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도 계속해서 은사주의 운동 시리즈를 진행하겠습니다. 먼저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 그레이스 교회는 성도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우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도 우리 교회에 처음 오신 분들이 참 많이 계실 텐데요, 아마도 오늘 드리는 말씀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진행하는 시리즈는 오늘날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중요한 문제로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로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문제를 살펴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 말씀 중심이어야 합니다. 이번 주제는 두 번에 나누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은사주의 운동의 한 측면을 분석하고, 다음 주에는 성경이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오늘도 은사주의 운동의 문제점을 다룰 것인데요, 저는 이것을 '경험 중심 신학'의 문제, 이렇게 부르고 싶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결론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아니라 자신의 경험에서 끌어내는 태도를 말합니다. 오늘과 다음 주에 이 권위 문제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 시리즈를 통해서 오늘날의 은사주의 운동을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아래에서 살펴보려고 힘써 왔습니다.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오순절 운동(Pentecostal Movement), 신오순절 운동(Neo-Pentecostal Movement), 또는 은사주의 운동(Charismatic Movement)이라고 불리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환상을 보았다고 주장하고, 방언, 그러니까 다른 언어를 말한다고 주장하고, 여러 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이 기독교와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들이 과연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의 진리인지를 반드시 검토해야 합니다. 이 시리즈의 목적은 교회를 신약의 사도적 교리에 기초한 참된 성경적 신앙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권위를 믿고, 가르치고, 설교합니다. 성경은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해서 말하고 있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회는 너무나 자주 오류를 선택합니다. 그럴 때마다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얼마 전에 몇몇 신학자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에 교회 조직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함께 이야기하던 한 신학자가 말했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이렇게 조직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러자 다른 신학자가 또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지난 200년 동안 다른 방식으로 조직된 교회들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러자 처음에 이야기했던 신학자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까지 교회는 1,500년 동안 잘못된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교회는 얼마든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중심에서 벗어나 문제에 빠질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지금도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요즘 아일랜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한번 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과연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 일치합니까? 분명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참 그리스도인이든 자칭 그리스도인이든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간 경우가 매우 많았습니다. 그러면 혼란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제가 하려는 일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중심에서 벗어났다면 다시 성경적 기독교라는 제자리로 돌이키도록 요청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잘못된 점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부합하도록 바로잡아야 할 부분들이 있고, 하나님의 진리와 더 조화를 이루어야 할 부분들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삶에도 있습니다. 전 세계의 교회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잘못된 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곳도 많고, 또 심지어 말씀을 전혀 가르치지 않는 곳도 많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혼란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이야말로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다시 선지자적 음성을 외쳐야 할 때라고 믿습니다. 교회를 다시 성경적인 자리로 돌아오도록 부르는 것이죠.
에스겔 9장 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심판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심판하시고 죽이시고 진노를 쏟으시는 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에스겔 9장 6절입니다.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베드로전서 4장에서 베드로도 같은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우리가 하나님의 집을 먼저 깨끗하게 하지 않고서는 세상에 어떤 영향력도 미칠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신약성경 중에서 13권의 서신을 기록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던 교리적인 문제와 실제적인 문제들, 그리고 여러 가지 잘못된 문제들을 바로잡기 위해서 여러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일곱 통의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들의 대부분은 교회를 바로잡기 위한 내용입니다. 책망입니다. 꾸짖음입니다. 그들의 행위가 너무도 심각하게 잘못되었기 때문에 내리시는 심판의 선언입니다.
우리가 지금 함께 공부하고 있는 고린도전서 역시 원칙 없이 행동하고 비성경적인 고린도교인들의 행위를 길게 강하게 책망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 이후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사람들을 세우셔서 교회가 다시 성경적인 자리로 돌아오도록 부르셨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백성과 지도자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든 질서를 향해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라고 외쳤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저도 지금 바로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하다 보면 비난도 받고, 압박받을 위험이 있다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는 하나됨과 사랑만을 너무 강조하는 분위깁니다. 성경적인 하나됨, 성경적인 사랑이라면 저도 좋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되어야 하죠. 형제애를 나누고, 기쁨 가운데 함께 손을 맞잡고, 이렇게 하는 것은 너무나 좋은 일입니다.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하나됨과 사랑만을 강조하다 보면 진리를 말하는 사람은 분열을 일으키는 것으로 여긴다는 겁니다. 저는 온갖 종류의 편지를 정말 많이 받습니다. 제가 믿는 바를 전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싸우고 싶어서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가 반드시 선포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마치 시편 69편에서 다윗이 말한 것과 같습니다. "주의 집을 위한 열성이 나를 삼키고…" 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셔서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나타내실 때 처음 하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채찍을 만들어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심판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까요? 하나님의 집입니다. 예수님도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도 교회를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치 천로역정에 나오는 순례자가 ‘마법의 땅’에 이른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 모두가 마법의 땅에 도착한 것 같습니다.
기독교는 거대한 친목 모임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어제였는지, 그저께였는지, 아무튼 어느 교회에서 제가 이런 것을 보았습니다. 탁자 위에 <오렌지카운티 기독교인 사업체(The Christian's Business Directory for Orange County)>라는 제목의 책자가 놓여 있었습니다. 사는 동안 모든 일을 오직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해결할 수 있도록 만든 각종 사업체 목록입니다. 저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이제는 기독교 병원에서 기독교인 의사에게 태어나고, 기독교인 아버지와 어머니 밑에서 자라고, 기독교 학교에 다니고, 교회와 관련된 것만 배우고, 기독교인 보험 설계사와 거래하고, 기독교인 치과의사와 만나고, 기독교인 주유소에서 '거룩하게 성별된 에틸렌 휘발유'까지 넣을 수 있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기독교'라는 이름표만 붙이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기독교라는 테두리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우리끼리만 어울리며 지내는 것이죠. 모두가 서로를 끌어안고, 우리끼리 작은 울타리를 만들어 그 안에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와서 "여러분, 뭔가 크게 잘못되었습니다"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큰일 났다! 저 사람은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이야"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두가 천로역정에 나오는 '마법의 땅'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노래를 들려주기 위해서 1년에 10억 달러가 넘는 돈을 들여서 기독교 음반을 삽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와서 이 평온한 분위기를 흔들면서 "여러 가지 잘못된 것들이 여러분에게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곧바로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문제의 핵심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핵심은 지혜가 거리에서 외치며 사람들을 다시 성경적인 자리로 부른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입장을 밝히려고 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교회 밖에서 반드시 말해야 할 문제들에 대해서 침묵합니다. 심지어 자기 교회 안에서조차 바른 입장을 밝히지 않은 채 모든 일을 그대로 흘러가게 그냥 내버려 둡니다. 저는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만 계속 모욕을 당하시고, 우리는 아무 불편함도 겪지 않으려고 합니까? 옳지 않습니다. 차라리 우리가 불편함을 감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이미 충분히 오랫동안 모욕을 받아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원리대로 돌아오도록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원리대로 살지 않을 때 지적하지 않는다면 신실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는 물론이고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세상이 바라보는 기독교가 어떤 모습인지 아세요?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켜 보면 기독교의 어떤 모습을 봅니까? 마치 집단적 광란에 빠진 것 같은 모습을 봅니다. 자기 삶에 온갖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TV에서 봅니다.
얼마 전에도 그런 프로그램 하나를 봤는데, 어떤 여성이 펑크 난 타이어가 고쳐졌다는 간증을 하더군요. 세상은 그런 모습을 봅니다. 세상은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기독교란 말입니까? 온갖 경험과 가르침이 뒤섞여서 혼란만 가중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라디오와 텔레비전에 나와서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서로 의견이 엇갈리는 이야기를 늘어놓은 뒤에는 어김없이 헌금을 요청하는 호소가 이어집니다. 세상이 바라보는 기독교가 바로 그런 모습 아닙니까? 그러니 사람들이 실망하는 것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은사주의 운동에서 가장 중심적인 문제로 보는 것, 그리고 세상이 가장 많이 접하는 모습이자 우리가 반드시 직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경험 중심의 신학(experiential theology)'입니다. 기독교 전체를 온갖 기이한 경험이며 기적이며, 환상이며 계시며, 병 고침,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들, 이런 것들로 이루어진 종교처럼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들이 끝이 없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그런 경험들이 성경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다는 겁니다. 경험 자체가 곧바로 정당성을 갖습니다. "당신이 그런 경험을 했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리고는 "굳이 성경으로 따져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경험했으니까요"라고 말합니다.
며칠 전에는 플로리다에 있는 어떤 분에게서 편지를 받았습니다. 제 파일에는 이런 비슷한 사례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에는 어떤 여성이 자기 개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법을 가르쳤고, 그 개가 '알 수 없는 짖는 방언'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다는 정말 놀라운 간증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정말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런 극단적인 사례를 가지고 은사주의 운동 전체를 비판하면 안 되지 않나요? 너무 특이한 경우잖아요?" 그렇습니다. 저는 그런 이야기를 가지고 은사주의 운동 전체를 공격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단지 이런 겁니다. 그런 이야기를 막거나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경험 자체가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는 기준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경험을 했다고 말하면, 그냥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니 누군가가 자기 개가 '알 수 없는 짖는 방언'을 한다고 해도 "아멘" 하고 받아들이는 겁니다. 왜냐하면 경험 그 자체가 핵심이 되기 때문이죠. 잠시 후에 제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또 어떻게 그런 사고방식이 형성되었는지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은 자기 경험에 성경을 억지로 맞추려고 하거나, 많은 경우에는 아예 성경을 무시해 버립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시리즈를 통해 계시의 문제, 성경 해석의 문제, 사도 시대의 독특성, 역사적 과도기의 문제를 살펴봤습니다. 지금은 경험 중심의 신학이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는 은사주의 운동의 중심부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점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은사주의 운동의 핵심 교리는 성령세례와 그에 수반되는 여러 가지 현상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교리입니다. 그리고 가장 큰 특징입니다. 은사주의자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먼저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에 매우 간절하게 성령세례를 구해야 하고, 성령세례를 받으면 반드시 육체에 어떤 현상이 함께 나타나야 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체험으로서의 느낌이나 음성, 방언을 비롯한 여러 가지 현상이 뒤따른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로 은사주의 운동 전체를 보면 사람들은 한결같이 어떤 체험, 느낌, 육체에 나타나는 현상, 감정 이런 것들을 간절히 추구합니다. 처음부터 방향 자체가 그렇게 설정되어 있습니다. 구원 이후에 반드시 받아야 하는 성령세례라는 비성경적인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체험의 연속이라는 생각의 문을 활짝 열어 버립니다. 만일 성령세례와 체험이 가장 중요한 교리라면, 사람들은 성령세례를 만능 열쇠라고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한 가지 체험에서 또 다른 체험으로 끊임없이 옮겨 다니게 됩니다.
그들은 "성령 충만은 체험을 하기 전에는 받을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체험을 좇습니다. "당신은 체험해 봤어요? 어떤 체험을 했습니까? 무슨 체험을 했어요?" 이런 질문을 끊임없이 받다 보면 사람들은 위축됩니다. 결국 그 체험이라는 것을 얻기 위해서 애쓰게 됩니다. 그리고 감정, 감정주의를 향한 문을 활짝 열어 버립니다. 끊임없이 또 다른 체험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죠. 물론 그들이 주장하는 체험들은 정말 놀라운 것들도 있지만, 평가 기준은 전혀 제시되지 않습니다. 아무도 "그건 성경이 이렇게 말하기 때문에 맞지 않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아, 정말 놀랍군", 이렇게만 반응할 뿐입니다. 그리고는 그 체험에 맞는 성경 구절을 여기저기서 찾아서 끼워 맞추려고 합니다. 마치 성경 위에 얇은 베니어판을 덧씌워 버리고는 본래의 진리를 가려버리는 것 같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전국적으로 발행되는 은사주의 신문에 아무런 논평도 없이 실린 기사가 있습니다. 편집자의 설명도 없고, 비평도 없습니다. 그냥 내용만 그대로 실려 있습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우리 주님의 실제 사진이다. 그렇다. 나는 주님의 모습을 필름에 담았다고 믿는다. 어느 한여름 새벽 3시 30분에 나는 어떤 음성을 듣고 잠에서 깼다. '가서 나의 해돋이를 찍어라.' 강가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동이 트기 전에 하나님과 너무도 가까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완전한 평안이었다. 그런데 필름에 완벽한 형상이 찍혀 있었다. 두 팔을 들어 축복하는 자세였다. 물에 비친 그 형상은 다른 모든 그림자의 방향과는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나타나 있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습을 내게 보이셔서 다른 사람들과 나누게 하셨다고 믿는다." 사진작가 더들리 대니얼슨(Dudley Danielson)이라는 서명과 함께 주소도 적혀 있었습니다. "이 사진은 만 원에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더 큰 크기를 원하시면 제작해 드립니다. 이 초상화는 여러분에게 큰 축복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더들리 대니얼슨(Dudley Danielson)이나 신문을 만든 사람들 중에 그 누구도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라는 말씀으로 문제를 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라는 말씀도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또 “나를 보고 살 자가 없느니라”라는 구절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 모든 말씀을 제쳐 두고는 하나님의 사진을 찍었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핵심은, 은사주의 운동의 기본적인 방향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 체험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체험과 충돌하지 않도록 성경을 다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몇 달 전에 우리가 살펴보았던 잘못된 성경 해석의 문제로 다시 빠져들고 마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 보겠습니다. 아주 최근의 일이죠. 이런 예를 들기 시작하면 일주일 내내 이야기를 해도 끝이 없습니다. 제가 하나만 더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977년 4월 11일, 로스앤젤레스 채널 40의 <프레이즈 더 로드 클럽(Praise the Lord Club)>라는 프로그렘에서 한 인터뷰가 방송됐습니다. 에드 스미스(Ed Smith) 목사가 리처드 이비(Richard Eby) 박사를 인터뷰한 내용입니다. 인터뷰의 핵심은 이비 박사가 죽었다가 천국에 다녀온 뒤에 다시 돌아왔다는 겁니다.
제가 몇 달 전에 이런 일이 앞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드렸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마빈 포드(Marvin Ford)가 먼저 그 여행을 다녀왔다고 하자,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가고 싶어합니다. 이제는 최고의 경험이 되어 버렸습니다. 누구나 천국에 갔다가 돌아온 사람으로 알려지고 싶어합니다. 그 사람 이후로만 해도, 저는 직접 네 사람한테서 자신도 같은 경험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새로운 유행이 된 거죠. 이비 박사는 자신이 죽었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모든 일이 발코니에서 떨어져 머리를 심하게 다쳤기 때문에 의학적으로 죽은 상태였다고 말합니다. 적어도 본인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때 이런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그 경험이 정말 놀라웠다면서, 자신이 낙원에 갔고, 안경이 전혀 필요 없었고, 약 160킬로미터나 되는 먼 거리를 그냥 볼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몸은 상처난 곳 없이 완전했고,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고, 보이기도 하고 동시에 투명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 천국의 향기가 자신을 압도했답니다. 제사의 향기로운 냄새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자신이 알게 된 새로운 것이 있는데, 제사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바로 그 향기를 하늘로 올려 보내는 거랍니다.
또 어떤 꽃이 보여서 꺾어 보았는데, 줄기 안에 물이 하나도 없었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예수님이 생수이시기 때문이랍니다. 또 사람의 뇌에 열두 개의 뇌신경이 있는데,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하나씩을 상징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이 완전히 증명되었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두개골에 있는 첫 번째 신경이 후각을 담당하는 신경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그 향기로운 냄새를 하늘로 올려 보내서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신경을 만족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얘기를 듣더니 진행자가 계속해서 "놀랍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라고 감탄을 하면서, 또 "이건 정말 깊이 있는 내용입니다",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저는 그저 웃음이 나옵니다. 웃지만 재미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혀 재미없습니다. 우리가 웃는 이유는 너무나도 터무니없기 때문이죠. 너무나 황당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 말들을 아무도 검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계속 이어집니다. 리처드 이비(Richard Eby) 박사는 낙원과 하늘을 전혀 구분하지 않는데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낙원과 하늘을 구분하고 있는데 말이에요.
또 성경 어디에도 그가 투명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거나, 그 몸이 이리저리 자유롭게 떠다녔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사실은 천국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지금의 육체를, 우리가 가진 이런 육체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변화되어 하늘로 올라간 몇몇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아직 몸의 부활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죽은 자의 몸은 여전히 무덤에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이 천국에서 무슨 몸으로 있었다는 말입니까? 안경이 필요 없었던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안경을 걸칠 몸 자체가 없는데 어디에다 안경을 걸친답니까? 만일 정말 천국에 있었다면 애초에 움직일 몸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어야 합니다. 그의 몸은 무덤에 있어야 합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제사 제도에 대해서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제사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향기가 아니라 죽음입니다. 그런데 완전히 오해하고 있습니다. 또 뇌신경과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연결시키는 것은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로 억지스러운 비약입니다. 그런 식으로 연결하면, 우리에게 발가락이 열 개 있으니까 몸의 아래쪽 절반은 짐승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겁니다. 그 정도로 말이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번 주에 제가 한번 직접 알아봤습니다. 실제로 뇌신경은 열두 개가 아니라 열두 쌍입니다. 스물네 개입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스물네 장로를 상징한다고 해야 하지 않아요?
결국 모두 어리석은 이야기일 뿐입니다. 정말 어리석은 이야기입니다. 제 마음이 정말 아픕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심각하게 왜곡하기 때문입니다. 어리석고 터무니없는 이야기일 뿐인데, 그런데도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제가 그런 문제를 지적하거나 반대하는 말을 하면 오히려 저를 비난합니다. 하지만 비난을 받아야 한다면 마땅히 받겠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문제를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에 미국에서 가장 큰 기독교 출판사가 대표 도서로 출판하겠다는 계약서를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하나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왜냐하면 이런 문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이런 모습은 정말 옳지 않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남부 캘리포니아에 있는 은사주의 교회에서 벨라드라는 목사가 하나님께서 새로운 계시를 주셨다고 성도들에게 말했답니다. 그 새로운 계시란, 이제부터는 두 사람씩 짝을 이루어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한 사람은 개신교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로마 가톨릭 신자여야 한다는 겁니다. 다섯 사람이 똑같은 계시를 받았는데, 다섯 사람이 같은 계시를 받으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레 크리슈나(Hare Krishna) 신도들이나, 선불교(Zen Buddhism) 수행자들도 다섯 명이 넘게 하나님께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는 사실은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결국 무엇이 남습니까? 수준 낮은 신비주의(sub-Christian mysticism)만 남습니다. 초월명상(TM)이나 하레 크리슈나(Hare Krishna), 또는 다른 여러 신비주의 운동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신비주의입니다. 신비주의란 뭡니까?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진리를 계시가 아니라 직관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계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직관이나 느낌, 또는 스스로 만들어 낸 생각을 통해서 영적인 진리를 이해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 온갖 체험의 집합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나서 그 체험에 맞추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리저리 비틀어 해석합니다. 기독교가 아니라 아주 수준 낮은 신비주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진리에 접근하는 방법은 전통적으로 두 가지뿐입니다. 오직 두 가지뿐입니다. 하나는 역사적, 객관적 접근,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서 행하신 일들을 이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죠. 또 다른 하나는 개인적, 주관적 접근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체험을 중심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에 관한 모든 참된 진리를 정리해서 성경적 신학을 세울 때에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 집합체를 기초로 삼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이 책, 성경이 말하는 것을 기초로 삼으시겠습니까? 사람들의 경험을 모아서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진리를 체계화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혼란스러울까요? 얼마나 뒤죽박죽이 되겠습니까? 사람 수만큼이나 서로 다른 견해가 생겨날 겁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위 있는 계시를 주신 것입니다.
신학을 세우는 방법은 두 가지뿐입니다. 하나는 성경을 역사적, 객관적 기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주관적인 경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자는 결국 혼란으로 이어질 뿐입니다. 역사적·객관적 접근은 '신조 신학(Creedal Theology)'이라고 부릅니다. 신조를 기초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시다. 하나님은 누구이시다. 성령님은 누구이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라는 식으로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여 세운 신학입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의 신학입니다. 반면 개인적·주관적 접근은 직관에 의존합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느낀다. 내게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나는 하나님이 이러이러하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되면 결국 경험 신학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경험 신학은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고, 말씀 신학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가장 잘 아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한 가지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사탄이 바로 이 일의 배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탄은 사람들이 경험을 근거로 신학적인 결론을 내리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경험은 얼마든지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죠. 이미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신학은 종교개혁의 신학입니다. 역사적 복음주의이고, 역사적 정통 신앙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누구의 생각이든, 누구의 주장이나 경험이든, 이 책, 성경에 비추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받아야 합니다. 반면에 두 번째 입장인 개인적, 주관적 접근은 역사적인 로마 가톨릭의 방식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오래전부터 직관과 경험을 바탕으로 신학을 세워 왔습니다. 성모 마리아가 여기저기 나타났다는 이야기들이나, 루르드(Lourdes)나 과달루페(Guadalupe) 등에서 일어났다고 하는 일들이 모두 그런 예입니다. 언제나 신비주의적인 성격을 띠었습니다. 그래서 성경 밖의 수많은 내용을 계속 덧붙여서 결국 로마 가톨릭 신학을 이루게 된 겁니다.
이 두 번째 입장은 로마 가톨릭만의 특징이 아닙니다. 역사적 자유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오랫동안 "진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것이다. 진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에게 강한 감동을 주는 것이 곧 진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신정통주의(Neo-Orthodoxy)도 같은 이야기를 했죠. 그리고 은사주의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경험 신학을 강조하는 은사주의 신학은 역사적 정통 신앙의 전통 위에 서 있지 않습니다. 로마 가톨릭, 자유주의, 신정통주의의 전통 위에 서 있을 뿐입니다.
경험주의 신학이 은사주의 운동의 핵심입니다. 오순절 운동에 클로드 켄드릭(Klaude Kendrick)이라는 역사가가 있습니다. 미주리주 스프링필드(Springfield, Missouri)에 있는 은사주의 출판사인 복음출판사(Gospel Publishing Company)를 위해 글을 써 왔는데, 오순절 운동의 역사를 정리한 <약속의 성취(The Promise Fulfilled): 현대 오순절 운동의 역사(A History of the Modern Pentecostal Movement)>라는 책도 한 권 썼습니다. 1961년에 출판되었습니다. 그 책에서 오순절 운동의 역사를 시간순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운동의 핵심을 그대로 보여주는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 나옵니다. 성령세례와 방언을 구해서 실제로 받았다고 주장하는 최초의 경험을 소개합니다. 애그니스 오즈먼(Agnes Ozman)이라는 사람입니다.
켄드릭은 오즈먼의 간증을 인용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오즈먼 양 자신의 간증은 이렇습니다. 찰스 파함(Charles Parham) 선생님이 제 머리에 손을 얹으시는 순간 성령께서 제게 임하셨고, 저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방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여러 가지 언어를 말했습니다. 새로운 언어가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저는 최초로 방언을 한 사람입니다." 여기까지가 애그니스 오즈먼의 간증입니다.
그런 다음에 켄드릭은 이렇게 이어서 말합니다. "애그니스 오즈먼은 현대에 방언을 한 첫 번째 사람은 아니었지만, 성령세례를 의도적으로 구하면서 방언을 하게 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알려진 최초의 인물이다." 잠깐 멈춰 봅시다. 잘 들어 보십시오. 이 여성이 1901년 1월 1일, 성령세례를 구하고 방언을 했다고 기록된 최초의 인물이라고 소개합니다.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결론을 내리셨겠습니까? 저라면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아니, 이런 일이 2천 년 동안 한 번도 없다가 이제 처음으로 일어났다면,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정말 성경적인 것인지도 한번 살펴봐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결론을 내렸는지 아세요? 켄드릭의 말을 한번 들어 보십시오. "이때부터 오순절 신자들은 성령세례를 반드시 구해야 하며, 방언이라는 증거와 함께 받게 된다고 가르치게 되었다." 이 가르침은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성경에서 나왔습니까? 아닙니다.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애그니스 오즈먼(Agnes Ozman)이라는 한 여성의 경험에서 나왔습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이것이 바로 경험 신학입니다.
은사주의자들은 경험을 기준으로 삼고, 경험, 느낌, 감정, 현상을 추구한 뒤에 뒷받침할 성경 구절을 찾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성경을 이리저리 비틀어서 해석합니다. 다시 한번 그 문장을 보십시오. "이때부터 오순절 신자들은 성령세례는 반드시 구해야 하며, 방언이라는 증거와 함께 받게 된다고 가르치게 되었다." 그 가르침은 누군가가 성경을 연구하다가 그 진리를 발견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어떤 여성이 경험을 했기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경험이 은사주의 신학의 출발점이 되었고, 그 경험을 나중에 성경 속으로 억지로 끌어들인 것입니다. 바로 경험에서 출발하여 성경에 억지로 맞추는 경험 신학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오순절 운동 전체는 경험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고방식이 경험, 현상, 느낌, 감정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런 체험을 한 사람에게 "틀렸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도 없게 됩니다. 그래서 검증할 방법도 없고, 막을 방법도 없습니다. 결국에 통제되지 않은 채로 끝없이 퍼져 나갑니다. 오늘날 미국의 기독교도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미국의 기독교는 문자 그대로 주관주의와 신비주의, 그리고 경험주의의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마치 애굽에 내렸던 개구리 재앙처럼 온 땅에 가득 퍼져 있습니다. 성령론에 관한 매우 학문적인 저서인 <성령의 신학(A Theology of the Holy Spirit)>을 쓴 데일 브루너(Dale Bruner)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순절주의는 한마디로 말해서 경험의 기독교로 이해되기를 원하며, 그 경험의 절정은 성령세례이다. 중요한 것은 교리가 아니라 교리와 상관없는 경험 그 자체이다."
여러분께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어떤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드리는 이유는, 이런 일들이 얼마나 황당한 수준까지 가는지를 보여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농담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웃기려는 것도 아닙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믿기 어려우실 겁니다. 러셀 빅슬러(Russell Bixler)가 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It Can Happen to Anybody)>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휘태커 북스(Whittaker Books)에서 출판한 책입니다. 이 책은 성령세례와 그에 따르는 여러 가지 육체적 현상들을 경험하면 삶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러셀과 그의 아내 노마가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대목부터 읽어 드리겠습니다. "노마가 자리에 앉자마자 몸에 힘이 빠지더니 부드럽게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나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노마는 20분 동안 식당 바닥에 누워 있었고, 그동안 짐(Jim)은 계속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계속 들어 보십시오. 끝까지 읽어 드리겠습니다. "새로 사귄 친구들 가운데 몇 사람이 내게 방언으로 기도해 보라고 권했지만,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할 말도 없었다. 분명 성령님도 나를 통해 하실 말씀이 없으셨던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할 무렵에는 새벽 2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때 나는 웃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이것이 러셀이 성령세례를 받은 뒤 처음 나타난 현상입니다. 웃음이 터진 겁니다. "곧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웃음이 나왔다. 이전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깊은 사랑이 내 마음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 방에 있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 작별 인사를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껴안았고, 심지어 장로교인의 아내를 번쩍 들어 안아주기까지 했다. 원래 내 성격과는 너무나 다른 행동이었다. 나는 원래 매우 내성적이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사람이었다."
여기서 멈춰봅시다. 여러분도 보셨듯이, 러셀이 말하는 성령세례의 결과는 웃음이 터지고 사람들을 껴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내용을 성경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까? 없죠. 이어서 읽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이야기가 더 이상해집니다. "다음 날 아침, 토요일이었다. 우리 아이들 중 하나가 우리를 다급하게 깨웠다. '아빠, 엄마, 변기가 넘쳐요!' 노마는 급히 화장실로 달려갔고, 물이 복도 카펫까지 흘러넘친 것을 발견했다. 사실 우리는 금요일 저녁에 이미 그 문제를 알고 있었지만, 저녁 모임에 가기 전에 수리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네 아이에게 아래층 화장실만 사용하라고 일러 두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 다섯 살 된 해럴드가 그 사실을 잊어버린 것이었다. 노마는 급히 집 안의 걸레와 수건을 모아 물을 닦아 낸 뒤에 아래층으로 내려가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가고 모두 아래층으로 내려간 뒤, 나는 이를 닦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갔다. 이를 닦으면서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이렇게 기쁜데도 왜 아직 방언을 말하지 못하는 겁니까? 정말 어젯밤에 제가 성령세례를 받은 것입니까?' 그러자 신학교 시절 이후 침묵하셨던 그 음성이 즉시 들려왔다. 내 인생에서 세 번째로 그분이 말씀하셨다. '나를 시험해 보아라.' 다시 그 음성을 듣게 된 것이 놀라워 나는 '어떻게 말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음성이 들렸다. '변기 물을 내려라.'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잠깐만, 이게 정말 성령의 음성인가, 아니면 사탄의 음성인가?' 나는 계속 이를 닦았다. "그러자 그분이 다시 말씀하셨다. '변기 물을 내리라고 했지 않느냐.' 이번에는 강한 권위가 담긴 음성이었다. 나는 아직 젖어 있는 바닥과 복도 카펫의 얼룩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자 다시 음성이 들렸다. '변기 물을 내려라.' 이번에는 정말 다급한 음성이었다. 나는 이미 한 번 물이 넘쳤던 일을 떠올렸다. 그리고 내가 뻔히 알면서 또다시 변기가 넘치게 만든다면 아내가 당연히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칫솔을 내려놓고 변기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정말 그렇게는 못 하겠습니다.' 그러자 네 번째로 음성이 들렸다. '변기의 물을 내려라.' 이번에는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한 음성이었다.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먼저 젖은 걸레와 수건을 모두 가져다가 변기 주위에 깔아 놓은 다음에 물을 내리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내가 이미 모든 걸레며 수건을 지하실 세탁기에 넣어 두고 올라온 뒤였다. 나에게는 아무런 대비책도, 인간적으로 의지할 만한 안전장치도 없었다. 나는 손을 변기 손잡이에 올려 놓았다가 다시 떼었다. 또 한 번 시도했지만 끝내 내릴 수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이것이 정말 주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손잡이를 눌러 물을 내린 뒤에, 물이 넘칠 것을 예상하고 얼른 뒤로 물러섰다. 물이 점점 차오르기 시작했다. 거의 변기 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보며 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안 돼! 이제 넘치겠어!' 라고 외쳤다. 바로 그 순간, 마치 거대한 손이 물을 아래로 밀어 넣은 것처럼 물이 갑자기 배수구로 쑥 빨려 내려갔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웃기 시작했고, 웃음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나는 허리를 숙일 만큼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후 두 주 동안 깨어 있는 거의 모든 시간 내내 웃으면서 지냈다. 나는 평생 한 번도 그런 엄청난 기쁨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집 안을 걸어 다니면서도, 교회 안을 걸어 다니면서도, 계단을 오르내리면서도 계속 크게 웃었다. 나는 그렇게 웃으면서 평생의 모든 아픔을 털어 버렸다." 결국 이 이야기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막혀 있던 변기를 뚫어 주심으로써 정말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계속 읽겠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후에는 다른 육체적인 변화들도 뒤따랐다." 여기서 말하는 세례는 물세례가 아니라 러셀이 말하는 성령세례 체험을 가리킵니다. "나는 과체중이었다. 아마도 내가 원하는 체중보다 약 4.5킬로그램 정도 더 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열흘도 되지 않아서 성령님이 내 몸에서 약 4킬로그램을 빼 주셨고, 그 후 몇 주 동안에는 1.5킬로그램 정도를 더 줄여 주셨다. 내 모든 신체 감각이 훨씬 예민해졌다. 내 육체의 감각은 예전에는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것을 느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음식이 더 맛있게 느껴졌고, 침대도 더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성령님이 정말 나를 완전히 변화시켰다."
정말 안타까운 일 아닙니까? 성령세례 교리를 얼마나 왜곡시키고 있습니까? 참으로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합니다. 왜냐하면 은사주의자에게 중요한 것은 경험 자체이기 때문이죠. 아시겠어요? 아무도 반박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이야기입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유치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다는 것은 변기 물을 내리고 깔깔거리며 웃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내용을 성경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본성과 성품을, 성령님이 하시는 일을,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거리로 만들어 버리다니, 얼마나 끔찍한 모독입니까?
제가 이런 사례들을 말씀드리는 것은 당사자들을 비난하거나 상처를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이 이 운동이 어디까지 흘러가는지를 제대로 보시길 바랄 뿐입니다.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점점 더 기이한 방향으로 흘러갈 뿐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인본주의의 물결을 타고 있습니다. 결국 인본주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간증 시간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일어나 서정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대부분의 내용인 이렇습니다. "나에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나에게 저런 일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이런 일을 하셨습니다. 내게 이렇게 하셨습니다.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습니다. 나는 이렇게 느꼈습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이런 이야기뿐입니다. 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기독교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일종의 인본주의에 불과합니다.
제 할아버지께서 보셨던 어떤 성경책 속지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나는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는 상관하지 않는다.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저는 오늘날 은사주의 운동에서 바로 이 목소리를 듣습니다. 물론 그렇게 인정하고 싶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신비주의적 체험이 진리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어 버렸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다구요? 변기 물이 잘 내려가는 것을 보고 알았답니다.
조셉 딜로우(Joseph Dillow)는 그의 책 <방언 말하기(Speaking in Tongues)>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보면, 성경에 따라 살아가는 데서 감정에 따라 살아가는 것으로 서서히, 그리고 미묘하게 옮겨 가는 흐름을 찾아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체험은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이나 진지한 성경 연구를 대신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습니다. 많은 은사주의 신자들이 성경을 공부한다고 말도 하고 실제로 공부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를 배우기 위해 성경을 연구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흥분이나 특별한 체험을 기대하면서 성경을 읽습니다.
이처럼 경험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큰 대가를 치르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설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탄이 원하는 일입니다. 결국 문제는 권위입니다. 신자의 삶에서 최종 권위는 무엇이어야 합니까? 자신의 경험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와 분리된 체험에는 성숙도 없고, 성화도 없고, 참된 정당성도 없습니다. 저는 이런 가르침과 이런 현상은 참된 성경 교육이 없는 곳에서만 나타난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책임을 성도들이 아니라 지도자들에게 물어야 합니다. 호세아가 말한 것처럼 말이죠.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오늘날도 이 말씀은 그대로 사실입니다.
그런데 은사주의자에게 "하지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라고 말하면, 언제나 뭐라고 대답하는지 아세요? "당신이 그런 체험을 해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판단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죠. "그런 체험을 했는지 안 했는지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는 체험을 해 보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근거해서 판단할 수 있습니다."
1973년 10월호 <무디 먼슬리(Moody Monthly)>지에 <문제에 직면하라(Facing the Issue)>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습니다. 그 글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최근 방언을 하는 한 사람이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 편집자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하나님의 선물인 방언을 믿지도 않고 경험해 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습니까?' 사실상 방언이 성경에 비추어 검토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방언을 해본 사람만이 그 문제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경험 자체를 하나님의 선물로 전제하고 주관적인 체험을 성경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려놓는 것이다." 맞는 말입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이렇게 말한 겁니다. "당신이 경험해 보지 않은 일을 판단하면 안 된다." 바로 이 말이 발신자의 판단 기준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성경이 아닙니다. 무엇입니까? 경험입니다.
저는 한 번도 죽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서 정말 많은 것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성경이 죽음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CBS에서 생명과 죽음 이후의 세계를 주제로 90분 동안 토론하는 프로그램에 저를 초대했습니다. 4월 27일 새벽 1시에 방송될 겁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토론할 반대 입장을 가진 사람을 원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분명하게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주장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입니다. 저는 잠재의식 속에서 어떤 경험을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직관에 근거한 신학은 성경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저는 이 문제 때문에 정말 마음이 무겁습니다.
450개, 아니 한 500개에 가까운 텔레비전 방송국을 통해서 설교하는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1976년 1월호 <비텐베르크 도어(Wittenburg Door)>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는 조직신학을 쓸 시간이 없다. 내가 직관적으로 알고 있는 것, 직관적으로 옳다고 믿는 것에 신학적 기초 따위는 제시할 필요가 없다." 신학이 필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무엇이 옳은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답니다.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아시겠어요? 또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을 공개적으로 부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은 설교하지 않겠다."
이 문제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합니다. 이런 경험 중심의 접근이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 있습니다. 역사적인 기독교가 아닙니다. 전통적인 정통 신앙도 아닙니다. 오히려 오래된 자유주의입니다. 자유주의입니다. 오래전부터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해 온 바로 그겁니다. 19세기 독일의 신학자인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를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신학계에서 매우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슐라이어마허는 "진리를 결정하는 것은 경험이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의 진리 자체도 믿지 않았던 자유주의 신학자입니다.
최근에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에 실린 글에서 로버트 존슨(Robert Johnson)은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의 사상을 은사주의 운동과 연결해서 평가했습니다. 이렇게 말이죠. "오늘날 종교개혁자들의 기독교 신앙 접근 방식을 거꾸로 뒤집는 시도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일부는 신학이 말씀에서 성령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서 말씀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관계 중심의 접근이나 성육신 중심의 접근, 또는 은사주의나 신오순절주의적 접근을 받아들인 복음주의자들은 점점 더 다른 신자들에게 자신들이 경험한 것을 출발점으로 하여 복음을 다시 생각해 보라고 요구하고 있다. 전통적인 복음주의 신학을 대부분 현실과 동떨어져 있거나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은사주의 운동은 성경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체험이 반드시 더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존슨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톨릭 신자들과 성공회 신자들, 하나님의 성회 신자들, 감리교인들, 장로교인들이 모두 함께 모여 성령의 충만을 체험한다고 말하면서, 말씀의 신학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온 각 교단의 전통적인 교리적 차이들은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결국 교리가 문밖으로 밀려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십니까? 지금 당장 우리에게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새장을 열어 놓은 겁니다. 진리가 날아가 버리면, 여러분의 자녀들이 자라서 그 진리를 찾을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때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진리가 없을 겁니다. 진리와 연결될 수 있는 아무런 기반도 남아 있지 못할 겁니다. 저는 프랜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우리는 다음 세대의 발밑에 깔린 양탄자를 걷어내고 있다. 그들은 진리를 찾으려고 하겠지만, 그 진리와 연결될 수 있는 아무런 기반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은사주의 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 중에 마이클 하퍼(Michael Harper)가 있습니다. 은사주의 운동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인물입니다. 영국의 오순절 잡지인 <리뉴얼(Renewal)>의 편집장을 맡고 있죠. <새로운 삶의 방식(A New Way of Living)>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은 이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인 교회 안에서 새롭게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사람들은 신학자들의 공허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교리에 싫증이 났다." 신학자들의 교리를 '공허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교리'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경험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유주의입니다. 역사적인 정통 신앙이 아니라, 슐라이어마허의 전형적인 자유주의입니다. 성경은 여러분의 경험을 정당화하기 위해 기록된 책이 아닙니다.
이러한 접근은 슐라이어마허의 방식과 마찬가지로, 신조에 기초한 정통 신앙의 확고한 교리를 무너뜨립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셨다"라고 선언하는 신학을 무너뜨리고, 그 대신에 "나는 이렇게 느낀다. 나는 이런 경험을 했다"라는 신학으로 바꾸려는 겁니다. 자유주의일 뿐 아니라, 신정통주의(Neo-Orthodoxy)와 같은 맥락의 신학입니다. 신정통주의 역시 성경의 진리를 부인하는 또 다른 형태의 자유주의입니다.
제가 이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멜로디랜드 신학교(Melodyland Seminary)의 학장이었던 신정통주의 신학자 로드먼 윌리엄스(Rodman Williams)는 <성령의 오류(The Error of the Spirit)>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계속해서 강조하려는 것은, 성령의 이 역동적인 운동이 지닌 신학적 의미가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이다. 그 중심에는 '무언가 역사가 일어났다'는 확신이 있다." 이게 바로 핵심입니다. 이어서 말합니다. "어떤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설명할 적절한 신학적 언어를 찾기도 어렵고, 기독교의 여러 교리와 어떻게 연결해야 할지도 알기 어렵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으로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무언가 역사가 일어난 것은 분명하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성령님이 하신 일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래리 크리스텐슨(Larry Christenson)이라는 아주 잘 알려진 루터교 은사주의 지도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경험에 기초하며, 신학은 그 경험을 설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여러분, 완전히 틀린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주장을 하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탄은 사람들에게 온갖 것을 경험하게 하고는, 그 경험을 근거로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된 결론을 내리게 만들고 맙니다. 결국 잘못된 신학이 정통 신앙의 기초를 무너뜨리고 말 겁니다. 우리는 교회가 성경의 권위 위에 서도록 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최종적인 권위는 뭡니까? 바로 이 책, 성경 아닙니까? 다음 주에는 성경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서론만 말씀드렸습니다. 다음 주에는 성경을 펼쳐서, 경험이 아니라 성경이 어떻게 자신의 권위를 증명하는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 함께 모여 이러한 진리들을 묵상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아버지, 저희가 강건하여서 주님의 진리를 굳게 붙들게 하시고, 그 진리를 전할 때에도 사랑으로 전하게 하옵소서. 자신을 어떤 권위 있는 사람으로 내세우지 않게 하시고, 오직 이 성경만을 유일한 권위로 높이 받들게 하시며, 믿는 공동체를 다시 이 말씀과 그 안에 담긴 놀라운 진리로 돌아오도록 부르게 하옵소서. 저희는 말씀으로 시작했고, 이 위대한 진리를 통해 구원을 받았으면서도, 어쩌다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말씀의 범위를 완전히 벗어나 경험을 기준으로 정의하게 되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저희를 구원하신 것도 말씀이었고, 지금도 저희를 거룩하게 하실 수 있는 것도 오직 말씀뿐입니다. 그러므로 저희를 말씀의 사람들로 만들어 주옵소서. 모든 영광을 이 말씀의 주인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돌립니다. 아멘.
끝
This article is also available and sold as a booklet.
