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시작했던 주제를 오늘 마무리하겠습니다. 은사주의 운동을 살펴보는 큰 흐름 속에서 '영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죠. 오늘 처음 오신 분들을 위해 말씀드리자면, 오랫동안 고린도전서를 살펴보다가 잠시 멈추었는데, 몇 주 뒤에는 고린도전서 14장으로 돌아가서 끝마칠 예정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많은 분들이 은사주의 운동에 대해 궁금해 하셨고, 또 장로님들의 권면도 있어서 오늘날 교회와 세상에 나타나는 은사주의 운동을 함께 살펴보고 있는 중입니다. 그 중에서도 '영성의 문제'는 지난주에 시작한 주제인데요, 오늘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지난주부터 참된 영성 문제를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은사주의 운동의 문제점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참된 영성을 분명하게 정의한 다음, 은사주의자들이 영성에 대해 가르치거나 암시하는 내용과 비교해 보았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은사주의자들이 분명하게 밝히지 않을 때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암시하고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경험 중심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성령세례를 받거나, 방언을 하거나, 황홀한 체험을 하기만 하면 그것만으로도 자동적으로 더 높은 수준의 영성에 이르게 된다고 생각하거나 그렇다고 암시합니다.
제 아내는 오순절 계통의 은사주의 환경에서 자랐는데, 이번 주에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체험을 한 사람들, 환상을 본 사람들, 방언을 하는 사람들을 영적으로 더 높은 단계의 그리스도인, 그러니까 신령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 거의 일반적인 분위기라고 합니다. 반면에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다른 범주에 속한, 한 단계 낮은 그리스도인처럼 취급한다는 것이죠. 체험과 체험 추구를 전부로 삼으면, 어떤 황홀한 체험이나 특정한 세례 같은 것을 얻는 순간 자동으로 신령한 존재로 인정받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비추어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성경은 영적인 은사나 영적인 환상이나 체험을 참된 영성과 연결시키지 않습니다. 성경은 아무 연관성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참된 영성은 어떤 체험이나 은사 같은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핵심입니다. 참된 영성은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체험을 통해 순간적으로 어떤 극적인 영성에 이른다는 은사주의의 견해는 성경으로 뒷받침할 수 없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인 이 영성은 두 가지를 포함합니다. 기억하시나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삶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으로 실천할 때 우리는 성령을 따라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영성의 성경적 기준입니다.
또한 참된 영성이 있다고 해서 특별한 체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살펴보았습니다. 참된 영성은 황홀경이나 환상이나 계시나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영성은 마음속에 맺히는 성품의 열매로써 나타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은 "성령의 열매는"이라고 하지 "성령의 은사는"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방언이나 표적이나 기사가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진정한 성령의 열매이죠. 참된 영성을 행할 때 실제로 맺히는 열매입니다. 참된 영성이 체험에 근거하고 더 큰 체험으로 이어진다는 은사주의의 주장은 성경과 맞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자, 이제 성경을 펴시고 시편 85편을 보시기 바랍니다. 시편 85편은 참된 영성, 곧 참된 영적 부흥을 분별하는 데 매우 유익한 본문을 제시합니다. 참된 영성을 판단할 수 있는 시금석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나는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시죠? 다시 말해서 너희를 육신에 속한 사람들로 다룰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분쟁하고 시기하고 다투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고린도 교회에는 두 가지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또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두 가지가 없는 상태, 바로 육신에 속한 상태입니다. 반대로 이 두 가지가 있는 상태가 영적인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영성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시편 85편을 보겠습니다. 부흥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참된 영성이 나타나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참된 영적 부흥을 일으켜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핵심 구절은 5절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영원히 노하시며 대대에 진노하시겠나이까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도록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 다시 말해서 “하나님, 우리는 주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포로 생활도 겪었습니다. 그 모든 일을 지나왔습니다. 이제 이제 하나님, 우리에게 부흥을 주옵소서. 주의 은혜로운 손길을 보게 하옵소서. 징계를 불러왔던 불순종 대신 참된 영성이 우리 가운데 자리 잡게 하여 주옵소서.” 참된 부흥을 위한 간구입니다. 진정한 거룩함이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을 사로잡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이러한 간구는 참된 부흥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줍니다.
1절부터 7절까지는 참된 부흥을 구하는 기도이고, 8절부터 13절까지는 부흥을 이루는 요소입니다. 오늘 전부 다 살펴보지는 않겠지만, 참된 부흥을 이루는 두 가지를 11절에서 보겠습니다.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여기에 두 개의 구절이 있습니다.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리로다.” 참된 부흥에는 언제나 두 가지가 함께합니다. 무엇인가 하니 진리와 의입니다. 언제나 함께합니다. 핵심은 바로 진리와 의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이 시편 마지막 부분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10절에도 의가 나옵니다. 13절은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의는 참된 영성, 참된 부흥을 이루는 필수 요소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거룩함과 의는 언제나 성령의 역사와 함께 나타납니다. 매우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한 가지 예를 에스겔 36장에서 보겠습니다. 다른 예시도 많지만 이 말씀이 도움이 될 겁니다. 에스겔 36장 27절입니다.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장차 올 영적인 삶에 대한 위대한 약속입니다.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이제 그 결과를 보십시오.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잘 들으십시오. 참된 영성, 성령의 참된 역사가 맺는 결과는 황홀경이 아닙니다. 계시도 아니고 환상도 아니고 체험도 아닙니다. 무엇인가요? 의롭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행하고 하나님의 율례를 따르고 하나님의 규례를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26장 31절입니다.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좋지 못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스스로 밉게 보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참된 영성은 의와 거룩함을 낳습니다.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계명을 추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죄를 미워하고 혐오하고 증오하는 것입니다. 참된 영성은 반드시 의를 추구하고, 그와 함께 죄에 대한 깊은 근심과 책망의식이 따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경우 은사주의 운동 안에서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이런 모습이 없습니다. 그저 웃고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 들뜬 분위기 뿐입니다. 그러나 참된 영성과 함께 나타나야 하는 것, 무엇인가요? 죄에 대한 깊고 타오르는 책망의식과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그 길을 걷고자 하는 거룩함에 대한 갈망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영성입니다. 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죄를 통회하는 마음으로 의를 추구합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곳에는 기쁨이 있지만 깊은 슬픔도 함께 있습니다. 참된 영성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오순절에 임하셨을 때 수천 명이 “마음에 찔려” 죄책감의 고통 속에서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기의 비참함과 슬픔과 죄 때문에 깊이 아파하며 살아갑니다. 부도덕의 악취가 코를 찌르는데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언제까지나 행복하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이것이 오늘날 성령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모습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저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령님은 유쾌한 영(Jolly Spirit)이 아니라 거룩한 영(Holy Spirit)이시다.” 저는 예를 들어서 채널 40 같은 방송을 보면서, 이런 가벼움과 피상성과 늘 “행복합니다, 행복합니다, 행복합니다”만 외치는 모습, 끊임없이 웃으며 모든 것이 너무나도 훌륭하다고 말하는 모습을 볼 때, 두 가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는 죄에 대한 깊은 책망의식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기 주변 세상이 얼마나 잃어버린 상태에 있는가에 대한 절박한 인식이죠. 그것을 안다면 언제나 그냥 마냥 즐거워할 수만은 없을 겁니다.
사도 바울은 “나에게는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균형입니다. 물론 기쁘죠. 기쁩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죄책감과 죄로 인한 아픔, 그리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근심인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에 참된 부흥이 일어난다면, 그리고 오늘날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이 은사주의 운동이 정말 참된 영성이라면 분명 다른 모습이 나타나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참된 영성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우셨던 것처럼 울 겁니다. 성령께서 흘리게 하시는 눈물이 흐를 것입니다. 손뼉을 치기보다는 가슴을 치게 될 것이고, 요나가 설교했을 때 하나님의 성령께서 참된 부흥을 일으키셨던 니느웨의 거리처럼 애통의 소리가 거리를 가득 채울 것입니다.
저는 참된 부흥을 예수님을 신나는 여행이나 흥미로운 체험 정도로 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참된 부흥은 사람이 자기 가슴을 치며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거룩함을 추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월터 챈트리(Walter Chantry)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사주의 운동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삶의 거룩함을 이루고자 하는 것 같지는 않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더 많은 것을 구하는 이유는 세상에서 겪는 문제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이다. 은사 자체가 가장 큰 관심사가 될 때, 사람들은 성령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인생길의 모든 거친 장애물을 없애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치유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대중적인 분위기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완전한 복음의 영향을 받은 평범한 신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고난받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리스도인이 믿기만 하면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어떤 질병이든 고쳐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난은 그리스도인에게 해롭고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 마치 모든 쓴맛을 없애 주는 달콤한 인생이 보장된 것처럼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안에서 황홀한 경험을 하고 성령의 체험 속에서 폭발적인 기쁨을 누린다고 말하지만, 거룩함에 대한 진지한 관심은 너무도 적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는 단지 행복만을 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참된 부흥은 반드시 거룩함과 의를 추구합니다. 죄에 대한 깊고도 타오르는 책망의식이 있고, 하나님의 율례에 순종하고자 강렬히 열망합니다. 제가 오늘날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이 바로 이 점입니다. 참된 신자는 달콤한 인생만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편의 다윗처럼 고백합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영성이란 체험이나 표적이나 기사나 기적, 또는 늘 즐겁고 행복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 반대에 더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지상의 복은 건강이다. 병이 더 큰 복이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저는 이 말이 참 좋습니다. 계속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건강보다 병이 더 큰 유익이 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들은 한 달 정도 류머티즘을 앓기만 해도 하나님의 은혜로 성품이 놀랍도록 부드러워질 것이다. 나는 누구라도 오래도록 병들고 고통받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런 시련이 때때로 한 번쯤은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병든 아내, 죽음, 가난, 비방, 낙심과 같은 일들은 다른 어떤 곳에서도 배울 수 없는 교훈을 가르쳐 준다. 시련은 우리를 신앙의 실체로 이끈다. 우리의 고난은 저주처럼 보일지라도 사실은 하나님의 복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스펄전의 말이 맞습니다. 참된 영성이 있는 곳, 참된 부흥이 있는 곳에서는 하늘에서 의가 굽어보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거기에는 들뜬 흥분도, 행복감도, 가벼운 분위기도 없습니다. 오직 의와 거룩함, 이것이 참된 영성입니다.
그리고 시편 85편에 나타난 영성의 두 번째 요소, 지난주에도 말씀드렸듯이 바로 11절에 나옵니다.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참된 부흥의 두 번째 요소는 진리입니다. 참된 부흥이 일어나면 진리가 사방에서 솟아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진리에 대한 깊고도 강한 헌신이 생겨납니다. 성령의 역사를 판단하는 두 번째 기준은 진리입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에서 성령을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바로 진리의 영, 이렇게 부릅니다.
참된 부흥이 있는 곳에서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를 의로운 삶으로 실천합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은사나 표적이나 황홀경이나 기사나 환상이나 계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느헤미야 시대에 부흥이 일어났을 때를 한번 보십시오. 느헤미야 8장 1절을 보면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라고 청합니다. 모세의 율법책,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펼쳐졌을 때 부흥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시대든 부흥은 다른 방식으로 시작된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또 성령님에 대해 잘못된 교리를 가진 사람들이 성령님께 올바르게 반응하는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잘못된 신학으로는 참된 영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먼저 진리가 땅에서 솟아나야 하고, 그다음에 하늘에서 의가 내려오는 것입니다. 시편 85편이 말하는 내용입니다. 참된 영성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헌신이 있고, 죄에 대한 깊은 책망의식이 있고,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이 있습니다.
성경을 바르게 강해하고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골로새서 3장 16절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라고 말합니다. 이 두 본문은 서로 평행을 이루는 말씀이라는 것을 여러분도 아실 겁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영성입니다. 은사주의적 체험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무엇을 배웠습니까? 정리해 보겠습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신령한 자, 영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살펴봤습니다. 그러나 모든 신자가 실제 삶에서 그 신분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영적인 삶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또 영성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은사나 체험이나 성령세례나 특별한 감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참된 영성은 순종을 낳습니다. 육체의 정욕을 따르지 않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을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고 온유하게 만듭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죄의 비참함을 깊이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하게 합니다. 또 기쁨과 죄에 대한 책망의식을 균형 있게 갖게 합니다. 이것이 참된 영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영성을 원하십니다.
저는 오늘날 미국에서 이른바 부흥이라고 불리는 많은 현상들을 보지만 이러한 특징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참된 영성에 대한 주제를 마무리하면서 매우 중요한 한 가지를 덧붙이겠습니다. 정말 중요한 내용이니까 잘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오랫동안 정말 이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정말 오랫동안 말하고 싶었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은 영성에 대한 관점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 잘못된 사람들을 높이는 문제에 빠지고 맙니다.
다시 말해서 체험을 영성의 기준으로 삼게 되면, 더 놀랍고 더 극적인 체험을 한 사람일수록 더욱 위대한 성도, 곧 ‘슈퍼 성도’처럼 여겨질 가능성이 커집니다. 은사주의 운동 안에도 분명 참된 영성을 가진 성도가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받은 만큼, 또 이해한 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죠. 또 교회 성도님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삶으로 실천하는 영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뒤로 밀려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 만한 특별한 이야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체험이 최고의 가치인 세상에서는 가장 놀라운 체험담을 가진 사람들이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결국 잘못된 사람들이 높임을 받는 것이죠.
특별한 체험담만 있으면 사람들 앞에 섭니다. 텔레비전에 출연하고, 책도 쓰고, 모든 주목을 한번에 받습니다. 게다가 이미 어느 정도 유명한 사람이라면 더 그렇습니다. 자신의 체험에 유명세까지 더해지면 성공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는 소위 기독교 유명인사를 대거 만들어 냈습니다. 저는 그들을 ‘슈퍼스타 성도(superstar saints)’라고 부릅니다. 기독교의 본보기이자 대변자이며 권위자로 이미 자리를 잡았습니다. 결국 교회 안에 유명인 중심의 문화가 생겨난 겁니다.
저는 우리가 이미 이 교훈을 배웠다고 생각했습니다. 15년 전에도 교회는 헐리우드 출신 사람들에게 똑같은 일을 했죠. 헐리우드 기독교인 모임에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위대한 기독교 홍보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저기 다니며 간증을 하고, 찬양을 부르고, 여러 집회에 초청받는 게 큰 유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바로 그런 일을 겪은 분이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선전하고, 강사로 세우고, 유명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전국을 다니며 간증했고, 화려한 경력과 이력도 갖췄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 후 마흔 두 살 즈음에 그레이스 교회로 왔습니다. 가족과 함께 세상적인 의미에서는 무명의 자리로 이제 물러난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겨우 1년을 지낸 뒤 말기 암에 걸려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제가 병원에서 그분의 침대 곁에 앉아 있었습니다. 기침을 하면서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존 목사님, 제 인생에 일어난 일은 정말 끔찍합니다. 정말 비극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제가 유명한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제 간증을 이용하고 소비했습니다. 제 인생을 망쳐 버렸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참으로 비극적인 일입니다. 저는 우리가 이미 이 교훈을 배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똑같은 일이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잘못된 사람들을 높이고, 받들어 세우고,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들 대신에 기독교를 대표하는 대변자로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유명인들이 출연하는 텔레비전 특집 프로그램들을 보면, 늘 같은 기독교 슈퍼스타들이 등장합니다. 유명인이 예수님을 믿으면 곧바로 집회에 초청하려고 경쟁이 시작됩니다.
얼마 전에 제가 광고를 하나 봤는데, 어떤 목사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제가 그대로 인용해 드리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근본주의적이고, 영혼 구원에 힘쓰고, 성경을 믿는 교회입니다. 코스타메사에서 모이며, 이번 주일에는 특별 초청 스타를 모십니다.” 그 말을 듣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게 도대체 뭐지? ‘특별 초청 스타’라니?” 또 어떤 교회는 유명한 기독교인을 초청하기 위해서 하루에 5백만 원을 지불합니다. 실제로 집회 강사료로 5백만 원을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을 초청하기 위해서 주일 저녁에 예배 입장권을 판매합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저는 매달 몇몇 광고 대행사로부터 안내 자료를 받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유명한 기독교인이 어느 날짜에 초청 가능한지, 그리고 사례비가 얼마인지 이런 목록이 적혀 있습니다. 한 번에 50만 원에서 500만 원까지 아주 다양합니다. 유명한 그리스도인을 초청하려면 그 정도 비용을 내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럴 때마다 디모데전서 5장 17절 말씀이 떠오릅니다. 만일 사례비를 많이 지급해야 한다면 성경은 누구에게 주어야 한다고 합니까?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사람은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사람과 다릅니다.
제가 아는 미국 중서부의 한 침례교회에는 ‘기독교 명예의 전당’이 있습니다. 그 교회 현관에 현재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 열 명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그 교회의 ‘슈퍼스타’들입니다. 기독교 잡지도 영화배우나 가수나 운동선수나 정치인 가운데 회심한 사람들을 앞다투어 소개하고 있습니다. 유명인으로 만들어서 전국 교회의 강단에 세웁니다. 이제는 너무도 흔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지난해 크게 흥행한 한 잡지는 “함께 기도할 수 있는 기독교 스타 48인”이라는 목록을 내세우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여러분, 이 모든 일의 가장 안타까운 점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유명세가 영성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사람이라고 해서 교회를 이끄는 사람들이 되면 안 됩니다. 교회는 성령 안에서 행하는 사람들이 이끌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도자의 책임을 주신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저는 특히 찬양 분야에서 이 현상을 많이 봅니다.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찬양을 통해서 유명해지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엄청난 돈을 들여서 그들의 주머니를 채워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슈퍼스타 성도’라는 사고방식은 매우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은사주의 운동 안에서뿐 아니라 그 밖의 영역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흐름 속으로 들어갔다가 결국 믿음에서 떠나서 비참한 결말을 맞은 사람이 제가 아는 사람만도 다섯 명 정도 있습니다. 이런 유명인들은 자신의 특별한 체험, 놀라운 회심 이야기, 극적인 성령세례, 환상이나 다른 특별한 경험을 계속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들을 앞세워주고 여기저기 밀어주고 홍보하죠. 그러면 곧 강연을 하고, 책을 쓰고, 인터뷰를 하고, 텔레비전과 라디오에 출연하면서 위대한 영적 권위자로 추앙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디모데전서에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새로 입교한 자에게는 교회의 직분을 맡기지 말라”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뒤틀려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3장 6절과 10절, 디모데전서 5장 22절을 읽어 보십시오. 모든 원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로저 하이델베르크(Roger Heidelberg)는 이번 달, 그러니까 5월호 <무디 먼슬리(Moody Monthly)>에 “회심자를 이용해 돈을 벌지 말아야 한다(Let’s Stop Cashing in on Converts)”라는 글을 썼습니다. 하이델베르크가 쓰지 않았다면 아마 제가 썼을 겁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다소 사람 사울이 1977년에 미국 60번 국도를 따라 덴버로 가던 길에서 회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독교 교리 해설자가 되기까지 충분히 성장할 시간을 허락받았을까?”
“생각해 보자. 그렇게 극적이고 뉴스 가치가 높은 회심 소식이 통신사와 언론에 전해지는 순간, <피플(People)> 잡지 기자들, 영화와 텔레비전 관계자들, 신문 사진기자들, 특집 기사 기자들, 라디오 제작자들이 떼를 지어 덴버로 몰려들었을 것이다. 사울 형제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졌을 때, 자신의 주변이 이런 사람들로 가득한 것을 보았을 것이다. <크리스천 스타 매거진(Christian Star Magazine)> 기자는 단독 특집 기사를 따내려고 <타임(Time)>지 부편집장과 경쟁하고, ‘헤븐리 라이트 TV 아워(Heavenly Light TV Hour)’의 프로그램 책임자는 ‘미트 더 프레스(Meet the Press)’ 제작진과 서로 사울을 섭외하려고 경쟁을 벌였을 것이다.”
“방 한쪽에서는 아나니아가 사울의 에이전트가 되어 계약을 주선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울이 새 생명을 얻은 첫날 해가 지기도 전에 기독교 채널이든 라디오 방송이든 출연 일정이 잡혔을 것이다. 수개월, 아니 수년 후까지 모든 일정이 잡혔을 것이고, 기독교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복음 집회의 대표 연사로 초청되었을 것이다. 대형 전도 집회, 청년 집회, 심지어 성경 사경회까지 모두 사울을 초청했을 것이다. 현수막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을 것이다. ‘최고의 랍비가 그리스도께 돌아온 이야기’,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대인이 예수를 전하다’, ‘회심한 바리새인 사울, 산헤드린에서 구주께로 향하다.’”
아침 신문에 “최고 스타인 글로리아 골디록스(Gloria Goldilocks)가 종교를 갖게 되었다”라는 기사가 실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일주일도 되지 않아 같은 신문에 글로리아가 ‘펄리 게이츠 부흥의 시간(Pearly Gates Revival Hour)’에 네 번째로 출연한다든지, 또는 ‘원자 시대 복음팀(Atomic Age Gospel Team)’에 합류했다는 기사가 실릴 겁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메이저리그 선수든, 유명한 악단 지휘자든, 밀주업자든, 범죄 조직의 두목이든, 이름만 충분히 알려져 있어서 사람을 많이 끌어모을 수 있고, 회심이 진짜처럼 보이기만 하면 누구라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연예계든 정치계든, 심지어 극악한 범죄자라 할지라도 진심으로 주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받는다면 저는 천사들보다 더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회심한 유명인들을 영적으로 자격이 있는지 충분히 검토하기도 전에 복음주의 기독교의 최전선으로 밀어 올리는 습관입니다. 왜 글로리아가 ‘펄리 게이츠 부흥의 시간’에 출연하게 되었습니까? 성령 충만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전 유명 배우 글로리아 골디록스’라는 이름이 가진 홍보 효과 때문입니까? 성경을 강해하는 일입니까, 아니면 유명인을 이용하는 일입니까?
이처럼 유명인 회심자들을 이기적인 목적을 가지고 이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용당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의 삶에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요? 이 복음 집회에서 저 복음 집회로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보면, 회심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풍성한 간증이 될 때까지 성숙해질 시간을 거의 갖지 못합니다. 결국에는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당시 유행하는 경건한 표현들을 몇 마디 익히고 나서는 매끄럽게 이어 붙이고, 거기에 자신의 회심 이야기를 섞어서 간증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면 무대에 설 준비는 끝납니다. 같은 이야기를 계속 반복합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회심 당시의 그 뜨거운 감격은 모두 사라지고 맙니다. 새로운 영적 공급이 없기 때문에, 결국에 진심 없는 배우처럼 올바른 말은 하지만, 회심하지 않은 양심에게 듣기 좋게만 들릴 뿐 아무런 능력도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잘못된 사람들을 높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여러분, “오늘 저녁에 성경 공부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 목사님께서 말씀을 전하십니다”라고 하면 별다른 반응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녁에는 유명한 슈퍼스타가 옵니다”라고 하면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든 기준이 잘못되었습니다. 우선순위 전체가 뒤바뀌었습니다. 더 나아가 오늘날 기독교는 우리의 신앙이 참되다는 것을 성경적 변증이 아니라 유명한 신자들로 증명하려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우리는 공개적으로 기독교를 변호하면서 믿는 사람의 간증을 근거로 내세웁니다. 책을 쓰고, 간증을 하고,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고, 텔레비전에 출연합니다. 텔레비전 특집 프로그램에서 이런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이제 ~교회의 ~목사님을 모시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왜 기독교가 참된지를 설명해 주시겠습니다.” 이런 프로그램을 보신 적 있으세요? 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드디어 소개하겠습니다”, 이렇게 화려한 멘트와 함께 유명인의 간증이 이어질 뿐이죠.
저는 간증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회심한 것을 비판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드리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유명인들이 믿기 때문에 기독교가 참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성경이 참되다고 증거하기 때문에 참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성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명성을 근거로 진리를 입증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이단들도 똑같은 일을 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아세요? 이제는 그들도 유명인들을 광고에 등장시키고 자기들의 교리를 변호하게 합니다. 유명인을 내세우는 것은 커피나 오렌지주스나 자동차를 파는 방식입니다. 세상의 모든 상품의 판매 방식과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바로 그 방식으로 기독교를 팔고 있습니다. 유명인들이 기독교를 판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체험 중심의 기독교를 더욱 강화합니다. “내가 직접 경험해 봤습니다. 정말 만족스러웠습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경험해 보십시오.” 이렇게 해서 신앙 전체를 체험 중심으로 접근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기독교를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기독교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가서 성경을 가지고 사람들과 변론했습니다. 성경을 통해 예수님께서 반드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셔야 했음을 증명했습니다. 또 누가복음 24장에서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함께 걸어가실 때, “이제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믿도록 몇몇 유명한 사람들이 믿게 된 놀라운 간증을 들려주겠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모세와 모든 선지자로부터 시작해 자신에 관해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풀어 가르쳐 주셨습니다. 체험이 진리를 변호하는 수단이 되어 버린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얼마 전에 제가 미국의 한 출판사 부사장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제까지 유명인들의 간증으로 기독교를 변호하려 하십니까? 언제쯤 성경의 권위를 근거로 기독교를 변증하는 책들을 출판하시겠습니까?” 이렇게 계속 은사주의적이고 체험 중심의 영성이라는 흐름을 이어 가다 보면, 이런 사람들이 마치 교회의 영적 지도자인 것처럼 앞에 서게 됩니다. 그들이 늘 중심에 있고, 사람들을 모으는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사실 많은 경우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호해야 합니다. 또한 은사를 받은 교사들과 신학자들, 그리고 경건한 사람들의 가르침을 들어야 합니다. 바로 그들이 가르쳐야 합니다. 여러분, 신약 시대의 교회에는 슈퍼스타가 없었습니다. 유명인도 없었습니다. 대중매체도 없었습니다. 매디슨 애비뉴식 광고 전략도 없었습니다.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경건한 사람들이 경건하지 않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세상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다”라고 말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는 시장으로 들어가서 세상의 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담배를 파는 것처럼, 커피를 파는 것처럼, 콩을 파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상품을 파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기독교를 팔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자들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래리 킹(Larry King)은 1976년 9월 3일자 <뉴 타임스(New Times)>에 글을 하나 썼습니다. 냉소적인 비그리스도인이 오늘날의 ‘기독교’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한번 들어 보십시오. “나는 이른바 예수 운동(Jesus Movement)에 별 관심이 없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그런 태도 때문에 내가 문화의 주류에서 벗어난 사람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이제 예수 사업은 시골 오지에서 밀주를 마시는 사람들의 일이 아니다. 뉴욕 그리니치빌리지의 워싱턴 스퀘어 공원을 걸어다니기만 해도, 눈을 부릅뜨고 떠드는 예언자들이 다가와서 끈적끈적하고 달콤한 ‘예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런데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제대로 모른다.”
“나는 세족식을 행하던 침례교회(Foot Washing Baptists)에서 자라난 오래된 성경 연구자다. 그런데 나에게 다가와 전도하는 이른바 ‘예수 운동’ 사람들 가운데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 너무 적다는 사실에 정말 놀라고 있다. 기독교든 다른 종교든 종교의 역사에 관해서도 거의 아는 바가 없다. 십자군 전쟁을 언급해 보거나, 어떻게 다른 번역본들을 제쳐두고 킹제임스 성경을 널리 사용하게 되었는지 물어보면, 돌아오는 것은 멍한 표정과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똑같은 말뿐이다. 나는 예수님께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남용하는 사람들에게 불만이 있다. 예수님이 아니다.”
“나는 이미 충분히 보아 왔다. 고등학교 미식축구 감독이 승리를 위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도, 라이온스클럽이 연례 자선 빗자루 판매 행사를 축복해 달라고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도, 존 버치 협회(John Birch Society) 사람들이 예수님께 북한 사람들을 계속 감시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도, 또 감옥 문이 눈앞에 다가오자 그제야 회심했다고 말하는 화이트칼라 범죄자들도 말이다. 소박하게 하나를 제안한다. 아마도 노동하는 예수님과 우리를 돌보시는 아버지 하나님은 훨씬 더 큰 불의의 문제들을 다루시는 데 시간을 쓰시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기적인 기도들의 끝없는 중언부언은 필요하지 않으실 것이다. 예수님이 정말 그렇게 생각하셨는지는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내 생각에는 예수님은 그분을 대신한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품격 있는 분이시다.”
여러분,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 사람이 지금 기독교의 어떤 모습을 보고 있습니까? 거룩함은 어디에 있습니까? 의는 또 어디에 있습니까? 거룩한 사람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가 보고 있는 것은 매디슨 애비뉴식 기독교뿐입니다. 온갖 상업적인 기법이며 홍보 전략뿐입니다. 기독교의 가장 값싸고 피상적인 모습뿐입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본질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본질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입니까?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뒤죽박죽 만들어 놓았습니다. 있어야 할 것이 제자리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도 효과는 있잖아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하면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지만 효과가 있잖아요. 결과를 보세요. 결과를 보시란 말이에요. 사람들이 모이고, 군중이 몰려오고, 우리가 설교하면 사람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결과를 보고 말씀하세요.”
여러분, 아십니까? 그런 의미의 결과는 제게 아무 것도 아닙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잘 들으십시오. 민수기 20장 11절입니다. 찾아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셨습니까? 반석에게 명령하라고 하셨습니다. 기억하시죠? 그런데 모세는 반석에게 명령하지 않고 어떻게 했나요? 지팡이로 반석을 내리쳤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모세는 불순종했습니다.” 맞죠. 그렇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반석을 쳤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효과가 있었습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그 결과가 모세의 행동을 옳게 만들어 주었나요?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에 그 특권을 잃었습니다. 불순종하면서도 결과는 얻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결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순종을 통해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불순종을 통해서도 결과는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순종이 순종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불순종은 그저 여전히 불순종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래도 결과는 좋지 않습니까?”라고 말해도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방법대로 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까요?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그 결과가 어떠했을지 알 수도 없습니다.
기독교의 진정한 지도자는 누구입니까? 누가 정말 교회의 방향을 제시할 자격이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체험을 영성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누구라도 그 체험이 어떤 것이든 체험만 했다면 모두 주목을 받게 될 것입니다. 특히 그 사람이 유명인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결국 매디슨 애비뉴식 기독교를 만들어 내게 됩니다. 더욱이 그 체험이 기이하고 극적일수록 출판사들은 앞다투어서 그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려고 달려듭니다. 반면 신실하고 경건한 사람들은 뒤에 계속 남아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묵묵히 감당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의 체험으로 큰 돈을 법니다. 제 말이 조금 쓴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비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오늘날의 시대정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누가 교회의 지도자입니까?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새신자 출신의 유명인입니까? 유명 인사들입니까? 아니면 참으로 영적이고 경건한 사람들입니까?
이제 여러분에게 꼭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설교 중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한 말은 다 잊어버리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꼭 기억하십시오. 고린도후서 10장을 펴 보십시오. 저는 이 말을 정말 오래 전부터 하고 싶었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고린도후서 10장부터 13장까지, 곧 마지막 네 장은 특별한 체험으로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거나, 체험을 했다는 이유로 영적 지도자가 될 자격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성경 어디보다도 분명하게 다루고 있는 본문입니다. 바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정말 흥미로운 내용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고린도라는 도시에 바울이 교회를 세웠습니다. 여러 편의 편지를 보냈고, 오랫동안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아주 새로운, 아주 인기 있는 ‘슈퍼 사도들’이 그 도시에 들어왔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5절에서 바울은 ‘슈퍼 사도들’이라고 부릅니다. 고린도에 와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새로운 세대입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하고 계십니다. 새로운 부흥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제 옛것은 물러가야 합니다. 새로운 시대입니다.” 온갖 그럴듯한 주장들을 들고 들어왔습니다. 말하자면 고린도후서 10장에 은사주의자들이 등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고린도에 들어왔습니다. 새로운 ‘슈퍼 사도들’입니다. 대단한 기세로 자신들을 내세웠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0장 12절에서 “자기를 칭찬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또 10장 18절에서도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자들이라고 지적합니다. 스스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선지자입니다. 새로운 사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새로운 도구요 새로운 일꾼입니다. 이제 우리가 왔습니다.” 그들에게는 체험도 있었고, 환상도 있었고, 황홀경도 있었고, 카리스마도 있었고, 사람을 끄는 매력도 있었습니다. 온갖 것을 다 갖춘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 들어와 성도들을 완전히 압도했습니다. 사람들은 완전히 매료됐습니다. “바로 이거지. 이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슈퍼 사도들이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영성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교회의 주도권을 잡으려면 먼저 참된 지도자인 바울의 권위를 무너뜨려야 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 왜 아직도 자신들의 지도자라고 생각하는지, 왜 자신들이 여전히 바울의 말을 들어야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3장 3절을 보십시오. 이 단락 전체의 핵심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여기서 잠간 멈추겠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할 권리가 있다는 증거를 요구하고 있다. 내가 여전히 하나님의 음성을 전하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도요, 하나님의 메신저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라고 요구하고 있다.”
당시 고린도 교인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새로운 사람들이 왔습니다. 바울 선생님, 저 사람들을 보십시오. 놀라운 환상이며 황홀한 체험이며 계시도 있습니다. 사람을 사로잡는 매력과 카리스마도 있습니다. 말도 아주 능숙합니다. 저 사람들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사도입니다. 바울 선생님, 솔직히 당신은 이제 시대에 뒤처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내 안에서 말씀하신다는 증거를 구하고 있는 것이냐? 나를 저 사람들과 비교하려는 것이냐?” 기준이 무엇이었습니까? 고린도후서 12장 1절을 보십시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바울은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좋다. 나는 너희가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 너희의 기준은 환상과 계시구나. 그렇다면 그 문제를 이야기해 보겠다. 너희는 특별히 영적인 사람이라면 환상을 경험하고 계시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구나. 좋다. 그 이야기를 해보자.”
이들은 참된 사도가 아닙니다. 사탄의 사도들입니다. 스스로를 추천했고, 스스로를 내세웠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1장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하노라.” 여기서 바울은 야고보나 베드로나 요한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환상과 계시와 신비한 체험을 자랑하던 이 ‘슈퍼 사도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바울은 “나는 그들보다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나는 그들에게 밀려날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거짓 사도들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어떻게 압니까?” 4절을 보십시오.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뭔가 잘못된 것이 있었습니다. 교리가 바르지 않았던 것이죠. 실제로 무엇이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상대가 안 돼.” 고린도후서 10장 10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다. 글은 참 잘 쓴다. 내용도 대단하다. 그러나 그의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의 말은 시원찮다.” 다시 말하면 “저 사람은 정말 볼품없는 사람이고, 말도 잘 못해. 글은 대단하지만 직접 만나 보면 외모도 별로고 말도 분명하지 않아. 우리의 카리스마와 웅변과 품위와 세련됨에는 당연히 상대가 되지 않아.”
가련한 바울은 이 모든 ‘슈퍼스타’들과 맞서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해야 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오늘날에도 이와 매우 비슷한 모습을 봅니다. 참으로 경건한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적으로는 이름 없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앞에 나서 있는 사람, 큰 인물로 추앙받는 슈퍼스타들을 보면, 과연 정말 그런 자격이 있는 사람들인지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좋다. 나도 저 사람들처럼 나 자신을 자랑해 보겠다. 환상과 계시, 잘생긴 외모와 매력, 카리스마를 기준으로 말이다. 나도 내 이야기를 좀 해 보겠다. 내 자격을 말하겠다.” 자, 이제 바울의 자격이 나옵니다. 준비되셨나요? 고린도후서 11장 23절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물론 풍자적인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자신의 ‘자격’을 말합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내가 거짓말 아니하는 것을 아시느니라.” 32절입니다.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나의 가장 대단한 자격 하나를 말해주겠다. 나는 초라한 늙은 사람처럼 작은 광주리 속에 웅크리고 앉아 창문 아래로 내려져서 목숨을 건져 달아난 사람이다. 대단한 이야기 아닌가? 보십시오. 통렬한 풍자입니다. 바울은 “너희는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다. 모든 것을 거꾸로 보고 있다. 너희의 어리석은 교만 자체가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도가 아니라는 충분한 증거이다. 너희는 슈퍼 사도들의 화려한 업적을 들었다. 이제 내 이야기를 들어봐라. 나는 한 번 광주리에 담겨 성벽 아래로 내려가 겨우 목숨을 건졌고, 감옥에도 갔고, 목숨을 부지하려고 도망쳐야 했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 무슨 대단한 간증입니까?
바울은 자신의 강함을 자랑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자랑했습니까? 약함을 자랑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의 사도는 언제나 그렇습니다. 반대로 누군가가 자기의 환상이며, 체험이며, 계시며 그런 것들을 자랑하기 시작한다면, 바울의 기준으로는 이미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바울도 결국 그런 이야기를 꺼냈잖아요.”
12장 1절을 보십시오. 맞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정말 좋습니다. 꼭 보셨으면 합니다. 바울이 이제 말합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바울의 요점을 보셨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래, 환상과 계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어디 보자… 내가 마지막으로 체험을 한 것이 언제였더라? 아, 14년 전이구나.” “14년 전이라고요? 은사주의자 자격이 없네요. 매주 성령에 쓰러지는 체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마지막 체험이 14년 전이라뇨?” 그러자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맞다. 그런데 그때 내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기억도 분명하지 않다. 사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정확히 모르겠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만 기억할 뿐이다.”
여러분, 원고가 이렇다면 그 어떤 편집자도 받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천국에 갔다 왔다면 좀 더 생생하게 써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마 셋째 하늘에 이끌려 올라갔던 것 같다. 실제였는지조차 잘 모르겠다. 어쩌면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너무 오래전 일이다. 마지막으로 그런 체험을 한 것이 14년 전이다.” 그리고 덧붙여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나는 이 이야기도 그만하고 싶다. 별로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5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저는 이 말이 너무 좋습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환상, 계시, 그게 핵심이 아닙니다.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어떻다고 합니까? “곧 강함이라.” 바로 이겁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진정한 스타가 누구인지 아시겠습니까? 참으로 영적인 사람이 누구인지 아시겠습니까? 자신의 삶 속에서 겸손을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보이십니까? 스가랴가 어느 날 밤 환상을 본 후에, 하나님의 음성을 다시 듣기까지 2년이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또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은 평생 단 한 번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단 한 번의 음성으로 예언을 받고, 그 이후에는 다시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신 삶의 기준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나는 연약하고 비참하고 절박하고 초라한 삶을 살았다. 그리스도를 만난 순간부터 목이 잘려 순교하는 날까지 고난 가운데 살았다. 비참하고 연약했지만 겸손하고 온유하게 살았다. 바로 그런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능력을 나타내셨다.”
이것이 참된 영성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누가복음 5장을 보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베드로와 말씀하실 때입니다. 8절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11절입니다. “그들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 무엇을 했습니까? “예수를 따르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시겠어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너 같은 사람이 내가 사용할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부르셨을 때도 이사야는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입니다. 저를 부르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는 종들은 언제나 그렇게 말했습니다. 결코 자신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값을 매기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무력하고, 죄 많고, 연약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월터 챈트리(Walter Chantry)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성경적인 부흥을 갈망하지만, 우리의 본래 연약함을 없애 주겠다고 약속하는 어떤 체험도 추구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재능이나 지혜나 거룩함이나 능력을 필요로 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 사역 가운데 역사하시기를 간절히 필요로 한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사용하시기에 합당한 도구가 되기 위해 두 번째 은혜의 역사로 놀랍게 변화될 필요는 없다. 주님께서는 연약한 도구들을 사용하심으로 자신의 은혜로운 능력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신다.” 이것이 참된 영성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거룩하게 살고, 겸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이제 교회에서 이 문제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 체험을 한 뒤로 너무나 행복합니다. 너무 행복합니다. 이제 나는 영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한 가지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것만 말씀드리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을 보십시오. 이번에는 예수님의 입에서 직접 나오는 말씀을 들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자, 여기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이 보십니까? 바로 팔복입니다.
‘복이 있다(blessed)’라는 말의 또 다른 표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행복하다(happy)’입니다. 누가 정말 행복한 사람인지 아십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행복하나니.” “애통하는 자는 행복하나니.” “온유한 자는 행복하나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행복하나니.” “긍휼히 여기는 자는 행복하나니.” “마음이 청결한 자는 행복하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는 행복하나니.” 그리고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행복하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정말 행복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겸손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거룩한 사람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또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바로 영적인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된 영성의 기준은 분명합니다. 제 마음이 너무나도 아픈 이유는, 우리가 가짜 기준을 받아들이는 순간 참된 기준을 잃어버리게 되고, 결국 영적으로 가난해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체험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환상을 좇지 마십시오. 계시나 특별한 경험을 구하지 마십시오. 거룩함을 추구하십시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 거룩함 가운데 겸손을 추구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상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에도 함께 교제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분명하고 직접적으로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에게서 나온 것은 잊어버리게 하시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말씀만을 마음 깊이 기억하게 하옵소서. 이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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