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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에베소서를 살펴보면서 정말 멋진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5장 18절에서 신자의 ‘합당한 행함’을 살펴보는 도중에 많은 성도님들이 술을 마셔도 되는지에 대한 질문을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를 살펴보는 것을 잠시 멈추게 되었습니다. 18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이 구절을 당시의 상황에서 살펴봤지만, 또 다른 질문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술에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경이 술 취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술에 취하는 것은 죄이며, 과거 삶의 일부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말이 다시 떠오릅니다.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이와 함께 베드로는 음란과 정욕, 술취함, 방탕, 향락, 무법, 우상 숭배에 대해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지나간 때의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술 취함이 금지 사항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술 취함이 죄라는 것은 동의하지만, 그렇다면 술 마시는 것 자체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기독교인이 술을 마시는 것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잠시 본문에서 벗어나서 이 문제를 논의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술을 마셔도 되는가?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술을 마시는 문제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가?

기억하시겠지만, 지난 시간에 이 논의를 하는 데 필요한 몇 가지 원칙을 여러분께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은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 만약 성경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면, 그 구절을 읽고는 모두 집으로 돌아가면 됐을 겁니다. 하지만 성경에 그렇게 적혀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술을 마시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기 위해서 다른 원칙들을 찾아봐야 했습니다. 옳다면 언제 옳고, 언제 옳지 않은지를 판단해야 했습니다. 기독교인이 술을 마셔도 될까?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술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귀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답을 얻기 위해 우리가 점검해야 할 8가지 원칙 또는 점검 항목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난번에 첫번째와 두번째 원칙을 다뤘습니다. 잠시 복습해 보겠습니다. 첫번째 질문은 ‘같은 것인가?’였습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포도주와 성경 시대에 마셨던 포도주가 동일한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다뤄야 하는 이유는 기독교인이 포도주나 술을 마실 때, 성경 시대에도 마셨으니 우리도 괜찮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성경 시대에 마셨던 포도주가 오늘날의 포도주와 같은가? 당시의 포도주가 오늘날 포도주와 같은가? 동일한 포도주인가? 지난주 주일에 이 주제를 매우 자세히 다뤘습니다. 그 답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성경 시대의 포도주는 오늘날 사람들이 마시는 알코올 함량이 9~11%인 포도주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또 당시 포도주는 세 가지 종류가 있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첫번째는 헬라어로 ‘글류코스(gleukos)'입니다. 새 포도주, 신선한 포도주를 의미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티로쉬(tirosh)’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오늘날의 ‘포도즙’과 매우 유사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이 포도즙은 매우 빠르게 발효가 되어 취하게 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물과 섞어서 마셨는데 가장 낮은 희석 비율은 물 3에 포도주 1의 비율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알코올 함유량이 매우 낮아져서 사실상 알코올 음료로 분류되지 않았습니다. 취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양을 마셔야 했습니다. 두번째는 ‘오이노스’(oinos)로, 일반적인 포도주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액체 상태의 포도주에 물을 혼합시킨 형태였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오랫동안 큰 용기에 보관해 온 일반적인 포도주를 물에 타서 마셨는데, 이 혼합 비율은 최고 10내지 15대 1에서 최소 3대 1까지 다양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알코올 함유량이 거의 없어져서 마셔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새 포도주도 물에 타서 마셨고, 발효된 포도주도 물에 타서 마셨습니다. 그 외에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진하게 끓인 농축액 형태의 포도주도 있었습니다. 새 포도주를 끓여서 물을 증발시키면 박테리아가 모두 죽기 때문에 발효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만든 농축액 형태의 포도주는 가죽 부대에 보관했습니다. 이 농축액 형태의 포도주를 짜내서 물에 섞으면 음료처럼 마실 수 있었죠. 로마 역사가 플리니에 따르면, 이 농축액 형태의 포도주는 발효되지 않은 상태에서 최대 20대 1의 비율로 물과 섞어서 마셨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는 포도주는 발효되지 않은 농축액 형태를 물에 섞은 것이거나, 액체 상태의 포도주를 물과 섞은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처럼 알코올 함유량이 9~11%인 순수한 포도주는 구약성경에서는 ‘샤카르’(shakar)로, 신약성경에서는 ‘시케라’(sikera)로 불렸습니다. 독주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학자들과 이교도들, 성경 모두가 독주를 야만적인 음료로 간주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9-11%의 알코올 함유량을 가진 포도주는 성경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마셨던 술이 아닙니다. 오늘날 15%에서 50%까지 알코올 함량이 있는 다른 종류의 술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포도주는 오늘날의 포도주와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이 마셨다고 해서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것과 동일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두번째 질문은 이랬습니다. 오늘날의 포도주가 당시의 포도주와 같은 것인지뿐만 아니라, 꼭 필요한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성경 시대의 대다수 사람들에게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어느 정도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물, 염소나 소의 우유, 그리고 포도주 뿐이었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많지 않았습니다. 다른 음료를 만들었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상 마실 수 있는 것이 포도주가 거의 전부였습니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포도주를 마셔야만 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일상적으로는 물에 탄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독주를 마시는 경우는 취하기 위해서나 심각한 질병의 진정제로 사용할 때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선택지가 굉장히 제한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어떤가요? 선택지가 아주 많습니다. 따라서 두번째 질문의 답은 무엇입니까? 오늘날에는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꼭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필수가 아닌 선택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취향이나 선호의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맛이 좋아서”라고 말하는데, 그럴 수 있습니다.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선호, 욕구에 따른 것이지 필수적인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일부 문화권에서는 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로, 세상에는 특정 상황에서 꼭 포도주를 마셔야만 하는,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는 문화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곳에 사는 사람들의 경우는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전 세계 대부분의 경우에는,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필수적이지는 않습니다. 제가 다녀본 모든 장소, 모든 언어권, 모든 문화권, 모든 기후권 어디에나 코카콜라가 있었습니다. 코카콜라 말고도 많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아랍 국가들, 예를 들어 피라미드가 있는 지역 사막 한가운데에서도 탄산음료를 팔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탄산음료에 뭐가 들어 있는지 잘 확인해야 했지만, 어쨌든 어디에나 탄산음료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필수적이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음료를 생산하는 발전된 기술이 있습니다. 냉장 기술 등을 통해서 발효를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성경 시대와 같은 상황에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첫번째 질문, ‘오늘날의 포도주가 성경 시대의 포도주와 같은가?’에 대한 답은 ‘아니오’입니다. 두번째 질문,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필요한가?’에 대한 답도 ‘아니오’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선택의 문제라는 사실에 도달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포도주를 마시기로 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선택의 문제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다. 고린도전서 6장 12절에서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라고 하듯이, 모든 것이 합법적이다. 나는 뭔가에 얽매이지 않고, 율법 아래에 있지도 않다. 사도행전 10장이나 로마서 14장과 같이 음식은 더 이상 신성하지 않으며, 깨끗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의 구분도 더 이상 없다. 따라서 음주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나의 자유는 나에게 그 권한을 허락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선택의 문제이며, 나는 선택할 수도 있고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세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최선의 선택인가요? 최선의 선택입니까? 우리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은 입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입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여서 코로 연기를 내뿜고 싶다면, 그럴 권리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성경에서 금지된 것은 아닙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하나님이 담배를 피우라고 하셨다면 우리에게 굴뚝을 달아주셨을 텐데요"라고 말하겠지만, 그것도 꼭 맞는 말은 아닐 수 있습니다. 어쨌든 성경에서 금지된 것은 아니므로, 여러분이 선택할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 아니라고 말할 것입니다. 커피를 마실지 말지도 선택의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커피가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카페인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해서 최선의 선택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할 겁니다. 커피를 마시고, 입에 담배를 물고, 포도주를 마실 자유가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 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선택의 문제이지만, ‘과연 최선의 선택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봐야 합니다. 이 범주에 대해 잠시 생각해 봅시다.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성경적 진리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레위기 10장을 보겠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도 특별한 사람들을 구별하셨습니다. 더 큰 책임을 가진 사람에게는 더 높은 기준이 요구되었습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속죄제물을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와서 속죄제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회중의 죄라면 수송아지를 제물로 드려야 했습니다. 대제사장의 죄도 역시 수송아지를 제물로 드려야 했습니다. 지도자의 죄라면 수컷 염소를 제물로 드렸습니다. 평신도 개인의 죄라면 두 마리의 산비둘기나 어린 비둘기, 심지어 밀가루도 가능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위가 높을수록 더 좋은 희생제물을 드려야 했던 겁니다. 영적으로 지위가 높을수록 더 비싼 제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회중과 대제사장에게 요구되는 제물이 같았던 것은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은 가장 비싼 제물인 수송아지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 아래의 통치자들은 염소를 드려야 했고, 그 아래의 사람들은 비둘기 같은 것들을 드렸습니다. 지위가 높을수록 책임이 더 무겁고, 죄의 책임이 더 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야고보서 3장 1절에서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라고 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더 큰 정죄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되느니라”라고 하신 것도 이와 같은 이유입니다. 신정체제에서의 지위가 높을수록 더 큰 책임이 따랐고, 죄도 더 엄중하게 다뤄졌습니다. 지위가 높을수록 죄책도 더 컸습니다. 그 위치에서 죄를 지으면 파급 효과가 더 크지 않겠습니까? 대제사장이나 통치자, 왕의 마음에 있는 죄는 사람들 사이에 엄청난 반응을 일으킵니다. 그 영향은 광범위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위한 기준을 세우셨습니다. 하지만 구약 시대에는 일부 사람들에게 더 높은 기준을 주셨습니다. 그들을 부르시면서 “나는 너희를 위해 더 높은 기준을 세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첫번째 예시를 레위기 10장 9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제사장직에 대한 요구 사항을 제시하시면서 매우 흥미로운 내용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대제사장 아론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 매우 엄격한 요구입니다.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되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물에 섞은 포도주를 마셨고, 어떤 사람들은 가죽 부대에서 나온 농축된 포도주를 물에 섞어 마셨고, 또 어떤 타락한 사람들은 독주를 마시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사장들은 더 수준 높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다시 말해, “너희는 더 수준 높은 분리, 더 수준 높은 성결, 하나님께 더 수준 높은 헌신을 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일부 주석가들은 이것이 제사장들이 성막에서 사역할 때만 해당된다고 해석하고, 다른 주석가들은 일생 전체에 적용된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중요한 점은, 제사장들이 주님을 위해 사역을 할 때,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받았을 때 금주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금주해야만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제사장들이 술을 마심으로써 판단력이 흐려지거나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의 마음이 깨끗하고 명확하고 순수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보다 더 높은 기준,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하셨던 겁니다.

잠언의 마지막 장인 31장 4절에서도 동일한 기준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기준은 제사장들뿐만 아니라 왕과 고관에게도 적용됩니다. 잠언 31장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르무엘아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고 독주를 찾는 것이 주권자들에게 마땅하지 않도다.” 왜 그럴까요? “술을 마시다가 법을 잊어버리고 모든 곤고한 자들의 송사를 굽게 할까 두려우니라.” 제사장들뿐만 아니라 왕과 고관들도 금주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들의 생각이 희미해지거나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구별되고, 거룩하게,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로서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6절에서 독한 술을 누구에게 줘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독한 술은 오직 “죽게 된 자에게”만 주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 외에 누군가가 독한 술을 마시는 것은 야만적인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독한 술, 즉 물에 섞지 않은 포도주는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진정제로 써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반 포도주, 혼합주, 물과 섞인 포도주는 마음이 아픈 사람들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가난을 잊고 고통을 잊으라는 것입니다. 포도주는 심히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따뜻함과 기쁨을 주기 위한 것이고, 독주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왕들과 고관들, 레위기에서 볼 수 있듯이 제사장들은 무조건 금주해야만 했습니다. 지도자들에게는 더 높은 수준의 헌신이 요구되었고, 더 높은 기준을 필요로 했습니다.

이제 민수기 6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왕, 귀족, 제사장, 대제사장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회중 중에서도 이 기준이 적용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이 기준을 선택함으로써 더 높은 경지에 올라설 수 있었습니다. 가장 높은 기준이었습니다. 민수기 6장 1절을 보면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고 하면.”

이제 잠시 멈추고 생각해 봅시다. 이스라엘 회중 가운데 누구든지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제 인생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고 싶습니다. 제 인생을 주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제 자신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이 세상의 것들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것만을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저는 세상과는 다르게 살고 싶고, 헌신된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나는 이제 가장 높은 헌신의 행위를 제정하노라. 그것은 나실인 서약이다.” 나실인이라는 단어는 헌신된 자를 의미하는 ‘나지르(nazir)’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이 자신을 구별하여 진정으로 헌신하고자 할 때 나실인 서약을 했습니다. 나실인은 자신을 주님께 구별하겠다는 서약이었습니다. 2절 끝부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고 하면.” 즉, 구별하여 드리는 거룩한 헌신의 서약입니다.

서약의 내용은 어땠을까요? 3절입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로 된 초나 독주로 된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지며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절대로 그의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이것이 바로 나실인 서약이었습니다. 머리를 자르지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 것입니다. 가장 수준 높은 헌신은 절제를 포함합니다. 한 단계 더 올라가서 제사장, 왕, 귀족들과 같이 하나님께 특별하게 구별된 사람들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나실인 서약은 30일, 60일, 90일 또는 평생 동안 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평생 나실인이었던 세 명이 나옵니다. 사무엘, 삼손, 그리고 세례 요한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자신들만 평생 나실인으로 산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삼손의 어머니인 마노아의 아내의 경우, 천사가 와서 말하기를, “네가 임신한 아이처럼 너도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사사기 13장 4절에 삼손의 어머니에 대한 구절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너는 삼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지니라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7절 하반절입니다. “이 아이는 태에서부터 그가 죽는 날까지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신약으로 넘어가면, 누가복음 1장 15절에서 관련 내용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주 흥미롭습니다. 13절을 보면, 천사가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하며, 그 아들이 큰 기쁨과 즐거움을 줄 것이고, 많은 사람이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라고 합니다. 누가복음 1장 15절입니다.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11장 11절에서 세례 요한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은 평생 동안 완전히 절제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특정한 사람들을 이 수준으로 끌어올리셨는데, 일반적인 수준보다 더 높은 차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특별한 시기에는, 제사장들이나 왕들, 귀족들, 삼손과 같은 위대한 사사들, 사무엘과 같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들, 그리고 세례 요한과 같은 위대한 선지자들에게 더 높은 수준의 헌신과 더 깊은 서약이 요구되었습니다. 일반 사람들에게 요구된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의 서약이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이 서약이 단지 그 지도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누구든지 서약할 수 있었고, 실제로 이스라엘에는 많은 나실인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정확히 그 수를 알 수는 없지만, 많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아모스 2장 11절입니다. “또 너희 아들 중에서 선지자를, 너희 청년 중에서 나실인을 일으켰나니 이스라엘 자손들아 과연 그렇지 아니하냐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내가 선지자들을 일으켰고, 나실인들도 일으켰다. 내가 구별된 자들을 일으켰다. 더 높은 서약을 한 자들, 너희 중에서 더 높은 기준의 삶을 산 자들을 일으킨 것은 바로 나다.” 그리고 이어서 아모스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너희가 나실 사람으로 포도주를 마시게 하며 또 선지자에게 명령하여 예언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절제하게 하셔서 구별하고 성별하신 나실인들을 더럽혔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나실인들에게 포도주를 주면서 나실인들을 더럽혔습니다. 아모스 2장에서 하나님께서 나실인으로 세우신 많은 사람들은 평생 나실인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른 사람들로 인해 더럽혀지거나 강요받거나 유혹을 받아 불순종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헌신의 서약을 제정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서약을 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수준 높은 서약을 제정하셔서 제사장들, 왕들, 통치자들, 특별한 선지자들, 사사들, 그리고 삼손과 같은 특별한 사람들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셨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이 특별한 사람들을 자기들의 수준으로 끌어내려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최고 수준에 도달하기보다는 그 최고 수준에 있는 사람들을 잡아 끌어내려 자기들 수준으로 만들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상황을 보며 가슴 아파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이 문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도다.” 예레미야 35장에서 하나님은 “너희는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하나의 대조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예레미야 35장에서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레갑 사람들을 기억하느냐? 요나답의 자손 레갑 사람들을 기억하느냐? 요나답이 레갑 족속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영원히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너희와 너희 아들들, 딸들, 아내들, 그리고 너희 가족 중 누구도 마시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다시 말해, 온 가족이 절제하기로 서약을 했다는 것입니다. 온 가족이 가장 높은 수준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레갑 사람들 앞에 포도주 잔을 두었을 때 마시지 않았다.” 예레미야 35장 2절에서 6절까지 나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그의 자손에게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 한 그 명령은 실행되도다 그들은 그 선조의 명령을 순종하여 오늘까지 마시지 아니하거늘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끊임없이 말하여도 너희는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도다.” 순종한 사람들과 불순종한 이스라엘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순종의 핵심은 바로 절대적인 절제였습니다. 레갑 사람들은 그 높은 수준을 유지했고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모범적인 예로 드셨습니다.

이렇게 묻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 있나요?” 많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 17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고린도후서 7장 1절은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가장 높은 수준으로 부름받았습니다. 최고의 선택을 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 기준이 신약으로 넘어와도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신약에서 그 기준을 낮추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제사장이 항상 맑은 정신을 유지해야 하고 유혹에 빠질 가능성조차 차단해야 했다면, 왕이나 귀족, 사사, 사무엘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 또는 세례 요한과 같은 선지자에게도 적용되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다스리는 사람들에게 그 기준이 더 낮아져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예수님이 자신의 귀한 피로 사신 교회를 위해 그 기준이 낮아져야 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제가 말하려는 바는 이것입니다. 성경은 영적인 책임과 지도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높은 기준을 요구하고 있는데, 그 기준을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모두 제사장이고, 성령님에 의해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이라면, 로마서 12장 1절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드려야 한다면, 우리 자신을 번제물처럼 온전히 드리는 것이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예배라면, 우리 모두는 최고의 선택이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당시의 포도주와 지금의 포도주가 동일한가? 동일하지 않습니다. 포도주가 꼭 필요한가?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음료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최고의 선택인가? 글쎄요,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겁니다. 아마도 최고의 선택은 구약과 신약, 그리고 오늘날 교회에서 지도자로 구별된 이들과 동일한 결정을 하는 것일 것입니다.

네번째 질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술을 마시려고 한다면, 이런 질문을 해 봐야 합니다. “음주가 습관이 될 수 있는가?” 습관이 될 수 있는가? 이 문제가 복잡한 이유는 습관이 될 수 있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저는 양말을 신을 때 왼발부터 신어요. 저의 습관이죠. 하지만 그 습관이 저에게 해를 끼치진 않아요.” 여기서 말하는 습관이란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습관을 의미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 12절을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유익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해도 되는 일 중에서 나를 넘어뜨리거나 나를 얽어매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허용되지만, 어떤 것은 나를 방해하고 나를 얽어맬 것입니다. 우리가 “나는 그럴 자유가 있다, 나는 그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알코올은 우리가 그 자유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우리를 얽어맵니다. 12절 하반절입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알코올은 우리를 얽어맬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다른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습관적으로 알코올에 의존하게 만들어서 우리의 선택과 사고 과정을 지배하는 것이죠.

결국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죄를 피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그러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믿습니다. 무언가가 죄라는 것을 알게 되면, 피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저는 한 발 더 나아가서, 죄를 촉발할 수 있는 것들도 피하고 싶어집니다. 음식에 대해서도 똑같습니다. 폭식, 식탐을 부리는 것은 죄입니다. 음식을 조절하지 못하면 많은 문제에 빠질 수 있습니다. 물론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먹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술을 마시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저는 식단을 다양하게 구성하고, 때로는 단식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음식이 저를 통제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매우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우리는 경건하지 않은 영향력이나 죄에 빠지게 할 수 있는 것들의 통제와 권력 아래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죄 자체를 피해야 하기도 하지만 죄를 유발할 수 있는 것들도 차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알코올 연구소에 따르면 알코올이 습관을 형성하는 이유는 뇌를 공격하고 의존성을 만들어내는 능력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죠. 우리 모두가 그렇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알코올을 섭취해도 습관으로 발전하지 않을 수 있지만, 알코올에 그런 잠재력이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알코올 섭취는 습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습관이 될 수 있는가? 네, 습관이 될 수 있습니다. 알코올은 습관을 형성할 수 있고, 의존성을 만들어내고, 우리를 그 영향력 아래에 가둘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의 본래 생각이 아니라, 알코올에 의존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다섯번째 질문으로 넘어가 봅시다. 알코올이 습관을 형성할 수 있다면 파괴력을 가질 수도 있을까요? 습관이 되거나 습관이 될 가능성이 있다면, 파괴적으로 변할 수도 있을까요? 그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지금 제 손에 우리 교회의 한 여성 청년이 보낸 편지가 있습니다. 편지 전체를 다 읽어드릴 시간까지는 없으니까 간략하게 요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일요일, 에베소서 5장 18절에 관한 설교를 듣는 중에 말씀드리고 싶은 일이 생각났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1978년 8월 15일에 심장마비와 호흡불능으로 종합병원의 중환자실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간경화, 고혈압, 신장병, 그리고 제 진단에 따르면 마음의 병을 앓고 계셨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사랑하는 저희 어머니는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어머니는 20대 후반부터 66세로 돌아가시는 날까지 알코올 중독자로 사셨습니다.”

“제가 제 삶을 그리스도께 헌신했을 때,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구원에 대한 깊은 염려가 생겼습니다. 저는 어머니께 여러 번 복음을 전했지만, 어머니는 자신이 끔찍한 사람이라 하나님이 도와주실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어떤 사람이었든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이 어머니를 사랑하신다고 말씀드렸지만, 어머니에게는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가끔 전화로 대화할 때 어머니는 저에게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또한 가끔 성경을 읽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계셨습니다. 어머니는 마지막 날들을 로스앤젤레스의 낡고 허름한 호텔에서 보내셨는데, 그곳에서 폭행을 당하시기도 했고, 여러 차례 도둑을 맞으셨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천식 발작으로 병원에 실려 갔는데, 제가 병원에 전화를 걸었을 때는 혼수상태였습니다. 어머니는 두 번의 심정지와 심장마비를 겪으셨습니다. 혼수상태에 있는 어머니에게 예수님을 전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저는 모든 친구들, 특히 그레이스 교회의 응급 기도 모임에 어머니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바로 다음날 어머니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셨습니다. 어머니는 숨을 쉬기 위해 인공호흡기를 달고 계셨고, 심박수를 모니터링하는 기계와 신장을 위한 기계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어머니 곁에 머물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선물을 어머니께 전했습니다. 어머니는 매우 불안해 보였습니다. 제가 거기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의 상태에 대한 의학적인 설명 부분은 건너뛰겠습니다. “제가 어머니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지 물었습니다. 믿으신다면 제 손을 꼭 쥐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제 손을 꼭 쥐셨습니다. 그 후 어머니의 심박수가 내려가기 시작해서 결국 94bpm까지 내려가서 그 범위 내에서 유지되었습니다. 그 이후 어머니는 더 평온해지셨고, 이틀 후 결국 어머니의 심장이 멈추어 돌아가셨습니다. 알코올 중독이 결국 어머니의 죽음을 초래한 것입니다.” 편지가 계속 이어집니다만 여기까지만 읽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사실, 즉 알코올 중독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랑스러운 여성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마음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손을 꼭 쥔 것이 진심이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바라시지요? 우리는 알코올의 해악을 알고 있으며, 그것이 잠재적으로 파괴적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간증에서뿐만 아니라 에베소서 5장 18절의 성경적 관점을 통해서도 살펴보고 싶습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 보면 매우 강력한 단어가 하나 나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여기서 ‘방탕’으로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로 ‘아소티아(asōtia)’입니다.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중요한 단어입니다. 원래 이 단어는 ‘치료할 수 없는 절망적으로 병든 상태’를 의미했습니다. 이 구절을 그렇게 읽어 보겠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치료할 수 없고 절망적일 정도로 병든 상태로 이끈다.” 하나님께서 술 취함이 방탕함, 즉 무절제와 타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고 생각하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당시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했을 때의 문자적 의미는 이렇습니다. ‘아소티아(asōtia)’적인 사람이란, 자신의 삶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파괴하는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삶의 방식으로 자기를 파괴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술 취함은 치료할 수 없고, 절망적인 병과 파괴로 이어진다는 것이 성경에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참고로, 누가복음 15장 13절에서도 이 단어 ‘아소티아’가 사용되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가서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라고 말한 후에, 모든 것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갔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방탕한 생활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죠. 기억하시나요? 누가복음 15장 13절에서 방탕한 생활을 가리키는 단어가 바로 ‘아소티아’입니다. 자신을 방탕하게 하며, 치료할 수 없고 절망적인 병으로 이어지는 삶을 살았고, 파괴로 이끄는 삶의 방식을 택했습니다. 무질서하고, 무절제하며, 방탕한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이 이 단어의 뜻에 들어 있습니다. 술 취함은 방탕으로, 술 취함은 파괴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포도주는 거만하게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잠언 4장 17절에서는 포도주를 마시면 폭력이 뒤따른다고 경고합니다. 창세기로 돌아가 보면, 술 취함이 있는 곳에는 부도덕함이 있었고, 술 취함이 있는 곳에는 근친상간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명기 21장 20절은 술 취함이 있는 곳에 폭식이 있고, 술 취함이 있는 곳에는 반역이 있으며, 술 취함이 있는 곳에는 부모에 대한 불순종과 방탕한 삶이 뒤따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술 취함이 가져다주는 결과입니다. 성경은 치료할 수 없는 절망적인 병을 초래할 수 있으니 술 취하지 말라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술 취함이 파괴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환자의 4분의 1이 알코올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알코올은 정신을 산산조각 내버립니다. 또한 신체에는 간경화를 유발합니다. 간이 막히면 부풀어 오르기도 합니다. 제가 읽은 한 의학 보고서에 따르면 식도의 정맥도 부풀어 오를 수 있다고 합니다. 정맥이 얇아져서 음식을 삼킬 때 쉽게 파열될 수 있으며, 심각하고 치명적인 출혈을 일으켜서, 식사를 한 직후에 사망하기도 합니다.

또한, 알코올은 술을 마시는 사람만을 해치는 것이 아닙니다. 주변에 있는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폭행으로 인해 사망하는 사람들의 41.2%가 알코올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거의 절반 가까이가 알코올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델라웨어에서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교통사고 사망자의 절반이 알코올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뉴욕시에서는 뉴욕주 보건부와 코넬대학교가 공동으로 연구한 결과, 교통사고로 사망한 운전자 중 73%가 음주운전을 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뉴욕주 웨스트체스터 카운티에서는 단일 차량 사고로 사망한 83명의 운전자를 대상으로 혈액 검사를 실시했는데, 이들 중 79%가 술에 취한 상태였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알코올은 매우 치명적인 물질입니다. 방탕함, 즉 치료불가능하고 절망적인 ‘아소티아’로 이어집니다. 잠언은 이 점을 반복해서 경고합니다. 이사야 28장 7절부터 8절입니다. “그리하여도 이들은 포도주로 말미암아 옆 걸음 치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말미암아 옆 걸음 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환상을 잘못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 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도다.”

그렇다면 누가 남아서 지식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누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씀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알코올은 제사장 직분을 타락시켰고, 선지자들을 부패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도자로 세우고자 하신 사람들을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에게 높은 기준을 제시하신 이유는 알코올이 지도자들을 침 흘리고, 메스껍게 하고, 토하게 만드는 무능한 집단으로 전락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높은 기준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요엘서에서 하나님은 음주에 대한 사람들의 권리를 철회하셨습니다. 요엘 1장 5절입니다. “취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울지어다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이는 단 포도주가 너희 입에서 끊어졌음이니.” 하나님께서는 “너희에게 더 이상 술이 남아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왜일까요? 메뚜기가 와서 모든 작물을 파괴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살아 있는 한 다시는 술을 마시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호세아 7장을 보면 에브라임의 죄악은 포도주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한, 아모스 2장, 4장, 6장은 술 취함과 포도주로 인한 끔찍한 타락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알코올이 이러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것을 굳이 우리 앞에 두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하박국 2장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웃에게 술을 마시게 하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에게 취하게 하고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네게 영광이 아니요 수치가 가득한즉 너도 마시고 너의 할례 받지 아니한 것을 드러내라 여호와의 오른손의 잔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라 더러운 욕이 네 영광을 가리리라.” 매우 강력한 구절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토해내실 것이며, 심판의 잔을 마시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웃을 술에 취하게 한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매우 엄중한 경고입니다.

하나님은 음주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아십니다. 빈민가 같은 곳에 가본 적이 있다면, 그 지역을 배회하는 불쌍하고 비참한 사람들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방어할 능력이 전혀 없거나 최소한 합리적으로 자신을 방어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공격당하는 사건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삶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저도 어린 시절부터 그런 지역에서 여러 선교 사역을 하며 설교했기에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마 알고 계실 겁니다.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알고 있기에, 저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파괴적일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어떤 형태로든 즐기는 것이 과연 지혜로운 일일까요?

그러니까 지금까지 ‘같은 것인가? 꼭 필요한 것인가? 최선의 선택인가? 습관이 될 수 있는가? 잠재적으로 파괴적인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나머지 세 가지는 빠르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섯번째 질문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걸림돌이 되는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또 점검해야 할 사항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봐야 합니다. 내가 술을 마시면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걸림돌이 되는가? 물론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자유로워. 어떤 율법적인 속박에 빠지고 싶지 않아.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자유가 있고, 나는 그것을 잘 다룰 수 있어.” 지난주에 한 성도님이 이렇게 말을 하시더군요. “저는 술을 잘 다룰 수 있는데, 목사님이 왜 그렇게 신경을 쓰시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아침 저녁으로 스카치 한 잔을 마시는 것을 즐깁니다. 저는 술을 잘 다룰 수 있어요. 제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글쎄요, 성도님은 술을 잘 다루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도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을 보는 누군가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성경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고린도전서 8장 9절에는 일반적인 원칙이 나오고, 로마서 14장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고린도전서 8장 9절입니다.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저에게 이렇게 말하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저희는 술을 마셨는데 아이들이 청소년이 될 때까지 마셨습니다. 아이들도 저희를 따라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술을 끊었습니다.” 많은 부모들이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경찰이 전화해서 이런 말을 할 때 더 실감하게 됩니다. “귀하의 아이가 여기 경찰서에 와 있습니다. 취해서 길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자유가 있을 수 있고, 절제할 수 있는 능력과 성숙함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럴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나쁜 본보기가 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바울 당시에 술 취함은 이교도들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기억하시죠? 지난 시간에 바쿠스와 디오니소스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술 취함은 이교도들과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지 않으려 했던 것처럼 술 마시는 것도 끊으려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끊어버린 것 중 하나가 바로 음주였습니다. 절제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우리는 술을 마실 자유가 있다”라고 말하며 포도주를 마실 경우, 평생을 이교도 의식에서 술을 마심으로써 사탄을 숭배했던 경험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불쾌했을 것입니다.

로마서 14장을 보면 바울이 이 문제에 대해 정확히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에 있던 어떤 사람들은 이교도 숭배와 관련된 온갖 악한 술 취함에 노출되었다가, 이제 막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배경이 없어서 술을 마시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 그리스도인 중에는 술 취함과 방탕, 부도덕, 폭식, 그리고 관련된 모든 악과 끔찍한 타락을 경험한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그런 것들과 관련된 모든 것을 단호히 끊고자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그리스도인이 와서 “아, 마셔도 돼, 별일 아니야”라고 말했을 때 마음이 크게 상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음주가 과거의 삶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삶에서는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겁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자유를 누린다고 하면서 과거 때문에 그런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이방 그리스도인들 앞에서 술을 마신다면, 이들을 불쾌하게 하고, 넘어지게 하고, 상처를 주고, 슬프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4장에서 바울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13절입니다.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형제를 낙심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특정한 것들을 잘 감당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술을 마시면, “아, 괜찮은가 보다”라고 생각하고, 따라서 하다가 결국 알코올 중독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여러분은 단순히 누군가의 마음을 상하게 할뿐만 아니라, 넘어지게 하고 약하게 만든 셈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앞에 두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이 옳지 않다고 느끼는 일을 하거나, 자신들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따라 했다가 결국 알코올 중독자가 되는 상황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는 너무나 많은 알코올 중독자들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변화시켜 주신 알코올 중독자들을 정말 많이 만났습니다.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 여러 번 참석해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지 지켜본 적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일들을 너무 많이 겪었기 때문에, 제 삶에서 누군가에게 원하는 대로 술을 마셔도 된다는 생각을 심어주는 책임을 지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누가 제 본을 따르다가 비참한 삶을 살게 될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15절에서 또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다시 말해서,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 내가 마시고 싶으면 마실 거야.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쓰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한다면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17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우리가 키워야 할 것은 의와 평강과 희락이지,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을 자유가 아닙니다.

따라서 19절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다른 사람을 세우는 일을 하십시오. 무너뜨릴 일은 하지 마십시오. 넘어뜨리거나, 약해지게 하거나, 낙심하게 만드는 일은 하지 마십시오. 20절입니다.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술을 마시는 것이 괜찮을 수도 있고, 포도주 자체에 아무 문제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적절하게 희석되어 감각을 잃게 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술을 마셔서 다른 사람을 낙심하게 한다면 어떨까요? 그래서 21절은 특정 상황에서 완전한 절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그렇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단순히 어떤 음식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누군가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걸려 넘어지게 한다면,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도 먹지 말고 포도주도 마시지 말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면 평생을 다른 사람들에게 맞추면서 살아야 하겠네요”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게 핵심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기를 원하시는 일입니다.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해방된 것은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일 중 하나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들을 구원하시고 깨끗하게 하시며, 알코올 중독과 술 취함이라는 악한 죄에서 벗어나게 하셨다는 것은 이들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기쁜 일입니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어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자유를 드러내는 것은 매우 마음 상하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자녀들이나 신앙이 약한 형제들이 그 모습을 보고 끔찍한 구렁텅이에 빠지게 하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시의 포도주와 지금의 포도주는 같은 것인가? 그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필수적인가? 그 대답도 ‘아니오’입니다. 최고의 선택인가? 그 대답도 ‘아니오’입니다. 습관이 될 수 있는가? 네, 그럴 수 있습니다. 잠재적으로 파괴적인가? 네, 매우 파괴적입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불쾌감을 주는가? 네, 자주 그렇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미국과 같이 금주법을 경험한 사회에서는 기독교가 항상 금주와 연관되어 왔고, 이러한 이유로 많은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습니다. 특히 음주를 옛 삶의 일부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두 가지 질문이 남았습니다. 내 간증에 해를 끼치는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내가 술을 마시면 사람들에게 더 잘 다가갈 수 있어. 내가 같이 술을 마시면 내가 하는 말을 더 잘 받아들일 거야.” 그런데 간증에 정말로 도움이 될까요, 아니면 해가 될까요? 로마서 14장 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여러분이 좋은 사람이고 좋은 사역을 하고 있을지라도, 만약 다른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방식으로 여러분의 자유를 행사한다면, 여러분의 간증과 사역을 평가절하하고, 덜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만일 제가 이 자리에 서서 “여러분, 저는 술을 마십니다. 얼마든지 조절해서 마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일부 사람들은 놀라서 숨이 막힐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스코필드 성경을 움켜쥐고 구석으로 달려갈지도 모릅니다. “존 맥아더가 술을 마시다니.” 그리고 제가 설교를 할 때마다, 여러분은 “맥아더 목사님이 술을 마신대. 술을 마신대. 목사님 정신이 정말로 맑은지 궁금해”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많은 분들이 신경을 쓰실 겁니다. 어떤 분들은 전혀 신경쓰지 않으실 수도 있지만, 어떤 분들은 신경을 쓰실 겁니다.

그러니까 다른 이유가 없다 하더라도, 저는 아무도 불편하게 하거나 신경쓰이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무언가를 해서 제 간증이 조금이라도 약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내가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그리스도인으로서 덜 존경하게 될까? 그리고 저는 제가 그런 행동을 한다면 기독교와 교회 내에서 많은 사람들이 저를 덜 존경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을 불쾌하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어떨까요?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을 보십시오.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든, 포도주를 마시든, 무엇을 하든지 간에,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할 수 있을까요? 32절입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그래서 저는 교회를 불쾌하게 할 일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불쾌하게 하고, 제 간증에 해를 끼칠 자유를 행사하고 싶지 않습니다. 또한 유대인이나 헬라인을 불쾌하게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33절입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여기서 바울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싶다면, 술을 끊고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차이를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이해하셨나요? 사람들에게 차이를 보여주십시오. 저는 제가 원하는 것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에게 어떤 일을 할 자유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제게는 분명한 기준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 누군가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차이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나 자신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일곱 가지 점검 항목을 다 통과했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여덟번째 질문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로 술을 마시는 것이 옳다고 확신하는가? 즉, 완전히 확신하는가? 왜냐하면 조금이라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다시 점검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한 성도님이 제게 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저는 친구들과 맥주를 마십니다. 그게 잘못된 건가요?” 그래서 제가 반문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랬더니 “저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신경이 쓰입니다”라고 답을 하셔습니다. 그럼 “신경이 쓰이는 것이 좋은가요?”라고 물었더니, “아니요, 싫습니다”라고 하시더군요. “신경 쓰이지 않는 방법을 아십니까?”라고 물었더니, “네, 안 하면 되겠죠”라고 하시더군요.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로마서 14장 23절은 이 문제에 대해 유익한 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전부 해석할 시간은 없지만, 간단히 살펴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술 마시는 것과 관련해 상상을 해 보십시오. 여기 한 형제가 있습니다. 이교도였다가 회심했고, 술을 마시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술 마시는 것은 이교도적 생활의 일부였으니 절대 술에 손대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런데 어떤 자유로운 형제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봐, 찰리, 너무 신경쓰지 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우니까 그냥 마셔도 돼.” 그 얘기를 듣고는 의심하면서 술을 다시 마시기 시작한다면, 이미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이며, 더 약한 형제가 됩니다. 자신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양심에 반하는 행동을 강요하게 되면, 더 깊은 의심과 정죄로 밀어넣게 될 뿐입니다. 그렇게 할 자유가 있다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죄를 범한 것이 됩니다.

만약 어떤 일을 완전히 자유로운 양심으로, 마음 깊이 그것이 옳다고 믿으면서 할 수 없다면,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행동이 더 깊은 정죄로 몰아넣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양심을 거스르는 것은 매우 나쁜 일입니다. 양심에 반하는 일을 계속하면 할수록 마치 뜨거운 쇠로 양심을 지지는 것과 같아서, 양심에 남은 상처 자국이 두꺼워져서 결국에는 무뎌집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정말로 중요한 문제로 여러분의 양심을 찌르고 싶으실 때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양심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깨우치시는 도구입니다. 만약 계속해서 양심을 거스른다면, 정말로 그 양심이 필요할 때 작동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위에서 말씀드린 일련의 기준들을 따라 여러분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제가 제 자신에게 물었던 질문들을 여러분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같은 것인가? 꼭 필요한가? 최선의 선택인가? 습관이 될 수 있는가? 잠재적으로 파괴적인가?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불쾌감을 주는가? 간증에 해를 끼치는가? 확신을 가지고 옳다고 할 수 있는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믿음으로 옳다고 믿으면서 행할 수 있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이 모든 것은 지혜롭게 행하며, 어리석은 자가 아닌 지혜 있는 자로 살아갈 수 있는 하나의 측면일 뿐입니다. 세월을, 시간을 아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이 시대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으로서 행하기를 원한다면,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그 기준을 설정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되어줄 겁니다. 이 문제를 잘 다루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 귀한 시간을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중요한 주제를 논의하고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가 이 문제에 율법주의적으로 접근하여 사랑 없이 판단만 하거나, 그저 시대의 문화적 흐름에 편승하는 양극단에 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진리와 말씀만을 따르게 하옵소서. 우리가 지혜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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