 세워준 사랑하는 사도 바울마저 부끄러워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두려움과 소심함, 사랑의 결핍, 수치심, 정욕 등 온갖 혼란 속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2장 1절에서 이렇게 당부합니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디모데야, 이럴 이유가 없다. 하나님이 이미 주신 능력을 붙잡으라.” 1장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핵심은 이겁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인생의 어느 순간에도, 원수 앞에서 패배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승리를 위한 모든 자원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국 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할 것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미 승리하셨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그 과정 중에 겪는 전쟁에서도 패배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반드시 주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 둘째,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반드시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귀신의 역사에 대해 참 많은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스도인들끼리 서로 귀신을 어떻게 내쫓아야 하느냐에 대해서 걱정하는 모습도 봅니다. 이른바 ‘기독교적 퇴마’라고 불리는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내용은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어느 시대에도, 어느 곳에서도, 귀신이 신자, 믿는 자에게서 쫓겨났다는 사례는 단 한 번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사탄을 두 가지 방식으로 다룹니다. 하나는 주님의 능력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성도에게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공급입니다. 언제나 이 두 가지 방식입니다. 의식, 퇴마, 그런 것들과 성경은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자원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꼭 전하고 싶은 핵심입니다. 그 자원이 이미 주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에베소서 1장 19절입니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어떤 능력입니까? “지극히 큰 능력”입니다. 얼마나 큰 능력입니까?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히신 능력입니다.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신 능력입니다. 우리가 가진 능력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에서 죽음을 이기신 능력입니다. 무덤에서 죽음을 이기신 능력입니다. 그리스도를 하늘 보좌 우편에 높이 들어 올려 세상의 모든 천사와 모든 귀신의 발 아래 두신 그 능력입니다.
바로 그 능력을 우리가 가졌습니다. 그 능력이 지금 믿는 우리를 향해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사탄이 어떤 방식으로 공격해 오든지 그 공격을 감당할 수 있는 그 자원이 우리 안에 이미 있습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그 능력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주님에게서 비롯된 것이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주신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급을 붙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준비란 무엇입니까? 주 안에서 그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우리는 예수님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을 이미 공급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부활의 능력으로 사탄을 대적하지 못할 성도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최근에 저는 그리스도인이 귀신 들려서 스스로는 쫓아낼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대신 쫓아내 주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성경과 전혀 맞지 않는 말입니다. 모든 성도 안에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어떤 형태든, 단순하든 복잡하든, 그 어떤 사탄의 일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이미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입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여러분, 언제가 가장 약한 때인지 아십니까? 스스로 약하지 않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나는 모든 정보를 다 갖고 있어. 에베소서를 완벽하게 이해했고 심지어 암송까지 했지. 교리적인 지식도 충분해. 이제 괜찮아. 무엇을 해야 할지도 알고, 원리도 다 알고 있어.” 이렇게 생각할 때입니다. 또는 “나는 사탄도 감당할 수 있어. 필요한 장비를 다 갖췄어.” 이렇게 생각할 때입니다. 핵심은 이겁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패배하게 될 겁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순간, 사탄이 그 어떤 공격을 해 오더라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13절을 보겠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여기서 이 모든 싸움이 하나님의 성품, 그러니까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단지 하나님의 능력만이 아니라, 그 능력을 반드시 우리에게 사용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탄이 성도의 삶 속에 성도가 감당할 수 없는 발판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시험과 함께 피할 길도 만드셔서 우리가 능히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다시 말해, 이 전쟁 속에서 우리가 패배하는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기만 한다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가장 약할 때 가장 분명하게 승리합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약함 가운데서 온전해집니다.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순간, 하나님이 능히 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승리를 경험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보초병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해봅시다. 적군이 다가오는지 감시하고 있다고 해봅시다. 그런데 갑자기 적군이 요새를 향해 몰려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망루에서 헐레벌떡 내려와서 작은 총을 하나 들고 나가서 적군하고 직접 싸우시겠습니까? 현명한 병사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보초병은 전쟁에 나가서 싸우는 병사가 아닙니다. 지휘관에게 알리는 병사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원리를 삶에 더 빨리 적용할수록 훨씬 더 안전해집니다. 사탄이 공격해 올 때 직접 맞서 싸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지휘관이신 하나님께 보고하십시오.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뭐라고 말했습니까?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전쟁은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께 맡기십시오. 주님은 무엇을 하셔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싸우시도록 주님께 맡기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능력은 이미 주님 안에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0절입니다.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그러므로 패배 의식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어떤 성도라도 사탄에게 완전히 짓눌려서 빠져나올 수 없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세게 묶여 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주신 힘을 붙잡기만 하면 반드시 빠져나올 길이 있습니다. 그 힘은 첫째,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이고, 둘째는 우리가 앞으로 계속 살펴보게 될 전신갑주를 입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반드시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준비’입니다. 성령님이 여호사밧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얼마나 큰 위로인지 모릅니다. 사실 저는 제가 볼 수도 없고, 본질 자체가 영적인, 저의 이해를 훨씬 넘어서는 이 전쟁에 저 혼자 뛰어들어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원수가 어디에 있는지도, 어떻게 역사하는지도 모르는 그런 싸움에 뛰어들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싸움이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시험이 오고 사탄이 혼란스럽게 할 때마다, 저는 곧바로 지휘관이신 주님께 보고합니다. 제 삶을 정결하게 해 주시고, 가능한 한 의로운 그릇으로 만들어 달라고 주님께 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 가운데서 저는 두려움 없이 섭니다. 주님께서 저를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두번째입니다. ‘전신갑주’로 넘어갑니다. 원수를 상대하는 두번째 방법입니다.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에베소서 6장 11절입니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여기서 잠시 멈추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자세히 다룰 겁니다. 모든 성도는 반드시 이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전신갑주를 실제로 입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여러분 주위에 둘러앉아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쫓아내면서 얼굴이 새파래질 때까지 소리를 쳐도, 전신갑주를 입지 않으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전신갑주를 입고 있다면, 귀신을 쫓아내려고 그렇게 소동을 피울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마련해 두신 전신갑주를 순종으로 입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문제를 다룰 때 언제나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입으라”는 이 표현은 원문을 보면 “계속 입고 있으라” 이런 뜻입니다. 토요일에 경기를 할 때만 입는 유니폼처럼 필요할 때만 잠깐 입는 옷이 아닙니다. 평생 동안 벗지 않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만나는 날까지 이 전신갑주를 결코 벗지 말아야 합니다. 전신갑주를 계속 입고 있으셔야 합니다. 만약 입지 않고 있다면 즉시 약해집니다.
바울은 아마도 로마 군인에게 사슬로 묶인 채 이 글을 쓰면서, 군인이 입고 있는 군복과 모든 갑옷을 바라보면서, 이것이야말로 성도가 원수를 대적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완벽한 모습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6장 14절 이하에서 이 전신갑주를 하나하나 말합니다.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다음 주부터 이 놀라운 내용들을 하나씩 자세히 살펴볼 겁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반드시 붙잡아야 할 기초를 보겠습니다.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전신갑주를 입으십시오. 벗지 말고 끝까지 계속 입고 계십시오.
제가 지금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너무 순진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을 알고 있기만 하면 괜찮다고 그런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안됩니다. 우리는 반드시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이 전신갑주는 단순한 지식의 차원을 넘어서, 의롭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앞으로 살펴볼 겁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승리하고 싶으시다면, 전신갑주를 입으십시오. 여러분의 삶을 바로 세우십시오. 왜냐하면 이 싸움은 여러분이 죽는 날까지 계속될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세번째로 원수에 대해 말합니다. 11절입니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다시 말해서 우리는 주님의 능력과 그 힘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습니다. 우리는 준비된 상태입니다. 전신 갑주를 입고 순종하며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여 서는 것입니다. 신자는 항상 서 있어야 합니다. 사탄이 공격해 오기 때문이죠. 여러분이 굳이 사탄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귀신을 부르고, 귀신을 쫓아내야겠다고 말하고, 귀신과 직접 대화를 시도하는 것을 볼 때마다 불안합니다. 왜냐하면 아무 정보도 없는 영역으로 함부로 뛰어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서 계시기만 해도 사탄은 반드시 다가옵니다. 굳이 찾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탄과 직접 상대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면 됩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전신갑주를 붙들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전신갑주를 통해서 원수를 처리하십니다. 우리는 굳게 서 있기만 하면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마귀를 공격하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마귀를 대적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도망친다고 했습니다. 굳게 서 있으라는 겁니다. 자기 자리를 지키라는 겁니다. 원수가 누구입니까? 너무 분명하죠. 마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 마귀같은 건 없어. 그냥 할로윈 때 입는 의상 아니야? 뾰족한 꼬리에 작은 뿔 두 개가 있고 삼지창을 들고 있는 캐릭터, 그런 것일 뿐이야.”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마귀가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루시퍼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가장 위대한 천사였죠. 이사야 14장과 에스겔 28장은 이 천사에 대해서 말합니다. 기름 부음 받은 그룹이었고, 하늘의 모든 보석으로 빛나던 존재, 하나님께서 만드신 가장 높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이 기름 부음 받은 천사가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교만의 죄를 품었습니다. 그 결과로 하늘에서 쫓겨났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입니다.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이렇게 타락한 천사 루시퍼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사 삼분의 일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그 수가 말 그대로 수백만에 이릅니다. 이들이 곧 악한 영적 원수, 귀신들의 무리가 된 겁니다. 루시퍼가 바로 마귀입니다.
예수님도 마귀의 존재를 인정하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마귀와 직접 대화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6장, 다른 곳 여러 곳에서도 마귀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도 마귀의 존재를 알았습니다. 바울도, 베드로도, 야고보도 모두 마귀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역사 전체를 보아도 마귀는 분명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와를 유혹했죠.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했고, 스가랴 3장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대적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에서 하나님의 종의 길을 막았고, 고린도후서 4장에서 복음을 가로막았습니다. 디모데전서 3장에서는 우리를 올무로 잡고, 요한계시록 16장에서는 열방을 미혹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는 빛의 천사로 가장하고, 유다서에서는 미가엘과 싸웁니다. 창세기 3장에서는 죄를 세상에 끌어들였고, 요한일서 5장에 따르면 지금도 온 세상이 마귀의 손아귀에 있습니다. 이처럼 마귀는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계속 활동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이름이 여러 가지입니다. 에스겔 28장에서는 ‘기름 부음을 받고 지키는 그룹(anointed cherub)’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6장에서는 이 세상의 임금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서는 이 세상의 신이라고 하고, 누가복음 11장 15절에서는 귀신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사탄(Satan)’은 52번 등장하는데요, ‘대적자’라는 뜻입니다.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이름입니다. ‘마귀(devil)’는 35번 나옵니다. 헬라어 디아볼로스(diabolos)로서 ‘중상자’, ‘비방하는 자’ 이런 뜻입니다. 또 옛 뱀, 큰 용, 울부짖는 사자, 악한 자, 아바돈(Abaddōn), 아볼루온(Apolluōn), 시험하는 자, 고소하는 자, 지금도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으로 불립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마귀를 살인자요 거짓말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귀는 노골적으로도, 은밀하게도 일합니다. 귀신의 교리와 미혹하는 영들로 사람들을 속입니다. 요한일서 3장 8절에 따르면 죄를 짓는 자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3절에서 15절을 보면 거짓 사도로 가장하는 모방자이기도 합니다.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루시퍼입니다. 수세기, 수천 년 동안 존재해 온, 거대한 귀신의 무리를 다스리는 통치자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 땅에 있었습니다. 교활하고, 영리하고, 교묘하고, 간사하고, 보이지 않는 인간을 초월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원수입니다.
11절을 보면 귀신들은 “마귀의 간계”에 따라 움직입니다. 여기 ‘간계’라는 말은 헬라어로 메도데이아(methodeia)인데, ‘계략’, ‘전술’, ‘조직적인 술책’ 이런 뜻입니다. 에베소서 4장 14절에서는 사람을 속이기 위해서 숨어서 쓰는 ‘간교한 속임수’로 번역됩니다. 무엇을 속입니까? 어린아이처럼 이 교리 저 교리에 흔들리면서 이리저리 휩쓸리게 만드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쓰는 간계의 핵심은 거짓말, 거짓 교리, 거짓 종교, 거짓 가르침입니다.
마귀는 거짓말하는 자입니다. 거짓의 아비입니다. 속이는 자입니다. 마귀는 은밀하게, 초자연적으로, 영리하게, 강력하게 사람을 속입니다. 거짓 종교 체계를 통해서 전 세계의 인류를 속여 왔습니다. 그 체계들이 얼마나 정교한지 정말 놀라울 지경입니다. 구약 시대에 사탄이 이스라엘을 속여 우상을 섬기게 하고 하나님을 등지게 했다는 사실 아십니까? 신약 시대에는 사탄이 이스라엘을 속여 자기들의 메시야를 죽이게 만들었습니다. 미래에는 사탄이 이스라엘을 속여서 적그리스도를 그리스도라고 믿게 만들 겁니다.
마귀는 속이는 자입니다. 교묘합니다. 거짓말, 이단, 거짓 교리로 사람들을 속입니다. 단순한 것이든 정교한 것이든 가리지 않고 거짓말을 합니다. 제가 거짓 교리와 거짓 종교와 거짓 가르침에 대해서 화가 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든, 하나님의 가정을 향한 질서를 부정하는 새로운 해방 사상이든, 동성애라는 새로운 도덕이든, 각종 사이비와 분파와 온갖 변형된 사상이든, 혹은 이 세상의 오래된 기존 종교이든, 이 모든 것이 전부 사탄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런 것들에 격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반드시 정면으로 맹렬하게 공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지옥에서 유래했기 때문이죠. 사탄에게서 왔기 때문이죠. 마귀의 간계입니다. 사탄은 매우 영리합니다. 세상 속으로 들어와서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에 이르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누가복음 8장에 따르면 말씀을 빼앗아 갑니다. 말씀을 비틀고 왜곡합니다.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고,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을 부정하고, 재림을 부정하고, 심판을 부정하고, 죄를 부정하고, 결국에 모든 것을 부정하는 사람을 강대상에 세워서 설교하게 합니다.
마귀는 사람을 멸망으로 이끄는 삶의 방식을 가르칩니다. 개인의 삶에만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와 정부와 국가에도 개입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와에게 했던 것처럼,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 속에서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마음속에 의심을 만들어 냅니다. 박해를 일으키고, 섬김을 방해하고, 공포를 교회 안으로 스며들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유혹해서는 자기 의지로 살게 하고, 의심하게 하고, 거짓에 빠뜨리고, 음란하게 하고, 세속적으로 만들고, 교만하게 하고, 낙심하게 합니다. 끝이 없습니다. 아주 매우 교묘합니다. 정말로 교묘합니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더 성숙해질수록 점점 쉬워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많이 알수록 더 교묘하게 유혹합니다. 그래서 이 원수는 정말 대단히 두려운 존재입니다. 그런데 원수는 마귀 하나만이 아닙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이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원수는 우리가 눈으로 보는 이 세상의 제도 그 자체가 아닙니다. 물론 세상이 우리를 박해할 수도 있고, 언젠가는 예수님께 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렇게 할지 모릅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너희를 박해하고 죽이고 미워해도 놀라지 말라”고 하셨죠.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했고, 박해했고, 죽였기 때문입니다. 종을 주인보다 더 좋게 대우할 리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놀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진짜 원수는 혈과 육이 아닙니다. 우리의 전쟁은 영적 전쟁입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입니다. 이 모든 표현은 귀신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진짜 원수는 귀신의 제국입니다. 우리는 귀신들과 씨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씨름한다’는 말은 단순히 스포츠 경기를 한다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로마 시대에 씨름 선수들이 경기장에 들어가서 싸울 때에, 상대의 목을 두 손으로 조여서 어깨뿐만 아니라 머리까지 바닥에 꽉 눌러 붙이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머리가 일정 시간 바닥에 붙어 있으면 패배 판정이 내려졌습니다. 반면에 어깨만 닿고 머리가 붙지 않으면 다시 일어나서 또 싸울 수 있었습니다. 사탄은 자기의 귀신들을 통해 우리와 이렇게 씨름합니다. 우리는 사탄과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생사가 걸린 싸움입니다.
사탄도 성경을 읽습니다. 모든 일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무저갱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자신들을 위해 마련된 영원한 처소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들을 붙들고 어떻게든 그 결말을 바꾸려고 온 힘을 다해 목을 조르듯 달려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싸움은 인간의 수준을 훨씬 넘어선 전쟁입니다. 결코 운동 경기 같은 놀이가 아닙니다. 사실 인간은 이 초자연적인 전쟁에 속아서 끌려 들어온 존재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사탄의 목적을 위해서 싸우도록 속임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원수는 정말로 교묘한 원수입니다.
사탄이 얼마나 영리한 존재인지 생각하다가 사람들이 귀신 세계를 파고들겠다고 달려드는 것을 보면 정말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무엇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있는 겁니다. 그걸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존 월든(John Walden)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이단 연구에 평생을 바친 사람입니다. 아마 이단에 대해서 가장 많이 연구한 학자일 겁니다. 월든이 이런 문제를 다룬 논문 하나를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월든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귀신의 영역에서 살아가도록 창조하지 않으셨다. 설령 그 환경이 중립적이라고 가정하더라도, 실제로는 결코 그렇지 않지만, 귀신이 자기들의 세계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또 귀신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 사이에 어떤 상호 관계가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 우리는 영적 차원을 날아다니도록 창조되지 않았다. 귀신의 세계는 악과 적대감으로 가득 찬 영적 돼지우리와도 같다. 우리는 주술적 영역에서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선지자 다니엘은 매우 뛰어나고 경건한 젊은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술적 문제를 분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식의 지혜를 주셔야만 했다. 그러므로 그런 영역에 개입하는 것은 언제나 좋지 않은 결론을 낳게 된다. 타락한 인간은 귀신의 영역을 분별하고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본질적으로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지휘관께 보고하는 것뿐입니다. 전신갑주를 입으십시오. 여러분이 이해할 수조차 없는 영역을 함부로 건드리지 마십시오. 저는 지금 원수에 대해 설명하면서 우리에게 왜 전신갑주가 필요한지, 왜 준비가 필요한지, 그리고 이 싸움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삶은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인생에서 정말로 가치 있는 것, 정말로 달콤한 것은 모두 수고해서 얻은 것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진짜 승리를 경험할 때 얻어지는 것들입니다. 날마다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은 내가 사탄을 이기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데 있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사탄은 지금 여기에도 있습니다. 귀신들이 곳곳에 퍼져 있습니다. 그리고 귀신들은 저를 압니다.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죠.
제가 한 번은 귀신 들린 사람이 있는 방에 들어갔을 때, 그 안의 귀신들이 저를 향해서 소리를 지르면서 “저 사람을 여기서 내보내!” 이렇게 외쳤다고 했죠. 귀신들은 제가 누구인지 압니다. 저를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게 지난 10년 동안 제가 귀신과 직접 대화를 나눈 유일한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귀신들하고 상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저에게 직접 상대하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귀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어떤 술수를 쓰는지 모릅니다. 제가 들어갈 곳이 아닙니다. 저는 귀신들과 말도 하지 않고, 관심도 두지 않습니다. 그저 전신갑주를 입고 지휘관이신 주님께 보고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계속해서 복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귀신들에게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귀신들은 우리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천이든, 만이든, 10만이든, 100만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모두 떼를 지어서 덤벼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사탄이 직접 제 앞에 선다 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 안에 계신 분이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어떤 영역과 맞서 싸워도 이길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저는 지난 10년 동안 사탄의 세력이 하나님께서 이곳에서 하시는 일을 막으려고 끊임없이 시도해 왔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신실하기만 하면 사탄은 절대로 성공하지 못합니다. 모든 힘의 근원을 오직 하나님께 두고, 우리 자신에게는 아무 힘도 없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하고, 전신갑주를 계속 입고 있으면서 의로운 삶을 살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온 지옥이 우리를 대적하여 병력을 모은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힘이 작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은 결국 13절의 승리로 마무리됩니다. 준비에서 전신갑주로, 전신갑주에서 원수로, 원수에서 전투로, 전투에서 승리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이 말씀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서기 위함이라”입니다. 우리는 설 수 있습니다. 승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전신갑주를 입고, 오직 주님을 신뢰하기만 하면 됩니다. 전신갑주를 벗은 채로 붙잡히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이렇게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그 악한 날이 언제입니까?” 언제인지 아세요? 오늘입니다. 어제도였습니다. 내일도입니다. 사탄이 공중의 권세 잡은 자로 있는 한, 이 세상에서 악이 다스리는 날은 계속됩니다. 그러니 지휘관이신 주님께 보고하십시오. 그러면 승리는 여러분의 것입니다.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그러면 도망칠 겁니다.
한 찬송가 작가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나는 십자가의 군사인가?” 그러나 질문이 잘못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의 군사입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진짜 질문은 이겁니다. “나는 어떤 군사인가? 승리하는 군사인가, 아니면 패배하는 군사인가?” 그러나 우리에게는 패배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직 승리만이 있습니다. 그리고 승리와 함께 기쁨, 행복, 만족, 평안이 따를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방식입니다. 여러분이 살아야 할 삶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담대히 원수 앞에 설 수 있다는 확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전신갑주를 입고, 전쟁은 하나님께서 싸우시도록 맡기며 살아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 교회에 속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만 의지하며 전신갑주를 입고, 전쟁 중에 있음을 알면서도 그 전쟁마저도 기쁨이 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매 순간 순간마다 이미 승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가 전신갑주를 입고 있는 한, 원수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하옵소서. 이 말씀이 우리의 실제 삶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더욱 분명히 알게 하옵소서. 우리가 이미 치르고 있는 이 전쟁,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바라보며 점점 더 격렬해지는 이 전쟁을 잘 감당하도록 더욱 온전히 무장시켜 주옵소서.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생명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친히 붙들어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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