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영적 성장이라는 위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영적 성장의 핵심적인 요소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첫번째 시간에는 고린도후서 3장 18절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개념에서 살펴봤습니다. 신자가 믿음 안에서 자신의 삶과 시선을 하나님의 영광에 집중할 때, 성령님이 그 사람을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시며,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이 영적 성장의 원동력이십니다. 영적 성장이란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바라볼 때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추진력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집중할수록, 우리는 그 영광에 이끌려 영적 성숙의 과정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지난 시간을 마무리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의 구체적인 방법을 예로 말씀드리겠다고 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영적 성장의 핵심 열쇠라면, 그 열쇠를 구성하는 다른 열쇠들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첫번째 방법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의 시작점입니다. 만약 제 삶의 중심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면, 가장 먼저 집중해야 할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주되심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빌립보서 2장 9절부터 11절 말씀이 답을 줍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케노시스’, 다시 말해 자기를 낮추심, 곧 예수님이 사람이 되셔서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자기를 낮추사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는 놀라운 구절 다음에 이어집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잘 들으십시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정말 잘 들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순종의 행위였습니다. 예수님이 순종하시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고 높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우주 만물 모두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라고 명하십니다. 그 명령은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제가 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원받아야 하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사람들에게 “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십니까? 왜 자신의 믿음을 나누십니까?”라고 물어본다면,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사람들이 지옥에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요. 영원한 형벌을 피하게 해주고 싶어서요.”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분명히 타당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닙니다. 사람들이 구원받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지옥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또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아닙니다. 저는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저를 강권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저도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이것도 분명히 타당한 이유입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닙니다. 또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모든 민족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삼고,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가르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혹은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또는 사람들이 지옥에 가지 않도록 돕고 싶기 때문에 복음을 전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 모든 이유는 타당하고, 모두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가장 큰 이유,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결국 이것이 핵심입니다. 구원받지 않은 삶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삶이고,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삶은 하나님을 가장 크게 모욕하는 것입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누군가가 계속해서 믿지 않는다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사실 믿지 않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죄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6장에서 성령을 보내어 세상에 죄를 깨닫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죄입니까?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고, 구원자가 아니시며, 예배받으실 분이 아니고, 주님이 아니시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5장 23절에서 예수님은 아주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충만한 표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시작점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순간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요? 바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구원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구원 이후에 따로 일어나는 두번째 단계가 아닙니다. “나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지만, 나중에 주님으로 모시겠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두 단계로 나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9절부터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다시 말해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고백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주권자이시며, 주님이심을 믿고, 그 진리를 내 삶에 직접 적용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사람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주 되심 구원론자입니까?” 저는 그게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몰랐습니다. 마치 거리 한복판에 나가서 트럼펫을 불거나 북을 두드리는 사람 같다는 인상을 줬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 사람이 말한 의미는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이 말한 '주 되심 구원론자'란,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뜻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이것 이외에 예수님을 받아들일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고, 저는 제 방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방식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실제보다 작게 정의해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십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이 “네, 그렇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하길래,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이제 간단히 말하자면, 그 누구도 이 지점을 그냥 지나치고서는 영적으로 더 성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도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출발점입니다. 모든 것이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이 말씀을 적용해 보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믿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서 주가 되신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했고, 거듭났고, 예수님이 우리 삶을 다스리신다면, 실제로 예수님은 우리 삶 전체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통치에 순종하느냐의 문제이지, 예수님의 통치 여부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곧 복음을 전파하는 일의 핵심 목적은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도 주님으로 다스리시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가장 큰 죄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믿어 순종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합니까? “그의 이름”,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복음을 사람들을 위해 전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 전하는 것입니다. 요한삼서 7절에도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우리가 전도하는 이유는 이름을 위하여,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 전파는 사람들의 유익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로 인정받으시는 것, 예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복음 사역은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여러분이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적이 없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여기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하면서, “나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 내 구주도 아니고 내 주님도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영적으로 성장하려 하거나 하나님을 다른 방식으로 영화롭게 하려 한다면 모순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겁니다. 아들을 무시하는 것은 곧 아버지를 무시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은 바울이 빌립보서 2장에서 말한 것처럼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는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됩니다. 따라서 구원은 영적 성장이 시작되는 데 필수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태어나지 않으면 자랄 수 없습니다.
이제 두번째 진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주제와 관련해 두번째로 나누고 싶은 내용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두번째로는 주님이신 예수님께 순종하는 삶을 목표로 삼음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이신 예수님께 순종하는 삶을 향해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의 자주색 옷으로 덧입혀질 때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아들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실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때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나 여기에 이어지는 또 하나의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였다면, 이제는 주님이신 예수님께 반응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꼭 말씀드리고 싶은 핵심 구절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여러분은 이미 예수님을 주로 고백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어떤 일을 하든지, 여기서 먹고 마신다는 것은 삶에서 가장 평범하고 일상적인 행동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그렇게 사소하고 단순하고 반복적이고 흔한 일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실 “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주제로 몇 편의 설교를 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삶의 가장 작은 부분, 가장 일상적인 영역에서부터 시작이 되어서 점점 더 확장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행동의 지침이 아니라 삶 전체를 지배하는 태도여야 합니다. "나는 지금 이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모든 순간에 스스로 던지면서 살아가는 삶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이렇게 사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50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바로 앞절인 49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 영광을 위해 이 땅에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왔다." 바로 이것이 제가 말씀드리는 핵심입니다. 영적으로 자라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삶의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삶 전체를 지배하는 요소가 될 때에, 비로소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그렇다면 외식하는 자는 무엇을 추구합니까? 사람들은 무엇을 추구합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훔쳐서 그 자리에 자신의 영광을 대신 세우려 합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6장 1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영적인 사람처럼 보이게 하려는 의도라면 하나님께 받을 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들이 사람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말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사람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사람들이 주는 영광을 추구하는 자기 자신입니다. 방금 우리가 읽은 말씀도 그랬죠.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만하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러니까 제가 제 삶의 방향을 여기에 맞춘다면, 제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복종한다면, 제 안에는 반드시 겸손의 태도가 자리잡아야 합니다. 교만이 죽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숭배하려는 태도를 경계해야 합니다. 항상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게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예수님의 주 되심에 순종하며 복종한다고 말하고, 제 삶의 목표를 하나님의 영광에 둔다고 말하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다고 고백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이렇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몇 가지 중요한 점을 나누고 싶습니다. 첫번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뜻입니다. 결코 가볍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주 되심에 복종한다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삶을 조준한다는 것의 핵심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12장 27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만일 우리가 십자가 처형을 앞두고 있다면 어떤 기도를 해야 할까요? “하나님, 저를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라고 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제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그러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내가 이미 영화롭게 하였고 또 다시 영화롭게 하리라.”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이건 상상도 못 할 대가입니다. 고통과 고뇌 속에서 죄짐을 지는 일입니다. 하지만 아버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아버지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란 이런 삶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기꺼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갈 때, 여러분은 영적 성장의 두번째 중요한 원리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이신 예수님께 순종하는 삶의 열쇠를 여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마지막 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21장입니다. 사도 베드로와 관련된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앞으로 계속해서 다시 다루게 될 겁니다. 왜냐하면 영적 성장의 중요한 진리 몇 가지를 아주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명을 위해 예정하신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1장부터 12장까지의 핵심 인물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교회가 탄생하고 세상으로 퍼져 나가는 과정에서 십자가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적 설교의 중심 인물입니다. 역동적이고 탁월한 리더가 될 사람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베드로가 반드시 굳건히 세워지고,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는 일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베드로는 요즘 말로 하면 조금 덜렁거리는 사람이었습니다. 확신 있게 결단을 내리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말은 많았지만 끝까지 버티지를 못했습니다. 시험이 올 때마다 실패했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신학교 학생이었다면 진작에 퇴출당했을 겁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베드로가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전에도 베드로를 도와주셨고, 물 위를 걷게 하시고 자신의 능력을 직접 보여주신 적도 있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시는 자리에도 함께 있었고, 변화산에서의 놀라운 순간도 목격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위대한 고백 역시 베드로의 입에서 나왔지만 사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에서 비롯된 고백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엄청난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병사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도미노처럼 뒤로 넘어졌던 그 순간도 베드로는 직접 보았습니다. 정말 놀라운 장면이었습니다. 게다가 다락방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고, 요한복음 21장 시점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만나서 대화를 나눈 경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베드로는 갈팡질팡합니다. 여전히 흔들립니다. 제 생각에는 스스로를 보면서 무능하다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속으로 이렇게 말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지금까지 시험을 당할 때마다 실패했어. 다음번이라고 성공할 수 있을까?"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야, 갈릴리로 가서 산에 올라 기다리라."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베드로가 그 산에 있긴 합니다. 그런데 이제 슬슬 못 견디겠는 겁니다. 베드로는 원래도 성격이 급하고 가만히 있는 걸 힘들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산에 앉아 기다리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예수님은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다시 말해, "예전으로 돌아가겠다"는 겁니다. '애초에 나는 사역 같은 거랑은 안 맞는 사람이야. 지금껏 기회가 주어졌을 때마다 나는 다 망쳐놓았어. 그래도 내가 하나는 확실히 할 줄 아는 게 있는데 물고기 잡는 거야. 난 그거 하러 돌아갈 거야.' 베드로가 대장 격이었기 때문에 나머지 제자 여섯 명도 마치 오리 새끼처럼 그 뒤를 따라서 산을 내려갑니다. "우리도 같이 가자." 모두가 함께 뒤뚱뒤뚱 내려가서는 배를 탑니다. 베드로는 대장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베드로를 사용하시고자 하셨습니다.
3절을 보면 "배에 올랐으나"라고 되어 있는데, 헬라어 원문을 보면 다시 그 배로 돌아갔다는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즉, 베드로가 과거에 사용했던 자신의 배로 돌아갔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옛 직업인 어부로 돌아가려고 했고, 다른 제자들도 함께 따라갔습니다. 모두가 어부였습니다. 하지만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의 모든 고기들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와 대면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의 사랑을 점검하셨습니다. 이 장면은 나중에 다시 다루게 될 겁니다. 베드로가 세 번에 걸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8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여기서 잠깐 멈춰 보겠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베드로야, 지금까지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왔지. 네가 결정하고, 스스로 허리에 띠를 띠고, 가고 싶은 곳에 갔어.” 여기서 ‘스스로 띠를 띠다’라는 표현은 여행을 떠나기 전에 준비하는 모습을 묘사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온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팔을 벌린다는 말은 성경 외의 다른 문헌에서 십자가형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무엇을 한다고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제 중요한 부분입니다. 베드로는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의 뜻을 부인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할 만큼, 그 뜻에 순종하기로 결단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베드로에게는 놀라운 소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전까지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 항상 신앙을 저버렸기 때문이죠. 한 번은 예수님의 제자라는 말에 욕을 했고,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면서 자기는 그런 사람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다행히 이 맹세는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지금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베드로에게 충격적인 소식이었을 겁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베드로야, 언젠가는 네가 나를 위해 죽게 될 거야. 그리고 그 죽음을 통해서 나에게 영광을 돌리게 될 거야. 너의 죽음이 곧 나의 뜻이고, 너는 나를 위해 죽는 것을 기쁘게 여길 것이기 때문이란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내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차이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주의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는 삶의 목표를 하나님의 영광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한다는 말은, 그것이 죽음이라 해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뜻입니다.
기독교 선교 역사에서 수많은 선교사들의 이야기들이 모여 이루는 그 위대한 이야기들이 떠오릅니다. 기꺼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음을 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이 생각납니다. 믿음의 영웅들은 장차 올 영광과 부활을 소망하며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 세상은 그들에게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치러야 할 너무 큰 대가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화형을 당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했던 라티머(Latimer)와 리들리(Ridley)가 떠오릅니다. 복음을 담대히 선포하다가 종교 체제에 의해 화형당한 이탈리아의 위대한 설교자 사보나롤라(Savonarola)가 생각납니다. 역사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람들을 계속 만납니다.
또 저는 항상 존 페이턴(John Paton) 선교사님의 일화가 떠오릅니다. 뉴헤브리디스 제도로 선교를 떠났던 위대한 선교사님이죠. 페이턴 선교사님은 졸업 후에 아내와 함께 파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섬에는 식인종밖에 없었습니다. 배를 타고 그 섬 근처까지 가기는 했지만 해변까지 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작은 배를 저어서 해변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언어도 통하지 않고, 아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아는 것이라고는 그 전에 누군가 그 섬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누군가의 먹잇감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런데도 해변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식인종이 사는 땅에, 언어도 통하지 않는 그 땅에 도착해서 사역을 시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주일학교는 일요일 오전 9시 30분에 시작합니다. 누구든지 환영합니다" 이렇게 작은 팻말 하나 세워놓는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시작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언어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전혀 없는 데다가 생명을 위협받는 상태에서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책에서 읽은 이야기인데, 나중에 그 지역 추장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후에 페이튼 선교사님에게 와서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페이튼 선교사님, 선교사님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말입니다. 밤마다 선교사님 댁을 에워싸고 지키던 그 군대는 도대체 뭐였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천사들이 실제로 페이튼 선교사님을 보호했던 것입니다.
페이튼 선교사님은 계속 섬에 머물렀습니다. 몇 주가 지나서 아내가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곧 죽었습니다. 며칠 뒤에는 아내도 죽었습니다. 식인종들이 시신을 파헤쳐서 먹지 않도록 무덤 위에서 사흘 밤을 잤습니다. 완전히 혼자였지만 여전히 섬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그곳에 35년을 머물렀습니다. 선교사님의 자서전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35년이 지난 지금, 이 섬에 사는 모든 원주민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했다.” 페이튼 선교사님은 큰 소망을 품고 그 섬에 갔습니다. 세상에서 진정으로 사랑한 유일한 존재였던 아내와 소중한 아이를 잃었습니다. 무덤 위에서 잠을 자야 했고 홀로 남았지만 떠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기꺼이 따르겠다는 마음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삶의 방향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삶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여러분의 길을 계획하고 있다면, 즉 “주님, 제가 할 수 있는 건 이거고, 못 하는 건 이겁니다. 제 계획은 다 세워놨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하겠습니다. 이건 안 하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조금의 부끄러움도 감수할 수 없다면, 세상에게 비방당하고 조롱받는 겸손의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이 땅에서 조금 덜 가지는 삶을 감당할 수 없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의 의미를 결코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영적 성장의 의미도 결코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삶의 목표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만의 안락함, 자신만의 평안함, 자신만의 계획, 자신만의 뜻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사로잡힐 때, 비로소 여러분은 자라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제 삶의 목표를 하나님의 영광에 두기로 했다면, 그것이 먹고 마시는 일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어떤 일이든 상관없이, 저는 하나님의 뜻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만족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둘째로, 제 삶의 목표가 하나님의 영광에 있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제 마음을 사로잡아 하나님이 모욕당하실 때 제가 아파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누군가가 정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이 모욕당하실 때 그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다윗은 시편 69편 9절에서 성전을 바라보면서, 이스라엘의 예배를 바라보면서 마음이 찢어졌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켰고” 다시 말해 다윗은 이렇게 말한 겁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너무 크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에 대한 미움이 너무 커서, 저는 하나님의 성전과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예배를 너무나 깊이 마음에 품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찢어집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이렇게 말한 겁니다. “하나님이 모욕당하시면 제 마음이 아픕니다.”
이제 제가 아버지가 되고 보니 조금은 이해할 것 같습니다. 제 아이가 상처를 입으면 제가 다 아픕니다. 제 아내가 다치면 제가 다 아픕니다. 제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고통당하면 결국 저도 고통당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제게 일어난 일들보다, 제가 아끼는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들 때문에 훨씬 더 많이 울었습니다. 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해서 쉽게 눈물이 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무너진 누군가의 곁에서 함께 우는 것이 더 쉽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으로 하나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하나된 사람, 연합된 사람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모욕을 당하실 때 마음이 찢어집니다. 그런 마음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춘 자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살고 계십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첫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신경 쓰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가 온통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상태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중요하지만 너무 쉽게 지나치는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2장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를 향한 말씀인데요, 아주 짧은 표현이지만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하고.” 바로 에베소 교회의 위대한 특징 중 하나였습니다.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악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뜻을 가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사실을 잘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 뜻에,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기 안위에,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일보다는 자기 자신이 무시당하고 상처받는 일에만 몰두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진짜 초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초점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씩 제대로 깨닫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감격스러운 순간입니다.
몇 년 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 소녀가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왔습니다. UCLA에 다니는 남학생과 함께 살려고 온 겁니다. 당시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고, 그 남학생도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함께 살고 있었을 뿐입니다. 아직 고등학생이었던 이 소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남학생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웨스트버지니아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멀리 이곳까지 왔지만, 남학생은 이제 그 소녀에게 흥미를 잃어버렸고, 마치 낡은 걸레처럼 내던져 버렸습니다. 그렇게 버려진 소녀는 방황하다가 삶을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면도칼 자국이 수도 없이 손과 팔에 남았습니다. 피를 많이 흘렸지만 죽음은 피했습니다. 이 소녀를 만나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때 일을 저는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 여동생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소녀가 마음을 열고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삶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어머니께 예수님을 전하고 싶고, 친구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싶고, 제 삶도 바로잡고 싶어요.”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그럼 거기 가면 교회가 있니? 너를 양육해줄 사람은 있니?” 소녀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아뇨, 저희 마을은 작아서 그런지 가톨릭 교회밖에 없어요. 그리스도인 중에도 아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도 저 돌아갈래요.”
그래서 저는 걱정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건네주면서 이제 제가 아니라 성령님께 맡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성령님이 일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요. 아무튼 소녀는 떠났습니다. 저는 소녀를 위해서 계속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소녀는 원래 다니던 고등학교로 돌아가는 대신 가톨릭 고등학교에 다니기로 결정했습니다. 예전 학교로 돌아가면 좋지 않은 환경 때문에 과거의 유혹에 다시 빠질 수 있다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비교적 안전한 환경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기를 원했던 거죠. 소녀가 떠난 지 한 세 달쯤, 네 달쯤 되었을 때 편지가 한 통 도착했습니다. 그 편지를 보는 순간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혹시라도 방황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언을 구하려는 내용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편지 내용은 이랬습니다. “잘 지내고 계신지요? 요즘 성경을 읽으면서 많은 것들이 연결되기 시작했어요. 구약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수없이 많은 기회를 주셨지만, 사람들은 계속해서 우상을 숭배하고 죄를 지으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어요. 하나님은 세상이 하나님의 것이 되기를 원하셨어요. 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양과 염소와 소 같은 것을 죄에 대한 속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어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니까요. 인간의 끔찍한 죄에 대한 대가가 반드시 있어야 했던 거예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자면, 소녀는 제가 알기로 어떤 설교 테이프나 성경공부 교재도 없었습니다. 그저 성경을 읽으면서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사람들과 말씀하시고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함께 계셨다니, 그런데도 그들은 계속해서 불평하고 죄를 지었어요. 있잖아요, 누군가가 하나님을 거절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때 하나님이 느끼실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느껴질 것 같아요.” 아니,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에게 이 정도로 통찰력이 있다는 건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잖아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걸 주셨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계속해서 의심하고 거절해요. 너무 끔찍해요. 제가 하나님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생각하면, 꼭 그 아픔을 조금이라도 갚아드리고 싶어요.”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소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제 제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부드러운 마음이 있어요. 사람들이 우상이나 다른 신들을 섬기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의 질투가 느껴져요. 이제 모든 것이 너무 분명해요. 하나님은 반드시 영광을 받으셔야 해요. 하나님은 반드시 예배를 받으셔야 해요. 하나님은 그런 것을 받기에 마땅한 분이세요. 너무 오랫동안 그 영광을 돌리지 못한 거예요. 저는 예수님께, 그러니까 하나님께 제 사랑을 고백할 날이 너무 기다려져요. 하나님이 걸으시는 땅에 입 맞추고 싶을 만큼 하나님은 예배받으셔야 해요. 저는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기를 원해요.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리에 계시길 원해요. 사람들은 너무 오래 하나님을 깎아내리고 있어요.”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이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무너질 때 아파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은 먼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내 뜻을 꺾고 주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나를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아픔을 함께 느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두번째 원리의 세번째 요소입니다. 그것은 바로 기꺼이 다른 사람의 뒤로 물러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알려주는 분명한 기준입니다. 누군가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에게 기꺼이 나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탄이 타락한 후에 떨어진 곳이 성가대석이었다고요. 진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가대 안에서 실제로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모두가 독창을 하고 싶어하지만 그럴 수는 없죠. 그러면 독창을 하지 못한 사람들한테서 불평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왜 나는 독창을 안 시켜줍니까?” 그 사람은 사실 하나님의 영광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독창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만 관심이 있는 겁니다. 제가 아는 한 어떤 목사님은 독창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아예 1년에 한 번 ‘솔로의 밤’을 연다고 합니다. 그날 밤에는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한 절씩 부를 수가 있는데요, 앞 사람이 무대에 올라서 한 절 부르고 내려오면 또 다음 사람이 부르고 내려오고 그렇게 해서 하룻밤에 다 끝내버린답니다.
단지 성가대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배당에 앉아 있는 성도들만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강단에 선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기억하건대, 두 목사님이 주일학교에 누가 더 많은 사람을 데려올 수 있는지 경쟁을 벌인 적이 있었습니다. 그 경쟁에서 진 목사님은 너무 속상한 나머지 토하기까지 했답니다. 다른 목사님에게 지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질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보다 누가 인정을 받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나보다 더 잘 섬기고, 더 잘 가르치고, 더 큰 복과 반응을 얻을 때에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다면, 그때야말로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탁월하게 설교하고, 더 효과적으로 가르치고, 내가 하는 일을 더 잘해도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감으로 기뻐할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삶입니다.
이와 관련된 정말 놀라운 예를 하나 소개하고 싶습니다. 바로 빌립보서 1장에 담긴 진리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랑하는 사도 바울의 삶 속에 담긴 이 진리에는 참으로 놀랍고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장면을 조금 더 실감나게 이해하시도록 몇 가지를 상기시켜 드리겠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쓸 당시에 감옥에 갇혀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자신의 인생 끝자락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교회가 아시아와 그리스를 향해 확장되어 가는 동안 영광의 시대를 살았고, 아덴의 마르스 언덕에서 복음을 전했던 놀라운 경험도 있었고, 고린도에서의 위대한 사역, 데살로니가에서의 은혜, 성경을 깊이 연구하던 베뢰아 사람들과의 기쁨,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여정과 지중해를 다시 건너는 항해, 난파, 그리고 그 외에도 수많은 승리와 모험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이 모든 것을 지나 바울은 지금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있는 중입니다. 더 이상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시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당시 이방 세계 전체에서 바울만큼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은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영웅이었습니다.
실제로 바울이 설교를 하면, 밤새도록 설교를 해도 사람들은 기쁘게 들었습니다. 창문에 앉아 있던 한 청년이 졸다가 떨어져서 죽었는데도 바울은 내려가서 청년을 다시 살리고는 위층으로 올라가서 설교를 마저 이어갔습니다. 제가 언제 한번은 이 이야기를 해주면서 “바울은 밤새 설교했는데, 누가 죽어도 설교를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 얘기를 했더니, 한 사람이 이렇게 말을 하더군요. “목사님도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계속 설교하셔도 됩니다.”
어쨌든 바울은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인물이었습니다. 바울이 오면 사람들은 기쁘게 맞이했습니다. 떠날 때는 사도행전 20장을 보면 에베소 장로들이 다 크게 울면서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할까봐 근심했습니다. 그만큼 바울을 사랑했던 겁니다.
이제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환영받고, 그렇게 사랑받고, 그렇게 깊은 애정 속에서 살아간다는 건 정말 놀라운 경험일 겁니다. 정말 대단한 일이죠. 모두에게 사랑받고, 모두에게 환영받고, 사람들이 아낌없이 선물과 후원을 보내주는 그런 삶 말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에게 보내준 선물만 봐도 그렇습니다. 바울은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요? 이제 점점 무대 뒤로 밀려나고, 새로운 세대의 젊은 설교자들이 뒤를 이어서 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 젊은 설교자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말투도 세련되고, 바울에게서 가장 좋은 것을 배운 데다가, 어쩌면 더 능숙한 설교 기술을 갖추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말하자면 새로운 시대의 정예 요원들이 이제 바울의 뒤를 이어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 겁니다.
그리고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활동할 수 있는 능력을 잃었습니다. 반면에 젊은 사역자들은 군중의 이목을 끌고, 사람들은 이제 그들에게 마음을 쏟고 있습니다. 옛날의 사도들이나 바울 같은 사람들은 잊혀지는 존재가 되어버린 겁니다. 이제는 과거의 추억일 뿐이었습니다.
저도 그런 분들을 종종 만납니다. 한번은 미국 중서부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 나이 드신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96세였는데, 설교를 하지 못한 지가 15년이나 되었답니다. 하지만 스무 살 때부터 시작해서 여든한 살까지 평생을 설교하면서 살아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날 그분은 예배당 한켠에 앉아서 낡은 성경을 들고 저의 설교를 듣고 계셨습니다. 몸이 계속 덜덜덜덜 떨렸고, 이가 잘 맞지 않아서 자꾸 딱딱 소리를 내셨는데, 제대로 씹기는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그분이 누군지 몰랐습니다. 낡은 검은 양복에 넥타이를 하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채로 그냥 그렇게 앉아 계셨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았던 그 영광스러운 날들을 떠올리고 계셨을 겁니다.
바울도 그런 시기를 살고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울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됩니다. 바울의 머리는 단두대 위에 얹히고, 도끼날이 햇살에 반짝이며 목을 내리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삶은 그렇게 끝나게 될 겁니다. 그의 뒤로는 젊은 사역자들이 뒤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젊은이들은 늘 그렇듯이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해서 앞 세대를 비판하곤 합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별로야", "감각이 떨어졌어", "지금 기준으론 좀 아니야" 이런 식으로 말이죠. 바울 시대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보세요, 바울이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조용히 그를 물러나게 하신 거예요. 바울이 뭔가 실수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다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하나님께서 그렇게 치신 데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바울은 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어떤 형제들은 바울이 지금 이렇게 감옥에 있는 모습을 보고 오히려 더 담대해졌다는 겁니다. 담대한 형제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해 갇힐 수 있다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바울은 우리의 본보기다. 우리의 모범이다.” 다시 말해서, 여전히 바울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전히 바울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지금 더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비록 바울이 갇혀 있는 상황이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15절을 보십시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무슨 말입니까?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를 전하긴 하는데, 그 동기가 시기심이랍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바울의 삶에 이루신 일들을 시기합니다. 바울이 가진 명성을 시기합니다. 바울이 교회 안에서 가진 위치를 시기합니다. 바울이 받은 사랑을 시기합니다. 그래서 그 시기심 때문에 교회 안에 분쟁을 일으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니까 진심으로 전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논쟁을 일으키고, 바울을 더 괴롭게 하려고 복음을 전한다는 겁니다.
바울은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갇혀 있는 것도 억울한데, 이 사람들은 나를 향해 비난의 화살을 쏘고 있다. 두 번이나 아프게 하는 셈이다.” 여러분, 상상이 되십니까? 바울 같은 사람을 향해 젊은 목회자들이 비난을 퍼붓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런데 사실 가능합니다. 젊은 사람은 착각하기 쉽습니다. 마치 자신이 세상의 중심인 것처럼, 자기 세대가 전부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전 세대, 이제는 무대 뒤로 물러난 이들의 이야기는 무시해 버립니다. “그 사람들이 뭘 알겠어?” 뭐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백발을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장로들을 세우셨습니다. 왜냐하면 젊은 사람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 세대가 전부 아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역시 살아갈수록 확신하는 답은 점점 줄어들고, 어르신들의 지혜에 점점 더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면서 동시에 바울을 비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태도가 정말 놀랍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참 좋아합니다. 1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이런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된다면 나에 대해 뭐라고 하든 상관없다.” 얼마나 멋진 태도입니까?
이것 하나는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것이 시작입니다. 주님이신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 때에,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에 마음 아파하게 될 때에, 내가 무시당하더라도 하나님이 높임을 받으신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길 수 있을 때에, 바로 그때 여러분은 삶의 방향을 하나님의 영광에 맞추고 있는 것이고, 영적으로 성숙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복종하는 삶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여러분을 베드로전서로 잠시 초대하고 싶습니다. 아마 이 말씀을 통해서 지금까지 드린 말씀을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4절입니다. 이 위대한 진리를 들어보십시오. 이 말씀은 지금 믿음을 지키느라 고난을 겪고 있는 성도들에게 주어진 편지입니다. 정말 혹독한 고난을 견디고 있습니다. 믿는다는 이유로 핍박받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신앙에 대해 설명하라고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정말 견디기 힘든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입니다.
14절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잠깐만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에서 말하는 행복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먹으면 화를 내고, 보복하려 하고, 분노합니다. “당신이 감히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저는 직장에서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비난받는 사람들을 봤습니다. 프로 운동선수들 중에서도 그런 일을 당하는 걸 봤습니다. 저 역시도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조롱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가 “행복합니다, 기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베드로는 그렇게 말합니다.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특별한 복입니다. 다시 말해서 누군가가 여러분을 욕할 만큼 여러분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시느니라.” 다시 말하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이 세상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하다면, 확신하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이 여러분의 삶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분명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세상이 여러분을 받아들이고, 여러분이 그 시스템에서 아무 저항 없이 흘러가고 있다면,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전혀 자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무슨 말입니까? 사람들이 여러분을 비방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욕할 때 악한 말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이것만큼 십자가에서 더 잘 드러나는 장면은 없습니다. 겉으로는 마치 지옥이 축제를 벌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피를 흘리시고, 사람들은 조롱을 하고, 침 뱉고, 모욕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들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하나님의 영광의 한 부분으로 보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라고 말씀하시며, 바로 십자가를 가리키셨습니다.
그러나 15절을 보십시오.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5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살인자나 도둑이나 악행하는 자와 함께, 남의 일에 간섭하는 자가 나열되어 있다는 게 참 놀랍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만일 고난을 받아야 한다면,” 16절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당하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수치를 함께 짊어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정말 단순한 원리입니다. 이제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영적으로 성장하길 원하십니까? 만일 전혀 성장하고 싶지 않다면, 과연 여러분이 진짜 구원받은 사람인지 의문을 제기해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에는 반드시 성장과 번식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자라고, 성숙하고, 전진하기 마련입니다. 만일 제가 예수님을 주로 고백했고, 구속받았고, 거듭났고, 영적으로 살아 있다면,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 자라나길 원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성장을 목표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성장을 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라는 관점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잘할지라도 하나님이 영광받으신다면 기꺼이 만족하고, 예수님의 근심과 수치를 함께 짊어질 수 있다면 기꺼이 감당하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고난을 감수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아주 간단합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이 세상의 체제와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면서 동시에 세상에서 편안하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 둘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디에 가든 어울리지 못하는 괴짜가 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매력 없고 무례한 사람이 되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아간다면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받은 치욕을 함께 당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쉬운 기독교를 만들려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언제나 어렵다고 말합니다. 지금은 모두가 그리스도인을 사랑스럽고 호감 가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을 세상으로부터 비난받는 존재로 세우십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세상과 정면으로 맞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고, 그 체제와 싸우고, 세상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기독교는 반드시 죄를 드러내야만 구원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값싼 은혜, 쉬운 믿음, '예수님만 사랑하면 괜찮다'는 식의 가르침을 거부합니다. 우리는 악한 세상을 정면으로 대면해야 하고, 그 대가로 따라오는 치욕을 기꺼이 감당해야 합니다.
어떤 작가가 이 점을 참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이 표현으로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읽습니다. “내 촛불이 꺼져도 좋다. 그 일로 의의 아들께서 떠올라, 그 날개 아래 치유의 광선을 비출 수 있다면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간다는 이 위대한 진리를 다시 전했습니다. 영적 성장이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주님, 저희가 영적 성장에는 마법의 공식이나 비결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또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도, 하나님에 의해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영적 성장은 우리가 주님의 형상을 닮기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는 과정입니다. 그 모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올 때 시작되고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주님이신 예수님께 순종할 때 시작됩니다.
이 모든 여정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주님이신 예수님께 순종으로 엎드리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이렇게 기도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영적 성장을 위한 더 많은 열쇠를 손에 쥐고 주님 안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옵소서. 모든 영광을 주께 돌리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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